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공 신익희선생의 동상
길을 걷다 보니 5호선 강동역 1번 출구
이스트 쎈트럴 타워 앞 작은 공원에
해공 신익희 선생의 동상이 보인다.
신익희 선생의 친필
"민주주의를 위기에서 구출해 내어 죽엄에서 되 살아날 삶길을 뜷차."
선생은 대한민국 제3대 대통령 민주당 후보로 자유당의 이승만후보 보다 지지율이 높았으나, 선거를 10일 앞둔 1956년5월5일 목포유세를 가다가 호남선 열차 안에서 사망하였다.
사인은 뇌일혈이라고도 하고. 심장마비라고도 한다.
지지자들은 때마침 발표된 대전부르스를 합창하며 선생을 떠내 보냈고, 이 노래는 선생의 추모곡이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3선에 성공했으나 런닝메이트인 이기붕은 부통령에 당선되지 못 하였다.
이기붕은 대전부르스의 작곡가와 작사가 가수를 모두 잡아 가두는 만행을 저질렀다.
만약 대통령 유고시 장면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게 되는데 장면은 민주당소속이었다.
4년후 4대 대통령과 5대 부통령선거때
장면의 부통령 당선을 막고자 부정선거를 저질렀고 다음달 4.19가 터져 이승만은 하와이로 망명을 떠났고, 이기붕은 아들이 쏜 총에 맞아 죽었으며, 부정선거를 기획했던 최인규는 사형을 당했다.
이승만과 대권 경쟁을 하던이들은 괴이하게 죽음을 맞아야했다.
1대 때 가장 유력했던 백범 김구선생은 포병소위 안두희가 쏜 총탄 4발을 맞고 죽었고, 3대때도 절대 우세했던 신익희는 10일 전에 급사했고, 4대때도 절대 우세했던 우리지역(천안) 출신후보 조병옥박사가 선거 1달전에 지병으로 죽었다. 우연이었을까?
백범을 살해한 안두희는 무죄 석방 된 뒤 인천에서 잘먹고 잘살다가 80세때 어느 버스기사에게 몽둥이로 맞아 죽었다.
그 후 대전부르스는 대전블르스라는 곡명으로 1980년 조용필이 불러 대 히트를 쳤으며 대전역 광장에 노래비가 세워졌는데 가수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다.
https://m.youtube.com/watch?v=HRYZ_l_Di18#bottom-she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