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의 이유와 방법
J. R. W. 스코트
석 태 진 역
그리스도의 교회 선교연구회
전도의 이유와 방법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에게는 그저 자신의 신앙을 지켜 복음의 진리를 향유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용감히 전파할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 . . .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됨이라" (빌립보서 1: 7),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빌립보서 1: 12).
그런즉 믿음에 있어서 복음적인 그리스도인은 또한 그 목적에 있어서도 복음적이어야 합니다. 지면상의 문제로 인하여 전도의 정의나 복음적인 소식에 관해서는 규명하지 않고 오직 전도의 이유와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데 필요한 방법들을 취급해 보고자 합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전도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리고 어떻게" 전해야 하는지 알아 보려는 것입니다.
1. 전도의 동기
부활하신 주께서 그의 교회에게 복음을 전 세계에 전하라는 명령을 하신 지도 어언 1900년이 훨씬 지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상황은 어떠합니까? 솔직히 말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가 수행되려면 아직도 요원하다고 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나라에서, 그리고 모든 사상과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개종해야 하며, 지구상의 모든 적절한 장소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설립되어야만 비로소 그리스도교가 우주적인 종교라고 주장할 수 있는 까닭입니다. 아직도 미치지 못한 장소가 많고 교회의 소리는 미약하고 왜소한 실정입니다. 더욱이 어떤 면에 있어서는 퇴조의 경향마저 보이고 있는 실정에 있습니다.
세계 인구는 연간 약 50,000,000명, 매일 약 140,000여명이 늘고 있는데 이러한 증가는 심각한 경제적 문제를 야기시킬 뿐 아니라 전도상의 문제점도 노출시키는 결과를 수반하고 있으니, 인구의 증가율이 그리스도인의 증가율보다 현저히 높다는데 그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고대의 민족 신앙(힌두교, 불교, 이슬람교 등)이 자극을 받고 분발함으로써 지역적으로는 오히려 그 선교 및 교세 확장에 있어서 그리스도교를 능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또한 동서양에 걸친 공산주의의 확산도 계속되고 있으니, 근래의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공공연히 자신들의 생전에 전 지구상에 적기를 게양하겠다고 호언장담하는 판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교 국가로 간주하고 있는 영국의 경우에도 불과 5% 미만을 유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전에 요-크 지역 대주교를 지낸 바 있는 "가베트 (Dr. Cyril Garbett)" 박사는, "영국은 완전한 이교 신앙에 빠질 염려에 처해 있다"는 표현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모두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에 실패한 교회의 노력은 그 원인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교회가 직면한 여러 가지 문제에 관해서 책할 수 있습니다만, 진정한 설명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 잠재해 있는 것입니다. 간단히 표현하자면 우리가 예수께로부터 받은 과제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원인은 우리들 자신이 그 일을 하려는 충동을 느끼지 못했던 까닭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게으를 수 있는 동물"이라고 "에머슨 (Emerson)"은 말했으며, 실제로 인간은 게으를 뿐 아니라 이기적인 존재입니다. 우리들이 근본적인 이기심을 극복하고 복음 전파에 헌신하기 위래서 우리는 보다 강건해지고 강력한 동기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성서는 전도에 대한 세가지 중요한 동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의 명령에 대한 순종
각 복음서는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임무 부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 . .". 마가복음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누가복음은,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요한복음의 기록은, "아버지가 나를 보내심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했습니다.
의심이나, 차이, 논쟁의 여지도 없이 예수께서 사도들이나 교회에 주신 명령은 명확합니다. 사도행전 1: 8에 기록되었으되,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하셨은 즉, 우리는 단지 권능의 제한이 있는 경우에만 증인이 되라는 명령에 제한을 둘 수 있을 뿐입니다. 성령의 은사와 증인으로서 소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이 명령은 유감스럽게도 제대로 받아들여지지는 못하고 있으나 광범위하게 확인되었습니다. [팩커 (Dr. J. I. Pacler)] 박사는 그의 저서 "전도와 하나님의 종주권 (Evangelism and Sovereignty of God)"에서 쓰기를;
"복음 전파의 임무는 사도들에게 국한된 것도 아니며 오늘날에 있어서 교회의 전도자에게 국한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전체 교회에게 주어진 것임으로 모든 그리스도인 각자에게 수임된 바인 것이다.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빌립보 사람들이 한 것처럼 일하라고 보냄을 받은 것이며, 빛과 같이 세상을 비추고 생명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
이 명령의 의미는 명백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증인의 임무를 취하려 하지 않는다면 이는 단순한 태만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 대한 반역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전도하라는 그의 명령에 유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주인되심에 대한 입술의 봉사를 기피하는 것이니, 침물하는 그리스도인은 곧 불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전도에 전념하지 않는 교회는 배교하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백성들을 사랑하여
나는 불신자들까지도 "그리스도의 백성"이라고 묘사할 수 있는데 이는 그가 그들을 지으셨고 저들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그의 공의로써 그들을 여전히 그의 백성으로 간주하고 있는 까닭인 것입니다. 그는 "나의 다른 양들"이라고 하셨은 즉 이 말씀은 그가 저들을 찾아내어서 그의 양떼 속으로 인도하시기 이전에 하신 것임을 유의하십시오.
