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문 Ⅲ-55]『빨치산 리포트』라는 혈서(血書)
지난 8월 10일자 한겨레 21면에 실린 인터뷰기사 제목 <지리산 빨치산의 중심은 이현상 아니라 김선우였다>를 보자마자 아내에게 즉시 관련 책을 사보내달라고 했다. ‘빨치산 문학’이라고 들어보셨으리라. 『빨치산 리포트』(정인 저, 7월 27일 다큐북스 발행, 311쪽, 3만원)가 그것이다. 그제 툇마루에 놓인 소포를 급하게 뜯고, 어젯밤 통독하면서 몇 번이고 가슴이 저릿저릿해 수 차례 책을 접었다폈지만 오늘 새벽 다 읽었다. 솔직히 ‘유구무언’(有口無言). 뭐라고 단 한 줄도 소감을 쓰지 못하겠다.
빨치산문학의 압권은 아무래도 이태의 『남부군』 1, 2권일 듯. 언제 읽었을까? 아련하고 책도 갖고 있지 않은데, 달포 전 남원친구 서재에서 발견하고 다시 읽어보자는 마음으로 빌려왔다. 그전에 이병주의 『지리산』(전7권)이 있었을까. 조정래의 대하소설『태백산맥』(전 10권)도 빨치산 문학일까. 그런 것은 잘 모르겠고,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쓴 정지아의 『빨치산의 딸』 두 권을 읽고 여러 번 울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책 말미의 ‘참고문헌’을 보니, 그동안 듣보잡이던 빨치산문학의 단행본과 논문이 많이 있었다.
물론 김선우의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그가 '지리산 빨치산의 중심'인 줄은 몰랐다. 저자 정인은 황광우의 필명. 시인 황지우의 아우로 이름 석 자는 들었지만, 이렇게 제대로 빨치산과 광주항쟁의 시민군 그리고 항일혁명운동 등에 대해 천착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이 책의 부제 <역사의 구름 속에 자취를 감춘 전설의 빨치산 총사령관 김선우에 바치는 헌사>가 책의 맨끝 285쪽에서 291쪽에 실려 있다. 감춰졌던 많은 사실들을 알고, 분노하고, 애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작가는 이 헌사를 바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한 듯하다. 이 책을 사서 읽지 않아도 좋지만, 이 헌사만큼은 꼭 읽어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전문을 옮긴다. 어제는 제81주년 광복절이고, 역사에 대해서 또 이런 ‘역사의 순교자’가 있다는 것도 모르는 채, 우리는 대체휴일까지 포함한 황금연휴를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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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총사령관에게 바치는 헌사(獻辭)>
8·15 해방은 우리의 힘으로 싸워서 얻은 해방이 아니고, 남이 준 해방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해방이 아니었다. 9월 2일, 잠자리비행기에서 뿌려진 미군의 삐라에는 한국 민중에게 해방을 축하한다는 글자 한 줄도 없고, 미군에 대해 섣부른 짓을 하면 좋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만이 실렸다.
하지(Hodge)는 점령군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한국인의 자주적 의사를 짓밟았다. 한국을 점령한 미군은 인민위원회의 해산을 강요하였다. 아놀드(Arnold) 소장은 10월 9일 “인공의 지도자들은 유치하고 어리석으며 타락한 사기꾼들이며, 구경하기가 괴로운 괴뢰극을 벌이고 있다”며 우리네 지도자들을 조롱하였다.
신탁통치니 미소공동위원회니 다 개소리였다. 미국은 애시당초 이 땅에 민주정부를 세울 뜻이 없었다. 1950년 6월 25일, 인민군이 삼팔선을 넘어온 것은 맞다. 하지만 한국전쟁은 그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1950년 5월 7일, 위조지폐 사건을 조작한 것은 미 방첩대였다. 이 사건으로 조선의 지도자 이관술을 구속하였고, 박헌영에게 체포령을 내렸다. 도대체 한평생 옥고를 치르며 독립투쟁을 한 민족의 지도자들을 적대시하면서 어떻게 민주주의를 하자는 것인가? 한국전쟁의 방화범은 미군정이었다.
해방이 되었으나 해방은 오지 않았다. 일제로부터 해방은 되었으나 친일파들이 버젓이 활개를 치고 다녔다. 노덕술, 이 자는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다가 두 손과 두 발을 묶고 천정에 매달아 코에 물을 집어넣던 자였다. 이런 놈이 다시 활개를 치고 다녔다.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한 장교들이 국군의 지휘봉을 잡았다. 전(前) 만주군 장교 정일권이 육군총참모장 대장이 되었고, 전 만주군 장교 백선엽이 제1군 사령관 대장이 되었으며, 전 일본군 중사 송요찬이 3군단장 중장이 되었다.
