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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
☪ 부산의 고개
부산에 살지 않는 외지 사람들에게 ‘釜山’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냐고 물어보면 아마도 바다(海), 釜山港, 海雲臺, 太宗臺, 廣安里라고 할지 모르겠다. 요즘은 더 핫한 ‘부캉이’라고 할지도 모르고. 아니면 PIPA나 롯데야구를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산에는 그것들말고도 금년에 국립공원이 된 金井山과 萇山, 黃嶺山, 蓬萊山 같은 산도 많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낙동강’도 있다. 또 ‘짭잘이토마토’로 유명한 강서구 大渚와 江東에는 논도 밭도 많다. 전국 어디에나 마찬가지지만 산이 많으니, 고개도 많다. 「부산의 고개」라는 이 책에서는 모두 23개의 고개를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부산에서 50년 이상 살아온 내가 보기엔 책에 소개한 고개 말고도 더 있다. 책에서는 소개하지 않은 산성고개, 계좌고개, 문현고개 등이다. 저자인 ‘동길산’선생도 아마도 모두 소개하기에는 버거움이 있었을지 모르고, 선택한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전국 곳곳에는 ‘장고개’라는 이름이 많다. 장을 보러 가기 위해 넘는 고개가 장고개다. 부산에 ‘해운대 장고개’, ‘우암 장고개’, ‘강서 장고개’등이 있고, 장고개라는 이름이 붙지 않아도 장으로 가는 길에는 고개들이 있다. 용당에서 감만동, 우암동을 거치고 동천을 건너서 가는 길에 ‘우암 장고개’가 있다. 용당, 용호, 감만동 사람들이 부산장(부산진시장)에 장보러 가기 위해 넘던 고개가 우암 장고개다.
이 고개가 있던 곳의 일부가 1983년 개방대 부지로 편입되면서 고갯길은 점차 흐려졌고, 개방대는 1996년 부경대와 통합되면서 개방대 자리는 부경대 용당캠프스가 되었다. 우암 장고개는 300년 전〈대동여지도〉가 그려지기 전부터 우롱산 고개길로 존재했으며, 부산진성 근처에 장터가 생기면서 장고개라는 이름을 얻었다.
‘하단장은 추워서 못 보고, 명지장은 포구가 없어 못 보고
구포장은 허리 아파 못 보고, 부산장은 길을 못 찾아 못 본다.
골목골목 부산장 길 못 찾아 못 본다.’- 부산장 장타령 일부다.
옛날 시장은 열에 아홉은 관공서를 끼고 섰다. 유동 인구가 많아서기도 하지만, 도난과 분쟁, 싸움 같은 불상사에 대처하는데 이점이 있기 때문이었기 때문이다. 동래시장은 동래부 동헌 곁에, 부산장은 수군 성이던 부산진성을 끼고 생겼다. 부산진시장으로 불리기도 하는 부산장은 중국에서 비단이 들어오면서 혼수 전문 시장이 되었다. 근처에 조선 최대의 방직공장, 조선방직(조방으로 통한다)이 있어서 혼기에 가까운 여공들이 넘쳐났다. 혼수 시장으로 승승장구하던 비결이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일본인 거주지역이 부평동으로 옮겨가면서 부평시장(국제시장)이 번창하며 주춤했다. 하지만 조선 시장이자 부산 시장이 부산장(부산진시장)이었다.
초읍에서 사직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초읍고개’다. 온천장 목욕하러 가거나, 동래시장에 장보러 가거나, 거제리 조선견직으로 출근하기 위해 넘던 고개다. 소구루마가 겨우 지나던 길로, 길 양쪽에는 산비탈이었다. 해방 전까지 소달구지 한 대가 겨우 지났는데, 다른 쪽에서 오는 달구지는 옆으로 비껴야만 했다. 지금은 그것을 상상하기도 어렵다. 초읍고개에는 묘지가 많았다. 문씨를 비롯 손씨, 김씨 등이 집성을 이루었다.
동래에서도 초읍으로 넘어졌고, 지금은 고개를 넘으면 서면시립도서관이 있는데, 도로가 나기 전에는 도서관쯤에서 길이 끊겼다. 온통 논밭이었다. ‘초읍못’이라고 불린 저수지가 있었고, 못둑과 논길을 지나 내려오면 미군의 하야리아 부대가 나왔다. 초읍못은 1965년 헐려졌고, 부산진고교 앞을 메워서 시장과 주택들이 들어섰다.
1970년 차도가 생기면서 넓혀졌고, 성지곡수원지가 유원지로 지정되면서 어린이 회관이 들어서 지금에 이른다. 내가 알기로 내 고향 남지에는 1960년 중·후반에야 전기가 들어왔으나, 초읍에는 1953년 6월 전기를 끌어들이려고 했다. 그러나 돈 많이 들고, 전기가 들어오면 일들은 않고 전깃불 밑에서 밤새 노름이나 하면서 농사를 망친다고 지주들이 반대했다. 그러나 유지들로 구성된 ‘전기가설기성회’의 노력으로 그해 8월에 전기가 들어왔다.