문제는, 그가 이러한 사람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들을 사랑해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사랑의 모습은 요한일서 3: 17, 18에 묘사되었으니;
"누가 이 세상 제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 성구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사랑 위에서 태어났음을 보여주며, 또한 사랑이 내재하고 있는 증거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준을 살펴보기 위해서 세 가지 관정에서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① 사랑은 형제의 궁핍함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누가 . . .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 . ". 그러나 때때로 사람들은 사랑하면 장님이 된다고 말하는데 이는 타인의 단점에 대해서 그렇다는 것이지 결코 어떤 궁핍함에 대해서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은 형제의 궁핍을 보나, 자만은 아무것도 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기를 원치 않는 것은 보지 않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볼명예로 점철되었으니 그것은 노예 제도, 감옥, 노동 혹사, 기아 등의 사회적인 악인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단지 비그리스도인들의 물질 및 정신적인 궁핍만을 본다면 우리의 차이는 무었이겠습니까? 우리는 성서가 묘사되는 것과 같은 하나님의 눈을 가지고 그들을 보아야 합니다. 그들이 죄를 지어 죽어 있는 현재의 조건에 대해서와 그들의 다가올 재난에 대해서 말입니다.
전도의 강한 열성을 가진 사람은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못할 때에는 죽어가게 됨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점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표면에 잘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외형적인 매력이나 화려함은 쉽게 알아 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처럼 보아야 하니 이는 그도 역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사람이며 멸망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② 사랑은 형제의 궁핍함을 생각게 하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이 없으면 . . . " 이러한 동정심은 형제의 궁핍을 봄으로 생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보는 것과 동정"은 예수께서 그의 대중 전도 시기에 보여 주신 놀라운 진리인 것입니다. 성서는 자주 예수께서 개인이나 군중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던 일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는 무리를 보시고 그들이 마치 목자 없는 양떼처럼 외롭고 어려운 것을 동정하셨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죽자 예수는 그녀를 불쌍히 여겨서 구원해 주셨고 그를 항해 외친 소경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마태복음 9: 36; 누가복음 7: 13; 마가복음 1: 41; 마태복음 20: 34).
이 모든 경우에 그는 동정을 가지셨으니 그는 눈을 들어 보시고 인간의 슬픔과 고통을 마음으로 느끼셨던 것입니다.
[박스터 (Richard Baxter)]는 17세기 영국의 청교도 목사인데 이 진리에 관해 말하기를;
"만일 인간의 육체를 구호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영향을 구하겠다는 것입니까?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 . .' . 여러분은 그처럼 무정한 사람은 아니겠으나 문둥이에게는 동정을 할 것입니다. 헐벗고 굶주리거나 감옥에 갇힌 자나 질병과 신고에 고통당하는 사람은 동정하면서도 무식하거나 완고한 죄인에게는 동정을 주지 않는 것입니까? 주님으로부터 쫓겨날 사람을 동정하지 않으십니까? 주님을 위하고 불쌍한 영혼을 위해 그들을 동정하고 분발하여 그들의 구원에 이바지합시다".
③ 사랑은 형제의 궁핍을 완화시킬 행동을 하게 합니다. "우리는 말과 혀로만 사랑할 것이 아니라 행위와 진정으로 해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항상 행동적이며 건설적이며 긍정적인 것입니다. 신약성서에서 의미하는 사랑이란 행동적인 추구로서 타인의 적극적인 선을 찾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알아볼 수 있는 순서에 관해 유의해 보십시오. 예수께서 궁핍에 처한 사람을 보고 동정이 생겼고 바로 행위에 들어가셨던 것입니다. 그의 동정은 보는 데서 기인하였으며 궁핍을 도와 주셨습니다. 그의 눈으로 보실 때에 그 마음으로 느끼고 그의 마음으로 느낄때에 그의 손은 동작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배고픈 자를 먹이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소경을 눈뜨게 하시고 문둥병자를 고치셨은 즉, 진정한 사랑이란 행동적인 것입니다.
