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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06. 묵상글 ( 연중 제14주일. -Peace Maker? Peace Breaker?.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아직 / 05:25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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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06. 연중 제14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7.06 05:15
-Peace Maker? Peace Breaker?
오늘 연중 제14주일의 주제는 주님의 평화 선포입니다.
오늘 첫째 독서 이사야서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예루살렘에 평화를 강물처럼 끌어들이리라.
민족들의 영화를 넘쳐흐르는 시내처럼 끌어들이리라.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러니까 이 두 말씀을 연결하면 주님께서 어딘가에 평화를 강물처럼
끌어들이시는 일에 있어서 우리는 그 평화 선포의 일꾼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질문하게 됩니다.
나는 Peace Maker(평화 조성자)인가, Peace Breaker(평화 파괴자)인가?
내가 가는 곳마다 나는 평화를 강물처럼 흘러들게 하는 자인가,
내가 가는 곳마다 나는 분란을 일으켜 평화를 파괴하는 자인가?
나는 내 마음의 평화도 지니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런 내가 어떻게 세상에 평화를 흘러들게 하고
그것도 강물처럼 흘러들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말이 맞습니다.
평화의 선포자가 되기 전에 자신이 먼저 평화의 담지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 평화의 담지자(擔持者)!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맡아 지니고 사는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먼저 인격적인 평화입니다.
아기가 어머니와 같이 있으면 그 자체로 평화롭고
어머니와 떨어지면 그 자체로 불안하여 평화가 없듯이
주님이 곧 우리의 평화인 평화입니다.
다음으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평화를 먼저 사는 평화입니다.
쉽게 말해서 평화란 다투거나 싸우지 않는 것입니다.
너 왜 그러냐고, 왜 그렇게 지지리 못났냐고,
너 왜 내 말 받아들이지 않고, 내 사랑 받아들이지 않냐고,
너 왜 나를 존중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냐고 시비 걸지 않고 그러냐고 하는 겁니다.
평화? 왜 그러냐고 하지 않고 그러냐고 하는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그 집에 평화를 빌라고 하시는데 그 집이 평화를 받아들이면
그 집은 평화가 머물러 좋고 나는 평화를 전한 사람이 되어서 기쁠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평화를 빌어주고 주님 평화를 전해줬는데 거절할 때
그것을 괘씸하게 생각하고 화가 나고 미워지고 하면
평화를 준다고 하다가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Peace Maker가 되겠다고 갔다가 Peace Breaker가 되는 겁니다.
어쨌거나 나는 주님의 평화를 줄 수 있을 만큼 평화가 있습니까?
나는 주님의 평화를 전하고픈 강한 열망과 원의가 있습니까?
내 평화가 깨질까 봐 남의 평화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닙니까?
지금 북한이나 분쟁 지역에 프란치스코처럼 평화의 사도로 갈 마음은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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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06. 연중 제14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제자, 주님의 일꾼
“평화와 기쁨, 희망과 위로, 십자가와 새창조의 사람”
주님의 제자, 주님의 일꾼
“평화와 기쁨, 희망과 위로, 십자가와 새창조의 사람”
“온땅은 춤추며 하느님을 기리라.”
오늘 미사중 화답송 후렴이 참 흥겹습니다. 이어지는 시편도 우리의 신명을 북돋웁니다.
“그이름을 노래하여라, 빛나는 찬미를 당신께 드려라.
너희는 주께 아뢰어라, 당신이 하신일이 얼마나 놀라운고”
찬미와 놀라움의 영적 감수성이 참으로 절실한 시대입니다. 주님의 제자이자 주님의 일꾼인 우리들이 마땅히 지녀야 할 영적 감수성입니다. 연중 제14주일 아침 성무일도 즈카르야의 노래 후렴도 어제 저녁기도 마리아의 노래 후렴과 동일했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꾼이 적으니, 추수할 일꾼을 보내달라고 주님께 청하여라.”
예나 이제나 여전히 추수할 주님의 일꾼은 적습니다. 끝없이 펼쳐진 일입니다. 추수할 일꾼을 청함은 물론 우리가 먼저 주님의 제자이자 일꾼으로서 주어진 책임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막연한 사랑이나 믿음이 아니라, 책임을 다하는 사랑, 책임을 다하는 믿음입니다. 쏜살같이 흐르는 세월입니다. 모두가 한때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주님의 제자로, 주님의 일꾼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오늘 말씀이 그 길을 알려줍니다.
첫째, 평화와 기쁨입니다.
평화와 기쁨의 일꾼으로 파견되는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주님의 파견 명령이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 주머니도 여행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말하여라.”
말그대로 무소유의 정신은 절실합니다. 곳곳에 산재한 형제들의 환대에 의존하면서, 소유가 아닌 존재의 삶, 홀가분한 자유로운 삶일 때 주님의 일을 잘 수행할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참 좋은 선물이 주님의 평화입니다. 우리 선교의 자리 오늘 지금 여기가 예루살렘입니다. 이사야서 말씀이 기쁨으로 넘치게 합니다. 평화의 기쁨입니다.
“보라, 내가 예루살렘에, 평화를 강물처럼 끌어들이리라.”
바로 주님의 강물같은 평화의 통로가 되는 삶이자 선교입니다. 파견과 귀환은 삶의 리듬입니다. 파견됐던 일흔 두 제자가 귀환하여 기쁘게 보고하자 주님의 답이 우리에게도 큰 격려와 힘이 됩니다. 흡사 이 거룩한 미사전례가 귀환의 기쁨을 보고하고 노래하는 장처럼 생각됩니다. 그대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주님 친히 보호자와 방패가 되어 주시니 천하무적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참기쁨의 소재를 알려줍니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완전히 하느님께 소속됨에서 오는 기쁨이요 이를 확인하는 거룩한 미사전례시간입니다. 이런 숨겨진 기쁨의 샘에서 샘솟는 평화요 기쁨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로부터 오늘 참 기쁨입니다.
둘째, 희망과 위로입니다.
바빌론 유배후의 절망적 상황에서 희망과 위로를, 기쁨을 노래하는 희망과 위로의 예언자 이사야입니다. 예루살렘이 상징하는 바, 우리가 몸담고 있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입니다. 그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시는 감로수같은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이들아! 모두 그와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그 위로의 품에서, 젖을 빨아 배부르게 되리라. 너희가 그 영광스러운 가슴에서 젖을 먹어 흡족해지리라.”
우리 교회는 늘 자비로운 어머니의 품같습니다. 사랑 가득한 어머니의 품, 이 거룩한 미사잔치에서 받는 주님의 은혜가 차고 넘칩니다.
“너희는 젖을 빨고 팔에 안겨 다니며, 무릎위에서 귀염을 받으리라. 어머니가 제 자식을 위로하듯,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라.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라.”
위로의 주님이요 위로의 교회입니다. 희망의 주님 자체가 우리에게는 위로가 됩니다. 우리를 위로하는 희망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제자이자 일꾼답게 주님의 희망과 위로가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셋째, 십자가와 새창조입니다.
주님 십자가와 부활의 사도 바오로가 주님의 제자이자 일꾼의 빛나는 모범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일치된 삶입니다. 바오로의 고백을 우리의 고백으로 삼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만 남고 세상도 나도 없습니다. 정말 자유로운 새 창조의 삶입니다. 이 법칙을 따르는 이들에게 주님의 평화와 자비의 은총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일치될수록 날로 자유로워지는 새 창조의 삶입니다. 어디서나 새하늘 새땅의 삶입니다. 먼저 바뀌어져야할 것은 밖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우리입니다. 다음 바오로의 고백도 우리의 고백이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다음 바오로 사도의 고백도 평생화두로 삼고 싶을 만큼 깊은 울림을 줍니다.
“앞으로는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나는 예수님의 낙인을 내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
정도와 양상의 차이일뿐 주님의 십자가와 일치가 날로 깊어지는 분들 역시 몸에 이런 예수님의 낙인을 지니고 있을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 원장 막바지 책임을 다하고 있는 어느 도반 수녀님의 메시지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저는 지금 남은 몇 달, ‘십자가를 껴안다’라는 말을 매일 아침 되뇌이면서 성실한 마무리, 신앙인답게 마무리를 할 수 있기를 고대하며 기도합니다. 신부님도 기도해주세요.”
내 삶의 자리가 예루살렘이요 복음선포의 장입니다. 바로 여기 오늘 지금부터 주님의 제자답게, 주님의 일꾼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평화와 기쁨, 희망과 위로, 십자가와 새창조의 사람이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여러분의 영과 함께 하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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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06. 연중 제14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말씀전례는 ‘말씀의 선포’와 ‘기쁨’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귀양살이 후에 있게 될 예루살렘의 구원에 대한 ‘기쁜 소식’을 선포합니다.
“보라, 내가 예루살렘에 평화를 강물처럼 끌어들이리라.
~어머니가 제 자식을 위로하듯,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라.”(이사 10,12-13)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새로운 창조를 입었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감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낙인을 내 몸에 지니고 다닙니다.”(갈라 6,17)
<복음>은 예수님께서 일흔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장면과 당부 말씀, 그리고 돌아온 제자들의 활동보고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를 파견하기에 앞서, 먼저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 10,2)
이 말씀은 추수할 때가 되었음을, 곧 복음 선포의 시급성을 알려줍니다. 동시에, 먼저 필요한 것이 ‘기도’임을 알려줍니다. 왜냐하면 추수는 하느님께서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기도’하기를 명하십니다.
이어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여행을 시작하면서, 몸소 가시려는 곳으로 앞서 일흔 두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루카 10,3)
참으로 난감한 일입니다. ‘이리 떼’가 없는 곳이나 ‘이리 떼’를 제거해 준 다음에 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낸다고 하시니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평화로운 곳에 보내진 것이 아니라, 갈등과 대립이 있는 곳에 평화를 이루는 일꾼으로서 보내진 것입니다.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이 바로 그곳이요, 내가 파견된 곳입니다.
(사실, “이리 떼 가운데 양처럼” 보내신 것은 종말에 늑대와 새끼 양이 평화롭게 뒹굴고 어린 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닐 것이라는 이사야 예언(이사 11,6;65,25 참조)에 따른 종말론적인 하느님 나라의 선포를 나타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이미 앞 장에서 열 두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권고하셨듯이, ‘하지 말 것’과 ‘해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도 말고,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그 어떤 안전장치나,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걱정에 빠지지 말고, 오로지 주님께만 의탁하여 신뢰로 사명을 수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의 신발이 아니라 ‘주님의 신발’을 신고 걸으며, 자기의 옷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다니며, 자신의 능력을 담은 보따리가 아니라 ‘하늘나라의 보물을 담은 보따리’를 짊어지고 다니며, 자기의 힘이 아니라 ‘말씀의 지팡이’에 의탁하고, 언제나 주님의 평화를 몸에 달고 다니면서 먼저 ‘축복의 인사’를 하라 하십니다.
그리고 ‘해야 할 것’은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평화를 빌어주며, 받아들여 차려주는 음식을 먹으며, 병자를 고쳐주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든 먼저 평화를 빌어주라” 함은 빈부귀천 없이 어느 집에든지 평화를 빌어주며, 인사를 받으려하지 말고 겸손하게 먼저 인사를 나누며,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 의로움에서 오는 평화를 빌어주라는 말씀입니다.
