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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위를 걷는 예수
요 6:16-21
16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17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18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19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20 이르시되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대
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요 6:16-21 / [물위를 걸으시다;마14:22-27,막6:45-52] 날이 저물자 제자들은 바닷가로 내려가서 17) 배를 타고 바다 건너편에 있는 가버나움을 향해 떠났다. 날이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께서는 아직 제자들에게 돌아오지 않으셨다. 18) 그런데 갑자기 강풍이 휘몰아치면서 물결이 사나워졌다. 19) 10여 리쯤 갔을 때에 예수께서 물위를 걸어 배 있는 쪽으로 오셨다. 제자들이 이 광경을 보고 무서워하자 20) 예수께서는 `나다. 무서워하지 말라' 하고 말씀하셨다. 21) 그제야 마음이 놓인 그들은 기쁜 마음으로 예수를 배 안에 모셔 들였다. 배는 어느새 그들의 목적지에 다다랐다.
오병이어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채 열광하던 무리와 제자들을 떠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합류하시는 장면입니다.
파도가 일어나더라(16-18) 제자들은 예수님의 지시대로 배를 타고 벳새다 건너편 가버나움으로 출발합니다(마 14:22). 이미 어두워진 때에 설상가상으로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저녁이 되면 산 위에서 아래로 불어오는 찬 공기 때문에 종종 예상치 않은 돌풍이 분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자들 중에는 노련한 어부 출신이 많았기에 자신들의 힘으로 풍랑을 헤쳐 나가려 부단한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내 힘으로 되는 것보다 되지 않는 일이 더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이 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예수님과 덧대어 사는 은혜입니다. 그 은혜 안에서 문제가 문제로 여기지지 않게 되는 신비가 복음의 능력입니다. 복음의 능력 안에서 바울은 죽음의 상황에서도 의연할 수 있었고(딤후 1:12) 베드로는 불같은 연단과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담대한 권고를 할 수도 있었습니다(벧전 4:12-14).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는 것, 우리가 예수님을 사모하여 기다리는 것입니다.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19-21) 주님이 반복해서 말씀하시던 것 중에 하나가 “내가 너희를 고아처럼 내버려 두지 않겠다”라고 하신 약속입니다(요 14:18). 제자들이 풍랑에 악전고투를 하면서 5km 가량을 항해하였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가야할 길을 가려는 제자들을 주님이 내버려 두실 리가 없습니다. 풍랑에 고생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다가오신 것입니다. 풍랑이 몰아치는 바다 위를 걸어오는 형체를 보고 두려워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모든 고난과 공포를 큰 기쁨으로 바꾸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만나는 것은 더욱 자연스럽고 마땅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풍랑으로 위급한 배에 오르자 모든 것은 끝이 납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가려던 땅에 이르렀다”는 기술과 같이 모든 것이 기쁨 중에 완료될 것입니다. 하루의 삶을 이러한 믿음 안에서 오늘 하루도 힘차게 열어 맞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와 같이 육지와 바다에서의 두 표적은 생명의 양식을 제공하시는 풍성한 예수님과 자신의 백성을 지키고 보호하시는 구원자이신 주님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적용: 곤경에 처한 시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시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시간에 정확히 찾아오십니다. 주님은 스스로를 알리셨고 두려움을 떨쳐버리게 하셨으며 바다를 잔잔케 하셨습니다. 곤경 속에 있는 나, 폭풍 속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들으며 바다 위를 걸어 오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중병에 걸려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는 마취에서 깨어나자마자 고통을 호소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때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간호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잠깐만이라도 불평과 신음을 멈춰보세요. 그러면 당신이 아직도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거예요.” 그제야 그 환자는 “내가 느끼고 있는 이 고통은 아직 나에게 생명이 있다는 증거입니다.”라고 고백하며 자신이 살아 있음을 감사했다고 합니다. 살아 있는 사람만이 고통을 느낄 수 있습니다. 몸이 아파 병상에 누워 있을 때, 사업에 실패해 벼랑 끝에 서 있을 때,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 마음이 아플 때 감사하십시오. 당신이 아직 살아서 이런 고통을 당하고 있음을 말입니다.<오인숙/ 교단작가 >
< 설 교 >
삶의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주님
요 6:16-20 / 이동휘 목사
1. 예수께서 오병이어,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 한 어린아이의 도시락 한 개로 2만 명이 넘는 무리들을 배불리 먹이는 기적을 베풀고 나신 후, 그 무리들을 집으로 모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미리 가버나움으로 보내시고 자신은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가셨습니다. 제자들은 배를 타고 출발했습니다. 날은 이미 저물었는데 갈릴리 호수 한 가운데 이르게 되었을 때, 뜻하지 않은 큰바람이 불어 풍랑을 만나 제자들이 큰 역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온 힘을 다해 배가 뒤집히지 않도록 애를 썼지만 어찌 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새벽 4시경이었습니다. 기도하러 산에 가셨던 예수께서, 풍랑을 만나 위경에 처한 제자들의 모습을 보시고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다가 그대로 지나가시려하셨습니다. 바로 그때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서 제자들은 유령인 줄 알고 모두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쳤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즉시 그들에게 “나다. 무서워하지 말고 안심하여라.” 하시면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자 곧 바람이 그쳤습니다. 제자들은 너무 놀라 어쩔 줄 몰랐습니다. 몇 시간 전에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서도 물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의 능력과 권능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둔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2.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예수께서 산으로 기도하러 가셔서 기도하시던 중 새벽 4시경, 풍랑을 만나 위경에 처한 제자들의 모습을 보셨다는 것입니다. 십리도 더 멀리 떨어져, 육안으로는 결코 볼 수없는 바다 한 가운데 위경을 만난 제자들을 보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한시도 제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으시고 지켜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광풍노도에 시달리던 그 자초지종을 예수님의 사랑의 눈초리는 떠나지 않으시고 항상 함께 하고 계셨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들을 향해 물위로 걸어 가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어찌 제자들을 잊으시겠습니까? 예수께서 어찌 제자들에게 무관심하시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광풍으로 고난당하는 인생들을 찾아 세상에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께서는 여러분 인생의 고난에 결코 무관심하지 않으십니다. 예수께서는 어디서나 언제나 여러분을 살펴보고 계십니다. 칠흑같이 깜깜한 바다의 풍랑 속에서도, 결코 시선을 놓치지 아니하는 분이십니다. 예수께서는 심지어 우리의 생각도 아십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슬픔도 모두 아십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당하는 모든 어려움을 다 아십니다. 예수께서는 거기에서 기도하고 계셨으며, 그들은 바다에서 풍랑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마음은 그들을 걱정하고 계셨으며, 그래서 마침내 예수께서는 그들에게로 오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지금도 우리가 곤경에 처해 있을 때 우리가 필요로 하는 도움을 틀림없이 우리에게 베푸시려고 사랑으로 우리를 살피시는 가운데 우리에게로 다가오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경험한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시139:1-10) (1)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2)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5)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6)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7)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10)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B.C. 853년경, 남유다 왕 여호사밧이 시간을 내 사돈인 북 이스라엘 왕 아합을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제안을 받게 됩니다. 아람과의 2차례에 걸친 전쟁으로 힘들어 하는 아합이 함께 아람을 정복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여호사밧 왕은 강력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단되기 전에는 한 민족이었고, 게다가 당신과 나는 사돈지간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동맹군을 만들어 아람을 정복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제의를 두고 여호사밧 왕은 사돈의 제안을 쉽게 거절하지는 못하고, 하나님을 잘 섬기는 통치자여서 그 전쟁 여부를 하나님께 물어보도록 하자고 아합에게 말합니다. 아합이 선뜻 그 뜻을 받아들여 선지자 400명쯤을 모아놓고 전쟁 여부를 물어봅니다. 그러자 그 400명의 선지자들이 만장일치로 전쟁에 나가면 반드시 승리하게 되리라고 예언합니다. 그러나 이 선지자들은 모두 어용(御用)으로 거짓 선지자들이었습니다. 참된 선지자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아합의 탄압을 피해 모두 피해버리고 없었습니다. 만장일치로 전쟁 승리를 예언하자 여호사밧이 수상이 여겨 물을 만한 다른 선지자는 없느냐고 묻습니다. 이에 아합이 미가야라는 한 선지자가 있긴 있는데, 그는 길한 일은 예언하지 아니하고 흉한 일만 예언하기 때문에, 자신이 아주 미워하는 기분나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여호사밧 왕은 ‘그런 말씀을 마소서’라며 미가야 선지자를 부를 것을 요청합니다. 급히 불려온 미가야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봇의 포도원을 권력으로 강탈하고 나봇을 죽인 아합 왕과 이세벨, 그리고 그에게 속한 친아합계 사람들을 모두 죽이려고 작정하시고, 아합에게 항상 길한 예언만 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입에 거짓의 영(靈)을 담아 예언하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몹시 기분 잡친 아합이 미가야 선지자를 감옥에 가두고 죽을 정도로 굶겼습니다. 여호사밧 왕은 황당했지만 사돈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아람과의 전쟁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미가야 선지자로부터 불길한 예언을 들은 아합은 잔꾀를 부려 자신은 방탄복에 사병 복장으로 위장하고, 여호사밧 왕을 총 지휘하는 사령관으로 내세워 자신의 왕복을 입혀 출정(出征)했습니다. 적군이 상대방 왕을 향해 집중 화살을 쏠 경우, 자기는 살고 사돈 여호사밧 왕은 죽어도 좋다는 심산이었습니다. 마침내 전쟁에 나갔는데 적군 아람 왕은 지휘관 30명을 불러 명령합니다. 모든 화력을 상대방 왕을 향해 집중 사격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략에 따라 적군 병사들이 북 이스라엘 왕으로 복장한 여호사밧을 향해 집중 화살 공격을 감행합니다. 이에 기겁하여 여호사밧이 소리지르자 그가 아합 왕이 아님을 알고 공격을 중단합니다. 그리고 적병 하나가 무심코 활을 당겼는데, 그 화살이 사병 복장으로 위장한 아합 왕의 방탄복 사이를 꿰뚫고 가슴에 박혔습니다. 아합 왕은 피를 흘려 병거 바닥이 흥건하게 되었고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그 시체를 치우고 피에 젖은 병거를 사마리아 못에 씻어는데 그 핏물을 개들이 몰려와 핥았습니다. 그 못은 창녀들이 목욕하는 곳이었습니다. 이를 두고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왕상22:38) (38) 그 병거를 사마리아 못에서 씻으매 개들이 그의 피를 핥았으니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거기는 창기들이 목욕하는 곳이었더라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는 말씀은, 아합이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강탈한 범죄를 두고 하신 말씀, 열왕기상21:19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왕상21:19) (19) 너는 그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고 하셨다 하고 또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하였다 하라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죽일 자를 죽이고 살릴 자를 살리기 위해, 아합이 아무리 방탄복을 입고 사병으로 위장했을지라도 그 모든 것을 보시고, 랜덤으로 날아간 적병의 화살 하나가 오늘날 스마트 미사일처럼 아합을 찾아 추적하여 그 방탄복 사이를 뚫고 피를 흘려 죽게 만드신 것입니다. 한편 아합 왕과 함께 전쟁에 참여했다 죽을 뻔 했던 여호사밧 왕이, 그야말로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오게 된 그 순간을 성경에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대하18:31) (31) 병거의 지휘관들이 여호사밧을 보고 이르되 이가 이스라엘 왕이라 하고 돌아서서 그와 싸우려 한즉 여호사밧이 소리를 지르매 여호와께서 그를 도우시며 하나님이 그들을 감동시키사 그를 떠나가게 하신지라
여호사밧 왕이 사돈집을 방문했다 뜻하지 않게 아합 왕과 함께 전쟁에 나서, 하마터면 억울하게 죽을 수밖에 없는 위기에 처했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여호사밧을 도우셔서 그의 생명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 여러분을 하나님께서 눈동자처럼 지켜 보고계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이 여러분의 뜻과 달리 그런 시련에 부딪칠 때도 예수께서는 지켜보고 계시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하신다.’(God with us)는 것입니다.
(마1:23)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여러분이 어떤 삶의 풍랑 속에 있든 예수는 항상 여러분과 함께 계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오늘 본문은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 위경에 처해 있을 때, 물위로 걸어오신 예수님을 배에 영접하자 그 거센 풍랑이 잔잔해지고 목적한 항구에 안전하게 도착하게 된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자연을 다스려 물위로 걸어가시는 표적을 보이신 목적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중심으로 영접하게 되면 일었던 풍랑이 잔잔하게 되고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20:30-31을 보겠습니다.
(요20: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요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신앙 가운데 빠져 생명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삶의 풍랑을 겪게 되지만 예수를 배에 영접하게 되면 인생의 진정한 목적지에 안전히 도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인생은 일엽편주를 타고 언제 끝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넓은 바다를 쉬임없이 항해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진정 세상은 바다며 인간은 항해자이며 인생은 항해입니다. 항해를 하다보면 뜻하지 않는 시기에, 예기치 않는 장소에서 이유도 알 수 없는 폭풍과 거센 파도에 휩쓸려 고생할 때가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석양이 물드는 잔잔한 저녁 바다, 혹은 힘차게 태양이 솟구쳐 올라오는 고요한 아침 바다는 참으로 멋있습니다만 별안간, 그것도 한밤중에 몰아닥치는 폭풍과 파도는 정말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은 개인생활이나 가정생활 혹은 신앙생활에서 순풍의 돛을 달고 평탄하게 달릴 때도 있지만 때로는 예기치 않게 감당할 수 없는 삶의 풍랑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과 죄로 인하여 만나는 풍랑도 있습니다.(요나서 1:11-15) 하나님의 뜻과 상반되는 죄악의 길로 가는 인생들에게 거센 풍랑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하나님 보다 인간의 경험을, 진리의 말씀보다 재물을 더 의지할 때 찾아오는 풍랑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호송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배가 항해 도중 큰 풍랑을 만나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이 있을 것을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미리 알고 항해를 지연할 것을 건의했습니다. 그러나 선장과 선주는 항해를 늦추게 될 경우 입게 될 경제적 손실을 염려한 결과 자신들의 경험과 실력을 믿고 항해를 강행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말대로 그들은 도중에 큰 풍랑을 만나 많은 재산의 손실을 입고 생명의 위험까지 겪게 됩니다. 결국 그 큰 배와 배에 실었던 모든 화물을 잃고, 사람들만큼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 생명만을 겨우 건지게 되었습니다.(행47장) 한번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저편으로 가시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배에 타시자 곧 주무셨습니다. 그런데 바다 한 가운데 이르렀을 때, 갑자기 큰 광풍이 일어 물결이 뱃전에 부딪쳐 물이 배에 들어와 침몰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께서는 아무런 일 없는듯이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풍랑을 만나서 생명의 위협을 당하고 두려워하던 제자들은 배에서 주무시던 예수님을 원망하며 부르짖었습니다.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이에 예수께서 일어나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를 향해 명령하셨습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예수의 말씀대로 풍랑이 그치고 아주 잔잔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막4:40) (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이처럼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있었음에도 풍랑을 만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대부분이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그리하여 바다생활에는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점점 거칠어져 가는 거센 풍랑을 어찌할 수 없어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험한 세상 속을 살아가면서 삶의 경험들을 통해 삶의 전문가들이 되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부들도 큰 풍랑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듯이, 아무리 풍부한 경험이 있어도, 아무리 많은 지식이 있어도, 아무리 높은 권세와 넘치는 재물이 있어도, 어찌할 수 없는 격렬한 풍랑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자신에게 아무런 잘못이나 범한 죄가 없어도, 이유를 알 수 없이 숙명적으로 풍랑을 당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만유의 주이신 예수는 모든 인생의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죄값으로 오는 풍랑이든 세상을 의지하다 만난 풍랑이든 어떤 풍랑도 예수는 잔잔케 하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인생의 거센 풍랑이 여러분을 위협할 때, 예수님을 찾으시고 그 분을 인생의 배, 삶의 중심에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처럼 예수님과 함께 배에 타고 있었음에도 믿음이 없어 큰 풍랑을 만나 위경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여러분을 부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예수는 제자들을 떠나 보내고 무관심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말하자면 우리를 관람석이나 울타리 밖에서 그저 보고 계시는 예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힘이 모자라고 우리 스스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때에 예수께서는 사랑의 눈빛으로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의 목적지에 무사히 이르도록 위로와 용기를 불어 넣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홀로 내버려두시거나 스스로 견디어 보라며 팔짱끼고 계시는 분이 결코 아니십니다. 예수께서는 광풍을 만나 부르짖는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직접 찾아와 물결을 잔잔케 하시며, 평온한 가운데 기쁨으로 소원의 항구에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시107:28-30)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풍을 평정히 하사 물결로 잔잔케 하시는도다 저희가 평온함을 인하여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오늘 본문에서 분명히 제자들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오늘날도 그와같이 예수를 보려면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눈으로 예수를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자연적인 눈으로 예수를 볼 수 없지만, 봄으로 행치 아니하고 믿음으로 행합니다. 삶의 풍랑이 어떠하든지 간에, 파도가 얼마나 높든지 간에, 소동이 얼마나 심하든지 간에, 예수를 신뢰하고, 예수를 의지하고, 믿음으로 앞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예수께서 여러분을 향해 파도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땅에 것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예수께서 우리를 도우러 오실 때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일과 우리 자신의 환경에 얽매여 있어서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실 때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영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권고합니다.
“(골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골3: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골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골3: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바다 한 가운데서 풍랑을 만난 제자들의 모습은 마치 우리가 사는 현대 사회의 정황과 다를 바 전혀 없습니다. 한 개인뿐만 아니라 나라 민족이 경제, 정치, 사회적인 광풍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풍랑이든, 풍랑의 크기가 어떠하든 풍랑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예수밖에 없습니다.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정치, 경제와 사회 등 나라 민족이 사는 길은 ‘길과 진리, 그리고 생명’이신 예수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1절에서 그 해결책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요6: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다시 말해서 예수를 배에 영접하자 제자들은 가려던 항구에 속히 안전하게 도달했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현대가 당면한 모든 문제점을 해결해 주는 열쇠가 바로 예수라는 것입니다. 먼저 예수를 배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가 없었을 때에는 위험했으나 일단 그를 배 안에 영접하자 풍랑이 잔잔해졌다는 것입니다. 여기 ‘배’는 작게는 ‘나 자신’을 뜻하며, 크게는 ‘가정’ ‘교회’ ‘국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의 문제나, 가정의 문제나, 교회의 문제나, 국가의 문제는 오직 예수를 영접할 때만이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를 영접하니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고 했습니다. 배는 항구에 정박하기까지는 언제 어떤 풍랑에 밀리고 요동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바다와 바람을 창조하시고 자연법의 주가 되시는 주님을 모시면 목적한 항구까지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삶의 풍랑을 잔잔케 하실 뿐만 아니라 삶의 참된 목적지까지 우리를 평안하게 이르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진실로 마음 중심에 모시고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물 위로 걸어오신 예수님
요한복음 6:16-21 / 김영규 목사
다섯 번째 이적
오늘의 말씀은 사도 요한이 기록한 일곱 가지의 이적 중 다섯 번째 이적입니다. 이 사건은 마태나 마가도 기록하고 있습니다.(마14:22-32,막6:45-52) 사도 요한은 이 사건에 대해서 마태나 마가처럼 상세한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사건의 이적적인 의미를 축소시킵니다. 그러나 요한이 이 사건의 개요를 상세히 기록하지 않았다고 의미가 작은 것은 아닙니다. 요한의 관심은 언제나 사건의 내용보다는 사건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입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집니다. 요한은 5병 2어의 이적 직후에 많은 군중들이 예수를 유대인의 임금으로 추대하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본 예수님은 유대 민족의 왕이 아니라 전 우주의 왕이요, 온 세계의 왕입니다. 인간 세계는 물론 바다와 풍랑을 지배하시는 자연 세계의 왕입니다. 예수님은 인간 세계, 자연계, 현세와 내세, 영적 세계를 지배하는 우주의 왕이십니다.
그러면 이 이적의 내용을 살펴봅시다. 예수님은 5000명을 먹이신 사건 직후에 군중들을 떠나서 홀로 산으로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이적으로 빵을 얻어먹고 열광하는 군중들, 부질없이 세상 임금 삼으려는 그들을 위해서 주님은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미 날이 저물었습니다. 어두워진 시간에 제자들은 주님을 뒤로 하고 먼저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려고 했습니다. 밤중에 배를 띄우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에 워낙 익숙했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과는 달리 바다에 들어서자마자 역풍이 불기 시작 했습니다. 바람을 마주쳐서 노를 저으려니 힘이 듭니다. 바람은 점점 심해졌습니다. 제자들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바람과 싸웠습니다. 동서로 10킬로미터 안팎의 거리인데 초저녁부터 새벽녘까지 노를 저어서 겨우 25-30스타디온 밖에 가지 못했습니다. 1스타디온이 약600피트(200m)니까 5킬로미터 밖에 가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해가진 시간부터 새벽 4시까지, 대략 8시간 동안 5킬로미터를 갔다면 시속 600 미터를 간 셈입니다.
그런데 밤 4경(3시-6시)이 되어서 예수께서 물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로 다가 오셨습니다. 제자들은 놀라고 두려워 어쩔 줄 몰랐습니다. 마태의 기록에 보면 예수님을 유령이라 하면서 무서워 소리쳤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풍랑 때문에 정신이 없는데 그 캄캄한 바다 위로 누가 걸어서 옵니다. 혼비백산(魂飛魄散)할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 이하 모두 소리쳤습니다. 유령이다!