초읍에서는 성지곡을 지나 만덕으로 넘어가는 고개도 있는데 여기를 만남의 광장이라고 하지만 여기가 불태령 고개다. 여기서 보면 석불사 바위가 마치 부처의 모양, 부처의 태처럼 보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성북고개’는 지금 보면 고개 같지가 않다. 그래서 소개를 생략한다. 해운대 ‘달맞이 고개’는 부산의 명소다. 대한 팔경 중 하나기도 하다. 가본 사람은 알지만, 달맞이 고개에 유명한 것은 벚나무이고 벚꽃이다. 물론 유명한, 이름난 카페들도 많다. 벚나무는 언제 심어졌을까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1983년 국토 공원화 사업의 일환으로 해운대구청에서 심은 것이다. 1980년 4월 출장소에서 구청으로 승격한 뒤, 2대 구청장이던 수필가, 채낙현 구청장 때 심고, 기념비를 세우고 ‘달맞이 길’이라는 애칭도 붙였다.
달맞이 길을 따라 걸으면 ‘송정옛길’이 나오는데, 여기는 포장도 되지 않아서 정취가 물씬 풍긴다. 몇 번 가보지는 않았지만, 옛길에서 송정해수욕장 쪽을 내려다보면, 일본 북해도 하코다테항 야경이 떠오른다. 내가 볼 때는 그랬다. 아래 사진은 ‘하코다테 야경’이다.
동래성에는 人生門이 있고, 인생문 고개가 있다. 아마도 여기만큼 애환이 담긴 고개는 없을 것이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10년 후에 동래부사로 온 李安訥은 이런 시를 남겼다. 이안눌의 시비는 해운대 백사장에도 있다.
‘아비가 자식 위해 곡하고 자식이 아비 위해 곡하고
할아버지 손자 위해 곡하고 손자가 할아비 위해 곡하고
곡할 사람 있으면 그래도 슬프지 않네.
얼마나 많은데 슬픈 칼날 아래
온 가족이 다 죽어 곡할 사람조차 없는 집이’
1592년4월15일, 동래읍성 전투는 그야말로 격전이었다. 조선군 5천 명, 일본군 1백 명이 죽었다고 당시의 포르투갈 선교사가 기록했다. 노약자와 아녀자는 킬링필드를 피해 뒷산 고갯길로 넘어가 살았다고 하는데, 그 고개가 인생문 고개다. 왜란이 끝난 130년 뒤 성을 새로 쌓고, ‘인생문’이라는 성문을 세웠다. 지금의 성문은 2005년 복원한 것이다. 돌로 만든 성문 현판이 부산박물관에 있는데, 1731년 세웠던 표석이다. 이때 동래부사로 온 정언섭(鄭彦燮, 1686~1748)이 성내 외에 있던 유해들을 수습해 도시철도 동래역 부근에 6개 무덤을 만들고, 추모비를 세우고 매년 제사를 지냈다. 추모비는 ‘오호 이 여섯 무덤은’으로 시작하는데, 정언섭이 쓴 추모비 내용은 서늘하고, 비통했다. 동래정씨 후손답게 화지공원의 鄭廟 비문도 그가 섰다. 무덤은 일제강점기 때 망가뜨려서 한 개만 우여골절 끝에 금강공원에 옮겨졌다. 아이와 개, 고양이 할 것 없이 피 흘리는 것은 모두 죽였던 절대 절망 속에 삶의 끈을 놓지 않았던 인생문과 인생문 고개를 넘던 민초의 길이고, 부산정신이 담긴 고개가 인생문 고개다. ‘죽을지언정 길을 내 줄 수 없다’던 그 길에는 지금은 어지러이 꽃들이 피어 있다.
민락동 ‘백산고개’는 수영강교에서 민락 본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지금은 차도 다니지만, 예전에는 좁은 길이었다. 수영강에서 보면 마천루같은 높은 빌딩들이 있고, 동양 최대라는 신세계백화점과 영화의 전당이 보인다. 민락 본동은 널빤지 같다고 하여 ‘널구지 마을’이라고 불렀는데, 이게 민락동의 옛이름이다. 민락당산도 널구지 당산이다. 1950년대 사진을 보면 다닥다닥 초가집에 기와집이 드문드문 보인다. 백사장 가에는 작은 목선이 한가롭다. 이 마을을 품은 산이 ‘진조말산’인데, 여기에 할매 당산과 우물이 있다. 뒤로 玉蓮禪院이 있고, 산정에는 점이대가 있지만, 책에서는 점이대는 소개하지 않았다. 백산고개는 수영과 널구지마을 사이에 있다. 고개 그 아래가 포이진으로 좌수영성 예하 수군부대가 있었다. 岾夷臺는 이 수군부대에서 적을 매부리 눈으로 노려보던 곳이다.
‘만덕고개’는 동래와 구포를 잇는 지름길이다. 터널이 생기기 전에는 장꾼들이 이 길을 넘나들었다. 동래장은 2,7일에, 구포장은 3,8일에 섰고,지금도 그렇다. 물론 둘다 상설시장이 되었지만. 고려시대 절 만덕사에서 이름을 땄다. 산세가 깊은 덕에 임란 때는 여기로 피난와 살았으나, 먹고 살길이 막연해 대신에 산적들이 많았다. ‘만덕고개와 빼빼영감’전설도 아마 그래서 생긴 것일 것이다. 고개의 시작은 온천천 명륜역 근처 萬年橋에서 시작되었다. 동래우체국 근처에 우시장이 있었으니, 장꾼이 넘쳐났다. 롯데백화점 근처 유락여중 삼거리에서 올라오면 금정마을, 황전요양원으로 갈라지는 굴다리가 만덕고개 시작점이다.