“받아들이면 차려주는 음식은 먹어라” 함은 음식물에 대한 유대적 관습에 매여서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방해 받지 않도록 하며, 일꾼으로서 정당한 삯을 마련해 줄 것이니 먹을 것을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병자를 고쳐주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라” 함은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오심을 전파하고 증거 하는 것이 소명임을 알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 역시, 예수님으로부터 파견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말씀을 통해 파견의 본질과 당부 말씀을 새겨들어야 할 일입니다. 곧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 해야 할 일’,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과 ‘주님께서 하시고자 한 일’을 깨달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먼저 다가가고 먼저 사랑하며’, ‘먼저 신뢰하고 먼저 평화를 빌며’, ‘먼저 하느님 나라와 의로움을 구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파견 받은 자’가 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행위’에 앞서 먼저 ‘존재’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파견 하신 분’을 섬기고 따르는 존재 말입니다. 먼저 자신의 정체성과 신원을 알아야, 그에 합당하게 그분이 ‘하라 하신 일’을 하고, ‘하지 말라 하신 일’을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루카 10,3)
주님!
이리 떼에 둘러싸인다 하더라도 결코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허리에는 돈주머니가 아니라 사랑의 주머니를 차게 하시고,
등에는 여행보따리가 아니라 믿음의 보따리를 지게 하시고,
발에는 신발이 아니라 희망을 등불로 삼고 당신께만 의탁하게 하소서!
길에서 인사하느라 서성거리지 않고
오로지 말씀의 씨앗을 뿌리는 당신 밭의 일꾼이 되게 하시고
당신의 뜻을 따름이 오로지 저의 양식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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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06. 연중 제14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는 국어 시간에 ‘운문과 산문’을 배웠습니다. 운문은 시와 시조처럼 리듬과 가락이 있는 언어입니다. 반면 산문은 생각을 논리적으로 풀어서 이야기하는 형식입니다. 운문은 짧지만, 때로는 산문보다 더 큰 감동을 줍니다. 저에게도 애송시 몇 편이 있습니다. 나태주의 「시(詩)」, 이정하의 「험난함이 거름이 되어」, 윤동주의 「십자가」, 그리고 지하철 안전문에서 읽었던 작자 미상의 「늦었다고 원망하지 마라」라는 시입니다. “늦었다고 원망하지 마라./ 그래야 하늘을 보고, 그래야 구름도 보고,/ 그래야 꽃도 보고, 그래야 뺨에 스치는 바람을 느낀다./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 이 시는 우리에게 관점의 전환을 요구합니다. ‘늦음’이라는 현실을 원망하지 말고, 그 안에서 바라보는 풍경을 받아들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인생은 단지 목적지에 이르는 경주가 아니라, 그 여정을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따라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의 눈은 창문과 같습니다. 결국 우리가 보는 것은 외부의 풍경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정신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독서에서 관점의 차이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신앙은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줍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십자가는 고통의 상징이 아니라, 생명의 시작입니다. 마치 엄마의 태중에서 태어나는 아이처럼, 세상으로 나오는 고통은 죽음처럼 느껴지지만, 가족에게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입니다. 위령 감사송도 이 관점을 이어줍니다. “주님의 종들에게는 죽음이 아니라 새 생명의 시작이며, 이 지상에서의 거처가 무너질 때는 하늘에 영원한 처소를 마련해 주시나이다.” 우리는 죽음을 끝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이르는 문으로 받아들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기에, 그분을 따르는 우리도 부활의 희망을 품습니다. 바로 이 믿음이 사도들과 순교자들이 박해 속에서도 기쁨으로 십자가를 짊어지게 했습니다.
성경에서도 운문의 형태로 기록된 시편은 예수님의 기도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내 하느님, 내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시편 22편), “제 영을 당신 손에 맡깁니다”(시편 31편)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또 메시아적 정체성을 말씀하시며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이다”(시편 118편), “주님께서 내 주님께 이르셨다. 내 오른편에 앉아 있어라.”라고 인용하셨습니다. 예수님께 시편은 단순한 인용이 아니라,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드러내는 깊은 기도였습니다. 저 역시 사제품을 받을 때 시편 126장을 서품 성구로 정했습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기쁨으로 거두리라.”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눈물과 수고를 절대 잊지 않으신다는 신뢰의 고백입니다. 이 말씀은 신앙 선조들의 삶을 통해 구체화합니다. 그분들이 흘린 눈물은 순교의 피가 되었고, 교회는 그 결실로 103위 성인과 124위 복자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저도 그분들처럼 제게 주어진 십자가를 기쁘게 지고 가겠노라 다짐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세상의 성공과 인정은 덧없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기뻐해야 할 것은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 곧 하느님과 깊은 관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영광 드리는 삶을 살아간다면, 하느님께서는 어머니가 자녀를 위로하듯 우리를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늦었다고 원망하지 마십시오. 눈물로 씨 뿌리는 지금, 이 순간이, 기쁨의 추수로 이어질 것입니다. 시편의 기도처럼, “씨를 지고 울며 나가던 이,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라는 말씀이 우리의 삶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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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06. 연중 제14주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비전을 위한 싸움! - 스물일곱 번째 주간 실천
하느님의 숨
2025.07.05. 22:23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7월 5일 토요일 - 스물일곱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해방과 정의
관상이 우리 자신을 넘어서 있는 곳으로 우리를 데려갈 때 해방(emancipation)이 발생합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 절대 편안하지도 않고 또 완전히 개인적이지 않은 - 참된 신앙은 언제나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깊은 갈망을 수반합니다.
- 교황 프란치스코, 복음의 기쁨
가톨릭교회의 수녀이자 활동가인 시몬 캠벨(Simone Campbell)은 본인이 경제 해방을 위해 투신하게끔 자극을 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세상의 모든 아픔을 건드려 보고, 또 그 모든 아픔을 몸소 느끼는 것은 해방을 위한 운동에 있어 심장부입니다. 또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여정에 있어 두 번째 요소가 있습니다: 싸움입니다! 너무나 자주 우리는 싸움을 "무언가에 대항하는 싸움"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누군가나 어떤 정책에 "대항하여 싸울" 때, 그 사람이나 정책은 실질적으로 더 완고해질 뿐입니다. 오히려 해방(emancipation)을 향한 영적인 여정에서 우리는 우리가 모두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비전을 위해 싸우도록 초대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피조물을 포함하는 세상을 위해 싸웁니다....
제 경험에 의하면 우리가 모든 것의 현실을 철저하게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비전을 위한 싸움에 투신할 때 해방은 실현됩니다. 모든 것을 자애로이 끌어안고 100퍼센트의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는 경제를 위해 싸운다면 이 싸움이 양극화와 분열의 족쇄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줄 것입니다. 제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이런 사건들은 공동체 전체를 불사르는 불과 같은 것입니다. 모든 이의 선익에 헌신하는 공동체에는 어떤 선한 불길 같은 것이 존재합니다. 이 불은 서로와 나눌 수 있는 따스한 보살핌의 마음과 뭔가 선한 변화를 이루려는 노력 안에 있는 불입니다. 이 불은 우리를 두려움과 판단, 소외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불이고, 풍요로운 우주의 자유를 향해 마음을 열게 해 주는 불입니다....
수입과 부의 불평등이라는 족쇄로 채워져 있는 우리 시대에 우리는 하느님으로 하여금 우리 삶에 불을 지피시게끔 하라는 소명을 받고 있습니다. 해방은 우리의 관상적 여정을 통해 우리가 우리 자신을 넘어서서 모든 이를 돌보아주며 100퍼센트의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는 비전을 위해 온 힘을 다해 싸울 때 생겨납니다.... 우리 시대에 있어 참된 해방의 선포는 우리 나라는 물론이고 온 세상 안에 있는 수입과 부의 불평등이라는 족쇄를 우리가 함께 끊어야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창조된 세상은 하나의 몸이기에 이 위대한 투쟁은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되어 하는 투쟁이어야 합니다....
여러분 존재 안으로 깊이 빠져들어가십시오. 여러분이 어디에서 행동하라는 소명을 받고 있는지를 깊이 경청해 보십시오. 배제의 경제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하는 일에 저와 함께해 주십시오. 우리 나라를 위해 우리가 다른 선택을 하는 데에, 그리고 100퍼센트의 사람들을 위한 정의를 옹호하는 데 저와 함께해 주십시오. 관상적 삶은 행위에 대한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족쇄를 푸는 열쇠를 쥐고 있습니다... 그러니 깊이 경청하고 행동합시다!
References
Simone Campbell, “The Shackles of Our Time,” ONEING 3, no. 1, Emancipation (2015): 38, 39. Available in print and PDF download.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Sushil Nash, untitled (detail), 2020, photo, United Kingdom,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주먹은 억압과 불의에 맞서 저항과 연대, 그리고 일치를 위한 강력한 상징입니다. 억압받는 이들의 해방을 위한 내면의 갈망은 기대치 않게 억압하는 자들을 위한 해방까지도 가져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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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이것이 내가 너를 보냈다는 표징이 될 것이다!"(탈출 3,12)
하느님의 숨
2025.07.06. 05:59
어느 영적 스승이 한 제자에게 이런 권고를 주었다고 합니다. "그대의 숨겨진 잘못들을 진솔하게 고백하라. 그대가 혐오스러워하는 것에 다가가 보아라. 그대가 도울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도와주어라. 그대가 집착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떠나 보내라. 그대를 두렵게 하는 곳으로 가라."
언뜻 들으면 "이걸 무슨 권고라고 주는 거지?" 하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이 권고는 권고라기보다는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피하고 싶어 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면서 대개 '우리가 잘한 일들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어 하고, 우리가 도울 수 있는 사람들만을 돕는 일이 더 많고, 우리가 집착하는 것들에 무의식적으로 매달려 살며 힘들어 하고, 우리에게 편한 곳에 있고자 하는 경향이 더 크지 않습니까?!
그런데 가만히 이 권고를 살펴보면 이게 바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그들에게 해 주신 권고와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하시며 제자들을 파견하시는데, 그 다음에 바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마라." 하고요. 여행에 꼭 필요한 것인데 이것을 지니고 가지 말라고 합니다. 적어도 위험한 곳에 가는 여행자라면 더더욱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사도들: 파견된 이들)에게 이 준비를 하지 말고 다른 준비를 하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다른 준비란 '내' 힘을 믿지 말고 '하느님'의 힘에 굳은 신뢰심을 두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스스로가 하느님의 평화를 가져다주는 이들이며 하느님의 힘으로 병자들을 고쳐주며 이 행위 안에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이루는 이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우리의 힘을 믿고 할 수 있는 일들이 절대 아닙니다.
루카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고 나서 당신을 따르겠다고 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그리고 이 이야기 조금 전, 즉 9장 1절부터 6절 사이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 파견하시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 내용이 오늘 우리가 듣는 일흔두 제자의 파견 내용과 거의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제자들에게 주신 사명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실현은 '내'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를 통하여 이루시는 일이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어떻게 양들 몇 마리가 이리 떼 가운데서 생존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들(우리)을 파견하시면서 이들에게 하느님의 현존 의식을 그들 마음에 깊이 심어 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주님의 사도들(파견된 이들)인 것입니다!
