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동안 누가복음 십사오륙 장을 통하여 신앙생활의
여러 과정들을 살펴보았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르심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그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도달하고야 말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다는 것,
그리고 거기 이르기까지 우리가 버려야 할 삶과
취해야 할 삶의 모습들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이 자기를 불러주셨다는 사실만 감사하고
자기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일에 충성할 생각만 하지,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신 그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에 대하여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신앙 생활을 바로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충성과 봉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의 얘기를 빌어보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 1:17-19)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기원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엡1:13)" 사람들이다.
바울은 지금 이런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다시금
"지혜와 계시의 정신(pneu'ma,퓨뉴마, 영)" 을 주시라는 것과,
그래서 그들의 마음 눈을 밝혀달라고 기도한다.
신앙생활은 방언을 소리 높여 외치며, 앞날을 족집게 무당처럼 예언하거나,
불치의 병을 안수 한 번으로 고쳐내는 능력이 아니다. 적어도 사도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원했던 신앙생활은 이런 것들이 아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이제 마음 눈을 열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그 부르심의 소망과
우리가 장차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누릴 그 영광이 어떤 것인지를
똑바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러 싸구려 약장사나 만들려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게
하신 게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우리로 당신의 아들 삼기
위함이고, 궁극적으로는 당신과 우리가 온전한 하나로 살기 위함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영광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영광을 거부하며 "아니,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로
살 수 있단 말입니까. 더구나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하나가 된단 말입니까?"
고 항변한다.
이래서는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신앙 생활이란 결국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며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로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는' 것으로는
신앙 생활이 끝나지 않는다.
이것은 그야말로 초보며 시작에 불과한 것이다.
신앙생활은 예수를 '믿는'데서 출발하여 예수가 되고
예수로 살아 마침내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는 고백에서
끝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끝끝내 하나님 아버지께 "충성"하고 싶은 사람들은 아직도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그 부르심의 소망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께 충성하지 않는다. 그냥 아들의 삶을 살뿐이다.
충성과 헌신은 그것이 자기 일이 아닐 경우에나 미덕이 된다.
그러나 아버지 일이 곧 나의 일이요, 아버지의 영광과 아버지의 고난이
곧 자기 것인 아들에겐 충성이니 헌신이니 하는 따위는 모두 우스운 말이다.
하나님의 일차적인 목표는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아들로 살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왔다.
우리가 그동안 힘든 것을 참고 견디며 하나님의 일에 열심이었던 이유는
아버지를 사랑함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조물주고 우리는
피조물이라는 인식에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을 일 점 일 획도 "어길 수 없기에" 열심히
노력하고, 자신의 모든 삶을 드려 헌신했던 것이다. 하긴 이것도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며,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기에 그것이 마치
신앙인 양 사람들을 속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행태는 결코 아들의 삶이 아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명을 지켜 어김이 없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아들이기에 아버지의 명을 어길 수도 있고,
아들이기에 아버지의 재산을 창기와 함께 말아먹을 수도 있는 것이다.
「자신이 무엇인가를 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의로운 존재로 서려고 하는
모든 시도를 일러 성경은 "육신"이라고 한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롬 4:1-2)
개역 성경은 로마서 4장 1절을 난하주에서 다음과 같이 번역하기도 한다.
"그런즉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육으로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내 생각으로는 이 번역이 옳다고 본다.
로마서 4장 1절은 아브라함이 이스라엘 민족의 육신적인 조상이라는
사실을 얘기하려는 게 아니라, 아브라함이 자기 노력이나 자기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입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야 2절이 자연스럽다.
1절의 육신이라는 말이 2절에 오면 행위로 발전한다.
사도 바울의 지적은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된 것은
절대 그의 노력이나 그의 '행위' 즉 그의 육신에 기인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한 것이란 얘기다.
아브라함의 육신이 만들어내는 아들은 이스마엘이다.
그러나 이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약속의 대상이 아니며,
오직 이삭으로 말미암는 자라야 아브라함의 씨가 되는 것이다.