주님은 이러한 제자들을 보시면서 크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다. 두려워 말아라 !”(20) 제자들은 주님인줄 알고 기뻐하면서 주님을 배로 영접했습니다. 영접하자마자 바람은 멎고 그들은 평탄한 항해를 거듭하여 가려던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시려 하셨을까요?
풍랑 만난 제자들
첫째로, 풍랑 만난 제자들입니다. 인생에 풍랑은 언제나 일어납니다. 익숙한 길에서, 평범한 길에서, 풍랑은 발생합니다. 제자들은 해가 지고 어두워진 시간에 배를 띄웠습니다. 상식적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너무 자신이 있었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남북으로 12km 동서로 10km 정도 됩니다. 어려서부터 이 호수에서 자라난 사람들입니다. 눈 감고도 위치가 훤히 보입니다. 워낙 자신 만만했습니다. 그런데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풍랑이 너무 심해서 시속 600m, 1분에 10m씩 나아갔습니다. 그런 속에서 5km라도 앞으로 간 것이 신기합니다. 계속 역풍만 불었다면 차라리 되돌아갔겠지요? 아마 바람의 방향이 이리 저리로 바뀐 것 같습니다. 아무튼 제자들은 오기로 버텼는지 어쩔 수 없어서 그랬는지 계속 풍랑 속에서 노를 저었습니다.
풍랑은 예고 없이 다가옵니다. 욥은 동방 제일의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재앙이 다가왔습니다. 자식 열 명을 하루에 잃었습니다. 양 7천 마리, 낙타 3천 마리, 소 500 쌍, 암나귀 500 마리가 하루에 죽었습니다. 살이 썩는 병이 들어 세상에 태어난 것을 원망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풍랑 없는 인생이 없고, 예측할 수 있는 풍랑도 없습니다. 풍랑은 예고가 없습니다. 돌발적입니다. 우리가 겪는 풍랑이 대부분 그렇습니다. 믿는 사람에게 속임 당하고 배신당합니다. 평안한 날에 살인, 강도, 사기꾼을 만납니다. 불의의 사고를 당합니다. 기대를 걸었던 자식이 말을 듣지 않고, 남편이 속을 썩입니다. 잘 나가던 사업이 부도나고, 가난과 궁핍이 다가옵니다. 내게 왜 이런 일이! 나에게는 이런 일이 생전 일어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실제로 일어납니다.
기왕에 풍랑을 만났으면 어쩔 수 없습니다. 풍랑에 직면해야 됩니다. 제자들은 밤중에 배를 띄운 것을 후회했을지 모릅니다. 아하! 출발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러나 후회는 해답이 아닙니다. 이미 풍랑 속에 있습니다. 인생에 발생하는 많은 풍랑은 불가항력적인 면이 있습니다. 내가 판단을 잘못해서 풍랑을 만나기도 하지만, 전혀 예기치 않게 풍랑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일부러 풍랑을 일으키십니다. 어떤 풍랑이든지 최소한 하나님의 허용 아래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어떤 풍랑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만이 역사를 움직이시고, 우주 만물을 움직이시기 때문입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잠27:1)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7:14) “내가 마음을 다하여 이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펴본즉 의인과 지혜자나 그들의 행하는 일이나 다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 미래임이니라.”(전9:1) “대저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가 재앙의 그물에 걸리고 새가 올무에 걸림같이 인생도 재앙의 날이 홀연히 임하면 거기 걸리느니라”(전9:12) “여호와께서 명하신 즉 광풍이 일어나서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도다. 저희가 하늘에 올랐다가 깊은 곳에 내리니 그 위험을 인하여 그 영혼이 녹는 도다. 저희가 이리 저리 구르며 취한 자 같이 비틀거리니 지각이 혼돈하도다.”(시107:25-27)
만일 하나님이 허용하신 풍랑이라면 당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후회가 아닙니다. 풍랑을 정정당당하게 마주하는 일입니다. 마주치세요. 정면 돌파를 하세요. 직면이란 말은 영어로 confrontation입니다. front란 말은 군대 용어로 전선, 최전방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풍랑을 당할 때 최전방에 서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풍랑을 알고 계시니 마주치자! 풍랑을 두려워 마세요. 원망 불평하지도 마세요. 걱정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원망 불평한다고 해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어떻게 하면 이 풍랑을 뚫고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지 그 길을 찾으세요.
풍랑 속에 다가오시는 주님
둘째로, 풍랑을 속에 다가오시는 주님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풍랑 만나 애쓰는 것을 아셨습니다. 한 밤중이지만 주님은 제자들에게로 오셨습니다. 산으로 기도하러 가셨던 주님입니다. 거리상으로 몇 십리 되는 길입니다. 낮도 아닌 밤중입니다. 주님이 오실 리 만무한 상황입니다. 그래도 주님은 제자들에게로 오셨습니다. 이때까지 제자들은 주님을 찾을 생각도 안했습니다. 우리가 고생하는 것을 보소서! 기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도 주님은 제자들에게로 오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본래 내가 주님을 찾았기 때문에 시작된 게 아닙니다. 주님이 나를 찾으셨기 때문에 시작되었습니다.
풍랑 만난 때는 주님을 만날 때입니다. 왜냐하면 그 때에 주님이 나를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풍랑은 주님이 찾아오시는 시기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찾기 전에 주님이 먼저 우리를 찾으십니다. 오늘 내 삶을 주목하세요. 주님이 나를 찾아오십니다. 주님은 인류 역사 속으로 찾아 오셨습니다. 안드레와 요한을 찾아오셨습니다. 마태나 삭개오를 찾아 오셨습니다. 수가성 여인을 찾아오시고, 38년된 병자를 찾아오시고,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에게 찾아오시고, 죽은 나사로를 찾아 오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도 땅 끝까지 찾아 가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주님이 다가올 때에 제자들은 환영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놀라 소리쳤습니다. 구원하러 오시는 주님을 오히려 두려워했습니다.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둠은 죄악을 상징합니다. 어둠은 혼돈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혼돈의 시기에는 주님을 알아보는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현대를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합니다. 무엇 하나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역사가 어디로 흘러갈지? 인류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인간 사회의 타락이 어디까지 나아갈지? 가정이 어디까지 파괴될지? 과학의 발전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지구 환경은 어떻게 될지? 모든 것이 어둡고 불확실합니다. 이런 어둠 속에 주님이 다가오십니다. 선입견으로 잘 못 알아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과 이미 여러 날 동안 같이 했습니다. 실루엣만 봐도, 걸음걸이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설마 주님이 여기에 나타나실까? 유령이겠지?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할 때 제자들은 오히려 두려워했습니다. 저는 가끔 초신자(初信者)들 중에 이렇게 걱정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예수의 영이 나를 확 잡아끌어서 꼼짝 못하게 하면 어쩌나? 예수가 나를 광신자로 만들면 어쩌나? 예수가 내 인생을 외골수로 몰아가서 가장 재미없고 무의미한 인간이 되게 하면 어쩌나? 예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얼마나 평안합니까? 얼마나 행복합니까? 얼마나 즐거워합니까? 얼마나 만족합니까? 얼마나 자신감이 넘칩니까?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예수를 바로 아는 사람들은 고백합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3:17-18)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8:9)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10:10,11,15)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올바로 알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니 두려워 말라 !” 여기서 주님이 ‘내니’라고 하신 말씀은 헬라어로 εγω ειμι입니다. 이 말은 종종 주님 자신의 신성을 단정적으로 나타내실 때 사용하신 말씀입니다. “나는...이다” 즉,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참 포도 나무다.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양의 문이다. 그러므로 ‘나다’(εγω ειμι )라고 말씀하신 것은 ‘너희가 믿고 신뢰해야 될 구원자인 바로 나다’라는 뜻입니다. 주님을 올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알지 못하면 구원에 이르기는커녕 오히려 두려움에 빠지고 맙니다. 오늘 내게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영접하세요. 환영하세요. 마음에 모셔들이세요. 주는 나의 하나님, 나의 구주십니다! 할렐루야!
풍랑을 밟으신 주님
셋째로, 풍랑을 밟으신 주님입니다. ‘바다 위로’라는 말, επι τησ θαλασσησ 에 대하여 어떤 사람들은 on the lake로 번역하고, 어떤 사람들은 by the shore로 번역합니다. 본문에서 επι 는 분명히 by가 아니라 on입니다. 주님은 풍랑 곁에 계시지 않고 풍랑을 밟고 풍랑 위에 계십니다. 주님은 세상의 어떤 풍랑도 발아래 굴복시키십니다. 주님은 자연의 풍랑을 밟으시는 분입니다. 바다도 산도 천체도 식물도 동물도 주님의 발아래 있습니다. 심지어 귀신도 비인격적인 질병도 주님의 명령 하에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의지 하는 까닭이 거기 있습니다. 제자들은 풍랑을 두려워하고 죽음의 공포심을 가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죽음의 공포도 발로 밟으셨습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왕으로 옹립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들이 옹립하지 않더라도 이미 왕이십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정치적인 왕이실 뿐 아니라, 자연 만물을 지배하시는 자연계의 왕이시요, 현세의 왕이시요, 내세와 영원한 세계의 왕이십니다. 인간 세계의 왕이실 뿐 아니라 온 천사들과 영적 세계의 왕이십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가 당하고 있는 모든 문제를 발아래 밟으시는 왕이십니다. 할렐루야!
제자들은 주님인줄 알고 기쁨으로 배 안으로 영접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내 인생의 배 안으로 모셔 들여야 합니다. 주님 없는 항해는 암담했습니다. 밤새도록 노를 저어도 진전이 없었습니다. 1분에 10m밖에 못 갔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모셔 들이게 될 때에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풍랑은 잔잔케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4:32에 보면 예수께서 배에 오르시매 바람이 그쳤다고 말씀합니다. 주님이 풍랑을 밟으셨기 때문에 배는 안전했습니다. 성경은 주님과 함께하는 인생 항로를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풍을 평정히 하사 물결로 잔잔케 하시는도다. 저희가 평온함을 인하여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시107:28-31)
주님이 배에 타실 때에 풍랑이 멎었습니다. 제자들은 소원의 항구까지 평안하게 도착했습니다. 오늘 풍랑 만난 여러분의 인생에 주님을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정말 내 인생의 선장으로 모셔 들인다면 절대로 풍랑에 침몰하지 않습니다.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증표가 있어야 됩니다. 주님을 모셔서 풍랑을 이긴 증표! 오늘 당장 이런 증표를 얻으세요. 물질의 풍랑, 건강의 풍랑, 마음의 풍랑, 영혼의 풍랑. 모든 풍랑을 이긴 증표를 만드세요. 그래서 소원의 항구까지 안전하게 도달하시기 바랍니다. 소원의 항구가 어딥니까? 소원의 항구는 가까이도 있고 멀리도 있습니다. 즉, 가까운 인생의 목표도 있고, 멀리 있는 목표도 있습니다. 가까운 목적지는 하루하루의 목표들입니다. 육체적인 목표일 수도 있고, 물질적인 목표일 수도 있습니다. 가정적인 목표 혹은 자녀들에 대한 목표, 또는 사회적 성취가 될 수도 있습니다. 멀리 있는 목적지는 인생의 궁극적 목적지인 하나님의 품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 잠시 잠깐의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삶은 장차 이 땅을 떠날 때에 이루어집니다. 그 미래적 삶의 향방은 전적으로 주님의 인도하심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이 세상에 사는 누구도 하나님의 나라가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가 본 사람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 아시고, 주님만 인도하십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1-6) 주님의 안내를 받으면서 하나님 나라에 도달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
주님은 풍랑을 밟으시는 우주의 지배자십니다
본문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주님의 우주적 주권입니다. 주님은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을 통제하십니다. 그 주님께 내 인생을 믿고 맡기세요.
오늘 어떤 풍랑을 만났습니까? 그 풍랑에 직면하세요. 마주 대하세요. 그리고 나를 찾아 오시는 주님을 영접하세요. 풍랑 한 복판에 주님을 모셔 들이세요. 주님이 내 인생에 들어오시는 순간 풍랑은 잔잔해집니다. 인생 항로가 보장됩니다. 풍랑이 있든지 없든지 목적지까지 갑니다. 주님을 모시고 소원의 항구에 도달하시기 바랍니다.
우주의 왕이신 주님과 함께하는 항해! 멋진 승리자들이 되세요. 할렐루야! “저희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계17:14)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요 6:16-21; 찬송가 135장, 1,2,4절 / 정준모 목사
옛날부터 사람들은 인생을 항해에 비유하곤 했습니다. 항해는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복음서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항해 중에 풍랑을 만난 이야기가 두 개가 나옵니다. 비슷한 것 같지만 서로 다른 사건입니다.
(1) 하나는, 막4장에 나오는데요, 열두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갈릴리 바다를 건너는 중에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너무 피곤하셨는지,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잠을 자고 계셨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풍랑 속에서 잠을 주무신 장면에서 은혜를 받습니다.
“얼마나 사역에 지쳐 피곤하셨으면 풍랑 속에서 주무셨을까? 또한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평안하셨으면, 그 상황에서 잠이 오셨을까?”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문제로도 고민에 빠지고 잠을 자지 못할 때가 있는데, 예수님은 그런 상황에서도 절대적 평안을 누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면서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잠에서 일어나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에게 잠잠하라고 명령하셨을 때, 바람이 그치고 파도가 잔잔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라고 하시며,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을 잃지 말 것을 권면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 문제임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2) 오늘 본문 이야기가 예수님과 관련된 두 번째 풍랑 이야기입니다. 앞의 이야기와 차이점은 제자들이 한 밤 중에 풍랑과 싸울 때, 예수님이 거기에 함께 계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위기의 순간에 바다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아주 짧은 이야기입니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과, 생명의 떡에 관한 긴 설교 사이에 놓여져 있습니다. 두 이야기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이야기입니다. 삽화 같은 것입니다.
저는 본문의 이야기가 두 큰 이야기 속에 끼어 있는 작은 이야기라서 지나치려고 하다가, 요즘 우리들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적지 않을 것 같아서 설교하기로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한 밤 중에 갈릴리 바다 한 가운데서 폭풍 만나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마치 세계적인 코로나19 재앙으로 인해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는 오늘의 우리들의 모습처럼 보였습니다.
지난 주에 살펴본 것처럼, 오병이어 기적 사건 후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붙들어 임금 삼으려고 하자, 예수님은 혼자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저문 상태에서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향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왜 날이 저문 상태에서 제자들이 배에 승선하여 항해를 시작했는지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가라고 명하신 것은 분명한 것 같은데,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아마 추측해 보건대, 제자들을 군중들로부터 분리하시려는 의도와, 다음 날 가버나움에서 중요한 사역이 있어서 밤에 배를 타고 이동하게 하신 것 같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항해에 대해 묘사하면서 몇 가지 두드러진 특징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 우선 항해가 낮에 이뤄지지 않고 밤에, 어두울 때에 이뤄졌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6절,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17절,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이미 어두웠다고 한 점을 볼 때, 밤 9시 쯤은 되었을 것 같습니다. 오병이어 기적이 저녁 때 일어났기 때문에 식사 후에, 그리고 군중들을 돌려 보낸 후에 승선하였기 때문에 저녁 9시쯤은 되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바다라고 해도 캄캄한 밤에 항해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어두운 밤의 항해는 뭔가 환난이 닥쳐올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2) 이 항해의 또 하나의 특징은 예수님 없이 이뤄진 점입니다.
17절 하반절,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였더니”
분명히 제자들은 떠나기 전에 예수님께 왜 같이 가시지 않느냐고 물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너희들 먼저 배를 타고 떠나라, 난 나중에 가겠다”고 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군중들과 제자들이 합세하여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 삼으려고 하였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두 그룹을 분리시켰을 뿐 아니라 자신도 얼마동안 그들과 분리되어 산에 머물러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3) 이번 항해의 또 하나의 특징은 바다 한 가운데서 큰 바람, 그것도 역풍을 만난 것입니다. 그래서 몇 시간 째 노를 젖었는데도, 십여 리쯤 밖에 가지 못한 것입니다.
18-19절 상반절,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같은 사건을 다루는 마가복음에서는 “바람이 거슬러서 제자들이 노를 힘겹게 젓고 있었다”라고 정확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십여 리는 5-6킬로미터를 의미합니다. 갈릴리 바다의 길이(동서)가 21Km이고, 폭(남북)이 11Km이기 때문에 벳세다에서 출발해서 가버나움까지 거리가 약 11 km라고 한다면, 바다 한 가운데까지 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그 시간이 나와 있지 않지만 마가복음에 보면, 밤 사경쯤이라고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밤 사경이면 새벽 3-6시 쯤을 의미합니다. 정상적인 항해가 이뤄졌다면 벌써 가버나움에 도착해서 잠을 자고 있어야 할 시간에 아직도 바다 한 가운데서 바람과 파도와 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4) 이 항해에서 가장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까지 온 것입니다. 한밤 중에 바다위를 걸어오는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냥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제자들이 두려워 하였다”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다른 복음서에는 유령인가 하여 소리 질렀다고 되어 있습니다.
요즘에 왼드 써핑하는 사람들이 도구(보드)를 이용하여 바다 위를 달리는 경우가 있지만, 풍랑이는 바다 위를 5-6Km 걸어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제자들이 들은 적도 본 적도 없기 때문에 그 장면을 보고 놀라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5) 예수님께서는 아주 짧게 한 마디 하시고 배에 오르셨습니다.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그리고 예수님이 배에 오르시자 바람도 그치고, 배는 목적지에 안전하게 도착하게 되었다, 라는 것입니다.
20-21절, “이르시되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대 이에 기뻐서 내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오늘은 본문의 이야기와 관련해서 좀 무거운 주제를 다루려고 합니다.
1) 왜 제자들의 주의 말씀대로 했는데 밤중에 폭풍을 만났는가? 왜 의인도 고난을 받게 되는가? 왜 하나님의 자녀들도 고난을 겪게 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고난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고난을 주시는 분은 아니지만, 고난 속에 있도록 허락하시고, 그 고난을 통해 일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많은 고난은 죄의 결과로 올 수도 있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의인도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어도 고난에 처할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욥의 고난과 요셉의 고난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욥- 당대의 의인, 온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였습니다. 하지만, 사단의 시험으로 인해 참혹한 고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한 날에 자녀들을 다 잃고, 많던 재산도 다 잃고, 건강까지 잃어버렸습니다. 그래도 공수래 공수거를 이야기하면서 입술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요셉- 성경의 인물 중 가장 예수님을 닮은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온갖 고난과 억울한 일을 다 받았습니다. 형들의 미움과 노예 생활,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과 모함으로 인한 감옥살이까지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고난을 주셨다고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은 틀림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당한 고난도 마찬 가지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데도 고난이 찾아올 수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의 명령대로 순종했는데도 바다 한 가운데서 앞으로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상황을 만났습니다. 그들이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노를 저었지만 몇 시간 째 거의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위기에 빠진 것입니다.
우리가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해 믿는 자들을 고난의 한 복판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홍해 앞 바다에 있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그런 상황으로 몰아 넣은 것입니다.
두려움에 빠진 이스라엘 사람들은 불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 우리를 이런 곳으로 인도하셨나요? 왜 이런 사면초가의 상황에 몰리게 하셨나요?
출애굽기14:11-12절입니다.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을까요?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구원자는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세상에 하나님 외에는 신이 없음을 보여주시고 영광을 받으시려는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 왜, 하필이면 나야, 라는 식으로 이유를 찾지만, 세상엔 이유를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은 틀림 없습니다.
2)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보려고 하는) 두 번째 질문은 “그렇다면 고난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는가? 어떻게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는가?”하는 질문입니다.
인생 중에 불어오는 풍랑, 찾아오는 고난을 능히 이겨 내기 위해서는 세 가지를 기억할 필요
(a) 먼저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이 찾아오면,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으신다는 생각, 하나님은 나를 버리셨다는 생각이 들어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때, 단호하게 물리쳐야 하는 것입니다.
존 파이퍼(John Piper)목사님이 최근에 무료로 이북을 출판했습니다. 제목이 <코라나바이러스와 그리스도>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 강조하는 내용 중에 하나는 세계적 대재앙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 사랑,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는 의심할 수 없다,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재앙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일하시며,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책에서 저자는 개인적인 간증을 합니다. 15년 전인 2005년에 암진단을 받았을 때, 두려움이 엄습해 왔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으로 인해 위로와 평안을 얻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죽음에 대해 걱정할 때 이런 주의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파이퍼야, 살든지 죽든지 너는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너는 살아날 것이다.”가 아니라 살든지 죽든지 너는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라는 음성이었습니다.
그 말씀은 데살로니가전서5:9-10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저자는 코로나바이러스 대유행을 1918년 스페인독감에 비교하면서 많은 사람이 죽을 수도, 죽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견고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스페인독감으로 전세계에서 5천만명이 목숨을 잃었고, 미국에서만 50만명이 목숨을 잃었었다고 회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죽음이 멀리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누군가의 문제이고, 나와 상관없는 문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질병이나 사고를 만나 죽을 수도 있고, 건강하게 오래 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살든지 죽든지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씀으로 인해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흔들리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가장 큰 차이점이 뭐겠습니까?