얼마 전에 유튜브에서 어느 노 사제의 임사 체험 이야기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가 죽어서 하늘 나라에 갔는데, 그곳에서 천사가 세상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그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세상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 주시는 [잃은 양 한 마리 비유]가 완전히 거꾸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양 한 마리 정도만 양 우리에 들어 있고, 다른 아흔아홉 마리의 양이 길을 헤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 천사가 보여준 세상에는 너무도 많은 이가 고통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 체험을 하기 전에는 성당에서 성사를 집전하는 일을 주로 했는데, 임사 체험 이후에는 주로 가난한 사람들, 병자들, 난민들, 소외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일을 하기 시작했하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성사가 최종적으로 이루어지는 장은 성당이 아니라, 바로 이 세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물론 성사는 성당 안에서 거행되는 것이 원칙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을 맺는 곳은 성당 안이 아니라 성당 바깥쪽인 세상입니다. 우리가 미사를 마칠 때 사제가 신자들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이 말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 표현하자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하신 말씀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미사가 끝났으니, 이제 세상에 나가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마음과 몸이 아픈 이들에게 하느님의 힘으로 용서와 치유를 해 줍시다!" 우리는 미사가 끝날 때마다 이 시대의 사도들로서 세상에 파견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용서와 치유가 필요한 사람을 우리는 우선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 곁에 있는 가족들이고 공동체 구성원들이며 직장 동료들이고 우리 이웃들이며 '나'와 함께하는 이들인 것입니다. 여기서부터가 세상입니다! 물론 우리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자주 권고하셨듯이 주변부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 가까이 있으면서 주변부를 살아가는 이들도 참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중 누가 "'나'는 은총도 기도도 사랑도 필요 없어!"라고 말할 자신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가 지금 여기의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할 수 없다면 다른 어디서에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모세가 하느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았을 때 이렇게 여쭙습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끌어낼 수 있겠습니까?"
그때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이것이 내가 너를 보냈다는 표징이 될 것이다."
그러고 나서 모세는 하느님의 일을 합니다!
우리가 사도로서 하는 일은 모두 하느님께서 우리와 더불어 해 주시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함께함을 의식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하느님 나라 선포, 즉 복음 선포에 있어 핵심이 되는 것이고, 우리가 이 의식 안에 있을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내'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우리는 작은 사랑부터 실천하고자 할 때 우리는 이미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사도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며 하느님의 위대한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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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06. 연중 제14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마크 맨슨의 ‘신경 끄기의 기술’이라는 책에 이런 글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당신과 결혼한 사람이 당신과 싸울 사람이고, 당신이 선택하는 꿈의 직업이 당신에게 스트레스를 줄 직업이다.”
크게 와닿는 말이었습니다. 결혼은 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본인이 그토록 원하는 결혼이어도 부부싸움 한번 없이 살고 있다는 분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었지만 그 사람 때문에 어렵고 힘든 삶을 살 때도 많습니다.
또한 꿈이 스트레스를 준다는 말에도 크게 공감됩니다. 어렸을 때부터 저의 꿈은 신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1999년 1월 28일에 그토록 꿈에 그리던 신부가 드디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원하던 길이었으니 지금까지 전혀 스트레스가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이 길이 절대 쉽지 않음을 자주 깨닫습니다.
우리의 삶 전체에서 고통과 시련은 계속되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길을 가고, 원하는 것을 얻었다고 해서 고통과 시련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코헬렛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허무로다 허무”(코헬 1,2)였습니다.
세상 삶에서 스트레스를 없애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저 예수님께서 직접 보여주셨던 모범인 겸손과 사랑의 삶을 살면서, 하느님 나라를 꿈꾸며 살아갈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해서 파견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루카 10,2)
일흔두 명은 창세기 10장에 나오는 모든 민족의 목록을 말하는 것으로, 이스라엘을 넘어서 온 세상을 향한 선교를 암시합니다. 이 일흔두 제자가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을 때 너무나 큰 행복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행복은 세상의 편안함과 안락함과 거리가 있었습니다.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로지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주님을 따른다고 해서 무조건 세상의 행복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통과 시련이 전혀 없을까요? 이것도 아닙니다. 스트레스는 어떨까요? 역시 아닙니다. 그러나 진정한 기쁨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그 뜻을 실천함으로 하늘에 우리의 이름이 기록되는 구원의 기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면서 얻는 나의 행복을 깊이 묵상하는 오늘이 되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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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인생은 거울과 같으니 비친 것을 밖에서 들여다보기보다 먼저 자신의 내면을 살펴야 한다(윌리 페이머스 아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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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06. 연중 제14주일. 키엣 대주교님.
선교를 지탱하는 힘, 기도
복음을 읽으며 선교의 주체가 누구일까 한번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12 사도들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세히 알고 있지만 72명의 제자들에 대해서는 이름도 나이도 신분도 잘 모릅니다. 따라서 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72명이라는 많은 제자들을 보내심으로써 ‘선교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해야 하는 소명’임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성직자가 아닌 우리들이 선교를 할 때 필요한 것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선교는 주저하지 말고 즉시 행동해야 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기다리는 사람은 많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기회를 잃지 않으려면 즉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는 선교를 지탱하는 힘입니다. 선교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누렇게 익은 논을 보여준 후 그들에게 ‘먼저 기도부터 하라’고 하셨습니다. 선교는 바로 주님의 의지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선교의 시작은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와 함께 이루어지는 선교만이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성녀 소화 데레사’를 보면 선교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아홉살 어린 나이에 중병에 걸린 데레사는 오직 성모님께 기도하였으며 성모님의 미소를 통해 치유되었고 열세 살이 되던 해 수녀원 입회를 희망했지만 나이가 어려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 후 교황님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갈멜 수도회 입회를 허락해 주실 것을 청원했을 때 교황께서는 '딸아 안심하여라. 하느님의 뜻이라면 꼭 수녀원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라고 위로 하셨다고 합니다.
귀국 후 주교님께 편지를 보냈고 얼마 후 수녀원에 입회하게 된 그녀의 나이는 15세였습니다. 24세의 일기로 선종한 그녀는 9년간 수녀원에 사는 동안 한번도 수녀원 밖을 나오지 않았지만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쓴 「영혼의 이야기」는 그녀의 신앙심과 수도생활에 대해 많은 사람을 감동시켰습니다.
"나는 황홀한 환상보다는 숨은 희생의 소박함을 선택했습니다. 이웃을 위해서 떨어진 작은 조각 한 개를 줍는 것이 한 영혼을 회개시킬 수 있는 시작입니다."
그녀는 선교사들을 위해서 기도와 편지를 보냈으며 그녀의 순박한 영혼은 교회의 쇄신을 불러일으켰고 선교사들이 신앙을 전파하는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1925년 그녀는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라는 이름으로 성인반열에 오르셨으며 교황 비오 11세는 그녀를 '포교사업의 수호자'로 선포하였습니다.
작고 평범한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의 덕을 실천하는 극기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그리고 선교사업의 가장 중요한 ‘사랑의 열정’을 보여주는 성인으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선교는 주님의 힘에 의지해야 합니다.
선교를 떠날 때는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마라’
즉 가난을 체험하고 이해하며 자신의 능력에 의지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나약한 자신을 깨닫고, 영원하지 않은 물질적 가치를 깨닫게 될 때 비로소 주님께 의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교는 평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이웃과 화합을 이루려는 마음과 태도에서 시작되는 평화, 서로 이해하고 협조하고 주고받을 때 만들어지는 평화, 주님의 자녀로서 사랑의 빛 안에서 살아갈 때 이룰 수 있는 평화입니다.
그러므로 선교는 성직자뿐 아니라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이며 그리스도인의 소명입니다.
선교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고, 기도하며 주님께 의탁하고 마음을 주고받으며 화합하고, 평화를 줄 수 있는 사랑의 마음과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선교사업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바라시는 선교입니다.
"밭에 벼가 다 익었는데 수확할 사람이 부족하다”
예언자 이사야와 같이 간절히 주님께 청하십시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주십시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선교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2. 주님의 제자들처럼 성공적으로 선교를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3. 선교를 위해, 선교사들을 위해, 또 주님을 알지 못하는 이웃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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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06. 연중 제14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참된 일꾼은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 주 예수그리스의 십자가 외에는 어떤 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십자가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기꺼이 진다고 호언장담할 것이 아니라 조신하고 겸허해야 합니다. 그럴 때 신앙인은 주님 앞에 물러나 앉아 그분만이 주체가 되고 구원의 능력인 십자가 자신안에 효과있게 나타남을 보게 됩니다. 자원하여 지는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지워주시는 십자가 보다 훨씬 쉽습니다.
우리는 기쁘게 받아들인 고통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만납니다. 그분은 고통속에서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고통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께로 가는 길을 열어주며 이 길을 따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십자가의 신비로 이끄십니다. 우리의 고통은 그분의 십자가의 권능을 통해 변화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일치되어 있을 때에는 고통이 매우 적습니다. 우리 자신이 이기심에 의해 야기된 고통으로부터 분노와 원망, 자기연민, 신랄함, 절망에 의해 야기된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일상생활의 여러 여건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의 느낌들 안에서 고통을 참아내야 할 여러 경우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아무리 사소한 경우일지라도 우리의 감정들을 자극하는 모든 것 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발견하기 위해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때로 슬프고 부담스럽고 고달프고 씁쓸한 일이 생길 때, 특히 어떤 선한 것이 역겹게 보일 때면 지체말고 십자가 위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십자가가 없을 때 우리는 메말라집니다. 십자가를 끈기있게 지면 우리는 감미로움과 행복과 상쾌함을 맛봅니다.
비안네 성인의 말처럼 십자가는 책중에서 제일 지혜로운 책입니다. 이 책을 모르는 사람은 다른 책을 다 보았다 하더라도 무식한 사람입니다. 십자가의 학교에 다닐수록 여기에 머물고 싶은 것을 다 알게 됩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이 당신 친구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십자가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입니다. 십자가는 하늘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십자가를 반갑게 맞이하는 사람은 십자가를 십자가로 여기지 않습니다. 십가가는 그를 우리 주님과 일치시켜 줍니다. 십자가는 지고 가는 사람을 깨끗이 하고, 이 세상에 대한 애착을 버리게 합니다.
십자가의 신비는 하느님의 사랑이 핵심입니다. 사랑이 없는 희생, 고통, 포기는 사랑이 없는 십자가로서 그것은 한갖 나무라는 물질에 불과합니다. 다음의 준주성범에 나오는 십자가의 의미를 되새기며 참된 일꾼으로 거듭나는 은총을 청하도록 합시다.
“예수를 사랑하는 이들 중에 천국을 탐하여 사랑하는 이는 많으나, 그의 십자가를 지고자 하는 이들은 적다. 위안을 구하고자 하는 이는 많으나 곤란을 받고자 하는 이는 적다. 잔치의 벗은 많으나, 재 지키는 벗은 적다. 누구나 다 예수와 더불어 즐기려 하지만 그를 위하여 고통을 참겠다는 이는 적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되 떡을 뗄 때까지만 따르고 수난의 잔을 마시는 데 까지 가는 이는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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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요일 성체의 날✝️
성체성사(현존, 희생, 그리고 친교의 신비) / 로렌스 페인골드
제 1부
기초
제 1장
그리스도께서 왜 성체성사를 제정하셨는가?