예수의 행동적인 사랑은 비단 그의 공중 전도에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 전체를 통해서 보여지고 있습니다. 그의 사랑은 십자가 상에서 죄인을 위해 돌아 가실 때에 그 절정에 다다랐으니 그는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부유도 그리스도의 사랑의 우화에는 미치치 못하니,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의 이상을 완전히 구현하신 유일한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다치고 굶주리고 헐벗어서 반쯤 죽은 것을 보시고 우리를 동정하시어서 우리가 사는 곳으로 내려 오셔서 큰 값을 치르시고 우리를 고치시고 생명을 주셨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죄인에 대한 사랑이 그와 같았다면 마땅히 우리도 그처럼 해야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형제의 영적 궁핍을 본다면 그리고 그들을 동정한다면 마땅히 행동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행할 수 있습니다. 형제의 궁핍을 보는 사람은 엄숙한 의무로서 그렇게 해야 합니다.
단지 형제의 영적 궁핍만을 보는데 그쳐서는 안되며 복음의 지식을 거기에 첨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복음의 수탁인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축복을 혼자서만 간직해서는 안됩니다. 복음의 결여로 인해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복음의 지식을 혼자만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비정의 극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성스러운 사랑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보고 느끼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관찰하고 동정하고 실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거나 느끼지 못하거나 또는 행동하지 못한다면 한 가지 결론만이 가능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일 뿐 아니라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에서 지은 죄를 고백하고 그의 사랑을 우리에게 주십사고 울며 기도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와 같은 죄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기는 합니다. 모든 진실한 사랑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그 사랑을 구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사람들의 궁핍에 대해서 동정을 가지고 행동하기까지는 모든 나라와 족속에게 복음을 전파할 수 없습니다.
(3)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세번째는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34: 14에 보면,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이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질투에 관해서는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으니, 질투란 경쟁자를 용납지 않으며 대상이 옳건 그르건 또는 합법적이건 아니건 관계치 않는 것입니다.
설명하자면, 운동 선수가 경쟁자를 질시하는 것은 나쁘니 이는 그가 그런 권리를 갖지 못한 까닭입니다. 그러나 남편이나 아내가 제삼자의 개입을 질투하는 것은 정당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결혼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서로만을 위하기로 서약했기 때문입니다.
정당한 질투는 "인내하며 불신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투는 순수하며 신성하니 이는 우리의 예배를 그만이 받으실 수 있는 까닭입니다.
그는 유일한 하나님이시며 다른 신은 없습니다. 이사야서에는;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42: 8).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만물의 주인이시며 모든 예배를 받으실 가치가 있으신 때문입니다.
우리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을 측량하려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질투를 받는지 아닌지를 보면 됩니다. 에리야가 그러했으니 이세벨 여왕이 민족에게 주님을 버리고 바알을 섬기도록 영향력을 미쳤을 때에 엘리야는;
"내가 만군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히 특심하오니 . . " (열왕기 상 19: 10, 14).
다른 예는 바로 주 예수 자신의 경우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성전을 보았을 때에 상인들과 돈바꾸는 자들의 거래로 더럽혀진 것을 알았습니다. 그 때 그는 무엇을 했습니까? 그는 양과 소를 몰아내고 환전상의 책상을 뒤엎었으며,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하심을 제자들이 기억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2: 17).
하나님의 이름과 명예를 위한 열심이 예수를 삼키어 그로 하여금 성전을 깨끗케 하셨습니다. 헬라어의 "열심"은 "질투"의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이러한 열심을 가졌으니,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그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그들을 위하여 열심을 낸다고 썼으니 그는 그들을 순수한 신보로서 그리스도와 정혼시키고자 하였고 그들이 그리스도께 대한 신실하고 순수한 예배를 벗어날까 염려했습니다.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바울은 그의 사도직에 관해 언급했는데, 그는 모든 나라에 "그의 이름을 위하여" 믿음의 순종에 관해 전할 임무를 가졌다고 했습니다. 그는 예수의 이름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고 그들로 하여금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했으니 그러한 열망이야말로 그의 위대한 동기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고린도 후서 11: 2, 3).
