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65
3월17일[사순 제2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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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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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_iC_GVmtNGM
[인천교구 이현종 세베리노(송내1동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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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신앙생활보다 더 좋은 우울증 치료제는 다시 또 없습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인 다니엘 예언서 말씀은 깊은 절망감과 우울감으로 가득한 요즘 제 심정을 대변하는 듯한 분위기입니다. 주님께서 사랑이요 자비 그 자체이신 분이시면서, 어찌 이리 큰 참담함과 혹독함을 체험하게 하시는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주님이십니다. 그분 마음속을 헤아리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주님, 저희의 임금들과 고관들과 조상들을 비롯하여 저희는 모두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다니엘 예언서 9장 8절)
지난 우리의 삶을 더 깊이 성찰할 순간인 듯합니다. 누구를 탓하기에 앞서 더 유심히 내 발밑을 내려다봐야 할 때입니다. 더 부끄럽게 되지 않기 위해 더 정신 차리고 깨어있어야 할 때입니다.
부디 너무 우울해하지 말길 바랍니다. 초기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 같아서 본인의 적극적인 의지로 극복이 가능합니다. 규칙적인 운동, 산책이나 등산, 마음 비우기 작업 등이 도움이 됩니다. 스스로 극복하기 힘겨울 때는 의사나 전문가의 진단에 따른 처방과 치료는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명의(名醫)이자 주치의가 한 분 계십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치유자이신 예수님께 다가갈 때 그분께서 우리를 우울증에서 해방시켜 주십니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신앙생활보다 더 좋은 우울증 치료제는 다시 또 없습니다.
우울증의 원인을 찾아 올라가 보니 실망이란 단어가 자리 잡고 있더군요. 그렇다면 실망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나 자신과 이웃에 대한 지나친 기대가 결국 실망을 불러옵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 인간이기에 실망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실망감을 느끼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 함께라면 언제든지 일어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망했을 때 낙담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우울증으로 진전되도록 방관하지 말고 넘어진 그 자리에서 바로 일어서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과거의 상처와 아픔을 하느님 자비의 강물에 흘려 보내는 일이야말로 우울증 치료에 최선책임을 강조합니다.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마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한다.”(이사야 43장 18~19절)
한편 다윗 임금은 자신에게 다가온 우울증이 하느님 은총과 자비 안에서 완치되었음을 크게 외칩니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녹아내리며 어찌하여 내 안에서 신음하느냐? 하느님께 바라라, 나 그분을 다시 찬송하게 되리라, 나의 구원, 나의 하느님을.”(시편 43장 5절)
우리 그리스도교는 철저하게도 희망의 종교입니다.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 때조차도 주님께 희망을 두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참 그리스도인으로서 취할 태도입니다. 암담하고 울적할수록 주님께 매달려봐야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향후 5년간을 대 피정 기간으로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뉴스도 끊기로 했습니다. 대신 더 깊이 복음 속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습니다. 더 깊이 책 속으로 빠져들어가기로 결심했습니다. 더 인간다운 세상, 더 의로운 세상, 더 복음적인 세상 건설을 위해 노력하고 연대할 바가 무엇인가, 고민해보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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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cd8hI3fDZ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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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용서에 이르는 유일한 방법>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많이 들어본, “뿌린 대로 거둔다.” 법칙입니다. ‘부메랑’ 법칙이라 해도 될 것입니다. 법칙은 예외가 없어야 합니다. 심판받지 않으려면 심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잘 됩니까? 잘 안 됩니다.
영화 ‘밀양’에서는 신앙으로 용서를 하려고 해도 잘 안되는 불편한 상황을 잘 그려냈습니다. 회개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느낌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먼저 어떻게 하면 남을 심판하지 않을 수 있을지를 조금 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께서 그 책임을 물을 때 다른 이들에게 책임을 떠넘깁니다. 이렇게 자신이 아닌 타인을 심판했기 때문에 자신들도 심판받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타인을 심판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자신부터 심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이미 자기 자신을 심판하였습니다. 그래서 부끄럽고 두려워 몸을 무화과 잎으로 가린 것입니다.
자기를 심판하지 않는 이들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솔직함입니다. 타인의 판단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자기 부끄러운 것을 쉽게 드러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판단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도 아니요, 이웃도 아니요 하느님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자비로운 분임을 믿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못할 때 저절로 자기가 자기를 심판합니다.
이것으로 충분할까요? 충분하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완전한 용서를 위해 반드시 여기까지 이르러야 했습니다. 바로 나 자신을 심판하는 내 안의 심판자, 자아를 완전히 십자가에 못 박는 일입니다. 자아는 ‘나의 뜻’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이 아니면 절대 완전히 죽지 않고 계속 나를 심판합니다.
영화 ‘반지의 제왕: 반지 원정대’에 나오는 아라곤은 왕국 곤도르의 정통 후계자로 태어났으나, 자신의 조상이었던 이실두르가 사우론에게서 ‘절대반지’를 빼앗고도 끝내 파괴하지 못한 과오 때문에 깊은 죄책감과 두려움을 안고 살았습니다.
이실두르의 그 선택은 훗날 사우론이 다시 힘을 키우는 빌미가 되었고, 후손인 아라곤은 “나도 언젠가 조상처럼 약해져서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을까?” 하는 공포와 자격 상실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젊은 시절부터 그는 은둔자처럼 숨어 지내며 방랑 생활을 이어갔는데, 이는 스스로 “내가 왕의 자리에 설 자격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내가 힘을 발휘하면, 혹시 조상 이실두르처럼 반지와 악의 유혹에 휘말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끊임없는 자기 의심이 마음 한편에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두려움과 자기 정죄가 쌓여서, 아라곤은 왕좌를 이어받을 수 있는 용기도 없었고, 왕이 되어야 한다는 소명조차 뿌리 깊이 거부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반지 원정대에 함께하면서 서서히 자신의 두려움과 조상의 죄책감을 이겨 내기 시작합니다. 절대 반지를 파괴하기 위해 길을 떠난 이들과 동행하는 동안, 아라곤은 단지 무력이나 권위가 아닌, 진정한 용기와 헌신으로 동료들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을 느끼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조상과는 달리 “절대 반지의 악한 힘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없애는 사명을 완수하도록 동료들을 돕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스스로는 반지를 소유하지 않았지만, 반지를 지닌 프로도와 그 곁의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숱한 전투와 유혹 속에서도 ‘반지의 힘을 탐내지 않겠다’는 결심을 지켜 냅니다. 결국 그는 “이실두르가 실패했던 과제를 후손인 내가 마무리하겠다”는 마음으로 모든 두려움을 떨쳐 내고, 인간과 엘프, 호빗과 드워프가 하나 되는 연대를 이끌어 갑니다.
특히 프로도가 반지를 파괴하기까지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 사우론의 군대를 상대로 과감히 전쟁을 걸고, 자신의 힘을 다해 동료들을 지켜 내는 장면에서, 그는 더 이상 “조상의 잘못된 길을 밟을까 두려워 숨어 있는 존재”가 아니게 됩니다.
