♣복음말씀의 향기♣ No4164
3월16일[사순 제2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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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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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eRYwxwekpDE
[서울대교구 홍성원 미카엘(청소년국 학교사목부 담당)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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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귀찮더라도 또다시 산 밑으로 내려가야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단 가운데 핵심급이라고 할수 있는 제자 세명,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을 데리고 타볼산으로 올라가십니다. 정상에 도달한 제자들은 잠시후 기상천외한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스승님의 얼굴과 분위기가 평소와는 완전 다른 모습, 거룩하고 태양처럼 빛나는 모습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놀라움의 시작일뿐이었습니다. 잠시 후 전설로만 여겨왔던 신앙의 선조 아브라함 할아버지와 대 예언자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장차 이루어질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영광스러운 부활을 핵심 제자들에게 살짝 미리 보여준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제자에게만 살짝 천국 문을 열어 보여준 사건이라고나 할까요.
그야말로 황홀경에 도취된 베드로 사도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마음과 더불어, 이 좋은 곳에서 저 위대하신 인물들과 함께 영원히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일었습니다. 시끄럽고 복잡하고 아귀다툼의 산밑의 세상으로 내려가고 싶지 않은 마음에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루카 9,33)
베드로의 제안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셨는지에 대해서 복음사가들은 구체적으로 기술하지 않습니다. 존경하는 김승훈 마티아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각은 베드로 사도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무 놀라서 반쯤 얼이 빠진 제자들을 어루만지시며,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어서들 일어나거라. 우리는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황홀한 산 위 풍경을 뒤로한 채, 다시금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질 수난을 향한 여행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어리석은 베드로 사도의 표현을 통해 어찌 그리도 우리들의 생각과 흡사한지 놀랄 지경입니다.
우리 역시 얼마나 부족한 존재입니까? 주님의 뜻을 따르는 데는 너무나 게으르고, 잠시 편안하기만 하면 그냥 그곳에서 주저앉고 맙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아직 멀고도 멉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우리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계속 가야만 합니다. 중간에 힘들다고 주저앉아 버리면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편하고 안락한 길을 찾는다면 우리는 주님 십자가의 신비를 깨닫지 못한 사람이 될 것이고, 주님 십자가와 원수로 살게 될 것 입니다.(김승훈 신부, 당신께서 다 아십니다, 빛두레 참조)
형제들과 공동체 식사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식사가 거의 다 끝나갈 무렵, 원장 신부님께서는 식사 후 기도를 하려고, 계속 분위기를 살피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한 식탁에서는 한 형제의 주도로 나라와 민족, 인류와 지구 온난화 등을 주제로 한 범국가적, 범세계적 대화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원장 신부님은 이런 말로 대화를 종료시켰습니다. “자, 그럼 나라는 나중에 구하고, 우선 마침 기도부터 바칩시다.”
그렇습니다. 이상은 원대하게, 뜻은 크게 품어야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은 늘 우리의 발밑을 향해야겠습니다. 매일의 귀찮고 짜증 나는 일상사 안에 하느님께서 굳게 현존하고 계십니다. 부족하고 죄투성이인 우리 공동체 안에 하느님께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거룩한 산 위에만 계속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귀찮더라도 또다시 산 밑으로 내려가야겠습니다. 형편이 좋든지 나쁘든지, 내려가서 주님의 말씀을 선포해야겠습니다. 조금 전에 맛본 감미로운 천상 체험을 이웃들에게 나눠야겠습니다. 저 아래로 내려가서, 복음 때문에 고생하고 박해받으며, 멸시당하고 배척당하면서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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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피정센터 강론
https://youtu.be/NtXt2zwVdnw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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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LnjESxf8H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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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볼산에 오르는 법>
우리는 모두 하느님 자비의 얼굴을 뵈옵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고민할 필요도 없고 딱 맡기고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먼저 ‘표징’을 바라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먼저 하느님 얼굴을 뵈옵자고 하는 사람들을 악하다고 하십니다.
저도 사제가 되라고 불러주실 때, “그럼 먼저 당신 얼굴을 보여주세요~!”라고 청했습니다. 그게 정말 성모님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분께서 성모상에서 당신을 나타내 보이셔도 저는 “내가 술을 마셔서 헛것을 봤지!”라고 생각해버렸습니다.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마음은 순종하고 싶지 않은데 그 핑계를 하느님께 대는 것입니다. 자기가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도 하지 않고 하느님 탓만 하는 것입니다. 복권은 사지 않고 복권에 당첨되면 믿겠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나를 타볼산 꼭대기까지 데려다줄 이를 만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변모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변모하시며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하늘에서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제자들은 먼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기에 산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김흥순 자매는 불교 신자였습니다. 장이 유착된 상태여서 음식을 넘기지도 못하고 다 게워내며 걷지도 못하는 극단적 상황이었습니다. 유명한 병원엔 다 다녀봤지만 수술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진단도 받았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 병원에서는 수술하면 2~3년, 길면 5년은 더 살 수도 있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자매는 수술이 두려워서인지 이미 자포자기 상태였습니다.
이영숙 베드로 수녀님이 설득하자 자매는 자신들을 위해 고생하는 수녀들 인생이 참 딱하다고 말했습니다. 수녀님은 딱한 수녀 말 한 번만 들어보라고 설득했습니다. 그래서 일단 대세를 받고 수술도 받아보겠다고 했습니다. 데레사라는 세례명으로 대세를 받고는 “나는 무조건 하느님을 믿습니다.”라고 선포하고 다녔습니다.
수술실에 들어설 때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인자한 모습으로 다른 의사들과 간호사들 사이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마치 “걱정하지 마세요. 잘 될 겁니다.”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의사가 자신을 분명히 고쳐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고 그렇게 수술을 잘 받았습니다. 그리고 깨어나서는 수술받을 때 자기 발 쪽에 서 계셨던 흰 가운을 입은 의사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수술실에는 모두 청색 가운을 입게 되어 있어서 흰색 가운 입은 의사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자매는 빠른 속도로 회복하였습니다. 두 달 후 교리를 받고 정식 세례를 받았습니다. 병자성사를 받을 때는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짐을 느꼈고 걷지도 못했던 그 자매는 기쁨에 취해 병실을 두 바퀴나 돌았습니다. 그리고 기도실에 들어선 자매는 감실 쪽을 보더니 “선생님, 여기 계셨군요! 얼마나 찾았는데요. 저를 치료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라고 큰절을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자매는 기적적으로 일어서서 걸을 수 있게 되었고 모든 사람이 기적이라는 소리를 하는 것을 들으며
퇴원하였습니다. 지금까지도 수녀님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잘 사신다고 합니다. [출처: 『내 가슴에 살아있는 선물』, 이영숙 베드로 수녀, 비움]
이영숙 베드로 수녀는 예수님과 같이 말을 듣기만 하면 타볼산에 오를 수 있게 하는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자였습니다. 파견된 자의 특징은 사랑을 위해 고생한다는 것입니다. 파견된 자는 마치 아이에게 엄마와 같습니다. 엄마를 믿지 못하면 아빠는 자동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엄마를 파견한 아빠의 사랑은 더더욱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그의 말을 들었기 때문”에 하느님 신성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랑 때문에 괜한 고생을 하는 분”이십니다. 그런 고생은 스스로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사명과 힘을 받았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고 그런 사람들의 말을 듣는 이들은 반드시 주님의 얼굴을 뵐 수밖에 없습니다. 별을 따라오다 보면 구유의 메시아를 볼 수밖에 없는 것과 같습니다.