만년교 근처에 있었던 萬年臺는 군사들이 훈련을 받던 곳이다. 만년교 이전에는 西川橋라는 나무다리가 있었다. 유락여중 앞 삼익아파트 자리는 1960년대 ‘조폐공사’와 ‘금성사’가 있던 야트막한 야산이었다. 근처에 장꾼들이 쉬어가던 주막이 있었다. 지금 금정마을 백숙집들이 전통을 잇고 있다. 비좁은 고갯길은 1962년 넓어졌고, 1963년 직할시로 승격하기 전까지 경남도였다. 이때 길을 넓혔던 경남도지사 양찬우 공덕비가 여기 어디 있었으나, 현재는 행방불명이다. 대신 만덕고개 정상 굴다리 옆에 ‘1965.2.6. 부산시장 김현욱’이라고 쓴 공덕비가 아쉬움을 달래 준다. 육군 소장 출신 양찬우가 고갯길을 넓혔고, 육군 중장 출신으로 ‘불도저’라는 별명을 가졌던 김현욱이 도로를 완전 포장 개통했던 것이다.
1973년에 만덕고개 굴곡의 세월에 종지부를 찍었다. 터널이 뚫리면서 남해고속도로와 연결된 것이다. 1972년 착공해 이듬해 11월, 2차선으로 개통했다.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에는 제2만덕 터널도 뚫혔다.
‘영선고개’는 영주동 고개다. 부산터널 앞에서 코모도 호텔, 메리놀 병원, 가톨릭센터를 지나, 보수동 책방 골목 앞까지 이어진다. 지금은 매립 되어 부산역이 생기고, 널다란 중앙로가 뚫혀 있지만, 옛날에는 달랐다. 영선고개는 최소 350년의 역사를 품은 고개길이다. 일본과 교류한 길이고, 전쟁 후에는 재기를 도모한 길이다. 내가 어릴 때는 이 고개에 재첩국 장사가 많았던 것을 기억한다. 이 길을 지나던 동래부사 행렬도가 남아 있는데, 동래부 동헌에서 출발한 행렬이 세병교, 부산진성을 거쳐 이 길로 해서 용두산 왜관으로 갔다.
영도에도 영선이 있지만 그 영선은 瀛仙이고, 영선고개 영선은 집을 수리한다는 營繕이다. 영주동과 대청동 사이에 있는 산이 營繕山이다.
원래 부산 왜관은 수정동에 있었다. ‘고관’이라 불리는 곳이다. 후에 용두산 일대로 옮겨갔는데, 그때가 1670년 무렵이니, 350년 전이다. 이때 길을 내면서 길가에 즐비한 나무들이 수난을 당했다. 모조리 베어져 왜관을 신축하는데 자재로 쓰였다. 집을 짓고 수리한다는 ‘營繕’이 그래서 생겼다. 나무가 베어지고 산이 흘리고, 흙과 돌은 바다를 매웠다. 부산역 일대 바다가 매워진 것이라는 것을 지금 젊은이들은 잘 모른다. 전쟁이 터지기 두 달 전인 1950년 4월 미국 메리놀 수녀회가 세운 병원이 ‘메리놀병원’이다. 박애를 실천하던 그들은 ‘산만디’로 몰려든 피란민들을 도왔다. 피난민이 오르내리며 재기를 실천하던 길이 영선고개다.
영선고개와 맞닿은 대청동은 일본과 연이 깊다. 왜관이 있었으므로, 일본에서 사신이 오면 연회를 베풀던 ‘宴大廳’이 있었고, 거기서 대청동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하기도 하지만, 그것과는 무관하다고 하나 모를 일이다. 일본인 거주지 왜관은 보안구역으로 일본인도, 조선인도 허락 없이는 드나들 수 없었다. 무단 출입을 막고자, 伏兵이란 감시초소를 두었는데, 東一, 東二, 西一, 西二, 南一, 南二 등 초소에 순번을 매겼다. 北伏兵은 지금 중구청 자리에 있었다. 중구청 있는 자리가 伏兵山인 것은 그것 때문이고. 남일이란 이름도 여기서 생겼다.
영도 청학동 ‘청학119안전센터’에서 영도구청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복징어 고개’다. 강원도에 오징어가 있다면, 부산에는 복징어가 있다. 복징어는 복어다. ‘복징어 알 먹고 중독사망, 복징어 중독’이런 제목의 기사를 1950년대 신문에서 종종 볼 수 있다. 복징어 고개는 복징포라는 포구에서 따왔다. 지금은 ‘태종로’라는 그럴듯한 이름이 붙어있지만, 반세기 전에는 생선비린내가 진동한 구불구불한 길이었다. 복징포는 미창석유에서 영도하수종말처리장 일대 해양로 바깥으로, 복어로 호가 났던 곳이다.
1760년대 최초로 청학동에서 고구마를 심었다. 종자 고구마는 조선 통신사였던 趙曮 선생이 대마도에서 가져왔다. 보릿고개를 근근이 넘기던 조선에 구황식품으로 각광받았다. 청학동 자연마을 이름이 조내기인데, 조내기 고구마는 씨알은 작지만, 타박한 밤고구마다. 명맥은 지금 ‘조내기 고구마(주)’가 이어가고 있다. 2013년에 우수중소기업으로 전국 10대 우수마을기업에 선정되기도 했다.
