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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의 양식
요 6:22-27
22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서 있던 무리가 배 한 척 외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23 (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께서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 곳에 가까이 왔더라)
24 무리가 거기에 예수도 안 계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25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2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요 6:22-27 / [생명의 떡] 다음날 아침, 바다 건너편에 남아 있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 뵈려고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에 계시다가 제자들만 한 척밖에 없는 배를 타고 떠난 것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디베랴로부터 온 작은 배 몇 척이 주님이 감사기도를 드리고 군중들에게 떡을 먹이시던 곳 가까이에 닿았다. 24) 군중들은 그곳에도 예수와 제자들이 없자 배를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왔다. 25) 그들은 바다를 건너와 예수를 뵙자 `선생님, 언제 이리로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26)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아온 것은 내 이적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먹을 것을 배불리 주었기 때문이다. 27)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 애쓰지 말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 애써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려는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나를 보내셨다.'
갈릴리 호수 북단에 있는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 있어서 선교센터와 같은 역할을 하던 곳입니다. 그래서인지 기적을 경험한 무리들이 가버나움까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22-25)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예수님의 능력을 확인한 무리들은 예수님을 그들의 왕으로 세우려 했습니다. 자신들의 암울한 상황을 바꾸어줄 정치적인 메시야로 오해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 나선 그들의 노력은 집요하고 끈질겨서 가버나움에 예수님이 가셨을 것이라는 정황을 알아냅니다. 그리고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언제 가버나움에 왔냐는 그들의 질문에는 예수님을 애타게 찾던 심정과 배가 한척 밖에 없었고 예수님은 그 배에 타지를 않았는데 어떻게 가버나움까지 왔는지에 대한 여러가지 의문이 들어있습니다. 예수님을 찾는 그들의 심정은 선하고 좋은 것이지만 동기는 모든 것에 가치를 부여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는 동기가 복음적이지 못하고 영적이지 않다면 그들의 선한 노력은 오히려 예수님의 사역을 훼방할 뿐입니다. 열심도 좋고 헌신도 좋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은 열심을 내고 헌신하는 이유와 동기일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성결하고 복음적이어야 합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26-27) 예수님은 자신을 쫓아 가버나움까지 찾아온 무리들에게 가장 필요하고 적절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그것은 영적인 사람이 되라는 당부였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아무리 대단하고 훌륭한 일이라 할지라도 그 일 자체는 지나가는 하나의 사건일 뿐입니다. 사람은 또 배가 고파질 것이고 또 먹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생기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경험한 기적을 통하여 앞으로의 모든 먹는 문제, 인생의 문제에 대한 답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를 예수님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영적인 일에 관심을 가지면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소유물로 인증을 받은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드려질 흠이 없고 완전한 제물이 인을 쳤듯이, 영적인 일에 관심을 가지면,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희생 제물로 인치는 자라는 가장 복음적인 이해를 가질 수 있습니다.
적용: 예수님은 신앙심을 가장한 얄팍한 이기심을 정확히 찌르셨습니다(26). 참된 신앙의 동기는(27) 육신의 생명보다 영원한 생명에 대해 더 깊은 갈망을 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쫓고 있는지요?(참조 마 4:1-11)
폭풍이 오기 전에 모든 동물은 신경이 날카로워집니다. 폭풍을 동반하는 낮은 기압은 가스와 냄새를 배출하기 때문에 동물들이 예민한 반응을 보입니다. 폭풍이 없는 지역은 낙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없다는 말은 공기가 없다는 뜻입니다. 바람은 배를 전진시키는 원동력이 됩니다. 역경은 곧 바람과 같습니다. 파멸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도약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도약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알렉산더 벨은 청력을 잃은 아내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보청기를 연구하다 전화를 발명했습니다. 고통이 곧 악은 아닙니다.
< 설 교 >
영생 양식을 위해 일하라
요 6:22-36 / 김영규 목사
예수를 찾는 사람들
예수께서 물 위로 걸어오신 다음날입니다.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서 있던 무리가 배 한 척 외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께서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 곳에 가까이 왔더라), 무리가 거기에 예수도 안 계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22-25) 그들은 이른 아침부터 예수를 찾아 나섰습니다. 자기들이 있던 곳에 예수님이 없는 것을 알고 행적을 살폈습니다. 예수님은 어제 저녁에 제자들과 헤어져서 산으로 가셨는데? 제자들은 배로 출발하는 것을 보았고? 예수님은 어디 계시단 말인가? 수소문 끝에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찾아 왔습니다. 가버나움 회당에서(59) 예수님을 만난 그들은 너무나 반가워했습니다.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25) 아니 어제는 다른 곳에 계셨는데 어떻게 캄캄한 밤중에 여기로 오셨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기이한 행적에 계속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열심히 찾아 온 무리들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26) 너희들 또 배불리려고 왔지? 무리들은 하루 전에 오병이어의 이적을 체험하고 또 이런 이적을 기대하면서 몰려왔습니다. 이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이적이 아니라 배부름입니다. 양식을 만든 기적 자체보다도 양식에 열광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너희들 기적 때문에 온 게 아니라, 양식 때문에 왔지? 인기 가수를 따라다니는 열성 팬들이 있습니다. 그 팬들에게도 수준이 있습니다. 수준 높은 팬들은 음악성 때문에 따라다닙니다. 수준 낮은 팬은 외모 때문에 따라다닙니다. 음악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열성 팬도 수준차가 있어요. 기적 자체를 보려는 팬이 있는가 하면, 단순히 빵 때문에 열광하는 팬도 있었습니다. 기적을 따르는 사람이든 빵을 따르는 사람이든 신앙 없는 것은 마찬가집니다. 수준 낮은 추종자들 중에 빵 때문에 찾아다니는 교인들은 가장 수준 낮은 교인들입니다.
이적은 메시아의 증표입니다. 그러므로 이적을 보면 당연히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깨달았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무리들은 예수가 누구인지는 알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적만 구경하려는 무리, 또한 그만도 못한 빵을 얻으려는 무리! 그들은 예수님을 추대해서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정의롭고 진실하셔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빵 문제를 해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님이 사용하신 ‘배부른(χορταξω )’이란 단어는 짐승 떼를 먹일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배를 채우기 위해서 돌아다니는 짐승들로 보셨습니다.
이 세대 사람들이 그와 같습니다. 만일 주님이 현세적인 축복을 주시지 않고 내세의 영생만을 주신다면 과연 몇 사람이나 예수를 믿으려고 할까요? 그래서 요한 칼빈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고통 없는 육적 기쁨 때문에 복음을 열렬히 끌어안으려고 한다.” 오늘 여러분은 왜 예수를 찾아 오셨습니까? 오직 육신의 배부름 때문만은 아니겠지요? 예수님은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주님과 무리들 사이의 대화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내용을 무리들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동문서답을 계속합니다. 이것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대화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영생하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
육의 양식에 열광하는 무리들에게 주님은 영의 말씀을 얻으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십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27)
근로자가 일을 하면 품삯을 받습니다. 옛날에는 주로 곡식으로 받았습니다. 곡식도 종류가 다양합니다. 품질 좋은 고급 양식이 있고, 저급한 양식이 있습니다. 기왕에 일을 한다면 품질 좋은 양식을 받아야 합니다. 양식 중에 최고의 양식은 육의 양식이 아닙니다. 먹으면 영생하는 영혼의 양식입니다. 이런 품삯을 주는 곳에서 일하는 것이 최상입니다. 영생 양식을 주는 곳보다 더 좋은 일터는 없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청중들은 반문합니다.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28) 먹으면 영생하는 양식! 그런 좋은 양식을 주는 일터가 과연 세상에 있을까요? 누가 그런 품삯을 줄 수 있나요? 무리들은 우선 그런 종류의 일이 어떤 일인지 물었습니다. What must we do?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 이들이 물은 ‘하여야’라는 말은 複數形(τα εργα )으로 되어 있습니다. 영생 양식을 얻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되느냐는 질문입니다. 즉, 영생을 얻기 위한 업무, 과제, job을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주님은 우선 영생 얻는 일은 노력이나 job이 아니라 신앙임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29) 여기서 주님은 단수 명사를 사용하고 계십니다. 영생을 얻는 것은 인간의 노력들(works)이 아니라, 오직 한가지 일(το εργα )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일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입니다. 믿음입니다. 영생 양식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얻습니다. 노력의 산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을 만들어 내려고 헛된 노력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됩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賞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영생은 어떤 종류의 일을 해서 얻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얻습니다. 신앙은 노력이 아닙니다. 믿음입니다. 주님은 영생을 줄 수 있는 고용주가 누구냐에 초점을 맞추셨습니다. 영생을 줄 수 없는 일터에서 백날 일해 봐야 영생은 얻지 못합니다. 삼성 전자나 현대 자동차 같이 확실한 일터에서 일을 하면 품삯이 보장됩니다. 그러나 부도난 회사에서 아무리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일해 봐야 품삯이 나오지 않습니다. 차원이 다른 얘기지만 영생이 그렇습니다. 영생을 줄 수 있는 고용주에게 우선 소속이 되어야 품삯이 나옵니다. 영생을 줄 수 없는 고용주에게 고용 되어야 합니다. 성경적 표현을 빌린다면 예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자신만이 영생을 줄 수 있음을 강조하십니다.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27) 영생을 줄 수 있는 사업장이 어디 있습니까? 누가 영생을 주는 고용주입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영생을 위해서 보내시고 보증 서신 분입니다. 본문에 보세요. ‘하나님의 보내신 자’ 혹은 ‘인자’, ‘하나님의 인 치신 자’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보내시고 하나님이 보증 선 자를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덮어놓고 아무나 믿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참 신앙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요 또한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서 믿느냐 안 믿느냐에 따라서 영생 문제도 결정이 됩니다.
무슨 표적을 보고 예수를 믿는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믿으라고 했더니, 무리들이 반문합니다. 우리가 무슨 표적을 보고 당신을 믿을 수 있습니까? 당신을 믿으라고 하는데 무얼 보고 믿습니까? 유대인들은 표적주의자들입니다. 표적을 보면 믿고, 표적이 없으면 믿지 않았습니다.(고전1:22,마16:1,12:28) 유대 랍비의 교훈 중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만일 어떤 선지자가 표적(表蹟)과 기사(奇事)를 보여 준다면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는 그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30-31) 당신이 정말 영생 양식을 주시는 분이라면 그 증거를 보여주시오! 무리들은 예수님께 특별히 모세의 표적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한 메시아는 모세 같은 사람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원한 민족의 구원자입니다. 많은 기적을 행했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께 요구했습니다. 당신이 정말 구원자라면 모세 이상의 표적을 보여주시오!