저도 ‘하.사.시.’를 읽게 된 것이, 그 책을 쓴 ‘마리아 발토르타’란 분을 보면서였습니다. ‘왜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시는 분이 살아생전에 영광도 보지 못했는데 수만 페이지에 해당하는 광대한 예수님의 생애를 썼을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들었습니다. 이 책을 읽고 사도들의 삶에 저도 순종하였고 그렇게 “다 주시는 분”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의 예수님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사랑으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고생하는 새로운 예수님입니다. 교회의 말을 듣고 순종한다면 우리는 분명 타볼산에 있게 될 것이고 그 가운데서 모세의 말씀도 듣고 엘리야의 은총도 받으며 밝게 빛나는 하느님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별을 존중하고 공경하지 않는다면 구유의 아기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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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미국에는 없는데, 한국에 있는 주거 방식이 있습니다. ‘전세(傳貰)’ 제도입니다. 임대인은 일정 금액을 지급하고 임차인의 주택을 계약기간 동안 사용하는 제도입니다. 계약기간이 끝나면 임대인은 임차인의 결정에 따라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계약기간이 끝났을 때 임차인이 전세 금액을 올리면 임대인은 올린 금액을 더 지급하고 재계약을 하든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제가 어릴 때는 ‘내 집 마련’은 서민들에게는 ‘꿈’과 같았습니다. 제 기억에 어린 날 이사를 자주 가야 했습니다. ‘쌀가게, 미진이네, 담배 가게, 재웅이네, 쌍둥이네, 할머니 집’까지 6번을 이사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6학년이 될 무렵 비로소 더 이상 이사 가지 않아도 되는 집이 생겼습니다. 어머니는 무척 기뻐하였습니다. 알게 모르게 주인집 아이들의 눈치를 보았던 저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어릴 때, 매주 ‘주택복권 추첨’이 있었습니다. 1등에 당첨되면 주택을 살 수 있을 만큼의 당첨금이 지급되었습니다.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은 2년 후면 설립 50주년이 됩니다. 지금 성당이 3번째 성당입니다. 첫 번째 성당은 ‘다운타운’에 있었다고 해서 다운타운 성당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독일인 이민 공동체가 세운 성당인데 독일인 이민이 줄면서 한인 공동체가 다운타운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했다고 합니다. 다운타운 성당이 좁고, 주차장이 협소하여서 교우들은 더 넓고 큰 성당을 원했습니다. 다운타운 성당에서 지내면서 교우들은 지금의 자리에 성전 대지를 마련했습니다. 새로운 성전을 세우기 전에 임시로 옮겨간 성당이 있었습니다. 창고 건물이었기에 교우들은 그 성전을 ‘창고 성전’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새로 마련한 땅에 성전을 세우자는 의견이 있었고, 지금의 성전 위치가 달라스 중심에서 서쪽으로 치우쳐 있기에, 이민 오는 분들이 북쪽에 세워지는 새로운 도시로 오기에, 북쪽에 성전을 세우자는 의견이 있었다고 합니다. 몇 번의 진통 끝에 지금, 우리가 있는 이 자리에 아름다운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교우들의 땀과 눈물로 세워진 성전입니다. 2017년 3월에 새 성전이 완공되었고, 축성식이 있었습니다. 어느덧 8년이 지났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아브람은 하느님께 2가지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는 땅의 축복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식의 축복입니다. 어렵게 자기 집을 마련하는 것도 큰 기쁨이고 축복입니다. 40년 만에 아름다운 성전을 세우고 축성하는 것도 큰 기쁨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 집에서 사는 가족들의 삶입니다. 넓고 큰 집에 살면서도 사랑이 없으면, 믿음이 없으면, 희망이 없으면 그 집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행복한 집이 될 수 없습니다. 6번이나 옮겨 다니면서 이사를 할지라도 그 집에서 사랑이 꽃이 피면, 믿음이 자라나면, 희망이 열매 맺으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행복한 집이 될 수 있습니다. 새로 신축된 아름다운 성당에 있으면서도 공동체에 사랑이 없으면, 믿음이 없으면, 희망이 없으면 그 성당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행복한 성당이 될 수 없습니다. 다운타운에서 힘들게 미사를 봉헌했어도, 창고에서 공동체를 이루었어도 그 성당에서 사랑이 꽃이 피면, 믿음이 자라나면, 희망이 열매 맺으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행복한 성당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셨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대화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천막 3개를 만들어서 함께 지내자고 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해석을 잘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한 것은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된 대로 수난을 통해서만 영광스러운 부활이 있음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를 꾸짖으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종교는 삶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종교는 삶의 길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삶을 해석하고, 삶의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왔으니, 하느님께로 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하느님께 가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오늘 제2독서는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다 함께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다른 이들도 눈여겨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아름다운 성전과 공동체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성전과 공동체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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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바오로수도회 한창현 모세 신부님]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어 기도하시는데,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루카 9,31)을 말합니다. 이 떠나심은 ‘영광’을 위한 ‘넘어가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고난을 겪고, 예루살렘의 최고 법정 산헤드린의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예고하셨습니다.(9,22 참조) 영광 가운데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죽음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잠에서 깨어난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에 싸여 있는 것을 보고는 초막 셋을 지어 드리겠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그들이 영광 가운데에 있는 것을 보았지만,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다만 자신이 본 그 영광이 계속되기만을 바랐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사명의 깊이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함께 있었던 요한과 야고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 제자들을 끝까지 포기하시지 않고, 그들을 위하여 수난하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제자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두고 떠났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포기하시지 않은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 사명의 신비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포기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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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조용히 참회와 보속을 하는 시기에 영광스러운 모습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오늘의 루카 복음은 사순시기의 의미를 더욱 깊이 있게 파악하도록 해주고 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계약이 먼 훗날에 이루어지리라는 그 말씀을 믿었다.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자기 자신을 변모시켰던 믿음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자기의 후손들까지 변모시키는 믿음이었다. 아브라함도 그렇지만 우리도 사순절의 기다림과 앞당겨진 파스카의 빛으로 신비스럽게 변모한다는 것이다. 우리도 매 순간 이 변모의 체험을 하기 때문이다.
복음: 루카 9,28-36: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에 그 모습이 변하였다.