위기 때에 두려움 때문에 낙심하고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것과, 위기 속에서도 흔들지지 않는 소망과 평안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성경은 믿는 자들에게 고난이 없을 것, 질병에 걸리지 않을 것 등등 좋은 일만 약속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살든지 죽든지 주님이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b) 고난을 이기는 비법은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힘듭니다. 비결이 있다면, 하나가 있는데, 참는 것입니다. 인내하는 것입니다. 고난의 유익을 믿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의 말씀을 기억하시죠? 시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야고보서1:2-4절을 보세요.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의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인내하다 – 헬라어로 휘포모네오- under remain라는 뜻이 있습니다. 고난, 역경, 스트레스가 찾아 올 때, 피하여 숨는 것이 아니라 그 아래서 버티고 견디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내를 통해 인격이 성숙되어 지는 것입니다. (그림을 보세요. 무거운 스트레스를 피하지 않고 견딜 때 인격이 자라는 것입니다.)
시련을 통해 예수님을 닮을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축복인 것입니다.
(c) 셋째로, 승리를 위해 영적 무장이 필요합니다. 고난과의 싸움도 영적 싸움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코로나바이러스와의 싸움과 영적 전쟁은 몇 가지 점에서 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a) 보이지 않는 적과의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바이러스도 보이지 않고, 악한 마귀도 보이지 않습니다.
(b) 굉장히 위험한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얼마나 많은 사상자를 냈는지 모릅니다. 어제까지 사망자가 9만 6300명이었습니다.(전세계33만 9000명)
(c) 사람들을 분열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사람들은 함께 하지 못하고 분열되고 있습니다.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있습니다. 미국과 중국은 신냉전 시대에 돌입했습니다.
악한 마귀의 주 공격 방법이 사람들을 분열시키는 것입니다. 가정을 분열시키고, 교회를 분열시키기도 합니다.
(d) 이 싸움에서 이기려면 무장을 잘 해야 합니다. 마스크도 쓰고, 손 소독도 하고, 운동을 통해 바이러스에 대한 저항력도 키워야 합니다.
마찬 가지로,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면, 로마의 병사처럼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엡6:13-17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여러분, 눈에 보이는 싸움보다 보이지 않은 싸움이 더 힘들고 위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싸워서 악한 마귀와의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그런데 고난에서 승리하기 위해 인간적 노력만으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한 구원자요, 해답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이야기 속에서 제자들의 노력으로 벗어날 수 있었나요? 아닙니다.열심히 노를 저었지만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저는 본문을 반복해서 읽으면서 제자들이 주님께 기도하거나 주님을 찾았는가 살펴보았지만, 그런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항해하는 동안 기도하신 분도 예수님이셨고, 문제를 해결해 주신 분도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이 멀리서 제자들이 힘들어 하는 것을 보셨고, 물위로 걸어오셔서 도우셨습니다.
막6:46-48a절을 보세요.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께서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 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이 말씀을 통해서 보면, 그 시간에 기도하시고 계신 분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제자들의 고통을 보시고 도우시려고 찾아 오신 분도 예수님이셨습니다.
저는 이 부분의 말씀에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보통 힘들고 어려울 때, 기도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또한 문제 해결을 위해서도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에 보니, 그 반대였습니다. 힘든 순간에 기도하신 분도 주님이시요, 돕기 위해 찾아오신 분도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힘들 때엔, 기도도 나오지 않을 수 있어요. 하나님이 날 버린 것은 아닌가 의심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솔찍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어야 하는 사실은 - 주님은 그 상황을 다 보고 계시며, 일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기도에 대해 강조하고 있는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셨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눅22:31-32절입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베드로가 기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셨다, 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그대로 응답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신 후에 어떻게 하고 계실까요?성경에 의하면, 승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롬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여러분, 우리의 기도도 능력이 있지만, 예수님의 기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저와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중 제3위이신 성령님은 또 어떻습니까?성령님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롬8:26-27절,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시느니라”
여러분, 성도의 기도도 필요하고 역사하는 힘이 크지만, 예수님의 기도와 성령의 기도와 비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모래 위의 발자국이란 시에 대해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시인은 꿈 속에서 바닷가 모래밭에서 두 쌍의 발자국을 발견합니다. 하나는 자신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기뻐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부분에는 발자국이 한 쌍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를 회상해 보니, 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이었음으로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언짢아서 주님께 불평했습니다. 주님, 왜 어려운 순간에 저와 함께 걷지 않고 혼자 걷게 하셨나요?
주님이 그 시인에게 어떻게 대답하셨는지 아십니까?
“그 모래 위의 발자국은 네 것이 아니라 내 것이란다. 그 어려운 때엔 내가 너를 등에 업고 걸었었단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을 살다 보면, 맞바람 같은 고난 속에서 힘겹게 노를 젓지만, 벗어나지 못하고 제자리를 맴도는 상황에 놓일 때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잘 믿고,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고 있는데도, 거듭되는 고난 속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 버림 받은 것과 같은 상황에 놓일 때도 있습니다.
기도하고 싶어도 기도도 안 나올 때도 있는 것이죠.
하지만 기억하세요. 성령님과 예수님은 그 순간에도 함께 계시며, 여러분을 위해 중보기도 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 본문은 예수님이 오셔서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자 풍랑이 잔잔해 지고 배는 가려는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었다는 결론으로 맺고 있습니다.
요6:20-21, “이르시되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대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밤 사경까지 맞바람으로 인해 바다 한 가운데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하던 배가 예수님이 걸어 오셔서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고 배에 오르시니 풍랑이 멈추고 배가 가려던 땅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배가 날아가듯이 빨리 갔다는 뜻인지, 바람이 방향이 바뀌어 ‘smooth’하게 항해를 했다는 뜻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주님이 오신 후, 더 이상 바람이나 파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라는 것입니다.
“내니”라는 말은 원어로 ‘에고 에미미’인데요, 영어로 It is I. 입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요, 예수님이 곧 답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난이나 역경, 환난이 피해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고난을 받아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요16:3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 환난이 피해갈 것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분명히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함께 하심으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승리한다는 것이 고난 없는 상태에 이른다는 것은 아닙니다. 병에 걸리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고난 중에도 인내할 수 있고,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릴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소망 가운데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난이 오히려 주님을 만나게 하고, 나의 성품을 주님 닮은 성품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상처받은 치료자로서 주의 일을 하게 하신다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 며칠 전에 한국의 기독교방송, 새롭게 하소서 프로그램에 나온 양미동목사님이 나와서 간증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간증을 들으면서 두 가지 사실에 놀랐습니다. 하나는, 어떻게 한 사람에게 고난이 연거푸 일어날 수 있는가, 하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하며 주님께 헌신할 수 있을까, 건강한 사람보다 더 귀하게 쓰임 받는 것을 보면서 놀랐습니다. 그는 청년 때, 친구의 공장에 갔다가 손이 기계에 빨려 들어가 큰 부상을 당합니다. 얼마 후엔 난로에 기름을 붓다가 넘쳐, 불이 나아론 옷에 붙어 전신 75% 화상을 당합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울 것인지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병원비 때문에 오래 입원하지 못하고 누나 집에서 통원치료를 받는데, 이번에 계단에서 넘어져 다리 고관절이 부러집니다. 수술과 그 후 관리를 잘못해서 다리 수술한 곳이 썪어버렸습니다. 10여차례 전신마비 수술을 하였지만 아직도 고통 때문에 진통제를 먹고 있습니다. 죽고 싶어서 의사에게 안락사를 해 주면 안되겠느냐 묻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고난 가운데서 주일마다 병원에 찾아온 누나와 교인들의 전도로 복음을 받아들였으며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까지 되어서 지금은 건강한 사람보다 휠씬 더 귀한 사역을 하고 계십니다. 장애인들을 섬기고 있고, 몇 년 째, 소록도에서 나환자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감옥의 재소자들을 위해서도 사역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제 상처받은 치료자가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진정한 위로를 주고,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된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고난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지만 인생의 폭풍, 역풍을 만날 때, 오히려 주님을 체험할 수 있고, 믿음의 성장과 성숙의 계기가 된다는 것을 확신하며, 소망 중에 즐거워하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지금도 귀하게 쓰임 받고 있지만, 연단 받아 더욱 귀하게 쓰임 받게 되길 축원합니다. 아멘.
목적지에 도달하려면
이재철 목사
♬ 주만 바라볼찌라 ♬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 하나님의 평안을 바라보는 자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하는 자 하나님의 선하심을 닮아가는 자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주님이 너를 자녀 삼으셨네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서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던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찌라
요한복음 6 : 16-21
16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17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18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19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20 가라사대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신대
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꼭 도달해야 하는 목적지가 있습니다.
출발은 멋지고 거창하게 출발했으나 도중에 흐지부지 되어서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아래서 40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처음 출애굽 할 때는 장정이 60만명 이었으나 목적지인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착했을 때는 출애굽 사람 중 단 두 명만이 가나안 땅에 도착했습니다. 나머지는 광야에서 다 죽고 광야에서 태어난 새로운 세대만이 여호수아와 갈렙의 인도를 받고 가나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처음에는 불덩이었으나 도중에 불이 다 식어버리고 숯덩이만 남게 됩니다.
살다보면 이런 일들이 있습니다. 결혼 생활, 사업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 말씀의 흐름을 보면 오병이어 기적 이후 제자들이 신이 나고 우쭐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쭐하는 제자들을 배를 띄워 건너편으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가다가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할 정도의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배에 오르시자 목적지에 잘 도착하였습니다.
◈ 어떻게 하면 주님이 목적했던 그 목적지에 잘 도착할 수 있을까요?
① 목적지에 가는 도중에는 풍랑과 광야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16-17절 말씀에 보면 날이 금방 어두워졌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 있습니다.
내가 정말 주님을 필요로 할 때 내 곁에 계시지 않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18절 말씀에 보면 설상가상으로 큰 바람이 일어 파도까지 일어났습니다. 한계에 도달한 것입니다.
열 두 제자 중 6-7명은 갈릴리 바다 어부 출신이지만 태풍 앞에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노 젓는 괴로움”입니다. 이런 괴로움을 안당해본 사람은 없습니다.
실패를 했을 때는 노 젓는 것이 더 겁이 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앞에 광야가 있었듯이, 제자들이 목적지에 가기 위해 풍랑을 만났듯이, 인생에는 광야와 풍랑이 있습니다. 광야와 풍랑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주님은 땅과 바다의 주권자이십니다.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풍랑과 바다를 다스리십니다. 그 실패를 통해서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② 풍랑 가운데 주님을 모셔 들여야 합니다.
21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이 배에 오르시자 가려던 곳에 이르렀습니다.
땅과 바다의 주권자이신 주님을 모셔야 합니다.
★ 어떻게 하면 주님을 내 인생에 모실 수 있을까요?
㉠ 무슨 일을 시작하든지 주님께 물어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잠언 4장에 있는 말씀을 보면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하였습니다. 범사에 여호와를 인정하면 네 길을 인도하시리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스스로 일 다 해 놓고 풍랑을 만나면 원망하고 눈물 흘립니다.
모든 일을 할 때는 꼭 주님께 물어보십시오.
어떻게 물어볼 수 있습니까? 기도 시간을 늘려야 합니다.
주님을 내 배 안에 모시고 주님께 늘 물어보십시오.
영적 분별력, 영감, 지혜를 구하십시오.
㉡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실 때는 즉시 순종하십시오.
부모님이 내게 말씀하실 때는 자녀가 잘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순종을 통해 복이 옵니다.
순종은 하고 싶으나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잘 모를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까?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그러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진리의 영이 깨닫게 하십니다.
이렇게 하면 오히려 풍랑 때문에 더 빨리 갈 수 있습니다.
모두 목적지에 도착하는 축복을 누리십시오.
오병이어의 감사
요 6:1-13 / 박헌승 목사
성경을 보세요.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감당한 사람은 모두 감사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위대한 성군이 되었던 것은 그가 감사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시 9:1)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사를 전하리이다
다니엘이 90세가 넘도록 하나님께 쓰임받았던 것은 그가 감사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단 2:23) 내가 주께 감사하고 주를 찬양하나이다
요나가 재기하여 니느웨에 들어가 느니웨성을 살렸던 것은 그가 감사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욘 2:9)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하니라
바울이 아시아, 유럽, 로마, 스페인까지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나라를 확장했던 것은 그가 감사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롬 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이것저것 따지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이것 저것 따지십니다. 그러나 무조건 감사하면 하나님은 무조건 쓰십니다. 감사하는 자가 됩시다.
(골 3: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감사의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의 도구가 되어 하나님께 쓰임받는 것은 예수님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본문에서 감사의 주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축사하셨습니다. 축사하셨다는 것은 축복하고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오병이어를 손에 가지고 감사했습니다. 저는 본문을 묵상하면서 감동이 되었던 것은 오병이어로 5,000명을 먹이고 12광주리가 남았다는 것보다, 예수님이 오병이어를 가지고 감사했다는데에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눅9:16절에 하늘을 우러러 감사했다고 했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는 자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 보는자는 항상 감사할수 있습니다.
범사에 감사할수 있습니다. 땅을 바라보면 감사가 없지만 이 시간 하늘을 바라보며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감사가 어떤 감사인가를 살펴보며 추수감사주일에 감사가 넘치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부족한 가운데서 감사하였습니다.
- 7절에, 빌립은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200 데니리온의 떡도 부족하겠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지금 여기에 모인 자가 오천명입니다. 눅9:14에 남자만 오천명입니다. 이 많은 사람들에게 조금씩이라도 떡을 나누어 주려면 200데니리온 즉 8개월어치의 노동자 월급을 가지고 떡을 사서 먹인다 할지라도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NIV 성경에는 8개월의치의 봉급으로 떡을 산다해도 충분하지 못하다고 나옵니다.
200데나리온의 떡도 부족한데 지금 예수님의 손에는 몇 데나리온의 떡이 있습니까? 한 데나리온의 떡도 되지를 않습니다. 데니리온의 16/1이 앗사리온인데 한 앗사리온의 떡도 되지를 않습니다. 소년이 겨우 허기를 떼울 수 있는 이 떡을 가지고 어찌 남자만 오천명, 여자 아이까지 합치면 10,000여명을 먹일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턱없이 부족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부족한 것 가지고도 하늘을 우러러 축복하며 감사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감사입니다. 부족하지만 감사했습니다. 부족하다고 해서 더 구해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부족한 것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고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부족하다고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부족한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감사했습니다.
부족했지만 감사할 때 어떠한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조금씩 나누어 준다해도 200 데니라온이 부족하다고 했는데, 11절에 원대로 나누어 주고 12절에 배불리 먹고 13절에 남은 것이 열 두 바구니에 채워도 가득 찼습니다.
이것이 감사의 기적입니다. 감사의 표적입니다. 감사할 때 부족한 것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지혜의 사람은 있는 것 가운데서 감사하지만 미련한 사람은 없는 것 가지고 불평하는 사람입니다. 지금 부족하다고 해도 있는 것 가지고 감사하세요. 거기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부족하다고 불평말고 있는 것 가지고 감사하자” “부족하다고 낙심말고 있는 것 가지고 감사하자”
(신 2:7) 이 큰 광야에 두루 행함을 알고 네 하나님 여호와가 이 사십 년 동안을 너와 함께 하였으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
(약 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시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보잘 것 없는 가운데서 감사했습니다.
- 9절에 안드레가 예수님께 나와 보고합니다. 여기 한 아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습니까?
아주 실망한 어투로, 어떤 의미에서는 비웃는 어투로 보고를 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너무나 보잘 것이 없습니다. 너무나 작은 것입니다. 떡도 보리떡입니다. 물고기라 그랬지만 멸치같은 작은 생선입니다. 그것 가지고 어찌 10,000여명의 많은 사람을 먹일 수가 있겠습니까?
꼬마가 먹어도 모자라는 조그만한 그것 가지고 무엇을 할 수가 있습니까? 200데니리온의 떡이 있어도 시원찮은데 겨우 보리떡 5개와 물고기 두 마리라니 너무나 낙심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보잘 것 없는 가지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손에 올려 놓고 하늘을 우러러 축복하고 감사했습니다. 작다고 우습게 보지를 않았습니다. 적다고 기도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적은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진정으로 축복을 하였습니다.
보잘 것 없는 가지고도 감사할 때 어떠한 기적이 일어났습니까? 200데나리온의 이상의 값어치의 떡이 나왔습니다. 즉 200배 이상의 열매가 맺어졌다는 것입니다. 5,000명이 먹고도 남았습니다. 즉 5,000배 이상의 풍성한 열매가 맺어졌다는 것입니다.
지혜의 사람은 작은 것가지고도 감사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작은 것을 우습게 여깁니다.
“작다고 불평하지 말고 작은 것 가지고도 감사하자”
여러분, 내가 크면 주님이 손댈 곳이 없습니다. 작아야 , 보잘 것이 없어야 하나님이 손댈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작아도 하나님이 손대어서 크게 되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다윗은 이새의 아들로서 8째 말째였습니다. 냄새나는 목동 보잘 것 없는 소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골리앗을 무찌르고 마침내 왕이 되었습니다. 가난한 과부 두 렙돈의 보잘 것 없는 헌금이었지만 전부를 드릴 때 많은 것을 드렸다고 주님이 칭찬해주셨습니다. 바울은 작은 자였습니다. 그는 육체의 가시 때문에 엄청난 고생을 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선교의 거성이 되었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3년 6개월동안 가뭄이 들었습니다. 엘리야가 사르밧에 사는 과부에게 가서 떡을 구합니다. 이 여인은 낙심하며 말을 합니다. 왕상17:12 “하나님의 사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나는 떡이 없습니다. 통에 가루가 조금있고 기름병에 기름이 조금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떡을 만들어 내 아들과 함께 먹고 죽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작은 떡을 만들어 가지고 오라 그리고 나서 떡을 만들어 아들과 함께 먹으라 그리하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도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대로 순종했더니 정말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떨어지지 아니하는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사 60:22)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학 2:3)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자 곧 이 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이 없지 아니하냐
(학 2:4) 그러나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학 2:8)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학 2:9)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 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능력이 없고 보잘것없는 나의 모습이라고 꿈과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힘은 작은 힘처럼 보여도 결코 작은 힘이 아닙니다.
엘리자베스 노벨이란 사람이 쓴 '조금'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설탕을 조금 써 음식의 맛을 낼 수 있습니다.
비누를 조금 써도 몸을 깨끗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햇볕이 조금 비춰도 새싹이 힘차게 자라날 수 있습니다.
연필이 조금 남아도 아름다운 글 한편을 쓸 수 있습니다.
양초가 조금 남아도 주위에 환한 빛을 밝힐 수 있습니다.
3. 불가능한 가운데서 감사했습니다.
- 오병이어의 누가복음 9:12-14절에 나옵니다.
(눅 9:12) 날이 저물어 가매 열 두 사도가 나아와 여짜오되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 있는 여기가 빈 들이니이다
(눅 9:1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는 할 수 없삽나이다 하였으니
(눅 9:14) 이는 남자가 한 오천 명 됨이러라
13절에 보니 열 두 제자 모두는 오병이어밖에 없으니 “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오병이어 가지고는 도저히 이 많은 사람들을 먹이기가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당연합니다. 인간의 계산방법으로는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12제자들을 나무랄 수가 없습니다. 보십시오. 때는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장소는 황량한 빈 들입니다. 사람은 수만의 사람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가지고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없습니다.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어쩌면 저들은 무모한 사람들이 아니라 정말 현실을 잘 파악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불가능한 상황에서 불가능의 생각에 묶여 한탄하지 않았습니다. 눅9:16에 하늘을 우러러 축복하고 감사하였습니다.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누어 주게 했습니다. 그 많은 사람이 원하는대로 배불리 먹고도 12 바구니에 넘치도록 남았습니다.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뀐 것입니다.
감사할 때 할수 없었던 상황이 100% 변하여 할 수 있는 상황으로 바뀐 것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일을 맡기실때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능력 범위안에서가 아닙니다. 능력 밖입니다. 만약 사람이 할 수 있는 능력안이라면 구태여 하나님의 능력을 사람이 의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능력밖에서 사건이 일어났다면 이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이요,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이삭을 얻을 때, 모세가 홍해를 건널 때,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널 때, 여리고성이 무너질 때 , 기드온이 300명 용사로 십이만의 미디안 군대와 싸워 승리할 때 , 다윗이 골리앗을 무찌를 때,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선지자 850명과 대결하여 하늘에서 불을 내릴 때... 모두가 인간의 능력한계 밖의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할수 없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하실 수가 있습니다.
마가복음10:27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하실 수가 있느니라
창세기 17:1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욥기 42:2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이사야 14:24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
불가능한 상황가운데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려면 감사해야 되는 데 감사하기 위해서는 먼저 믿어야합니다.