그렇게 반지가 결국 파괴되고 사우론의 권세가 무너져 내렸을 때, 아라곤은 마침내 스스로 “나는 조상과 다르며,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끝까지 책임 있게 완수했다”는 내적 확신을 얻게 됩니다. 그 결말로 아라곤은 ‘엘레사르’라는 이름을 받아 곤도르의 왕으로 즉위하고, 왕이 된 이후에도 과거의 경험과 겸손을 잊지 않으면서 백성과 중간계 여러 종족을 아우르는 훌륭한 통치자가 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기를 가리려는 노력을 멈췄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마련하신 용서의 가죽옷을 입었어야 합니다. 그래도 부족합니다.
또 과거의 망상이 자기들을 괴롭힐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에 매진했어야 합니다. 그 뜻에 자기 뜻을 죽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에 당신의 뜻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셨던 것처럼. 여기까지 오지 않으면 자아는 끊임없이 나를 괴롭혀 다른 이들을 심판하게 만들 것입니다.
탈출기에서 ‘모세’는 사실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민족을 버리고 도망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그 민족에게 되돌아가야 했습니다. 하느님은 그러한 직무를 맡기심으로써 과거의 일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리셨습니다. 결국 나에 대한 죄책감을 없애는 가장 완전한 길은 그분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믿는 것입니다.
죄책감은 ‘자격이 없다’로 귀결됩니다. 그리고 그 죄책감을 타인을 판단하면서 합리화하려고만 합니다. 죄책감이 없었다면 분명 사명을 수행했을 것입니다. 사명을 받아들여 수행함으로써 이전의 나를 판단하던 자아는 죽습니다. 자아를 죽이는 가장 완전한 길은 하느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수행하는 일입니다. 자격이 있다고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셨고 내가 그것을 받아들였다면, 나의 발밑에서 계속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뱀의 소리는 그저 쐐야 쐐야 하는 소리에 불과하게 됩니다.
이렇게 뱀이 무력하게 될 때 나는 의로움으로 타인을 심판할 존재가 아닌 용서할 존재로 새로 태어납니다.
이것이 완전한 용서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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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가톨릭 연구소에서 교우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내용을 보았습니다. 질문의 내용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성당에 다니는 이유였고, 다른 하나는 성당을 떠난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에 따른 성당에 다녀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였습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는 신앙인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먼저 성당에 다니는 이유입니다. 이유는 다섯 가지 정도 되었습니다. 첫째는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성체를 모시기 전에 ‘평화의 인사’를 합니다. 마음의 평화는 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에게 필요한 위로입니다. 둘째는 ‘삶의 의미와 목적 발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라는 사명입니다.
셋째는 ‘공동체와의 유대감 형성’입니다. 여행을 가도 혼자 가는 것도 좋지만 함께 가는 것이 좋습니다. 재미있기도 하고, 안전하기도 합니다. 초대교회는 함께 모여서 기도하였고, 찬양하였습니다. 가진 것을 서로 나누었고, 힘들고 어려운 이웃을 도왔습니다. 가톨릭은 세계 어디에 가도 같은 전례를 하기에 유대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넷째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지침’을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계명은 이렇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여라.” 예수님께서는 “첫째가 되려거든 꼴찌가 되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 겸손, 희생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계명입니다. 다섯째는 ‘전례와 의식 참여로 영적인 충만감’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를 제정해 주셨습니다. 성체성사는 신앙생활의 정점입니다. 고백성사를 통해서 주님을 합당하게 모실 준비를 합니다.
성당을 떠나는 이유도 다섯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삶이 바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신앙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성직자와 수도자에 대한 실망 때문입니다. 넷째는 성당 내에서의 소속감, 교제, 혹은 따뜻한 공동체 경험이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다섯째는 교회 조직의 경직된 구조나 변화에 대한 저항, 혹은 내부 정책과 결정 과정에 대한 불만 때문입니다. 교우들이 성당에 바라는 것도 다섯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신앙 교육 강화입니다. 둘째는 공동체 내에서의 소통입니다. 셋째는 신자들의 재교육입니다. 넷째는 성당의 시설개선입니다. 다섯째는 청년 사목의 확대입니다.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은 성당에 다녀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성찬례(미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미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마련해주신 축복과 감사의 예배입니다. 이 미사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합니다. 둘째는 ‘하느님과 깊은 만남’입니다. 모세는 거룩한 곳에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성당은 하느님과 만날 수 있는 거룩한 곳입니다.
셋째는 ‘죄의 용서와 영혼의 회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고 하셨습니다. 용서는 아낌없이 모든 것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넷째는 ‘공동체로서의 신앙’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교회가 모진 박해를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몸으로 의지하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시편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좋기도 좋을시고 아기자기한지고, 형제들이 함께 모여 오순도순 사는 것” 다섯째는 ‘구원의 은총’입니다. 우리가 성당에 다니는 것은 현세에서 축복받는 것만이 아닙니다. 현세에서 비록 고난과 역경을 당할지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당에 다니는 진정한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다니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 저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주님께 거역하였습니다. 주 저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당신의 종 예언자들을 통하여 저희 앞에 내놓으신 법에 따라 걷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의 신앙은 진실한 회개였습니다. 하느님의 법과 계명의 준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다니엘의 신앙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식을 말씀하십니다. 먼저 용서하고, 먼저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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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바오로수도회 한창현 모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자비로움을 실천하려면 남을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말고 용서하라고 이르십니다. 그리고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을 심판하시거나 단죄하시지 않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이 여정 안에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알아차리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이해하는 데 바오로 사도가 회심하는 과정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회심하기 전까지 십자가 죽음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박해하였습니다. 그런 바오로를 하느님께서는 심판하시거나 단죄하시지 않고 용서하셨습니다. 바오로는 죄인인 자신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체험으로 배반자 이스라엘이 자기 잘못을 깨닫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셨던 하느님의 자비(예레 3,12-13 참조)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담긴 신비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로마 11,32 참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이해하려면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먼저 체험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남을 판단하거나 단죄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멈추고 자신을 돌아보는 데 집중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는 상대에게 잘못이 없다고 인정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만 보려는 우리의 한계를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시선으로 다른 이들을 바라보고자 노력합시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겸손의 은총을 청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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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6,36-38: 남을 용서하여라.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36절) 자비는 훌륭한 덕으로서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며 경건한 사람들에게 최고로 어울리는 덕이다. 이 자비는 하느님의 속성임을 항상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한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37절) 남을 심판하지 말고 자신의 허물을 돌아보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반성하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의무지만, 남의 일에 참견하느라 바쁘다. 남을 심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다른 이의 허물을 찾거나 들추는 대신 자신의 잘못을 성찰한다. 심판하지 말아야 한다. 심판하는 그대로 우리도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마태 7,2 참조)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37절) 우리는 하느님을 세상에 보여 주고 정의와 용서와 은총으로 심판해야 한다. 그러면 정의에 따라 심판받을 때, 은총으로 용서받을 자격을 지니게 된다. 정의에 따르지 않고 보복하려고 심판하지 말라는 뜻이다. 자신을 위해 앙갚음하는 심판은 안 된다. 심판하기보다는 훈계하거나 충고하라는 뜻이다.
