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문 Ⅲ-54]임중도원(任重道遠), 개인연구소 차린 까닭은?
나로서 그제는 아주 특별한 날이었다. 오후 6시, <임실·오수 이야기연구소 출범>이라는 플래카드를 대문 위에 아담하게 걸어놓고, 오수지역 민간단체장 등 유지 10여명, 임실 남원지역에 귀향해 잘 살고 있는 고교 친구 15명, 고향지킴이 꾀복쟁이 친구 대여섯 명을 초대해 개소식을 가진 것이다. 지역이름을 내세운 <이야기연구소>라? 이건 또 무슨 수작이란 말인가? 궁금한 이들이 많으리라. 하여, 플래카드에 ‘인문교양 향토지리서(鄕土 地理書) 등 편찬’이라는 설명을 한 줄 덧붙였다. 그러니까 기특하게도 애향심의 발로로 연구소를 차려 본격적으로 집필활동을 하겠다는 것을 30여명 앞에서 공식적으로, 공개적으로 처음 ‘선언’을 한 셈인데, 이는 여러 분의 앞에서 약속을 함으로써 내 마음에 다짐을 더욱 굳게 하고자 함이었다. 정치인이 공약을 지켜야 하듯, 개인이지만, 이 핑계 저 핑계로 유명무실하면 안될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아무튼, 입추 직후부터 날이 좀 풀려서 다행. 웬 시골동네에 승용차가 즐비하고 잔치도 아닌데 30여명이 나래비를 선 것이 조금은 이채로웠을 터. 호스트(주인공)이 여러 가지 공지사항을 육성으로 알린다. 간단한 세리머니 후 인근 오수식당에서 뒤풀이가 있으면 모두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주시라고, 본채 마루에 늘어놓은 책들을 꼭 훑어보시라고, 1차 자료집이라고 준비한 소책자들을 꼭 가져가 반드시 읽어보시라고(5년간 지역에 대해 쓴 졸문 30여편과 오수개 현창에 30년 넘게 헌신한 심재석 회장의 오수개 역사 10편이 실려 있다), 서재에 여분이 있는 책도 있으니 부담없이 가져가시라고, 오수를 다룬 인문지리서 책이름을 가칭 <오수여지승람>이든 <오수여지도>로 할 생각인데, 참고서적들도 떠들어보시라고.
이어서 내빈 30여명의 소개를 제법 재미난 설명을 곁들여 침착하게 마쳤다. 행사에 어울리게 그날 서울에서 공수한 생활한복을 입고 속으론 조금 긴장됐지만, 억지로 태연한 체 너스레를 떨었다. ‘유세차’ 어쩌고하는 축문은 생략한 채, 연구소가 잘 되라며 막걸리 한 잔을 따르고 재배를 했다.
멋진 여름한복을 입고 계룡에서 오신 금석문학자 손환일 박사의 덕담이 듣기에 보기에 심히 좋았다. 이분은‘서화문화연구소’라는 개인 연구소를 차린 지 오래이다. 오기 직전에 둘버본 풍욕정(風浴亭)과 체리암(滯離巖)을 소개하며, 바람으로 목욕(샤워)를 한다거나 ‘체리우(滯離友: 헤어지기가 섭섭해 발걸음을 머뭇머뭇하는 깊은 우정의 친구를 말함) 등 함축적인 이름의 뜻을 설명하는데 인상적이었다. 이런 멋진 곳이 방치된 게 안타깝다. 속히 번듯하게 조성해야 될 일이 아니겠는가. 연구소가 해야 할 첫 번째 미션이 생겼다. 하하.
그날의 주인공이 자축하는 말씀을 ‘3분 스피치’로 부족하다며 5분의 시간을 달라고 한다. 42년만에 탯자리인 이곳, 이 집으로 내려와 홀로 된 노부를 모시고자 했는데, 100세가 된 마당에 2년 전 요양원에 가셨다, 오수의견비 존재조차 모르고 내려온 귀향 7년차, 없던 애향심이 생긴 까닭은 마음을 허락한 친구를 만난 때문이고 덕분이라고 한다. 또한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또 사람을 만든다’는 말처럼 2년 전 우연히 경기도 수지구의 두 동네 이야기를 담은 인문대중교양 지리서 <머내여지도>와 <머내만세운동>이라는 소책자를 접한 후, 고향을 위하고 알리는 이런 책을 써야겠다는 ‘야심’으로 연구소를 개설한다는 취지를 얘기해 박수를 받았다. 고향 오수에 살면서 오수를 알면 알수록 대단한 고장임을 알고 놀란 적이 여러 번 있었다고, 아무리 과거의 영광이 화려해도 기록이 없으면 ‘꽝’이라고, 오수의견비도 고려-조선때의 기록이 없어 역사의 수수께끼를 풀기 어렵듯, 어떠한 기록이든 남겨놓아야 하지 않겠냐고 하는 주인공의 얘기에 모두 공감했으리라고 생각한다. 오늘의 호스트는 실제로 “우리나라가 기록의 나라”를 언제나 강조하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을 주제로 한 인문학특강을 정부 교육위촉기관에서 5-6년 동안 해온 ‘기록유산 전도사’였다. 흐흐.
우리 면의, 우리 군의 고고샅샅, 과거, 현재, 내일의 이야기들을 모아 모아서, 정제된 글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우리의 2세들에게 남겨주는 것이야말로 이름없는 농촌의 글쟁이로서 큰 보람이 아니겠냐는 기특한 생각을 했다는 대목에서는 ‘만장일치’ 큰 박수를 받았다. 그는 귀를 언제나 열어놓고 발품을 무수히 팔음으로써, 자격이 있든없든 스토리뱅크(story bank)를 만들어 스토리텔러(story teller)가 되고 스토리라이터(story writer)가 될 터이니 도와주실 분들이 바로 여러분들이라는 말로 ‘짧은 인사’ 겸 자축사를 마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한적한 식당을 전세내, 요즘 세태와 다르게 30여명의 유흥시간이 9시까지 펼쳐졌다. 서울 송파구에서 활동하는 <7080 윤중현밴드>의 자니윤 친구가 약소한 장비를 갖고 내려왔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는 일. 기품있는 흑백사진으로 ‘시인’을 자처하는 거리의 사진사 이반형도 내려와 찰칵찰칵, 어떤 예술사진, 인생샷이 태어날지도 궁금한 일이다. 작은 잔치는 끝났다. 모두 돌아가는 길, 가까이 전주와 임실, 남원에 사는 친구들은 차치하고라도 서울, 하남, 오산, 광양, 대전, 계룡 등에서 오신 분들에게 하염없이 미안했지만, 할 수 없는 일. 아아-, 행사 마무리에 연구소 공동소장으로 점찍어 내락을 한 관천(오동영) 친구의 ‘오수개’ 창작시 낭송이 그날의 하이라이트가 아니었을까(연구소의 ‘천군만마’이다). 전문을 따로 공개할 생각이다.
아무튼, ‘처음은 미미해도 끝은 창대하리라’는 말처럼, 고향에서 10년, 20년(?) 제2의 삶을 살면서 소원하는 지리서 등을 몇 권 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기로 했다. 펴낼 수 있다면, 나로선 큰 보람일 터이고, 행복할 게 틀림없다. 임중도원(任重道遠). 책임은 무겁고 갈 길은 멀다. 아멘, 할렐루야. 나무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