여기서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요구한 이적은 바로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전승에 따르면, 양식을 만들어 주는 것이야말로 참 메시야의 표적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미드라쉬 코헬렡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첫째의 속죄자는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게 하였다.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떡을 하늘에서 비같이 내리리라’(출16:4) 이와 같이 둘째의 속죄자도 ‘땅 위에 곡식이 풍성하리로다’(시72:16) 한 말씀처럼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게 할것이다.” 또한 위경 제2바룩서 29:8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만나의 보화가 다시 높은 곳에서 내려, 그날에 사람들이 먹으리라” 무리가 예수님께 요구한 것은 바로 이런 이적입니다. 그들은 이미 보리떡 두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 성인만 5000명이나 되는 군중을 먹이신 사건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원한 것은 한 번의 이적이 아닙니다. 계속 먹여주는 이적입니다. 모세는 40년간 먹였으니 예수님도 계속 먹여 달라는 것입니다. 또한 모세는 60만 전 민족을 먹였으니 예수님도 5000 명이 아니라, 전 이스라엘 사람을 먹여 달라는 요구입니다.
예수님은 우선 이들에게 모세 시대의 이적에 대한 유대인들의 오해를 지적하셨습니다. 첫째로, 유대인들은 과거의 만나를 모세가 준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만나는 모세가 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둘째로, 그들은 그 만나를 진정한 양식인 양 오해 했습니다. 그래서 메시야가 오면 먼저 육의 양식이 풍성해 지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의 계시 문학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땅은 천배의 소산을 생산할 것이다. 포도나무는 천개의 가지가 달리고, 각 가지는 천 송이의 포도를 맺고, 한 송이는 천개의 포도가 열리고, 한 알갱이는 한 코르(약120갤론)의 포도주를 낼 것이다.”(제2바룩 29:5) 말하자면 이들은 메시아를 육의 양식 생산자로 생각했지, 영적 양식을 주어 영생을 주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32-33) 주님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참 떡이십니다. ‘하늘에서 내려’라는 말은 동명사로(ο καταβαινων )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는 자’의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한 순간 내려지는 떡이 아닙니다. 전 인류에게 계속 내려오는 떡입니다. 매일 거두어 저장해야 하는 모세 시대의 만나가 아닙니다. 한 번 마음에 모시면 영원히 영생하는, 영생의 효력이 있는 양식입니다. 유대인들은 모세만 보았지 모세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은 보지 못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육신의 생명만 보았지 영생하는 영혼의 생명은 보지 못했습니다. 이런 안목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영생 양식인 것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유대인들은 이러한 주님의 말씀에 대해서 긍정적인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34) 무슨 떡인지 모르지만 좌우간 하늘에서 거저 준다고 하니 많이 달라는 말씀입니다. 양잿물인지 설탕물인지 모르지만 많이만 주시오! 마치 수가성 여인이 생수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좌우간 많이 달라고 한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지도 못하면서 좌우간 복만 많이 달라고 하는 우리의 실정과 똑같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이제 주님은 자기 자신이 곧 영생 양식임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εγω ειμι ο αρτοσ τησ ζωησ (I am the bread of life)(35)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 여기서 ‘내가’라는 말이 강조형입니다. 바로 주님 자신이 생명의 떡입니다. 32절에는 참 떡이라고 하셨습니다. 먹어도 다시 배고파지는 가짜 떡이 아니라 영원히 배부른 떡입니다. 33절에는 하나님의 떡이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빚어 낸 떡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떡입니다. 구약의 만나는 땅에서 거둔 육신의 떡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내려온 영혼의 떡입니다. 생명의 떡(34)입니다. 먹으면 영생합니다.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35) 주님을 먹으면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습니다. 갈증이 없습니다. 만족합니다.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는다는 주님의 말씀은 유대인들의 사상과 반대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기다리면서도 육신의 양식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메시아는 육신의 양식을 주시는 분! 또한 그들은 성경 말씀을 지식이나 지혜의 차원에서 얻어먹었습니다. 그래서 밤낮 얻어먹어도 늘 결핍을 느꼈습니다. 유대인들의 지혜 문학에 보면 율법적 지식이나 지혜를 이런 식으로 표현했습니다. “나를 먹는 자는 더욱 주릴 것이요, 나를 마시는 자는 더욱 갈하리라”(시락24:21) 인간의 지혜나 지식은 얻을수록 부족을 느낍니다. 솔로몬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내 아들아 또 이것들로부터 경계를 받으라 많은 책들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느니라.”(전12:12) 신앙은 성경 지식이 아닙니다. 교리적 지식도 아닙니다. 그냥 예수님을 믿고 맡기는 겁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 자의 주인으로 마음에 모셔 들이는 겁니다. 인격적인 만남과 일치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먹어야 될 떡과 음료로 표현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주님을 먹는 겁니다. 주님을 아는 게 아닙니다. 음식을 먹으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 몸에 녹아져서 내 몸을 살리는 원동력이 됩니다. 주님을 내 마음에 모셔 들이면 내 인생이 주님께 녹아집니다. 성령이 내 마음에 오셔서 나를 지배하십니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살지 않고 주님이 살 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점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에 관한 지식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겁니다. 주님을 양식처럼 먹고 마시라고 합니다. 주님의 사상이나 교훈을 받기에 앞서, 주님의 인격을 우리 속에 받아 들여야 합니다. 신앙의 결단입니다.
삶의 변화는 지식의 영역에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신앙의 영역에서 이루어집니다. 오늘 정말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는 인생이 되고 싶으세요? 그러면 예수님을 마음에 구주로, 주인으로 모셔 들이세요. 그러면 거듭납니다. 성령이 오십니다. 영혼으로부터 새로운 인생이 됩니다. 만족한 인생으로 변합니다. 물이 포도주가 되듯이 삶이 변화됩니다. 영혼이 만족합니다. 평안합니다. 기쁨이 넘칩니다. 감사가 넘칩니다. 미래 소망이 넘칩니다. 영혼이 잘 되니 육신도 건강합니다. 물질 문제가 풀립니다. 지금까지 그런 체험을 하지 못했다면 이제 예수님을 중심에 구주로 영접하세요. 당장 삶이 변화됩니다. 거듭납니다. 새로운 인생이 시작 됩니다. 이 진정한 삶의 표적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문제는 불신앙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는 불신앙입니다. 불신앙을 극복하세요.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36)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보아 왔고, 보고 있으면서도 믿지 않았습니다. 표적을 보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계속적으로 표적을 구했습니다. 배부르게 할 육신의 양식만 찾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구원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목표가 엉뚱한 데 있기 때문입니다. 배부름 때문에 예수를 왕 삼으려고 쫓아다녔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썩어질 육의 양식 공급자가 아닙니다. 영생 양식의 공급자이십니다. 육의 양식 구하는 열심의 100분의 1이라도 주님께 영생 얻는데 투자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영생 양식을 위해서 일해 보라고 하십니다. 영생을 얻는 일은 노동이 아니라 신앙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믿는 것입니다. 중심에서 예수가 곧 생명이심을 알고 영접하세요. 그런 사람은 현세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고, 죽어서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뜻이요,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할렐루야!
광야에 나온 무리
요 6:22-27 / 손상률 목사
한번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찾아와서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하고 물었습니다(마 11:3). 그 때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향해서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라고 하였습니다(마 11:7).
광야의 선지자 요한은 스스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라 하며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날들을 요한과 함께 하며 듣고 배운 사람들이 막상 주인공 되는 예수님 앞에서 오실 그이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한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할 일도 없이 광야로 많이 몰려다니곤 하였습니다. 갈릴리 바다 근처 벳세다 광야에서 오병이어의 이적을 베푸실 때도 오천 명이 넘는 장정들과 많은 부녀자들과 아이들이 몰려와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때의 상황과 분위기에 따라서 휩쓸려 다니는 사람이었고, 뚜렷한 이유나 목적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떡을 먹고 배부른 군중이 예수님을 임금삼자고 들뜨게 하다가도(요 6:15), 잠시 후에는 썰물 빠지듯이 모두가 예수님을 떠나가기도 하였습니다(요 6:66).
이와 같은 현상은 오늘날 지상교회의 불완전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많은 무리가 운집하여도 그들이 추구하는 목적이나 욕구가 다르기 때문에 “무엇을 위하여 나왔느냐?” 고 물으신다면 대답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여기 광야에 나온 무리들의 성향을 보면서 우리들의 신앙상태를 점검할 수 있기 바랍니다.
I. 떡을 먹기 위해서 나온 무리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과 물고기로 많은 사람을 배불리 먹게 하신 후 제자들과 함께 그곳을 떠나 가버나움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무리들은 전날 떡을 먹었던 그 장소로 또 나가서 예수님을 찾았으나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수소문하여 가버나움까지 와서 예수님을 보는 순간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하고 반갑게 인사하였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고 하였습니다(26절).
(1) 배고픈 사람들
우리말에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든지, ‘수염이 석자 오치라도 먹어야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곧 아무리 좋은 구경도 배가 고프면 못한다는 뜻이며, 아무리 지체 높은 벼슬아치도 먹는 문제가 해결 안 되면 곤란하다는 뜻입니다. 가난한 시절을 살아온 사람은 배고픈 설움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잘 압니다.
우리 사회가 물질문명의 발달로 인하여 배고픈 고통을 모르기 때문에 옛날 어른들이 체험한 「보릿고개」나 「초근목피」 또는 「조반석죽」같은 말의 의미를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도 로마의 식민지하에 있어서 국가적으로는 자주독립을 희구했지만, 개인적으로는 모두가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어서 굶주린 배를 채우는 일이 가장 급선무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찾아 나온 무리들의 사정을 잘 아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당장 배를 채울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마가복음 8:1-2에 “그 즈음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고 하였습니다.
(2) 물질적인 가치관
영혼의 가치나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갖지 못한 사람은 세상 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가치를 부여합니다. 유물론적 철학의 이론을 정립한 칼 막스(K. Marx)나 엥겔스(Engels) 같은 사람은 「배고픈 사람에게 빵을 주라」는 논리로 한 때 국제공산주의 선풍을 일으켰습니다.
사도 바울은 많은 사람이 자기의 배를 하나님으로 삼고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여기며 땅에 일만 생각한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도 세상나라에서는 정치, 경제, 사회, 교육 심지어 예술이나 문화까지도 그 추구하는 목적이 경제문제로 귀결됩니다.
이와 같은 배금주의 또는 물질만능주의의 사고가 팽배하여 종교의 이상으로까지 파급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교회로 찾아 나오고 입으로 주님을 부르는 많은 사람들이 물질적인 번영과 세상 적으로 형통케 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것입니다. 여기에 일부 교회들은 전도된 가치관에 덩달아 교회를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기관으로 오도하고 있습니다.