“용서하여라.”(37절) “주어라.”(38절) 용서하고 베푸는 것, 이것은 기도를 싣고 하느님께로 날아가는 두 날개라고 한다.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주고, 가난한 이에게 베풀어야 한다고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선을 베풀고, 용서하며 너그럽게 베푸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자선을 받고 용서받으며 너그러운 대접을 받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이들의 곳간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줄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더 많이 주실 것이며, 우리의 죄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모든 것을 충분히 주시는 하느님께서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38절) 하셨다. 용서는 단지 상대방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내 안에 미움과 분노가 있으면 바로 나를 해치는 결과를 초래한다.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말씀과 권고를 받아들이고 실천하면서 주님과 함께 살아가며, 좀 더 자비롭게 용서를 베풀며 하느님과 함께 여정을 계속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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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함께 회개하고, 함께 구원 받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6-38)
1) “남을 심판하지 마라.”라는 말씀은, “하느님 행세를 하지 마라.”라는 뜻입니다. ‘심판’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권한입니다. 인간에게는 남을 심판할 권한은 없고, 남에게 자비를 베풀 의무만 있습니다.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남을 심판하는 일은 심판받을 죄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7장을 보면,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남을 함부로 심판하고 단죄하는 말을 한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전 경비병들이 돌아오자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왜 그 사람을 끌고 오지 않았느냐?’ 하고 그들에게 물었다.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고 성전 경비병들이 대답하자, 바리사이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 최고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그를 믿더냐?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요한 7,45-49)
여기서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라는 말은, “성경을 모르는 저 무식한 놈들은 구원받지 못한다.”, 또는 “이 무식한 놈들아, 저주나 받아라."(지옥에나 가라.)라는 뜻입니다.
이런 말이 바로 남을 함부로 심판하고 단죄하는 말인데, 하느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신성 모독죄이고, 하느님의 사랑을 거스르는 죄이기도 합니다.
2) “남을 심판하지 마라.”라는 말씀을, 요한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하느님의 뜻’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구약성경 에제키엘서에, “나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한다."(에제 33,11)라는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이, 함부로 남을 심판하고 단죄하고 저주하는 말을 하는 것은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죄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구원 사업에 동참하고 협력하는 사람인데, 사탄은 그 구원 사업을 어떻게든 방해하려고 애를 쓰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남을 심판하고 단죄하고 저주하는 말을 하는 것은, 신앙인의 본분을 잊어버린 채 사탄이 하는 일을 도와주는 것과 같고, 사실상 사탄의 뒤를 따르는 것과 같습니다.
3) “‘남을 심판하지 마라.’라는 말씀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어라.’라는 말씀은 모순되지 않은가?” 루카복음 17장에,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루카 17,3ㄴ)라는 말씀이 있고, 마태오복음 18장에는 더 길고 자세한 말씀이 있습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마태 18,15-17)
형제가 죄가 되는 일을 하고 있을 때, 그 일이 죄라는 것을 판단하는 일은 심판일까, 아닐까? 또 그 형제에게 가서 ‘너, 그런 짓을 하지 마라.’라고 꾸짖는 것은 단죄일까, 아닐까?
‘죄 짓는 형제를 꾸짖는 일’과 ‘남을 심판하고 단죄하는 일’이 겉으로는 비슷하게 보일 수도 있는데, 같은 일이 아닙니다. 죄짓는 형제를 꾸짖고 타이르라는 예수님 말씀은, 그를 회개시켜서 구원의 길로 인도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라는 말씀은, “그 사람의 회개와 구원 가능성을 믿지 않고, 또는 인정하지 않고, 구원받지 못한다고 함부로 판단하지 마라.”라는 뜻입니다. <지옥에 갈 줄 알았던 ‘그 사람’은 천국에 가 있고, 당연히 천국으로 갈 것이라고 생각한 ‘나는’ 연옥이나 지옥에 가 있는 일이 많이 생길 것입니다.>
4) “남을 심판하지 마라.”라는 말씀은, 인간 세상의 사법제도를 부정하는 말씀도 아니고, 사도들에게 주신 ‘매고 푸는 권한’을 부정하는 말씀도 아닙니다. 민주주의 국가의 사법제도는 원래 ‘정의와 선의 실현’입니다. 그것은 하느님 뜻에 합당한 일입니다.
또 사도들에게 주신 권한은 심판하는 권한이 아니라, 사람들을 회개시켜서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권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용서하거나 용서하지 않는 것을 마음대로 판단하고 결정해도 좋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 뜻 실현’을 위해서, 죄인들을 회개시키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라는 지시입니다.
여기서 ‘용서’는, 회개하도록 인도하는 일까지 포함되어 있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는, “용서받지 못한 채로 남아 있게 하지 마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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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늘 하느님처럼 되어가는 것>
루카 6,36-38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늘 하느님처럼 되어가는 것>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코
하느님이
될 수는 없지만
쉬지 않고
하느님처럼
되어가는 것이니
하느님을
향한 믿음은
늘 더욱 깊숙이
뿌리내리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희망한다는 것은
결코
하느님이
될 수는 없지만
쉬지 않고
하느님처럼
되어가는 것이니
하느님을
향한 희망은
늘 더욱 새롭게
피어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코
하느님이
될 수는 없지만
쉬지 않고
하느님처럼
되어가는 것이니
하느님을
향한 사랑은
늘 더욱 뜨겁게
타오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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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다니엘은 바빌론 유배시기에 하느님 부르심을 받고 예언자로 활동합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죄악이 유배의 생활로 이어졌다고 한탄하며 고백합니다.
“저희는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질렀으며 악을 행하고 당신께 거역하였습니다. 당신의 계명과 법규에서 벗어났습니다. 저희는 저희의 임금들과 고관들과 조상들과 나라의 모든 백성들에게 당신의 이름으로 말하는 당신의 종 예언자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다니엘 예언서 9장 5절-6절)
그것은 이미 다른 예언자들도 예루살렘 멸망을 예고하며 왕과 지도자들의 잘못된 이런 죄를 지적했는데 다니엘은 하느님께 그들의 잘못을 용서 청하며 자비를 구합니다.
또한 다니엘은 이스라엘에 남아 있는 사람 뿐 아니라 유배지의 동포를 포함한 이들의 죄까지도 주님의 자비를 청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1) 그리고 남을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그대로 심판받고 단죄를 받을 것이라고 하시지요. 어질고 포용력이 있는 사람은 남을 비판하기보다 먼저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이것 또한 사랑에서 나오는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원숙한 신앙인의 모습은 착하고 어질며, 남의 단점을 인내할 수 있는 여백이 있습니다.
이어서 주님의 기도에서도 용서를 청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듯이 주님께서 ‘용서하라’고 하라고 하십니다.2) 사실 우리가 생활하면서 의도를 갖거나 계획한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섬세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이웃의 무례나 한 마디 말에도 쉽게 상처도 받고 또 주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관용과 겸손의 마음을 잊지 않는다면 이웃을 용서하려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복음 6장 38절)
주님의 오늘 말씀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사는 비법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베풀고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은 주님의 마음을 읽고 그분의 길을 따를 수 있는 참 신앙인이라 하겠습니다. 넉넉한 삶의 모습은 어떤 처지에서든 이웃에게 베풀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 가까운 예로 행복한 부부는 서로 받기보다는 서로 베풀려고 노력하는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부부에게서 진정한 행복은 혼자의 노력보다는 함께 실천할 때 더욱 빛나는 것입니다.
