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 제1상륙사단 특수교육대(1)
본 내용은 필자(이근식 예 해병대령 해간 3기)가 한국군이 최초로 파월될 당시(1965년3월) 비둘기부대(주월한국 군사원조단(단장 조문환 준장), ROK MAG-V)의 J-2로 파견되어 1년 간(1965년3월-1966년3월)의 육군과의 합동근무를 마치고 귀국 후 전투부대인 파월 청룡부대의 교대병력의 교육, 훈련을 목적으로 창설된 해병 제1상륙사단 특수교육대의 창설과정과 동시에 2년 간(1966년4월-1968년6월) 특수교육대장으로서 근무 중의 각종 내용들을 진솔하게 여기에 소개하므로써 오늘의 해병들의 교훈을 삼고져 하는데 목적이 있음.
이 내용은 지금 노년기에 들어서 있는 청룡부대출신 노 해병들에게는 당시의 상황을 회고할 수 있는 회고록이 될 것이며 또한 현재의 해병들에게는 당시의 실상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이 모든 내용은 필자의 저서(노 해병의 어제와 오늘 2002년8월15일 발행) 내용 중의 '해병 제1사단 특수교육대장'편에서 발췌, 보완한 것임.
- 내용 -
1. 개 요
2. 해병 제1상륙사단 특수교육대 창설
(1) 월남교장 건설과 박동규 소령
(2) 훈련과정
1. 개 요.
1963년6월 나는 김포반도에 배치되어 있는 해병 제1연대의 제2대대장직을 마치고 미국 해병학교(Jr. School MCS Quantio, Va)입교차 김포공항의 미군 Terminal을 통하여 한국을 출발하여 항공기편으로 미국을 향하였다. 미 해병학교에서 약 1년 간의 소정의 교육과정(1963년6월-1964년6월)을 수료하고 이번 귀국 시는 김포공항 청사를 통하여 입국하였다.
10년 전인 1954년12월에 내가 미 해병학교(Basic School Quantico, Va)에서 소정의 교육을 마치고 1년만에 귀국했을 당시는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었던 김포비행장에 미군 C-54수송기에서 내려 12월의 찬바람이 부는 속에서 미군의 GMC 추럭 뒤에 올라 타고 서울 시내로 들어간 기억이 어제 일처럼 느껴졌었는데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여 생각하면 정말 격세지감이 있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이걸 두고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귀국 후 나는 진해소재 해병교육기지 교수단 교관으로 발령이 나서 사단전술과 특수전과목을 담당하게 되어 교육준비에 한참 바쁜 시간을 보내면서 오랫 만에 가족들과 함께 단란한 매일 매일을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몇 개월이 지났다.
그런데 호사다마라 할까? 귀국한지 7개월 되는 어느 날 느닷 없이 해병대 사령부 인사국장으로부터 나에게 직접 전화가 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인사국장이 나에게 직접 전화 할 만한 용건은 없는데? 하면서 나는 전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이근식 중령입니다" "응 이 중령, 나 인사국장인데 이 중령 월남에 갈 생각이 없어?"하고 묻는 것이 아닌가? 아닌 밤 중에 홍두깨라더니 이걸 두고 하는 소리 같았다.
이때 국내에서는 한참 월남전에 대한 화제가 분분하고 있었다. 결국 "지금 사령관님(공정식 사령관)을 모시고 파월장교(중령급)의 선발을 논의 중인데 이 중령이 가장 적임자로 결정되었으니...". 이렇게 하여 나는 한국군의 첫 파월부대인 비둘기부대(부대장 조문환 준장 정식명칭 주월한국 군사원조단, ROK MAG-V)의 J-2로 1965년1월30일부로 발령이 났다.
다음 날 아침부터 처와 둘이서 이삿짐을 꾸리고 밤열차로 서울로 와서 준비기간을 걸처 2월21일 선발대로 참모장(육군대령)을 위시하여 참모요원 11명과 함께 오산 미 공군기지에서 C-130 Hercules편에 Saigon을 향하여 새벽에 출발 후 다음 해인 1966년3월에 월남에서의 1년 간의 육군 속에서의 근무를 마치고 귀국하였다.
