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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가해 9월18일 월요일 [(녹) 연중 제24주간 월요일]
[수도회] 평등 실천에 주어지는 축복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1티모 2,1-8
† 복음 루카 7,1-10
◈ 오늘의 묵상
믿음은 교리나 규범을 잘 알고 지키는 것만으로 생기지 않습니다.
믿음에는 인격적 신뢰가 중요합니다. 한 사람에 대한 확고한 신뢰,
그리고 그 신뢰가 자신의 삶을 지탱해 주고 있다는 체험이 있어야
믿음은 성장합니다.
오늘 예수님께 자기 노예의 치유를 청하는 백인대장의 모습 속에는
이러한 인격적 신뢰가 엿보입니다. 그는 이방인이었지만 더불어
사는 유다 민족에게 회당을 지어 주며 우호적인 태도로 유다인의
원로들의 신뢰를 얻습니다. 자신의 종마저 소중한 한 인격체로
받아들여 그의 고통을 치유해 주고 싶어 합니다.
이런 백인대장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기만 했을 뿐인데도,
예수님을 신뢰하고 ‘주님’으로 부릅니다. 그리고 친구를 보내어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을 전할 정도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백인대장의 믿음에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고 하시며 예수님마저도 감탄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신다는 확신을
이방인의 믿음에서 보셨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믿음에는 간절함과
확고함, 인내와 끈기가 필요합니다.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손길이 내 인생에 절실하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에게
믿음은 진정성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영성체할 때 바치는 이
백인대장의 청원을 일상의 삶에서도 매 순간 바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주님을 믿어야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2017년 가해 9월18일 연중 제24주간 월요일
제1독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느님께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1서 말씀입니다. 2,1-8
복음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1-10
어떤 형제님에게 요즘 걱정이 하나 생겼습니다. 글쎄 지금 자신의
증세가 큰 병처럼 생각되는 것입니다. 3일 전부터 배가 계속해서
아프고, 변의 색깔도 검은색일 때가 많습니다. 더군다나 윗배를
만져보니 딱딱한 느낌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터넷을
살펴보았습니다. 모든 부분은 아니지만 대부분 분명 위암 증세인
것입니다. 이유 없는 체중 감소도 증상 중 하나라고 해서 얼른
체중을 재보니 자신이 알고 있었던 체중보다 2Kg이 빠져 있습니다.
특별히 다이어트를 하지도 또 운동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지요. 이
형제님은 확신했습니다.
‘내가 위암에 걸렸구나. 어떻게 하지? 아직도 할 일이 많은데.’
병원을 찾아가서 각종 검사를 했습니다. 검사 결과 의사
선생님께서는 ‘위궤양’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심각한
상태는 아니니까 약물을 통해서 간단히 치료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이러한 진단을 받은 형제님께서는 어떠했을까요? 당연히 위암이
아닌 사실에 대해서 기쁘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형제님께서는 의사 선생님께 화를 내면서 따졌다고 합니다. 자신이
인터넷을 통해서 확인해보니 분명히 ‘위암’이라고 말이지요. 그래서
혹시 놓친 부분이 있어서 위암을 못 찾을 수도 있으니 다시 검사를
해달라고 합니다. 안 그러면 때를 놓쳐서 치료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지 않냐고 말합니다.
이 형제님께서는 의사 선생님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자신이 찾아본
인터넷 자료에 근거해서 스스로 진단을 하고 결론을 맺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의사 선생님을 믿고 있다면 어떨까요? 감사하고
기뻐할 일인 것입니다. 그리고 의사 선생님의 말을 따라서 치료를
받으면 건강을 되찾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 역시 종종 잘못된 믿음으로 스스로를 어렵게 만듭니다. 앞선 이
형제님의 모습처럼 주님을 믿지 못해서 끊임없이 의심하고 부정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우리가 미사 영성체 전에 바치는 기도문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라는 사제의 말에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라고 응답하지요. 바로 교우들의 응답부분이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백인대장의 고백이었습니다. 말씀만으로도 충분히 나을 수 있다는
것, 바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 때문이었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이 세상 안에서 잘 살 수 있도록 해주시고, 더불어
구원이라는 가장 커다란 선물을 들고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주님을 믿지 않고 오히려 불평불만만을 간직하고 있다면
어떨까요? 순간적인 만족만을 주는 것이 전부인 양 생각하면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을 멀리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의사선생님을 믿어야 병이 치료되는 것처럼, 주님을 믿어야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아무 때라도 바로 그때가 할 일을 하기에 가장 적절한 때다
(마틴루서킹 주니어).