‘좁은 집에 살 수는 있어도 속이 좁아터진 사람과 사는 것은 어렵다’라는 우리 속담이 있는데, 아무래도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사람과는 충돌하고 함께 오랜 관계를 지속하기는 힘들지요. 신앙에서 그래도 중요한 것은 속이 넓고 자비로운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게 큰 그릇을 갖고 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축복도 받게 되어있습니다.
‘그 사람이 참다운 신앙인이냐?’라는 질문에 한 마디로 대답할 수는 없지만 그 중에 하나가 ‘편한 사람’. 아니면 ‘따뜻한 사람’이 아닐까요? 물론 여기다가 ‘진실한 사람’도 포함하면 더 좋겠지만, ‘베푸는 사람’은 주위 사람들에게 진정한 평화와 위로를 줄 수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불편하거나 차가운 사람’은 아무래도 베푸는 것은 없고 자기 가치관에 묶여 인색하거나 부자유스럽기 때문일 것입니다.
미사 전례에서 세 번이나 가슴을 칠 정도로 우리는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대들보는 못 보고 남의 눈의 티는 보며 따지고 판단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사순 시기를 지내고 있는 우리는 먼저 주님 앞에 겸손을 청하며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는 잘못도 살피고 우리의 죄에 대한 회개를 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남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접고 대신 그 손으로 우리 자신의 가슴을 세 번 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좋은 생각’을 읽다가3) 이런 문구가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좋은 말은 진실한 말, 따뜻한 말, 필요한 말’이라고 합니다. 이 글을 쓴 저자도 이 말의 출처가 생각나지는 않는데 20여년을 간직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신앙인들에게는 이 말이 하느님의 사랑이 바탕이 될 때 가능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생각이나 신념을 말로 표현하게 되어있습니다.
신앙인이라도 베풀지 않고 받는 것만을 바라는 사람도 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오로도‘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행복하다.’라는 말을 남깁니다.4) 그리스도교가 ‘은총’이도 중요하지만 사람의 의지로 이루어지는 ‘선행’도 신앙인의 삶에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교회역사에서 베푸는 ‘선행’에도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부족한 가운데 하느님 사랑을 바탕으로 베풀고 나누는 삶을 또한 가르치십니다.
그럴 때 신앙인은 고통 중에서 사랑의 삶을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것이고 이웃에게 자비롭고 너그러운 마음과 함께 용서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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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오잌티르몬 에스틴(οἰκτίρμων ἐστίν)’처럼.”에서 하느님의 본성이 사랑이심을 드러낸다. 여기에서 자비와 측은한 마음이 나오신다.
유학(儒學) 사단(四端)에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기고 측은하게 생각하는 측은지심(惻隱之心), 의롭지 못함과 못함을 부끄럽게 여기는 수오지심(羞惡之心), 겸손하여 남에게 양보할 줄 아는 사양지심(辭讓之心), 그리고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이 있다. 이것은 인간본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중에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양보할 줄 아는 마음은 어진 마음(仁)과 연결되는데, 복음은 ‘사랑’을 가리키고 동양의 가르침은 어질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표현된다고 할 수 있다.
2) 주님께서 ‘심판하지 마라(크리네테 κρίνετε)’. ‘단죄하지 마라(카타디카제테 καταδικάζετε)’. ‘용서하라(아포뤼케헤스테 ἀπολύετε)’라는 말씀을 이어서 하신다. 그래야 그 결과로 ‘심판받지 않고.’ ‘단죄 받지 않으며’. ‘용서 받을 수 있다’고 하신다. 부족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쉽게 범할 빠져들 들 수 있는 잘못이다.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사랑의 참다운 단계에 우리가 이르러야 가능할 것이다.
3) ‘좋은 생각’1월호(2015,48-49): 1992년 8월에 창간된 에세이 전문 월간지.
4) 사도 바오로가 성령에 사로잡혀 예루살렘으로 향하기 전에(사도행전 20장 22절) 에페소 원로들과 작별하기 전에 했던 말이다. “나는 모든 면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그렇게 애써 일하며 약한 이들을 거두어 주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친히 이르신 주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에페소서 20장 3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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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님]
<남는 장사>
다니엘의 삶이 돋보이는 것은 이방인의 땅에 끌려간 포로의 신세로 살았던 그의 처지에서는 하느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일이 여의치도 수월하지도 않았을 것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늘 성경을 펴 놓고, 주님의 말씀을 곰곰 마음에 새겼다고 하니(9,1-3 참조) 다니엘의 올곧은 믿음은 하느님의 말씀에 기준하여 살려고 했던 그의 뚜렷한 심지에서 비롯된 것이라 싶어 더욱 존경스럽습니다.
오늘 다니엘이 바친 기도를 들으시고 서둘러 가브리엘 천사를 보내어 응답을 들려주셨던 하느님의 기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오늘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내린 말씀을 묵상하다가 이스라엘의 바빌론 유배햇수가 일흔 해라는 것을 깨닫고 하느님께 기도를 올렸던 것이니까요.
인간은 모두 예배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만 예배 대상이 무엇인가가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하느님을 믿는 대신 세상에 보이는 것을 숭배하고 믿도록 하는 사탄의 계략은 곧잘 먹혀들어서 세상이 온통 죄로 물들게 했습니다.
세상적인 가치를 추구하고 그것에 유혹당하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사탄의 말에 혹한 까닭입니다.
참 하느님이신 그 분을 예배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 만질 수 있는 것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우상을 예배할 때 끝은 허망하고 악합니다. 인생이 덧없다고 말하는 이유도 헛된 우상을 향했던 결과를 토로한 것이라 싶습니다.
값비싼 것으로 치장하면 달라질 것이라 여기고 명예가 높아지면 다른 사람으로 변화될 줄로 착각하고 권력을 누리게 되면 전혀 다른 삶이 보장될 줄로 생각하지만 결과는 전혀 그렇지 못한 것이니까요.
우리의 약점을 알고 계신 주님께서는 오늘, 매우 간단하게 죄를 피하고 또 이길 수 있는 비법을 알려 주십니다. 그런데 이를 행하기 위해서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이 참 놀랍습니다.
우리들이 죄를 이기기 위해서는 힘도 시간도 혹은 물질도 그 무엇도 필요한 것이 없다 하시니까요. 다만 생각 하나를 버리고 마음하나 바꾸면 족한 일이라 일깨우십니다.
허다한 조상의 죄를 아뢰고 모든 세상의 죄들을 고백했던 다니엘은 그 누구를 원망하지도 탓하지도 않았던 까닭이리라 싶습니다.
하느님을 대신하려고 죄에 빠진 인간을 위해서 대신 인간이 되셨던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했습니다. 보답하는 마음으로 생각하나 쯤, 마음 한 번쯤 바꿔보기를 강권해 드립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가 오늘 우리의 삶이 다니엘처럼 남을 원망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다만 그분을 닮아 용서할 수 있기를 청할 때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품에 담아 주실 것이라니, 정말 크게 남는 장사입니다. 망설일 이유가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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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회 故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우리는 마태오 복음에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는 말씀을 들었고 오늘 루카 복음에서는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는 말씀을 들었다.
내가 믿는 하느님은 "완전하신 아버지", "자비로우신 아버지"이시다. 이분이 나의 아버지이시고 나는 그분의 자녀이다.