# 월남 근무 중 야기된 각종 사건, 사고의 우스꽝스러운 내용 등은 다음에 이어서 별도로 "비둘기부대"편에서 계속하기로 함.
2. 해병 제1상륙사단 특수교육대 창설
귀국 후 1주일 동안 갑작스러히 10시간 차이로 상하의 나라, 월남에서 겨울인 한국으로 옮겨온데 따르는 온도의 변화에 적응하기 위하여 처가에서 꼼짝않고 가족들과 함께 오랜 만에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해병대 사령부로 귀국 인사차 들렸다.
육군 속에서 1년 간 근무하고 다시 나의 모군인 해병대 사령부로 돌아 오게 되니 사실 그 감개무량했던 그 기분을 무어라, 어떻게 표현할 수 없었다. 꽤 오랜 만에 온 것같았다. 나의 출국 당시의 인사국장은 교체되고 이홍균 대령(해간 1기)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사국장을 만나니 마치 친정에 돌아온 듯한 들뜬 기분이었는데 인사국장은 나를 만나자마자 칭찬부터 해주는데 좀 계면쩍은 기분이었다. 나로서는 당연히 해병대 장교로서 할 일을 했을 뿐인데, 비록 사령부에서 지명해서 나를 파월했지만, 기분은 몹시 좋았다.
사람은 누구나 남에게 인정받는 것으로 자기가 한 일에 대한 보람을 느끼게 되며 또한 자부심을 갖게 되어 더욱 분발하게 된다는 사실을 나는 인사국장과의 대화 속에서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것이 인간의 속성이 아닌가 생각된다.
"보직은 어떻게 발령해주면 좋겠는가? 이 중령이 원하는 보직은 뭐나 좋으니 발령하겠으니 말해"하고 인사국장이 나에게 말했다. 그야말로 파격적인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내가 뭐 대단한 일을 했다고, 하는 생각이 들어서 "특별히 원하는 보직은 없으니 사령부 계획에 의거해서 발령해 주세요"라고 대답했다. 인사국장은 몇마디 더 했으나 내가 극구 사양하니 오히려 인사국장의 표정이 좀 이상하게 이그러져 보였다.
며칠 후 포항으로 사단장에게 귀국 인사차 갔다. 사단장인 강기천 소장(후일 해병대 7대 사령관)께 귀국 신고를 했더니 "이 중령 정말 수고 많았다. 내가 이 중령에게 가장 알맞는 보직을 준비해 놨으니 그리 알고 있으라"하고 나에게 말했으나 나는 그 보직이 무엇인지 묻지 않고 그대로 서울로 돌아 왔다.
5월 초 귀국 후 2개 월만에 발령이 났다. 해병 제1상륙사단 특수교육대장의 보직이었다. 아직 해병대 편제에 없는 편성이다. 파월 청룡부대의 교대 병력을 훈련시키는 아주 중요한 교육부대이다. 훈련을 위한 교육부대가 아니라 실전투에 투입되는 병력을 훈련시키는 것이 부대의 임무이다. 그 임무는 당시의 어느 부대의 임무보다 중요했고 또한 긴급한 업무였다.
새로이 무에서 편성을 시작하는 이 특수교육대는 교육대장, 부대장 그리고 교육대대장 및 2개의 교육중대장에 교관반장, 교관요원 7-8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참모부서로는 인사장교, 작전장교, 군수장교 등으로 구성되어 특수교육대를 이루고 있다.
이때 특수교육대가 당면한 무엇보다 시급한 문제는 전투교육 훈련장의 확보와 각종 훈련장의 시설 준비였다. 월남의 특수지형에 알맞는 유사 지형의 선정과 이에 따르는 각종 장애물의 설치 및 동굴과 동굴 통로의 공사 작업 등, 그리고 특별히 헬리곱터 탑승 훈련장 및 그에 따르는 기재 등을 보관 및 설치할 수 있는 넓은 지역을 필요로 했다.