(3) 물질과 생명의 관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산상보훈을 강론하시면서 천국시민이 가지는 최고의 가치가 무엇인가를 일러 주셨습니다(마 5:1-12). 한편으로는 육신을 가지고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 현세적인 요건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에는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대목이 있습니다(마 6:11). 성경은 성도가 육신생활에 필요한 물질을 외면하도록 가르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양식을 값없이 먹지 않기 위해 손으로 수고하며 주야로 일한다고 했으며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하였습니다(살후 3:8-10). 그렇지만 물질이 생명보다 우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재물이 사람의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이 아님을 확실하게 일러주셨습니다. 마태복음 6:25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고 하였습니다.
Ⅱ. 표적을 보기 위하여 나온 무리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6:2에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움직이시는 곳에는 언제나 많은 무리들이 따랐습니다(눅 19:3). 그들 중에는 예수님의 교훈에 감화되고 매력을 느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마 7:28-29). 그러나 대부분은 주님이 행하시는 이적에 경이감을 가지고 기이히 여겼으며 그중에도 신체적인 악조건이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께 나아와서 병 고침을 받고자 소원하였습니다(마 9:21).
(1) 표적을 구하는 세대
사도 바울은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하였습니다(고전 1:22). 마태복음 12:38-39에 보면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표적을 좋아하였습니다. 그들은 구약시대 저희 조상들의 역사 가운데 나타났던 하나님의 신비로운 능력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고전 10:1-4). 그런 전통 때문에 예수님에게도 하늘로부터 내려온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마 16:1). 예수님께서도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였습니다(마 11:5).
(2) 표적이 주는 유익
예수님께서는 그가 행하시는 표적들을 통하여 자신이 메시야 이심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마 11:5). 또 초대교회 성령 받은 사도들의 행적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표적들도 그것을 통하여 성령의 다양한 은사와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고전 12:4-7).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내어보내실 때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고 하였습니다(막 16:17-18). 이 말씀대로 사도들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여러 가지 표적을 행하며 세계 도처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오늘도 성령이 역사하는 교회에서 여러 가지 은사와 표적이 나타나곤 하는데 이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또 신실한 성도들은 성령이 들어 쓰시는 도구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자기의 목적을 위해서 성령의 능력과 신비로운 은사를 행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3) 표적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게 합니다.
평소 예수님께서 가장 많은 표적을 보이셨던 곳의 사람들이 주님을 믿지 않고 거부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1:20-21에 보면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가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찐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으로 보아 이적 그 자체가 믿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표적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수단이라고 보아야 마땅합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22-24).
하나님의 교회가 지니는 가장 큰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며 이로 말미암아 죄인이 회개하고 구원받게 되는 것이 최상의 표적입니다.
Ⅲ. 영생을 위하여 나온 무리입니다.
27절에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광야로 나온 자들은 경위야 어떻든지 결국 예수를 만난 사람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만나서 육신의 양식인 떡도 먹었고 신비로운 표적도 본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정도로 광야에 나온 목적을 이루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곳에 오신 예수를 붙들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1-12에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1) 영생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떡을 먹고 표적도 보고 한 때는 예수님을 임금으로 옹립하자고 들떠 있던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이 그냥 돌아가 버렸습니다. 요한복음 6:67에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었습니다. 68절에는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는 제대로 된 대답입니다. 똑같은 상황 아래서도 제자들은 영생의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광야에 나온 목적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보리떡과 물고기로 세상적인 양식을 얻었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영원히 사는 생명의 양식을 얻은 것입니다. 신명기 8:3에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2) 신앙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나의 구주라는 사실을 고백하게 됩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과 우리에게 구원을 얻게 하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신앙을 고백하게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제자들은 빈들에서 천국시민의 특권인 상상보훈을 들을 때나, 오병이어의 신비를 체험하는 이적의 현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인하게 되었고, 이 사실을 시인하며 고백하였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마 16:16).
어느 때나 은혜 받은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사람은 이와 같은 고백을 하게 됩니다. 오랜 세월 교회생활을 통하여 보고 듣고 아는 것은 많아도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냥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 예레미야와 같은 사람으로 가볍게 생각합니다.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갈지라도 예수를 만나고 그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확신을 가진 것이야말로 최상의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확인한 사람은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신앙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행 4:12).
(3) 자기의 사명을 인식하게 됩니다.
수가성 여인은 우물가에서 생수의 주인공이신 예수를 발견한 후 물동이를 내버리고 마을로 내려가서 만나는 사람에게 “와 보라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하며 선전하였습니다(요 4:29). 나다나엘은 친구 빌립의 손에 억지로 끌려나왔지만 예수를 보는 순간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하고 고백하였습니다. 그 후로 그는 하늘이 열리는 환상과 함께 더 큰일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요 1:46-51).
이런 경우는 매우 소수의 사람에 한정된 것입니다. 광야에 나온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이적을 보았고, 떡으로 배를 채우며 기뻐했지만 아무런 결과 없이 돌아갔습니다. 예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보면서도 그의 메시야적 능력을 몰랐으며 오병이어로 배불리 먹고도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을 외면하였습니다. 예수가 구세주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기에 신앙고백이 안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영생의 말씀이 계시오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하고 고백한 사람들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았습니다. “가서 복음을 전하라”(마 28:18-20)고 하시는 주님의 분부를 받들었습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요 21:15)는 명령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를 만나 신앙고백을 하고 자기 사명에 충실 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눅 12:32).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
요 6:22-36 / 최승윤 목사
요한복음 6:26절에서 29절까지의 말씀을 다시 읽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를 믿는다는 것과 예수를 통해서 단지 자신의 유익, 자신의 만족을 추구하는 종교생활과의 뚜렷한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해서 간구해야 하는가? 기도의 근본 동기와 목적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함께 생각하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고 계시듯이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은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갖고 약 25000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을 먹이셨습니다. 그 놀라운 경험을 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 다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무엇 때문에 자신을 찾아 다니는지를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만나자 마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이 나를 찾아 다니는 것은 내가 행한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가요?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다니는 근본 동기는 표적을 통해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 다닌 것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표적과 그 표적을 행하신 예수님께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의 결과, 표적을 통해서 얻게 될 유익에만 관심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제사에는 관심이 없고 제삿밥에만 관심이 있다는 말과 동일한 것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집요하게 자신들의 유익에 집착하고 있는 지를 보십시오. 29절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곧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을 하시니까” 그들은 곧 바로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얼마 전에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았으면서도 다시 표적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말은 “만일 당신이 메시야이신 것을 우리가 믿기를 원하신다면 우리에게 더 많은 표적을 보여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뜻입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광야 40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만나를 먹었던 것처럼 우리들에게도 날마다 필요한 음식 문제를 해결해 주십시오.” 본문 말씀에는 그런 구절이 없지만 “당신이 우리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면 우리가 당신을 믿겠습니다” 이런 뜻으로 그들은 예수님께 표적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보지 않았습니까? 이번 문제만 해결해 주시면 내가 예수를 믿겠습니까? 이번 시험만 잘 보게 해주시면, 나에게 직장만 허락해 주시면 신앙생활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번에 제 기도만 들어주시면 내가 교회를 열심히 다니겠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요구들은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요구하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의 삶을 어떻게 인도해 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의 기도를 단 한 번도 들어주신 적이 없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구원의 은총을 허락해 주신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신기한 능력으로, 풍성하신 사랑으로 저와 여러분들의 삶에 간섭하신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까?
아닙니다. 돌이켜 보면, 우리들 인생의 구비구비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드리는 수많은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뿐만아니라 우리가 원하던 것을 들어주셨으면 큰 낭패를 당했을 뻔 했는데 그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은 것이 천만 다행인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예수님께 요구하고 있습니다. “표적을 내게 보여주십시오. 지금 내가 당하는 어려움을 해결해 주십시오. 날마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음식문제를 해결해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한끼도 굶기지 않고 만나를 먹여 주셨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지금도 그런 기적을 행하셔서 나의 배고품, 나의 어려움, 내가 힘들어 하는 문제를 한꺼번에 확 풀어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시면 내가 하나님을 믿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무엇을 위해서 기도하고 계십니까? 기도를 통해서 무엇을 얻기를 바라고 계십니까? 모든 일이 잘 되면 기도합니까? 대부분의 경우 기도하지 않습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기도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견딜만 하면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를 하기 보다는 이런 저런 구상을 하고, 이렇게 저렇게 알아보고,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노력합니다. 기도를 하더라도 건성으로 하던지, 맨 마지막에 “기도나 하지” 그런 생각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다가 막다른 골목에 들어가면 그제서야 하나님께 나와서 울면서 하소연합니다. “하나님!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제가 잘못했으니 이번만 제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이번만 제 문제를 해결해 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겠습니다”