복징어 황토길은 1972년과 73년에 박정희 대통령 의지로 포장되고 넓혀졌다. 시청 자리였던 중앙동 롯데백화점에서 태종대까지 모두 12㎞였다. 자발적 참여를 내세워 도로공사비 8,700만 원을 민간에 떠넘겨 뒷말이 많았다. 공사가 끝난 뒤 박정희가 와서 치하하면서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영도구청 뒤 비탈길에는 박정희 친필로 ‘의지의 꽃길’이라는 돌 표지석이 서 있다. 원래 이 길은 낙락장송으로 우거져 있었으나, 지금은 김소운, 한찬식 시비와 장승 한둘이 외롭게 서 있고, 보도연맹 처형지라는 伸冤의 비도 있다.
신평 동매역 근처 동매산 기슭에는 옛날에 배나무가 많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당리초등학교에서 동매산을 넘어 신평초등학교로 가는 고개길을 ‘배고개’라고 한다. 동매산은 해발 210m에 불과하지만, 둘레길은 한 길이 한다. 다 둘러보려면 한 시간은 족히 걸린다. 평생 걸어도 다 걷지 못할 인생 고갯길 같은 동매산 둘레길은 끝없이 제자리로 돌아오도록 연결되어 있다. 오래전에 이 산을 오르면서 중턱쯤에 처가 성인 ‘분성배씨’ 묘소가 있던 것이 기억이 난다.
서구 대신동 꽃마을과 사상을 잇는 ‘구덕고개’는 1986년 구덕터널이 뚫리면서 왕년의 고개, 오래된 고개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 고개를 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도 고개는 고개다. 꽃마을에는 ‘九德嶺’이라는 표지석이 있고, 옛날에는 여기에 고갯길을 넘던 길손들에게 갈증을 풀어주던 주막이 몇 채 있었다. 20년 전만 해도 한때 100군데도 넘는 오리집이 성업 중이었으나, 지금은 장사가 예전만 못하다고 한다. 그것은 여기뿐이 아니라 산성마을도, 범어사 계곡도 같다. 꽃마을은 6.25동란으로 피난민이 정착하면서 사람 냄새가 났다. 그들은 먹고살기 위해 꽃을 심어 팔았다. 그래서 ‘꽃마을’이란 예쁜 이름을 얻었다.
구덕산 아래에는 수원지가 많았다. 동아대병원 자리도, 구덕초등학교 자리도 수원지가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수원지를 오염시켜버렸다. 피난민이 정착하면서, 1968년 식수 대신 홍수를 조절하는 댐이 되었다. 그런데 계곡이 가팔라서 비가 조금만 와도 댐에 물이 금방 찼다. 1972년 9월 14일 역대급 폭우가 퍼붓고, 둑이 무너지면서 댐 아래쪽 주민 60명이 죽고, 15명이 실종되는 참사가 벌어졌다. 동아대병원 뒤 ‘구덕수원지터’표지석에는 그날의 일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성고개’는 성으로 가는 길에 있는 고개다. 부산에 유일하게 이름으로 남은 성고개는 녹산에 있다. 나라를 지킨 결기와 비장함이 서린 곳이다. 조선 중종 대인 1485년 녹산 金丹串에 보성을 세운 것이 시작이다. 堡城은 鎭城보다는 작은 성으로, 산 아래 평지와 만나는 경계선을 따라 세운 것으로 왜구를 감시한 곳이다. 그런데 보성이면 군사가 지키던 성이라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보성 터에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거기에 1510년 삼포왜란 때 웅천성을 지원하기 위해 ‘금단곶 군사 100명이 출동했다.(發金丹串軍一百)’고 《중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웅천성은 진해 웅천에 있는 평지성이다.
부산은 남해안 변방답게 성이 아주 많다. 배산성, 기장산성, 반월성은 삼국시대 성으로, 배산성은 연산동 배산에, 기장산성은 기장 산성산에, 반월성은 기장 정관에 있다. 고려 시대 성은 동래고읍성, 동평현성, 기장고읍성, 갈마봉성, 구량동성이 있다. 조선 시대 성은 이보다 훨씬 더 많아 이곳 금단곶보성을 비롯해 동래읍성, 금정산성, 좌수영성, 부산진성, 다대포진성, 절영도진성, 포이진성, 가덕진성, 수정동과 괴정동의 목장성, 노포산성 등이다. 또 왜성도 많은데 증산, 자성대, 동래, 구포, 죽성, 임랑포, 죽도, 가덕도, 동삼동에 있다. 우리 성과 왜성의 차이점은 성벽이 비스듬하면 왜성, 직각이면 우리 성이다.
안평에서 1시간마다 다니는 버스를 타고 철마·정관을 가본 사람이라면 ‘갈치고개’라는 이름을 들어봤을 것이다. 안평저수지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기장이고, 왼쪽으로 가면 갈치고개를 넘는다. 지금은 산뜻하게 포장되어 있지만, 몇 년 전만 해도 비포장이었고 그전에는 오솔길이었다. ‘갈치재’는 ‘거칠재’의 방언이다. 갈치재는 갈치고개로 거친고개라는 뜻이다. 옛지도에는 盧峴이라고 나오는데, 노는 갈대다. 갈대가 갈치가 된 것이다. 고려와 조선 때는 기장현감 발령을 받으면, 이 고개를 넘었다. ‘盧峴嶺險隘十里’라고 지도 여백에 쓰였다.〈대동여지도〉와 비견되는 지도가 〈해동지도〉인데 보물 제1591호다. 대동여지도는 보물 제850호.