어제 강의를 했던 청라성당입니다.
단순하게 삽시다.
어떤 남자가 생을 끝내고 싶어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쥐약을 먹으면 목숨이 위험하다던데.”
그 말에 남자는 그 방법이 가장 간단해 보였습니다. 약국으로
달려갔지요. 마침 약국엔 약사인 아버지 대신 자리를 지키는 어린
아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자는 아이에게 급히 물었습니다.
“여기 쥐약 있니?”
그러자 아이가 심각한 얼굴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왜요? 쥐가 어디 아픈가요?”
아이들은 참으로 단순합니다. 그 단순함이 문제의 해결을 가져올
때도 있지요. 이러한 단순함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어떨까요?
어제 강의 때 만났던 막 잠에서 깬 아이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평등 실천에 주어지는 축복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9월18일 연중 제24주간 월요일 루카 7,1-10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루카 7,9)
평등 실천에 주어지는 축복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이방인들에게도 전해집니다. 여기
나오는 로마 관리는 이방인으로서 카파르나움을 지키는 로마
백인대장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병들어 죽어가는 노예를
살리기 위해 직접 예수님을 찾아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을 보내어 그 노예를 살리려고 혼신의 노력을 기울입니다.
이 백인대장의 태도는 우리 신앙인들의 귀감이 됩니다.
먼저 백인대장은 자신의 노예를 “소중히” 여겼기에(7,2) 유다인의
원로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그를 살려내려고 합니다. 그는 노예의
존엄한 인간성을 인정할 뿐 아니라 틀임 없이 유다인이었을 그
노예의 종교 또한 존중했던 것입니다. 그는 식민지를 지배하는 통치
권력의 힘 있는 사람이었음에도 노예를 자신과 동등한 존재로
인정하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얼마든지 갑질을 할 수 있고, 해도
무방한 상황에서 그의 태도는 놀랍습니다.
유다인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이렇게 말하며 간곡히 청합니다.
"그는 선생님께서 이 일을 해 주실 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회당도 지어 주었습니다.”
(7,4-5) 그런데 예수님께서 백인대장의 집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그는 친구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아룁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7,6-7)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에 감탄하시며 그의 노예를
고쳐주십니다. 사실 백인대장은 유다인이 이방인의 집으로 들어오면
불결해진다는 유다인의 관습을 알았기에 그것을 존중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며 지극히
겸손한 자세로 노예의 치유를 간청한 그의 믿음의 자세입니다. 그는
사랑이요 선이신 주님을 주인으로 인정함으로써 그분의 능력과 자비
안으로 들어갑니다.
또한 백인대장의 놀라운 면모 가운데 하나는 식민지 통치를 받고
있는 지역 사람, 그것도 노예에 지나지 않은 보잘것없는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죽어가는 노예가
하느님 생명의 축제에 참여할 수 있도록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부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인간을 존중했고, 노예마저도
자신과 평등한 위치에 두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깊고깊은
사랑이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백인대장의 노예를 살려주신 것은 그의 믿음과 노예를
향한 경이로운 평등과 사랑의 마음에 감탄하신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이 백인대장의 믿음과 사랑과 평등의 정신을
본받아야겠습니다. 믿음을 사랑의 불을 지피고, 사랑을 믿음을
완성함을 알 수 있습니다. 믿고 사랑하면 할수록 주님께서는 죽음을
생명으로 바꿔주시고 억압과 불의로부터 해방시켜주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을 다시 돌아봐야겠습니다. 혹시 우리는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살리시는 것을 보고도 믿으려 하지
않았던 유다인들을 닮지는 않았습니까? 보지 않고도 믿고, 신분과
지식과 재산, 인종과 언어, 종교와 문화 그 어떤 것에 관계없이
모두를 평등한 사랑으로 대하고 있습니까?
오늘도 사랑 가득한 믿음 안에서 모든 이를 차별 없이 대하는 평등을
실천함으로써 주님의 축복 안에 머물렀으면 합니다. 그저 생각에
그치지 말고 백인대장처럼 우리 모두가 주님 생명의 축제에서
기쁨을 나눌 수 있도록 자신 모두를 끝없이 쏟아붓는 사랑의 화로가
되어야겠지요.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좋은 사람
2017년 가해 9월18일 연중 제24주간 월요일(루카 7,1-10)
좋은 사람
이 세상 살아가다보면 가끔씩 뜻밖의 선물처럼 참으로 매력적이고
호감가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로또에 당첨되거나
보너스를 탈때 보다 더 기분이 좋습니다.