민중의 요구는 간단하였다. 친일파의 재산을 몰수하라는 것, 토지를 분배하라는 것, 통일정부를 세우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승만은 민족의 염원인 통일정부를 외며난 채 단독정부를 강행하였다. 여기에다가 이승만 정부 밑에서 친일파들이 득세하자 젊은이들은 눈이 돌아버렸다. 배알이 있는 젊은이라면 이승만 정부에 대항하여 싸울 수 밖에 없었던 것이 한국전쟁의 전야였다.
민중의 요구를 싫어하는 자들이 있었다. 1948년 4월 제주도가 학살터가 되었다. 1948년 10월 여수의 제14연대 애국 군인은 동포의 목에 총을 겨누라는 상부의 명령을 거부하였다.
“애국병사 여러분! 우리는 동족 살상의 제주도 출동을 결사반대합니다. 우리는 조선의 아들입니다. 우리가 어찌 동포의 심장에 총을 겨눌 것입니까? 병사 동지여러분! 나는 자주독립을 쟁취하는 싸움을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조국을 통일하고 평등한 세상을 쟁취하는 성스러운 싸움에 앞장섭시다. 애국병사는 나를 따르시오!”
하지만 여순 봉기군은 오갈 데가 없었다. 이들 젊은 병사들을 데리고 산으로 들어간 이가 이현상이었다. 빨치산은 한 개인의 실존적 선택도 아니었고, 특정 집단의 전략적 선택도 아니었다. 여수에 주둔하던 제14연대의 지창수가 차마 동족을 죽일 수 없어 봉기를 일으켰듯이, 이현상이 오갈 데 없는 지창수의 봉기군을 이끌고 산으로 들어갔듯이, 민족 앞에 죄를 짓지 않으려는 젊은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입산이었다.
1950년 6월 25일 인민군이 남하하였을 때, 자국민의 목에 총을 겨눈 자는 이승만이었다. 1950년 7월 5일, 헌병은 형무소에 수감중이던 좌익수를 골짜기로 끌고 가 학살했고, 경찰은 보도연맹원을 무자비하게 죽였다.
그래서 1950년 10월, 젊은이들은 산으로 올라갔다. 산은 청년들의 피난처였고, 산속을 헤집고 다니다 죽은 빨치산은 ‘역사의 순교자’였다.
소년 박현채는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 저는 입산해서 싸우고 싶습니다. 역사의 발전을 위해 싸우는 것이 올바른 삶을 영위하는 사람의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살면서 옳다고 생각하는 삶을 살지 못할 때 인간으로서 삶의의미는 없지 않습니까? 설령 싸우다 죽더라도 끝까지 민중의 편에 서고 싶습니다.”
전남도당 휘하에서 활동하던 대원들 2만여명이 산으로 올라갔다. 이들의 다수는 총 한 자루 없는 비무장 대원들이었다.
유격대가 아니라 피난민들이었다. 도당은 이들을 품에 안고 보호해야 하는 어미 닭이었다.
1950년 12월 6일, 양민 학살의 회오리바람이 불었다. 그날은 진눈깨비가 흩날리고 있었다 간밤에 내린 눈으로 들녘과 지붕이 수북이 덮여 있었다. 함평에 군경이 진입하였다. 뿌옇게 동이 틀 무렵, 일단의 군인들이 기관총과 소총을 쏘아대며 마을로 접근하고 있었다. 군인들은 마을을 포위하고 초가지붕에 불을 지른 다음, 주민들을 향하여 “마을 앞으로 나오라”고 외쳤다. 부녀자들이 줄줄이 끌려나왔다. 총이 불을 뿜었다.
1951년 2월부터 12월까지 매달 4천명이 죽어갔다. 함평에서, 장성에서, 영광에서, 나주에서, 영암에서, 장흥에서, 보성에서, 구례에서, 곡성에서, 화순에서, 순창에서…. 전라도 황토흙이 ‘광주 학살’보다 더한 피로 적셨다.
토벌대는 유격대의 기지를 공습했다. 비행기는 백아산 갈갱이 골짝에 폭탄을 떨어뜨렸고, 불기둥 같은 것을 쏟아부었다. 원추 모양의 물질이 쏟아지자 반경 40미터 안이 시뻘건 불과 검은 연기로 덮였다. 네이팜탄이었다.