오늘 복음은 사순절의 분위기로 이끄는 두 가지 특성이 있다. 첫째는 산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기도’로써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28-29절) 여기에 예수께서 기도하신다는 것이 반복적으로 강조되고 있고, 그 기도가 그 영광스러운 변모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 같다. 그래서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활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하느님께 맡길 수 있다. 루카 복음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기도의 주제가 바로 이 사순시기에 언급되고 있는 것은 사순절의 의미가 기도의 표지 아래서 더 잘 드러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기에 우리가 참으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열렬히 타오르는 기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둘째는 다른 복음에서는 단순하게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이야기하고 있었다(30절)는 사실만 전해주고 있는데 반해, 루카 복음은 두 인물과 예수님과의 대화 내용에 대해서도 전해주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31절). 여기서 ‘세상을 떠나실 일’이라고 한 말은 원문으로 ‘exodos: 출애굽, 대탈출이다. 즉 결정적인 해방과 약속의 땅을 향한 출애굽의 모든 주제가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예수님의 죽음은 출애굽 사건과 같이 결정적인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사건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약속의 땅으로 가고 있는 고달픈 여정이나,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그 여정을 반복적으로 이해시키고 있는 사순절의 분위기로 우리를 이끌어주고 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세 사도의 졸린 눈에 그리스도의 얼굴에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났다는 내용이다.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과 함께 서 있는 두 사람도 보았다.”(32절). 그리고 구름이 그들을 뒤덮었다(34절)고 한다. 이 구름은 특별한 신적 현존을 나타내는 것으로 예수께서는 사도들에게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하느님의 영광과 권능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게 해 주셨다는 것이다. 이제 예루살렘, 즉 십자가의 길을 향해 가시는 예수님은 수난과 수모를 당하시겠지만, 한결같이 하느님 아버지께서 ‘선택한 아들’(35절)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아무 힘없이 십자가 위에 죽임을 당하시지만, 그분은 산에서 보여주신 영광을 받으실 분이라는 것을 알아 그 고통과 괴로움의 의미를 알아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변모’는 부활의 영광에 대한 ‘예표’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죽음은 부활의 빛을 위한 것으로써, 우리가 지내는 사순절의 의미는 다른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택하신 아들’ 예수의 영광스러운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 길을 가는 것이다. 이러한 삶을 살아갈 때 예수께 일어났던 그 사건이 우리에게도 일어나게 된다. 우리 자신이 신앙을 통해 아브라함이 변화되고 그의 자손들이 은총을 입었듯이 그처럼 변모되어갈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딸로, ‘그분과 같이’(1요한 3,2) 될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35절)는 말씀을 잘 따라야 한다. 우리는 신앙으로 약속된 땅을 향해 걸어가고 있지만, 이미 그 영광을 미리 내다보고 있고 알고 있다. 내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달린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결코 우리를 속이거나 실망하게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의 말을 들으며’(35절) 즉 그분의 말씀을 따르며 살아가려고 노력할 때 그 영광을 체험할 수 있음도 알고 있다. 그러기에 광야와 같은 이 사순절은 어떤 두려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목적지에 미리 도착할 수 있게 해준다고 할 수 있다. 순간순간의 삶을 통하여 우리는 이미 부활의 신비를, 영광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삶이 이렇게 될 때, 진정 파스카 신비의 완성인 하느님 나라는 지금 여기에서의 삶에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다.
필리피서에서 바오로 사도께서도 십자가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는 자신들의 생활에서 고달픈 십자가를 회피함으로써 사순절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는 말씀이다.(필립 3,18-19) 갈바리오를 향한 여정이 없다면 파스카의 기쁨은 없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하늘의 시민으로서(필립 3,20)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 변모의 기다림 속에서 자신의 생활을 매일매일 변화시켜 가는 삶을 통하여 하늘나라의 시민이 될 자격을 갖춤으로써 신앙 안에서 그와 같은 생활을 하는 것이다. 이 사순절이 우리 자신의 변모를 이룰 수 있는, 그래서 합당하게 파스카의 신비에 참여할 수 있는 은총의 시기가 되어야 한다. 우선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그리고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함으로써 그 변모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갈 때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주실 것입니다.”(필립 3,20-21) 나 자신의 참된 변화를 위하여 기도하는 시간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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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십자가의 길을 생략하고 부활로 직행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그리고 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 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과 함께 서 있는 두 사람도 보았다. 그 두 사람이 예수님에게서 떠나려고 할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데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다. 그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제자들은 그만 겁이 났다. 이어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이러한 소리가 울린 뒤에는 예수님만 보였다. 제자들은 침묵을 지켜, 자기들이 본 것을 그때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루카 9,28ㄴ-36)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신성’과 ‘하느님 나라’를 사도들이 직접 목격하고 체험했다는 증언입니다. 그 일에 대해서 베드로 사도는 서간문에서 다시 이렇게 증언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재림을 알려 줄 때, 교묘하게 꾸며 낸 신화를 따라 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위대함을 목격한 자로서 그리한 것입니다.
그분은 정녕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영예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존귀한 영광의 하느님에게서, ‘이는 내 아들,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하는 소리가 그분께 들려왔을 때의 일입니다. 우리도 그 거룩한 산에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하늘에서 들려온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2베드 1,16-18).
베드로 사도는, 사도들이 직접 보았고, 직접 들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교묘하게 꾸며 낸 신화를 따라 한 것이 아닙니다.”라는 말은, “옛날이야기들을 짜깁기 하는 식으로 잘 만들어낸 이론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은 학문을 연구하거나 공부하는 생활이 아닙니다. “살아 계시는 예수님”을 ‘삶 안에서’ 만나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신앙은 이론이 아니라 ‘삶’이라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은 세 가지 중요한 일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 자신이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일이고, 두 번째는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일이고, 세 번째는 하느님께서 직접 사도들에게 말씀하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일은,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신(계시하신) 일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일은, 율법의 대표자와 예언자들의 대표자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긴다는 것과 구약과 신약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구약의 율법과 예언들이 예수님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나눈 대화 내용은 중요하지 않고, 나타났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에는 대화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은, 예수님은 당신이 보내신 메시아라고 선포하시고 보증하신 말씀입니다.
3) 33절의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라는 말은, 예수님의 신성과 하느님 나라를 직접 체험하면서 ‘황홀경’에 사로잡혔다는 뜻입니다. <헛소리도 아니고, 아무 말이나 막 한 것도 아닙니다.>
초막 셋을 지어 드리겠다는 말은, 너무 황홀해서 “그냥 이대로 영원히 이곳에서 살고 싶다.”라고 소망하게 되었음을 나타낸 말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 소망은 옳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말씀에서 ‘그의 말’은 바로 앞의 23절에 있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라는 말씀을 가리킵니다. 십자가의 길을 생략하고 부활로 직행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아무리 좋아도 지상에서의 인생을 중단하고 그곳으로 직행할 수는 없습니다. 자살은 원래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대죄’입니다. 하느님께서 부르실 때까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끝까지 살아야 하는 것은, 사람마다 맡은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침묵을 지키라고 명령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루카복음에는 제자들이 스스로 침묵을 지킨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차이는 중요하지 않고, 어떻든 제자들이 보고 들은 것에 대해서 침묵을 지킨 것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증언하려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부터 믿어야 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4) 예수님께서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신 것은, 또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게 해 주신 것은, “수난 예고 말씀을 듣고 기가 꺾여 있는 제자들에게 믿음과 용기와 힘을 주기 위해서”라고 해석됩니다.
이 해석에 대해서, “그렇다면, 제자들은 왜, 예수님 수난 때에 모두 달아나 버렸는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 일에 대해서는, 예수님의 수난 전에는 사도들이 ‘머리로만’ 믿는 단계에 머물러 있었고, 부활 후에야 비로소 ‘온 마음과 온 삶으로’ 믿는 단계에 도달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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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과 함께>
루카 9,28ㄴ-36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고 이르셨다.(루카 9,22) 이 말씀을 하시고 여드레쯤 되었을 때(루카 9,28ㄱ)]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그리고 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 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과 함께 서 있는 두 사람도 보았다.