그저 외모가 잘 생긴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뜻한 인간미에
자상하고 너그러운 성품, 균형잡힌 감각에다 이웃을 배려하는
자상한 마음, 거기다 예의바르고 겸손한 말투까지.
그런 사람과 함께 있으면 마음이 저절로 훈훈해집니다. 그의 존재
자체가 금은보화보다 더 소중합니다. 그 무엇이든 한없이 베풀고
싶습니다. 해질녘 긴 강가를 따라 아무리 걸어도 피곤을 느끼게 하지
않는 그런 사람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극찬하시는 백인대장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를 향한 예수님의 칭찬은 복음서 그 어디를 봐도 찾아보기가 힘든
대단한 칭찬이었습니다. 당신께서 후계자로 지목하신 베드로
사도에게도, 애제자였던 요한 사도에게도 하지 않으셨던
극찬이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루카복음 7장 9절)
그렇다면 극찬의 이유가 무엇일까요? 다른 무엇에 앞서 백인대장이
지니고 있었던 한없이 따뜻한 인간미 때문이었습니다. 백인대장은
예수님께 누군가의 치유를 간절히 청하고 있었는데, 그 대상이
누구였습니까?
백인대장 자신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애지중지했던 아들이나 딸도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데리고
있던 노예의 치유를 청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바처럼 예수님 시대 당시 노예는 가축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요즘 우리 시골 장날 우시장에서 소가
매매되듯이, 당시 노예들은 목줄이 묶인 채 길거리에 진열되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노예를 사러 온 사람들은 마치 소를 사는 것 처럼 노예의 입을 ‘쫙’
벌려 치아가 괜찮은지 확인해봤습니다. 때로 옷을 홀랑 벗겨
피부병은 없는지 육안으로 자세히 살펴보곤 했습니다.
그런 어처구니 없던 시대, 백인대장은 자신의 노예를 가족처럼
여기며, 인격적으로 대해주었습니다. 노예였지만 한 지붕 아래서
오랫동안 동고동락하다보니 정이 많이 쌓였겠지요. 그런 노예가
죽을 병에 걸리자 체면불구하고 예수님께 치유를 청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백인대장은 이방인이었지만 유다인들에게도 큰 호의를
갖고 살갑게 대해준 사람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을 위해 회당까지
지어준 것을 보면 그는 이미 마음으로 하느님을 믿고 있었을뿐
아니라,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백인대장은 말 한마디 한 마디도 아주
예의바르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갸륵한 마음이 든 예수님께서
그의 종을 치유해주시려고 백인대장의 집을 찾아가던 중에 그는
사람을 보내어 이렇게 아뢰었습니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루카복음 7장 6~7절)
백인대장이 지니고 있었던 예수님을 향한 강한 믿음과 자신이
데리고 있던 노예를 향한 측은지심, 거기다 지극한 겸손의 덕까지...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기적을 불러오기에 충분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소위 ‘아랫사람’들을 향한 측은지심을
지니고 있습니까? 그들의 치유, 그들의 구원을 위해 간절히 주님께
청하고 있습니까?
- 살레시오회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연중 제24주간 월요일
2017년 가해 9월18일 연중 제24주간 월요일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 루카 7,1-10
25년 동안 만남을 이어가는 모임이 있습니다. 30대인 저는 50대
중반이 되었고, 그분들은 70이 넘으셨습니다. 약속장소로 함께
가는데 예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는 어느덧 앞서가고
있었고, 그분들은 약속하신 것처럼 늦은 걸음으로 오셨습니다.
