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딕토 16세 교황
바티칸
베네딕토 16세 교황 재위 기간의 핵심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스캔들과 교회 출세주의에 맞닥뜨린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끊임없이 회심, 참회, 겸손을 촉구하는 한편 참으로 세상에 열려 있기 위해 물질적·정치적 특권에서 벗어난 교회의 모습을 제시했다.
ANDREA TORNIELLI / 번역 김호열 신부
그레고리오 12세 교황은 1417년 선종했다. 그의 선종으로 새 교황을 선출하지는 않았다. 선종 전에 이미 교황직을 사임했기 때문이다. 베네딕토 16세(세속명: 요제프 라칭거) 교황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는 12월 31일 바티칸 내 ‘교회의 어머니 수도원’에서 선종했다. 지난 2013년 2월 11일 갑작스레 사임을 발표한 지 약 10년 만이다. 당시 그가 라틴어로 된 짧은 사임 선언문을 낭독할 때 추기경들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던 것처럼 교황의 자진 사임은 세상에 큰 충격을 줬다. 2000년 교회 역사상 현직 교황이 베드로 직무를 수행하기에 맞갖은 힘이 없다는 이유로 사임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난 2010년 독일 언론인 페터 제발트와의 대담 형식으로 대화를 나눈 뒤 발표된 저서 『세상의 빛(Luce del mondo)』에서 언급한 대로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이미 교황직 사임을 예감하고 있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맡은 일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는 생각이 분명하게 들 때는 물러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이 의무이기도 하고요”(페터 제발트 대담 및 정리, 『베네딕토 16세: 세상의 빛』, 정종휴 옮김, 유경촌 감수, 가톨릭출판사, 2012, 58쪽). 선종에 앞서 이뤄진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사임은 엄청난 역사적 선례를 남겼으나 이 사실로만 그를 기억하기엔 참으로 인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공의회에 참석한 “젊은” 신학자
지난 1927년 독일 바이에른 주의 평범하고 신앙심 깊은 가정에서 지방 경찰관의 아들로 태어난 요제프 라칭거는 20세기 교회의 주역이었다. 1951년 친형 게오르그와 함께 사제품을 받은 그는 2년 후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57년엔 교의신학 교수 자격을 취득했다. 그는 프라이징 철학-신학대학, 본 대학, 뮌스터 대학, 튀빙겐 대학, 레겐스부르크 대학 등지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그의 선종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활동에 개인적으로 관여한 마지막 교황의 선종을 뜻한다. 젊은 시절 이미 존경받는 신학자였던 그는 쾰른대교구장 프링스(Frings) 추기경의 자문가로 쇄신파에 속해 공의회에 긴밀히 참여했다. 그는 교황청이 준비했으나 훗날 주교들의 결정으로 폐기된 의제들을 강하게 비판한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젊은 신학자 요셉 라칭거에 따르면 공의회 문헌은 “가능한 한 판단하거나 비난하지 말고, 모국어를 사용해 가장 시급한 현안에 답해야” 한다. 또한 라칭거는 임박한 전례 개혁과 그 필연성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더불어 신앙의 수호자
훗날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된 라칭거 추기경은 공의회 이후의 위기, 대학과 신학부의 논쟁을 직접 목격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신앙의 본질적인 진리에 대한 물음과 전례 분야에서의 무분별한 실험을 목격했다. 공의회가 폐막한 지 불과 1년 후인 1966년, 이미 그는 “가치가 떨어진 그리스도교”가 눈앞에 닥쳤다고 말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1977년에 50대인 그를 뮌헨대교구장으로 임명했고, 몇 주 후 그를 추기경으로 서임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81년 11월 그를 신앙교리성 장관으로 임명했다. 폴란드 출신 교황(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바이에른 신학자(라칭거 추기경) 사이의 강력한 협업으로 싹튼 이 관계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선종할 때까지 이어졌다. 라칭거 추기경이 자신의 곁을 떠나는 걸 원치 않았던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그의 장관직 사임을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신앙교리성의 전신인 성무성성(Sant'Uffizio)이 여러 사안을 명확하게 하던 시기였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주의 분석을 이용한 해방신학을 제재하고 주요 윤리 문제들의 발생 앞에서 입장을 명확히 했다. 가장 중요한 협업의 결과물은 6년의 작업을 거쳐 1992년 빛을 본 새로운 『가톨릭 교회 교리서』였다.