그 두 사람이 예수님에게서 떠나려고 할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데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다. 그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제자들은 그만 겁이 났다. 이어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이러한 소리가 울린 뒤에는 예수님만 보였다. 제자들은 침묵을 지켜, 자기들이 본 것을 그때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당신과 함께>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살리시는 당신을 따라
살고파 나선 길 위에서
살리시기 위해서
반드시 죽으셔야 한다는
받아들일 수 없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당신의 말씀에
코앞에 닥친
당신의 죽음보다
당신과 함께 한다면
반드시 맞닥뜨려야하는
아직은 뿌연 나의 죽음이
오히려 더욱 쓰라리게
가슴을 파고들어
살려면 떠나야 하고
따르면 죽어야 하는
참담한 갈림길에서
느닷없이 곁에 계신
빛나는 당신을
살아있는 당신을
영광스러운 당신을
어느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고
악착같이 움켜쥐어
당신과 더불어
빛나는 나를
살아있는 나를
영광스러운 나를
그려보는 꿈은 이내
온데간데없이 부서지고
끝내 길을 가시려는 당신과
갈지 말지 두려움에 머뭇거리는 내가
날것 그대로 마주한 순간에
생생하게 듣습니다
무른 믿음을 다지는 하느님의 소리를
바랜 희망을 돋우는 하느님의 소리를
식은 사랑을 지피는 하느님의 소리를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당신의 말씀을 듣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듣고 싶지 않아도
당신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따를 수 없어도
따르고 싶지 않아도
당신을 오롯이 따르겠습니다
“당신과 함께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당신을 배척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처럼 배척을 받아 죽음을 당하였다가
당신과 함께 사흘 만에 되살아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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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제가 처음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동료 중의 한 분이 저를 데리고 신학교 뒷산인 낙산을 돌며 이 나무가 느티나무고 저 나무가 무슨 나무고…… 나무 이름에서부터 자연의 섭리까지 도시에서 자라난 저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비단 저에게만 친절하게 해준 것이 아니라, 그 신부님은 청소에서부터 모든 동기 신학생의 각종 행사와 일의 뒤처리를 도맡아 해주었습니다. 똑같이 주어진 빠듯한 신학원 생활 속에서도 그 신부님은 남몰래 그리고 남들이 시간이 다 되어서야 나타나는 데 반해, 그분은 미리 나가서 다른 형제들을 위해 준비해 주었고, 맨 마지막까지 남아 정리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동기들끼리 무슨 회합을 해도 그 신부님이 한 마디를 하면 그것이 그 모임과 그 주제의 결론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신부님이 책임지고 마무리 하기 때문입니다.
그 신부님은 남보다 잘난 것도 아니었고, 공부를 더 잘하는 것도 아니었고, 물론 훤칠한 키에 잘 생기고 노래도 잘하지만, 그보다는 변하지 않고 확실하게 끝마무리를 해주는 것이 동료들의 신임을 얻은 탓이었습니다.
가끔 살펴보면, 너도나도 좋은 안을 내세울 수는 있지만, 꼭 그 안대로 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요, 그 안들이 모두 다 실현 가능한 것도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는 그 안을 제시한 사람조차 여러 가지 변수가 생기면 자기가 제안한 안 대로 실현하지 않는 경우조차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신부님은 말없이 꾸준히 끝까지 마무리 지어주었기에, 동료 중에 그 누구도 더 이상의 말을 할 필요도 없었고, 딴소리를 할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하시는 분을 먼저 데려가신다고, 그분은 참으로 아쉽게도 일찍이 주님께 돌아가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늘에서 제자들에게 이런 말이 들려옵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왜 그의 말을 들어야 합니까? 그는 하늘에서 선택한 아들임과 동시에 다른 이들을 구하기 위해 다른 이들을 대신해서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31절)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일을 하실 것이고, 또 스스로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여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치기로 결심하셨기 때문에, 더욱 환하게 빛나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28-29절)
사람은 누구나 세상에 나서 한 생을 살고 돌아갑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여러 사람에게 존경을 받고 가고, 어떤 이는 여러 사람의 미움을 받고 돌아갑니다. 여러 사람에게 존경을 받고 가려면 여러 사람을 살려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자기 일처럼 도와주고 함께 해줄 때 사람들의 존경을 받습니다. 우리 부모님이 우리에게 커다란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우리 부모님이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신들의 생애를 바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변한 모습을 본 제자 베드로는 엉겹결에 말합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33절)
이렇게 자신의 이득과 편함을 위해 자기 일생과 일생에서 자기에게 닥쳐온 기회를 사용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런 존경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시샘과 원망마저 받게 됩니다. 사람들을 눌러 이기려고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하고, 잘 살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을 쥐어짜며 자기 것을 늘리는 사람은 도망자가 되고, 스스로도 추하게 인생을 마감합니다. 채워지지 않은 욕망 때문에 스스로를 한탄하면서, 심지어는 남들을 원망하면서까지 불만족스럽게 떠나게 됩니다.
보다 낫고 좋은 미래를 위해 너도나도 노력합니다. 그런데 서로가 그 좋은 미래에 자신이 얻을 혜택만 생각하고, 그 좋은 미래를 이루기 위해 오늘 함께 참여하여 양보하고 희생하지 않는 한, 좋은 미래는 다가오기 힘들어 보입니다. 혹자는 모두 다 귀한 인생인데, 어느 누구 하나의 희생을 요구하지 말고, 다 같이 상생의 길을 걷자고도 합니다. 좋은 말입니다. 더 이상 예수님같이 어느 한 사람의 희생이 요구되는 시대와 처지가 다시 오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어느 한 부류나 어느 한 세대에게만 좋은 열매가 아니라 모두에게 좋은 열매, 곧 공동선을 얻을 수 있는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관련자들의 이해관계 속의 야합이 아니라, 동시대 사람들의 공감대를 가져올 수 있는 좋은 안과 기획이 마련되고, 다 함께 자신들이 추구하는 미래를 건설하기 위한 실현 의지와 헌신이 동시에 이루어질 때, 좋은 미래가 열린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힘을 가지고 있고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해서, 자기를 따르라고 하거나 자신의 생각만이 좋은 결정이라고 여기지 말고, 동시대 이해관계 당사자들의 공감대와 동의를 통해 서로가 서로를 위한 미래를 함께 건설해 나갈 수 있도록 참여케 하며, 우리 스스로 그 일을 위하여 개인적인 친분이나 이해관계를 떠나, 인류 사회의 공동선인 하느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도록 합시다. 그리하여 우리도 주님의 모습을 닮아 변화되도록 합시다.
하느님께서는 오늘 세상 사람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려는 예수님의 주윗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35절)
사도 성 바오로는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킬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필립 3,21)라고 말합니다.
우리도 우리 인생길을 밝혀주고 인도해 주시는 주님을 따라, 우리의 생을 거룩하게 변화시키기로 합시다. 그래서 마지막 날 웃으면서 주님께 돌아가기로 합시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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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윤대건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회개">
오늘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변모를 통해 그분의 영광을 목격합니다. 또한, 영광에 싸여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를 함께 목격하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이룩하실 일을 듣습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 이룩하실 일은 '구원을 위해 세상을 떠나심'이었습니다.
영광에 싸여 모 습을 드러내신 그리스도께서는 고통과 수난을 동반한 새 파스카를 언급하십니다. '세상을 떠나실'에서 '떠나다'는 탈출을 의미하는 희랍어 '엑소도스'이 사용되었습니다.