여기에 보면 조선팔도 군과 현을 그림처럼 그렸다. 여백에는 깨알 같은 한자로 정보를 요약했다. 갈치고개 노현을 비롯해 이천현, 비음현, 진현, 삼현, 우현 등이 그려져 있다. 조선시대 길은 지금과 어떻게 다른지 보여준다. 기장에서 외지로 나가려면 고개를 넘어야 했다. 외지는 동래부와 좌수영, 양산과 울산이다. 이천현은 동래 가는 길이었고, 노현과 비음현은 양산 가는 고개다. 삼현과 우현은 좌수영 고개였고, 화철령은 울산 가는 고개였으며, 도마현과 진현은 양산·울산 접경지에 있다.
‘새띠고개’는 송도 윗길이다. 송도 아랫길이 생기기 100년 전, 200년 전부터 불리던 이름이다. 새띠는 초가지붕을 이는 ‘삘기’를 말한다. 그래서 조선팔도 곳곳에 새띠마을이 있고, 새띠고개가 있다. 일본인 면서기가 내팽개친 순우리 말 지명이다. 송도 윗길의 우아한 표현은 ‘천마로’다. 조선시대 말까지 천마산 이쪽저쪽에 목마장이 있었다. 그래서 천마다. 목마장이 영도로 옮겨가면서 목마장 대신에 풀 草를 써 초장동이 되었다. 천마산 꼭대기에는 너른 바위에 천마 발자국이 있어 전설을 뒷받침한다.
부산에 목장이 있었다는 것은 부산 역사의 단면이기도 한데, 말을 키운다는 것은 기피 대상 1호였다. 처음에는 다대강변에서 천마산에 이르는 널따란 괴정 목장을 영도로 옮겼고, 영도 목장은 해군부대가 생긴 1881년 이후 송도 모지포로 옮겼다. 송도가 조선 마지막 국모장이 되면서,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보내는 소가 건강한지 검사하던 ‘혈청소’가 들어섰고, 이후 국립수의과학검역원으로 바뀌며 옮겨져 혈청소 자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모지포 마을만은 그대로다.
조선의 말은 애물단지였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말에 관한 일화로 下馬, 犯馬, 逐馬라는 것이 있다. 이 세 가지 이름이 조선 사회를 때로는 서늘하게 때로는 공분을 사게 했다. 下馬는 말에서 내려서 예를 갖추라는 엄명이다. 왕이 계신 궁궐, 공자를 모신 향교, 큰 절, 원님이 계신 동헌, 명망가의 묘소 앞에 하마비가 있다. 부산에 남은 하마비는 범어사, 동래향교, 수영사적공원, 하마정에 남았다. 犯馬는 하마와 반대말이다. 말에서 내리지 않고 그냥 졸다가 지나쳤거나, 급하다고 지나쳤거나 상관없이 잡혀와 경을 쳤다. 임금의 명을 전하던 내시조차 범마를 하면 며칠씩 잡혀 있어야 했다. 지킬 것은 지켰던 정신이 조선의 범마다.
축마는 국마장에 대한 반감이다. 탐관오리들이 국마장을 빌미로 민간 소유 땅을 가로챘고, 말은 울타리를 넘어 민간의 작물을 망쳤다.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다. 국마장에 있던 괴정에서 불만을 토로하다 맞아 죽은 일도 기록에 있다. 국마장이 타지로 옮겨가면 감격해서 축마비를 세웠다. 남해군 이동면에는 축마비가 3개나 있다고 하는데 아직 가 보지는 못했다.
‘냉정역’이 있는 곳이 ‘냉정고개’였다는 것을 실감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100년 전 여기는 고개가 있었고 고개를 넘어 부산장, 하단장, 동래장으로 가던 사람들에게 물좋은 샘이 있어 냉정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냉정은 물이 청량하고 물맛이 좋기로 유명한 곳 중의 하나라고 택리지에 기록되어 있다. 물이 좋아 쉬가가기 좋은 곳이었기에, 조선시대 여기 고개에서 말이 쉬어갔다. 고개 너머 태화고무가 있던 일대가 마철리였다. 말이 쉬어가고 말에 자갈과 말발굽을 갈아 끼어던 마을이란 것으로 태화고무 상표가 말표였던 것과 무관치 않다.
냉정고개를 넘으면 황령산 꼭대기가 보인다. 황령산 꼭대기에는 逢火臺가 있다. 세종 때 쌓은 봉수대다. 봉수는 위급할 때는 물론이고 평시에도 봉홧불을 피웠다. 날마다 피어오르던 봉홧불은 냉정고개를 넘던 장꾼들에게 희망의 등불이었을지 모른다. 봉화는 부산시민에게는 유별나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 때 맨처음 봉화를 올린 곳도 부산이다. 부산에는 현존하는 봉화대가 11곳이나 있다.