이스마엘과 이삭. 이들의 삶이 누가복음 15장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 양들에 대해서는
한 번도 잘못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안전한 곳에,
그리고 또 다른 목자의 보호 아래 잘 있는 줄 안다.
그러나 그들이 있는 곳은 메마른 땅 광야며,
그리고 그곳엔 목자가 없다.
목자는 오직 길을 잃은 양 한 마리에만 관심이 집중된다.
"회개할 필요가 없는 - 왜냐하면 아버지의 명을 지켜
어김이 없었으니까 - 양들에겐 목자가 필요 없다.
그들은 목자가 없어도 그들끼리 무리를 지어 있음으로
안전하다고 믿는다.
교회에 나오기 때문에 구원받았다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에 열심이기 때문에 안전하다 생각한다.
길을 잃었다는 말의 의미는 자신의 육신적인 능력, 자신의 노력과
행위의 열심으로는 도저히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다는 자각에 있다.
그러니 이제 어디로 가야 좋을지, 무엇을 해야 좋을지를 모르기에
방황이며 갈등이 시작되는 것이다. 예루살렘이나 그리심 산에서
드리는 예배가 의미를 잃고, 그동안 드려왔던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자기 욕심 나부랭이나 지껄여왔던 기도는 도대체 무엇이며,
금식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성경말씀이라는 하나님의 재산을 받아 그저 창기와 더불어 먹고
마신 삶 끝에 찾아온 이 기근. 사람들은 이 궁핍을 만나야만
아버지의 의미를 알고, 또 아들이 자신의 노력으로 아버지 앞에
의롭게 될 수 없음도 안다.
그러나 맏아들처럼 성실한 사람들은 절대로 이런 궁핍을 만나지 않는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인간적인 성실의 경연이 아니다.
때문에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사람들은
인간들의 눈에 언제나 이삭(비웃음)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획을 쉽게 납득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오셔서 구십 구 세 된 사람에게 아들을 얘기하면
웃을 수밖에 없고,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저 값없이 우리 죄를
사하겠다고 말씀하면 웃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들은 이삭보다는 이스마엘이 좋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창17:18)" 했던 것이다.
이스마엘이라면 우리가 한 번 해볼 만하다.
그러나 이삭은 우리의 능력으로 이루는 게 아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탄생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다.
이래서 "믿음으로"라는 말이 나오며,
이래서 "값없이 주신 선물"이라는 말이 나온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더 이상 우리에게 묻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도 스스로의 죄를 더 이상 문제삼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자존심 하나로 버텨가는 인생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그냥 받기엔
뭔가 쑥스럽고, 뭔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다.
그래서 지어내는 얘기 - '그래요, 하나님이 이처럼 많은 죄를
사해 주셨으니 앞으로는 더 이상 죄 짓지 말고 하나님의 일에
충성된 일꾼이 됩시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사하심은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율법 아래 살지 않게 하시겠다는 의미다.
율법과 상관없이 온전히 은혜의 원리 아래 사는 사람.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러나 오늘의 기독교는 믿음으로 죄 사함 받은 사람들을
다시금 율법의 수렁으로 몰고 간다.
우리가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이제
율법을 온전히 지키려고 노력해야 하며,
이런 삶을 일러 성화의 과정이라고 가르친다.
다시 한번 사도 바울의 얘기를 들어보자.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갈3:1-3)
어리석은 사람들은 갈라디아 사람들만이 아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 역시 이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오늘도 예배당 꼭대기에, 저처럼 높이 걸려 있지만,
그래서 주일마다 자기 두 눈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분명히 보지만,
그러나 이들의 삶은 여전히 율법 아래 머물며,
오히려 율법을 벗어난 사람들을 이단시하고 백안시한다.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는 탄식은
괜히 해보는 소리가 아니다. 이는 실제로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나오는 탄식이다.
한 번 믿어 구원을 받은 사람은 절대 그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는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정말 성경도 하나님의 의도도
모르고 크게 미혹된 것이다.
성령으로 시작하여도 얼마든지 육체로 마칠 수 있다.