고통 중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로부터 탈출 시키시어 자유를 선사하신 하느님은 그들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고통과 고난에 참여하시어 새 파스카를 세우셨고 인류와 새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억하는 사순 시기에 그리스도의 변모 사건을 듣습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목격했고 새롭게 맺어질 새 계약과 새 파스카를 듣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고통을 당하심으로써 인간과 유대하시고, 그로인해 인간의 고통을 덜어주심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겪으실 고통 뒤에 찾아올 영광을 미리 목격하였고 그리하여 그들은 훗날 그 영광에 참여할 것입니다. 구약에서 영광은 목격에 그쳤지만 신약에서는 참여로 확장됩니다. 이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로마 8,17)
하지만 누가 선뜻 고통이 있는 길을 선택하고 그 고통을 받아들이겠다고 다짐할 수 있을까요? "성장통이다."라는 생각으로 고통을 참기만 하고 무조건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요?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이 그저 미련하게 고통을 참고 견디어내는 것을 바라실까요?
예수님께서는 '고통을 참고 견디어내라, 고통을 받으라', 라고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심지어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고통을 받고 견뎌라.'라고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사랑하라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죄와 고통이 시작된 이유는 첫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저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이 그 죄를 씻어내고자 고통을 짊어지고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으시고 부활하시어 다시 나타나셨고 영광을 모든 이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옷은 "하얗게 번쩍였다."고 합니다. 흰옷은 더러워지기 쉬워 자주 입기 꺼려집니다. 혹시라도 때가 타지 않을까 조마조마합니다. 하지만 더러워진 옷은 다시 세탁해서 입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자비에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란 없습니다. 고통을 마주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비와 사랑의 주님을 찾을 수 있는 회개의 용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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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서원하 베드로 신부님]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봄이 다가오면 성당 근처에는 아침마다 울며 떼를 쓰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성당 바로 옆에 있는 성모 유치원에 이제 막 들어온 유치원생들이 부모님과 떨어지고 싶지 않아 큰 소리로 우는 소리입니다.
익숙한 집을 떠나 생소한 곳에 떠밀려가야만하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조금은 안타까운 마음도 들지만, 동시에 언젠가 우리들도 이런 모습을 보이는 날이 오지 않을까 묵상해 봅니다.
유치원 친구들에게 하느님, 예수님, 성모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가끔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예수님, 성모님은 지금 어디 있어요?" 이야기를 듣는 아이들 중에는 가족이나 반려동물과의 이별을 경험한 아이들도 있지만, 대다수는 아직 너무 어리기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조금 난감했습니다. 고민하던 가운데 문득 장례미사의 복음환호송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질문을 했던 아이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엄마 배 속에서 태어났지만, 그전에는 어디에 있었을까? 우리는 하늘나라에 살고 있 었어. 지금은 잠시 이곳 지구에 내려왔지만, 언젠가 다시 하늘나라로 돌아가야 해. 익숙한 집에 있다가 유치원에 잠시 왔지만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우리는 언젠가 다시 예수님, 성모님이 있는 하늘나라로 돌아갈 거야."
오늘 복음은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신 예수님과 3명의 제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산에 오르시기 전,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가르침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를 목격한 제자들은 예고하신 수난과 십자가보다 영광으로 가득 찬 지금 눈앞의 영광스러운 순간에 그저 머무르고 싶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로 다시 돌아가시기 전에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죄의 용서와 참사랑을 우리에게 전해주시고자 합니다. 이는 익숙한 나의 환경, 내가 바라는 곳, 그저 머무는 자리를 떠나 십자가를 향한 여정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하느님께 생명을 받아 지금은 잠시 이 세상에서 때론 바쁘게, 때론 아늑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우리는 모두 다시 하늘 나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순간이 언제일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부디 그날에 울며 떼를 쓰는 모습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한 걸음씩 십자가를 향해 떠나는 여정을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쩌면 베드로처럼 막연하고 생소한 떠남보다 지금 이 순간의 영광에 더 머무르고 싶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먼저 이 길을 앞장서 가셨고, 몸소 이 십자가의 여정 끝에 부활이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희망을 품고 하늘나라를 향한 여정을 출발합시다. 하늘나라에서 별처럼 많은 분이 우리의 순례를 응원하고계심을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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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신부님! 이런 책도 읽으세요?”
가톨릭 신부이니 종교 서적만 읽는 줄 아셨나 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다양한 책을 읽습니다. 시, 소설, 에세이, 철학, 정치사회, 종교, 예술, 과학, 역사 등 조금이라도 관심이 가면 책을 사서 읽습니다. 요즘에는 아이들을 더 많이 알고 싶어서 어린이, 청소년 책도 읽고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장르의 책을 읽는 이유는 그만큼 저의 시야를 넓혀준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책을 읽으면서 이 세상이 너무나 궁금해집니다.
전에는 저와 맞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면, 읽으면서 불편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또 화가 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양한 장르의 책을 읽으면서 세상의 변화를 볼 수 있었고,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아는 지인이 중병에 걸려 오랜 시간 병상에 있었습니다. 사실 이분은 열려 있는 분이었습니다. 비난보다는 새로운 생각으로 받아들이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병에 걸려 병상에 누워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점점 변하셨습니다. 뉴스를 보면서 계속해서 부정적인 말을 쏟아내셨고, 사람들에게 화를 낼 때가 많아졌습니다. 세상을 보는 시야가 좁아지면서 마음이 닫힌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에 대해 궁금함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열린 마음속에서 하느님의 다양한 활동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활동에 감사와 찬미의 기도를 바치게 될 것입니다. 그 안에서 넘쳐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장면입니다. 여기에서 닫힌 마음을 가진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베드로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입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하는 예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모든 모습이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초막 셋을 지을 테니 여기에서 지내자고 말합니다. 워낙 힘든 전교 여행 중이었으니 이런 제안을 할 만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닫힌 마음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구름 속에서 이런 소리가 났습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하느님의 일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역사하시는 이 세상에 대한 궁금함을 가질 수 있는 열린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세상 안에 갇혀 사는 닫힌 마음으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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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우리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데 가장 큰 힘이 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어서 우리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열심히 일하면, 내 가족이 행복하겠지? 내가 열심히 기도하면 하느님께서 나와 우리 가족을 돌보아 주시겠지? 내 가족이 나를 사랑하니까! 나는 그것을 믿으니까, 나도 최선을 다해 살아갑니다.
저는 이곳 갑곶 성지에서 살아갑니다. 저는 제가 이 성당에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가 믿지 못한다면 누가 그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살겠습니까? 남편이, 아내가, 자식이 서로 믿지 못한다면 한집에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것이 가족이겠습니까?
‘믿음’은 단순한 마음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허황된 단어도 아닙니다. ‘믿음’ 그것은 힘입니다. 나를 살게 하는 힘입니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게 하는 힘입니다. 다시 일어나게 하는 힘이고, 다시 웃게 하는 힘입니다.