연산동 ‘배산고개’는 토곡 연천초등학교에서 망미동 배산초등학교로 이어지는 길이다. 동래에서 수영으로 갈 때는 이 고개를 넘어야 했다. 물론 지금은 번듯한 토곡로가 뚫려있다. 토현은 우리말로 토끼고개, 톳고개다. 동래에서 수영으로 가려면 온천천의 돌다리 利涉橋를 지나 한참 내려와 배산고개를 넘어야 한다. 배산고개가 土峴이다. 지금은 당연한 것처럼 동래현이 수안동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옛지도를 보면 망미동 일대를 ‘古東萊縣址’라고 적혀 있다. 고읍성이란 것이다. 조선시대 이전에는 망미동이 동래였고, 동래부 중심이 망미동이었다. 부산병무청 안에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되는 우물터와 제방 흔적이 있어서 2003년 이를 복원해 두고 있다. 여기서 가까운 수영강변에는 고려시대 鄭瓜亭이 있는데 이것도 관련 있음을 말해준다.
오시게 시장으로 잘 알려진 ‘오시게 고개’는 지금은 ‘서동고개’로 불린다. 부곡동에서 동상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동상동은 영도 동삼동과 헷갈리기도 하지만, 서동과 금사동, 회동동을 합쳐 부르는 이름이다. 오시게라는 이름을 먹물 먹은 사람은 ‘烏峴’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까막고개’에서 따온 것이다. 고갯길에 까마귀가 유독 많았다고 한다. 까마귀는 까치와 달리 사람들이 꺼린다. 그만큼 오시게 고개 일대는 민가가 적었다.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서동(28), 금천동(11), 사천동(21), 회천동(19), 동대동(8)을 합쳐서도 100가구가 안 됐다.
오시게 고개를 넘는 것은 대체로 동래장에 가기 위해서였다. 2,7일마다 장이 서면, 밭작물이나 회동천에서 잡은 물고기, 약초 등을 팔러 동래로 넘어왔다. 그러나 1937년 동래시장이 상설시장으로 바뀌면서 2년 동안은 5일장과 상설시장이 공존하도록 했다. 그것은 뜨내기 장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허가받은 상설시장 상인들에게 그들은 눈엣가시였다. 장터에서 밀려나자 가까운 곳 오시게 고개에 시장이 생긴 것은 당연지사. 고개에 생긴 시장이 1970년대까지 이어졌다. 그렇지만 공단이 들어서고 마을이 커지면서 밀리고 밀려 부곡동까지 밀렸다. 1960년대 말부터 도시 정비와 환경정화 일환으로 영주동 등지에 살던 고지대 주민들을 금사동과 반송동으로 이주시켰다. 동네가 뒤바뀐 것이다.
오시게 시장은 제법 잘 나갔다. 온천장 입구까지 장터가 되고, 떠밀려 다닐 정도였다. 도심이 확대되면서 밀리고 밀려 구서동 태광산업 건너편으로 갔다가, 1994년부터 지하철 1호선 종점인 노포역 맞은편으로 옮겨져 현재에 이른다. 어디로 가던지 오시게 시장은 오시게 시장이다.
다음은 동상동 지명에 대해서다. 서동은 동상면 서쪽에 있다고 붙여진 지명이다. 동상면은 동래 동쪽에 있는 해운대 일대로 상하로 나누면서 동상면, 동하면이 되었다. 1904년 발간된 〈동래군지〉따르면, 동하면은 재송동, 우동, 중동, 좌동. 동상면은 명장동, 서동, 오륜동, 석대동, 반송동, 반여동이다. 그래서 서동은 西洞이었으나 지금 書洞으로 쓴다. 왜 그럴까? 여기에도 사연이 있다. 기장군과 양산군 일부가 동래군에 편입된 1914년 동상면이 동래읍에 편입되면서, 면사무소가 書堂으로 바꿨다. 당시 동상면장이 애향심을 발휘해 서쪽에 있는 동네라는 西洞을 書洞으로 바꿨다. 그쪽에 사는 사람이라면 이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양정에 ‘모너머고개’가 있다. 하마정에서 부전역으로 가는 거제로의 ‘東萊府使 宋象賢公 銅像’이 있는 곳이 예전에는 제법 높은 산이었고, 고개였다. ‘모너머’는 ‘못 넘어’보다 다급하고, 현장감 있게 들린다. 높이 50m 정도였지만, 엄연히 고개로 馬比峴이라는 이름도 있었다. 마비현은 국마장으로 가는 고개라는 것이다. 오가는 장꾼이 많았으니 도적도 도사렸다. 그래서 넘기 힘든 고개, 못 넘는 고개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이곳이 평지가 된 것은 1909년, 그해 8월에 착공해 11월에 私鐵인 부산궤도가 생기고 증기기관차가 부산진과 동래를 오갔다. 이 해에 광무교가 놓이고, 모너머 고개는 허물어졌다. 이어 1915년에는 온천장까지 전차가 다녔는데, 궤도전차는 1968년에 사라졌다.(사실 모너머보다‘모너미’라고 불리는 고개가 내가 알기로는 전국에 많다)
부산에는 浦가 많다. 구포, 전포, 다대포, 석포, 덕포 등이다. 포구라는 뜻으로 순우리말로는 ‘개’다. (내 고향 남지도 옛날에는‘웃개’라고 했는데, 위쪽에 있는 포구라는 뜻이다) 개는 고어도, 사투리도 아니다. 갯벌, 갯가, 갯바위, 갯장어 등등이 다 개다. 국어사전에는 ‘강이나 하천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이라고 했다. 갯바위가 많기는 하나 석포는 좀 다른 것 같다. 돌로 쌓은 성이 있어서 석포라고 한 것이다. ‘석포고개’는 부산박물관에서 남광시장을 지나서 홈플러스 감만점까지 가는 고개를 말한다. ‘목마성 또는 석성’은 국마장이었다. 말을 키우기 위해 쌓은 성으로, 전쟁과는 관련이 없다.