성체성사에 대한 적합성의 이유들
사랑의 성사
영적 양식이라는 비유만으로는 성체성사의 풍요로움을 다 담아낼 수 없습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일곱 성사의 적합성과 조화를 더욱 드러내기 위해, 그것들을 일곱 가지 주요 덕목들과 비교합니다. 즉, 네 가지 주된 윤리적 덕목(신중, 정의, 용기, 절제)과 세 가지 신학적 덕목(믿음, 희망, 사랑)입니다. 그중 성체성사는 신학적 덕목인 ‘사랑’(Caritas)과 연결됩니다. 이 사랑은 하느님과의 우정적 관계, 즉 자녀와의 사랑이며 동시에 신랑과 신부 사이의 사랑과 같은 초자연적인 사랑입니다.
성체성사는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우리를 양육하기 위해 제정되었기에 **‘사랑의 성사’**입니다. 이 사랑은 교회를 하느님과의 수직적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수평적 관계 속에서 하나로 결속시킵니다. 이로써 성체성사는 교회 일치의 성사가 됩니다.
현존
성체성사가 왜 사랑의 성사, 곧 자기 자신을 선물로 내어주는 성사인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세 가지 측면에서 그 목적과 합당함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 혼인의 사랑에 있어 고유한 특징은 사랑하는 이와 친밀히 함께 거하고자 하는 열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을 앞두고 제자들을 떠나시기 전에, 하느님으로서만이 아니라 사람으로서도 제자들과 가까이 머무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셨고, 이를 통해 승천하신 이후에도 당신의 거룩한 인성으로 지상에 있는 제자들과 계속 함께하실 수 있게 하셨습니다.
사람은 죽음을 맞이할 때 유언을 남기고,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편지나 사진, 유품, 재산 등 자신을 기억하게 할 유산을 남깁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수난 전날 밤, 사랑하는 이들에게 **유산(testamentum)**을 남기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신 그분은 인간처럼 제한되지 않으셨기에, 그 어떤 유산보다도 크고 탁월한 것을 남기실 수 있었고, 실제로 교회라는 당신의 신부에게 당신 자신 그 자체를 남기셨습니다.
그분은 단지 과거의 예수님을 기억하게 하는 상징만 남기신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지금 여기 현존하시게 하는 방식을 마련하셨습니다. 성체성사 안에서 예수님은 단지 기념되시는 것이 아니라, 실제 존재하십니다.
그리고 이 성체 안의 현존은 오히려 지상에서의 공생활 중보다도 더 완전하고 충만한 방식입니다. 육화하시어 인간의 본성을 취하신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 아래 놓이셨고, 팔레스타인이라는 한정된 지역에서 30년의 숨은 삶과 3년의 공생활, 그리고 부활 후 40일 동안만 활동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단지 한 시대, 한 지역의 구세주가 아니라, 모든 시대와 민족의 구세주요 신랑이시기에, 그 이후 세상에 태어날 모든 이들이 그분의 거룩한 인성과의 접촉을 잃지 않도록, 한계를 초월하는 방식을 마련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모든 세대와 모든 장소에서 사람들과 함께하시기 위해 성체성사를 제정하셨고, 이로써 승천하신 이후에도 세상 모든 교회 안에서, 모든 사람에게, 모든 시대에 현존하시게 되었습니다.(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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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06. 연중 제14주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생각과 말과 행위로 기쁜 소식을 땅 끝까지 /
박윤식 [big-llight] 2025-07-05 ㅣNo.183252
‘예수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이제 나는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그리로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같은 집에 머물면서, 주는 것을 먹어라.”‘
예수님께서는 이 시간, 곧 주님의 평화가 내렸음을 선포하라고 제자들을 파견하신다.
제자들은 기쁜 소식을 전하며, 마귀들마저 복종시킨다.
하느님께서 평화를 주시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나 공로 덕분이 아닌, 당신의 무상적인 은총 덕분이다.
그러나 제자들 가운데 일부는 여전히 율법을 철저히 지켜야지만,
하느님의 위로와 평화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는 이들도 있었다.
인간은 평화를 원하는데, 세상은 그리 평화롭지만은 않다.
우리는 정의와 평등을 추구하는데, 세상에는 미움과 불의와 질투가 가득하다.
우리 인간은 현실에서 부와 명예와 우상을 구하려 하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런 세상에 일흔두 명의 제자를 파견하신다.
그들은 세상에 나아가 인간의 내면적인 갈등을 해소하고자 방문하면,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라고 인사할 게다.
이로써 그들은 다가올 하느님 나라의 평화와 행복은 세상이 주는 부와 명예와는 차원이 다른 행복임을 증언하리라.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이 구원의 메시지는 세상의 메시지와 맞서는 이리 떼 가운데 있는 양들과 같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늘 박해와 고통 등의 십자가가 뒤따른다.
그러나 십자가는 단순한 고행을 넘어선다.
십자가는 곧 다가올 하느님 나라,
아니 이미 우리 가운데 시작된 새로운 나라에 대한 희망이며,
그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하시는 말씀은 우리에게 의문을 갖게 한다.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낸다면서도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하고 말씀하신다.
이것저것 잘 챙겨도 걱정이 될 판에 굳이 왜 가져가지 말라 하실까?
그것은 복음 전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게 바로 하느님에 대한 철저한 의탁이니까.
하느님께 의탁할 줄 모른다면, 돈이 많아도 복음을 전하는 데 아무런 힘이 되지 않을 게다.
아니, 선교 떠나면서 이것저것 다 챙겨 간다면,
그것들에 의지한 나머지 하느님 믿고 그분께 의지하는 데 소홀할 테니까.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다음과 같이 권고하였다.
“어느 것에도 마음 두지 마라. 무엇에도 걱정하지 마라. 모든 것은 헛되이 지나간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변치 않으시니, 하느님을 지닌 이는 부족함이 없으리라.
오직 하느님만으로 만족하여라.”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에 더, 의지하고 있지 않는지를 틈틈이 돌아다보자.
예수님께서는 성부로부터 파견되신 아드님의 권위로 제자들을 파견하셨고,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인 교황을 정점으로 성직자들은 복음을 전하고,
하느님 나라를 확장시키고자 신자들을 파견하신다.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라는 선언으로 신자들은 세상 속으로 파견된다.
이렇게 파견된 자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정의와 평화를 선포한다.
우리 모두는 생각과 말과 행위로 기쁜 소식을 세상 끝까지 나아가서 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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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06. 연중 제14주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슬로우 묵상] 멈춤과 다시 걷기 - 연중 제 14주일스크랩 인쇄
서하 [nansimba] 250706. 02:10 ㅣNo.183258
연중 제 14 주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루카 10,3)
가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리 떼가 우글거리는 세상', 그게 정말 어딜까?
예수님은 우리를 이리 떼 한가운데로 보내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단순히 외적 위협이나 폭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모든 환경, 구조, 시선을 포함합니다.
사실, 이리 떼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 삶 전체, 때로는 우리 마음 깊숙한 곳에도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리 떼가 우글거리는 곳
* 거짓과 왜곡이 만연한 세상
가짜 뉴스, 조작된 정보, 왜곡된 가치관이 진실을 흐리고,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합니다.
진실을 말하고, 투명하게 살아가려는 사람은 늘 위협받습니다.
* 약함을 부끄러워하게 만드는 사회
느림을 탓하고, 실수를 용납하지 않고, 더 높이, 더 빨리, 더 많이를 외치는 이 세상은
존재 본연의 가치를 지우려 합니다.
평화롭고 온전한 존재가 아닌, 성과로만 평가받는 인간이 되기를 강요합니다.
* 내면 깊숙한 자기혐오와 두려움
끊임없이 자신을 깎아내리는 목소리,
'나는 부족하다', '거절당하면 끝이다'는 생각들 역시 내 안의 이리 떼입니다.
* 공동체의 파괴와 관계의 단절
이리 떼는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힘, 즉 불신, 혐오, 분열 속에 숨어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가족, 친구, 사회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상처 주며 고립될 때,
우리는 관계 속에서 이리 떼를 마주합니다.
이리 떼 속에서도 평화를 품는 법
* 내면을 바라보는 용기
조용한 시간을 내어 내 마음의 불안을 마주합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두려워하지 마라'를 되새기며
흔들리는 내 존재를 부드럽게 바라봅니다.
* 작은 진실로 거짓 흔들기
가족에게 솔직한 마음을 전하고,
동료를 격려하며, 꾸밈없는 일상을 나누는 작은 실천이
거짓의 벽을 조금씩 허물어갑니다.
* 약함을 부끄러워하지 않기
"오늘 나는 힘들다", "도움이 필요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패배가 아닙니다.
그 솔직함이 우리를 더 깊게 연결시키고, 사랑을 회복합니다.
* 한 사람을 깊이 사랑하기
분열을 넘어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의 아픔 곁에 머무는 것, 그 사랑이 작은 공동체를 일구어 갑니다.
* 감사의 눈으로 세상 보기
따뜻한 햇살, 친구의 안부, 평범한 일상 속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발견하는 연습이 우리를 더욱 단단히 세워줍니다.
이리 떼 속에 보내졌지만, 두려워하지 마라
예수님은 우리를 이리 떼 속으로 보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존재 그 자체로, 평화를 품고,
한 걸음 한 걸음 사랑의 길을 걷습니다.
이리 떼가 우글거린다고 해서,
우리는 숨거나, 거짓에 물들거나,
나의 약함을 감추며 살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의 이름은 이미 하늘에 새겨져 있고,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존재의 근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늘도,
이리 떼 한가운데서 양의 마음을 잃지 않고,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를 품고
담대히 걸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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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06. 연중 제14주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십니다.
그러면서 평화의 인사를 하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평화의 인사로 제자들은 사람들에게 평화를 전하는데
그것은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평화
제자들이 살고 있는 평화를 전하는 것입니다.
평화를 말씀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걱정하십니다.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양처럼 보시면서
어려움을 예상하십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어려움에 도움이 될 것처럼 보이는
돈주머니나 여행 보따리 같은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더 힘든 삶을 강요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라는 말씀은
철저하게 하느님께 의존할 것을 가리킵니다.
제자들이 파견되어 세상에서 사는 삶은
제자들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하는 힘으로 사는 것입니다.
파견되었던 제자들은 마귀까지도 물리쳤는데
그것은 하느님과 함께할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즉 제자들이 하느님과 함께할 때
그들은 이미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갑니다.
어려움도 있겠지만
하느님과 함께 있을 때
제자들은 평화를 누리게 되고
그 평화를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전하는 것을
제자들은 사명으로 받았습니다.
물론 그것을 말씀으로 전하는 것이지만
제자들이 직접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가면서
그곳으로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더 효과적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전하는 방식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도 하느님의 나라를 전하기에 앞서
먼저 그 나라를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살아갈 수 있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평화를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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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706. 연중 제14주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0,1-12.17-20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많은 신자분들이 신앙생활을 하시는 이유가 ‘마음의 평화를 찾기 위해서’라고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천주교에서 가르치는대로 따르면, 세상의 거센 풍랑에 사정없이 휘둘려 시끄럽던 내 마음이 잔잔한 호수처럼 평온해질거라 기대하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하고 찾고 얻어야 할 ‘참된 평화’는 고통과 시련이라는 벌레 한 마리만 빠져도 흐트러지고 깨지는 일시적 안정상태가 아닙니다. 오히려 내 마음에 걱정과 근심의 태풍이 불고 두려움의 파도가 몰아쳐도 담대하게 마주할 수 있는 굳건하고 넓은 마음을 지녀야 하지요. 그런 마음은 오직 주님께 대한 깊고 단단한 믿음으로부터 우러나오기에, 주님께서 당신 평화를 우리에게 주겠다고 하십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참된 평화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그것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한 내용입니다.