또한 "그의 이름을 위하여" 다니는 그리스도교의 순회 전도자들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요한 3서 7).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그의 오른편에 두시고 그의 이름을 모든 이름보다 위에 두셨음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이름을 통해서 믿게 되었고 구원받기 위해서 그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들의 최상의 관심은 다른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위해서 그리스도교를 열광되게 하는데 있었습니다. 그鳁서 그들은 그의 이름 때문에 고통받는 것을 가치 있는 일로 여겼으며 그 이름을 기쁘게 전파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세상을 보고 경건치 못한 사람들에게 진정한 예배를 주어야 합니다. 우리 사이에는 성스러운 열심의 발로가 없는 것입니까? 우리는 주변에서 종교적인 방황과, 하나님의 날과 그 율법을 거부하는 것, 그리고 예배와 예수 그리스도가 회피되고 있음을 보면서도 그대로 있을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위해 열심을 내어 우리 자신을 불태울 것입니까?
시편 기자와 같이, "저희가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시편 119: 136).
또, 우리의 친구로서 이교 신앙이나 또는 무신앙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봅시다. 우리는, "그대로 놔두어야지, 내가 그의 일에 개입해서 되겠는가?"하는 태도를 가져야만 할까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과 관련하여 할 일이 없겠습니까? 그에게 드려야 할 예배가 다른 대상에게 행해지는 것을 보고도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는다는 것입니까?
[헨리 마틴 (Henry Martyn: 19세기 영국인 선교사로서 인도와 이란에서 전도했으며 신약성서를 우루두어와 페르사아어로 번역했음)]은 누구라도 그리스도를 욕하면 깊은 정신적 상처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이르기를;
"나는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시지 않으시면 참을 수가 없으니 내게는 그것이 지옥같아요. 만일 한 사람의 눈을 뽑은 후에 그에게 왜 아파하느냐고 묻는다면 이처럼 어리석은 질문이 있겠습니까?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람들 중의 하나이며 그러한 경우 나는 치명상을 입는 셈입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한 열성에서 선교의 열심이 나오는 것이니, 만일 우리가 우리 친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거나 그리스도의 교회 세계 선교를 지원하지 않는다면 이는 곧 우리가 그리스도의 명백한 명령을 불순종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기피하는 것이며 예수의 이름에 대한 헌신을 비통하게 결여시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 가지의 전도의 동기는 성서에 분명히 기록되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2. 전도의 방법
원칙적으로는 오직 한 가지의 전도 방법이 있을 뿐이니 사적이거나 공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가 그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전도의 방법이라기보다는 전도의 본질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설교와 강연으로 전도하고 회합과 선교를 통해 전도한다는 것은 복음 선포의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아무 준비도 없이 가능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전도의 준비를 위한 기본적인 두 가지 측면에 관해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사람들과의 진정한 접촉
필자는 대학 강의나 종교적인 강조를 통해서 세상의 이모저모를 보아왔으며 그리스도인인 학생과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과의 접촉을 위해 변화가 시도되어야 함을 보아 왔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폐쇄되고 은둔적인 자세를 가지게 되면 아무리 잘 조직되고 평판이 좋다고 하더라도 선교의 영향을 끼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인 학생이 대학 생활의 모든 부분에 참여하고 잘 알려져 있고 대학 내에서 존경을 받고 있을 경우에 그 친구들은 선교의 요지를 받고 복음에 좇을 것입니다. 모든 전도 운동과 다른 특수한 노력의 진리가 이것입니다. 그들은 흔히 외부인과 접촉을 갖지 않기 때문에 비판을 받게 됩니다. 이점에 있어서 전도자를 비난하는 것은 온당치 못합니다. 교인들이 적절한 생활을 하지 못하고 그들과 밀접한 관계를 갖지 못하기 때문에 외부인들은 전도 운동에 가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비교인들의 사회와 너무나 유리되어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과의 사이에 담을 치고 우리의 안락한 교제의 문을 닫아 걸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코 적군과 만나지 않는 군인과 같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모범과 교훈은 이러한 고립을 꾸짖으십니다. 그의 모범을 잘 생각해 보십시다. 그는 인간과 만나기 위해서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셨을 뿐 아니라 그의 공중 전도를 통해서 세상과 어울리기까지 하셨습니다.
죄인과 접촉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회개에 이르게 하였으며 공의의 말씀을 전파하셨습니다.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그와 친구가 되었으니;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 . ." (누가복음 15: 1).
