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줄다리기’에… 한국 반도체 ‘마이크론 딜레마’ 어쩌나
미 “어부지리 말길”, 중 “공급망 수호”... 서로 “내 편 돼 달라“
중국이 미국 반도체기업 마이크론에 대해 제재 조치를 취한 가운데 이 조치로 인한 빈자리를 한국 기업이 채워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미국 의회에서 나왔다. 중국은 이에 대해 “결연히 반대한다”며 한국이 미국의 압력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한국은 난처해졌다. 미국 말만 들을 수도, 중국 말만 들을 수도 없는 처지에 빠졌다.
●안보심사 핑계로 마이크론 제재한 중국 = 중국이 미국 반도체기업 마이크론 제품에서 심각한 보안 문제가 발견돼 안보 심사를 통과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중국 국가인터넷정보판공실 산하 인터넷안보심사판공실(CAC)은 5월 21일 마이크론의 중국 내 판매 제품에 대한 사이버 안보 심사 결과 이같이 결론 내렸다고 전했다.
중국 당국이 “마이크론 제품에는 비교적 심각한 네트워크 보안 문제가 존재해 중국의 핵심 정보 인프라 공급망에 중대한 안보 위험을 초래해 국가안보에 영향을 준다”고 공개했지만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중국이 외국 반도체 회사에 대해 사이버 안보 심사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조치가 첨단 반도체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하려는 미국의 시도에 대한 ‘맞불’ 조치로 보고 있다. 미국은 그동안 일본, 네덜란드 등 동맹국까지 동원해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막고 있다. 특히 제재 발표 시기가 미국이 주도하는 주요 7개국(G7)이 중국에 대한 전방위 견제 내용을 담은 정상회의 공동성명을 발표한 다음 날이자 G7 정상회의 폐막일이었다는 점에서 상징성이 더해졌다.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삼성전자, SK하이닉스와 함께 3강 체제를 형성한 마이크론은 작년 매출액 308억 달러(약 40조7000억 원) 가운데 16% 이상인 52억 달러(약 6조8700억 원)를 중국 본토와 홍콩에서 올렸다. 중국 본토 매출액만 따지면 전체 매출의 10∼11%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진다.
●‘중국에 반도체 판매 늘리지 말라’는 미국 = 미국은 중국의 마이크론 제재로 인해 중국 자신들이 입게 될 피해를 한국이 채워주지 말라는 압력을 높이고 있다. 외신에 따르면 미 하원의 마이크 갤러거 ‘미중전략경쟁특위’ 위원장은 5월 23일 “미국은 미국 기업이나 동맹에 대한 경제적 강압을 용납하지 않을 것임을 중국에 분명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 상무부는 중국에서 활동하는 외국 반도체 기업에 대한 미국의 수출 허가가 마이크론의 (빈자리를) 채우는데 사용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면서 “최근 몇 년간 중국의 경제적 강압을 직접 경험한 동맹국인 한국도 (한국 기업이 마이크론의) 빈자리 채우는 것(backfilling)을 차단하기 위해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갤러거 위원장은 또 “상무부는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를 블랙리스트(entity list)에 추가하고 어떤 미국 기술도 수준과 무관하게 CXMT나 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YMTC), 다른 중국 기업에 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갤러거 위원장의 이런 발언은 중국의 마이크론 제재에 대응해 중국 기업을 추가로 제재하는 동시에 한국 등 외국 기업이 마이크론 제재로 인한 반사 이익을 누리지 못하도록 분명히 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눈치 봐야 되는 한국 =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중국에 반도체 생산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미국이 지난해 10월 대중국 반도체 장비 수출통제 조치를 발표했을 때 두 기업은 올 10월까지 1년간 통제 조치를 유예 받은 바 있다.
하지만 미국은 이후 대중 반도체 수출 통제를 광범위하게 진행하면서 동맹국들에게도 동참을 요구했다. 지난 1월 제이크 설리번 국가안보보좌관 주재로 일본, 네덜란드 측과 협의를 하면서 반도체 장비 대중국 수출 통제에 두 나라가 동참하도록 요청했고, 결국 일본과 네덜란드 모두 미국의 요구에 부응하는 국내 조치를 취하고 있다.
미국은 한국에도 유사한 내용의 요청을 했다는 외신보도가 있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 4월 중국이 마이크론을 제재할 경우 한국 기업이 그 빈자리를 채우지 않게 해달라고 미국이 한국 정부에 요청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한국 정부는 이를 부인했다. 안덕근 산업부 통상교섭본부장은 최근 외신 인터뷰에서 관련 요청을 받은 바가 없다고 말했다.
외신 보도대로 미국이 삼성전자·SK하이닉스에 대중국 반도체 수출을 늘리지 말 것을 ‘공식’ 요청할 경우 한국 정부와 재계로서는 쉽지 않은 결정을 해야 할 상황이 될 것으로 관측통들은 보고 있다. 이런 가운데 5월 23일 미 하원의 마이크 갤러거 ‘미중전략경쟁특위’ 위원장의 한국에 대한 ‘중국에서 반도체 어부지리 불가’ 발언은 ‘공식에 준하는’ 요청이 됐다.
중국은 22일 외교부 대변인 브리핑 때 미국이 한국업체의 ‘마이크론 어부지리’를 저지하려 할 가능성에 대해 “결연히 반대”한다고 밝힌 뒤 “유관 국가 정부와 기업이 중국과 함께 다자무역 시스템, 글로벌 산업망과 공급망 안정을 수호하기를 희망한다”며 한국 정부와 반도체 업체들이 미국 요구에 응하지 않기를 기대했다.
만일 한국이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여 중국에 대한 반도체 공급을 제한할 경우 중국은 한국에 대한 보복조치를 단행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미 한중 관계는 윤석열 대통령의 대만 관련 발언 등으로 위험수위에 도달해 있다.
[한국무역신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