성경에서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싸우지 않아도 되고, 적으로부터 내 것을 지키기 위해 싸울 필요도 없는 상태를 ‘샬롬’, 곧 ‘평화’라고 표현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재화는 한정적인데 비해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기에, 무언가를 더 획득하고 소유하기 위해 전쟁과 싸움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미 모든 것이 충분하여 모두가 마음이 흡족한 상태가 되면 굳이 싸울 필요가 없는 ‘태평성대’가 올거라고 기대하는 겁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런 평화를 가져다 주시리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께 불충과 배신을 저지른 벌로 그들의 도성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황폐해졌지만, 하느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시고 예루살렘에 평화가 강물처럼 밀려들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 자비와 사랑의 손길을 느끼며 위로와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진노와 심판을 상징하던 예루살렘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된 기쁨과 평화를 상징하는 ‘희망이 도성’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민족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을 찬미하게 될 것입니다.
한편, 오늘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구약시대의 평화와 구분하여, 주님의 수난과 부활을 체험한 그리스도인이 지향해야 할 참된 평화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평화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으로부터 선물처럼 주어진 풍족하고 충만한 ‘결과’라면, 주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체험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평화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은 바로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십자가를 가슴에 품고 그분을 따르는 일입니다. 수난과 죽음을 거치지 않고는 부활할 수 없듯이, 힘들고 어려운 과정 없이는 영광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맡겨주신 십자가를 부담스러워하거나 외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족하고 보잘 것 없는 자신에게 십자가라는 중요한 소명을 맡겨주셨음에 감사하며, 자신이 주님께로부터 십자가를 받았음을 기쁘게 자랑합니다. 자신을 핍박하고 억압하는 세상 사람들은 눈엣가시같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았으니 승리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주님의 눈으로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오히려 그런 그들의 모습이 스스로를 세상에 못박아 함께 멸망해가는 딱한 모습으로 보인다는 것이지요.
세상이 말하는 십자가는 원하지 않는 슬픔입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입니다. 포기하기 싫은 욕망입니다. 그런 것들로 인해 자기가 행복해지지 못한다고 여기기에 멀리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바오로 사도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기꺼이 메고 가신 사랑의 멍에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고통의 잔이라도 기꺼이 들이키시는 순명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유함보다 가난을, 건강보다 질병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와 희생입니다. 그런 십자가를 자랑하며 기꺼이 지려는 그의 모습이 주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였지만, 주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섭리를 굳게 믿은 바오로에게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로 보였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이고 구원의 ‘진리’이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통해 하느님과 참된 일치를 이룬 이들만이 그분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복음선포의 소명을 맡겨 파견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곱씹어볼수록 참으로 난감한 말씀입니다. 기왕이면 ‘이리 떼’가 없는 곳으로 보내주시고, 그게 안된다면 최소한 내 목숨을 노리는 ‘이리 떼’를 없애주신 다음에 보내주시면 좋겠는데,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낸다고 하시니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말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의 소명이 무엇인지가 명확히 드러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좋은 것들을 편안히 받아서 누리기만 하라고 뽑힌 게 아니지요. 그런건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특권’이지 우리가 따라야 할 ‘소명’은 아닌 겁니다. 우리는 불의와 부정으로 가득한 세상에, 욕망과 고집으로 인한 갈등과 대립이 극심한 세상에 평화를 이루는 ‘일꾼’으로써 파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소명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하지말아야 할 것과 해야 할 것을 올바르게 식별하여 실행해야 합니다.
먼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필요 이상의 재물을 지니지 않는 것입니다. 길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친목을 다지는데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며 취향과 기호에 맞는 것을 고르지 않는 것입니다. 사물에도 사람에도 기대지 말고 철저히 하느님께 자신을 의탁하며 그분 뜻을 따르는 것이 제자답게 사는데에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지요. 다음으로, 꼭 해야 하는 것은 나에게 호의를 베풀어준 이에게 평화를 빌어주는 것입니다. 그들이 나에게 차려주는 음식을 투정하지 말고 감사히 먹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거저 주신 능력을 바탕으로 병자를 고쳐주며 행동과 삶으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누가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그에게 원망이나 미움을 품지 말고 그에 대한 심판을 온전히 주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이 세상에 그분께서 주시는 참된 평화가 싹트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에 평화를 이루는 일꾼으로써의 소명을 다하는 과정에서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주님 손에 맡겨진 도구일 뿐임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능력 자체에만 집중하면, 그 능력을 이용하여 눈에 보이는 결과를 얻어내는 데에만 신경쓰다보면, 정작 중요한 하느님의 뜻은 소홀히 하면서, 사람들 앞에서 나를 드러내고 높이기 위해 헛심을 쓰게 되지요. 주님의 제자로써 나아갈 길을 잃어버린 채 부질없는 것들 속에서 방황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 것들에 신경쓰지 말고 ‘우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뜻을 이루려는 우리의 수고와 노력을 어여삐 보시고 당신 나라에 받아주신다는 기쁜 소식이 우리가 구하고 바라야 할 유일한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부족하고 보잘 것 없는 나를 통해 이루시는 놀라운 신비는 우리를 그분 사랑으로 물들이고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그 변화가 우리 마음에 참된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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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 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1. ================================================
♣복음말씀의 향기♣ No4276
7월6일 [연중 제1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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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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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과달루페 외방선교회 양진홍 제랄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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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를 유심히 바라보시고 선택하신 주님!>
공생활 기간 동안 예수님과 동고동락했던 사람들은 12 사도뿐이 아니었음을 루카 복음사가는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12 사도를 선발하신 예수님께서는 72명의 제자를 다시 지명하셨습니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군중, 그리고 예수님께 주어진 시간은 지극히 제한적인 딱 3년, 복음선포를 기다리는 지역은 한도 끝도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께는 더 많은 제자들이 필요하셨을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탁월한 능력을 고려할 때, 아버지께서 주신 과업 혼자서도 충분히 해내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위대한 인류 구원 사업, 복음선포 사업에 한없이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 인간을 협조자로 부르셨습니다. 참으로 감사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12+72=84명입니다. 결코 만만치 않은 숫자였습니다. 그 외에도 마리아 막달레나를 비롯한 여제자들, 뿐만 아니라 자발적으로 예수님을 따라나선 추종자들로 큰 무리를 이루었습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수많은 남녀 제자들과 추종자들이 함께 움직이며 합심해서 복음을 선포하는 광경은 정말이지 장관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저는 ‘지명’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크게 와닿았습니다. 따지고 보니 한없이 나약하고 부족한 저이지만, 저 역시 예수님으로부터 지명받은 존재입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과분하게도 예수님으로부터 지명받은 사람들입니다. 지명받았다는 것은 참으로 은혜로운 일입니다.
지명받기 이전에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눈여겨보셨습니다. 우리를 유심히 바라보셨고, 우리를 선택하셨고, 마침내 우리를 당신 인류 구원 사업의 협조자로 가까이 부르신 것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영원히 우리를 당신 가까이 부르시는 예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지명되고, 부르심 받은 사람으로서 합당하게 살아가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루카 복음 사가는 지명되고 부르심 받은 사람으로서 어떻게 처신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몇 가지 행동 지침을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루카 10, 3-4) 하느님 나라가 임박했으니, 다른 모든 것에 앞서 복음선포에 전념하라는 당부입니다. 복음선포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재물이나 사람 등등 유혹 거리들을 과감하게 떨쳐버리라는 권고입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0,5) 어디를 가든지 복음 선포자로서 평화의 전도사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선포 과정에서 반드시 반대에 부딪히기도 하고, 노골적인 적대자들도 만날 것입니다. 고통과 상처도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작은 것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면서 쭉 직진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 후반부에는 무사히 선교 활동을 마치고 돌아온 제자들이 예수님께 활동 보고를 드리고 있습니다. 출발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의 신신당부에 따라 돈주머니도 식량 자루도, 여벌 옷이나 신발도 지니지 않았습니다. 땡전 한푼도 없이 계속된 전도 여행길에 제자들은 굶주림에 시달렸고, 심신은 지칠대로 지쳤을텐데, ‘선교 여행 결과 보고회’ 분위기는 놀랍게도 기쁨과 축제의 분위기였습니다.
제자들 얼굴은 피곤한 기색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보다는 충만한 기쁨으로 가득한 의기양양한 얼굴, 세상을 다 얻은 그런 얼굴이었습니다. 상기된 얼굴의 제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루카 10, 17)
이제 제자들은 더 이상 사탄의 세력에 지배되지 않게 되습니다. 그들은 이제부터 하느님 아버지의 다스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있어 사탄의 복종도 큰 기쁨이었지만, 그와 비교할 수 없을만큼 큰 기쁨이 있었으니, 제자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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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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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평화를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평화를 줄 때 더 큰 평화가 오는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을 ‘평화의 사명’으로 파견하십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세례를 받으면 주님이 주신 평화를 전하라는 복음 전파 사명으로 파견받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라는 말씀으로 마무리됩니다. 평화의 사명으로 파견되는 것이 왜 기쁨으로 끝날까요? 그러한 사명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 왜 기쁠 수 없는지 먼저 알아야 할 것입니다.
평화의 사명이 없는 사람들이 왜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느냐면 필연적으로 두려움에 떨며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명령을 수행하며 삽니다. 대부분은 자아의 명령을 수행합니다. 자아는 생존이 목표입니다. 그런 자아의 명령을 받는 사람들은 사람들을 만날 때 기본적으로 ‘어떻게 하면 나를 평화롭게 할까?’를 생각합니다. 평화란 생존에 대한 보장입니다. 육체의 생존을 보장받고자 하는 이들은 돈과 맛과 힘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될까요? 이런 것을 추구하면 외로워집니다. 누구도 자신들에게서 돈과 맛과 힘을 빼앗는 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모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모기는 자기 평화를 위해 남의 피를 노립니다. 그러나 그 평화는 언제든 사라질 수 있음을 압니다. 모기약에 죽을 수도 있고 손바닥에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하찮은 평화를 위해 그런 두려움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영화 ‘에비에이터’가 그려내는 억만장자 하워드 휴스의 삶은, 자기 생존을 위한 평화만을 추구하는 ‘모기’와 같은 인생이 결국 얼마나 비참한 파멸로 끝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예화입니다. 그의 비극은 유년 시절, 어머니가 심어준 깊은 불안감에서 시작됩니다. 영화의 초반,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목욕시키며 세상의 세균에 대해 경고합니다.
“너는 안전하지 않아(You are not safe).” 이 말은 단순한 위생 교육을 넘어, 세상은 위험하고 너는 언제든 오염될 수 있다는 공포의 씨앗을 그의 영혼 깊숙이 심어놓습니다. 여기서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돈과 여자와 권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렇게 타인의 돈과 힘, 쾌락이라는 피를 빨아먹으며 자신의 생존과 평화를 보장받으려 했던 것입니다.
