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서쪽 교외의 이허위안 동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원명원, 장춘원(長春園), 기춘원(綺春園 : 나중에 만춘원으로 바뀜) 3원을 통틀어 일컫는다. 면적은 320ha이며 호수가 많은 땅에 지어져 수면이 35%를 차지한다. 1709년 강희제(康熙帝)가 네 번째 아들 윤진에게 하사한 별장이었으나 윤진이 옹정제(雍正帝)로 즉위하자 1725년 황궁의 정원으로 조성하였다. 그뒤 건륭제(乾隆帝)가 바로크식 건축양식을 더하여 원명원을 크게 넓혔고 장춘원과 기춘원을 새로 지었다.
장춘원 북쪽에는 프랑스 로코코 양식의 영향을 받은 유럽식 건물인 서양루(西洋樓)를 세웠다. 3원 가운데 뒤쪽에 자리잡은 원명원은 호수 주위에 있는 9개의 섬에 조성하였고 구주(九州), 청연(淸宴)을 비롯한 9동의 부속건물이 있다. 호수 푸하이[福海]에는 신선이 살고 있다는 세 섬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州)를 뜻하는 작은 섬 3개를 조성하여 뛰어난 경치를 자랑하였다. 원명원은 1709년부터 1860년까지 황제가 기거하며 정무를 처리하던 곳이었으나, 1860년 제2차 아편전쟁 때 영국·프랑스 연합군에 의하여 불에 타 지금은 폐허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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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에 따르면 150여년에 걸쳐 완성된 원명원의 최종 모습은 1천여개의 궁전과 100여개의 원림 경관, 600여개의 크고 작은 축구장 등이 있었고 총면적은 5천묘(약 100만평 정도)
에 달하는 크기였다고 한다. 2세기에 걸쳐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등 청대 전성기를 이룬 황제들의 정치이념, 사상, 제국에 대한 신심은 고스란이 원명원의 웅장한 면모에 녹아 있
었던 것이다. 청대의 황제들은 겨울에만 자금성에 들어가 1개월여 동안 머물렀을 뿐 제의와 경전, 국사 집행 등 대부분의 시간을 이 원명원에서 보내면서 청왕조의 가장 융성했던
시기의 역사를 써내려갔다. 그러나 오늘날 남은 것은 1900년 프랑스 군대가 공격할 당시 3일 밤낮을 타고 남은 돌 무덤에 가까운 잔해뿐으로 감독 진티에무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
게 고백하기도 했다. “실제 원명원에 갔을 때 우리가 찍을 수 있는 장면은 오로지 돌과 돌뿐이었으며 고작해야 5분도 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원명원의 나머지 98%를 복원하는 것
은 촬영팀에 가장 큰 숙제이자 성공의 관건이었다. 이런 미션 임파서블을 감당해낼 파트너를 찾기 위해 촬영팀은 뉴질랜드로 날아갔고 여기서 <반지의 제왕> <킹콩> <나니아 연대
기: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의 CG를 맡았던 웨타와 최종 계약을 맺었다. 제작팀은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서적과 그림 등을 토대로 원명원의 창건 당시 모습을 파악해내고 웨타
의 3D기술과 특수효과로 실제에 가까운 원명원을 복원해내는 데 성공했다.
1년 이상의 준비기간과 4년여에 걸친 촬영기간, 그리고 중국 다큐멘터리로서는 블록버스터급에 가까운 1천만위안의 제작비는 고스란히 작품에 대한 호평으로 돌아왔다. ‘드라마
같은 다큐멘터리 혹은 다큐멘터리 같은 드라마’라는 제작 원칙은 사실의 기록이라는 다큐멘터리의 본질을 넘지 않는 선에서 기록영화의 단조로움을 보완하고 객관성을 더해주는
참신한 시도로 읽혔다.
첫댓글 복원를 하던가 말던가
워낙 짭이 많아서...복원한것도 개구라일지 몰라...
중국은 땅덩어리가 커서 좋겠다
놀라운 예술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