왜 복음에서 하느님께서는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고 하셨을까요? 이 말이 우리에게 그리고 주님께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주님은 힘들 때마다 무엇으로 일어서셨을까요? 십자가의 길을 가시며 3번 넘어지셨다고 하는데 그때마다 무슨 힘으로 다시 걸으셨겠습니까? 믿음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믿음, 그분이 나를 믿고 있다는 믿음.’ 그 믿음이 주님을 십자가에 오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주님께서 평생을 사시며 말씀하신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우리가 다 아는 단순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믿고, 그렇게 살아라.’ 하는 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내가 하늘나라에서 환영받으리라는 것을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십시오. 하루에 열 번, 아니 단 한 번이라도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십시오. 그러면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얼마나 행복한 마음인 것인지,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보다 더 행복하고, 나도 모르게 내 얼굴에 미소가 생긴다는 것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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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루카 9.28-29)
해와 같이 빛나는 주님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 창조주의 모습입니다. 기도로 아버지와 일치된 주님의 얼굴은 사람과 세상을 향한 아버지의 열망입니다. 그 사랑의 열망이 해처럼 빛이 납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불태우려는 아들의 열망이 세상을 향한 빛이 되었습니다.
아버지와 일치하고 싶지만 우리는 기도하기가 어렵습니다. 때로는 갈망하지만 우리는 아버지의 산에 오르지 못합니다. 그 산에 오르려고 때로 노력은 하지만 인내가 부족하여 금방 단념합니다. 아버지와 일치되지 못한 우리의 얼굴은 자주 어둡습니다.
열렬히 사랑하고 싶지만 우리는 끈기도 부족합니다. 사랑의 열정은 금방 식어버립니다. 가끔 온 마음을 다하여 당신만을 생각하며 사람과 세상을 향한 사랑의 열정도 있었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습니다. 당신만을 사랑하기보다 이 세상의 현실에 우리 마음을 쉽게 빼앗겼습니다.
하얗게 빛나는 옷은 주님의 거룩한 마음입니다.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감추지 못하시어 거룩함이 드러난 당신의 옷입니다. 거룩함을 입은 당신이시기에 그 옷에 손만 대어도 우리는 온전하게 됩니다. 당신의 성의(聖衣)는 우리를 온전하게 보호하고 치유해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감추기 위해 옷을 두릅니다. 창조된 남자와 여자가 알몸으로 창조주의 거룩함 앞에 서서 부끄러워 하얀 거짓말이라도 하고 싶기에 두른 옷입니다. 부끄러워 감추는 우리지만, 거룩한 사순시기에 당신을 입고 온전함으로 거룩함을 드러내기를 갈망합니다.
사순절은 잃어버린 우리의 온전함을 회복하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열정을 되찾는 시간입니다. 새로운 사랑의 열정을 품는 시간입니다. 사순절은 또한 거룩함을 입는 시간입니다. 천지창조 때 부끄러워 가렸던 나뭇잎을 벗고, 거룩함을 입어 최초의 온전함으로 치유되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필립비서. 3.21)
기도할 때 그리스도인의 얼굴은 가장 빛나고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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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수님과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9,29)
신학생 시절 감명 깊게 읽은 어른 동화책이 있습니다. ‘트리나 포올러스’가 쓴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동화입니다. 그 내용은 애벌레가 나비로 변모하는 과정을 아름답게 표현한 작품입니다. 책의 제목에서 느끼는 것처럼 한 애벌레의 변모로 이 세상의 많은 꽃들에게 희망을 주기 때문입니다. 한 존재의 변모가 다른 모든 존재에게 희망이 된다는 게 놀랍기만 합니다. 그런데 애벌레가 나비로 변모하기 위해서는 애벌레의 상태를 기꺼이 포기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는 게 더 놀랍습니다. 자기의 겉모습이 죽어 없어질 때만이 자기의 참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예전 베트남에 살 때 시청한 드라마 「내 딸 서영이」란 드라마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그때부터 ‘이보영’이란 배우를 좋아했습니다. 서영이는 물론 서영이 아버지 그리고 서영이 남편 ‘우재’, 시아버지인 ‘강기범’ 등 여러 사람의 변화에 초점이 있습니다. 변하고 싶어도 변할 수 없는 자기 자신 하지만 변화를 사랑으로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결국 자신의 상처를 치유할 때 변화는 일어난다는 메시지를 표현한 드라마였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아브라함도 하느님과 계약을 맺음으로써 모든 신앙인의 선조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후손과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너의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창15,5), “나는 이집트 강에서 큰 강 곧 유프라테스 강까지 이르는 이 땅을 너의 후손들에게 준다.”(15,18) 그런데 많은 후손을 얻기 위해선 자기의 외아들을 하느님께 바쳐야 했고, 약속한 땅을 얻기 위해서는 고향 칼데아의 우르를 떠나 나그네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더 나아가 아브라함의 생전에는 많은 후손도 없었고, 많은 땅도 없었다는 게 더 놀랍습니다. 눈에 보이는 축복이 없어도 끝까지 믿은 신앙이 모두에게 희망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산에 오르시어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습니다. 거룩한 변모를 하신 것입니다. 아울러 그분은 영광에 싸여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고,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9,35) 하지만 하느님께서 선택한 아들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자기 목숨마저 바쳤다는 게 놀랍기만 합니다. 더 나아가 제자들이 본 영광된 모습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한 게 더 놀랍습니다. 수난과 죽음을 거쳐야 부활의 희망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변화하려고 할 때는 아픔이 따릅니다. 애벌레의 상태를 기꺼이 포기해야 하는 아픔, 자기의 가장 소중한 아들을 바치고 고향 땅을 떠나야 하는 아픔, 자기의 가장 소중한 목숨마저 바쳐야 하는 아픔이 따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아픔을 싫어하고 베드로처럼 주어진 현실에 안주해 버리고자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9,33) 이 말은 이곳에 초막 셋을 짓고 그냥 머물러 살자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축복에 머물면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영광에 싸여 살자는 겁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는 게 놀랍기만 합니다. 더 나아가 제자들은 “모세와 엘리야가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그만 겁이 났다는 게” 더 놀랍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의 진정한 의미는 수난을 겪은 뒤에야 비로소 그 뜻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하게 변화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자기를 포기하는 아픔을 받아들이십시오. 자신의 상처를 놓아버리십시오. 우리도 사도 바오로처럼 십자가의 원수가 아니라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선택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살면 그 끝이 멸망이지만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선택하면 그 끝이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사랑하는 필리피 교우들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 여러분,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3,20.21)
불가능함이 없으면서도 늘 자기의 능력과 힘을 발휘하지 않으셨던 주님께서 왜 이렇게 느닷없이 영광스러운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셨을까요?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을 내다보셨습니다. 제자들의 절망과 방황도 내다보셨습니다. 그때를 대비해서 당신의 천상 모습을 미리 제자들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후에 당신이 수난당하고 십자가에서 죽더라도 좌절하지 말고 일어서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체험을 떠올리며 의심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당신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모세와 엘리야처럼 생명의 나라에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변모 사건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 주시고자 했던 위안과 격려의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변모의 순간은 한순간이었지만, 제자들은 영원을 목격하고 체험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그들은 스승에 대한 믿음이 더 굳건해졌고, 예수님에 대한 신뢰가 더 깊어졌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체험이 없었을까요. 우리에게는 그분의 변모 사건이 없었을까요. 신앙 안에서 낙심하지 말라고 그분께서 개입해 오신 사건은 없었을까요. 이것을 찾아내어 묵상하라는 것이 오늘 복음의 교훈입니다. 사람들은 쉽게 잊어버립니다. 고통과 역경 속에 놓이게 되면 좋았던 순간, 행복했던 것을 쉽게 잊어버립니다.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 기적을 체험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수난의 순간이 오자 스승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절망에 빠져버렸습니다. 