자녀는 부모의 품성을 이어받는다. 즉 자녀는 부모를 닮는다. 따라서 내가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라면 나에게 완전하신 아버지, 자비로운 아버지의 품성이 있고 그 영이 나에게도 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 하느님을 닮으려고 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자녀이니까.
그럼 자비로운 아버지란 어떤 분이신가? "자비로운 아버지"란 부성과 모성을 의미한다. 즉 하느님의 품성은 부성과 모성을 함께 가지고 계신 분이시다. 그래서 완전하신 분이시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생명을 전달해주시어 우리와의 부자관계를 맺게 해주신 아버지이시다. 즉 당신 생명의 씨앗을 우리에게 전해주셨다. 그리고 하느님은 아버지이기 때문에 우리를 양육시켜 주시고 우리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신다.
한편 하느님은 우리를 낳아 주시는 어머니이시다.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도록 우리를 낳아주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당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당신의 귀염둥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온 마음으로 사랑하신다.
하느님은 부성과 모성을 겸비한 분이시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무한히 자비로우신 것이다. 이 사랑은 오직 하느님만이 가지고 계신 사랑이시고 자비이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우리를 낳아주셨고 길러주시는 아버지요 어머니이시기 때문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라는 말씀은 자비의 근원이 "너희가" 아니라 "너희의 아버지이시다." 이라는 뜻이다.
즉 자비는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나오는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비의 근원은 너희가 아니라 너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자비로운 사람이 되려면 나 혼자서는 안 되는 것이고 반드시 자비의 원천이신 아버지와 함께 할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즉 내가 자비로운 사람이 되려면 자비의 원천이신 아버지로부터 자비의 선물을 받아야 만이 가능한 것이다.
이런 원칙에서 그 다음 구절을 보면 하느님의 마음과 인간의 마음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남을 심판하지 마라. 남을 단죄하지 마라. 용서하여라. 주어라."라는 말은 자비로운 아버지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어떤가? "남을 심판하고, 단죄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주지 못한다." 왜 그런가? 자비로운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즉 아버지처럼 부성과 모성애가 없고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이기심만 있기 때문이다. 부모는 자식을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않으며 그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용서하지 못할 일이 없다.
그리고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다 주고자 한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왜 그런가?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어느 자식이라도 잘못되는 것을 원치 않고, 어느 자식도 미워하지 않는다. 모두가 잘되기를 바라고 모두가 서로 화목하게 사랑하며 지내기를 바라고 어떤 잘못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끊임없이 용서해주신다.
자신들은 입지 못하고 먹지 못해도 땀흘려 지은 농사를 자식들에게 보내주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부모가 아니면 그 누구도 이런 행위를 하지 못한다. 그것은 부모만이 가지고 있는 마음이요, 사랑이다.
이런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부모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지 자식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의 은혜라는 노래 가사를 보면 부모의 사랑이 잘 표현되어 있다.
"낳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를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어려선 안고 업고 얼려주시고 자라선 문 기대어 기다리는 맘 앓을사 그릇될사 자식 생각에 고우시던 이마 위에 주름이 가득... 사람의 마음에선 온 가지 소원 어머님의 마음 속엔 오직 한 가지 아낌없이 일생을 자식 위하여 살과 뼈를 깎아서 바치는 마음 인간의 그 무엇이 거룩하리오."
예수님은 그 어떤 사람도 비록 당신을 배반하는 제자일지라도 그리고 당신을 향하여 욕하고 침뱉고 창으로 찔러대는 병사들도 그리고 당신을 사형에 처하는 빌라도도 그들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단죄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라고 끝까지 용서하시고 마침내는 그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치셨다.
왜 그러셨을까? 예수님의 마음에는 부성과 모성애의 한없는 자비로움이 있기 때문이다. 즉 하느님은 자비로움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에게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는 하나의 원칙이 세워졌다면 이 원칙에서 우리의 모든 행동이 나와야 한다. 그 다음 말씀은 바로 이런 원칙에서 우리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제시해주신 것이다.
즉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남을 심판하는 일과 단죄하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가 해야하는 것은 용서하고 베풀어 주는 것이다.
우리는 왜 남을 심판하지 말고 단죄하지 말아야 하는가?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자비로운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은 이기심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남을 제대로 심판할 수 없다. 우리가 남을 심판할 때 그 심판의 기준은 자비가 아니라 자기 이익에 두고 있기 때문에 자기에게 유리한대로 심판하고 단죄할 위험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남을 심판할 때 그 사람의 마음을 보고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난 것만을 보고 심판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잘못 단죄할 수 있다. 이렇게 우리의 심판에는 한계가 있다.
심판은 인간의 몫이 아니다. 심판은 완전하신 아버지만이 올바르게 심판하실 수 있다. 우리가 해야하는 것은 심판과 단죄가 아니라 용서와 베푸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잘못 심판하고 단죄함으로써 내가 받는 고통과 억울함이 많이 있듯이 우리 자신도 다른 사람을 잘못 심판하고 단죄하였기 때문에 용서받아야할 일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심판과 단죄가 아니라 용서와 베푸는 일이다. 그것이 곧 나의 잘못을 끊임없이 용서해주시고 베풀어 주시는 아버지의 자비로운 마음을 본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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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마을에 심한 가뭄이 찾아왔습니다. 계속된 가뭄에 마을 사람들은 성당에 가서 함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며칠째 계속 성당에서 기도회를 하고 있는데, 성당 한가운데에 천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하늘에 너희의 기도가 닿았다. 참된 믿음을 가진 이가 제단에 초를 봉헌하면 곧바로 비를 내려주겠다.”
사람들은 서로 주저하기 시작했습니다. 초를 봉헌했는데 비가 오지 않으면 참된 믿음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신부도 수녀도 망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자들도 차마 신부, 수녀에게 초를 켜라고 하기 힘들어서, 신자들의 대표이며 믿음이 크다고 알려진 사목회장님이 등 떠밀려서 제대 초를 켜서 봉헌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쉽게도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누가 제대 초를 켜서 봉헌해야 하는지 눈치만 보고 있었습니다. 신부님이나 수녀님밖에 없다는 의견이 모이고 있을 때, 성당 한가운데로 한 꼬마 아이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초를 켜서 제단에 봉헌하자마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아이의 복장에서 참된 믿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이는 비가 온다는 믿음을 가지고 우비를 입고, 장화를 신고, 또 손에는 우산을 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사람도 비가 내리길 기도하면서도 비 올 것을 준비하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떤가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온전한 신뢰를 하느님께 하고 있습니까? 이렇게 하느님께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지키려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라고 말씀하시면서, 남을 심판하지 말고, 또 남을 단죄하지 말고, 무엇보다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제일 못하는 부분이 아닐까요? 너무 쉽게 심판하고 단죄하고 있으며, 용서를 가장 힘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온전한 신뢰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이 온전한 신뢰는 지키기 힘들어도 그 말씀을 지키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습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8)
이 말씀의 주인공이 바로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온전한 신뢰를 보이는 굳은 믿음의 소유자만이 이 말씀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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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우리 그리스도교의 가르침 중 그 중심 주제들이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아마도 첫 번째는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다음 자리가 바로 ‘용서’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도 용서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저들의 죄를 알지 못합니다.’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용서하셨다고 해서 용서가 그리 쉬운 것은 아닙니다. 용서는 우리 삶의 커다란 산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올라가기를 처음부터 포기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올라가다 지쳐서 포기하기도 합니다. 용서라는 산의 정상에 선다고 하더라도 또 다른 정상을 향해 가야 한다는 것에 허무함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용서는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용서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닌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디언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분노 안에서 사는 사람은 하루하루 무덤을 두 개 파는 것과 같다. 하나는 마음으로 저주하고 있는 다른 이의 무덤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의 무덤이다.’