하나님이 아무리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 죄를 사하셨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여전히 율법적인 행위 아래 있으면 우리를 거듭나게 한
그 성령은 더 이상 우리를 어떻게 하실 수 없다.
그저 안타까움으로 탄식하며 눈물 흘릴 뿐.
율법을 벗어나는 삶은 단회적인 사건이다.
이것은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이며, 땅에 속해 있던 사람이 하늘로
그 주소를 옮기는 것이다. 이 일은 오랜 세월 동안 꾸준히 이루어
가야 하는 성질이 아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 같은 말씀이나,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같은 말씀을 이런 데
적용하려 해서는 안 된다.
세상이나 율법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가는 것은
단 한 번의 눈 뜸, 그것이다. 그 후에는 절대 율법적인 싸움을 하지
않는다. 이건 그런 싸움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다.
그저 '눈을 뜨고 있기만 하면' 싸울 필요가 없는 일이다.
물론 눈을 뜨고 나면 그동안 자기가 집착했던 것과 좋아했던 것,
그리고 자기가 살아왔던 삶의 터전 등이 제대로 보일 것이며,
따라서 그것들은 자신을 괴롭힐 것이다.
아름다울 거라 생각했던 것들의 추함이 가져다주는 괴로움.
무언가 의미가 있을 거라 생각했던 일들의 무의미함이 가져다주는 괴로움.
차라리 못 보고 몰랐더라면 편했을 것들이 이제는 보기 때문에 괴롭고
알기 때문에 고통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그래도 초보적인 괴로움이다.
정작 어려운 것은 눈을 뜨기 전에는 좋아할 수 있었던 대상들을
더 이상 좋아하지 못함으로 오는 괴로움이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항상 상대적인 것이다.
내가 돈을 좋아하기 때문에 돈도 나를 좋아하는 것이지
내가 돈을 싫어하기 시작하면 돈도 나를 좋아하지 않게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눈을 떠 율법 아래 사는 삶의 실상을 보고,
그 비참함을 버리게 되면, 문제는 그 율법도 나를 외면하고
나를 버린다는 사실이다.
'율법이 나를 외면하는 것이야 좋은 일이지 어디 고민할 문젠가'고
편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그러나 나를 외면하고 나를 버리는 것이
율법만이 아니고 "율법적인" 사람들까지도 포함되며,
그리고 그들은 바로 내 부모며 내 남편이며 내 처자식들이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내가 율법에 대한 눈을 떠 그 참혹한 모습을 알게 되더라도 - 이 비참함을
제대로 보기만 하면 절대로 그 아래서 살지 않는다. 모르고는 몰라도 알고는
살 수 없다. - 내 가족들에게 그 비참한 실상을 보게 할 수 없다는 점이
골치 아픈 문제다. 물론 말이야 할 수 있지만, 그러나 눈을 뜨고 보아야만
알 수 있는 걸 어떻게 말로 설명한단 말인가. 그렇겠구나고 동의를
받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그의 깨달음이 될 수 없음은 자명하다.
사람들이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하면서도 엉거주춤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런 데 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율법 아래서 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가운데는 자신이 사랑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이 함께
섞여 있다는 것. 또한 계속 그들을 좋아할 수 있으려면 자신도 계속
율법 아래 살아야 한다는 것. 그래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마 10:34-36)
율법에 매여 사는 사람들이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저 그들을 외면하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해결되지만, 그러나 그 대상이
아비요 어미며 형제며 자매일 때엔 외면하는 것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가족은 그 가족이라는 이름 때문에 가족으로부터의 이탈을 그냥
두고 보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곁에 묶어두려 하고,
애정이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집착한다.