재정적 상황이 불안해질수록 그의 강박증은 더욱 심해져,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고 자신을 어두운 방 안에 격리합니다. 세균이 두려워 통조림만 먹고, 손톱과 머리카락이 흉측하게 자라도 내버려 둔 채 자신만의 감옥에 갇혀 쓸쓸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나를 살리려는 마음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타인을 살리려는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자아가 명령하는 것을 안 들으려면 그와 반대되는 내어줌의 명령을 내리시는 하느님을 주인으로 삼아야 합니다. 저도 사실 저의 평화를 위해 살 때는 언제나 불안했습니다. 여기서 벗어나는 길은 완전히 다른 사명, 곧 “이젠 나를 행복하게 하는 삶이 아닌 타인을 행복하게 하는 삶을 살자!” 를 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그 집의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다른 이의 평화를 위해 살라는 사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한 여인으로 살다가 어머니가 되면 어떨까요? 자신이 한 여자였음을 잊고 이젠 자녀에게 평화를 주어야만 하는 사명으로 다가갑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이런 아내에게 남편은 평화를 줍니다. 만약 자녀가 어머니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면 어떨까요? 평화를 받을 자격이 없는 이들의 평화가 다시 돌아옵니다.
호세아 예언자의 삶은 하느님께서 한 인간을 통해 당신의 마음을 얼마나 절절하게 드러내시는지를
보여주는 한 편의 살아있는 비유와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호세아에게 “가서 음행하는 아내를 맞아 음행의 자식들을 낳아라. 이 나라가 주님을 버리고 음행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호세 1,2)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는 처음부터 호세아의 결혼이 그의 개인사가 아니라,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깨어진 관계를
상징하는 공적인 예언 행위임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은 또, “가서, 다른 남자의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간음하는 그 여자를 다시 사랑하여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다른 신들에게 돌아서서 건포도 과자를 좋아하는데도 주님이 그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하여라.”(호세 3,1)라고 하십니다. 이미 창녀와 같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이젠 그리스도를 보내어 또 구속하시겠다는 예언입니다.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아내를 사랑하면서 호세아는 어떤 평화를 누릴까요?
하느님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느끼며 참 평화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얻은 것은 하느님의 가장 깊은 마음을 엿보는 영적인 통찰이었습니다. 이는 마치 예언자 요나가 자기를 서늘하게 해 줬던 박넝쿨이 말라버렸을 때 니네베 시민들에게 가진 하느님의 마음을 알게 된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평화를 주는 이유는 그것 때문에 악령들이 쫓겨나고 그래서 그들이 평화의 사도로 변하는 나의 능력 때문이 아닙니다. 바로 나의 이름을 자녀로 삼아 하느님 나라의 상속권을 받았다는 사랑받는 느낌 때문입니다. 그러니 모기가 되지 않고 사랑이 외면당해도 상관없는 사랑을 전하는 사명을 수행합시다. 주님의 평화가 그 사명을 수행하는 이들에게 지금부터 영원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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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는 국어 시간에 ‘운문과 산문’을 배웠습니다. 운문은 시와 시조처럼 리듬과 가락이 있는 언어입니다. 반면 산문은 생각을 논리적으로 풀어서 이야기하는 형식입니다. 운문은 짧지만, 때로는 산문보다 더 큰 감동을 줍니다. 저에게도 애송시 몇 편이 있습니다. 나태주의 「시(詩)」, 이정하의 「험난함이 거름이 되어」, 윤동주의 「십자가」, 그리고 지하철 안전문에서 읽었던 작자 미상의 「늦었다고 원망하지 마라」라는 시입니다. “늦었다고 원망하지 마라./ 그래야 하늘을 보고, 그래야 구름도 보고,/ 그래야 꽃도 보고, 그래야 뺨에 스치는 바람을 느낀다./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 이 시는 우리에게 관점의 전환을 요구합니다. ‘늦음’이라는 현실을 원망하지 말고, 그 안에서 바라보는 풍경을 받아들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인생은 단지 목적지에 이르는 경주가 아니라, 그 여정을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따라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의 눈은 창문과 같습니다. 결국 우리가 보는 것은 외부의 풍경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정신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독서에서 관점의 차이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신앙은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줍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십자가는 고통의 상징이 아니라, 생명의 시작입니다. 마치 엄마의 태중에서 태어나는 아이처럼, 세상으로 나오는 고통은 죽음처럼 느껴지지만, 가족에게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입니다. 위령 감사송도 이 관점을 이어줍니다. “주님의 종들에게는 죽음이 아니라 새 생명의 시작이며, 이 지상에서의 거처가 무너질 때는 하늘에 영원한 처소를 마련해 주시나이다.” 우리는 죽음을 끝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이르는 문으로 받아들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기에, 그분을 따르는 우리도 부활의 희망을 품습니다. 바로 이 믿음이 사도들과 순교자들이 박해 속에서도 기쁨으로 십자가를 짊어지게 했습니다.
성경에서도 운문의 형태로 기록된 시편은 예수님의 기도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내 하느님, 내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시편 22편), “제 영을 당신 손에 맡깁니다”(시편 31편)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또 메시아적 정체성을 말씀하시며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이다”(시편 118편), “주님께서 내 주님께 이르셨다. 내 오른편에 앉아 있어라.”라고 인용하셨습니다. 예수님께 시편은 단순한 인용이 아니라,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드러내는 깊은 기도였습니다. 저 역시 사제품을 받을 때 시편 126장을 서품 성구로 정했습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기쁨으로 거두리라.”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눈물과 수고를 절대 잊지 않으신다는 신뢰의 고백입니다. 이 말씀은 신앙 선조들의 삶을 통해 구체화합니다. 그분들이 흘린 눈물은 순교의 피가 되었고, 교회는 그 결실로 103위 성인과 124위 복자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저도 그분들처럼 제게 주어진 십자가를 기쁘게 지고 가겠노라 다짐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세상의 성공과 인정은 덧없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기뻐해야 할 것은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 곧 하느님과 깊은 관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영광 드리는 삶을 살아간다면, 하느님께서는 어머니가 자녀를 위로하듯 우리를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늦었다고 원망하지 마십시오. 눈물로 씨 뿌리는 지금, 이 순간이, 기쁨의 추수로 이어질 것입니다. 시편의 기도처럼, “씨를 지고 울며 나가던 이,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라는 말씀이 우리의 삶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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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바오로수도회 김태훈 리푸죠 신부님]
제1독서와 복음을 통하여 선포되는 오늘의 주제는 ‘평화’입니다. 제자들이 하는 선포의 핵심, 곧 복음의 요약은 평화입니다. 평화는 ‘평온하고 화목함’을 뜻합니다. 평온은 평안한 것이고, 화목은 ‘함께’ 누리는 것으로 ‘공동체성’을 띱니다.
‘평안함’의 반대말은 ‘불안’, ‘두려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라고 하시며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루카 10,3) 같다고도 하십니다. 어떻게 평온할 수 있겠습니까? 그 비결은 그들이 선포하는 메시지 안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10,9).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께서 다스리시고 돌보시며, 영원한 생명까지 보장해 줍니다. 하느님을 믿고 그분께 의탁하는 데서 평화가 옵니다. 이 평화는 세상의 평화와 다릅니다. 가진 것 없고, 내세울 것 없어도 두렵지 않습니다. 제자들의 존재 자체가, 삶의 방식 자체가 선포입니다.
‘화목’의 반대말은 ‘전쟁, 싸움, 갈등’으로, 이는 결핍의 상황일 때 생깁니다. 제자들의 상황 자체가 바로 결핍의 상황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결핍은 마음에서 옵니다. 많은 재산을 가졌으면서도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탐욕’과 ‘분쟁’이 나올 수 있습니다. 반면에 가진 것이 별로 없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탐욕’의 반대말은 ‘만족’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사신 가난한 삶을 스스로 따르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난을 통하여 연대하고 함께함으로써 부요해짐을 배웠습니다. 가난하지만 함께 뭉침으로써 화목과 부요를 얻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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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0,1-12.17-20: 일흔 두 제자의 파견
오늘은 기쁨이라는 것이 고통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귀양살이 후에 예루살렘의 중흥에 대한 이사야 예언자의 기쁜 소식을 듣게 되고,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구원의 사명을 위해 파견하시지만 우선 기쁨보다는 고통을 예고하신다. 마치 “이리떼 가운데 있는 어린양”(3절) 같은 신세가 될 것이라고 하신다. 그러나 제자들은 선교 사명을 마쳤을 때 기쁨의 환호성이 나오고, 예수께서는 흥분한 제자들을 진정시키신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20절) 아마 그 기쁨은 복음이 전하는 사람에게나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도 너무나 어렵고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반발과 낙담과 위기 그리고 회피와 실망의 감정이 일게 된다.