신호등에서 기다리면서 저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아 함께
가야겠구나!” 마음은 그렇게 먹었지만 역시 제가 앞장서 가고
말았습니다.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 자칫 실수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혼자서 모든 것을 결정하고, 진행하려하기 때문에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불편을 주기도 합니다. 기다려주고, 믿어주고, 함께하면
조금은 늦을지 모르지만 일의 결과도 매끄럽고, 모든 사람이
만족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태양계에 속해 있습니다. 항성, 행성, 위성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태양은 우리 삶의 터전인
지구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태양이 사라지면 지구의
존재도 사라질 것입니다. 달도 지구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그것을 ‘만유인력’이라고 표현합니다. 과학적인 지식은
없었어도, 우리 조상들은 신화와 상상 속에서 태양과 달이 지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원망하면 원망할 일들이 생긴다고 합니다. 미워하면 미워할 일들이
생긴다고 합니다. 싸우면 싸울 일들이 생긴다고 합니다. 원망과
원망이 만나면 몸이 병들기 마련입니다. 미움과 미움이 만나면
폭력의 악순환이 되풀이 됩니다. 싸움과 싸움이 만나면 깊은 상처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감사하면 감사할 일들이 생긴다고
합니다. 사랑하면 사랑할 일들이 생긴다고 합니다. 용서하면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감사와 감사가 만나면 축복의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사랑이 만나면 은총이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용서와 용서가 만나면 치유의 열매가 맺어지기 마련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미움과 원망 그리고 분열과 다툼을 멀리하라고 이야기
합니다.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고, 기다려주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원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백인대장’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율법과 계명을
몰랐지만 마음은 이미 하느님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삶은 참된
신앙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을 위해서 회당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었습니다. 병든 종을 내치지 않고 정성껏
돌보아 주었습니다. 주님께서 한 말씀만 하시면 종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은 피부색, 신분, 학식에
따라서 커지는 것’이 아님을 늘 말씀하셨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 시로페니키아 여인, 백인대장’은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그분들의 믿음을 칭찬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 해도, 교만과 욕심에 사로잡혀있으면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야단치셨습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백인대장의 믿음 / 전삼용 요셉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9월18일 연중 제24주간 월요일
제1독서 : 티모테오 1서 2,1-8
복 음 : 루카 7,1-10
제가 아는 한 자매님이 이러한 고민을 저에게 보내왔습니다.
“신부님,
제가 상담할 일이 또 생겼네요.
이번 태풍으로 우리 아파트 나무가 다수 뽑혀나갔는데요,
경비아저씨 말씀으로는 우리 아파트에 나무가 너무 많고 너무
무성하게 자라서 저층에서는 나무를 베어달라는 민원이 계속
들어왔었는데 고층에 사는 주민들과 타협이 안 돼 베어내질 못하고
있었대요.
그런데 이번에 단 한시간만에 하느님께서 일을 깨끗하게 해결해
주셨어요.
제가 이 이야기를 듣고 남편과 아이들한테 전능하신 하느님의 힘이
느껴진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그럼 과수원에 다 떨어뜨린 과일들을 어떡할 것이며 죽은
사람들은 어떡할 거냐고 협공을 해오는 거예요. 이럴 때 제가 뭐라고
답하면 좋죠?
그냥 하느님의 천사인 바람이 한 일인데 심술궂은 천사도
있었나보다고 했더니 머리 컸다고 먹히지도 않고 비웃음만 샀어요.
완전 환자라나 뭐라나...
사실 제 신앙생활이 환자수준은 아닌데 그런 말은 하는 게
아니었을까요?
하지만 전 아직도 정말 신기해요... ”
이런 고민은 비단 이 자매만이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만나면 반드시 발생하게 되어있는
상황입니다.
믿는 사람은 모든 것에서 하느님을 보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직접 보아도 알아보지도 못합니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많은 사람들에겐 예수님은 그저 사람의 아들이지 하느님의
아들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보지도 못한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고백하고, 축성된 빵과 포도주가 그
분의 살과 피로 보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믿음을 갖게 해 달라고 기적을
요구하곤 합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요구하는 세대를 사악한
세대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기적이나
표징을 보지 않고서도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백인대장은 예수님의 소문만 듣고 사람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자신의 종을 고쳐달라고 청합니다. 그는 예수님이 하시는
기적도, 어쩌면 예수님을 본 적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믿는 유다인도 아니었고 다신을 섬기는 로마인이었습니다.
이방인이면서 보지도 않고 소문만 듣고도 그 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의 믿음을
이스라엘에서도 본 적이 없다고 하십니다.
믿음은 어떤 종교의 사람이냐에 상관없이 어린이처럼 깨끗한 마음에
하느님께서 넣어주시는 은총입니다. 깨끗한 마음만 있으면 성령님이
들어오시고 믿음을 선물로 만들어주십니다. 따라서 이교도의
백인대장도 하느님을 섬기는 유다인들보다 더 믿음이 강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백인대장과 같이 믿음이 강한 사람은 더 이상 표징이 필요 없습니다.