여러분, 지난 주일에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린 것을 기억하고 계시나요? 하나님께서는 완전히 깨지고 황폐해진 이스라엘을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이스라엘에게 일어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단순히 기도해야 한다는 것인가요?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기도해야 한다”는 말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무너지게 되었는지, 이스라엘이 무엇 때문에 황폐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깨달음, 반성과 돌이킴이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성과 돌이킴의 근본 목적은 하나님을 다시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무시하고 살았던 하나님, 그 동안 잊고 살았던 하나님을 다시 삶의 중심으로 모셔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와 같은 근본적인 돌이킴 없이 단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유익만을 추구하고 산다면 거기에는 아무리 거룩한 단어를 사용하고, 거룩한 동기와 그럴듯한 명분을 내건다고 하여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것은 단지 자신의 유익과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께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되는 그 순간, 하나님을 쉽게 떠나게 될 것입니다. 삶이 안정되고, 형편이 피고, 모든 것이 넉넉해지면 하나님을 또 다시 무시하고, 잊어버리고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을 예수께서 주시는 떡을 먹어서 배불렀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가 바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요, 영원한 생명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명확하게 하지 아니하면 우리가 드리는 기도, 우리들의 경건생활도, 우리들의 섬김과 봉사와 헌신도 결국 우리들의 만족과 유익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께 투자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구약의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끊임 없이 외쳤던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 아니었습니까?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것은 단지 그들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우습게 여기고 떠나버렸기 때문에 “돌아오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합 왕의 시대처럼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완전히 타락한 시대에는 그런 모습이 완전히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선왕들, 아하스나 히스기야가 다스렸던 그 시대 조차도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참된 경건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 수많은 제물을 드렸습니다. 종교적인 열정을 갖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찌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니리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적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고 하셨습니다.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경건과,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로움을 만들어가지 못한다면 하나님께 드리는 수많은 기도에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것은 결국 저와 여러분들의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무시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외면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원하시는 뜻과 목적을 내 것으로 삼아 그것을 이루어가는 일상의 삶 속에서 참된 영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찾고 구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썩어질 양식을 얻기 위해서 입니까? 아니면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 자신입니까? 이 땅 위에 살면서 필요한 것을 구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세상 것은 모두 썩어질 것이니 이 세상 것은 그 어떤 것도 기도제목이 될 수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필요를 아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연약과 부족과 모자라는 것을 알고 계시고, 그것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찾는 목적이 단지 썩어질 것, 이 세상 것만이라면 근본 목적과 동기가 잘못된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대인들처럼 예수님을 그런 생각에서 믿는 것이라면 우리들이 드리는 수많은 기도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이 되겠습니까? 저와 여러분들이 단지 우리의 욕심과 욕망과 불안과 어려움만을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고 구한다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게 되는 그 순간, 더 이상 예수를, 생명의 떡이신 예수를 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들에게는 이 세상의 것은 많이 갖게 될지도 모르지만 참 생명,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여러분 안에 없다면 여러분들은 갈급함과 목마름으로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생명이 없기에 한끼에 700불-800불하는 음식을 먹고, 수 천 불하는 옷을 입고, 수 백 만불 하는 집에 살고, 수 십 만불하는 차를 몰고 다닌다고 하더라도 영혼의 곤고함과 빈궁함은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돈이나 물질을 통해서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기를 원한다면 결코 그것을 통해서 만족감, 행복감은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늘 부족하고, 늘 아쉽고, 늘 불안하게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만약 우리들의 관심이 오직 우리들의 몸이라면, 외적인 미모가 숭배의 대상이 된다면 늘 자기 자신을 추하게 느끼면서 평생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성형을 하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합니까? 예뻐지기 위해서, 예쁘게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역으로 이야기하면 자신의 외모에 대해서 전혀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힘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약한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힘을 숭배하는 것이요, 지성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똑똑하게 보이고 싶어하는 그 욕망에 사로 잡혀 있기에 자신의 어리석음이 언제 드러날 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여서 살게 됩니다. 문제는 그것이 선하냐? 악하냐?의 문제가 아니라 이 세상 것들이 우리들을 서서히 잠식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들의 영적인 생명을 질식시켜서 살았으나 죽은 자와 같이 만들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불안한 것을 싫어합니다.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불철주야 애를 씁니다. 늘 상 무엇을 갈망하는 욕구불만 가운데 살아갑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탐욕에 사로 잡혀서, 자신을 숭배하면서 살아갑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와 이 시대의 문화가 디폴트 세팅으로 우리에게 준 것들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사로 잡힌 사람들 안에 근본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들입니다. 여기서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오직 생명의 떡이신 예수 안에 거할 때 그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를 찾고 구할 때 우리들의 무의식 안에 도사리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의 실체를 똑똑하게 보게 될 것입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먹고 마실 때 우리 안에 있는 어두움의 실체가 우리를 집어 삼키지 못하도록 거부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을 가진다고 하여도 생명의 떡이신 예수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은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잃어도 생명의 주이신 예수를 얻으면 모든 것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를 올바로 알지 아니하면 내가 하는 모든 것이 도리어 하나님을 거부하고 나아가는 악행이 될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의지하여 나의 만족과 유익만을 추구하는 세상 사람들보다 더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직 생명의 떡이신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요, 그 예수를 참되게 믿을 때만이 우리에게 참된 평안과 위로와 만족이 있을 것입니다. 세상이 결코 줄 수 없는 하늘의 위로, 하늘의 평안을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네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신 이 약속의 말씀이 날마다, 매 순간 마다 우리 안에 이루어질 수 있도록 이 한 주간 동안 예수님을 찾고 구하기 위해서 지성소로 날마다 나아가기를 힘쓰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배고픈 심령에게
요 6:22-36 / 박조준 목사
요한복음 6장 첫 부분에는 예수님이 다베랴 바닷가에서 보리떡 다섯 덩이와 생선 두 마리로 장정 만 5천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배불리 먹이시고 열두 바구니를 남기신 사실이 있습니다. 그 때 거기 에 있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을 보고 이 사람이야말로 세상에 오실 바로 그 선지자 라 고 하면서 억지로라도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바다 건너편으로 보내고 자신은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보이지 않자 여기저기 찾아다녔습니다. 그들은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가서 바다 건너편에서 예수님을 만나 뵙고 얼마나 반가워했는지 모릅니다. 선생님, 언제 여기 오셨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선생님을 찾아다녔는지 아 세요? 이 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신 말씀이 26∼27절에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 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습니다. 육신의 떡을 먹고 열광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떡에 대해서 말씀하심으로 저희의 눈을 여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중에 많은 표적을 행 하셨는데, 왜 표적을 행하셨습니까?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 위해서였습니까? 아닙니다. 사람들이 표 적을 봄으로써 믿음으로 인도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떡을 먹고 배가 불러 이런 이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임금님으로 모시면 식량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들은 표적을 통해서 예수님을 피상적으로만 보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을 실망시킨 것입니 다. 사실 이런 사람들은 지난 밤에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가신 이야기나 해주면 충분히 놀랄 것이 고, 호기심이 만족되었을 것입니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크리소스톰은 사람들은 이렇게 현실생활에만 집착해 있다 고 말했습니다. 전에 선지자 이사야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너희 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그렇습 니다. 사람들은 다 배고파합니다. 그런데 그 배고픔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육신적 인 배고픔이요, 다른 하나는 심령의 배고픔입니다. 육신적인 배고픔은 먹을 양식을 주어 먹게 하면 곧 배가 불러 만족해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육신의 배만 채운다고 만족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 이 짐승과 사람의 다른 점입니다. 많은 수입으로 높은 수준의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당신은 만족하시지요? 라고 물어보면 그가 뭐라고 대답할까요. 남이 따를 수 없을 정도의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당신은 정말 만족하십니까? 라고 물으면 그는 뭐라고 대답할까요. 밤낮 유흥 가를 헤매며 육신의 향락을 찾는 젊은이에게 이만하면 부족함 없이 되었습니까? 라고 물으면 그는 무엇이라고 대답할까요? 옛날 예수님 당시의 사람이나 오늘 20세기 문명의 시대 사람이나 한 가지 공통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나 다 배고파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옛날 사람이나 오늘의 사람이나 마 찬가지로 배고픔을 해결하지 못하고 번번이 실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세상의 물질 로 육신의 배고픔은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심령의 배고픔은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짐승은 물 질로만 채워주면 배불러합니다. 다른 고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짐승은 본능대로 살고, 본능을 충 족시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물질만으로는 심령의 배고픔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솔로몬을 보세요. 그는 일찍이 세상에서 산 어떤 사람보다 더 많은 재산과 지혜와 명성과 권력을 한 몸에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 영광의 극치를 말씀하실 때 솔로몬의 영화 라고 하실 정도로 그는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물질적인 것, 세상적인 것을 다 누린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영혼의 배고픔을 채워주지는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전도서 1장 2절에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세상의 모든 것은 바람을 잡는 것 같다고 했습니 다. 세상에서 행운아라고 말하는 괴테의 고백을 들어보셨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불행을 모르고 산 사람이라고 합니다. 사실 나는 세상의 물질적인 조건이나 육신의 환경은 누구보다도 좋 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내 평생을 돌이켜볼 때 정말 나는 만족하다, 나는 행복하다 고 나 스스로 생각해 본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인간에게는 물질만 가지고 만족할 수 없는 배고픔이 여전히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의 전적인 관심은 물질적인 만족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을 꼬집 었습니다. 그들은 뜻밖에 값없이 넉넉한 음식을 받았고 또 더 원했습니다. 사람의 욕심은 땅보다 더 두텁다 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입니다. 세상의 물질을 가지고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은 하 나도 없습니다. 사람은 짐승처럼 물질로만 된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심령이 배부름을 얻기 전에는 육신적으로 배가 불러도 여전히 만족하지 않은 상태에 있습 니다. 배고파 우는 아기에게 사탕을 주면 잠시 울음을 멈춥니다. 그러나 또 웁니다. 배고파 우는 아기에게는 젖을 주어야 합니다. 우리 심령의 배고픔을 채워줄 수 있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뿐입니 다. 이사야 55장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 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고 말씀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예수님이 사마리아 지방을 지나가시다가 수가라는 동네 우물가에서 어떤 여인을 만났습니다. 알고 보니 그 여자는 심령의 목이 말라 이리저리 헤매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을 향해 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십니까?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 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나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이 물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야곱의 우물에서 긷는 물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 물질적인 것, 세상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얻으면 얻을수 록 더 얻고 싶고, 누리면 누릴수록 더 누리고 싶어지지 배부름이 없습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사실 수가성 여인도 육신의 쾌락을 누리기 위해서 이 남자 저 남자를 찾아다니다 보니까 남자를 다섯이 나 바꿨고, 지금도 남의 남편과 살고 있는 그런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여전히 목이 말 랐고 배가 고팠습니다. 마실 물이 없이, 먹을 양식이 없이 우리의 육신이 살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의 심령에는 생명의 물, 생명의 양식이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심령의 배고픔을 채워주실 수 있는 생명의 양식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35 절을 보세요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 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간에게 참생명을 줄 수 있고, 더욱 풍성 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 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오늘 이 시간도 우리를 향하여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 썩는 양식, 참만족을 주지 못하는 세상 것을 위해 살지 말고 썩지 않게 하는 양식, 영생, 그리고 참만족을 주 는 생명의 양식을 위해서 일합시다. 27절 하반절을 보세요.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 라. 이 말씀에도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어떤 확증을 할 때 친필로 서명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 동양에서는 인, 도장을 사용합니다. 어떤 중요한 문서에도 모든 것을 도장으로 확증합 니다. 도장이 찍혀야만 그 문서가 실제적으로 효력을 가지게 됩니다. 도장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어떤 문서라도 도장이 찍히지 않은 것은 법적인 효력을 나타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인자는 아버 지 하나님이 인치신 자니라 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영원한 굶주림을 만 족시킬 수 있는 바로 그 하나님에 의해서 인치심을 받았으며,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진리인 것입니 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보는 사람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며,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하나님을 따르 는 것이며,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심령이 굶주려 만족을 얻기 위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구했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지쳐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얻고 비로소 만족을 얻은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 까? 심령에 만족을 주지 못하는, 단순한 세상적인 것의 번영은 오히려 고통만 더할 뿐입니다.