변모 사건의 기억도 소용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시 찾지 않았다면 그들은 어떻게 되었겠는가. 주님께서 다시 찾아가셨기에 제자들은 사도로 바뀔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영세 후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신자가 되기 전에도 그분의 도우심을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진정한 신자는 이러한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잊어버리면 감사할 수 없습니다. 잊지 않기에 감사할 수 있고 그래야 신앙은 힘이 됩니다. 누구에게나 주님께서 개입하신 사건은 있기 마련입니다.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십시오. 얼마나 위험하고 힘들었던 순간들이 많았던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사건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마무리되었습니까. 우연인 듯 느껴져도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역경을 만나 기도했는데 역경이 끝난 뒤에는 우연으로 여긴다면 얼마나 어이없는 생각입니까. 너무 쉽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게 바로 현실적인 유혹입니다. 신앙인에게는 반드시 은혜로운 기억이 있습니다. 고통으로 힘들었지만, 지난 다음 은혜와 감사로 충만하고 마감된 사건들 말입니다. 주님의 개입 없이 가능했었을까요. 신앙 안에서 힘을 내라고, 희망으로 견디어 내라고 주님은 변모하셨고, 이 놀라운 체험으로 그분께서 가신 십자가를 통해서 부활의 영광으로 나아오도록 베푸신 은총이 예수님의 변모 사건입니다. 은총은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옵니다. 평소의 작은 기도가, 작은 선행이 결정적 순간에 은총이 다가오게 하는 겁니다. 그분께서 눈길 한 번만 주셔도 우리의 삶은 놀랍게도 은총으로 넘쳐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변모 사건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미리 앞당겨 보여 준 사랑의 계시이며 은총의 사건이었습니다. 사순절을 지내면서 가끔씩 부활을 생각해야 합니다. 무작정 참고 인내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을 위해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어떤 부분이 부활해야 할지 생각하며 사순절을 보내도록 합시다. “주님, 우리의 마음을 바꿔주시어 현재에 만족하여 안주하지 않,고 당신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를 수 있도록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과정처럼 저희 또한 기꺼이 변화의 고통을 받아들여 당신 모습 닮게 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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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은 사순 제2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믿음’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1독서>는 하느님께서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시는 장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많은 후손을 약속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창세 15,6)
이처럼, 아브람의 믿음 위에 계약을 맺으시고 그의 후손에게 줄 땅을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화답송>에서는 주님을 믿음으로 영접하는 시편을 노래합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주님의 어지심을 보리라 믿나이다.”(시 27,7-8.13.)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멸망이 오고, 믿는 이들에게는 “당신의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시켜주실 것”(필리 3,21)이라고 하면서,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필리 4,1)라고 말합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수난을 앞두고, ‘예수님의 영광스런 모습’을 미리 보여주면서 제자들의 ‘믿음’을 굳세게 합니다.
복음사가는 먼저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루카 9,28)고 전합니다. 이는 마치 예수님께서 겟세마니 산에서 십자가를 받아들이셨듯이, 중대한 순간이 임박했음을 알려줍니다. 곧 죽임을 당하시기로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시간이 임박한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하시던 중에 변모를 이루시는데, “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루카 9,30). 이 표현은 ‘이 두 사람’에 대한 표현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곧 <루카> 24장 4절의 “눈부시게 차려입은 남자 둘이 그들에게 나타났다.”에 나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모세와 엘리야는 율법과 예언자들을 대표하며,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출애굽을 통해 약속된 땅으로 인도했듯이, 엘리야가 불붙는 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듯이, 그들이 예표한 바가 그리스도에게서 실현될 것을 미리 알려줍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예언자 중의 한 사람이 아니며 예언을 이루시는 분이요, 예언된 분이심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엘리야가 아니라 엘리야 다음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임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그들은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습니다.”(루카 9,31). 이는 예수님께서 이루실 구원과 그를 위한 수난과 죽음을 알려주심과 동시에, 제자들의 믿음을 굳게 하시기 위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나중에 빈 무덤 안에 나타난 “두 남자”의 말에서도 드러납니다. 그들은 당황하는 여자들에게 말합니다.
“그분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기억해 보아라.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박히셨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루카 24,6-7)
결국, 이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1코린 15,3.4) 이루어지게 될 것이며,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다.”(루카 9,34). 그리고 그 속에서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우리는 이와 유사한 말씀을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시는 장면에서도 들었습니다. 곧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2;마르 1,12; 마태 3,17)라는 말씀입니다. 이 둘은 예수님의 신원을 아버지께서 직접 밝혀주시는 장면입니다.
전자는 그 신원을 제자들에게 밝혀주시는 장면이고, 후자는 예수님께 밝혀주시는 장면입니다. 후자는 <2사무엘>(7,14)에 나오는 나탄의 예언을 이어받은 <시편>에 나오는 “너는 내 아들”(2,4)이라는 표현과 <이사야>에 나오는 “내 마음에 드는 이”(42,1)라는 표현이 합쳐진 것입니다. 이는 메시아 “왕”과 “주님의 종”이라는 두 예언적 인물을 합쳐줍니다.
그리고 전자는 <이사야서>의 “내가 선택한 아들”(42,1)이라는 표현은 “고통 받는 주님의 종”(53장)과 연결됩니다. 그리고 이 표현은 뒤에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께 대한 유혹의 말, 곧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루카 23,35)라는 말로 다시 반복됩니다. 따라서 이는 예수님을 인류구속을 위해 죽게 될 “종”임을 알려줍니다.
이처럼,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신원을 밝혀주시며, 동시에 우리가 해야 할 바를 가르쳐주십니다. 곧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하시며, 그들이 아드님처럼 영광된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우리는 지금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 시기를 흔히 말하기를 ‘은혜로운 회개의 때’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지금 나에게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하는 걸까? 지금, 나에게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가? 아니라면, 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가? 혹 예수님의 영광스런 모습을 보지 못해서 일까? 아니면, 그분의 가르침과 말씀을 듣지 못해서 일까?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 모든 선물을 받고 또 받았습니다. 우리는 진정 그분의 아름다움을 보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들은 말씀에 ‘응답’하지 않는 까닭에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을 뿐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말씀 아래에 머무는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들려오는 말씀이 내 안에서 성취도록 말씀께 ‘승복’하는 일입니다. 말씀께서 나를 맘껏 쪼물딱거릴 수 있도록 말씀께 자신을 ‘허용’하는 일입니다. 말씀의 힘을 ‘수락’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변화의 힘이신 말씀께 자신을 건네 드리는 일입니다. 내 자신이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초막이 되어 드리는 일입니다. 내 자신을 그야말로 말씀이 이루어져야 할 공간이요 장소로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그것은 내 자신이 아니라, 말씀을 주인 되시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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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35)
주님!
말씀 아래 있게 하소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말씀이 제게서 실현되게 하소서!
말씀에 응답하는 일, 바로 그 일을 제가 하게 하소서!
말씀의 권능으로 저를 덮으소서. 변모되게 하소서.
제 자신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요 장소가 되게 하소서.