(1) 월남전교장의 건설과 박동규 소령
월남전교장 건설 책임자로 그때 마침 월남에서 귀국한 청룡부대의 해병 공병중대장이었던 박동규 소령(해간 12기)이 전투교육훈련장 건설대장으로 발령이 났다. 우리는 이 훈련교장의 명칭을 '월남교장'이라고 명명하였다.
며칠 간 우리는 전투교육훈련장으로 적합한 지형을 찾아 사단지역을 중심하여 주변 일대를, 양포리까지의 지형을 답사한 결과 양포리 해안으로 가는 도중에 위치하고 있는 사단의 벽암지교육대에 못미처 도로변 지역에 우리가 찾던 아주 이상적인 소대 단위 공격전투 교육, 훈련장 후보지를 발견하였다.
그 후보지는 도로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았고 연못을 시발점으로 하여 앞으로 쭉 뻗어 올라간 야산은 정상까지 소대공격훈련장으로서는 안성맞춤이었다. 또한 정상에는 헬리?터 착륙장도 건설할 수 있는, 지형적으로 썩 좋은 여건을 구비하고 있었다.
즉각 사단의 승인을 얻은 박동규 소령은 청룡부대 공병중대출신 장교 2명과 하사관 몇 명으로 팀을 구성하여 1차적으로 교육장 건설계획 청사진을 작성하고 그 계획과 작업 일정표에 의거 구체적인 공사 윤곽을 바탕으로 하여 우리와 함께 현지 지형을 답사하면서 훈련장내의 각종 진지구축 공사에 들어갔다.
처음부터 지형내에 그늘 진 곳이라곤 하나 없는 햇볕아래에서의 진지 구축 공사는 작업 중인 해병들에게 많은 어려움을 주었으나 이들의 대부분은 청룡부대 공병중대출신들이어서 현지에서의 경험을 십분 살리면서 앞으로 파월될 후배 해병들을 위한 진지공사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잘 견디어 냈다.
사실 이들의 훈련장 건설에 흘린 땀과 그 노고는 표면에 나타난 청룡부대의 전과와 그 활략상이 국내외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에 비하면 비교가 안 되겠지만 이 청룡부대 교대 병력을 위한 전투교육훈련장은 박동규 소령과 공병중대출신 장교 및 하사관들의 비둘기부대에서와 그리고 청룡부대에서의 각종 전투진지 공사 및 도로 건설 등에서 얻은 산 경험이 없었다면 우리의 훈련목적에 적합한 교장 건설은 아주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것이었다.
만일 그렇지 않았으면 청룡부대의 교대 병력을 위한 교육, 훈련도 그 목적을 계획대로 달성하지 못했을런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박 소령의 월남에서의 경험과 공병장교로서의 치밀성과 근면성이 '월남교장' 건설의 기초가 된 거나 다름이 없었다.
청룡부대의 교대 병력의 귀국 일자(10월 중순)가 가까워짐에 따라 우리는 더욱 분발하여 연일 강행군으로 훈련에 필요한 각종 장애물 그리고 V.C.진지와 또한 유사 동굴진지 등 약 20여 개의 장애물 설치로 정규전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훈련장으로 월남 현지 실정에 잘 부합되도록 설계한 설계도에 의거하여 약 3개 월에 걸친 강행군 작업으로 훈련교장을 완공할 수 있었다.
박동규 소령
한국군 최초의 파월군인 비둘기부대의 독립해병공병중대장으로서 또 파월 청룡부대의 공병중대장으로서 월남전의 참전과 또한 청룡부대 교대병력 훈련을 위한 '월남교장' 건설에 중추적인 역활을 한 박동규 소령에게 특히 청룡부대출신들은, 제1차 인원은 제외하고 제2차부터 청룡부대가 철수할 때까지의 모든 청룡부대출신 해병들은 심심한 감사를 해야 함은 당연하지만 그의 숨은 공로를 해병대에서는 높이 평가하여 중용했어야 했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나는 아직껏 섭섭함을 떨쳐버릴 수 없다.
나는 지금 생각해도 만일 박 소령의 헌신적인 노력의 결정이 없었으면 파월 청룡부대의 교대 병력을 어떻게 훈련시켯을까? 그리고 만일 제대로 훈련되지 못한 해병들이 월남 현지에서 어떻게 전투했으며 또 그 결과가 어떠하였을까?하는 것을 생각하면 그 결과에 대해서 어떤 두려움조차 느끼게 된다.