석포고개는 이뿐 아니고 용당쪽으로 나 있기도 하다. 한때 부산을 대표하는 석포로 가는 고개. 지금 이 돌개고개는 유엔평화로이고 석포로이다. 2㎞가 채 안 되지만, 대형아파트가 들어서서 버스 정류소가 4군데나 있다. 고개 만디에 있는 ‘남광’골목시장은 석포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 일신기독병원 설립자인 호주 멕켄지 선교사가 1909년 세운 한센병 전문 치료병원인 성애원이 여기 있었다. 1935년 이들을 소록도로 내쫓고 병이 나은 음성환자는 오륙도 용호농장으로 보냈다. 그 후 남광학원으로 아동보호센터가 되었다가 1970년 노포동으로 옮겨가면서 남광시장으로 바뀌었다.
황령산에서 용호만으로 흐르는 하천에 돌, 자갈이 많아 돌개, 즉 석포라고 불렸거나, 말목장으로 돌성이 있었거나, 석포는 옛지명에 꼭 나온다. 이 석포에서 용호동 남부면허시험장까지 목책을 두르고, 군마를 방목해 키웠다는 것을 아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다. 석포 인근 용호만 매립지에는 盆浦가 있다. 이 일대는 갯가로 염전이 있었다. 화분 같은 큼직한 질그릇에 바닷물을 채워 끓여서 만드는 소금이었다. 소금 만드는 그릇을 盆介라고 했고, 토박이들은 분깨라 한다. 햇볕에 말리는 천일염이 아니라 구운 소금, 즉 煮鹽이다. 세종도 이 자염을 상복했다는 기록이 있다. 분포고개라고도 있는데, 용호동과 용당을 잇는 동명불원 옆으로 난 고개다. 고개를 용당사람들은 용당고개, 용호동 사람들은 용호고개로 부르는데, 황톳길이었으나, 1970년대 동명대학이 생기면서 포장도로가 되었다.
부산에도 ‘아리랑고개’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영도 ‘청학고개’가 바로 아리랑고개다. 아리랑고개는 보통명사나 다름없다. 아리랑은 특정 지역을 말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다. 까칠하고, 가파르고, 까탈스러운 고개가 아리랑고개다. 恨이 서려 부풀고, 한을 삭여서 아리랑이된다. 청학, 봉래 이름은 고운데, 지형은 險隘다. 影島는 加德島 다음으로 큰 섬이지만, 일제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수군부대가 주둔했고, 망아지를 키우던 곳이다. 거기가 구룡동이다. 駒가 망아지 구다. 망아지는 우리말로 아미르다. 동삼혁신지구 갈맷길 인증부스가 있고, 그곳이 ‘아미르공원’이다. 동삼동 일대 구룡동은 절영도진을 제외하면 인가가 제일 많았다.
동삼동에는 패총전시관이 있다. 신석기 시대 유물이 나온 곳에 지었다. 영도다리쪽의 영선동에는 도선장이 두 군데 있었다. 봉래동, 대평동 다 영선동이었다. 도선장 건너편은 육지인 롯데백화점 근처였다. 예전에는 자갈치 시장이 지금의 장소가 아닌 영도대교와 중앙동 사이에 있었다. 해안가 모두 자갈이 많았다. 지금 부산데파트 자리는 동광시장이었다. 도선은 2000년대까지 다녔다. 일제 때는 일본인들이 도선을 운영했고, 승객 대부분은 일본인이었다. 도선을 타는 이유는 저마다 달랐다. 영도다리가 막혀서, 연인과 바람 쐬기 위해, 장사꾼이 짐을 들고 도선을 탔다.
1934년 영도다리 생기기 전까지 영도에서 부산으로 가는 유일한 통로가 도선이었다. 동삼동에서 청학동으로 해서 영도 뱃머리로 이어지는 봉래산 산길이 아리랑고개다. 청학동 사람들에게 고개는 고됐고, 동삼동 사람들에게는 더 고됐다. ‘눈물고개’라는 말이 실감이 났다. 고개가 붐비는 날은 장날이었다. 부산데파트 자리에 있던 동광시장 어물전까지 가기도 했지만, 부산장을 가려면 새벽부터 서둘러야 했다. 아무리 고돼도 아리랑 한 구절로, 한숨 한 번으로, 부산사람 기질이 발휘됐다.
이제 부산의 지명에 대해 보자. 부산이 점점 커지면서 西面은 西上面, 西下面으로 나뉘었고, 백사장에 위치한 沙面은 沙上面, 沙中面, 沙下面으로 나누었다. 그런데 사상과 사하는 지금도 있지만, 사중은 어디일까? 구한말 제작된 일종의 ‘부산백서’(1904년 제작, 동래군 家戶案)에 상세히 나온다. 사중면은 모두 일곱 개로 초량동 216호, 영주동 95호, 절영도 160호, 청학동 6, 상구용동 18, 영선동 10, 하구용동 28호라고 가구 수까지 나와 있다. 사중면은 실제로는 모레와 상관이 없었다.