“주님 포도밭의 겸손한 일꾼”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선종한 후 2005년 열린 콘클라베(conclave, 교황 선거 봉쇄 회의)는 이미 78세의 고령인 라칭거 추기경을 24시간도 채 안 되어 후임자로 선출했다. 라칭거 추기경은 보편적으로 평판이 좋았고 심지어 적대자들에게서도 존경을 받았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첫 축복 메시지에서 스스로를 “주님 포도밭의 겸손한 일꾼”으로 소개했다. 주인공 역할에 거리를 두던 그는 즉위 미사 강론에서 교황청 “운영 계획”을 발표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며, 자신의 진정한 운영 계획은 “온 교회와 더불어 주님의 말씀과 뜻을 경청하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우슈비츠와 레겐스부르크
교황 재위 초창기에는 사도 순방을 주저했으나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 역시 전임자와 마찬가지로 순회하는 교황 재위 기간을 보냈다. 가장 감동적인 순간들 가운데 하나는 2006년 5월 아우슈비츠 방문이다. 독일 출신 교황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같은 장소에서는 할 말을 잊어버립니다. 결국 무서운 침묵만 남게 됩니다. 그 자체로 하느님께 진심으로 부르짖는 침묵입니다. 주님, 왜 침묵하셨나이까? 어째서 이 모든 것을 용인하셨나이까?” 아울러 2006년은 ‘레겐스부르크 사건’이 일어난 해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는 자신이 교수로 재직했던 레겐스부르크 대학에서 강연하던 중 무함마드에 관한 일부 고대 문헌을 인용한 것이 도구화되면서 이슬람 세계의 반발을 샀다. 그때부터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무슬림에 관한 관심의 표시를 늘려야 했다. 또한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어렵고 힘든 사도 순방을 떠나야 했고, 급격한 세속화로 탈그리스도교화된 세상과 교회 내부의 반대에 직면하기도 했다. 그는 미국을 순방하던 중 백악관에서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과 함께 자신의 생일을 보냈으며, 불과 며칠 뒤인 2008년 4월 20일에는 뉴욕의 ‘그라운드 제로’를 방문해 9.11 테러 희생자 유족들을 품고 기도했다.
하느님 사랑에 관한 회칙
신앙교리성 장관으로 재직할 당시의 별명은 “탱크 추기경(panzerkardinal)”이었으나, 교황이 되고 나서는 끊임없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기쁨”을 강조했다. 첫 번째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Deus caritas est)는 하느님의 사랑에 큰 비중을 할애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이나 고결한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삶에 새로운 시야와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한 사건, 한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1항). 그는 세 권으로 출간된 독창적인 작품인 나자렛 예수에 관한 책을 쓰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도 했다. 교황으로서 내린 수많은 결정 가운데 가장 기억해야 할 부분은 『로마 미사 전례서』의 사용에 관한 자의 교서 반포와 성공회 공동체들이 로마 가톨릭 교회와 완전한 친교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될 성직 자치단(Personal Ordinariate)을 설립하는 교황령 반포다. 2009년 1월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교황청 승인 없이 마르셀 르페브르(Marcel Lefebvre) 대주교에 의해 서품돼 파문당한 성 비오 10세회 소속 주교 4명을 사면했다. 그들 중에는 나치 가스실에서 죽은 유다인은 한 명도 없다고 주장하면서 나치의 유다인 학살을 부정한 리처드 윌리엄슨(Richard Williamson) 주교도 포함돼 있었다. 유다교 공동체는 이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고,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이에 관한 모든 책임을 지고 전 세계의 주교들에게 직접 서한을 보냈다.
스캔들 대처
교황 재위 마지막 시기는 미성년자 성 학대 스캔들 사건의 재점화와 교황의 책상에서 교황청 기밀 문서가 유출돼 책으로 발간된 사건 ‘바티리크스(Vatileaks)’ 스캔들로 점철됐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교회 내부의 “더러움”에 대한 문제들을 다루는 데 있어 단호하고 엄격했다. 그는 미성년자 성 학대에 대한 매우 엄격한 규범을 도입했으며, 교황청과 주교들에게 사고방식을 바꾸라고 당부했다. 그는 심지어 교회에 대한 가장 심각한 박해가 외부의 적들에게서 오는 게 아니라, 교회 내부의 죄에서 온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또 다른 주요 개혁은 바티칸 재정과 관련이 있다. 바티칸에서의 돈세탁 금지 법안을 제정한 인물은 베네딕토 16세 교황이었다.
“돈과 권력에서 자유로운 교회”
스캔들과 교회 경력주의에 직면한 고령의 독일 출신 교황은 끊임없이 회심, 참회, 겸손을 호소했다. 그는 2011년 9월 독일을 마지막으로 방문하며 교회가 세속적인 때를 벗어야 한다고 권고했다. “역사는 교회가 세속적이지 않을 때 그 증거가 더 밝게 빛난다는 사례를 보여줬습니다. 중압감과 물질적 및 정치적 특권에서 해방된 교회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방식으로 온 세상에 더 잘 헌신할 수 있으며, 진정으로 세상에 열려 있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