마가복음 9:23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골로새서 2:7 어린아이 같이 흔들리지 말고 믿음에 굳게 서서 넘치는 감사만하면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미국 텍사스주에 석유가 많이 나오는 '예이츠 유전'이 있다고 합니다. 1930년 경 미국의 대공황으로 불경기가 계속될때 예이츠라는 사람이 큰 목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빛에 쪼들려 목장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했습니다. '기도하기를 이 위기를 넘기게 도와 주십시요. 이 어려움이 회복되고 기적적 은혜를 베푸시면 복음 전하는 일에 일생을 바치겠다'고 하며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루는 석유회사의 기술자들이 찾아와서 이 목장에 석유가 날듯하니 시추를 해 보자고 했습니다. 기술자들이 땅을 팠을 때 석유가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매일 80,000배럴 의 석유가 나와서 일약 석유 부자가 되었고 그 수익으로 복음전파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사람의 능력밖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기적을 감사하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은 체험하게 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6절에 예수님이 시험하십니다. 부족한데도, 보잘 것 없는데도, 불가능한데도 믿음으로 감사하는 가 아닌가 시험하십니다. 이 테스트에 합격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기적은 빌립, 안드레, 열두 제자들 때문에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한 무명의 어린아이 소년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빌립같이 부족하다고 계산 만 하고, 안드레같이 보잘 것 없다고 절망만 하고, 열 두 제자같이 불가능하다고 불평하면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소년은 부족하지만, 보잘 것 없지만, 불가능 하다고 판단되었지만 자기의 가진 것 오병이어를 믿음의 제물로, 감사의 제물로 내어 놓았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이 축사하셨습니다. 여기에 감사의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인도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김태환 목사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다녀온 사람들에게 어디가 가장 인상 깊었느냐고 물어 보면 아마도 갈릴리 호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호수 주변이 참 아름답습니다. 이 호수에 각종 물고기가 살고 있어서 일찍이 어업이 발달했습니다. 호수 북쪽에 벳새다가 있고, 가버나움이 있고, 탑가, 그 남쪽에 디베랴가 있습니다. 모두 갈릴리 호숫가의 어촌들입니다. 이 호숫가 해변을 예수님께서 걸으셨다고 생각하면 그 감동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 해변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셔서 그들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는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갈릴리 호수는 바다 수면보다 200m나 낮고, 깊은 곳은 50 m나 됩니다. 호수 폭은 긴 쪽은 남북으로 약 20km, 동서쪽으로는 약 12km나 되는 큰 호수입니다. 이런 지형적인 특성 때문인지 갈릴리 바다는 예기치 않는 폭풍이 몰아쳐서 고기를 잡는 배들이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 외에도 성경에는 갈릴리 바다에서 폭풍을 만난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번은 제자들이 노를 젓고 있는데 폭풍을 만났습니다. 파도가 몰아 치면서 물이 배 안으로 들어와 배가 가라 않게 되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그 배 안에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우리가 죽게 되었다고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다를 향하여 “잠잠하라!”고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즉시 파도가 그치고 바다가 잠잠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면서 믿음 없음을 꾸짖었습니다. 제자들은 도대체 이 분이 누구시기에 바다도 그 명령에 복종하는가 하면서 놀랐다는 말씀이 마가복음 4:35-41에 나와 있습니다.
오늘 말씀도 갈릴리 바다를 건너다가 예상치 않은 폭풍을 만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때 제자들은 작은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배 안에 계시지 않고 제자들만 바다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날은 이미 어두웠습니다. 약 4-5km 노를 저어 갔는데, 갑자기 강한 바람이 불면서 파도가 거세졌습니다.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 말씀에는 그 때 제자들은 바람을 거스려 노를 힘들게 젓고 있었다고 했습니다(마태복음 14:24, 마가복음 6:48)
그 때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 제자들을 향해 오셨습니다.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 보지 못하고 “유령이다!” 하면서 놀라 소리를 질렀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겁과 두려움에 싸인 제자들에게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기뻐서 예수님은 배 안으로 모셨습니다. 배는 곧 그들의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이 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보고 “주여, 정말 주님이시라면 저에게 물 위로 걸어오라고 하소서” 라고 했는데, 베드로가 물 위를 잘 걸어가다가 거센 바람을 보고 겁을 먹는 순간 바다에 빠졌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마태복음 16:31)” 하시면서 베드로를 꾸짖으셨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읽어야 하겠습니까? 오늘 말씀이 여러분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몇 가지 생각해 보아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첫째는, 제자들이 거센 바람과 파도 때문에 힘들어 하고 있는 현장에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말씀을 읽을 때마다 삶의 용기가 생깁니다. 어떤 경우든지 하나님의 자녀들은 결코 혼자 있지 않습니다. 전에는 교우들의 가정에 그런 그림들이 많이 걸려 있었는데, 이젠 그 그림을 별로 볼 수가 없습니다. 알록달록하게 흑백으로 된 사진인데, 잘 보면 예수님의 초상화가 보이는 그림입니다. 신기하게도 어떤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무리 설명을 해 줘도 안 보인답니다. 제2차 대전의 말기에, 눈에 덮인 중국 오지의 시골길을 의심에 잠긴 한 사진사가 말을 타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주님, 주님의 얼굴을 한번 보기만 했으면 저는 믿겠습니다"라고 중얼거리면서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의 마음 속에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사진을 찍어라, 사진을 찍어라." 그곳은 눈이 녹기 시작하여 이곳 저곳이 진창이 된 들판 길이었습니다. 그는 말에서 내려 급히 그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집에 돌아와 그 필름을 현상했더니, 온유와 사랑이 넘치는 그리스도의 얼굴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 사진을 액자에 넣어서 벽에 걸었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 이렇게 썼습니다. “그리스도는 이 집의 주인이시요, 식사 때마다 보이지 않는 손님이시요, 모든 대화에 말 없이 듣는 이시라.”
여러분의 모든 삶의 현장 속에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신다는 믿음을 가져 보십시오. 오늘 말씀처럼 우리가 힘들어 하는 삶의 현장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슨 일로 실망하고 절망하든지 그 자리에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십니다. 그 말씀이 누가복음 24장에 나와 있는 엠마오로 가는 두 나그네 이야기입니다. 글로바(Cleopas)라는 사람과 또 한 사람의 제자가 예루살렘을 떠나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은 사실 때문에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가지고 있었던 모든 희망이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한 나그네의 모습으로 언제부턴가 이 두 사람과 함께 길을 걷고 계셨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 찬송 가사를 쓴 영국의 존 뉴턴(John Newton, 1725-1807)은 “모든 성경 말씀이 없어진다고 해도 누가복음 24장 말씀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했습니다.
어디 성경에 그 말씀뿐입니까?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 가에서 슬피 울고 있을 때, 예수님은 그 옆에 계셨습니다. 마리아는 그가 예수님인 줄 모르고 동산을 지키는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나중에 마리아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시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이 예수님인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겁과 두려움으로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있던 제자들과도 함께 계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준다고 하시면서 하나님의 샬롬(shalom)을 주셨습니다(요한복음 20:19).
사도행전 23장에도 위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방 세계에 전파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 사도 바울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오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면 위험하다고 그를 말렸습니다. 심지어 유대 출신 아가보(Agabus)라는 선지자는 바울의 허리띠를 가지고 자기 손을 묶으면서 이 허리띠의 임자가 이렇게 손이 묶여서 이방인의 손에 넘겨진다는 성령의 계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바울을 말렸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갔습니다. 가자마자 그는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는지 아십니까?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23:11) The Amplified Bible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the same night the Lord stood beside Paul and said ‘Take courage, Paul!’”
그렇습니다. 내가 힘들어 하고, 내가 실망하고, 내가 절망하고, 내가 두려워하는 모든 삶의 현장 속에 주님이 내 곁에 계신다는 이 믿음 하나가 내 삶을 변화 시킵니다. 삶에 용기가 생기고, 슬픔은 기쁨으로 변하고, 절망은 희망으로 변하고, 두려움 대신 하나님의 샬롬이 내 마음을 채웁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크리스천이라면 마땅히 이렇게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삶을 바꿔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현장 속에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신다는 말씀의 뜻은 그리스도께서 내가 겪는 모든 삶의 문제들을 함께 겪으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구약성경부터 신약성경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이집트)에서 무려 400년 간 애굽인들의 종으로 살았을 때,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어디서, 무엇을 하시고 계셨습니까? 성경에 어떻게 나와 있는지 아십니까?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려 하노라.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출애굽기 3:7-10) 이 말씀에서 주목해서 보아야 할 말씀은 “내가 보았고, 내가 들었고, 내가 알았고(I have seen, I have heard, I have known)”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백성의 아픔과 괴로움을 함께 겪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말씀은 오직 성경에만 나오는 말씀입니다. 성경 외에 어디서도 그들이 믿는 신이 그들의 아픔을 함께 겪는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마태복음 마태복음 27:46, 마가복음 15:34)?” 사람들의 죄 때문에 자기 아들을 버리신다는 말씀이 성경 외에 어디서 그런 말씀을 찾을 수 있습니까?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에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Immediately they arrived at their destination)”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 길에도 목적지가 있습니다. 여행에도 목적지가 있듯이, 우리 인생 길에도 목적지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인생 길을 영어로 “journey(여정)” 라고 하지 않습니까? 어쩌면 제자들이 작은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다가 예상치 않았던 거센 바람을 만나 고생했다는 말씀은 우리 인생의 여정하고 너무나 흡사합니다. 우리의 삶의 여정이 바다에 떠 있는 조각배 같다는 생각을 해 보지 않았습니까? 조각배로 바다를 건너기에는 너무나 힘에 겹습니다. 그리고, 언제 험한 파도를 만날지 알 수가 없어 조심스럽고 불안하기만 합니다.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우리의 인생의 여정에서 무슨 일을 만났건, 얼마나 고생을 했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의 인생의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만 할 수 있다면, 오히려 인생의 여정에서 많은 일이 있었던 것이 더 드라마틱 하지 않습니까? 더 삶의 이야기 거리가 풍성해서 좋지 않습니까? 예. 우리 인생의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만 할 수 있다면 말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장담을 못합니다. 지금 순조롭게 살고 있다고 해서 인생의 목적지에 안전하게 도착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리고, 더 걱정이 되고 염려가 되는 것은 내가 인생의 목적지를 향해 올바로 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때로는 그런 생각이 문득 들지 않습니까? “내가 올바로 살고 있는 것인가?” 아무도 이 질문에 대답을 해 주지 않습니다. 자기가 그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오직 성경만이 그 길을 보여 줍니다. 어떻게, 누구와 함께 우리의 인생 길을 가야 하는지 오직 성경만이 그 길을 보여 줍니다. 오늘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은 요한복음에 나타난 다섯 번째 싸인입니다. 오늘 말씀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셨다는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싸인입니다. 싸인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인도자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한복음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 보다 훨씬 뒤에 기록되었습니다. 학자들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1세기 말로, 서기 85-90년 경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은 거의 60년 간이나 오늘 말씀을 잊지 않고 마음에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그 많은 일들과 싸인들 중에서도 줄 곳 요한의 머리에 떠나지 않았던 말씀이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도움이시고, 우리의 인도자이십니다. 여행 길이 즐겁고 유익하려면 탁월한 가이드(guide)를 만나야 합니다. 탁월한 가이드는 여행의 많은 정보를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런 가이드를 따라가면 힘이 들지 않고 여행이 즐겁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 여정을 목적지까지 무사히 인도해 줄 탁월한 가이드입니다. 스스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여정을 목적지까지 무사히 데려다 줍니다. 마치 험한 바다를 항해한 배가 무사히 항구(harbor)에 들어와 닻을 내린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훌륭한가이드입니다. 히브리서 6장에 이런 말씀이 있지요? 예수님은 우리 “영혼의 닻(an anchor for the soul)”과 같은 분이시라고요. 인생의 여정을 목적지까지 무사히 데려다 줄 탁월한 가이드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여러분의 영혼의 닺을 내리십시오.
내니 두려워말라
문기태 목사
우범 지역에 살고 있는 한 젊은 여인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때 한 신참 내기 경찰관이 다가와 '함께 기다려도 될까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나는 무섭지 않아요'라고 그녀가 대답했습니다. 그 경찰관은 '그런데 저는 무섭습니다. 옆에서 같이 기다려 주시겠어요?'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두려움때문에 울기도 합니다. 놀라 소리지르기도 합니다. 병이 나기도 합니다. 또한 두려움 때문에 현실을 도피하여 달아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두려움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적게 모인 데서는 이야기도 잘 하지만 사람이 많이 모인 데 나서면 그만 입이 열리지 않아서 말을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해서 그럽니다. 남자를 두려워하는 여자도 있고, 심지어 여자를 무서워하는 남자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결혼생활 하면서 어려움이 클 것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빛깔을 두려워합니다. 특히 검은 색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붉은 색을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이는 소리를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큰 소리, 우뢰 소리 같은 것을 아주 무서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밖에도 상상적으로 두려워하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은 건강하지만, 병이 나면 어떻게 하나 미리 두려워합니다. 지금은 이렇게 좋은 직장에서 일하고 있지만, 퇴출당해서 실직하면 어떻게 하나 두려워합니다. 지금은 이렇게 모든 것이 안정되게 살아가고 있지만, 모든 것이 여의치 않아 빈궁하게 되면 어떻게 하나 두려워합니다. 지금은 고독한 것을 모르고 지내지만, 나중에 나이가 많아서 주변의 모든 사람이 떠나고 혼자 남으면 고독해서 어떻게 사나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은 괜찮은데 내일은 어떻게 될까 두려워하고, 지금은 건강하지만 죽을까봐 항상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젊은 여자가 심장이 뛰며 가슴이 항상 아프다고 해서 심장내과 전문의에게 가서 진찰을 받아보았습니다. 전문의가 아무리 현대의학 장비를 다 동원해서 진찰을 해보아도 심장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계속 심장이 뛰고 가슴이 아프다고 합니다. 그래서 심리분석을 하는 학자에게 그 여자를 부탁했습니다. 그 학자가 이 여자와 마주 앉아 상담을 통해서 알아보았더니, 이 여자는 두 번째 결혼한 여자인데 본래 어떤 좋은 남자를 만나서 결혼해서 아주 행복한 생활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남편이 갑자기 병이 나서 그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많은 슬픔을 겪고 몇 해가 지난 후 정말 다행스럽게 다른 좋은 남자를 만나서 다시 결혼하고 지금은 매우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에 '지금 이렇게 행복하게 지내고 있지만 이 남편이 또 죽으면 어떻게 하나?'하는 두려운 생각이 항상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에 결국 이 여자의 심장이 뛰고 가슴이 아팠다고 합니다.
또 오해에 기인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우리를 도와주려고 하는 다가온 사람이지만 해를 입힐 까봐 두려워하고 경계하기도 합니다. , 그리고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일이 일어 났는데도 불구하고 오해를 해서 크게 무서워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다 할 이유가 없는데, 그저 두려운 생각 때문에 늘 마음 가운데 겁을 품고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의식적으로는 모르지만 그 잠재의식 가운데 어떤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어렸을 때 크게 놀랐다든지, 어렸을 때 어떤 무서운 사람에게 고생을 당했다든지 하게 되면 장성해서 이미 지나간 일은 잊어버지만 잠재의식 가운데 이런 두려운 생각이 있어서 항상 그 사람을 괴롭게 하는 심리적 현상이 있을 수 있다고 합니다.
한동안 소위 행운의 편지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 행운의 편지라는 것은 아무 의미 없는 편지로 무슨 소식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쓸데없는 것인데 이 행운의 편지가 자꾸만 빙빙 돌아 다닙니다. 왜 돌아 다니는지 아세요? 그 행운의 편지를 보면 "이 편지를 받은 당신은 큰 복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복을 받으려면 이 편지를 다시 써서 당신이 잘 아는 친구 열 사람이나 혹 열 두 사람에게 보내야 합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 다음에 무슨 말이 있는지 아십니까?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신이 큰 저주를 받습니다." 그러니까 저주받는다는 말이 무서워서 공연히 그대로 베껴서 시간을 낭비하고, 종이를 쓰고, 우표 값을 써 가며 여러 친구에게 보냅니다. 이것은 순전히 사람의 두려워하는 심리를 이용해서 쓸데없는 짓들을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캄캄한 밤중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큰 바람이 불고 물결이 사나워졌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에는 점점 두려움이 커지고 있었습니다.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열심히 노를 젓느라고 고생하고 있는데 바다 위에 사람같은 것이 나타나 다가옵니다. 큰 물결에 보였다, 안보였다 하니까 무슨 귀신이 나타난 줄로 생각하고 크게 무서워 고함을 지릅니다. 사실은 예수님께서 밤중에 갈릴리바다 물위로 걸어 고생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을 도우려고 오고 계신 것인데도 말입니다.
그 밤에 제자들은 몹시 두려웠습니다. 밤에 그들만이 바다를 건너가면서 은근히 두려움에 사로잡히기 시작했습니다. 어둠의 공포가 그들을 눌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협하는 바람과 파도를 만났을 때 그 속에 삼키워 질까봐 주변 환경을 보고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다가 오시는 예수님을 유령으로 오해했을 때 그들은 더 크게 놀라 더욱 두려워하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님을 오해하고 마음속에 숨어 있던 두려움이 커져서 어쩔 줄을 몰랐던 것입니다.
이렇게 공포에 사로잡힌 제자들에게 주님은 "내니 두려워 말라" 고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 너희가 너희만 있어서 두려워했지만 안심하라. 이제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너희가 위험한 바다 한 가운데서 폭풍을 만나 죽음의 위협이 너희를 두렵게 하느냐? 절대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를 위협하는 두려움을 다 쫓아 주마!"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두려움에 떨고 있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니 두려워 말라" 어떤 대적을 만나도 두려워 하지 말아라. 어떤 위험이 엄습해와도 겁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주변에서 사고가 터지고 그 사고가 너에게도 임할 것 같이 느껴져도 두려워 마라 너를 지켜 주마. 질병이 찾아와 위협을 해도 겁내지 말라고 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는데 무엇을 두려워하느냐? 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큰 위험이 찾아 올 때, 여러분에게 두려운 일이 일어날 때 여러분이 놀라 소리를 지를 때, 사실은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찾아 오십니다. 여러분이 사람의 위협을 받게 되고, 여러분이 질병의 위협을 받게 되고 하여 겁을 먹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외 어떤 사고나 무서운 일을 만나 두려워 할 일이 여러분에게 찾아 올 때가 있지 않습니까? 사실은 그 때 예수님도 함께 여러분에게 찾아 오십니다. 여러분들이 두려움 속에서 "내니 두려워 말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바랍니다.
두려움에 사로 잡힐 때 그 영향이 얼마나 큰지 아십니까?
고양이 앞의 쥐를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쥐는 본래 뒷다리가 길어서 빨리 달려갈 수가 있습니다. 뒤따를 수 없을 정도로 빠릅니다. 그런데 이 쥐가 고양이를 한번 본 다음에 빨리 달아납니까? 빨리 달아날 수 있는데, 그러면 고양이한테 잡혀 먹히지 않겠는데 달아나지 못해요. 고양이를 본 쥐는 부들부들 떨면서 맥을 못 쓰고 기어갑니다. 두려워서 그래요. 그래서 쥐는 고양이에게 잡혀 먹힙니다. 왜 그렇게 됩니까? 쥐가 고양이를 보면 잡히기 전에 두려움에 싸여서 신경이 마비되고 근육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움직이지 못하게 됩니다.
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면 공연히 밤에 길을 가다가 바윗돌을 보고도 '아이고, 저게 호랑이가 아닌가?'하며 깜짝 깜짝 놀라고, 썩은 나무 뿌리를 보고도 '아이고, 저기 도깨비가 나왔다'하고 놀라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두려움이 있으면 볼 것을 바로 못보고, 생각을 바로 못하고, 말도 바로 못하고, 신경이 마비되고 근육이 마비되어서 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서커스단에서 줄을 타는 사람이 줄을 잘 타다가도 아래를 잠깐 내려다 보고 두려운 생각이 들게 되면 그순간 줄에서 떨어진다고 합니다. 군인이 전장에 나가서 전투를 잘 하다가도 두려운 마음이 생기면 패전하고 맙니다 이처럼 두려운 마음이 주는 영향이 대단히 큽니다.
더구나 두려워하는 마음이 우리의 육체적 건강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병은 반드시 세균에 의해서만 걸리는 것이 아닙니다. 부상을 당해서만 병에 걸리는 것도 아닙니다. 소위 기능적 질병이라고 해서 여러 가지 심리적 이유로 병에 걸리기도 합니다. 가령 신경 계통의 병, 소화기 계통의 병, 심장 계통의 병같은 것은 대개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근심과 염려 그리고 불안 속에서 세월을 보내다 보면 자연히 걸리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두려움 가운데서 근심과 염려로 얼마 동안 지나게 되면 신경이 쇠약해지고 마지막에는 점점 예민해지다가 심하게
되면 히스테리 같은 상태로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병이 나서 치료받는 사람도 그 병에 대해서 겁을 먹고 두려운 생각이 들어 '내가 이 병 때문에 죽지 않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면 다시 일어나기가 매우 어렵게 됩니다. 많은 사람이 병들어 죽지만 두려워서 죽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합니다.
출애굽기나 민수기를 읽어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인도를 따라 애굽땅에서 나와 여러해 수고를 하면서 광야를 다 지나서 마지막으로 가데스라는 곳에 도달했습니다. 거기서 진격만 하면 가나안 땅입니다. 모세는 그 준비로 열두 지파에서 한 사람씩 대표를 뽑아서 하나님이 주시기로 약속한 땅, 가나안 복지를 정탐하러 보냈습니다. 열두 사람이 40일 동안 정탐을 마치고 돌아와서 보고를 합니다. "거기에 가보니까 참으로 땅이 좋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곳입니다. 이 포도를 보세요. 포도 한 송이를 둘이 메고 왔습니다. 참 좋습니다. 너무 좋습니다. 어서 그 땅을
차지하러 가십시다." 이 말은 여호수아와 갈렙이 보고한 말입니다.
그런데 열 지파 대표들은 말이 달랐습니다.