구포에 ‘말등고개’라는 고개가 있다는 것은 처음 듣는다. 소 잔등에 얹는 안장처럼 생겨서 ‘질매재’라고도 한다는 데, 나도 수없이 넘었을 이 고개가 말등고개라는 것은 몰랐다. 말등고개는 사통팔달 지점에 있다. 고개 위에서는 네 갈래로 갈린다. 바로 가면 구포의 주산인 주지봉이고, 모라쪽 운수사로 가는 길과 만덕 가는 길, 구포시장으로 내려오는 길이 있다. 장꾼은 당연히 이 고개를 넘었고, 운수사 가는 신도들도 이 고개를 넘었다. 운수사 가는 오솔길에는 누가 돌탑을 쌓아놓아 옛날 성황당처럼 소원을 기원하도록 하고 있다.
감동진은 구포의 옛 이름이다. 대리는 구포에서 가장 컸던 마을이다. 오래된 당산나무가 있었으나, 2013년 인가 말라 죽었던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 한적이 있다. 대리에서 시작한 구포 농악은 지금도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말을 타고 넘던 고개라 말등고개라고 한단다. 운수사로 가보자.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 운수사 대웅전이다. 범어사 일주문인 조계문 또는 장안사 대웅전으로 아는 사람도 있으나, 장안사 대웅전은 1657년 중수했고, 범어사 조계문은 1694년, 운수사 대웅전은 1655년 중수했다는 상량문이 발견되었다. 운수사에 가려면 반드시 걸어서 가는 것이 좋다. 차를 타고 가면 길가에 현수막과 현판으로 새긴 법문, 하루 공부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부산에서 유명하고 사람들도 많이 넘는 고개가 대티고개다. 대티터널이 생기기 전에는 서구에서 사하로 가던 유일한 한 고개였다. ‘대티’는 ‘대치’라고 쓴다. 큰大 언덕峙. 우뚝 솟은 언덕, 높은 고개라는 뜻이다. 서대신동과 괴정을 잇는다. 이 고개에는 부산의 애환이 많이 서려 있다. 1951년에 세운 위생병원은 서울위생병원 부산분원으로 시작했다. 1954년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고, 2015년 ‘삼육부산병원’으로 이름이 바꿨다. 고갯길은 처음부터 경사가 급하다. 위생병원을 지나면서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고개 너머 괴정 일대에 말을 관리하던 國馬場이 있었다. 동주대학 뒷산에 돌담이 비교적 온전히 남아 있는데 목마장 돌담이다. 이 일대는 한 때 하수처리장이 있어 고개를 넘을 때 구린네가 진동을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구린네는 잊고 싶은 냄새기 때문일까? 1930년대 최초의 부산 분뇨처리장은 남부민동에 있었다. 인구가 늘자 1936년 동래군의 초읍, 가야, 당감, 전포가 모두 부산부에 편입되고 분뇨처리장에서 쏟아지는 눈초리가 하루가 따갑게 매서웠다. 더 외지고 너른 곳으로 옮겨야만 했다.
대티고개 너머가 대상지였다. 1937년 부산부는 분뇨처리비 38만 엔을 조선총독부에 요청했고, 승인받았다. 1938년 설치가 완공되고, 이듬해부터 운영에 들어갔다. 지난 여름에도 친구들과 여기를 트레킹하면서 보았지만 여기가 분뇨처리장이 있었다는 사실은 몰랐다. 말 그림이 아름다운 천마교가 있을 뿐이었다.
‘망미고개’는 내게도 인연이 깊다. 부산에 처음 내려와 고개 만디에 있던 ‘동래경찰서 연산3파출소’에서 근무를 시작하고, 우진제약 옆에 있던 어느 양옥집(양씨) 셋방에서 신접살림을 처음 시작했기 때문이다. 망미역에서 배산역까지가 망미고개다. 양정에서 수영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내 님이 그리워 우나니 산 접동새 나와 비슷하오이다’고 한 천년 전 선비 시인도 넘었던 고개다. 그의 이름은 鄭敍, ‘정과정곡’이 이 노래다. 고려가요 중 유일하게 저자를 아는 가요가 정과정곡이다. 지금 정과정이라는 정자는 망미동 코스트코 뒤에 있고, 양정에 있는 정묘에는 동래정씨 2대조인 정문도가 정서의 증조할아버지 묘소다. 망미동은 동래부의 중심이었으니, 정서는 아마도 수없이 이 고개를 넘었을 것이다.
조선 8대 명당 중의 하나로 꼽히는 정묘는 조선 시대 전주이씨, 안동김씨 다음으로 정승을 많이 배출했다. 명당 덕에 묘소 양쪽에는 800년 된 베롱나무 두 그루가 당당히 위풍을 자랑한다. 정서는 동래로 유배와 임금을 그리는 정과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정과정곡을 지었다. 모르긴 해도 망미고개를 수도 없이 넘었을 것이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동래정씨라 생전에 모시고 이 묘소를 참배한 기억이 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