용서하지 못하고 어두운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그 마음이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갈 것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용서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포기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산을 오르다 쉬어가는 것처럼 힘들면 쉬어가도 됩니다. 정상에만 도달하면 되니까요. 그렇게 정상에서 마시는 신선한 공기가 우리를 새롭게 하는 것처럼 용서라는 정상에서 만나는 기쁨이 우리를 새롭게 만들어 삶을 더욱 기쁘게 살아가는 은총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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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것은 항상….
어릴때 할아버지의 심부름으로 ‘베지밀’을 사러 갔습니다. 오면서 아이스께끼 사 먹으라고 여윳돈도 주셨습니다. 물론 신났습니다. 봉지에 베지밀 두 병을 담고 아이스께끼를 입에 물고 흥얼거렸습니다. 신나는 마음을 몸으로 표현하며 들고 있는 봉지를 빙글빙글 흔들었습니다.
집에 도착했습니다. 몇 개의 계단을 올라 집 대문에 들어서야 하는데…. 그만…. 신나게 흔들던 봉지가 계단에 부딪혔습니다. 그 이후는 말 안 해도 아실 것입니다.
‘소중한 것은 양손으로….’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손으로 받드는 것과 양손으로 받드는 것은 그 마음이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체를 양손으로 받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 바로 성체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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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무자비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이익만이 관계의 핵심이 되어 인류애를 바탕으로 강자가 약자를 돌보던 국제관계는 약해지고, 약육강식의 논리가 전개되는 비참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듯합니다.
먹히지 않으려고 약자들은 움츠러들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거칠어집니다. 인간관계나 국제 관계가 서로에게 방어적이고 거칠어질 때, 서로의 관계는 끊임없이 불협화음이 생기고 개인은 다툼과 분쟁이, 국제 관계는 전쟁이 일어납니다.
가질수록 더 많이 가지려는 개인이나 국가의 욕망과 지배욕은 가지지 못한 개인이나 국가를 더 가난하고 불행하게 만듭니다. 나보다 더 가난하거나 불행한 사람을 배려하고 돌보기보다, 다른 사람은 돌보지 않고 자신의 욕심만 채우는 개인이나 국가는 미래가 불행하게 됩니다.
사랑이나 자비심으로 다른 사람을 돌보고 배려하는 도덕 종교적 가치는 현실에서 불필요한 무용지물이 아니라, 개인이나 국가의 정체성과 기초를 세우고 지탱하며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이러한 사랑과 자비심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개인이나 국가는 당장 눈앞에서는 화려하게 보일지라도 결코 오래가지 못하고 비참한 결과를 맞이합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개인이나 국가 권력은 그러한 기본을 상실할 때 비참하고 불행한 종말을 맞이한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사랑과 자비심은 현실에서는 힘도 없고 잘 보이지 않지만, 좋은 인간관계나 국제 관계를 유지하는 필수적인 것이기에 큰 강물처럼 깊게 흐릅니다. 사랑과 자비심은 함께 사는 크고 작은 공동체와 인류의 생존을 위한 필수 덕목입니다.
자비심이 없는 인간관계, 사랑과 자비심이 없는 가정이나 공동체, 자비심을 상실한 국제 관계와 인류 공동체에서 사는 인간의 삶은, 함께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행복을 파괴하면서 죽음보다 더 비참하고 불행한 삶을 살 뿐입니다.
"주 저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주님께 거역하였습니다."(다니엘서. 9.9)
사랑과 자비심을 거부하며 불행과 죽음으로 가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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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요한 신부님]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지난 주 평일의 복음은 ‘대당 명제’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최소한’의 규정을 그마저도 겨우, 마지못해 실천하는 모습을, ‘남들도 다 그러는데 뭐!’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따라하지 말고, 하느님께 사랑받는 자녀이자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특별한 존재로서 계명의 근본정신을 온전히 실현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라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오늘 복음은 그 가르침을 마무리하시면서 우리에게 하시는 엄중한 권고의 말씀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이 말씀은 그저 자비를 베풀라고 명령하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왜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그리고 하느님께 받아 누린 그 자비를 어떻게 베풀어야 하는지 그 방법을 깨우쳐 주시려는 겁니다. 우리가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이유는 자비로운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먼저’ 조건 없이 한 없는 자비를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나도 이웃 형제 자매에게 ‘거저’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자비를 어떻게 베풀어야 할까요? 그 구체적 방법에 대해 예수님은 네 가지 동사로 설명하십니다. “심판하지 마라”, “단죄하지 마라”, “용서하여라”, “주어라”. 앞의 두 가지는 자비의 소극적인 실천으로써 적극적인 측면으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과정입니다. 이웃에게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웃을 비판하거나 단죄하려는 마음부터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된다”고 말씀하셨지요. 팔짱을 낀 채 째려보아서는 그 사람의 진면목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습니다. 그가 잘 되기를 바라는 긍정적 지향과 호의를 가지고 보아야 그 사람을 있는 모습 그대로 내 안에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그 사람의 행동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건 ‘법’이 할 일입니다. 그 사람의 속마음과 의도를 판단하고 단죄하는 건 ‘하느님’이 하실 일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남을 심판하고 단죄하는 게 아니라, 그를 본보기 삼아 나 자신을 깊이 성찰하여 잘못을 식별하고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는 일입니다.
뒤의 두 가지는 자비의 적극적인 실천으로써 하느님의 선하심을 닮아가는 과정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먼저 한 없는 자비를 베풀어 주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도 그분께서 사랑하시는 내 이웃 형제 자매들에게 기꺼이 자비를 베푸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내 안에 ‘담고’ 전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새에 하느님을 ‘닮아’가는 겁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은총과 사랑을 충만하게 내려 주시지요. 여기서 주의할 점은 우리가 ‘되질하는 그 되로 돌려받는다’는 점입니다. 이는 우리가 먼저 자비를 베풀어야만, 베푼만큼만 은총과 복을 주시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조건부로 사랑하시는 까다로운 분도 아니고, 받은 만큼만 돌려주시는 속 좁은 분도 아니지요. 우리가 이웃에게 기꺼이 베풀고 나누어서 생긴 ‘빈 자리’가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사랑을 담는 ‘그릇’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눈치보거나 아까워하지 말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베풀고 나누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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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찬미예수님
저는 언제나 관대한 사제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 이유는 온전히 경험에서 비롯되었는데, 신학생 시절 유난히 엄격하셨던 신부님들이 다소 원망스러웠기 때문입니다.
교수님들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학생들에게 F 학점을 많이 주는 신부님들도 계셨고 대하기 어려운 분들도 계셨습니다. 신학생들 입장에서는 당연히 관대한 신부님들, 수업은 가볍게 진행하며 점수를 잘 주는 신부님들이 인기가 많았습니다. 엄격한 신부님들께는 조금 더 너그럽게 우리를 대해주셨으면 좋겠는데, 안타까워했던 기억도 납니다.