"우리가 가보니까 땅이 좋긴 합니다. 그런데 거기 사는 아낙 자손은 키가 크고요, 모두 건장한 거인들인데 우리를 그들과 비교해 보니까 우리는 메뚜기처럼 보입니다. 그러니 땅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메뚜기 같은 우리가 어떻게 그 거인의 땅을 점령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겁부터 집어먹고,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두 사람의 말보다는 열 사람의 말을 듣고 두려움에 싸여서 지도자 모세를 원망하고 통곡하면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울부짖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하다가 두려워하던 사람들은 다 죽고 말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백성들에게 패배한 것이 아니고 두려움에 패배한 것입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나님께 불순종했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놀라운 선물을 포기하고 거지처럼 비참하게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여 두려워하지 않던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새로운 세대 사람들이 함께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 누린 것입니다. 그들의 앞을 가로막은 대적을 쉽게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요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뿐만 아닙니다. 욥기 3장 2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게 되면 그대로 되기 쉽다는 말입니다. 사업을 하는데 항상 '실패하면 어쩌나'하는 마음으로 사업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은 실패하기가 쉽습니다. 두려우니까 생각도 바로 못하고, 일도 바로 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에 서반아 왕 가운데 페르디난드 5세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이 왕이 어떤 점쟁이에게 "왕께서는 마드리갈이라고 하는 곳에는 아예 가지 마십시오. 그 마드리갈에서 왕께서 장차 죽을 것입니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왕의 별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은 두려워서 좋은 별궁을 지어 놓고도 21년 동안 거기에 가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한번은 서반아 지방을 여행하다가 어떤 조그마한 촌락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거기서 몸살을 앓게 되었습니다. 왕은 신하에게 "이 지방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옆에 있던
신하가 "네 폐하, 이 곳 이름은 마드갈레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마드갈레'가'마드리갈'과 발음이 비슷했습니다. 사실은 마드리갈은 아니고 비슷한 이름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왕은 '아이구, 나는 이제 죽었구나!' 하더니 며칠 안 되어 정말 죽었다고 합니다. 병이 왕을 죽인 것이 아니라 두려움이 왕을 죽였습니다. 두려움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이 두려움을 온전히 이기고 든든한 믿음과 평안한 마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이 대지에서 활보하면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분명히 들으세요. 하나님이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부르신 것은 두려움을 이기고 평안한 마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평강으로 기쁘고 즐겁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이런 지경에 들어 가지 못한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두려운 마음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
근본적으로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오늘 주신 말씀 20, 21절을 보세요. (요 6:20) '가라사대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신대 (요 6: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라고 말씀했습니다.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살아 계신 하나님인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여 온전히 그를 의지하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연약한 인생을 향하여 수없이 "두려워하지 말라"고 자주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15장 1절을 보세요.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이 방패가 되어서 막아 줄 터이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도단성에 있을 때 밤중에 아람 군대가 포위했습니다. 아침 일찍이 엘리사의 종이 일어나 이 광경을 보고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그때 엘리사가 한 말을 기억하십니까? 열왕기하 6장 16절에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엘리사가 하나님께 종의 눈을 열어 달라고 기도할 때에, 그 종이 눈을 뜨고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도단성을 겹겹이 둘러서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고 두려움이 없어지고 새 용기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위험한 곳에 서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게 될 때 천군과 천사가 우리 편이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믿음으로 충만하면 두려움은 자연히 물러갑니다. 시편 27편 1절을 보세요.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했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기독교청년운동을 시작한 미국의 롤링 박사는 아침에 잠에서 깨면 제일 먼저 "나는 믿습니다. 나는 믿습니다. 나는 믿습니다"라고 세 번 반복했다고 합니다. 물론 그 뜻은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하는 말입니다. 그 목적은 그의 마음속 잠재 의식에까지 믿음으로 충만케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침에 일어나서 다른 일을 하시기 전에 그렇게 해보세요 용기와 확신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외워 보세요. 시편 23편을 외워 보세요. 이사야 41장 10절을 외워 보세요. 마음속의 모든 두려움이 자연히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고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확실히 서로 다른 것이 하나 있습니다. 사복음에 나타나는 제자들의 생활을 보면 예수님을 가까이 모시고 살면서 여러가지 진리를 배우고 놀라운 기적도 보았지만 두려워하는 마음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갈릴리바다에 풍랑이 일어날 때 무서워했고, 예수님이 로마 군사에게 붙잡히실 때 다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베드로 같은 수제자도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따라간 것은 좋지만 거기서 분위기를 보고 두려운 생각이 들어 어떤 계집종에게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두려워서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에도 남은 제자들이 어느 집 방에 모여서 문을 굳게 닫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두려워서 그랬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을 보면 제자들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두려움이 없어졌습니다. 베드로는 두려워서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었지만, 이제는 많은 사람이 모인 앞에서 예수는 과연 메시야라고 담대하게 증거했습니다. 두려움이 없어졌습니다. 대제사장과 그 일당이 사도들을 잡아다가 때리고 위협했지만, 그들은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옳으냐?, 사람의 말을 순종하는 것이 옳으냐? 너희 스스로 판단해 보라"고 했습니다. 매맞고 나오면서도 기쁨으로 찬송을 부르고 또 다시 그 자리에 가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두려움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복음서 시대의 사도와 사도행전 시대의 사도 그 중간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열흘 동안의 기도가 있었고, 오순절에 성령이 그들 마음 가운데 강림했습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자 그들 마음속에 두려움이 없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항상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어떤 말씀보다도 하나님께서 자주 우리 인간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에게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야곱에게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에게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에게도,
다니엘에게도, 엘리야에게도, 모든 선지자들에게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오셔서 시몬에게도 "두려워하지 말라," 야고보에게도 "두려워하지 말라," 바울에게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다른 제자들에게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두려움이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 할 때에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극에 달했을 때 국가의 장래를 염려하는 사람들과 링컨대통령이 서로 대화하는 자리를 가졌습니다. 이 자리에서 한 청년이 "이제 미국이 끝장나는게 아니겠습니까?"라며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 링컨은 청년의 손을 잡고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청년시절,덕망높은 노인과 가을밤을 바라보았는데 그때 무수한 별똥이 떨어져 내려 두려워했더니 노인이 내게 말했습니다. 저 무수한 두려움을 바라보지 말고 더 높은데서 반짝이는 별들을 보게나 하고"
여러분도 여러분을 위협하는 문제를 보며 염려하고 두려워하고 있지 않습니까? 두려움을 바라보지 말고 더 높은 곳에 계시며 문제의 해결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 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에게 다가와 "내니 두려워 말라"고 부드럽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두려움이 모두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 인간 생활에서 행복을 빼앗는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죄요, 다른 하나는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악에서 구속하실 뿐만 아니라 두려움 가운데서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를 믿고, 의지하고, 성령을 충만히 받으면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양상을 보면 과학 문명이 발전되었고, 예술이 발전되고, 모든 방면에 큰 진보와 발전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인처럼 두려움에 싸여 사는 사람들도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참으로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두려움 많은 세상에서 두려움 없이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두려움을 온전히 극복하고 평안의 선물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폭풍의 바다를 건너는 여행
이동원 목사
1988년 1월 4일 OM 선교회 소속 로고스 배는 알젠틴 우수아이아(Ushuaia)항을 떠나 지구의 최남단 비글 해협을 돌아 남태평양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 배에는 모두 141명의 선교사 가족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한순간 큰 파도에 배가 흔들리면서 배가 20도 가량 기울자 배안에 타고 있던 모두는 공포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배의 함장으로부터 "모두 놀라지 말고 침착하라"는 방송과 함께 "이런 때를 대비하여 훈련받은 대로 모두 구명복을 착용하고 식당에서 기도하며 대기하라"는 지시가 내렸습니다. 새벽 5:10분경 배를 포기하고 모두 작은 배로 옮겨 타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로고스에 승선하고 있던 선교사 가족141명 모두는 한 사람도 상하지 않은 채 약 20분후인 새벽 5:30분경 미리 연락을 받고 온 칠레 해군에 의해 전원 구조되었습니다. 그동안 로고스 호는 약 17년 동안 세계 107개 국,402개의 항구도시들을 방문하며 이 배를 찾은 7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약 3천만부의 기독교 전도문서들을 제공할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선교적 목적의 배에 주께서는 왜 무슨 이유로 폭풍이 찾아와 배를 버리는 사고가 일어나도록 허용하셨을까요?
그런데 약 2천년전 예수의 제자들이 타고 있던 배 한척이 갈릴리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을 향하던 중 유사한 폭풍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역시 그때의 제자들도 두려워하고 놀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 14:22에 의하면 그때 사실상 제자들은 예수님의 재촉으로 거의 강제적으로 배에 태워져 바다 건너편으로 가고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폭풍은 사단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고, 제자들의 실수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었으며, 예수께서 친히 허용하신 사건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명확해 집니다. 예수 믿고 예수를 따르는 자들의 인생에도 폭풍은 반드시 경험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삶이란 오늘의 설교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폭풍의 바다를 건너는 여행"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폭풍의 바다를 건너는 여행을 할때 본문을 통해 배워야 할 레슨은 무엇일까요?
1. 폭풍속에 처함이 주께 버림받음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가 어느날 갑자기 파도와 풍랑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두가지 보편적인 심리적 경험을 갖습니다. 하나는 버림받음의 느낌이며, 또 하나는 홀로됨의 느낌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런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은 나를 버리신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과 함께 이 고통속에 처한 나를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며 나는 홀로 남겨졌다는 생각말입니다. 그때 우리는 도대체 "하나님,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묻게 됩니다. 갈릴리 바다 한 복판에서 폭풍을 만난 제자들의 심정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본문 17절을 보십시오."--(날은)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같은 사건을 기록한 마가복음의 기사를 읽어보면 사정은 달라집니다. 마가복음 6장 45절 이하에 보면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작별한 후에 갈릴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에 올라가 기도하시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한 순간 그는 제자들이 바다 한 복판에서 갑자기 일어난 폭풍으로 괴롭게 노를 젖고 고생하는 모습을 보시고 계시다가 바다 한 복판으로 달려나오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마가6:48을 보십시오."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젖는 것을 보시고--"
그렇습니다. 그분은 보시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시간에 그는 도움을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가 폭풍중에 처할때 반드시 기억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 도움없이 홀로 버려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보시고 계십니다. 우리의 아픔 우리의 고통의 현장을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기도하고 계십니다. 우리 주님이 말입니다. 그러면 된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안심할수 있지 않습니까? 마가 복음6:50에서는 그가 마침내 제자들 곁에 오셔서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폭풍중에서도 안심할수 있어야 합니다. 작년초에 있었던 일에 대한 개인적인 간증을 하나 하겠습니다. 한창 우리교회 비전센타 건축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었을때 제 마음이 조금은 무겁게 느껴진 때가 있었습니다. 과연 우리가 이것을 잘 감당할수 있겠나? 라는 생각과 함께 건축헌금은 기대처럼 약정되지 않고 있었을때이었습니다. 한날밤 잠은 오지 않고 불안한 생각과 염려가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생각 저 생각을 하고 있다가 성경을 열었는데 마가복음 6장이었습니다. 그런데 6:50을 읽다가 이 말씀이 이렇게 읽혀지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 쓰여 있기는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인데 실제로 제게는 이렇게 주께서 말씀하시는 것으로 들려 오고 있었습니다. "안심하라. 안심하고 내게 맡기고 너는 잠이나 자라"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러면 자겠습니다."하고 잤습니다. 그날밤 잠은 너무나 달았고 그후 저는 이 문제로 크게 걱정해 본일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주님의 말씀을 따라 바다로 나아가셨다면 우리가 만난 폭풍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안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단순히 폭풍을 만났다는 사실만으로 버림받았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2. 폭풍속에 필요한 도움이 곧바로 오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도상에서 폭풍을 만나 주의 도움을 부르짖어 구할 때 때로 우리는 기적적으로 즉각적인 도움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가 도움을 부르짖어 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도움이 즉각적으로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의 경우가 그런 케이스에 해당됩니다. 엘리야의 갈멜산상의 기도가 그런 케이스에 속합니다. 그는 가물어 기근이 극심한 그 땅에 하늘 문을 열어 주께서 비를 주시기를 기도했지만 그의 종이 바다편에 가서 일곱 번씩이나 확인할 때까지도 아직 비 소식은 없었습니다. 나사로의 케이스가 또한 그런 경우에 해당됩니다. 나사로가 병들었을때 그의 누이들은 사람을 예수님에게 보내어 나사로가 병든 소식을 알렸습니다. 그런데 요한11:6에 보면 이때의 예수님의 반응을 이렇게 기록합니다."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주께서 바로 달려가신 것이 아니라 지체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죽은지 나흘이 되어 그의 무덤에 도착하십니다. 왜 그랬습니까? 치유의 기적보다 더 위대한 부활의 기적을 행하시기 위해서 이었습니다. 그의 지체에는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필요한 도움이 바로 오지 않는다 해서 우리는 결코 실망할 이유는 없습니다. 다시 본문의 사건을 분석해 보겠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이 갈릴리에서 배를 탓을 때는 밤 9시경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어서 오래지 않아 그들이 풍랑을 만났을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파도가 심하여 배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고 아직도 6시간은 더 지나야 바다 건너편에 도착할 것으로 보여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찾아오신 시간은 새벽3시에서 6시 사이(마태14:25-밤 4경)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 19절에 의하면 파도속에 십여리(약5-6km)를 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폭이 약 10km이었기에 제자들은 바다 한 복판에서 사투를 계속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사투를 계속하며 주의 도움을 구했건만 응답은 주어지지 않은 것과 동일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이 응답의 거절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결정적인 때에 드디어 주님은 오셨기에 말입니다. 주님의 때에 주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응답이 없다해서 절망하지 마십시다. 다만 주님의 때가 되지 않은 것을 기억하십시다. 그리고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는 급하지만 그분의 때는 우리의 때와 다를 수가 있습니다. 그분이 판단하신 적기에 그분은 반드시 오십니다.
3. 폭풍속에 찾아오시는 주를 만나 목적지로 인도된다는 것입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지쳐갈 무렵 거의 포기할 무렵 드디어 주님은 오셨습니다. 그는 물위를 걸어 오셨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이 파도를 헤쳐온 동일한 바다 길을 헤치며 오셨을 것입니다. 제자들을 위협하던 동일한 파도를 타고 주님은 오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그는 오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전혀 예측하거나 기대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마침내 우리의 고난의 현장에 임하시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구세주를 우물에서 만날 줄 어떻게 예측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체포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던 청년 사울이 어떻게 그 길이 주님을 만나 변화될 길인줄 알았겠습니까? 빌립보 감옥에 죄인으로 수감된 바울과 실라가 어떻게 거기에서 주님의 구원의 기적을 경험할 기대나 했겠습니까? 주님은 우리의 기대를 초월하는 방법으로 주님의 때에 우리를 찾으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드디어 주께서는 제자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기쁨으로 제자들은 주님을 배 안으로 영접하였고 드디어 배는 목적지에 도달했습니다. 21절을 읽어보십시오.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파도와 풍랑이 결국 그들의 행로를 막지 못한 것입니다. 방해는 되었지만 마침내 제자들은 목적지에 도달한 것입니다. 파도와 풍랑, 폭풍을 이기고 도달했기에 그 기쁨은 더 큰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제자들이 이때 경험한 기쁨이 상당한 슬픔과 두려움의 시간 이후에 경험한 기쁨이요 환희였던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이라는 시간이 슬픔이요 두려움인 분들이 계시다면 이 슬픔과 두려움 속에서 잊지 말아야 할 레슨이 있습니다. 주님이 보이지 않아도, 응답이 오지 않아도, 상황이 빨리 개선되지 않아도 인생의 결론이 이렇게 비극으로만 끝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목적지에 결국 도달할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폭풍의 한 복판에서 주님은 우리를 지켜보시고 함께 아파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한 순간도 잊지 마셔야 합니다.
1986년도 노벨 문학 수상작가였던 유대인 엘리 위젤이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엘리 위젤은 세계 제2차 대전중 나치 독일의 홀로커스트(대학살)생존자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목전에서 자기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누이가 형장이 이슬로 사라져 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가족의 죽음이상으로 그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한가지 사건을 그는 회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불과 13살 정도된 한 소년이 옥에서 탈출을 시도했다는 이유 하나로 전체 수인들이 집합된 자리에서 교수대에 그의 목이 매달려 죽임당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된 것이었습니다. 반시간 이상 목졸린 채로 허공에 매달려 몸부림치며 혀를 내밀고 눈은 아직도 살아 움직이는데 피를 흘리고 서서히 죽어가던 이 소년을 보면서 엘리 위젤은 자신의 가슴속에서 피눈물나는 외마디 절규를 토해내고 있었다고 합니다. " --하나님,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그런데 갑자기 그때 그는 자기 안에서 들려오는 한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 소리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나 난 저 소년과 함께 저 교수대에 매달려 있지" 수년후 엘리 위젤이 생존자가 되어 불란서 파리에 가서 유명한 작가 프랑수아 모리악(Francois Mauriac)을 만났을때 그 체험 이야기를 들려주자 모리악은 조용히 엘리 위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당신에게 나타난 그분이 바로 십자가에 못박히셨던 예수 그리스도라고 믿고싶소--이천년전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와 고통을 대신 질머지신 그분은 지금도 우리가 당하는 고통속에 함께 하시는 분이시지요"
그렇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경험하는 고통의 이유가 이해되지 않을때 이것만은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는 당신의 고통속에 함께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넌 혼자가 아니야. 내가 함께 하고 있는걸 잊지 말아야 해. 그리고 난 당신을 반드시 저 바다 건너 영원한 목적지로 인도할 거라고" 진실로 그분을 신뢰하시고 오늘의 폭풍의 바다여행에 마침내 승리하시는 당신이시기를 기도합니다.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요 6:1-13 / 김광선 목사
■ 미국 뉴욕을 관광하는 여행객들이 빼 놓지 않고 가는 유명한 관광 명소가 하나 있는데 뉴욕에서 가장 높은 빌딩, 102층짜리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입니다. 왜 102층으로 지어졌는지 아십니까? 1,620년 영국의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배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최종적으로 미국 땅에 도착한 사람의 수는 남자가 78명, 여자가 24명 합계 102명이었습니다. 오는 도중에 절반 이상이 추위와 괴혈병으로 죽었다고 합니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102층으로 지어진 것은, 이렇게 많은 희생자를 내고서 미국 땅에 도착한 이들 102명을 기념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 102명은 대부분 도시 출신들이었습니다.
농사짓는 방법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미국에 도착한 첫 해에 농사를 지었으나 수확은 시원치 못했습니다.
장차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앞이 막막했습니다.
금식을 선포하고 기도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모두가 절망하고 좌절해 있을 때, 한 사람이 이런 제안을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우리는 힘들 때마다 금식하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한 번쯤 우리의 생각을 고쳐볼 필요가 있는 줄 압니다.
물론 우리가 영국에서 살 때보다도 형편이 어려워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사할 조건들을 찾을 수 있는 줄 압니다.
우리에게는 이제 신앙의 자유가 있습니다.
또 우리의 눈앞에는 광활한 대지가 펼쳐져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얼마든지 무한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금식을 선포하지 말고 차라리 감사를 선포하십시다.
우리가 감사의 주간을 정하고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더 많은, 더 깊은 감사를 하나님께 드려보면 어떻겠습니까?”
그의 말에 그곳에 있는 모두가 깊은 감화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금식주간을 선포하지 않고 대신 감사주간을 선포했습니다.
그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믿음으로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이것이 추수감사주일이 태동하게 된 배경이라고 합니다.
미국 건국의 조상들의 이런 감사가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미국을 그렇게 축복하신 것입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우리의 형편은 당시 청교도들처럼 생사를 넘나들 만큼 어려운 상황은 분명 아닙니다.
우리는 좋은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당시 청교도들은 한 끼 한 끼 먹는 문제가 가장 큰 문제일 만큼 절박했었습니다.
우리는 그 정도는 아닙니다.
입맛에 맞게 골라 먹을 때가 더 많습니다.
그들은 박해를 피해서 타지로 목숨을 걸고 이주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직장과 사업을 따라 비행기를 타고 이주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인디언들의 습격으로 늘 목숨의 위협을 받고 살았습니다.
거기 비하면 우리는 엔터네인먼트를 생각하면서 삽니다.
이런 좋은 환경에서 한 해를 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할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까?
지난 한 해를 뒤 돌아 보면 가정적으로 어려울 때도 있었고, 질병으로 고통을 당했을 때도 있었고, 직장이나 사업이나 공부 때문에 힘들었을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청교도들처럼 어쩌면 금식을 선포해야 할 상황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보다 훨씬 어려웠던 그들은 금식을 선포하기보다 차라리 감사를 택했습니다.
극한 어려움 속에서도 감사의 조건들을 찾아내어 드린 그들의 눈물겨운 감사는 추수감사절을 태동시켰고, 전 세계 크리스천들이 오늘을 추수감사절로 지키면서 한 해 동안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헤아리면서 감사케 하고 있습니다.
올해 추수감사절은 좋은 시절에 태어나 살게 하신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하고, 혹 어려울지라도 청교도들처럼 오히려 어려움 속에서 감사의 조건을 찾아 하나님께 감사하는 그런 추수감사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금년 추수감사절은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요6:1-13)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여러분들이 잘 아는 것처럼 디베랴 광야에서 예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인 기적의 사건입니다.
주님은 무리들이 먹고 남은 부스러기들을 버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부스러기들을 모으니 그 남은 조각이 열 두 광주리에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왜 예수님은 버려도 될 부스러기들을 버리지 말라고 하셨는지 그 이유들을 살펴봄으로 추수감사절을 맞아 감사의 이유를 찾기를 원합니다.