사람들이 율법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끝내 그 율법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런
율법적인 체제의 견고함 때문이다. 이 체제에 덤벼드는 것은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치기며, 풍차에 돌진하는 동키호테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항상 이런 위험 앞으로
내몰리는 일이며, 삶과 죽음을 건 대모험이다. 절대 신앙생활을
우습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신앙은 우리 생활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며 오히려 그 이상이다. 이런 각오와 이런 결단이 있는 사람만
하나님을 찾아 나설 일이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율법을 온전히 벗어난 사람들 앞에 하나님은
다시금 육신이냐 영이냐를 물으신다. 여기 나오는 육신은 앞에서(롬 4:1)
말한 육신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 앞에서 말한 육신이 인간의 능력과
행위, 노력 등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여기 나오는 육신은 이 물질 세계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전자의 육신에 대한 반대말이 은혜나 선물이라면,
후자에 대한 반대말은 '영'이며 '감추어진 세계'다.
신앙생활은 육신을 두 번 벗는 것이다.
한 번은 단회적인 사건이고(이스마엘과 이삭의 문제),
또 다른 한 번은 점진적인 사건(에서와 야곱의 문제)이다.
전자가 '영의 구속(롬8:10)'이라면
후자는 '몸의 구속(롬8:23)'이다.
영의 구속이 이루어진 사람이 몸의 구속에 이르기까지
하나님 안에서 사는 삶. 이것이 신앙생활의 참 모습이다.
하나님을 믿음이란 결국 이 세상에 대하여 부요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세상의 힘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모두 우리가 육신에 거하는 동안만, 그것도 우리의 육신적인
부분에 대하여만 발언권을 행사할 뿐이다. 우리가 만일 육신적인 풍요가
없이는 살기 힘든 "부자" 같은 사람들이라면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한다 한들 그것은 모두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나사로처럼
살 수 있어야 한다.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그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위로가 되고
그리스도가 도움이 되는 그런 삶을 살지 못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모래 위에 세운 빌딩일 뿐이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요일2:15-17)
요한의 말대로 이 세상과 그 정욕들은 정말 지나가는 것인가.
예수를 믿으면서 이 세상을 사랑하면 안 되는가.
어디서는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 되기"를 소망하던
요한이 왜 여기서는 이처럼 이 세상에 대하여 적대적인가.
예수를 믿으면서 이 세상을 같이 가질 수는 없는가.
요사이 기독교는 세상에서도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어,
재산을 공개하자는 일부의 주장도 외면하고 있는 판인데…….
육신의 정욕.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쾌락을 꼭 남녀 간의 일로만 볼 일이 아니다.
멋진 옷, 편한 집, 좋은 차. 이들이 제공하는 안락함도 모두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색(色)의 쾌락이다.
그런데 이런걸 좇으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니 어떡할 것인가.
안목의 정욕.
우리 눈이라는 것은 참으로 묘한 데가 있어 약간의 차이도
기가 막히게 분별해 낸다. 그리고 그 욕심은 끝이 없으니…,
이래저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생의 자랑.
명예와 권세, 아들 자랑 딸 자랑.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나사로 같은
사람에게도 이생의 자랑이란 게 있었을까. 부자의 동정으로 얻어 먹으며
산 일생에 무슨 자랑거리가 있었으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이처럼 이 세상에서의 영광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라면, 도대체 하나님을 믿어 얻는 게 뭔가.
사람들을 무얼 하자고 하나님을 믿는가.
이문열의 소설「詩人」에 보면 흔히들 김삿갓으로 알고 있는 김병연이
금강산에 들어가 취옹(醉翁)을 만나, 시의 효용에 대해 얘기하는
부분이 나온다.
취옹은 여기서 시의 효용은 그것으로 밥을 먹자는 것도 아니고
권세를 얻자는 것도 아니며 또 나아가 나라를 다스리기 위함도 아니라는
말을 하는데, 당시의 병연으로서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어서,
그럼 대체 시라는 걸 왜 쓰느냐는 질문을 하게 된다.
취옹의 대답 - "단지 시를 얻는다!"
시를 써 단지 시를 얻는 사람이 시인이다.
하나님을 믿으면 '단지 하나님을 얻을 뿐!'
천국에 가는 것도 아니고 지옥에 안 가는 것도 아니다.
이런 사람들이 신자(神者)다.
모쪼록 그 동안의 누가복음 강해가 하나님을 얻는 여러분의 삶에
작은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소망이다.
글: 이호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