그 순간 고지의 전사들이 타 죽었다. 삼각고지에서 숯이 된 시신을 건져냈다. 좀체 동요의 눈빛을 보이지 않았던 김선우 사령관도 타버린 동료의 시체를 보지 못하고 눈길을 돌린 채 눈물을 흘렸다. 모두가 참았던 오열을 터뜨렸다.
전쟁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조심할 것이 있다. 전쟁이란 무장한 군인과 군인이 벌이는 교전행위이다. 그런데 무장한 군인이 무장하지 않은 시민을 살해하는 것은 명백한 범죄행위이다.
보자. 1980년 5월 광주에서 시민들이 칼빈총으로 무장하였다. 우리는 이들을 시민군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헬기와 장갑차를 앞엣우고 도청을 진압한 계염군과 시민군이 교전했다고 기록하는 것은 큰 오류이다. 그것은 전쟁이 아니고 학살이었다.
마찬가지다. 백아산의 유격대와 토벌대의 교전은 전쟁으로 볼 수가 없다. 비행기를 앞세우고 네이팜탄을 투하했던 침공행위는 명백한 학살행위였다고 기록해야 한다.
박현채는 회고한다. “해만 떨어지면 많은 동지들이 서로를 피해 산 구석에 앉아 훌쩍이며 눈물을 흘렸다. 그런 광경을 목격하면 서로 자리를 피해 주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 시기 많은 동료들의 죽음 앞에서 고뇌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 자신을 가누기가 어려웠다.”
1951년 12월, 산사람들은 엄숙한 계절 앞에 섰다. 산사람들에게 가장 처참한 시기가 왔다. 미8군사령관 제임스 밴 플리트장군이 백선엽에게 토벌작전을 맡겼다. 백선엽은 지리산 주변 9개 군을 가리키며 “이 안에 있는 사람은 다 적”이라며 소탕할 것을 지시했다.
토벌대는 주요 능선을 장학하면 그곳에 벙커를 구축하고 주둔하였고, 무선 교신기를 들고 빗으로 훑듯이 산을 오르내리면서 수색전을 펼쳤다. 혹한과 적설이 빨치산들을 괴롭혔다. 식량은 바닥이 났다. 부상자와 동상자가 속출했다. 총에 맞아 죽고, 굶어서 죽고, 얼어서 죽었다. 백선엽 사령부는 다음과 같은 전과를 발표하였다. 사살 5009명, 생포 3968명, 귀순 45명.
제1차 동계토벌이 끝난 1952년 4월, 3천여명의 유격대원이 생존하였다. 휴전협정이 체결될 무렵, 1953년 7월 27일, 1천여명의 유격대원이 생존하였다. 북은 빨치산을 외면했다. 휴전협정 문서에는 후방에 남은 물자와 장비의 철거에 관한 조문까지 있었지만, 후방에 남은 살아 있는 인간에 대한 배려는 없었다.
알고 보니 빨치산의 기지는 지리산이 아니라 백아산이었다. 1951년 8월 이현상의 남부군이 지리산 달뜨기 마을에 도착했을 때, 남부군의 수는 400명이었다. 그때 총사령관 김선우는 5천명이 넘는 유격대원을 지휘하고 있었다. 이현상이 빨치산의 상징이었다면, 빨치산의 중심은 김선우였다.
1954년 4월 5일, 김선우는 백운산 상봉에서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누가 그의 고뇌를 기억할까?
내가 만일 시인이라면 분단의 비극과 김선우를 최후를 노래하련만…. 하늘은 나에게 시혼(詩魂)을 주지 않았으니 3천년 전 트로이벌판에서 있었던 이야기, 아킬레스에게 쫓기던 헥토르의 최후를 노래한 호메로스처럼, 72년 전 백운산 상상봉에서 있었던 이야기, 토벌대에 쫓기던 김선우의 최후를 노래하는 일은 언젠가 올 미래의 시인에게 맡겨야 할 것같다. 지금은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가득하니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릴 따름이다. 빨치산의 고뇌와 희생에 값하는 보답은 문학밖에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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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남주의 <전사 2>
오늘 밤
또 하나의 별이
인간의 대지 위에 떨어졌다
그는 알고 있었다 해방투쟁의 과정에서
자기 또한 죽어갈 것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자기의 죽음이 헛되이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렇다, 그가 흘린 피 한 방울 한 방울은
어머니인 조국의 대지에 스며들어 언젠가
어느 날엔가는
자유의 나무는 열매를 맺게 될 것이며
해방된 미래의 자식들은 그 열매를 따먹으면서
그가 흘린 피에 대해서 눈물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다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것이다
마치 우리들이 갑오농민에 대해서 이야기하듯
마치 우리들이 한말의병에 대해서 이야기하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