예수는 그들로 인하여 난처해 하시지 않았으며 그 무리들과 함께 마음 놓고 얘기하셨습니다. 그의 견해는 바리새인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바리새라는 말은 분리를 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특별한 옷을 입으며 창기와 멀리하는 태도를 가졌었습니다. 한 창기가 눈물로 예수의 발을 씻기고 머리칼로 닦아준 사실과 비교하시기 바랍니다.
비리새인들은 세리들과 상종하지 않았으니 이는 그들을 정치적, 도덕적으로 야비한 자들이라고 간주했던 때문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세리의 집에 들어가시어 그들과 함께 잡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문둥이들과의 거리를 유지하기 위하여 돌을 던졌으나 예수는 그들을 손으로 만져서 고쳐 주셨음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행해야 합니까 아니면 바리새인들처럼 행동해야 하겠습니까 교인이 아닌 사람들과의 합석을 원치 않거나 불편해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보게 되는데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는 세리나 죄인들과 함께 잡수셨습니다. 교인이 아닌 사람과 최근에 식사를 같이 한 것이 언제였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불리우셨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 중의 몇 명이나 친구로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도 이 사람은 죄인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만 하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교훈의 예를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를 따르는 사람은 세상의 빛이며 땅 위의 소금이고 반죽에 든 누룩과도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어두움을 관통하는 빛살처럼, 음식의 맛을 내며 상하지 않게 하는 소금처럼, 그리고 반죽에 펴지는 누룩처럼 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십니다. 우리의 교인 사회는 무엇을 좋아하고 있습니까? 자기 만족에 빠져 배타적입니까? 아니면 비그리스도인들의 사회로 파고 들어야 할 것입니까?.
우리가 사회에서 격리되는 원인은 무엇입니까? 사람들과의 생동적인 접촉의 결여는 보다 중대한 영적 병인 것입니다. 때로 그것은 단순한 수줍음이 원인이 되기도 하며 성결에 대한 잘못된 견해일 수도 있고, 도리어 악에 빠져 들어가지 않을까 하는 우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비그리스도인과의 진정하고 개인적인 접촉은 귀한 경험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자존심이 작용하고 죄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자존심에 관해서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때로는 비그리스도인에게 진정한 우정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만이 원활한 접촉을 가능케 합니다. 집회나 선교의 내용을 담은 카-드나 광고지를 돌리는 일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며 또한 그 집회나 선교를 주최하는 것 자체도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친구로서 몇년씩을 접촉하며 시간과 정력을 쏟고 동고동락하는 진정한 우정을 준다는 것은 상당히 힘이 드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기록하기를;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고린도 전서 9: 19).
라고 했은 즉, 과연 우리 중의 몇 명이 종이 되겠습니까? 바로 그러한 경지가 우리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시 우리들의 최고의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가서 살펴 보면;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 . ." (요한복음 17: 18), " . . .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한복음 20: 21).
그는 두 번이나 이 점을 강조했습니다. 물론 그가 지상에 오신 목적이 우리와는 다른 것입니다. 그는 구속을 위해 오셨으며 우리는 그의 구속을 전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인 양상은 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는 " . . .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 . . " )히브리서 2: 17). 그는 우리의 필요를 위하여 육신을 입으셨고 스스로를 낮추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일진대 우리는 사람들과 떨어져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그가 세상에 오신 것처럼 세상에 들어가라는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생활 속에 완전히 들어가서 그들의 슬픔과 의심, 죄와 두려움 속으로 뚫고 들어가야만 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매우 고귀한 일입니다.
우리의 죄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부자연스런 점을 드러내는 일도 사람들과의 접촉에는 필연적으로 따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떨어진 곳에서 상호 교제하며 증언하는 것은 보다 쉬운 일입니다. 우리는 가능한한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찬사를 듣고자 원합니다. 만일 우리가 떨어져 있는 경우엔 그것은 아무 쓸모없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과의 친밀한 접촉을 허용하여 그들로 하여금 우리가 좋아하는 것과 우리 자신에 관해서 발견하도록 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우리들 자신도 스스로를 알 수 있도록 해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정에서 생기는 진정한 증거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만큼의 성결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사람들과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한 발언이 힘들어집니다. 이것이 자기 가족에게 전도하기가 힘든 이유 중의 하나가 아니겠습니까? 왜냐하면 가족은 서로를 가장 잘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과의 진정한 접촉
사람들과의 접촉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며 하나님과의 생동적인 접촉이 필수적으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중요하고 직접적인 경험을 가져야만 합니다.