사제가 되어 많지는 않지만 연차가 쌓여 신학생들을 만나게 되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입장이 되다 보니 지금껏 만난 많은 신부님들이 생각납니다. 아직 제 나이는 청년에 가까운 듯 하지만 앞으로 어떤 본보기가 되어야 할지 어떤 스승이 되어야 할지 자꾸만 자신을 돌아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엄격하셨던 분들이 많이 생각납니다. 그 엄격함이 결코 신학생들을 미워했기 때문이 아닌 진심어린 관심과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을 점차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좋은 가르침을 주고자 하셨던 진심어린 마음을 한참 지나서야 느끼게 된 셈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러한 모습조차 일종의 ‘자비’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자비’라는 단어를 무한한 ‘너그러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말씀하셨듯, 진정한 자비란 ‘단순한 베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상대방을 일깨워 주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아무리 너그럽더라도 그 안에 사랑과 관심이 없다면 그것은 무관심입니다. 혹은 관대한 마음으로 상대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오히려 무책임에 가깝습니다. 반면 조금은 엄격한 듯 하지만 그 안에 사랑과 애정 그리고 너그러움이 담겨져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자비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이 말씀을 듣는 우리는 다소 의아합니다. 실천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무조건적인 자비로움은 오히려 정의를 무시하고 악인들과 선인들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무조건적으로 사람들에게 자비로울 수 있단 말입니까? 소위 말해 잘못을 저지른 이들을 어떻게 쉽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이 자비가 무작정 베푸는 용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상대방을 일깨워 주는 사랑의 마음”이라면 오늘 말씀의 이해가 조금 더 쉬워집니다.
우리가 때로 자녀들에게 훈계를 하고 따끔하게 혼을 낼 때가 있듯 그것이 사랑과 연계되어 있다면 그것은 곧 자비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또한 쉽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좋은 가르침을 주겠다고 자녀에게 훈계하지만 그것은 자칫 잘못하면 화풀이가 될 수 있으며 더불어 나의 욕심이 섞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자비로운 사람이 되기 위한 명확한 조건을 알려주십니다. 바로 그것은 “남을 심판하지 말고 단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곧 사람을 대함에 있어 심판과 단죄가 들어가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심판이란 나의 주관에 따라 그 사람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행위이며 단죄는 이에 대한 벌을 부과하려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군가를 감히 판단할 수 있는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므로 심판과 단죄를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분노가 섞인 심판과 단죄는 결코 객관적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호주의 어느 성당에는, “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 없다”라는 말이 쓰여져 있다고 합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실수를 저지르고 잘못을 행합니다.
이는 인간의 한계를 나타내는 것 같지만 사실 그만큼의 가능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실수를 저지른다는 것은 그것을 고칠 수 있음을 뜻하며 잘못을 행한다는 것은 반성의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미워하는 누군가의 미래를 감히 우리가 어떻게 단정 지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이가 과거에 어떤 실수를 했다고 한들 그것이 현재의 반짝이는 그를 어떻게 감히 해칠 수 있겠습니까?
한편, 누군가가 나의 실수를 이를 갈며 심판하고 있다면 그것은 나에게 얼마나 큰 비참함입니까?
무엇보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과연 얼마나 깨끗합니까?
우리들이 그림자를 소유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빛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빛이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바닥에 펼쳐진 그림자만 바라본다면 그는 자신에게 갇혀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빛을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은 당연히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반면 빛이 있음에 감사하며 그림자의 존재를 확인한다면 세상을 온전히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우리에게 빛처럼 쏟아지는 하느님의 자비로움에 기대 타인을 심판하지 말고 단죄하지 말 것을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비를 위한 조건으로 “주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자비를 완성하는 것은 사랑을 주는 행위이며 그것은 배가 되어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이 사랑은 내가 용서를 베푸는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아닌 하느님으로부터 받게 되는 사랑입니다. 사람에게서 돌아오는 것은 한계가 있으나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은 훨씬 크고 무한합니다.
다시 한 번 제가 만난 어른 신부님들을 생각해 봅니다. 제가 만난 선배 신부님들 중에는 엄격함과 관대함을 떠나 인격적인 분들, 덕이 있으신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분들의 공통점은 저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자비로움이라 부르며 저 또한 그렇게 기억되는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그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부족한 저를 사제로 쓰고 계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기억하며 힘을 내어 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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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이는 단지 우리에게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는 말씀인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왜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지를 깨우쳐줍니다. 다시 말해서, 이는 자비로운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먼저’ 자비를 베푸셨다는 사실, 곧 우리는 아버지의 ‘먼저 베푸신 자비’를 입었다는 사실을 깨우쳐줍니다. 나아가서, 우리 안에 당신의 거룩한 형상인 ‘자비의 얼굴’을 심어놓으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바로 그 ‘자비의 얼굴’을 드러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비를 베풀 것인가?
이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네 가지 동사로 표현하십니다.
“심판하지 말라”, “단죄하지 말라” “용서하라”, “주어라”
그러니 ‘자비의 실천’은 우선 심판과 단죄를 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요, 악을 피하고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다. 타인의 허물을 심판하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허물을 들여다보며, 타인들 앞에 자신을 앞세우기보다 자신을 다소곳이 내려놓고, 겸손하게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먼저’ 용서와 자비를 베푸셨듯이, ‘먼저’ 용서를 베푸는 것입니다. 묘한 것은 ‘먼저’ 용서하면, 저절로 단죄와 심판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곧 ‘단죄, 심판하지 않고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라, 먼저 용서하면 단죄, 심판하지 않게 됩니다. 이는 악을 피하되 선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비록 자신이 죄에 떨어지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사랑으로 나가지는 못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결국, 악이 스스로 선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먼저 선을 베풀면 악이 물러가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선을 행하는 것이 악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됩니다. 그러니 어둠을 저주하기보다 한 개의 촛불을 켜야 하고, 평화를 보존하려하기보다 평화를 창조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21)
그러니 우리는 ‘용서할 수가 없다’고, 혹은 ‘용서가 안 된다’고 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나아가서 이미 용서받은 죄인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용서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용서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아직도 용서하지 않고 있는 자신마저도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먼저,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죄를 주님께 용서 청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용서하시니 우리도 용서하는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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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주님!
제 안에 심으신 당신의 자비가 저를 다스리게 하소서.
제 안에서 자비가 흘러나게 하소서.
당신께서 자비하신 것같이 자비로운 자 되게 하소서!
자비 안에 심어 둔 당신의 거룩한 형상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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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닮의 여정>
-대자대비大慈大悲,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
“주님, 당신의 종 위에, 당신의 얼굴을 빛내어 주소서.”(시편 31,17ㄱ)
하느님의 마음이, 하느님의 얼굴이 자비입니다.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하느님 아버지입니다. 여전히 병원에 계시지만 점차 병세는 호전되고 있다는 프란치스코 교황님 소식입니다. 새벽에 읽은 어제 발표한 삼종기도후 메시지도 교황님 믿음을 반영합니다.