배고 픈 내 심령을 어디서 채웁니까? 참만족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영접할 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때, 내 심령이 참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윗 은 고백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참으로 만족합니다)… 내 잔 이 넘치나이다. 이것은 옛날 다윗의 고백만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 예수 그리 스도와 바른 관계를 맺을 때 이와 같은 만족한 삶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고백 은 사실입니다. 하나님이여, 당신은 당신을 위하여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당신의 품에 안 기기 전에는 참만족도 참평안도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겉으로 보면 물질입니다. 생리적 으로 보면 짐승과 별로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불멸의 영혼이 있어서 이 영혼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전에는 배고픔을 면할 수 없습니 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보내신 생명의 떡입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생명의 떡입니다. 예 수님께서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 말씀하셨을 때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을 통한 비유로 사용하셨던 것 이 분명합니다. 떡은 생명을 위해서 필수적입니다. 사람은 떡이 없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 로 내가 생명의 떡이다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사람이 죽고 사는 것 이 달린 존재라고 주장하신 것입니다. 주님 없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세상의 것을 다 얻어도 내 영혼을 잃는다면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그러면 무슨 소득이 있습니까? 사실 예수님 없 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도 친히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 음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없는 심령은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떡은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사람에 따라서 먹는 것이 조금씩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단 것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생선을 먹어서는 안됩니다. 어떤 사람은 육식을 전혀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채식만을 합니다. 그러나 떡은 누구나 먹어야합니다.여기서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떡은 우리가 명절 때나 아니면 특별한 날에 간식으로 만들어 먹는 그런 떡 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말에는 밥 위에 떡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떡을 간식으로 먹는 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일상적으로 떡을 주식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말로는 떡 이라고 번역하기보다는 차라리 밥 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우리에게 더 생생한 느낌을 줄 것입니 다. 그래서 영어에서는 이 말을 그들의 식단에서 우리의 밥에 해당하는 빵 (bread)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고기를 먹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생선을 먹지 못하는 사람이 있지만 밥은 누구나 먹고 또한 먹 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의 필요에 다 맞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구주십니다. 유식한 사람에게도, 무식한 사람에게도, 권좌에 앉은 권력가에게도, 아주 평범한 사람에게도, 돈이 많은 부자에게도, 가난한 사람에게도, 젊은이에 게도, 노인에게도, 누구에게나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아시고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 키는 방법까지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떡은 매일 먹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가운데도 오늘날 우리에 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여기 오늘날 이라는 말과 일용할 이라는 말에 강조점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그러한 간구를 반복적으로 해야한다는 개념을 두 번이나 나타내 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왜 중요합니까? 여러 해 동안 성경학자들이 주기도문을 주석하면서 일용할 이라고 번역된 헬라어의 정확한 뜻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주기도문에서만 이 말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최근에 학자들이 애굽의 파피루 스 파편을 발견했는데 그것에서 이 말의 바른 의미를 발견하는 데 큰 도움을 얻게 되었습니다. 일 용할 이라는 말은 매일 정해진 분량 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몸을 돌보십니다. 불행한 것은 기독교에서 영적인 것만 중요시하고 육신적인 것 은 천시한 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른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몸을 아주 중요 시하는 유일한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뿐만 아니라 몸도 주셨고, 영혼의 구속 뿐 아니라 몸의 구속도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살아 가는 데 필요한 것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더구나 떡은 우리를 자라게 합니다. 우리 의 심령이 자라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떡을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떡은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먹는 떡이 아니고, 좀더 고차원적인 의미로 하는 말씀입니다. 생명의 떡 이라고 했는데 그 생명이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른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과의 바른 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사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었는데 이것을 연결하는 관계를 맺는 것은 사람의 지식이나 노력이나 재물이나 무슨 공으로 되는 것이 아 닙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아니고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과 새롭고 바른 관계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 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생명의 떡입니다.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참된 생명의 시작도, 지속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 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배고픈 우리의 심령이 배부름을 얻게 되고, 불안한 심령이 평안을 얻게 되고, 주린 심령이 만족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때 일어나는 두 가지 현상이 있습니다. 인생의 새로운 만 족을 얻는 것과 인생의 끝날이 와도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축복을 어떻게 얻 을 수 있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에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 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하였습니다. 이사야 55장에서도 너희는 돈 없이 값없이 와서 라고 말씀 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돈 없이, 값 없이 라는 말은 무엇도 가지지 말고, 내세우지 말고, 자 랑하지 말고, 그저 빈 손 들고 주님께 오기만 하면, 몸이 아니라 마음이 주님께 오면 얻을 수 있다 는 것입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목마른 사람은 누구나 나아오기만 하면 얼마든지 주시기로 준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아오는 사람 누구에게나 은혜를 베푸십니다. 인종의 차별 이 없습니다. 유무색의 구별이 없습니다. 빈부를 가리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나아오기만 하면 이 귀한 선물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가셨을 때 두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는 삭개오라는 사람이요, 다른 하나는 바디매오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삭개오는 그 당시 세리장으로서 부정한 방법으로 축재 를 하였지만 어쨌든 부자였습니다. 사회적으로 빈축의 대상은 되었지만 어쨌든 지위가 있는 사람이 었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돈 한푼 없는 가난한 거지였고, 앞을 보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이요, 사회적 지위 같은 것은 말도 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두 사람을 보실 때 부자와 거지라는 겉모습으로 보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생의 환멸을 느끼고 있는, 배고파하는 심령의 속사람을 보았습니다. 거지 바디매오만 배고픈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자 삭개오도 그 심령 이 굶주려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두 사람에게 똑같이 은혜를 주시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셨습 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다 만족했고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예수님이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고 학벌 있는 사람에게만 생명의 떡을 주신다면 우리는 다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누구든지 배고픈 것을 알고 주님께 오기만 하면 심령에 배부름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 주님께서 배고픈 우리 심령에 만족함을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생명의 떡을 먹어라
요 6:22-59 / 조상호 목사
중국 한나라의 선제라는 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 서북쪽에 살고 있던 티베트계 유목민 강(姜)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한나라 군대가 대패하여, 금성 일대가 반란군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황급해진 선제왕은 경험이 많고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한 백전노장 조충국 장군을 불러 물었습니다. “장군, 장군이 이번 반란군을 토벌한다고 하면 어떤 전략을 쓰겠소? 또 병력은 얼마나 있어야 반란군을 토벌할 수 있겠소?” 이에 노장군 조충국은 다음과 같이 대답을 하였습니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입니다. 백번 듣는 것 보다 한 번 실제로 보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뜻입니다. 모름지기 군사나 전투에 관해서는 실제 현장을 보지 않고서는 계획이나 규모를 제대로 세울 수가 없습니다. 바라건대 현장에 직접 가서 두 눈으로 살펴 본 뒤, 지도를 펼쳐 놓고 작전을 세웠으면 좋겠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선제왕은 조충국 장군을 반란군 주둔지역인 금성으로 보냈습니다. 금성지역으로 파송된 조충국 장군은 그곳의 지형을 자세하게 정탐한 후, 한 가지 작전을 세웠습니다. 금성지역에 기병이 아닌 보병 1만 명의 병사들의 군복을 다 벗게 하고 농사꾼 복장으로 갈아입게 하여 농사꾼으로 변장시켰습니다. 그리고 사방으로 흩어져 농사를 짓게 했습니다. 물론 조충국 장군 자신도 농사꾼으로 변장한 후 현장에서 무려 1년 동안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열심히 농사를 지었는지 반란군들은 농사꾼으로 변장한 한나라 군사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상태로 1년이 지났을 때, 마침내 조충국 장군은 공격 명령을 내렸고, 농사꾼으로 변장한 한나라의 병사들은 사방에서 일어나 순식간에 반란군들을 진압하고 말았습니다. 그 토벌작전에서 한나라 병사나 반란군들의 인명 피해는 거의 없었습니다. 결국 그의 작전은 보기 좋게 맞아 떨어진 것입니다. 만약 조충국 장군이 대궐에서 반란군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만 하고 대군을 일으켜 반란군들의 토벌을 감행했더라면, 쉽게 반란군을 제압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약 한나라 군대가 반란군 진압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한나라 군대의 피해 또한 엄청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백문이 불여일견임을 알았던 조충국 장군은 참으로 지혜롭게 반란군을 진압했던 것입니다. 그 때부터 보는 것의 주요성을 언급할 때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말은 강조되고 있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 즉 백번 듣는 것보다 실제로 한번 보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은 확실히 맞습니다. 인간의 청력에 비해 시력의 효과가 훨씬 뛰어납니다. 그래서 요즈음은 가능하면 그냥 말로만 교육하지 않습니다. 귀로 듣게 하고 동시에 눈으로 보게 하고, 또 생각하게 하는 시청각 교육이 현대 교육의 특징입니다.
시청각 교육의 원조이신 예수님
그런데 우리의 예수님께서는 시청각 교육의 원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2,000여 년 전에 “백문이 불여일견” 임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시청각 교육을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본다면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자 물을 포도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요한복음 2장 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여기에서 이 사건을 표적, 영어로 Sign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표적, Sign이라는 말이 의도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숨은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잘 모르겠지만 과거에는 여자가 남자에게 넥타이 선물을 잘 하였습니다. 넥타이 선물에 무슨 의미가 들어 있습니까? “당신은 내 남자예요.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하며 남자를 옭아매듯이 꽉 잡아 두겠다는 것입니다. 넥타이를 통해서 여자의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또 과거 이성 간에 손수건 선물을 주곤 받곤 했었는데, 손수건에 무슨 뜻이 있습니까? 헤어지자는 뜻이 있습니다. 더 이상 교제하지 말자는 뜻입니다. 그런데 눈치 없는 여자가 남자로부터 손수건을 선물 받고 “고마워요. 제가 손수건이 필요했는데. 어떻게 제 마음을 그렇게 잘 알고 손수건 선물을 생각 하셨어요”라고 감동하면 문제 있는 여자입니다. 또 여자가 남자에게 밤중에 전화하여 “저, 잠이 안와요 그래서 전화 했어요”라고 말했다면 무슨 의미입니까? 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보고 싶어서 잠이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눈치 없는 남자는 “야, 너는 잠도 없냐? 이 늦은 시간에 전화하면 어떡하냐? 나 잠 좀 자자. 단잠 다 깨어놓았네”라고 하면서 투덜거리는 남자는 어떤 남자입니까? 여자 마음 아프게 하는 남자입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말로 그러한 남자는 ‘얼빵한 남자’입니다. 그러한 남자는 장가가기 쉽지 않습니다. 어떤 여자가 ‘얼빵한 남자’를 좋아하겠습니까? 상대방 말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상대방 행동의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5병2어의 사건에는 의미가 있다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은 하나하나 나름대로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사건을 사건 자체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수박 겉핥기식으로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메시지를 놓쳐 버릴 수 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사건은 다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지난주에 5병2어의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의 한 끼 식사 밖에 되지 않는 5병2어, 즉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를 가지고 성인 남자 5000명을, 그러니까 어림잡아 계산해도 어린 아이들과 여자들을 합하면 20,000여 명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사람들을 먹이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로 하여금 먹고 남은 부스러기를 거두게 하였는데, 그 부스러기가 무려 열두 바구니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5병2어의 기적을 단순히 “예수님께서는 벳세다 광야에서 굶주린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사 5병2어로 배부르게 해 주셨다. 주님은 긍휼이 풍성하신 주님이야”라고만 생각한다면 이것은 성경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은 긍휼이 풍성하신 주님이십니다. 5병2어를 가지고도 2만 명 이상을 먹이실 수 있으신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닫힌 문을 열어주시고, 없는 것을 있게 하시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능력의 주님, Super-natural Power를 가지신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능력의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해서 강조하시는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교훈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 6장 26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다시 찾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떡 때문이었습니다. 먹을 것 때문에 예수님을 다시 찾았습니다. 5병2어의 역사를 체험한 사람들은 단순히 배고픈 자를 배부르게 하시는 주님만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5병2어를 통해서 가르쳐 주시는 표적, 다시 말하면 5병2어를 통해서 가르쳐 주시는 주님의 Sign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5병2어로 수많은 사람들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신 예수님을 보면서 광야 40년 동안 만나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여 살렸던 모세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31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기록 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이 말씀을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 우리 민족의 지도자인 모세는 광야 생활 40년 동안 우리 조상님들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지금 사람들이 말하고자 하는 요점이 무엇입니까? 만나, 즉 떡을 달라는 것입니다. 조상들에게 40년 동안 만나를 공급해 준 모세가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가 된 것처럼, 예수님께 먹을 것을 달라고 조르고 있습니다. 지금 그들은 꼭 어린 아이들처럼 “배고파 죽겠어요. 모세 할아버지처럼 우리에게 먹을 것 주세요. 어제 광야에서 주셨던 것처럼 다시 떡 주세요” 징징 짜며 아우성을 치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아우성을 치는 군중들을 향해서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35절)”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48절에서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라고 반복하여 말씀하십니다. 또 51절과 58절에서도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반복되고 있는 말씀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떡입니다. 계속해서 보면 ‘떡’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사실 요한복음 6장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요한복음 6장에만 ‘떡’이라는 말이 무려 21번이나 언급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의 별명을 붙인다면 ‘떡장’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떡 좋아하시는 분들은 요한복음 6장을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여기 ‘떡’이라는 말은 영어로 bread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우리 정서에 맞는 번역은 ‘밥’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날마다 떡을 먹고 사는 것처럼 우리는 날마다 밥을 먹고 삽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나는 생명의 떡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나는 생명의 밥이다”라는 말입니다.
