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라 자손, 그리고 오늘 우리!
지구상에 존재하는 민족 가운데 가장 많은 외세의 침입을 겪은 나라는 이스라엘이라 합니다. 아마도 그 다음으로는 한 민족일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문화적으로 이스라엘과 우리나라는 닮은꼴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쟁기질이나 물동이를 이는 것, 또한 아기를 등에 업는 것, 자녀 명(名)에 부모의 바람을 담는 것 등이라 하겠습니다.
수많은 외세의 침략속에서 나라 잃은 민족이었지만 자주 독립을 일구어낸 끈기있는 나라입니다.
약소국이지만 열강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생존하는 공통적 특징도 지니고 있습니다.
구약성경 시편을 보면 강대국에 나라를 잃고 젊은 엘리트들은 적국에 포로로 끌려간 민족적 아픔을 고백하는 고라 자손들의 절규가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말씀이 시편 44편에 등장합니다.
특이한 모습은 기독교 역사관을 보여주는 신앙고백을 그들이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고라 자손들은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는 민족적 수치를 신앙고백으로 승화시키며 이 모든 것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담겨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44편 9절 이하에서 고라 자손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주께서 우리를 버려”
“주께서 주의 백성을 파셨다”고 노래하며 이스라엘의 현실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 근원임을 고백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끊임없이 주께서, 주께서, 라 노래합니다.
일컬어 섭리 사관적 역사 인식이라 하겠습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구약성경의 기록 특징을 단편적으로 보여줍니다.
구약성경에는 흥미로운 여러 표현들이 등장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적군을 우리 손에 넘기셨다(삼상17:47) 와 네 손에 붙이셨으니(창14:20)라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성경은 전쟁의 승패는 군사력이나 무기등의 외형적인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보여주는 고유적 표현입니다.
한편으로는 고라자손들이 처한 뼈저린 현실들의 단면을 시편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일컬어 약소국의 비애라 할까요.
고라 자손들은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고난과 압제를 기억해 주기를 탄원합니다.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우리를 구속하소서”(시44:26) 며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라 자손들의 탄원시를 보면서 개인적으로 우리 겨레의 아픈 역사의 한 장면이 오버랩되어 집니다.
그것은 바로 광해군 말기와 인조 정권 초기의 무렵입니다.
아시듯이 당시는 신흥강국인 청나라가 발흥하고 있었지만 조선의 사대부들은 어쭙잖은 의리를 내세우며 망해가는 명나라에 기대고 있었습니다.
일명 실리외교로 불리우는 광해군의 빛났던 외교 정책 가운데 하나인 명나라 파병문제입니다.
타의에 의하여 1만명이라는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 전장터로 내 몰릴 수밖에 없었던 절체절명의 순간에 강홍립 장군에게 밀지를 통하여 “시세를 판단하여 피해를 최소화하라”는 광해군의 모습은 약소국의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감각과 정세분석 능력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알려줍니다.
바야흐로 작금의 우리나라는 축소 사회 진입은 시작되었고 거스릴 수 없는 대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작은 면 단위의 시골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로서 축소사회와 초 고령화 시대 속에서 어떤 대응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을 자연스럽게 던지게 됩니다.
현실적이고 뚜렷한 방안을 찾기가 여의치 않음을 인정하면서도 두가지 단어 속에 답이 있지 않나 싶어집니다.
그것은 교회와 목회입니다. 어쩌면 원론적인 말일 수 있겠지만, 교회의 주인과 목회와 목회자를 머슴 또는 청지기로 정의한다면 주인되신 분을 신뢰하느냐 신뢰하지 않느냐의 문제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위기일수록 기본으로 돌아가라는 말처럼, 피할 수 없는 축소 사회에서 주어진 소명을 다하려면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바라야 합니다.
또한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같은 환경의 요인보다, 피난처인 하나님이 성중에 계시면 새벽에 도우시는 역사가 임하리라 믿습니다.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편 46:5)
여러분 한명 한명을 주님의 일ㅁ으로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