신약성서는 복음 전도에 관해서 선구자의 전파와 증인들의 증언이라는 두 가지로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증인은 그가 증언할 일에 관해서 우선적으로 경험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는 사건의 목격자이어야 합니다.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요한복음 3: 11),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며 너희에게 전하노니 . . ." (요한 일서 1: 2),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너의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사도행전 22: 15).
그리스도에 관한 직접적인 겅험이 요구되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 경험이 빈곤하면 입을 다물고 어떤 비밀을 감출 이유조차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증거할 것이 없다면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의 증언이 공허하고 진실성이 없다면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세 이론의 북부감리교회 의장이며 여러권의 책을 저술한 바 있는 [나일스 (D. T. Niles)]씨는 전도를 정의하여;
"그것은 마치 한 거지가 다른 거지에게 그가 어디에서 빵을 얻었는가를 알려 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러나 우리가 허약한 손을 가진 거지로 남아 있는 한 다른 사람에게 생명의 빵을 제대로 줄 수는 없지 않은가?" 하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양식이 우리를 만족케 하지 못했다면 비그리스도인들이 그로 인해서 만족을 느낄 수 있다는 가정이 어떻게 가능하다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항상 주시받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한 자랑스러운 주장을 하고 있으나 이러한 주장의 정당성을 입증할 어떤 자료가 있습니까? 전능의 구세주로서 그를 믿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생활에서 구원의 열매를 볼 수 있도록 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어떤 여대생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망설이고 있었는데 그녀의 말은 자기 친구이며 자기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려고 하는 사람의 생활을 몇 주간 만이라도 보고나서 자신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적합한 지 어떤 지를 먼저 알아 보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인도에 선교사로 간 미국인인 [죤스 (E. Stanley Jones)]씨는 힌두교도 한 사람으로부터, "진정한 그리스도인 한 사람을 보게 되면 바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겠습니다"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고 그의 저서 중에 쓰고 있습니다.
오늘날 복음 전파의 가장 큰 장애의 하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합당치 못한 생활자세에 있습니다.
[산상설교연구]에서 [죤스 (Dr. Martyn Lloyd-Jones)] 박사는 이점을 강조하며 얘기하기를; "오늘날 이 세상의 남녀들의 생활에 교회가 어떤 강력한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이유는 교회자체의 생활이 질서에 의하지 않은 까닭이라고 하는 점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말할 수 있다. 교회 자체가 역할을 다하게 될 때에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항상 교회에 들어오고 싶어할 것은 명확하다. 또한 그리스도인 각자의 태도도 역시 중요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당장 우리의 합당한 삶을 시작하자 . . . .".
하나님과의 생명력 있는 접촉이 중요한 세 번 째 이유는 그렇지 않을 경우에 우리에게는 아무런 힘도 없는 까닭인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은사 없이는 회개하거나 믿을 수가 없음을 알고 있으니;
" . . .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린도 전서 12: 3),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요한복음 6: 44).
사람들이 예수를 주님으로 보려면 성령이 그의 눈을 열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예수께로 오려면 아버지께서 이끌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접촉을 갖지 않으면 성부와 성령께서 우리를 통해 성자를 영광되게 하도록 우리를 시키실 수 있는 방법이 있겠습니까?
결론적으로 우리는 전도를 위한 기본적 준비로서 이상에서 말한 두 가지 전제를 수행해야 함을 알아야만 합니다. 즉, 사람들과 하나님의 생동적인 접촉이 있어야만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특히 어려운 점은 우리가 세상과의 접촉에 치중하다 보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지며 반대로 하나님과의 접촉을 추진하다 보면 세상과 멀어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임무는 하나님 곁에 그리고 또한 세상 속에 있어야만 하는데 있다는 것을 염두해 두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기 위해서 세상을 멀리하는 것은 세상을 버려지게 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멀리하고 세상 속에 사는 것은 또한 우리 자신마저도 망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이 살지 않으면 증언할 것이 없으며, 우리가 세상과 같이 하지 않으면 증거를 줄 대상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위해 목적하신바 두 가지의 근거를 지키며 성서에 준하여 사는 것을 배워야만 합니다. 즉, 그것은 세상과 예수 그리스도의 양자인 것입니다. 어느 한 쪽도 없어서는 안되며 반드시 둘 모두를 취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상사의 뜻이 이뤄지며;
"나를 맏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하시니" (요한복음 7: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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