생명의 떡(밥)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우리가 날마다 먹는 세끼 밥 같은 분이십니다. 밥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밥은 생명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밥을 먹지 않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서울 목동에 있는 지구촌교회에서 사역하시는 조봉희목사님의 <벤처 비전>이라는 책에 실린 이야기 한편을 소개합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전파되던 초기의 일입니다. 외국 선교사 한 분이 강원도 산골에서 전도를 하였습니다. 몇 마디 배운 한국말로 목소리를 높여 동네 사람들을 불러 보았지만, 사람들이 여간해서 밖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이 선교사는 어렵게 밭일을 하고 있는 할머니 한 분을 만났습니다. “할머니, 교회에 나오세요”하니까, 이 할머니가 하는 대답이 “이렇게 먹고 살기도 어렵고, 농사일도 바쁜데, 언제 교회 갈 틈이 있겠수?”라고 말합니다. 이 외국 선교사는 우리 말 성경에서 외운 말씀 몇 개를 가지고 할머니에게 계속 말을 붙였습니다. “할머니, 그래도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에 대한 할머니의 대답이 재미있습니다. ”선교사님 말씀이 옳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삽니까? 밥을 먹어야 살지요. 밥 먹지 않고 어떻게 살아요?“
그렇습니다. 밥은 없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밥을 먹어야 삽니다. 밥은 사치품이 아닙니다. 밥은 엑세사리도 아닙니다. 오히려 삶을 유지시키는 필수품입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든지 밥을 먹어야 삽니다. 수년전에 어느 여자 중학생이 날씬한 몸매를 만들려고 이를 악물고 밥을 굶다가 영양실조로 죽은 적이 있습니다. 자매님들 다이어트도 좋지만, 무조건 밥을 굶어서는 안 됩니다. 다이어트는 굶으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음식을 먹으면서 혹은 음식을 조절하면서 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밥을 먹어야 합니다. 아무리 건장한 신체를 가졌어도 밥 먹지 않고 견뎌낼 장사는 없습니다. 사람은 밥을 먹어야 삽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생명의 밥이신 예수님이 꼭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엑세사리가 아닙니다. 할 일 없는 사람이 믿는 사치품이나 기호품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는데 꼭 필요한 분이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날마다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시는 분이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날마다 우리의 삶을 풍성케 하시는 분이신 줄로 믿습니다. 생명의 밥이 되신 예수님은 먹고 나서 때가 되어 다시 배고파지는 시시한 세상의 밥과 다릅니다. 영원한 생명, 한 번 먹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의 밥입니다.
33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하늘로부터 내려오셔서 생명의 떡이 되어 주시는 예수님은 세상에게 무엇을 준다고 합니까? 생명을 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 ‘생명‘이라는 헬라어 원어에는 '비오스(bios)’와 ‘조에(Zoe)'라는 두 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비오스’는 육체의 목숨을 가리킵니다. 의학적으로 뇌사라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심장이 박동하면 살아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육체적인 생명을 '비오스’라고 합니다. 반면에 ‘조에'는 영적인 생명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의미는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과 이 땅에서 교제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과 교제하며 사는 삶 자체가 ‘조에'입니다. 또 다른 하나의 의미는 이 땅을 떠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사는 것을 또한 ‘조에'라고 합니다. 이것은 미래의 약속입니다. 54절의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라는 말씀과 58절의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는 말씀에 언급되어 있는 ’다시 산다, 영원히 산다’는 말이 바로 ‘조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육신적인 생명보다 영적인 생명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비오스’가 아니라, ‘조에’라는 사실입니다. 영원한 생명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아직까지 조에를 얻지 못했다면 세상의 것을 다 얻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은 정말로 불쌍한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세계적인 팝가수 마이클 잭슨을 아실 것입니다. 그는 전 세계에 있는 젊은이들의 우상입니다. 지난 20년 동안 그는 모든 인기와 부귀와 권세와 영광을 누리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는 삶에 대한 애착이 지나칠 정도로 많다고 합니다. 그는 스스로 150세 까지 살아야 한다고 공공연하게 말합니다. 그래서 지나칠 정도로 위생에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세균에 감염될까봐 마스크를 쓰고 다닌다고 합니다. 담배를 피우다가 담배가 카펫트에 떨어져도 카펫트로부터 균이 옮길까봐 담배꽁초도 줍지 않는다고 합니다. 결벽증 환자처럼 실내에서나 실외에서 너무 자주 손을 씻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젊어지기 위해 항상 어린아이들과 함께 장난치며 논다고 합니다. 그리고 매일 100퍼센트 농축 산소가 들어있는 튜브 속에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들어갔다 나온다고 합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현재 마이클 잭슨은 육체적인 생명 비오스는 알고 있었지만, 영적인 생명 조에는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조에를 모르기 때문에 그가 비오스에 목숨 거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생명만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그는 영적인 생명을 소홀히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발버둥친다고 마이클 잭슨이 죽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결국에는 죽습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의 육체는 노화되어 다른 사람들과 같이 흙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비오스입니다. 그러나 조에는 다릅니다.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가 어떻게 조에를 얻을 수 있습니까? 아니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과 교제하며 영원히 살 수 있습니까? 우리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밥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영적 생명인 조에를 찾을 수 있습니다. 51절을 보겠습니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한 마디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당신 자신을 먹으라고 하십니다.
생명의 떡(밥)을 먹어라
생명의 밥이신 주님을 먹는 사람은 영생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밥과 다른 점입니다. 물론 세상의 밥은 일시적으로나마 우리의 입과 혀를 즐겁게 해 줍니다. 일시적으로나마 우리의 배고픔을 해소시켜 줍니다. 어느 정도 까지 육체를 건강하게 해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세상의 밥이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해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먹는 것이 남는 것이다“라고 하며 마치 먹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먹는 것이 가장 주된 관심 사항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무얼 먹을까?”하고, 아침이 지나면 “점심은 어디 가서 먹을까?”하고, 점심 먹고 나면 “저녁에는 어떻게 먹을까?”하고, 24시간 내내 앉으나 서나 먹는 것만 묵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년 내내 성지 순례 하듯이 소문난 식당만 찾아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메뉴판에 있는 모든 음식을 먹어 보아야 직성이 풀린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다고 우리가 영원히 살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세상의 밥은 육체에 약간의 유익을 줄 뿐입니다. 일시적으로 우리의 생명을 유지시켜 줄 뿐입니다.
그러나 하늘로부터 내려오셔서 생명의 밥이 되어 주시는 예수님을 먹으면 영원한 생명을 누립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종도 아닌데, 어떻게 예수님을 먹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먹다니요?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당시 유대인들도 서로 다투며 논쟁할 정도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52절).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한 술 더 떠서 말씀하십니다. 53절부터 54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또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얻으려면, 영생을 누리려면 밥을 먹듯이 주님의 살을 뜯어 먹고, 물을 마시듯이 주님의 피를 마셔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도대체 먹는다는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이 말씀은 다른 몇 개의 말씀을 함께 살펴보아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35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요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이어서 40절을 보겠습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계속해서 47절을 보겠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세 구절에서 반복되는 단어가 어떤 단어입니까? ‘믿는 자‘라는 단어입니다. 앞서서 말씀하신 ’먹는다‘는 것과 ’마신다‘는 것은 ’믿는다‘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살을 먹고 예수님의 피를 마시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먹는 자마다, 다시 말하면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사는 줄로 믿습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조에를 누리며 사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 밥을 먹으면 힘이 생기고 활기차게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모시고 성령님을 의지할 때, 생명의 떡이 되시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날마다 새 힘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아직까지 이 자리에 생명의 떡을 먹지 못하신 분들이 계십니까? 아직까지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지 않으신 분들이 있습니까? 이번 기회에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로 하여금 다시 살아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절망 속에서도 산 소망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미 생명의 떡을 드신 분들, 다시 말하면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미 믿음으로 영접하신 분들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생명의 떡을 배달하는 영적인 배달부들입니다. 여기에서는 볼 수 없지만, 한국에서 중국집에 짜장면을 시키면 중국집 종업원이 철가방을 들고 오는데, 그 철가방 한쪽 면에는 업소이름이 쓰여 있고, 다른 한쪽 면에는 “배달”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는 철가방을 들고 짜장면 배달을 합니다만, 우리는 성경책을 들고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달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생명 떡을 혼자만 드시지 말고 아직까지 들지 못한 분들과 나눠 드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굶주린 사람들의 세 가지 질문
요 6:24-35, 삼하 11:26-12:13 / 김흥규 목사
<삼하 11: 26-12: 13a> <요 6: 24-35>
중학교에 다니던 어떤 학생이 담임선생님으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 학생은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도 선생님이 쓴 편지 속의 한 문장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개야, 네가 그토록 훌륭한 제자가 되어준 것이 너무 고맙구나. 부족한 내가 좋은 선생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다 네 덕분이란다. 너 같은 제자를 둔 것이 너무 자랑스럽고 감사하다.” 제자들이 선생님께 먼저 편지를 쓰는 일은 왕왕 있지만, 선생님이 제자에게 먼저 감사의 편지를 쓰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이 학생이 선생님의 따뜻한 진심이 담긴 편지를 두고두고 마음에 새겼을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 역시 날마다 우리에게 편지를 쓰십시다. 새날이 밝아 동쪽에서 떠오르는 찬란한 아침 해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아무개야, 나의 자랑스러운 제자가 되어서 너무 고맙구나.” 저녁에 서쪽으로 넘어가는 석양을 통해서도 말씀을 건네십니다. “아무개야, 오늘도 열심히 살아주어서 너무 고맙구나.”