“하느님을 찬미합시다, 그분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몸은 약할지라도, 그 어느 것도 우리를 사랑으로부터, 기도로부터, 줌으로부터, 믿음 안에서 서로 희망의 빛나는 표징이 되는 것으로부터 막을 수 없습니다. 부단히 하느님 사랑의 광선을 반사하십시오.”
그 어떤 환경 안에서도 자비하신 하느님의 빛나는 표징으로, 영원한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입니다. 오늘날 모든 불행과 재앙은 하느님을 떠남에서, 하느님을 잊음에서, 잃음에서 기인합니다. 발광체發光體 자비하신 하느님을 반사하는 반사체反射體 인생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광신도狂信徒가 되어 발광發狂하지 말고, 광신도光信徒가 되어 하느님을 발광發光하는 삶은 살라는 것입니다.
어느때보다, 하느님을 찾아야할 위기의 시대입니다. 해마다 맞이하는 사순시기, 날로 나라 안팎으로 위험이 증폭되어가는 위기의 시대에 올해 맞이하는 사순시기는 더욱 고맙고 반갑습니다. 어느때 보다 절실한 4월20일 부활대축일까지 기도와 회개, 절제와 극기의 사순시기입니다.
제 집무실 벽에 늘 걸려 있는 렘브란트의 돌아온 작은 아들을 품에 안고 기뻐하는 자비하신 아버지야 말로 자비하신 하느님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당신을 떠난 모든 사람들의 귀가를 간절히 한없이 기다리는 자비하신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오늘 옛 현자의 지혜도 자비하신 하느님이 답임을 보여줍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사람은 ‘밖’을 두려워하게 된다. 안에서 밖으로 나와야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다산>
나로부터 벗어나 밖의 하느님을 향할 때, 부단히 하느님을 향한 여정에 오를 때 비로소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을 몰아내는 하느님의 자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비슷한 성질을 가진 것들끼리 모이고, 만물은 무리를 지어서 나뉘어 산다. 길흉吉凶이 그로 말미암아 생긴다.”<논어>
부단히 한계를 넘어 대자대비, 공평무사한 자비하신 하느님을 향해 닮아감으로 평화 공존의 삶을 살 때 길흉도 점차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하느님을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입니다. 다음 행복기도의 다음 대목을 마음에 새깁니다.
“자비하신 아버지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오늘 복음도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 아드님을 통해 우리 믿는 이들을 향해, 아니 전인류를 향해 당신의 평생 소원을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모상대로 지음받은 우리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기대 수준은 이처럼 높습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루카복음 평지설교의 결론같은 말씀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하느님의 제시하는 바 유일한 평생과제이자 우리 모두를 향한 평생소원이자 우리의 평생목표이기도 합니다. 이래서 우리 삶은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이라 하는 것입니다. 몸은 노쇠해가도 날로 자비의 삶은 깊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신 하느님 아버지입니다. 하느님을 닮고 싶은 마음에 써놨던 ‘하늘’이란 고백 글도 생각납니다.
“하늘이
하늘에 가다니요?
그냥
있으세요
당신은
늘 높고 푸른 하늘이예요”
하느님의 자비는 추상적이 아닙니다. 애매한 추상명사가 아니라 구체적 실행동사입니다. 하느님의 깊이는 인간의 깊이입니다. 하느님의 신비는 인간의 신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신비가 바로 답입니다. 예수님의 구체적 처방이 모두 실행동사입니다.
1.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2.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3.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4.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되로 되받을 것이다.
바로 이런 구체적 자비행이요 이런 행위 또한 부단한 의도적, 의식적 선택이자 훈련이요 습관화의 노력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자비하신 하느님을 닮은 결정적 수행은 기도와 회개임을 제1독서 다니엘서가 제시합니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하늘을 우러러 두려워할 줄 모르는 후안무치, 철면피, 적반하장의 뻔뻔한 미치광이, 특히 오늘날 대한민국의 일부 극소수 양심과 상식을 잃어버린 무지한 사람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기도와 회개의 삶입니다.
“아, 주님! 위대하시고 경외로우신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계약과 자애를 지키시는 분! 저희는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질렀으며 악을 행하고 당신께 거역하였습니다. 당신의 계명과 법규에서 벗어났습니다. 당신의 종, 예언자들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저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당신의 법에 따라 걷지 않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의로우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오늘 이처럼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저희는 모두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주 저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다니엘의 회개의 기도가 가슴을 칩니다. 마음에 새기듯 절실한 내용들이라 대부분 다 써봤습니다. 거룩하고 은혜로운 사순시기 집중적 수행이 기도와 회개입니다. 진정성 넘치는 회개의 기도가 하느님 자비에 이르는 지름길입니다. 문제는 나에게 있고 답은 하느님께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가 궁극의 답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사순시기,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간절하고 항구한 회개의 기도와 더불어 하닮의 여정에 충실하도록 좋은 힘이 되어 주십니다.
“주님께 바라는 너희가 모두, 굳세게 마음들을 가져라.”(시편31,2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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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6,36)
<자비로운 사람이 되자!>
오늘 복음(루카6,36-38)은 '남을 심판하지 마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루카복음 6장 36절의 말씀인 '하느님의 자비'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어서 '남을 심판하지 마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자비는 하느님의 또 다른 이름이며,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하느님이 자비하시니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말고, 남을 단죄하지 말고, 너를 용서하고, 너에게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자비로운 사람의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자비로운 사람은 너를 심판하지 않습니다. 너를 단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너를 용서합니다. 잘 나눕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래야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심판받지 않고, 단죄받지 않으며,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용서받고, 넘치도록 되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육화(성탄)와 땀(공생활)과 수난과 죽음은 우리를 위한 하느님 자비의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하느님 자비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죄(罪)의 본질은 우리가 기도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자비로운 사람이 되지 않은 것입니다. 너를 심판하고 너를 단죄한 것입니다. 그리고 너를 용서하지 않고, 너와 나누지 않은 것입니다.
죄로부터 해방되는 은혜로운 사순시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다시 태어나고, 다시 부활하는 파스카 축제(주님부활대축일)를 기쁘게 맞이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저희는 모두 얼굴에 부끄럼만 가득합니다.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주 저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주님께 거역하였습니다."(다니 9,8.9)
하느님을 닮은 자비로운 사람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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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루카 6, 37)
우리는
매일매일
심판에
발목이 잡혀
우리 영혼을
잃어버립니다.
심판에 빠져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조차
잃어버렸습니다.
우리가
서야 할 자리가
어딘지를 묻는
은총과 용서의
사순입니다.
용서는
빛 속을
걷게 하지만
심판은 사람을
끊임없이
어둠으로
중독시킵니다.
심판에
중독된 채
살아가는
우리들
삶입니다.
심판의
돌을 던지면
그 심판의
돌은
또 다른
심판의
돌이 되어서
우리에게
되돌아옵니다.
심판을
끊는 것이
복음입니다.
심판은
우리 모두를
가두지만
복음은
우리 모두를
자유로이
풀어줍니다.
복음을 벗어나는
심판을 멈추고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용서로
걸어가야 할
때입니다.
심판에 빠져있는
우리를
건져올리시는
주님이십니다.
나누어야 할 것은
하느님의 자비이고
멈추어야 할 것은
심판입니다.
되받아야 할
자비의
기쁜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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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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