I. 예수 기적의 흔적을 버리지 말라
예수님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인 이후에 그 부스러기들을 버리지 말고 모으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을 위해, 그를 따라는 사람들을 위해 표적의 흔적을 간직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은 표적이 아니면 예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요한복음 4장 48절에,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의 떡과 물고기를 먹은 사람들은 한 입으로 말하기를,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요6:14)고 했습니다.
표적을 보고 나서야 예수님을 ‘그 선지자’라고 말했습니다.
‘그 선지자’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 즉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기다렸던 자신들을 구할 메시야입니다.
구약성경 전체 내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메시야를 보내 주시겠다는 언약입니다.
신약성경 전체의 내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이 땅에 오신 예수가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다고 한 ‘그 선지자’인 메시아 그리스도라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그리스도인 것을 구약에 예언된 표적들을 친히 베푸심으로 증거해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그 표적을 보고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았습니다.
예수께서 가나의 결혼식장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습니다.
요한복음 2장 11절에,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고 했습니다.
표적을 보고 나서야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게 되었습니다.
죽은 지 사흘이 되어 무덤에서 썩고 있는 나사로를 살리러 오신 예수님 앞에 나사로의 여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요11:27)
그 믿음대로 예수님은 무덤에 있었던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그 표적을 본 나사로의 가족과 온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였습니다.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과연 예수께서 구약에 예언된 ‘그 선지자’ 메시아 그리스도인지를 제자들을 통해 물었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나이까.
그때 예수께서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했습니다.
이는 구약에 이미 선지자 이사야가 이사야 35장과 61장에서 예언한 메시야 증거입니다.
그 예언 그대로 표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메시야, 그리스도이심을 확증했습니다.
누가 이 같은 표적을 보인 자가 역사상 있습니다.
만일 이런 표적을 행했다면 그는 그리스도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의심 많은 제자 도마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도마에게 직접 나타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실 때 도마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은 이처럼 예수께서 행한 표적으로 꽉 차있습니다.
그 표적은 다 구약 성경에 예언된 것들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메시아 그리스도이심을 표적을 통해 분명히 증거하셨습니다.
만일 예수께서 구약에 예언된 그리스도라면, 그리스도를 보내시겠다고 언약하시고 그 언약을 이루신 하나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성실하시고, 자비하시고, 영원하시고, 세상을 통치하시는 주권적인 살아 계신 하나님이신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은 성경 스스로가 진리임을 자증하는 원리인 것입니다.
성령께서 택자들의 마음을 열어 이 사실을 깨닫게 하심으로 성도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임을 믿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 도마처럼 “나의 왕, 나의 주시여”라고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3장 8절에, “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믿음을 갖고 있는 성도들은 올 한 해도 예수께서 베풀어 주신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살게 되었음을 진심으로 고백하게 됩니다.
한 해 동안 살아오면서 여러분들이 받았던 신령한 은사, 영적인 치유와 체험들, 기도 응답들.......
하나도 버리지 마시고 열 두 광주리에 채워 보세요.
한 해 동안 얼마나 큰 기적의 은총으로 살았는지 진심으로 깨닫는 추수감사절이 될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의 흔적들을 버리지 말라고 하신 것은,
II. 예수 축사의 흔적을 버리지 말라
본문 11절에,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많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축사하신 후 떡과 고기를 나누기 시작하자 거기 있었던 오천명의 사람들이 먹고 다 배불렀습니다.
여기 ‘축사’란 ‘축복하다’ ‘축복을 빌다’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축사하실 때 거기 있었던 사람들의 먹고 마시는 문제가 해결이 되었습니다.
예수 축사의 흔적을 버리지 말고 열 두 광주리에 담아야 할 이유는 예수님은 우리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시는 실제적인 주님이시라는 것을 잊지 않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을 우리에게 떡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고기를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입을 옷을 주십니다.
예수께서 산상수훈을 통해 이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
먹을 것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입을 것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안 하고 길쌈도 안 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먹을 것 주시고, 입을 것 주시는 하나님은 직장도 주시고 사업도 주시고 학업도 주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7장 28절에,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숨 쉬는 것, 발걸음 하나 옮기는 것, 먹고 소화시키는 것, 내 보내는 것, 피가 도는 것.......
내가 합니까?
이번에 우리 아내가 댕기 피버로 죽을 뻔 했는데 혈소판이 16,000까지 떨어졌습니다.
정상인의 혈소판 수치는 15만입니다.
그래서 급하게 인도피, 한국피 수혈을 받았는데 잘 안 올라가요.
안 올라가면 죽습니다.
혈소판을 누가 올립니까?
의사들은 자기들이 치료하는 게 아니라고 합니다.
자기들은 치료를 도울 뿐이지 하나님이 치료하신다고 솔직히 말합니다.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혈소판 올리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고 있습니다.
직장생활 잘하고, 사업 잘해서 돈 버는 것, 내가 잘 나서 버는 것 아닙니다.
신명기 8장 18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고 했습니다.
직장생활 잘하고, 사업 잘해서 돈 벌 때 누구 덕분에 그렇게 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라는 것입니다.
나는 올해도 내가 돈 벌어서 먹고 살았습니다.
내가 열심히 직장 다니고 내가 열심히 사업해서 먹고 살았습니다.
내 먹고 사는 문제에 관한한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어리석은 자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누가복음 12장에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한 부자가 농사를 잘 지었습니다.
곡식을 저장할 곳이 모자랄 정도로 풍성한 수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자는 생각했습니다.
옛날 창고들을 다 헐고 크게 새 창고를 지어야하겠다.
그리고 곡식을 저장해야겠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말합니다.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그날 밤 하나님께서 부자에게 말합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내 힘으로 돈 벌어서 내가 먹고 산다고 사는 사람은 다 이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밥 먹을 때 밥 주신 하나님께 기도하고 먹습니까?
밥을 주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라고 믿는다면 나의 전 생애 모든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도 믿는다는 고백입니다.
어떤 분들은 밥을 먹을 때는 기도하고 먹는데 라면을 먹을 때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왜 기도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더니 “라면 이하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커피 마실 때도 속으로 기도하세요.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지난 홍콩 포럼에 LA 로뎀교회 목사님이 참석했습니다.
그 목사님 교회에 사업을 하는 성도가 있는데 어느 날 ‘폐업 감사예배’를 드려 달라고 전화가 왔더래요.
개업예배는 숱하게 드려 봤는데 ‘폐업감사예배’라는 것은 듣지도 보지도 못해 의아해서 물었데요.
“집사님, 폐업감사예배를 왜 드리려 합니까?”그 집사님 대답이 “개업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폐업하게도 하시고, 사업이 잘 되게 하시는 하나님은 안 되게 하시는데 폐업케 하시는 하나님께서 앞으로 잘 되게 하시지 않겠습니까?”그래서 처음으로 폐업감사예배를 드렸는데 감동스러웠다는 것입니다.
잘 되거나 안 되거나 그것을 주님의 뜻으로 알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믿는 그 집사님은 지금 사업을 아주 크게 잘하고 있다고 합니다.
올해 한 해 동안 베풀어주신 예수 축사의 흔적들을 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잘 된 일, 안 된 일, 좋은 일, 슬픈 일, 버리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의 흔적을 버리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III. 예수 축복의 흔적을 열 두 광주리에 담으라
본문 13절에,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고 했습니다.
왜 예수께서 남은 조각들을 버리지 말고 열 두 광주리에 담으라고 했겠습니까?
그것은 축복의 흔적을 잊어 버리지 말라는 싸인입니다.
그 축복의 흔적을 가지고 있을 때 감사와 감동이 이어질 것입니다.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또 다시 나누어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였다면, 열 두 광주리에 가득한 물고기와 보리떡으로 몇 명을 먹일 수 있겠습니까?
오만 명도 더 먹일 수 있습니다.
열 두 광주리는 또다시 나누기 위한 광주리입니다.
열 두 광주리를 나눌 때 예수 기적의 흔적이 다시 나타나게 됩니다.
열 두 광주리를 나눌 때 예수 축복의 흔적이 다시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열 두 광주리가 있어야 할 이유입니다.
주께서 한 해 동안 여러분들에게 베풀어 주셨던 예수 기적의 흔적들, 예수 축복의 흔적들을 함께 모아 ‘임마누엘 열 두 광주리’에 가득 채웠습니다.
‘임마누엘 열 두 광주리’에 가득찬 예수 기적의 흔적들, 예수 축복의 흔적들을 보는 것은 참으로 즐겁고 감사한 일입니다.
‘임마누엘 열 두 광주리’ 안에 땅의 축복이 담겨져 있습니다.
말씀하시고 말씀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교회가 개척된 지 15년이 되었습니다만 아직도 셋방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델리교회도 남의 인도 교회당 빌려 쓰고 있고, 구르가온교회도 인도 교회당 빌려 쓰고 있습니다.
그마나 이것도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몇 년 동안 돈도 없으면서 수 없이 땅을 보러 다녔습니다.
그래서 땅 달라고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저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시기를, “아직 때가 되지 않았으니 기다려라 때가 되면 내가 친히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도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계속 땅을 보러 돌아 다녔습니다.
그만큼 답답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현실과 맞지 않아 내가 해결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만큼 제가 믿음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보다 믿음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결국 시간만 낭비하고 에너지만 낭비하고 실망만 커갔습니다.
그런데 올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땅을 주셨고 지금 주시고 계십니다.
두란노 아카데미 건물 지을 땅 152평을 그레이트 노이다 신도시 요지에 구입했습니다.
어제 우물을 팠습니다.
야채와 나무를 심으려고 합니다.
그레이트 노이다 땅 계약하기로 한 날 한국에 있는 치과 의사 배성제 원장님이, 우리 교회 교인도 아니고 제 설교를 직접 들어 본 일도 없는 분이 홈 페이지에 들어와 그것도 작년 설교를 읽다가 인도 목회자들을 훈련시키는 ‘설교 아카데미’부지를 구입해야 한다는 내용을 읽다가 감동을 받고 오천만원을 보내주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돈을 받아 북인도 데라둔 지역에 땅을 구입하고 현재 중도금까지 치룬 상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이 일을 하고 계신다는 확실한 싸인입니다.
그리고 비하르에 가나안 농군학교와 지역사회개발을 위한 영어로 가르치는 초, 중고등학교 설립을 위한 땅 구입을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그 지역의 땅 값은 아직 싸기 때문에 할 수만 있으면 많이 구입하려고 합니다.
5년 가까이 땅을 보러 다녔는데 단 한 평도 구입할 수가 없었는데 어떻게 한 해에 세 군데의 땅을 구입할 수 있겠습니까?
“때가 되지 않았으니 기다려라 때가 되면 내가 친히 이루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임을 보여 주시는 축복의 한 해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땅 살 돈을 내려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헌금들이 있습니다.
아무나를 통해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뭐가 모자라는 분이 아닙니다.
받으실만한 백성들을 통해 하시는 것입니다.
대지 구입을 하면서 ‘임마누엘 열 두 광주리’에 가득찬 주님 기적의 흔적과 축복의 흔적을 보았습니다.
올해도 ‘임마누엘 열 두 광주리’를 열어 열심히 나누어 주었습니다.
두란노 아카데미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기적의 떡과 고기를 먹고 사는 친구들입니다.
이 큰 인도라는 나라에서 어떤 사람이, 어떤 기관이 인도 학생들에게 무료로 최고 시설의 아파트를 제공해 주고, 먹여 주고, 재워 주고, 일류 영어 학교에 보내 주고, 과외 시켜 주고, 전담 인도 목사를 붙여 신앙과 인성 교육 시켜 주고, 용돈 까지 줘 가면서 키웁니까?
임마누엘 교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열 두 광주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10년 후, 15년 후, 그들이 인도 사회에 나가 리더들이 되어 살 때 그들 역시 예수 기적의 흔적이 담긴, 예수 축복의 흔적이 담긴 열 두 광주리를 가지고 나누어 주면서 살게 될 것입니다.
이번 달 ‘임마누엘 열 두 광주리’를 열어 데라둔에서 설교 아카데미를 했습니다.
설교 아카데미에 영의 양식과 육의 양식을 공급했습니다.
인도 교회를 살리는 운동을 했습니다.
‘임마누엘 열 두 광주리’를 열어 45명의 목회자 자녀들에게 전액 학비를 지원했습니다.
자녀들과 목회자들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를 보냈습니다.
‘임마누엘 열 두 광주리’를 열어 8개의 현지교회 목회자들을 불러 교육하고 사례비 일부를 주었습니다.
여러분들이 만든 ‘임마누엘 열 두 광주리’는 여러분들을 위해 주께서 남겨 두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나누어 주면서 기쁘게 행복하라고,
여러분들 자신의 축복과 하늘의 상급을 위해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임마누엘 성도 여러분,
정직한 마음으로 내 광주리를 보십시오.
많이 받았습니다.
받은 만큼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감사를 표하시기 바랍니다.
시편 50편 23절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했습니다.
받았으니 열 두 광주리를 열어 주의 ‘기적의 흔적들’을, ‘축복의 흔적들’을 나누어 주시기 바랍니다.
나를 통해 거기 또 다른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타나게 하십시오.
열 두 광주리를 갖는 추수감사절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구역공과 나눔>
1. 추수감사절이 태동하게 된 배경을 살펴 보고 그들의 형편과
우리의 형편을 비교하여 우리가 얼마나 큰 은혜를 받고 사는지
나누어 보자
2. 오병이어의 기적의 의미는 무엇인가?
3. 어떻게 나도 열 두 광주리를 가지고 살 수 있을까?
오병이어
요 6:1-13 / 안양준 목사
1. 빈 들
오병이어에 대한 말씀은 마 14:과 눅 9:에도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병행해서 보는 것이 좋습니다. 마 14:15에는 장소와 시간이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곳은 빈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빈 들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벳세다 들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빈 들”이라는 표현은‘아무 것도 없다’는 의미로 생각하시면 이해하기에 더 편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이미 저물었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가? 때가 저물면 저녁 식사를 해야 하는데 그래서 모두가 시장한 상태에 있습니다.
그리고 저물어가는 벳세다 들판에 굶주림에 지친 군중들은 어쩌면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고, 우리 삶의 현장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굶주림에 지친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며칠 전 뉴스에 한 중학생이 죽은 어머니의 시신과 6개월을 함께 지냈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더 자세한 내용을 알기 위해 인터넷을 뒤져보기도 했지만 너무나 가슴 아픈 일입니다. 또 아들의 카드빚 8천만원 때문에 자살한 어머니에 대한 뉴스도 있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이렇게 많은 것입니까?
벳세다 들판은 뭔가 부족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장 우선적인 문제는 먹거리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 세상은 언제나 만족한 상태가 될 수 없습니다. 뭔가 부족할 수 밖에 없는 곳이 세상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불완전할 수 밖에 없는 것처럼 그런 인간들이 모여사는 세상도 불완전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큰 무리가 빈 들로 모여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희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2절에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이들이 모두 병자는 아닐 것입니다.
5:에 무엇을 배웠습니까? 38년된 병자를 고치시는 주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대해 유대인들과 논쟁이 벌어집니다. 그러면서 더 크게 문제가 된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리고 유명한 말씀 요 5:39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메시야라는 사실을 결정적으로 공포한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일말의 희망이 피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장소도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옮겨졌지만 예수님에 대한 인식이 그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히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향해 큰 무리가 몰려옵니다. 5절에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고 묻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이 질문에 대해 절대적으로 공감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이 땅에 오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희망을 걸고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들의 굶주림에 대해, 그들의 필요에 대해 관심이 없으시다면, 아니 그들의 관심에 대해 외면하신다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어도 여전히 우리와는 동떨어진 세상에 사시는 분일 뿐입니다.
요즘 TV에 ‘체험! 삶의 현장’이란 프로가 있습니다. 유명한 연예인들이나, 사회 저명인사 또 정치인들까지 직접 삶의 현장에 뛰어들어 일할 때 그들의 어려움을 충분히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흘린 땀방울의 댓가로 주어진 돈으로 어려운자들을 돕는데 사용하는 것같은데 참 잘 만들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먹을 것입니다. 먹어야 다음에 도덕도, 예절도, 문화도 있는 것 아닙니까? 며칠 굶은 사람 데려다가 예술의 전당에서 유명한 오페라를 보여주면 뭘합니까? 20만원짜리 S석에 앉혀놔도 3000원짜리 짜장면 한 그릇이 더 시급한 것 아닙니까?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지만 떡에 대한 부분을 완전히 무시하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지만 사람이 사는 목적이 떡 때문만은 아님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제자들에게 묻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2.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
이 질문은 예수님이 제자인 빌립에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까?
6절에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신다”는 것은 모인 무리들을 먹일 모든 계획이 다 세워져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방법으로 흘러가게 될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주님입니다.
그러면 왜 제자에게 묻습니까?
“시험코자 하심이라”
이 말을 잘 들어야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시험은 유혹이 아닙니다. 우리 말 번역본에는 모두 시험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영어로는 ‘Test’와 ‘Temptation’으로 다르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Temptation’은 유혹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사단에게서 오는 시험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넘어뜨리게 하는 것입니다. 하와에게 찾아온 뱀, 아간에게 있어서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다윗이 왕궁을 거닐 때 보여진 밧세바의 목욕하는 모습, 이런 것들은 다 사단이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유혹입니다.
하지만 ‘Test’는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말 그대로 테스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테스트할 때 주님의 마음에 들게 하면 커다란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표적인 테스트가 무엇입니까? 구약에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는 테스트요, 신약에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입니다. 이 두가지 시험에 대한 답으로 아브라함과 베드로가 엄청난 복을 받지 않았습니까? 부천에서 열리는 세계 건축물 조각전에 가봤는데 세계에서 제일 웅장한 건물이 제가 본 견해로는 베드로 대성당입니다.
이제 빌립에게도 시험하십니다. 그때 빌립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200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바로 그때 안드레가 예수님께 나옵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빌립과 안드레가 예수님의 시험에서 온전히 통과했습니까? 아니요. 실패했습니다.
빌립이 계산한 것은 평범한 사람들도 다 할 수 있는 계산입니다. 안드레가 아이의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온 것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저는 교회에서 그런 얘기하는 사람들 보면 마음 한 구석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속으로 “복을 차라. 복을 차”하는 거지요. 안 믿는 사람하고 하나도 나을 것이 없습니다. 주님이 몰라서 묻는 것도 아니고,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물으시는데 그런 대답이나 하고 있고 말이 됩니까?
저는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우리에게도 다 가르쳐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성경이 우리에게 믿음으로 사는 법에 대해서 다 가르쳐주지 않습니까? 그리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과 함께 일하기를 원하셔서 우리에게 테스트하시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제자들은 믿음이 없어서 떨어져 나가고 전혀 생각지 않은 어린 아이 하나가 갑자기 믿음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2000년 역사가 지나도록 성경에 그것도 마태, 누가, 요한 세 복음서에 계속해서 그 아이의 믿음에 대해 자랑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예수님은 우리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네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였으면 좋겠느냐?”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머리로 계산해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떡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인간의 계산으론 항상 부족할 수 밖에 없다는 게 결론이지요.
3. 믿음의 방법으로
문제의 해결이 어디에서 이루어졌습니까? 어린 아이가 드린 보리떡 다섯개, 물고기 두마리로 해결되었습니다.
사실 보리떡 다섯개, 물고기 두 마리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보리떡 다섯개 얼마 됩니까? 거기에 물고기 두 마리 반찬 삼아 먹을 때 혼자 먹어도 시원치 않은 것 아닙니까? 그걸로 어떻게 오천명을 먹일 수 있습니까? 빌립의 계산법으로는 턱도 없는 일이지요. 그런데 불가능한 일인데 이상하게 가능해졌습니다. 아니 가능할 뿐 아니라 오히려 남았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역사입니다. 신비한 신앙의 세계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손을 거쳤다는 것입니다.
출 4: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모세를 부르십니다.그때 모세는 한사코 자기는 못한다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십니다.
모세의 손에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팡이 하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의 지팡이를 통해 놀라운 기적들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게산법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가 아닙니다. ‘어떻게’입니다. 부자가 많은 돈을 헌금한 것보다 가난한 과부가 적지만 자기에게 있는 것 전부를 드리는 것을 보시고 칭찬하셨습니다. 계 3:8에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해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저희 교회는 정말 적은 교회입니다. 이제 시작이니까 적을 수 밖에 없는 교회입니다. 하지만 빌라델비아 교회같이 칭찬듣는 교회이길 바랍니다. 하나님 큰 것 바라지 않으십니다. 작아도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는지? 얼마나 기쁜 맘으로 주님의 일에 헌신하는지?”
주님을 위해 드리는 모든 것은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입니다. 머리가 아무리 좋으면 무엇합니까? 자기 계산으로 아무리 맞춰봐도 빈 들에서 먹을 것이 나오지 않습니다.
어느 날 제자들이 아인슈타인에게
“선생님, 선생님의 그 많은 학문과 전문적인 지식은 어디에서 나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의 학문은 바다에 비유한다면 이 한 방울의 물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가진 지식이 주님 앞에 얼마나 되겠습니까? 바다도 순종하는 분 앞에 우리가 감히 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저 자신을 드려 주님 앞에 쓰이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나님이 기쁘게 사용하시면 그것보다 더 귀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신앙의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마다 긍정적이어야 합니다. 왜? 우리 뒤에는 든든한 스폰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주님이 부정적인 사람 사용하시는 것 본 적이 있습니까? 긍정적이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실 혼자 먹을 것을 지금 오천명이 함께 먹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남지 않습니까? 이것을 우리가 믿음으로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일은 현재는 불가능하고... 그런 이야기하지 마세요. 괜히 그런 사람 때문에 내 믿음까지 달아날까 두렵습니다.