오늘 말씀의 그늘 아래에서 비천한 제 몸이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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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변모의 여정>
-파스카의 주님과 늘 함께 하는 삶-
"주님, 제가 당신 얼굴을 찾고 있나이다. 당신 얼굴 제게서 감추지 마소서."(시편27,9ㄱㄴ)
사순시기 제1주일은 언제나 주님께서 광야에서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신 일화가 나오고, 제2주일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신비 사건이 소개됩니다. 수평의 광야에서 악마의 유혹에 이어 수직의 산상에서 주님의 거룩한 변모 신비 체험입니다. 산은 언제나 주님을 만나는 거룩한 곳이었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변모 사건에 앞서 바로 당신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고와 더불어 당신을 어떻게 따를 것인가에 대한 답을 주시고, 주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최측근 제자들에게 당신의 거룩한 변모를 체험토록 하시니 참 놀랍고 고마운 선물입니다.
주님의 첫 번째 수난과 부활 예고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 나야 한다.”
이어 당신을 어떻게 따를 것인지 확실한 지침을 주십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주님을 따르는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타당한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나를 따라야 한다.”
바로 이런 어둡고 무거운 경직된 상황에 이어 주님은 다소 긴장되었을 제자들에게 당신의 거룩한 변모 사건을 체험토록 하십니다. 이 말씀이 있은 후 여드레쯤 되어 주님의 거룩한 변모 신비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사순시기는 물론 삶의 여정에 참 좋은 세가지 가르침을 배웁니다.
첫째, “기도하라!”
기도가 답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입니다. 오늘 주님의 변모사건을 가능하게 한 것도 기도였습니다. 사순시기 어느때 보다도 기도와 회개의 시기입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바오로가 개탄하는 세인들의 타락한 삶이 더욱 우리의 기도를 부추깁니다.
“내가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
기도하지 않을 때 이런 세속적 육적 삶이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함께 가는 끊임없는 회개의 삶입니다. 복음 첫 대목부터 ‘기도’란 말마디가 나오고 기도의 결과 주님의 변모 신비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바로 기도와 더불어 발생한 주님의 변모 사건이요 여기서 등장한 구약을 대표하는 모세와 엘리야의 등장입니다. 영광에 싸여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해줍니다. 깊은 기도중에 시공을 초월하여 두분의 자문을 받으며 친교를 나누니 예수님의 기도가 얼마나 깊은 지 깨닫습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오늘 제1독서 창세기의 아브람 역시 주님을 만나 축복말씀을 들었으니 이 또한 깊은 기도중에 일어난 신비한 사건입니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너의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기도중 이런 신비축복체험은 아브람의 ‘믿음의 여정’에 샘솟는 활력의 원천이 되었을 것입니다.
둘째, “초연하라!”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중 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과 함께 서 있는 모세와 엘리야를 보는 순간 베드로는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베드로의 호의였을 수도 있지만 이는 분명 성급한 이기적 집착이었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릅니다. 은연중 본색이 드러난 것입니다. 이런 신비체험은 독점하여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잠정적 삶의 여정에 도움이 될 뿐입니다. 또 여기는 궁극의 머물 안식처나 정주처도 아니고 삶의 제자리도 아닙니다. 베드로가 정말 제정신이 아닐 정도로 흥분했음이 분명합니다. 십자가의 도상중에 있는 순례자의 삶임을 잊은 것입니다.
셋째, “순종하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때 베드로의 집착을 교정하는 하느님의 기민한 개입이 뒤따릅니다. 집착하지 말고 떠나 주님을 따르는 '따름의 여정'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중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을 때,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이 또한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이제 그만 제자리로 내려 가 다시 십자가의 길을, 파스카의 삶을 시작하라는 말씀입니다.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요 나를 비추는 빛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주님의 현존이요 빛이자 생명이요 영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의 인도따라 살라는 것입니다. 사순시기 광야여정 우리가 믿고 순종하며 따를 것은 주님의 말씀뿐입니다.
주님의 세 제자들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체험은 물론 주님의 이 말씀을 평생 잊지 못했을 것이며 파스카의 여정중에 지칠줄 모르는 삶의 원동력이 됐을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의 영광을 앞당겨 체험한 복된 제자들이요 이제 예전의 세 제자들이 아닙니다. 다음 시편 화답송은 그대로 세 제자는 물론 우리의 고백처럼 생각됩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주님의 거룩한 신비스러운 변모를 체험한 이 세 제자들은 바오로의 다음 고백에 이심전심 공감했을 것입니다. 바오로의 고백이 신선한 감동과 더불어 주님께 궁극의 희망을 두고 용기백배하여, 우리 모두 주님과 함께 하늘의 시민으로 ‘늘 새로운 시작’의 파스카의 삶을 살게 합니다.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흡사 오늘 주일이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처럼 생각됩니다. 매일이 주님의 변모축일입니다. 주님의 변모는 우리의 변모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를 통해 끊임없이 주님의 변모를 체험하면서, 주님의 성체를 모시면서, 주님의 몸으로 변모되어가는 ‘변모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바오로의 말씀을 제 말씀으로 삼아 여러분 모두를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제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 여러분, 나의 기쁨이며 화관인 여러분, 이렇게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필리4,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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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루카9,29)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사랑을 실천하자!'
오늘 복음(루카9,28-36)은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타볼산)에 오르십니다. 기도하실 때 예수님 얼굴 모습이 빛나고 옷은 하얗게 번쩍였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다음에 이어지는 '영광의 부활 사건'을 미리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이는 곧 수난을 통해서만 영광스럽게 부활한다는 것을 밝혀주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사건'은 '예수님의 신성, 곧 예수님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주는 사건입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9,35)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우리에게 '희망'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이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때 겪게 되는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주게 하는 희망'입니다.
사순시기에 우리는 육신의 재계와 극기와 절제의 삶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은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때문에 사순시기는 하느님의 큰 사랑을 더 깊게 묵상하는 시기입니다. 이 큰 사랑을 묵상하고, 나도 너에게 큰 사랑을 드러내는 시기입니다.
2025년 사순시기 운동의 주제는 '사랑으로 가진 바를 나누자'입니다.
영혼에 해가 되는 것들을 하지 않는 것도 중요한 실천이지만,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적극적으로 나누는 것은 더 큰 사랑의 실천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늘 기억합시다! 이 기억의 힘으로 크고 작은 시련과 고통들을 이겨내고, 보다 더 적극적으로 그리고 기쁘게 사랑을 나눕시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예수님이 모습이 거룩하게 변모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기도합시다! 나의 기도로 나를 거룩하게 변모시킵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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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 9, 35)
잃어버린
하느님의
얼굴을 다시
만나는 은총의
주일입니다.
짐승의 얼굴이
아니라
사람의 얼굴로
살아야 하는
우리들
시간입니다.
하느님께서
빚으신
얼굴을
우리의
교만과 욕심으로
우리는
못 지키며
살고 있습니다.
삶이 빛나야
우리의
얼굴 또한
빛날 수 있음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우리를
따뜻하게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마음이
사랑으로
느껴집니다.
얼굴이
도달하고자
하는 것은
진실한 사랑이며
마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진실로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당신의 얼굴을
보여주십니다.
이 사순시기는
우리가
사람의 얼굴을
다시 찾고
사람의 얼굴로
살아야 할
시간입니다.
하느님의
선택하심을
믿습니다.
생각과
마음이 달라져야
얼굴도 달라집니다.
기도 없이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버려야 할
교만이며
거짓입니다.
하느님과
함께할 때
더욱 빛납니다.
우리의 얼굴이
달라져야
우리의 길도
달라집니다.
우리의 마음을
바꾸는
변모의 주일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하느님을
닮은 모습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아야 할
우리들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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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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