초대 특수교육대장으로서, 나역시 박 소령의 해병대를 위한 숨은 공헌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박 소령이 다진 지반 위에 내가 청룡부대 교대 병력의 교육 훈련이라는 거대한 집을 지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 거대한 집은 해병 제1상륙사단 특수교육대였다.
약 3개 월 간 그 뜨거운 햇볕 아래서 그늘 진 곳이라고는 하나 없는 허허 벌판 같은 야산에서 교장 건설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특수교육대의 간부 편성도 동시에 이루어졌다. 특수교육대장은 나이고 부대장에 김동원 소령(해간 6기), 작전장교에 청룡부대에서 귀국한 성병문 대위(해사 11기 제16대 해병대 사령관), 교관반장에 역시 청룡부대출신인 김종세 대위(해간 24기 예 해병대령), 교육대대장에 오일수 소령(해간 8기 청룡부대출신), 제1중대장에 강기덕 소령(해간 9기), 제2중대장에 윤병옥 소령(해간 16기) 등으로 주요 간부편성이 끝났다. 특히 교관은 전원 청룡부대출신 장교들로 구성되었다.
우리는 매일 진지공사 중인 '월남교장'에 출근하여 진지공사에 대한 자문을 제공하거나 또는 교장 현장에서 촉박한 교육일정에 맞추기 위하여 진지공사를 도왔다. 뜨거운 햇볕 아래서의 우리의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활동은 우리 전체를 까맣게 검둥이로 만들었다. 한편 '월남교장'을 중심으로 시범소대를 편성하여 시범훈련도 병행 실시하였다.
(2) 훈련과정
특수교육대에서의 기본 훈련과정은 우선 월남에서 그 당시 진행 중에 있던 소부대에 의한 전투 형태, 게릴라 전술에 기준한 소부대 훈련, 즉 소대 단위로 특수교육대에서 중대 단위로 과목별로 교육한 내용을 총망라한 종합 훈련을 실시하는 것으로 4주 간의 교육을 마치는 것으로 계획하였다.
강의교육과목은 청룡부대출신 장교들에 의해 현지 실정에 맞는 과목으로 선정하여 중대 단위로 교육을 실시하였으며 야외훈련의 일부인 소대공격 훈련은 '월남교장'에서 최초 하천도하를 뗏목으로 시작하여 공격이 시작된 후 목표로 진출함에 따라 각종 장애물(20여 개)을 통과하고 정상의 목표를 점령 후 목조로 가설된 헬리곱터에 Rope를 타고 올라가는 것으로 훈련 상황이 종결되었으며 소요시간은 약 30분이었다.
대항군으로 1개 분대 규모의 병력을 V.C로 분장시켜 대항군 역할을 담당하게 하였으며 이때의 특수교육대의 시범소대의 공격시범은 해병 제1상륙사단을 방문하는 모든 귀빈 및 방문객에게 Simulator(포탄의 날라오는 소리와 낙탄음)를 사용하여 실전을 방불케 하는 훈련과정을 보여주고 칭찬을 받았다.
이 시범훈련과 연관한 아직까지 나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특별히 웃으운 실례로는, 주한 미 해군 사령관이 시범소대의 공격을 참관하면서 공격소대의 뒤를 따라 가던 중 주변에서 폭발한 Simulator의 포탄이 날라오는 소리와 폭음에 놀라 바로 옆에 있는 동굴 속으로 황급히 혼자 뛰어 들어가는 촌극이 벌어져서 주변의 수행원들이 파안대소한 일이 있었다.
청룡부대에서 귀국한 "짜빈동 전투"의 영웅 신원배 소위(해사 20기, 태극무공훈장 수장자)가 시범 소대장을 했고 역시 "짜빈동 전투" 당시 중대장이었던 정경진 대위(해사 14기, 태극무공훈장 수장자)도 귀국 후에 교관반에 합류했다. 진지공사도 계속 청룡부대에서 입수되는 각종 현지정보를 참조하여 공사의 진행과 보완 자료로 이용했다.