“그 때에 주님께서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보내셨다.”(1절) 예수께서는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열두 제자를 파견하셨다고 모든 복음에서 전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열두 제자들만이 아니라, 더 많은 협력자와 소식 전달자들이 있어야 함을 보여주신다. 72라는 숫자는 전승에 의하면 세계에 흩어진 이방인들의 나라 숫자가 그만큼 된다고 한다(창세 10장 참조). 바로 구원의 보편성을 말하는 것이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2절). 추수는 하느님의 심판을 의미하고 있다.(요엘 4,13 참조) 이는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한 종말론적 사업에 당신의 제자들을 결합하시는 모습이다. 즉 주님뿐 아니라 제자들도 종말을 선포한다는 것이다. 이제 제자들은 스승과 같은 사명을 실천하게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기도가 필요하다. 추수의 주인이신 하느님만이 그 복음 선포자들을 세워주실 수 있고 필요한 힘으로 무장시켜 주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3절). 그를 파견하신 분이 보호해주지 않는다면 결과는 뻔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인간적인 안전대책을 마련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철저히 그것을 거절하라고 하신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4절). 복음 선포의 여정을 걸으며 살아가는데 인간적 도구의 부족은 아무런 두려움을 주지 못한다. 그 복음 선포자들은 이미 가난을 근본적으로 선택하였고 모든 것을 그분께 의탁하기 때문에, 이리떼 가운데서 지켜주실 수 있는 그분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그 누구를 통해서 매일 양식도 마련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7절)
이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자신을 예로 들어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 보물(사도직)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2코린 4,7-10). 이러한 삶이 진정 다른 사람들에게 평화(shalôm)를 전해줄 수 있다. 이 평화는 하느님 나라의 표지이다. 즉 하느님 나라의 능력과 힘의 표지이며, 인류에게 주는 생명과 쇄신의 표지이다. 루카는 평화를 선교의 목표로 삼고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이리떼 가운데 어린양이지만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전해야 하기에 평화의 건설자이다. 항상 평화를 기원해주며 순교자의 삶으로 그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
제자들은 기쁨에 넘쳐 돌아와 그간의 활동을 스승님께 보고하고 있다. 제자들이 주님께 보고하는 것은 선교활동의 성공에 대한 자만심의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들을 통해 악령들까지도 쫓아내시며 보여주신 능력에 대한 기쁨의 표현이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하늘의 영광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신다.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20절). 성공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교만해질 수 있는 유혹이 될 수 있다. 사탄을 하늘에서 떨어뜨릴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이시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참조: 이사 14,12; 묵시 12,8). 이렇게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은 오직 공동 이익(1코린 12,7)을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 그 기쁨은 하느님께 다시 영광을 돌리며 느끼는 더 큰 기쁨이기 때문에 이 기쁨 역시 전교의 영역에 드는 것이다. 교회의 근본적인 사명은 선교이다. 그래서 교회와 일치하고 있는 우리 모든 신앙인은 선교 사명이 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의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씀이다. 세례로 주님의 제자가 된 우리는 모두 이리떼 가운데 어린양으로 진정한 평화와 기쁨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자세를 언제나 견지할 수 있는 삶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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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더욱더 그러하여라>
마태오 10,17-22 (박해를 각오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더욱더 그러하여라>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마태 10,17-18)
그대는
나의 빛이니
어둠 가운데서
더욱더 빛이어라
그대는
나의 믿음이니
불신 가운데서
더욱더 믿음이어라
그대는
나의 희망이니
절망 가운데서
더욱더 희망이어라
그대는
나의 사랑이니
증오 가운데서
더욱더 사랑이어라
그대는
나의 축복이니
저주 가운데서
더욱더 축복이어라
그대는
나의 기쁨이니
암울 가운데서
더욱더 기쁨이어라
그대는
나의 진실이니
위선 가운데서
더욱더 진실이어라
그대는
나의 정의이니
불의 가운데서
더욱더 정의이어라
그대는
나의 자유이니
폭압 가운데서
더욱더 자유이어라
그대는
나의 평화이니
분노 가운데서
더욱더 평화이어라
그대는
나의 살림이니
죽임 가운데서
더욱더 살림이어라
그대는
나의 사람이니
사람 가운데서
더욱더 사람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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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인의 충실한 신앙생활 자체가 복음 선포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 그곳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0,2-9)
1) 신앙인은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로마 8,16-17ㄷ) 자녀는 곧 상속자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일은 곧 자녀의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의 일꾼과 하느님의 자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들은 모두 하느님의 일꾼입니다. 따라서 ‘선교활동’은 하느님의 자녀들을 찾는 활동이기도 하고, 하느님의 일꾼들을 모집하는 활동이기도 합니다.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라는 말씀은, “사람들이 믿고 회개해서 구원받을 수 있도록 사람들을 인도해 주십사고 하느님께 청하여라.”입니다. <이 말씀은, 선교활동은 ‘기도하면서’ 해야 하는 활동이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2)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라는 말씀은, ‘이리 떼’를 ‘양들’로 변화시키라는 지시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을 회개시키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라는 지시입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는 ‘이리 떼’를 ‘양들’로 변화시키는 방법에 관한 말씀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세속의 물질에 의지하지 않고 하느님에게만 의지하는 모습 자체가, 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데도 내적 평화를 누리면서 사는 모습 자체가,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는 복음이 되고, 신앙의 증언이 됩니다.
만일에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돈 걱정을 하고 있다면, 그들이 전하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고, 그들의 증언은 신앙의 증언이 아닙니다. <돈 걱정이나 하고 있는 이들이 전하는 ‘기쁜 소식’은 기쁜 소식이 아니라 ‘걱정스러운 소식’이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신앙에 대해서 말한다고 해도, 믿음을 증언하는 일이 되기는커녕 믿음을 부정하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라는 말씀은, ‘세속 일’에 연연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7절-9절의 말씀은,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돈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이유, 또는 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에 대한 말씀입니다.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일꾼을 당연히 먹이신다.”입니다. “너희를 받아들이면”은, “너희를 받아들여서 음식과 숙소를 제공하면”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을 받아들여서 음식과 숙소를 제공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일꾼들을 먹이기 위해서 보내 주신 천사와도 같은 사람입니다.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와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는, 더 좋은 대접을 받기를 바라면서 옮겨 다니지 말고 ‘주는 대로’ 먹으라는 가르침입니다.
3)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라는 말씀은, 선교활동은 ‘하느님의 평화’를 전해 주는 일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상대로 싸우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평화’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누리는 평화를 가리키고, 하느님 나라의 구원, 영원한 생명, 영원한 기쁨과 행복 등을 총체적으로 나타내는 말입니다. 평화를 전해 주는 방법은 평화밖에 없습니다. 자기 자신이 먼저 평화를 누리고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돈 걱정을 하고 있는 사람은 이미 그 평화를 잃은 사람이고, 그런 사람은 남에게 하느님의 평화를 전해 줄 수 없습니다.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은, “복음을 받아들여서 믿으면”이고,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는, “구원을 받을 것이고”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는, “복음을 전해 주는데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고 배척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그 사람 자신의 책임이고, 너희의 책임은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4)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라는 선포는,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선포입니다. <종말의 심판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선포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늦기 전에 빨리 회개하고 믿으라는 선포입니다. 이 선포는 예수님의 첫 복음 선포와 같은 것인데(마태 4,17),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는 예수님의 부활에 복음의 초점이 맞추어지게 됩니다.
<처음에는 ‘회개와 믿음’을 강조했고, 부활 후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바뀌었는데, 그래도 복음의 핵심 내용이 바뀐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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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헛됨에 빠져들지 않게 하소서>
“오늘도 말과 행동 지켜주시고 온갖 악 피하도록 도와주소서. 우리 혀 삼가토록 보살피시어 시비에 말려들지 않게 하시고 우리 눈 조심토록 지켜주시어 헛됨에 빠져들지 않게 하소서.” 성무일도 아침기도의 찬미가 일부입니다.
온갖 악을 물리쳐 이겨야 하고, 헛됨에 빠져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몰라서 잘못을 범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의지가 약하고 인간적인 욕심 때문에 넘어지는 것입니다. 일순간의 기쁨을 맛보기 위해 큰 것을 잃어버려서는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인사하느라 가던 길을 멈추지도 마라”고 하시며 헛됨에 빠지지 않도록 단속하셨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넉넉해야 무슨 일을 해도 할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지만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저 ‘하느님나라가 다가 왔다’고 전하길 원하셨습니다. 말씀을 따르는 사람은 여장을 꾸리고 인사치레를 하는 것에 그리고 고의적으로 거부하는 이를 설득하느라 시간을 허비할 틈이 없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아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보다 자신의 안락을 더 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파견받는 제자는 파견된 곳에 전적으로 뿌리내릴 수 있는 자신으로부터의 해방을 살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소돔이나 띠로, 시돈은 이방인 지역입니다. 이 지역은 하느님의 저주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지역이 오히려 가벼운 벌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의 경고입니다.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곧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고 결국 그 지역은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스스로 파괴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의 문을 닫으면 헛된 것에 빠지게 되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으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은총으로 다가오시지만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구원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나 없이 나를 내신 하느님께서는 나 없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십니다.”
우리도 자칫 그릇된 신심에 빠져 자기가 최고인 것처럼 생각하고 이중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몸은 교회 안에 머무르면서 삶은 교도권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주장에 빠지는 그들에게는 겸손이 없습니다. 성령께서 원하시는 일치가 없고 분열을 조장하고 자기도 모르게 교만에 빠집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믿음에 따르는 순명을 통해 그리스도의 빛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놓여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원하는 대로 받을 것입니다”(집회 15,17). 그러므로 어떤 처지, 상황에서든지 생명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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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정상천 스테파노 신부님]
<말씀 전하기에 가장 좋은 조건>
사람은 저마다 좋아하는 것을 가꾸고, 키웁니다. 나무를 키우고, 반려동물을 돌보며, 시간의 무료함을 다른 생명체와 함께함으로써 달랩니다. 우리는 지금껏 혼자인 적이 없었습니다만, 과연 이것이 영성 생 활에 얼마나 보탬이 되어줄까요?
외로움은 다른 존재의 빈자리에서 오는 감정입니다. 오랜 시간 함께했을수록 외로움은 더해지고, 뜻깊은 일을 마치고서 느껴지는 상대적인 외로움은 더 깊습니다. 그래서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고 그리워합니다. 설령 그날이 다시 오지 않을지라도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 일흔두 명을 둘씩 짝지어 몸소 가실 곳에 앞서 보내셨습니다. 그들이 지니지 말아야 할 것과 옷차림, 행세 등으로 복음의 일꾼임을 드러내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루카 10,4)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이때 인사를 하지 말라는 것은 길게 인사하는 그들의 관습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데에 머뭇거리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서 이집 저집 옮겨 다니지 말고 같은 집에 머물라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받은 일꾼이 더 나은 대접을 받으려고 하지 말고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루카 10,8)고 하십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참된 일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나의 편의와 안락 중심보다는 복음에 중심을 두어야 합니다. 분명 같은 하느님 말씀이지만 누가 어떻게 전하는지에 따라서 무게 중심이 달라집니다.
복음에서 나온 전달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은 그분께 중심을 두는 삶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과 사랑을 전하면서 그분보다 자신이 더 두드러지지 않게 늘 살펴야겠습니다.
거룩한 말씀을 전할 때 이목을 집중시켜 사람들이 놀라워하면, 이내 전달자는 교만이라는 위험한 관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그분 말씀을 전하는 일꾼이지, 복음 자체일 수 없습니다. 길에서 인사하기 바쁘고, 이집 저집 옮겨 다니면서 쾌적한 집과 맛 좋은 음식을 찾는다면, 과연 우리가 그분을 잘 전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그분을 믿음으로써 알게 모르게 다른 이에게 그분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전함으로써 그 빈자리에서 오는 영적 외로움을 다시 말씀으로 채워 복음을 전하는 가장 좋은 조건을 만들어 나갑시다. 우리가 말씀을 전할 때 그분께서 주도하시며, 성령께서 같이 활동하심을 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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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윤헌식 F. 하비에르 신부님]
<“평화가 너희와 함께”>
찬미예수님! 오늘 봉독된 독서와 복음은 공통적으로 ‘평화’ 를 언급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주님께서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황폐화된 예루살렘에 평화가 강물처럼 흐를 것이라고 위로와 희망을 줍니다. 제2독서는 그리스도 십자가의 법칙에 따라 주어지는 결과가 평화와 자비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복음 역시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선교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 궁극의 목적이 하느님 나라의 평화를 누리기 위한 것입니다.
얼마 전에 선종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세계 평화의 날 담화문(2019. 1. 1.)에서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라고 하시며 오늘날 어느 때보다 ‘평화의 아티장(artisan of peace)’ 이 필요하다고 호소하셨습니다. 평화를 만드는 장인들이 곳곳에 드러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마음과 영혼의 회개’ 가 전제되어야 하고, 먼저 옹고집, 분노, 조급함을 버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나라빛 같은 말씀입니다. 이는 복음 선교의 대상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닌 우선적으로 나 자신부터 복음화되어서 평화를 비는 이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언제 어느 곳을 가든지, 그곳에는 복음이 가야 하고 예수님께서 가셔야 참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속된 내가 가니까 선교가 싼값으로 대우를 받고 사람들이 불편해합니다. 그 누군가 복음 선교는 마치 사제가 환자 영성체하듯 해야 한다고 합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인사나 말도 없이 오직 예수님만 가셔서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면 된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께로 부르심을 받아 파견된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와 고통이 없는 ‘나’ 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내’ 가 아니라는 말씀처럼 진정으로 우리는 나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삶을 따르고, 이 기쁜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느끼고 있습니까?