굳이 예수님께서 오셔서 아픈 사람에게 손을 대실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때, 침을 바르시거나, 안수를 주시거나,
흙을 바르는 등의 행위를 하시는 이유는 사람들이 그런 행위를
보아야 예수님께서 고쳐주신 것을 믿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백인대장은 그런 행위조차도 필요 없다고 하며 멀리서도 명령만
하시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에게 더 이상 유다인들이
요구하던 표징이나 기적은 필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모든
것 안에서 그 분을 볼 수 있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허락 없이는 참새 한 마리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낙엽
하나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
안에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한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사람은 나무가
부러지는 태풍 안에서도 하느님의 섭리를 보고, 또 어떤 사람은 보지
못합니다. 이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보는 사람은 믿음이
있는 것이고, 보지 못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태풍 속에서도 사람이 죽었다고는 하지만, 예수님도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겐 예수님의 죽음은
세상에서 패배한 죽음 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은 구원이고 생명입니다.
누가 죽고 농사를 망치는 것 안에도 하느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그분의 섭리는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이 회개하고 구원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악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이태석 신부님의 죽음은 수많은 새로운 생명을 싹틔우는 씨앗이
되었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당신의 죽음으로 더 많은 사람 안에
태어나시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을 지닌 사람의 시선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그저 의사까지 되어서 결혼도 못하고 힘들게
살다가 젊어서 요절한 사람 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죽음은
악입니다. 그러나 그 분은 기쁘게 죽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믿는
사람에겐 모든 악도 선을 위해 필요한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고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은 악도 선이로 이끄시는 분이라 하느님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은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안수를 받고 눈에서 비늘이 떨어져 나갔고 그 때서야
모든 것을 새롭게 보게 되었습니다. 성령으로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만약 내 주위 사람들이 하느님을 보지 못한다면 마치 아나니야가
바오로에게 안수를 해 준 것처럼 내가 지닌 성령님을 전해
주어야합니다. 함께 모든 것 안에서 같은 하느님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리고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본다면 그 믿음을 갖게 해 주신 하느님을 찬미합시다.
- 수원 교구 영성관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청주] 하느님의 능력을 만나는 기회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7년 가해 9월18일 연중 제24주간 월요일 (루카7,1-10)
믿음은 하느님의 능력을 만나는 기회
“저는 기도를 잘 하지 않습니다. 믿음도 부족합니다.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잘 안됩니다. 마음은 간절한데 실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 기도를 하는 대로 들어 주신다면 매달려 보겠는데 확신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일에나 성당을 찾는 발바닥 신자가 되고
말았습니다.”하고 말씀하신 분이 계셨습니다.
저를 두고 하는 말씀으로 알아들었습니다. 미사를 봉헌하고
성무일도를 바치는 것에 급급해 하는 자신을 보면서 기도가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성경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들은바 대로 행함으로써 하느님을 체험하라고 강조하면서도 정작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루의 끝맺음에 서면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한 가지도 못하고 후회하며 부끄러워합니다.‘내일은
잘해야지’하고 결심하고서는 아무 의식도 없이 또 하루를
보냈습니다. 이러고서도 굳센 믿음의 소유자가 되길 바라고 있으니
뻔뻔합니다.
민수기 14장 28절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내가 살아있는 한, 너희가
내 귀에 대고 한 말에 따라, 내가 반드시 너희에게 그대로 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간절한 청은 물론 불평 불만하면서
뱉어버린 말도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이루어 지지 않는다고 해서 투덜대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내가 원하고 바라는 때가 아니라 당신이 보시기에
가장 좋은 때에 당신의 뜻을 이루어 주십니다. 따라서 오늘 이루어
주실 수도 있고, 내일 이루어 주실 수도 있으며 내 세대가 아니라
다음세대에 이루어 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이루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저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백인대장은 자기
종이 병들어 죽게 되자 예수님께 ‘저는 제집에 주님을 모실 자격도
없고,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깁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하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청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당신을 의심하는 고향
사람들 앞에서는 별로 기적을 베풀지 않으셨지만(마태13,58)
믿음으로 준비된 사람에게는 당신 말씀의 능력이 살아났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의 능력은 늘 작용합니다. 다만 내가 믿음으로
준비되지 못한 탓으로 그 능력을 체험하지 못할 뿐입니다. 주님의
능력은 언제 어디서나 한결같습니다. 그러니 믿고 구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구하는 바대로 실천해야겠습니다. 그러면 그대로
얻게 될 것입니다. 열매는 행동하는 데서 맛보게 됩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능력을 만나는 기회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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