신앙은 자기를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 못난 것 밖에 더 있습니까? 인간을 원래 그렇게 나아 놓지 않으셨습니까? 그런 사람 바라보면 뭘 배울 게 있습니까? 나는 이런 인간이지만 하나님은 그런 분이니까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 자꾸 해야지요. 나는 원래 그런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도덕적 인간 원하지 않습니다. 철저한 인간 원하지 않습니다. 깨끗한 인간 원하지 않습니다.
구약에서 거룩하라고 하셨지만 신약에 와서 더러운 이방인 모두 다 수용하셨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뭘 원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테스트할 때 정답이 뭔지를 잘 알아맞추는 사람이 정말 인생에 성공하는 사람입니다.
이 말씀은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복음이 아닙니다. 먹을 양식이 없어서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이적으로 먹을 것을 주라는 말씀은 더더욱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인생의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우리들은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 것과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얼마든지 주님 앞에서는 귀하게 쓰일 수 있다는 것을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빈들에서 기적이
요 6:1-13 / 지태일 목사
우리 사람에게는 많은 욕구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벳세다 들판의 실제적인 삶의 문제는 빵의 문제였습니다. 몇 일 동안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따라다니다가 육적으로 변변히 먹지도 못한 저들이 힘없이 흩어져 가려는 것을 본 주님의 마음에 연민의 정이 넘쳤습니다.
특별히 로마 정부 밑에서 식민지(植民地) 생활을 하던 유대인들, 대부분이 갈릴리 가난한 지역의 사람들이었기에 끼니를 거르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사람이 사는 기본적 보장은 바로 이 빵의 문제입니다. 먹고 살 수 있어야 다음에 예절도, 도덕도, 윤리도, 정신문화도 따른다는 사실입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도 바로 먹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한 나라의 권력도 정치도 문화도 먹고 사는 경제의 문제를 안정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면 끝나는 것입니다. 이북의 핵문제 역시 한 겨울에 먹고사는 문제가 제일 큰 문제가 되었고 공산주의도 먹는 문제가 해결 안되면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말기 때문에 이북의 권력자들도 막강한 나라인 미국을 상대로 세계적인 고도의 정치 도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임을 보여주심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되, 영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육신적인 필요까지도 채워주시는 분이시라는 점입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영적인 문제해결에만 관심이 있으시지 우리의 육신적인 필요에 대해서는 외면하시는 분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것을 구할 때는 아주 당당하게 기도하는데 육신적인 필요를 구할 때에는 좀 부끄러워하는 것 같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육신적인 필요를 구하는 것은 잘못되었거나 저급한 신앙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오히려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에도 육신의 필요를 따라 '일용할 양식을 구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배고픔을 외면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적인 삶에만 관심을 가지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육신적 필요에도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의 배고픔과 약함과 피곤과 질병에도 관심이 있습니다. 관심이 있을 뿐만 아니라 부족함을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들판에 모였던 군중들의 배고픔을 친히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빌립에게 이상한 질문을 하십니다. 5절에 "우리로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이 질문은 오늘도 우리 모든 신앙인들에게 반복하여 물어지는 질문입니다. 어디서 떡을 해결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해서 벌어 먹을 수 있을까? 이 문제를 생각하기 앞서,
1. 우리가 먼저 고려할 것은 당시의 상황입니다.
언제 어디서 기적이 일어났는가? 그곳은 빈들이라 했습니다. 때는 저물어 가는 때라 말씀합니다.(마14:13에는 배를 타고 떠나사 빈들에 가시니, 막6:35절에는 이 곳은 빈들이요 때도 저물어 가니)
1) 언제 기적이 일어납니까?
막6:35을 보면 "때가 저물어 가매 제자들이 나아와 여짜오되 빈들이요, 때도 저물어가니" 저물어 갈 때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저물어 갈 때란 곧 어두워진다는 의미입니다. 부정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밝은 낮이 다 지나가 버렸습니다. 기적을 기대할 수 없을 때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다 틀렸다고 생각될 때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2) 어디에서 기적이 일어났습니까?
빈들에서 일어났습니다(막6:35절). 여기 '빈들'(remote place)은 마을과 동떨어진 한적한 광야를 의미합니다. 빈들이란 비었다는 말과 허허 벌판이란 아득한 느낌을 갖게 하는 곳입니다. 아무 것도, 아무도 없는 곳, 그 곳에는 하나님마저 도저히 계실 것 같지 않는 그러한 장소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나온 군중들의 벳세다는 빈들, 들판이었습니다. 갈 길은 막연하고 쉴만한 곳도 없는 곳입니다. 인가도 없는 곳입니다. 시간적으로 이미 해는 저물어가는 황혼시간입니다. 식사 때가 되었습니다. 먹을 것을 장만하기란 어려운 곳입니다. 들판에 모인 허기진 사람들에게 아무런 대책이 없는 곳입니다.
해 저문 광야, 찬바람 부는 언덕, 배고파 지친 모습들, 병든 몸을 이끌고 고쳐보려고 나와서 앉아 있는 모습들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벳세다 빈들의 모습은 바로 오늘의 우리가 사는 이세상의 모습입니다. 옛날부터 인간의 삶을 광야(廣野)에다 비유(比喩)하였습니다. 벳세다 들판에서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햇살을 받으며 굶주리고 지친 군중들은 어쩌면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요, 우리들의 삶의 현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성경에서 이런 빈들, 광야생활을 한 사람은 야곱일 것입니다. 아버지와 형 에서를 속이고 장자의 명분은 받았지만 야반도주해야 하는 야곱도 벧엘 광야에서 그런 기분을, 환경을, 마음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두렵고 춥고 쓸쓸하고 적막한 그 벧엘에 하나님은 나타나셨고 야곱을 지켜 주셨으며 땅 한 평 없는 야곱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놀라 외쳤습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창28;18)
빈들에서 야곱은 오히려 엄청난 기적을 맛보았습니다.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사닥 다리가 놓여있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이와 같이 해진 후 빈들은 기적의 때요, 기적의 장소입니다.
여러분! 병이 들어 빈들입니까? 물질이 없어서 빈들입니까? 인간관계가 파괴되어 빈들입니까? 이때가 바로 야곱과 같이 하나님 만날 때 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빈들에게도 주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자리인줄 압니다. 조용히 마음을 비우고 심령의 빈들이 되어 보십시오. 그곳에 분명히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이러한 빈들에서 예수님은 군중들의 굶주림을 해결하시기 위해 빌립에게 이상한 질문을 하십니다. "우리로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5절)"
이 질문은 인간의 여러가지 욕구를 이야기 했지만 무엇보다도 배고픈 사람에게 가장 급한 것은 먹는 것, 이것을 우리 주님도 너무 잘아시기 때문에 걱정하시는 질문입니다. 이 걱정은 몰라서 염려되서가 아니라 백성들을 사랑하셔서 하는 걱정입니다.
여기가 분명히 빈들인데 이 많은 사람들을 위해 어디서 음식을 사 가지고 이 많은 사람들을 먹일 수 있는지 연구해 보라며 계산 잘하는 빌립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때로 교회 일로 걱정이 되면 알만한 사람에게 물어 볼 때가 있습니다. 부탁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목사에게 도움이 되는 대답, 은혜가 되는 대답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혀 도움이 안되고 도리어 근심만 더해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성도들이십니까?
2. 제자들의 신앙 상태입니다.
(1) 먼저 빌립의 대답(7절)을 봅시다.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빌립은 갈릴리 근처 벳세다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자라온 고향이었기에 그곳의 상황을 눈감고도 알 정도였습니다. 이 근처 빵집이 있는지 없는지 어디에 뭐가 있는지 없는지 어디에서 잘하는지 못하는지 어디가 싼지 비싼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어느 집에 가서 싸게 흥정을 해서 해도 얼마가 들어 갈 것이다. 빌립은 순식간에 계산을 했습니다.
지금 모인 숫자가 적어도 2만 명 이상입니다. 5천 명이 먹었다고 성경에 기록하는 것은 아이들과 여자들, 노인들을 제외한 숫자입니다.
10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여기서 '오천 명의 수효'는 여자나 어린아이를 제외한 장정(壯丁)만의 수입니다. 동일한 사건을 기록하면서 마태는 이에 대하여 '먹은 사람은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마14:21)라고 기록하였고, 마가는 '떡을 먹은 남자가 오천 명이었더라'(막6:44)고 하였습니다
그 지역을 잘 알고 있는 빌립은 지금 갑자기 빵을 구워서 2만 명을 먹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럴만한 장소도 없으려니와 어림잡아 대충 계산해서 적게 잡아도 2백 데나리온의 엄청난 돈이 필요합니다(하루 품값이 한 데나리온). 200일 품삯, 약 8개월치 월급입니다. 일당 5만원씩 약 1000만원이 넘는 큰 돈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무일푼의 사람들입니다. 돈도 없으려니와 그만한 양의 떡을 갖추고 있는 집도 없습니다. 차라리 돌려보내는 것이 현명한 판단입니다. 빌립은 계산이 빠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주님께 이야기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계산에는 주님이 빠져 있었습니다. 빌립은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요한복음에 기록한 기적만 보아도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을 보았습니다. 아니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을 것입니다. 5장 초두에 등장하는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는 것도 체험했습니다. 현장의 증인으로! 그러나 막상 내 문제로 등장할 때는 그만 자신의 삶에 주님의 능력을 계산에 넣지를 못했습니다. 보이는 현실만을 계산에 넣었을 뿐입니다.
우리는 빌립을 나무랄 수 없습니다. 그는 적어도 정확한 계산을 하였습니다. 합리적으로 그리고 과학적으로 계산했습니다. 자신의 경험과 지식이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능력을 계산에서 빠뜨렸던 것입니다. 늘 주님 곁에서 보았습니다. 체험했고, 하나님께 찬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문제 앞에서는 그만 믿음이라는 단어를 적용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이 많은 사람들이 식사하는 일은 불가능하겠는데요. 빌립은 부정적인 대답을 했습니다. 빌립의 말은 맞았습니다. 그의 말은 현실적이고 타당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서 빌립의 대책 없는 인간적 계산과 푸념을 듣고자 질문하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주님께서 그 순간 왜 자기에게 그런 질문을 하셨는지 생각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장황한 설명과 경험에 근거한 계산을 하기 전에...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살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계산에 밝습니다. 계산이 빠른 사람일수록 똑똑하다는 말을 듣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원하신 것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지금 원하신 것이 무엇인지? 다시 말하면 주님의 뜻이 지금 무엇인지를 알아야 했습니다. 주님은 빌립에게 지금 이 일의 결정에 대한 선택을 하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방법을 물은 것입니다. 일의 방향과 결정은 주님이 하십니다. 지금 빌립의 약점을 지적하라면 자신이 일을 결정하려 했다는 겁니다. 자기의 계산으로는 불가능하니 그만 없던 일로 하자는 말입니다.
2) 안드레의 엉뚱한 발상
그러자 안드레가 엉뚱한 제안을 합니다. 9절에 주님, 여기 한 아이가 있는데 5병 2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어린아이의 도시락입니다. 어른들이 어떻게 어린애 것을 먹자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어렵지요. 그리고 이 작은 음식- 5병 2어를 가지고 이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다 먹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으로는 턱없이 모자랍니다.
안드레도 부정적인 대답을 했습니다. 이 많은 사람들을 생각할 때 우습게 생각되었던 도시락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역시 안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린이의 도시락을 주님께 소개해 드렸습니다.
여러분! 빌립과 안드레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빌립은 부정적이고, 비판적이고, 소극적인 사고방식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긍정적이고, 신앙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가졌습니다.
두 사람의 차이는 한 사람은 아예 처음부터 부정적이고 또 비관적이며 체념을 했다면, 한 사람은 그래도 작은 그 무엇이라도 제시하면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세를 가졌다는 것이 차이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일 할 때 빌립과 같은 자세가 아니라 안드레와 같은 작은 믿음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람니다. 무조건 '안된다, 틀렸다'가 아니라 작은 믿음을 들고 예수님을 의지할 때 역사는 일어나는 줄로 믿습니다.
신앙은 겨자씨 만한 믿음만 있어도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내 믿음이, 내 신앙이, 긍정적이고, 신앙적이고, 적극적인 믿음을 가졌는지 자신을 한 번 돌이켜 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보다도 믿음 있는 자를 기뻐하시고 사랑하십니다.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살면 모든 것이 변화되고 기적이 일어납니다. 성경에서 기적이 일어난 현장을 보면 항상 믿음 있는 곳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늘의 우리들은 안드레와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작은 것을 보고도 가능성을 가질 수 있는 믿음입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갈멜산에서 기도할 때 불이 떨어져 모든 제물을 사르는 기적을 일으킨 후에 비오기를 기도합니다. 한 번, 두 번 기도하여도 아무런 징조가 없더니 서쪽 끝에 손바닥만한 구름이 뜨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엘리야는 손바닥만한 구름에서도 큰 비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겨자씨가 비록 작은 것이지만 싹이 나서 자라면 큰 나무가 되어 많은 새들이 깃들이는 나무가 됩니다. 오늘의 우리 교회 성도들도 이와 같은 믿음을 소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생명의 양식이신 예수 그리스도
요 6:1-14 / 김태환 목사
몇 주 전에 복음서를 읽을 때 여러분의 마음 속에 팔레스타인 지도가 그려져야 한다고 말씀 드린 바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읽을 때도 여러분의 마음 속에 갈릴리 호수 부근의 지도가 그려져야 합니다. 갈릴리 호수는 때로는 갈릴리 바다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호수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큽니다. 예수님은 이 갈릴리 호수 부근의 마을을 중심으로 사역을 하셨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때로는 호수 부근 마을 이름을 따라서 디베랴(Tiberias) 호수라고 부르기도 했고, 게네사렛(Gennesaret) 호수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성경에는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후”라고 했는데, 예루살렘의 베데스다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심으로 그 자신이 생명의 주이신 싸인을 보이신 후에 예수님은 갈릴리로 돌아 오셔서 갈릴리 바다를 건너 가셨습니다. 복음서마다 말씀에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만, 누가복음 9:10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벳새다(Bethsaida)라는 마을로 가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벳새다에 사람들이 많이 모일 수 있는 들판이 있었고,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그 유명한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이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 6:45에는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이신 후에 제자들을 벳새다로 보내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이신 장소가 갈릴리 호수 부근의 한적한 마을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신약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마가복음의 기록이 더 신빙성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누가복음의 기록에 더 신빙성을 두고 벳새다가 갈릴리 호수 북쪽 요단강 동편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곳에서 어부 마을(House of the Fisherman)이 발견되었고, 지금도 발굴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왜 복음서마다 이런 차이가 있는지 궁금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복음서가 기록된 것이 예수님 당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지 약 20년 후에 기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생애가 문서로 기록되기 전에는 모두 구전(口傳, oral tradition)으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보니 자연스럽게 복음서마다 차이를 보이게 된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학자들은 가버나움(Capernaum) 아래에 있는 오늘날의 탑가(Tabgha)라는 마을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곳이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빌립의 고향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 세 제자가 벳새다 출신이라고 나와 있습니다(요한복음 1:44). 지금 그곳에 오병이어 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 교회는 4세기의 비잔틴 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바닥에는 오병이어가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그려져 있습니다. 탑가는 그리스말로 헵타페곤(Heptapegon)이라고 하는데, 그 뜻은 “the place of seven springs(일곱 개의 샘이 있는 곳)”라는 뜻입니다. 그곳에 일곱 개의 온천이 있었는데, 그곳이 당시에 고기가 많이 잡히는 “fishing spot”이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디를 가시든지 사람들이 따랐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병든 사람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2절)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를 그렇게 열광적으로 따르는 사람들이 속에 가지고 있는 소리 없는 외침을 듣고 계셨습니다. 마가복음 6:34에 바로 그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는데, 그것은 그들이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이 모두 “lost sheep”으로, “잃어버린 양”으로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서 참 목자를 찾고 있는 영혼의 외침을 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오늘 말씀을 “오병이어의 기적”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와 비슷한 사건이 또 한번 있었던 것 같습니다. 상황을 매우 비슷한데, 이번에는 오병이어가 아니라 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어마리로 사천 명을 먹이시고 일곱 광주리가 남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에서 주목할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많은 사람들이 나와 함께 삼 일 동안이나 있었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불쌍하구나. 그들을 주린 채로 돌려 보내고 싶지 않다. 저들이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른다.” (마태복음 15:32, 마가복음 8:2-3)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삼 일이나 있었고, 그 동안 별로 먹은 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냥 돌아가다가 쓰러질 것을 걱정할 정도였습니다. 삼일 동안이나 이 사람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배고픈 줄도 모르고 말씀을 들었던 것입니다. 영혼의 굶주림, 영적인 배고픔이란 그런 것입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영적인 배고픔을 느끼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고요.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영적인 배고픔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와 비교해 볼 때, 우리는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물질적인 풍부 속에 살고 있습니다. 누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있다고 하면서 “목사님, 이제 물질에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습니다.” 쓰고 싶을 때 쓰고 싶은 만큼 쓰면서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예. 그렇게 살 수 있으면 좋겠지요. 여러분 중에도 그것이 인생의 목표인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게 사는 것이 공부하는 목적이고, 그렇게 살기 위해서 조건 따져가며 결혼하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세상적으로는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으로서는 실패한 사람입니다. 영혼의 배고픔을 모르는 사람은 크리스천으로서는 실패한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질의 풍요로움이 영혼의 배고픔을 충분히 보상해 줄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 말씀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삼 일이나 배고픈 줄도 모르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영혼의 배고픔이 돈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자신의 영혼이 배가 고프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탑가(벳새다)의 어느 들판에서 배가 고픈 줄도 모르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이 천 년 전의 이 사람들을 머리 속에 그려 보십시오. 그들은 가난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양식을 발견한 그들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대로, 오늘 우리는 어떤가요? 사느라고 바쁘고 분주해서 물질적인 풍요함은 누리고 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는 결코 행복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제가 늘 말하는 말씀이 오늘 말씀에도 나옵니다. 악조건, 불리함, 위기, 절망, 이런 상황이야말로 하나님께는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지금 그곳은 빈 들입니다. 먹을 것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돈도 없습니다. 해는 저물어 갑니다. 사람들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 빌립에게 묻습니다. 왜 하필이면 빌립에게 물으셨는지, 그 이유는 아마도 빌립이 벳새다 출신이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이곳 벳새다의 사정을 누구보다도 빌립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먹을 빵을 어디서 살 수 있겠느냐?” 빌립은 즉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님, 여기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빵을 한 입씩만 먹는다고 해도, 그 빵을 사려면 이백 데나리온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빌립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랬지만, 오늘날도 우리는 돈이면 무슨 일이든지 해결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빌립의 입에서 즉각 이백 데나리온(denarion)의 돈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이 많은 사람이 한 입씩만 먹는다고 해도 우리 열 두 사람이 이 십 일은 일해야 하는 많은 돈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대답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가 하려고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교회가 돈이 있으니까 하고, 돈이 없으니까 못하고 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돈이 없는데도 믿음으로, 기도로 하나님의 일을 성취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지 않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기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적은 것으로 큰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한 아이가 가지고 있었던 작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가 전부였습니다. 이 말씀도 참 이상합니다. 아니, 어른들에게는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고, 어떻게 어린 아이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를 가지고 있습니까? 보통은 아이들은 먹을 것이 있으면 배가 부르던 배고 고프던 참지 못하고 먹어 버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아이는 그 때까지 먹을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경에 이 사실을 크게 기록한 것은 정말 오 천명이 먹을 것을 해결하는 데는 이것이 아무 소용이 없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때 모인 사람들이 남자만 오 천 명이었다고 했습니다. 실제로는 여자들과 아이들을 합해서 약 이 만 명 가량이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이 사람들에게) 주어라(마가복음 6:37, 마태복음 14:16, 누가복음 9:13)”라고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사정을 몰라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지금 이 상황을 몰라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지금 이 상황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그 때 제자들뿐만 아니라 오늘 이 말씀을 읽는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위기를 맞이해서, 불리한 조건에서, 내가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할 때, 오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예수님은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할 때 예수님은 “아니다. 네가 가진 것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한 아이가 가지고 있었던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를 손에 드시고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오, 주 우리 하나님, 땅에서 먹을 것을 내신 당신께 감사 드립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말씀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하신 후, 그 곳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만큼 나눠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물고기를 가지고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실컷 먹었습니다. 개역 성경에는 사람들이 모두 배부르게 원대로 먹었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연상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시편 23:1-2 말씀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도다.” 이 말씀이 보여 주는 그림이 그런 것 아닙니까? 목자의 인도를 받은 양들이 실컷 배부르게 풀을 뜯고 물가에서 되새김질을 하는 그런 그림 아닙니까?