우리는 분명히 십자가 위에 피는 꽃이 사랑, 용서, 자비이며 이 꽃들과 열매가 바로 평화이기에 그곳에서 위로와 희망을 가질 수가 있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세상의 모습을 ‘새로운 창조’ 라 말씀하셨고 이것이 교회의 사명인 선교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실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새 창조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이 십자가의 법칙을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하느님의 평화와 자비를 빕니다.”(갈라 6,14-1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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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성풍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주님께 바라는 사람.’(시편 34,9 참조)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서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를 희망합니다. 그래서 행복한 삶을 위하여 이런저런 것들을 소유하고 채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지혜가 더해가면 갈수록, 자신의 공간을 채우는 수많은 것이 영원한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행복, 하느님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참 행복을 찾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에 대한 체험이야말로 영원한 행복을 이 세상에서 미리 맛보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흔두 제자를 둘씩 짝을 지어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라고 파견하십니다. 곧 일흔두 명의 제자를 ‘주님의 일꾼’으로 파견하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파견은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루카 10,3)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하느님의 뜻을 알아차리려 하지 않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한다는 것은 이리 떼 가운데 놓여 있는 양들만큼이나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오롯이 하느님께만 의탁하며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수행해야 합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루카 10,4)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하고 제자들은 걱정할 필요 없이 오로지 하느님께만 시선을 두고, 하느님께만 속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 의탁한 제자들은 그저 ‘주님의 일꾼’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루카 10,5)라고 인사를 건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주는 음식을 먹어라.”(루카 10,8)고도 말씀하십니다. 행복의 기초가 되는 평화의 인사와 음식을 서로 나누며, 한 식탁 공동체를 이루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루카 10,9)라고 선포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걸어갈 이 모든 여정을 하느님께서 이끌어주실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일러주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자신들이 이 놀라운 일을 감당할 수 있을지 스스로 걱정도 하고, 불안해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제자들은 사명을 마치고 돌아와 예수님께 그간의 체험을 말씀드리며 기뻐하였던 것입니다.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루카 10,17)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진정 기뻐해야 할 일은 그들이 이룬 놀라운 일들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 때문에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루카 10,20 참조) 이렇게 일흔두 제자는 하느님의 놀라운 손길을 체험하고, 하느님의 낙인을 몸에 지니게 된 것입니다.
일흔두 제자가 하느님의 손길을 체험하였듯이, 우리도 우리의 인생살이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체험합니다. 일흔두 제자가 하느님의 손길에 대한 체험을 예수님께 보고한 것처럼, 우리는 어떤 체험을 예수님께 말씀드릴 수 있을까요?
사람은 누구나 매일매일의 삶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체험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특별히 소중히 여길만한 체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제 인생에서의 특별한 하느님 체험은 이렇습니다.
사제 수품을 준비하며 가진 30일 피정이 그 첫 번째입니다. 한 달이라는 긴 여정을, 그것도 성 이냐시오 영성에 따라 처음 걷게 되는 피정이었기에 낯설고 두려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피정을 마치며, 제 인생의 모든 순간에 함께해 주시는 하느님에 대한 강렬한 믿음이 자리하는 선물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믿음은 본당을 비롯한 다양한 곳에서의 사제 생활 가운데의 체험이, 체험을 더욱 키워가는 힘이 되었습니다.
가톨릭 청년 성서 모임 또한 하느님의 체험을 더욱 깊이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연수 봉사자들과 연수를 준비하면서, 연수가 진행되는 가운데 연수생들의 변화를 통해서, 그리고 연수 여정 안에서 제 안에 자리하고 있는 미성숙하고 미성장한 어린아이의 모습을 발견하고 치유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손길을 펼쳐주셨습니다.
사랑의 하느님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이제 우리가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드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당신의 놀라운 손길을 우리가 체험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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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마크 맨슨의 ‘신경 끄기의 기술’이라는 책에 이런 글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당신과 결혼한 사람이 당신과 싸울 사람이고, 당신이 선택하는 꿈의 직업이 당신에게 스트레스를 줄 직업이다.”
크게 와닿는 말이었습니다. 결혼은 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본인이 그토록 원하는 결혼이어도 부부싸움 한번 없이 살고 있다는 분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었지만 그 사람 때문에 어렵고 힘든 삶을 살 때도 많습니다.
또한 꿈이 스트레스를 준다는 말에도 크게 공감됩니다. 어렸을 때부터 저의 꿈은 신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1999년 1월 28일에 그토록 꿈에 그리던 신부가 드디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원하던 길이었으니 지금까지 전혀 스트레스가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이 길이 절대 쉽지 않음을 자주 깨닫습니다.
우리의 삶 전체에서 고통과 시련은 계속되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길을 가고, 원하는 것을 얻었다고 해서 고통과 시련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코헬렛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허무로다 허무”(코헬 1,2)였습니다.
세상 삶에서 스트레스를 없애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저 예수님께서 직접 보여주셨던 모범인 겸손과 사랑의 삶을 살면서, 하느님 나라를 꿈꾸며 살아갈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해서 파견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루카 10,2)
일흔두 명은 창세기 10장에 나오는 모든 민족의 목록을 말하는 것으로, 이스라엘을 넘어서 온 세상을 향한 선교를 암시합니다. 이 일흔두 제자가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을 때 너무나 큰 행복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행복은 세상의 편안함과 안락함과 거리가 있었습니다.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로지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주님을 따른다고 해서 무조건 세상의 행복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통과 시련이 전혀 없을까요? 이것도 아닙니다. 스트레스는 어떨까요? 역시 아닙니다. 그러나 진정한 기쁨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그 뜻을 실천함으로 하늘에 우리의 이름이 기록되는 구원의 기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면서 얻는 나의 행복을 깊이 묵상하는 오늘이 되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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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Peace Maker? Peace Breaker?>
오늘 연중 제14주일의 주제는 주님의 평화 선포입니다.
오늘 첫째 독서 이사야서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예루살렘에 평화를 강물처럼 끌어들이리라. 민족들의 영화를 넘쳐흐르는 시내처럼 끌어들이리라.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러니까 이 두 말씀을 연결하면 주님께서 어딘가에 평화를 강물처럼 끌어들이시는 일에 있어서 우리는 그 평화 선포의 일꾼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질문하게 됩니다. 나는 Peace Maker(평화 조성자)인가, Peace Breaker(평화 파괴자)인가?
내가 가는 곳마다 나는 평화를 강물처럼 흘러들게 하는 자인가, 내가 가는 곳마다 나는 분란을 일으켜 평화를 파괴하는 자인가?
나는 내 마음의 평화도 지니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런 내가 어떻게 세상에 평화를 흘러들게 하고 그것도 강물처럼 흘러들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말이 맞습니다. 평화의 선포자가 되기 전에 자신이 먼저 평화의 담지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 평화의 담지자(擔持者)!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맡아 지니고 사는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먼저 인격적인 평화입니다. 아기가 어머니와 같이 있으면 그 자체로 평화롭고 어머니와 떨어지면 그 자체로 불안하여 평화가 없듯이 주님이 곧 우리의 평화인 평화입니다.
다음으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평화를 먼저 사는 평화입니다. 쉽게 말해서 평화란 다투거나 싸우지 않는 것입니다.
너 왜 그러냐고, 왜 그렇게 지지리 못났냐고, 너 왜 내 말 받아들이지 않고, 내 사랑 받아들이지 않냐고, 너 왜 나를 존중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냐고 시비 걸지 않고 그러냐고 하는 겁니다.
평화? 왜 그러냐고 하지 않고 그러냐고 하는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그 집에 평화를 빌라고 하시는데 그 집이 평화를 받아들이면 그 집은 평화가 머물러 좋고 나는 평화를 전한 사람이 되어서 기쁠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평화를 빌어주고 주님 평화를 전해줬는데 거절할 때 그것을 괘씸하게 생각하고 화가 나고 미워지고 하면 평화를 준다고 하다가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Peace Maker가 되겠다고 갔다가 Peace Breaker가 되는 겁니다.
어쨌거나 나는 주님의 평화를 줄 수 있을 만큼 평화가 있습니까? 나는 주님의 평화를 전하고픈 강한 열망과 원의가 있습니까?
내 평화가 깨질까 봐 남의 평화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닙니까? 지금 북한이나 분쟁 지역에 프란치스코처럼 평화의 사도로 갈 마음은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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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루카 10,8ㄷ)
<내가 먼저인 삶!>
오늘 복음(루카10,1-12.17-20)은 '예수님께서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의 앞서 둘씩 파견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고 하십니다.
많은 어려움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평화를 전하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일은 하느님께만 의탁할 때 가능한 일이라는 것도 일깨워주십니다.
내가 먼저 하느님의 나라인 복음이 되고, 이 복음을 너에게 전하는 일은 참으로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러나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전하는 '희망'과 제2독서가 전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 아주 쉬운 일이기도 합니다.
"보라, 내가 예루살렘에, 평화를 강물처럼 끌어들이리라. 민족들의 영화를, 넘쳐흐르는 시내처럼 끌어들이리라. 너희는 젖을 빨고 팔에 안겨 다니며, 무릎 위에서 귀염을 받으리라."(이사 66,12)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낙인을 내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갈라 6,14.17)
'복음을 전하는 일'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믿음과 희망의 결과인 성령, 내 안으로 들어오신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마태 10,20 참조)
'복음을 전하는 일'은 '예수천국불신지옥'을 외치는 일이 아니라, 내가 먼저 복음이 되고 평화가 되고 사랑이 되는 일입니다.
우리의 삶은 신덕(믿음), 망덕(희망), 애덕(사랑)의 삶인 '신망애의 삶'입니다. 이를 '향주 삼덕 또는 대신덕'이라고 하며,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덕입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1코린 13,13)
믿음과 희망 안에서 사랑인 복음이 되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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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가거라."(루카 10,3)
우리 모두
하느님의
길 위에 있는
은총의
사람들입니다.
익숙함을 떠나는
파견이 있기에
새로운 만남이
있습니다.
우리는
머무르는
존재가 아니라
떠나고
보내심 받은
사람들입니다.
세상 속으로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삶이 바로
제자들의
삶입니다.
복음 전파는
미룰 수 없는
우리들의
사명입니다.
우리의 사명은
물질과 사람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는
신뢰의 삶입니다.
신뢰의 삶은
사람의 반응에
초연한 삶입니다.
파견의 순간이
가장 아름다운
시작입니다.
내가 원하는
길이 아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향한
사랑의
여정입니다.
이 사랑의 여정은
하느님을 드러내는
겸손의
여정입니다.
자신을
내어주는
하느님의
도구가 됩니다.
하느님의 도구는
내 것이라
주장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선물로
여깁니다.
먼저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의
감사의 응답이
복음으로
드러납니다.
복음은
익숙한 것을
떠나는
신앙의 용기를
보여줍니다.
"가거라."
그 한마디면
충분합니다.
하느님의 길 위에
다시 서 있는
우리들입니다.
사랑의 시작이
있는 곳에
길이 있고
하느님의 뜻이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보내심 받은
사람들임을
기억합시다.
보내심이
가장 좋은
은총입니다.
우리는
가기만 합니다.
그 외에는
하느님께서
모두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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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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