아니, 오늘 이 아침에도 주님께서 주시는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아무개야, 이 무더운 여름날에 딴 곳으로 놀러가지 않고 여기 내리교회에 나와 준 것이 너무 고맙구나.” 생각해보니 진정한 기도는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막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은밀한 음성을 듣는 것이 진정한 기도입니다. 오늘도 이렇게 예배하는 가운데 우리 주님의 따뜻한 음성을 듣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주어진 복음서 말씀은 지난주에 살펴본 오병이어의 기적과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신 기적 바로 다음에 일어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켜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여주셨습니다. 그 중에 일부가 배 몇 척을 나누어 타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켰던 장소에 다시 갔는데, 거기에 예수님은 물론이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배를 나누어 타고 예수님을 찾아 가버나움으로 갔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다음에 사람들은 오병이어의 현장을 다시 방문해서 예수님을 찾았고, 예수님은 또 이들을 피해서 숨으셨고, 숨 가쁜 숨바꼭질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렇게 예수님을 찾아 따라다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물론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이 분명하지만, 그 기적을 체험했던 오천 명 중에서도 아주 극성맞은 열성팬들이었을 것입니다. 오늘로 말하면 유명한 아이돌 스타의 팬클럽을 만들어 그 인기 스타가 가는 곳은 어디든지 따라나서는 열혈팬들과 같은 사람들이지요.
아마도 예수님이 계신 곳은 어디에든지 찾아내 따라나선 사람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다음에 예수님을 억지로 왕 삼으려고 했던 무리들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는 기적을 경험한 뒤 예수님만 따라다니면 평생 굶주릴 걱정을 안 해도 된다는 생각 하나 때문에 예수님 계신 곳을 수소문해서 기어코 찾아낸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무리들은 “Seekers,” “구도자들”이었습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예수님만 따르면 양식 걱정 안 해도 된다는 생각 때문에 예수님을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Stalkers”인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이들에게는 무엇인가 채울 수 없는 허기와 갈증이 있었습니다. 이 허기짐과 목마름은 단지 육적인 양식에 관한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남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 사랑받고 이해받으려는 욕구, 그 어떤 것으로도 풀 수 없고 채울 수 없는 영적인 공허함, 인생의 모든 허기와 갈증 때문에 예수님의 뒤를 따라 다녔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무리들과 오늘 우리의 모습 사이에는 놀랄만한 유사성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특히 예수님을 찾아 나선 구도자들이 던진 세 가지 질문을 주목해봐야 할 것입니다.
<賢問愚答에서 愚問賢答으로>
第一問: “언제 여기에 오셨습니까?
먼저 이 극성팬들이 여러 척의 배를 나누어 타고 가버나움으로 가서 예수님을 만난 뒤 던진 첫 번째 질문이 무엇입니까? 25절을 보세요.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여기 “랍비‘라는 말은 ”선생님“이라는 뜻으로서 그 당시 존경받는 스승에게 썼던 용어이므로 이 무리들이 나름대로 예수님을 존경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선생님을 그토록 열심히 찾아다녔는데 우리도 모르게 언제 이곳으로 오셨습니까?” 그토록 힘써 찾아다녔던 예수님을 마침내 찾았으므로 반가운 마음에서 이런 질문을 던졌겠지요.
극성팬들의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이 주신 대답이 무엇입니까? 26절을 보세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예수님은 이 무리들이 예수님 계신 곳을 수소문해서 가버나움까지 찾아온 동기와 목적을 정확히 간파하셨습니다.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여기 “표적”(sign) 혹은 “표징”이라는 말은 아주 주요합니다. 표적은 무엇인가를 가리키는 기호요 상징입니다. 자동차나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다보면 수많은 광고판을 볼 수 있습니다. 기업가들은 소비자의 관심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수많은 광고판을 세웁니다. 이 광고판은 한 기업의 상품을 지시하는 표적이지요. 이 표적 혹은 표징의 진정한 목적은 광고판 그 자체가 아닙니다. 소비자들이 오로지 광고판에만 열중하고 광고판 사진이나 문구에 푹 빠지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이 광고판이 지시하는 제품이나 회사, 그것이 광고판의 목적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베푸신 오병이어의 기적 역시 하나의 표적인데,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가리키는 표적이지요. 그런데 지금 예수님을 찾아온 열성팬들은 표적이 가리키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오병이어라는 표적, 즉 배불리 먹었다는 사실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킬 때, 달 그 자체를 봐야하는데 달을 지시하는 손가락을 보는 꼴이 되고 만 것이지요.
예수님은 물론 우리의 육적 양식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배고픈 사람들을 배불리 먹여주셨습니다. 하지만 인생은 육적 양식을 먹고 배부른 것, 그 이상입니다. 예수님이 단지 우리를 배불리 먹여주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른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육적인 배고픔은 죽을 때까지 반복될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영원히 배고프지 않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길이 있을까요? 예수님의 관심은 바로 이 질문에 있습니다. 그래서 오병이어의 표적만 보지 말고, 이 표적이 가리키는 궁극적인 진리, 영원히 배고프지 않게 하는 생명의 떡,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생수에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은 무리들의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 계속해서 뼈있는 대답을 주십니다. 27절을 보세요.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썩을 양식은 한 번 배불리 먹고 끝나는 양식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일어난 양식이 꼭 그런 것이지요.
육의 양식, 썩어질 양식은 그것으로 끝입니다. 현대인들은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수많은 양식을 구합니다. 하지만 일단 먹고 나면 끝입니다. 금방 허무해지고 또 다시 배가 고픕니다. 목이 마릅니다. 궁극적인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썩을 양식을 얻으려고 하지 말고 예수께서 주시는 영생의 양식을 선물로 받아야 합니다!
第二問: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알쏭달쏭 알 수 없는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대답을 들은 무리가 두 번째 질문을 던집니다. 28절을 보세요.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가버나움까지 쫓아온 이 극성팬들도 육신의 배만 채우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썩지 않는 양식도 함께 얻고 싶었습니다. 육신의 문제뿐만 아니라 영적인 문제에도 관심이 있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지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묻습니다.
하지만 여기 무리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했습니다. 무리들은 영원히 썩지 않는 양식을 인위적인 노력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은 이 썩지 않는 양식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더 정확히 말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의 노력과 상관없이 이 선물을 저절로 받을 수 있습니다.
29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하나님이 우리가 하기 원하시는 일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영원히 썩지 않는 양식도 선물로 받을 수 있습니다.
第三問: “당신이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문을 던질 때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을 하시는 예수님께 무리들이 세 번째 질문을 던집니다. 30절을 보세요.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앞에서 두 번째 질문에서 무리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하여 자기들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제 자연스레 무리들은 그렇다면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시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면 예수님이 어떤 표적을 보여주셔서 예수님을 믿게 할 것이냐고 묻습니다. 이미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한 무리들이 또 다시 예수님의 표적 운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세상의 양식은 한 번 먹고 나면 도 다시 배가 고픕니다. 그러니 그런 기적을 다시 한 번 더 일으켜달라는 주문입니다. 그러면서 무리들은 과거에 광야에서 일어났던 만나 이야기를 꺼냅니다.
31절을 봅니다.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출 16:4, 15; 느 9: 15; 시 78: 24 참조).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세 가지 재해석을 하십니다. 첫째, 예수님은 하늘에서 떡을 주신 분은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둘째, 하나님은 과거에만 떡을 주신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계속해서 아낌없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셋째,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참 떡은 만나가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32-33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서는 예수님께 주문합니다. 34절을 봅니다.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욕심도 많은 사람들이지요. 어린 아이가 엄마에게 끊임없이 보채듯이 그런 떡을 언제나 우리에게 주어 굶주리지 않게 해달라는 요구입니다. 이들은 분명히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떡이 자기들을 배고프지 않게 하는 육신의 양식, 썩어질 양식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만일 그런 떡이 있다면 언제나 배고프지 않게 항상 달라는 부탁을 했던 것이지요.
<예수께로 오면 생명의 떡! 믿으면 생수!>
이런 무리들의 부탁에 대해서 예수님이 주신 대답이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의 결론이자 가장 중요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35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사람들이 언제나 배불리 먹어야 할 떡은 다름 아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떡입니다. 예수님께 오는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늘로부터 오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받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언제나 예수님께로 오면 됩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을 믿으면 됩니다. 예수님께 오면 언제나 굶주리지 않는 생명의 떡을 먹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언제나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마실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저런 이유로 굶주려 있습니다. 목말라 있습니다. 아무리 먹고 마셔도 근원적인 허기와 갈증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배불리 먹은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의 극성팬이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은 반드시 수소문해서 찾아내고 끈질기게 쫓아다닙니다. 하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쫓아다닌 이유는 육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였습니다. 육신의 목마름을 풀기 위하여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육신의 양식, 썩어질 양식보다 훨씬 더 귀한 영생의 양식, 생명의 물을 우리에게 주시기 원합니다.
가을에 뒷마당에 나가보면 한 잎 두 잎 낙엽이 떨어지는 나뭇가지를 보게 됩니다. 계속해서 낙엽은 떨어지지만 가지는 하늘을 향해 힘차게 뻗어 있습니다. 가지에 붙어있는 모든 낙엽들이 떨어져나간다 해도 가지는 오로지 하늘만 쳐다봅니다. 이내 겨울이 찾아와 북풍한설이 몰아쳐 나뭇가지를 세차게 때려도 가지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땅을 쳐다보는 법이 없습니다. 그 무서운 눈보라 비바람을 이겨내고 오로지 오로지 하늘만 쳐다봅니다. 그러다가 다시 봄이 오면 가지에는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납니다. 이내 이파리가 되어서 푸르고 싱싱하게 새로운 생명을 내놓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이 이 나뭇가지와 같아야 할 것입니다. 온갖 눈보라, 매서운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하늘을 향하여 날개를 활짝 편 가지와 같이 오로지 하나님만 바라보면 반드시 승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너나없이 굶주린 사람들입니다. 목마른 사람들입니다. 육신의 배를 채우고 육신의 목을 축이는 것, 너무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역시 배고픈 무리들을 먹이시기 위하여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하지만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시기 위해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은 어디까지나 표적입니다. 이 오병이어의 기적은 영원토록 우리를 배고프지 않게 하시려고 생명의 떡, 생수가 되어 우리 곁에 오신 예수님을 가리키는 표적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은 이 표적에만 눈이 멀어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 삼아서라도 언제나 굶주리지 않고 배불리 먹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이 표적이 가리키는 생명의 떡, 생수이신 예수님께로 나아가고 그 예수님을 믿기 원하십니다. 그리하여 오늘도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이는 영원히 주리지 않는 생명의 떡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 예수님을 믿는 이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마실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 모두 예수님께 나아오고, 그분을 믿어서 이러한 생명의 떡을 먹고 생수를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일
요 6:24-29 / 이규왕 목사
인간은 살기 위해 먹는가 아니면, 먹기 위해 사는가? 라는 질문이 있습니다. 과연 그 정답은 무엇일까요?