여러분, 오늘 말씀은 단순한 기적이 아닙니다. 이것은 싸인입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 천 명이 먹고도 열 두 광주리가 남았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싸인입니다. 바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이라는 싸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우리에게 참 양식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 안에서 사는 사람은 그 분이 주시는 양식을 먹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35) 그분에게서 생명의 양식을 발견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제 이 말씀을 여러분의 삶으로 증명하십시오.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요 6:1-14 / 김광선 목사
I. 은혜(긍휼)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싶어서 나오는 사람들, 병고침을 받기 위해서 나오는 사람들, 사람들이 많이 모이니까 그냥 구경 삼아서 따라 다니는 사람들, 예수님에게서 어떤 실수거리라도 캐내기 위해 따라 다니는 종교지도자들, 심지어 폭동을 우려해서 감시하는 로마 당국자들...
사람들이 늘 구름떼처럼 모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약 오천쯤 모였다고 했는데 여자들과 아이들까지 합치면 적어도 만명 이상이 되는 군중들이 모였다고 생각합니다.
식사 시간이 지났지만 이들은 자리를 뜰 줄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부흥회를 했으니 얼마나 은혜스러웠겠습니까?
말씀의 선포되고 , 귀신이 ?겨나가고, 병자가 일어나는 역사들을 보면서 배고픈 줄 모르고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집회가 끝나자 저들은 배가 고팠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저들이 배고픈 것을 보시고 긍휼이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이 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조그만 도시락을 가져온 어린 아이 하나가 예수께 인도되어 왔습니다.
주님은 그 소찬을 축사하신 후에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곳에 모인 군중들은 실컷 먹었습니다.
이 때 주님은 먹고 남은 부스러기들을 버리지 말고 광주리에 담으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먹고 남은 부스러기가 열 두 광주리에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저는 중학교 때 미션 스쿨에 다녔습니다.
학교과목 중에 "종교"라는 과목이 있었는데 이것은 매주 교회에 나가 담당 전도사님이나 목사님에게 교회에 출석했다는 싸인을 받아 와야만 점수가 나왔는데 시험이 70점, 그리고 교회 출석이 30점이라서 억지로라도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성경구절을 외우거나, 일정범위에 성경을 읽는 것도 숙제였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성경책을 사게 되었습니다.
저는 어느날 이 본문을 읽고 싶어서 읽은 것이 아니라 선생님 읽어 오라고 숙제를 내 주어서 읽게 되었습니다.
본문을 읽으면서 황당했습니다.
어떻게 성경 속에 이런 황당한 스토리가 들어 있을까?
어떻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일 수 있을까?
숙제는 주로 4복음서에서 많이 나왔는데 그 외 더 황당한 스토리가 많았습니다.
예수께서 죽은 지 사흘이나 되어 시체에서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렸다는 스토리, 소경의 눈을 뜨게한 이야기, 문둥병자들을 순식간에 깨끗게 하신 이야기, 물 위로 걸으신 이야기, 십자가에 사형을 당했다가 사흘만에 부활한 이야기, 그리고 500명 이상이 보는 가운데 구름타고 하늘에 올라간 황당한 스토리들이 많았습니다.
중학교 1학년 학생의 눈으로도 성경의 수준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중 2때 어느날 친구들과 함께 부흥회를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부흥 강사는 대신측 총회장을 지낸 최복규 목사님이었습니다.
저는 그 날 밤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죄 때문에 돌아가신 사실이 믿어지게 되었습니다.
너무도 고맙고 너무도 놀라와 흐느껴 울었습니다.
저는 이제껏 살아오면서 그 날 처럼 감격의 눈물을 흘려본 기억이 없습니다.
사람에게 눈물샘이 있다는 것도 그 날 알았습니다.
눈물샘이 터지면 그냥 펑펑 쏟아집니다.
그리고 눈물샘에서 터져 나오는 눈물의 온도는 36.5도가 아닌 것 같아요.
두 볼을 타고 내리는 눈물이 얼마나 뜨거운지 볼이 델 것 같았습니다.
그 체험 이후 그런 황당한 스토리들이 100% 사실로 믿어졌습니다.
믿어지니까 행동이 따라오기 시작했습니다.
아침에 학교에 가기전 꼭 먼저 교회에 들려 기도하고 갔습니다.
학교가 끝나면 집으로 가지 않고 교회로 갔습니다.
교회에 가서 청소를 하고 집으로 갔습니다.
어느날 강대상 가마니 앞에 엎드려 " 주님이 날 위해 돌아 가셨듯이 저도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평생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세요."라고 기도했습니다.
아무나 성경의 황당한 사건들을 믿지 않습니다.
이것이 믿어지는 사람들이 따로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들을 "선택된 사람들" 이라고 부릅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성경은 이 사람들을 가리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부릅니다.(고후5:17)
성경은 이 사람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말합니다.(요1:12)
성경은 이 사람들을 가리켜 "그 이름이 생명책이 기록된 자"라고 말합니다.(계3:5)
한 마디로 하나님의 무한한 긍휼과 은혜를 입은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뉴욕 멘하탄 남동쪽 펄튼 수산 시장 근처에 레흐만이라는 노숙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40대 중반의 이 노숙자는 다른 부랑자들과 마찬가지로 잠은 화물 선착장 쓰레기 더미 위에서 자고 아침 일찍이 관광식당가 뒤편 쓰레기 더미를 뒤지고 다녔습니다.
전날 밤 손님들이 먹다 내다버린 마늘 빵, 감자 튀김, 피자 부스러기, 케? 조각등으로 배를 채우고 나머지는 갈색 종이 봉투 속에다 담아 점심을 대비합니다.
낮에는 할 일 없이 거리를 쏘다니면서 구걸을 하고 그 돈으로 매주 한 두장 복권을 사는 것이 십수년 노숙자 생활의 습관처럼 되버렸습니다.
그 날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식당가 쓰레기 더미 속에서 주은 피자부스러기로 배를 채우고 거리를 쏘다니다가 점심때가 되서야 주머니 속에 꾸겨 놓은 복권이 생각나서 신문 자판기 앞에 서서 복권 숫자를 맞추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세 자리가 맞았습니다.
네 번째도, 다섯 번째도, 입곱째 숫자까지 다 맞는 것이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뉴욕 복권이 이 노숙자에게 맞아 떨어진 것입니다.
그날 오후 텔레비젼 방송국에서는 헐렁한 바지에 수염이 덥수룩한 이 노숙자, 앞으로 20년간 해마다 243,000불씩 지급받을 이 스타를 취재했습니다.
눈 부신 조명 속에 미모의 여기자로부터 질문을 받았습니다.
"기분이 어때요?"
"기분이 어때요?"란 말은 까마득한 옛날 들어본 말이었습니다.
그는 이제껏 가장 비참한 사람이었고, 굶어 죽기 직전까지 갔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다시는 굶주리거나 쓰레기더미 위에서 자거나, 구걸하거나 거리를 방황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횡재하게 된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그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꾸져버렸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런 긍휼과 은총을 어느날 갑자기 받게 된 것을 말합니다.
성경이 믿어지고,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주님이 믿어지고, 주님이 하신 말씀이 진리로 믿어지고, 그 분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 믿어지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이 믿어진다는 것이야말로 어느날 갑자기 다가온 행운이고 기적입니다.
아무나 당첨된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찾아오는 행운입니다.
이런 긍휼과 은총을 받고 사는 성도들 가운데서는 어느날 복권에 당첨된 행운아처럼 흥분과 감사와 꿈을 가지고 사는 성도들이 있는 반면에 전혀 감격없이 사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주님이 왜 먹고 남은 부스러기를 버리지 말고 광주리에 담으라고 하셨을까요?
아무리 큰 은혜를 받아도 먹고 버려 버리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 감격과 흥분과 감사가 며칠 가지 못합니다.
아무리 부흥회 때 큰 은혜를 받았어도 오래 가지 못합니다.
그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광주리에 담아 놓고 사는 성도들은 지속적인 감사와 감격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주께 받은 은혜를 늘 잊지 않고 습관적으로 감사하면서 삽니다.
이번 부흥회때 저도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만 무엇보다도 두 가지 단어가 가슴에 와 박혔습니다.
감사는 훈련이다! 성도 가운데는 감사체질과 저주체질이 있다!
주께서 은총과 기적의 떡과 물고기를 배불리 먹은 사람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이 부스러기를 광주리에 담으라는 말씀입니다.
이번에 많은 분들이 부흥회 때 은혜를 받았습니다.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그것을 광주리에 담으세요.
그러면 내 광주리에 가득한 하나님의 긍휼과 선물을 수시로 보면서 감사와 찬양이 체질화 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II. 주님이 축사하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1절에,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라고 했습니다.
여기 "축사"라는 말은 "감사"라는 말입니다.
본문의 장면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밥 먹을 사람은 만 명 이상이 되는데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입니다.
사실상 감사할게 없습니다.
제자들이 얼마나 현실적입니까?
빌립이 말하기를, "이 사람들을 배불리 말고 시장기가 가시게끔 조금씩만 먹이는데도 돈이 약 이백 데나리온 쯤 들겠습니다."
안드레는 말하기를, "주님,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한 사람 분 도시락입니다. 이 많은 사람들에게 대책이 없습니다"
제자들의 말은 틀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현실적이고 계산적이었습니다.
결코 제자들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같은 것가지고는 감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 가지고 감사했습니다.
주님은 확실히 감사체질이셨습니다.
1)주님은 먼저 하나님을 향해 감사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축원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늘 창조역사를 계속하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죽을병에 걸린 사람도 깨끗하게 나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새롭게 창조하시니까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사업에 실패한 사람도 일어설 수 있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새로 만들어 주시면 되니까요.
그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일단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감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새롭게 창조해 달라는 기도와 함께요.
2)현재 갖고 있는 것에 대해 감사했습니다
지금 갖고 있는 것이라고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입니다.
전혀 택도 없는 것이지만 현재 갖고 있는 것에 대해 감사했습니다.
자족하는 마음입니다.
빌립보서 4장 11절에 바울은, "내가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노라"고 했습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할 줄 모르는 성도는 천하를 다 준다고해도 감사할 수 없습니다. 정말 감사는 체질입니다. 습관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은 무슨 일이 내게 생기든지 그것이 다 하나님이 날 사랑하셔서 날 축복하시기 위해 주시는 것으로 믿고 받아들입니다.
늘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믿음 좋은 랍비 모세가 먼 나라를 여행할 때 일이었습니다.
랍비 모세는 당나귀와 수탉 한 마리 그리고 등을 하나 가지고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을의 여관 주인은 그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방을 내 주지 않자 어쩔 수 없이 숲에서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아무렇지도 않는 듯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잘 하시는 일이야."
랍비 모세는 잠을 자기 전에 성경을 읽기 위해 등에 불을 붙였지만 그만 바람이 세게 불어서 등이 깨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성경을 치우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잘 하시는 일이야."
그런데 밤중에 들짐승이 몰래 수탉을 물고 가버렸습니다.
그리고 엎친데 ?친 격으로 도둑들이 당나귀마저 훔쳐 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모세는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잃어 버린 줄 알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 잘 하시는 일이야."
랍비는 잠자리를 수습하고 여관에 묵기 위해 다시 마을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간밤에 마을에는 군사들이 쳐들어와서 주님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 병사들이 랍비 모세가 잠을 자던 그 숲을 지났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만일 등이 깨어지지 않았다면 병사들에게 발각되었을 것이고 수탉이 짐승에게 물려 가지 않았거나 도둑들이 당나귀를 끌어가지 않았더라면 그 울음소리 때문에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것까지 생각이 미친 랍비 모세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잘 하시는 일이야."
지나 온 우리의 삶을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바로 랍비 모세가 아닙니까?
시마다 때마다 위기의 순간마다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세밀하게 우리를 돌보고 계십니까?
감사가 체질화 된 성도는 그래서 무슨 일을 당해도 감사합니다.
절대 불평을 안합니다.
왜 주님이 먹고 남은 조각을 광주리에 담으라고 했을까요?
주님이 이미 축복하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비록 하찮은 것일지라도 주님이 축복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신 하찮은 것입니다.
비록 내 존재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같이 하찮은 것일지 몰라도 만일 주님이 축사하신다면 내 존재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내 한 몸 제대로 간수하기 힘이 들 정도로 미약하다 할지라도 일단 주님이 나를 축복하신다면 나는 더 이상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아닙니다.
만명을 배불리 먹이고도 열 두 광주리에 가득 차게 만들 축복의 사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3)곧 나타날 축복에 대한 감사입니다
지금 당장은 겨우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지만 주님은 이것으로 만명 이상을 먹이는 비젼을 미리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꿈을 꾸는 자들입니다.
축복의 꿈을 꾸는 자들, 형통의 꿈을 꾸는 자들입니다.
III. 메시야의 표적을 보여주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기적의 떡과 물고기를 배불리 먹은 사람들이 입에서 나오는 결론입니다.
본문 14절에,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 분이 바로 우리를 먹여 살릴 왕이시다.
예수 바로 저 분이 우리에게 영혼의 양식이 되시는 생명이 떡이시다."
예수 저 분이 바로 이 세상에 오시기로 예언된 하나님이 아들이시다."
열 두 광주리에 가득찬 축복을 체험한 성도들은 이제 나가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에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기적을 들은 사람들은 예수 앞에 구름떼처럼 몰려 옵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 주님께서 베푸시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은총을 입고 산다면 우리는 나가서 전도하게 됩니다.
와 보라!
예수 앞에 와 보라!
우리에게 무한한 긍휼을 베푸신다.
감사가 넘치게 만든다!
임마누엘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총을 먹고 사는 성도들입니다.
매일 매일의 은혜들을 버리지 말고 광주리에 담으세요.
그리고 열 두 광주리에 가득찬 은혜 때문에 매일 감사하면서 사세요.
그러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감사체질로 변해서 기적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비록 하찮은 보리떡이나 물고기같은 존재지만 주님의 손에 불들려 축사를 받은 후 수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게 하는 하나님이 축복의 표징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들
요 6:1-15 / 김명혁 목사
주일마다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들"이란 주제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설교 말씀이 자기에게 잘 맞고 은혜와 감동이 된다고 고백을 하고 어떤 사람은 설교의 수준이 너무 높아서 마음에 부담이 된다고 고백을 합니다. 지난 주일 설교의 주인공은 스데반 별이었는데 스데반 별은 너무나 큰 별이었고 너무나 찬란히 빛나는 별이었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부담이 되는 별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도 지난 주일 설교 말씀에 은혜와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새 가족반의 노오현 교수님은 지난 주일 설교에 가장 큰 은혜와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말씀 듣는 자세가 아주 겸손해졌고 동시에 아주 높아졌습니다. 아무리 학문적으로 높은 서울대학교의 교수이고 대한민국 학술원의 회원이지만 겸손한 마음, 단순한 마음, 열린 마음을 가질 때, 높은 수준의 설교에도 은혜와 감동을 받게 됩니다.
오늘 아침에는 아주 작은 별 하나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스데반처럼 설교를 잘 한 별도 아니었고 구제를 잘 한 별도 아니었고 순교를 장하게 한 별도 아니었습니다. 스데반에 비하면 아주 작은 별입니다. 그러나 이 작은 별도 갈리리의 밤 하늘에서 그리고 천국의 하늘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습니다. "반짝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비치네" 그 별은 유명한 별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별의 이름을 모릅니다. 물론 예수님은 아셨고 하나님은 그 별의 이름을 생명 책에 기록하셨지만 우리는 모릅니다. 그 별은 작은 별이었지만 예수님을 분명히 증거한 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서도 5천명 이상을 먹일 수 있는 능력이 많으신 분이심을 분명히 나타내 보였습니다. 그 별의 작은 행동을 통해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 온 산 떡이라는 사실도 분명히 나타내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 별의 작은 행동을 통해서 사람이 예수님을 먹으면 영생한다는 사실도 분명히 나타내 보였습니다. 그 별의 작은 행동을 통해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은 너무나 중요한 말씀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요6:51). 그 별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 드린 한 아이 별이었습니다. 그 작은 별이 없었다면 예수님은 그 만큼 덜 분명히 증거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오병 이어를 드린 한 아이가 어떻게 예수님을 증거하는 작은 별이 되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한 아이는 예수님에게로 갔습니다.
한 아이는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예수께로 가면 나는 기뻐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예수님이 행하시는 이적도 보기 위해서 예수님에게로 갔는데 한 아이도 예수님에게로 갔습니다. 아이라고 해서 예수님에게로 가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이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에게로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배와 기도회가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교회에 가고 부흥회에 가고 기도회에 가고 새벽기도회에 가는데 있어서 아주 열심이었습니다. 특별히 6.25 전쟁 때 대구에 피난 가서는 제가 중학교 1학년 2학년 3학년 학생이었을 때 주일 저녁 예배 수요일 저녁 예배는 물론 새벽기도회와 부흥회에도 얼마나 열심이 찾아 다녔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에게로 부지런히 가야 은혜도 받고 그래서 예수님을 증거하게 됩니다. 저녁 예배에도 열심히 참석하고 새벽기도회에도 열심히 참석해야 은혜도 받고 그래서 예수님을 증거하게 됩니다.
삭개오도 예수님에게로 갔다가 은혜를 받고 예수님을 증거하게 되었고, 중풍병자도 예수님에게로 갔다가 은혜를 받고 예수님을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한 아이는 예수님에게로 갔다가 은혜를 받고 예수님을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무조건 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향하여 "다 내게로 오라"고 부르십니다. 무조건 가야 합니다. 도마는 주일 저녁 기도회에 한 번 빠졌다가 한 주간 내내 어두움과 회의와 절망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만사를 제쳐 놓고 무조건 예수님에게로 가야 합니다.
둘째, 한 아이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한 아이는 귀를 기울이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과 입에 초점을 맞추고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떡을 사서 많은 사람을 먹이도록 하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제자 안드레가 이곳 저곳을 찾아 다니며 떡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 말에도 귀를 기울이고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제자들의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주일학교 선생님의 말씀과 목사님의 말씀을 듣는데 아주 열심이었습니다. 주일학교 선생님의 말씀을 어머니의 말씀보다도 더 열심히 들었고 교회 목사님의 말씀을 어느 사람의 말보다 더 열심히 들었습니다. 중학생 때는 이성봉 목사님의 말씀을 너무 열심히 들었고 고등학생 때는 김치선 목사님의 말씀을 너무 열심히 들었습니다. 대학생 때는 김치선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과 김창인 목사님의 말씀을 열심히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제자들의 말씀을 들을 때 은혜를 받고 그래서 예수님을 증거하게 됩니다. 마음을 열고 귀를 열고 겸손하고 단순하고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귀를 열고 들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했습니다.
베다니의 마리아는 마음을 열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다가 은혜를 받고 예수님을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백부장 고넬료도 마음을 열고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의 말씀을 듣다가 은혜를 받고 예수님을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한 아이는 마음과 귀를 열고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의 말씀을 듣다가 은혜를 받고 예수님을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서 마음을 열고 귀를 열고 입을 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말씀과 은혜를 마음과 귀와 입에 채워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81:10).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루디아가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했다고 했습니다(행16:14).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도 마음을 열고 주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무조건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교만한 마음 닫힌 마음 비판하는 마음을 깨트려 열고 무조건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셋째, 한 아이는 예수님께 오병 이어를 드렸습니다.
한 아이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오병 이어를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떡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거기 모였던 5천 여명 가운데 떡과 생선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그 한 아이 뿐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한끼 끼니를 때우기 위해서 상당 수의 사람들이 떡 몇 개씩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떡이 필요하다고 말씀했을 때 떡을 선득 내어 놓은 사람은 한 아이뿐이었습니다. 어른들은 이해타산이 밝기 때문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선득 내어놓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나 한 아이는 단순하기 때문에 이해타산이 밝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이 떡이 필요하다고 말씀했을 때 떡을 선득 내어 놓을 수가 있었습니다. 한 아이의 작은 행동이 예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오병 이어를 드린 한 아이의 작은 행동이 그 아이로 하여금 예수님을 증거하는 작은 별이 되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무엇이 필요한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속 옷과 겉 옷이 필요한 때도 있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포도주와 약품이 필요한 때도 있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땅이나 집이 필요한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쌀과 간장이 필요한 때도 있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불과 담요가 필요한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시간이 필요한 때도 있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손과 발이 필요한 때도 있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눈물과 사랑이 필요한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무엇을 하나님께 드릴 때 감동하시면서 그 헌물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기도 하고 예수님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기도 합니다. 한 아이가 오병 이어를 드릴 때 예수님은 감동하시면서 그 아이의 헌물을 통해서 자기를 세상에 나타내 보이였습니다.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 온 산 떡이심을 세상에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한 아이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하나의 작은 별이 되었습니다. 그 아이의 삶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그 아이는 한 평생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하는 작은 별로서 살았을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아침 예수님을 증거한 한 아이 별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떻게 한 아이가 예수님을 증거하는 작은 별이 될 수가 있었습니까? 첫째 예수님에게로 갔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을 열고 들었습니다. 셋째 자기가 가지고 있던 것을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여러분들도 여기 한 아이처럼 예수님을 증거하는 작은 별이 되고 싶지 않습니까? 오늘 아침 말씀은 한 아이의 존재가 얼마나 귀중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무시해 버릴 수도 있는 한 아이를 예수님은 아주 귀중하게 여기시며 작은 별로 만들어주셨습니다. 현대교육의 창시자 코메니우스도 참된 교육의 목적은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씨앗을 계발해서 새로운 인간성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모두 어린이처럼 순수해지고 단순해지는 것이 중요하고 그리고 어린이들로 하여금 주님을 증거하는 작은 별들로 살도록 사랑으로 지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이 모두 예수님을 증거하는 작은 별들로 살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께로 가야 합니다.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가진 것을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 자녀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모두 작은 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