4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당시의 공사 관계 사항을 모두 열거 할수는 없지만, 당시 해병대로서는 무엇보다 우선하여야 할 주요사업으로 청룡부대 병력을 위한 훈련용 '월남교장'의 진지 건설공사와 그들을 위한 교육훈련 준비였으며 우리는 이의 완공에 총력을 기울였다.
2개 월 후면 청룡부대의 교대병력 제1진이 귀국하게 되므로 우리는 늦어도 7월 말까지는 모든 준비를 완료하고 8월 중순부터는 교대병력을 위한 파월 교육훈련을 시작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어야 했다. 교장건설은 우기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지만 사단의 적극적인 인원과 장비의 지원으로 계획대로 대략적인 공사가 8월 초에 끝났다.
'월남교장'의 개활적인 정비가 끝나고 교관들도 그들의 경험에서 얻은 교훈과 각종 참고자료를 이용하여 교육준비를 모두 마쳤다. 강의교육은 실내가 아닌 야외에서 주로 실시되기 때문에 교육용 괘도는 전천후로 사용할 수 있도록 전부 비닐로 제작했다.
8월 하순부터 교대병력이 특수교육대에 입교하기 시작했는데 약 800명의 인원이 제1차 교육대상이었다. 이는 청룡부대의 병력 교대계획에 의거 조정된 인원 수이며 이는 대대규모의 교육훈련이다.
처음 실시하는 전투인원을 위한 부대교육겸 개인교육이고 대상이 전투부대 인원인지라 교육하는 교관이나 교육받는 해병들도 진지했다. 그러나 800명이라는 인원의 통제는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특히 이 인원은 잠정편성이고 그 숫자가 신원조회로 인하여 수시로 변동되었기 때문에 통제가 어려운 것도 당연했다. 이들 훈련 인원은 전원이 지원자는 아니지만 해병이기에 그들이 가야할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들 속에는 파월기피자도 있을 수 있겠지만 이탈자는 나의 근무 기간 중인, 2년 간 1명도 없었다. 오히려 장교들이 가족 문제로 최초에 약간의 동요가 있었지만 부대 훈련과정이 진척됨에 따라 안정을 되찾았다.
4주 간의 교육은 주로 월남의 일반적인 소개와 현지에서 직면하게 될 V.C. 전술에 대한 것이 주요 골격을 이루었고 체력단련은 벽암지 교육으로 체력을 보강하고 마지막으로 전투훈련교장인 '월남교장'에서 시범소대의 소대공격 시범을 참관한 후 소대공격 실습으로 훈련을 마쳤다. 그리고 양포리까지 도보행군으로 가서 양포리 사격장에서 기동사격 및 공요화기 사격 실습을 마침으로서 파월 교육훈련의 전과정이 끝났다.
이 모든 교육이 4주 간에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교관이나 훈련받는 해병들에게는 전혀 시간 여유가 없었다. 지역 내에서의 모든 이동은 도보로 실시했다.
나는 '월남교장'을 준비하면서 전체 교육훈련장의 일부인 민간인 소유 보리밭 1,000평이 벽암지 교육대의 운동장겸 훈련장으로 상당기간 사용되어 있었기 때문에 항상 민원의 대상이 되어 자주 말썽이 일어나고 있었다. 때문에 나는 이번 기회에 이 문제를 조치하기로 마음 먹고 특수교육대장의 명의로 임대차계약을 단독으로 맺었다. 연간 사용료로 10만원을 지불하기로 했다. 매점에서 나오는 이익금으로 충당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를 사단장에게 사후 보고했다. 사단에서는 후속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포항기지에서 조치하도록 행정조치를 취함으로서 특수교육대에서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게 되어 보리밭을 아에 운동장으로 조성시켜 버렸다. 그런데 그 동안 벽암지교육대가 편성된지 상당한 기간이 지났는데도 사단에서나 교장확보 및 관리책임이 있는 포항기지 사령부에서는 전혀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으니 정말 알 수 없는 일이 아닌가? - 계속 -
이근식님의 블로그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