인간이 먹기 위해서 사는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지나치면 건강을 해치며, 음식을 배불리 먹고 나서 일을 통해 소모하지 않으면 성인병에 걸려 수명을 단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먹는 것은 살기 위해서만이 아니며, 인간이 사는 것은 먹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선한 일을 열심히 하며 살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느냐? 에 따라 그 사람의 존재 의미와 가 치가 좌우될 정도로 일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맨 처음 창조하셨을 때 지상 낙원 에덴동산에서 영생을 누리며 살게 하셨기 때문에 지금처럼 생존을 위해서 일할 필요가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빈둥거리며 놀고먹게 하신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일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정복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같은 일은 고통스러운 형벌이 아니라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새로운 은혜와 축복을 지속적으로 받아 누리게 하는 도구요 축복의 통로였습니다.
그 하나님은 인간에게 일을 시키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창조사역에서부터 비롯하여 그 피조물이 잘 유지되도록 하시는 일을 지금까지 한 순간도 쉬지 않고 계속하여 일하시고 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만 그렇게 부지런하신 분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예수님 역시 매우 부지런히 일하시는 분이심을 복음서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 5:1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그렇다면 하나님이나 그의 보내심을 받은 독생자 예수님은 누구를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셨으며, 오늘 우리는 누구를 위해 열심히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과연 오늘의 나는 누구를 위해 일을 하고 있으며 과연 그 일이 내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바람직한 일인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돌이켜 보는 시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의 열심
오늘 성경을 보면 예수님을 열심히 찾는 사람들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굶주린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서도 열두 광주리나 남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고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 삼으려고 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제 저녁 예수님이 자기들을 피해 기도하시기 위해 홀로 산으로 올라가시고, 제자들은 서둘러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떠난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다시 예수님을 찾아 모여든 것은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시지 않으셨거나 아니면 바닷가로 내려오실 것이라고 기대하고 예수님을 찾아 모여든 것입니다.
(요 6:22)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섰는 무리가 배 한 척밖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그들 생각에는 예수님은 아직 산에 머물러 계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찾았으나 예수님은 산에도 없으셨고, 바닷가에는 어제 저녁 제자들이 탔던 배 한 척 밖에 다른 배가 없었기 때문에 크게 당황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누가 예수님을 배로 태워 드리지도 않았는데 예수님은 홀로 물위로 건너 가셨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행방불명되신 예수님을 찾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요 6:24) 무리가 거기 예수도 없으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여기서 “배들은” 작은 배를 가르치는 것이고, “찾는다”는 말은 계속적으로 집요하게 찾아 헤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며, 이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얼마나 열심히 찾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그처럼 열심히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대단히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며,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처럼 보일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공을 했다는 사람들의 공통점 중에 하나는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열심을 다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에도 열심은 예외일 수 없습니다.
물론 신앙에는 무엇보다 열심을 다해야 하는 것이며, 성경 여러 곳에도 열심을 강조하고 있고 앞서 간 신앙의 선진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공통점 중에 하나도 역시 ‘열심’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왕상 19:14)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고후 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열심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도 매우 열심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사 37:32) 이는 남는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며 피하는 자가 시온에서 나올 것임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이다
하나님만이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 본보여 주신 여러 가지 중에 하나도 역시 ‘열심’이었습니다.
(요 2: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또한 예수님을 믿는 오늘 우리들도 이왕 예수님을 믿으려면 열심을 다해 믿어야 할 것을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롬 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오늘 성경에서 열심히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의 열심이 잘못된 동기에서 비롯된 열심이었습니다.
그들은 사흘 동안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고 디베랴 들판에서 주님과 함께 하였던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돌려보내시며 산으로 떠나셨는데도 그들은 다시 예수님을 찾아 모였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찾아다녔습니다. 그 같은 열심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며, 또한 무엇을 위한 열심이었을까요?
열심이 다 좋은 것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열심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열심을 낼수록 좋지 않은 것 또 하나는 열심을 낼수록 좋은 것입니다.
(갈 4:17)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 함이라 (갈 4:18)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무슨 위해, 누구를 위해 열심히 교회를 출석하고 있는 것일까요? 과연 나의 열심은 주님이 기뻐하실 만한 열심인지 우리 각자 자신을 돌이켜 보아야 할 것입니다.
2.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의 문제점
사람들이 예수님을 열심히 찾는 것은 예수님을 자기들의 임금으로 삼아 정치적으로 자유와 해방을 얻고 오병이어와 같은 기적을 통해 경제문제를 해결하려는 육신적인 목적을 위해서였습니다.
사람들이 그 같은 목적으로 예수님을 찾다가 가버나움에서 만나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너무나 기뻐하고 좋아하였습니다.
(요 6:25)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은 정반대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왜 당신을 그렇게 열심히 찾는 것인지 그 본심을 분명하게 지적해 주셨습니다.
(요 6:2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사람들의 육신적인 욕구 충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보다 더 귀한 영혼을 구원하는 메시아로 오신 것이며 예수님이 그 일을 위한 메시아이심을 증거하는 표적으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예수님이 육신적인 떡 문제만을 해결해주시는 정치적인 구세주, 경제적인 구세주로만 기대한 것입니다.
물론 인간이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용할 양식이 필요하며, 예수님조차 그것을 매일 구하며 살아가라고 주기도문에 가르치셨습니다. 그 육신의 양식은 세상이라는 들판에 가야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에게 죽지 않는 영혼을 주셨습니다. 그 영혼을 위한 양식은 예수님께로 나아와야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후에도 여전히 육신의 양식을 위해 예수님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예수님이 누구이신가 보다는 오로지 예수님이 무엇을 주실 수 있는가에 대해서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 같은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무엇이었습니까?
(요 6:27) 썩은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인간이 아무리 육신적으로 정치적인 자유를 만끽하고 경제적인 풍요를 누린다고 할지라도 언젠가는 죽음이 오게 되는데 그 앞에는 모든 것들이 수포로 돌아가고 맙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썩은 양식이 아니라 영생하도록 하는 양식을 구하는 일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는 궁극적인 목적이 여전히 육신의 양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지난 엿새 동안 세상에서 무엇을 추구하며 살았으며, 오늘 주님 앞에 나아와서 무엇을 주님께로부터 기대하고 있는지 우리의 최대의 관심사에 대해서 돌이켜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엿새 동안 육신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세상에서 열심히 일을 하였다면, 오늘 주님 앞에 나아온 후에는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영혼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생명의 양식과 주님의 영광과 교회와 성도의 유익을 위해 열심히 일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요일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육신의 양식을 위해서 열심히 일 하면 무엇인가를 거둘 수 있다면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위해 열심히 일을 하였을 때 그 수고가 왜 헛되겠습니까?
(고전 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3.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인가?
세상의 종교들이 인간의 선행과 노력을 강조하기 때문에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고,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절대자 앞에서 선행이 필요하다는 적선(積善)사상에 지배를 받기 쉽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수 없이 ‘하라’와 ‘말라’는 말씀과 더불어 순종을 강조하며 그에 상응하는 상벌을 약속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신 10:13)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신 28: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그러나 알고 보면 과연 누가 순종하여 그와 같은 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세상에는 무흠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하나님께서 구태여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실 이가 없습니다.
인간이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행치 못하고, 죄를 범하여 결국 죽게 되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어야 할 대속자가 반드시 요구되며, 예수님이 바로 그 일을 위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영원히 살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고,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은 무슨 선행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복이라고 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복음이라고 하며, 예수님을 믿는 것이 최대의 축복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이 무슨 선을 행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적선 사상을 뿌리치지 못한 상태로 예수님께 나옵니다. 오늘 성경말씀에서 예수님을 찾는 무리들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찾는 무리들에게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썩지 않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사람들이 예수님께 던진 질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요 6:28)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위해서 자기들이 무엇을 해야만 얻을 수 있는가 하는 적선 사상을 가지고 예수님께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해야만 영생을 주는 생명의 양식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가? 질문하였을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하나님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세상에 보내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6: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하나님을 불신앙하고, 우상을 숭배하며, 자기 이익을 위해 남에게 피해를 끼치기를 마다하지 않고 평생을 살다가 결국 죽은 후에는 그 죄로 말미암아 지옥 형벌을 받아야할 인간이 과연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또한 자신의 구원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죄의 용서는 범죄자에게 있지 않고 죄인을 심판하는 재판장에게 있는 것처럼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무엇을 하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모든 것들을 계획하시고, 준비하시고, 그것을 다 이루신 예수님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는 것입니다.
(갈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궁극적인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좀더 잘 먹고, 좀더 잘살고, 좀더 건강하게 오래 사는데 있습니까?
만일 그것이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이라면 언젠가는 반드시 실망하고 뒤돌아서는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어느 누구도 죽지 않을 사람이 없고, 그 죽음 앞에서는 물질도 권력도 아무 소용이 없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때 황금보석을 가지고 오시지 않고, 한 평생 세상 권력을 탐하지 않으시고, 오로지 천국 복음만을 가르치시고, 나중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이유는 그것만이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최선의 길이며, 최상의 길이며,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요 14:6) 예수(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우리에게 마지막 소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육신은 예수님처럼 다시 사는 부활의 축복을, 영혼은 하나님이 계신 하늘나라로 가는 것 외에 더 좋은 소망과 더 큰 축복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구세주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나님을 위한 일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예화:
자녀를 위해 열심히 노동을 하는 부모님의 은혜를 깨달은 자녀가 부모에게 이제부터 학교를 그만두고 부모님을 대신하여 돈을 벌겠다고 말한다면 그 부모는 무슨 말을 할까요?
“ 지금 너는 일을 하여 돈을 버는 것이 부모를 돕는 것이 아니라 네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 바로 부모를 돕는 가장 좋은 일이란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나의 구원을 위해 무슨 일을 하여야 할까요? 라고 질문을 하였을 때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요?
오늘 우리가 예수 믿게 된 것을 무엇보다 큰 은혜와 축복임을 깨닫고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믿는 일에 더욱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예배하며, 기도하며, 그 말씀을 따라 최선을 다하는 일이 우리가 해야 할 하나님의 일 중에 가장 큰 일이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와 같은 하나님의 일에 열심을 내야 할 이유는 우리를 그렇게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구원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엡 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