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시나무 새 ◈ 노래 : 이 진 석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 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 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외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 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
☆ 아티스트 이 진 석 그는 누구인가?
생략........
「좋은 세상 만들기」라는 작은 카페가 있다.
이 카페의 주인은 가수 이진석 씨다. 우리는 흔히 가수라 하면
작곡가로부터 곡을 받아 음반을 내고 방송 무대에 데뷔한 사람을
일컫는다. 이런 기준에서 본다면 이진석 씨를 가수로 부르는 것은
맞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미 80년대 초반에 부산의 광복동 무아음악 감상실의
〈무아가요제〉에 참가하여 네 차례나 금상, 은상을 받은 바 있고
96년과 98년에는 각각 개인콘서트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비록
자신의 노래는 아니지만 ‘아름다운 사람’, ‘누나야’, ‘봉숭아’등
13곡을 담은〈그리움, 그 너머의 시선〉이라는 CD를 내기도 했다.
뿐만 아니다. 작년 3월부터 그의 노래를 좋아하는 전국의 동호인
들이 인터넷으로 팬 클럽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이쯤되면 그를 가수로 인정해 주고 대접해 주는 것은 당연할 수
밖에 없다.
사실 그는 오래 전부터 부산지역에서 펼쳐지는 문화행사나 시위현장,
각종 후원행사 등에 가수로 초청되어 활발한 활동을 펴 오고 있어
그를 단순한 아마추어적 가수라기보다는 프로적 가수로 예우하고
있다. 다만 그러한 공연의 개런티로 호구지책을 면하기는 어려운
형편인지라 5년 전부터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 노래를 박음질한 재봉사의 삶
1958년 부산에서 태어난 그는 3살 때 소아마비를 앓으면서 지체
3급 장애를 가지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바닥
권인 그의 어린 시절, 그가 주위와 세상으로부터 받은 편견과 냉대
가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독자들의 상상에 맡기고 싶다.
이러한 그의 장애는 성격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나마 그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발휘한 노래실력이 그에 대한
차별과 냉대를 어느 정도 완화시켜준 것 같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반 친구들 앞에서 처음으로 노래를 불렀을 때의
설레임과 긴장을 지금도 선명하게 떠올리고 있음은 그 세월의 아픔
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 자신의 성격이 내성적이라고
하지만 지나온 세월 속에서 끊임없이 기타를 배우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노래실력이 주위의 인정을 받으면서 그는
자신감을 가지기 시작했고 신체적 장애가 정신의 장애로 전이되는
것을 방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가끔 그가 많은 관중들 앞에서
기타를 치며 열창하는 모습을 지켜본 필자로서는 날이 갈수록 활달
해져 가는 모습과 세련된 태도를 발견할 수 있었다.
10여 년 전쯤으로 기억된다. 일주일에 한두 번씩 들려 知己들과
어울리던 허름한 대폿집에서 그가 일행들과 기타를 치며 애잔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던 모습을 보곤 했다. 그 자신은 별로 술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취향이 맞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맛으로 그
곳에 들려 늦은 밤까지 쉼 없이 노래를 토해내던 그를 보면서 그의
신체적 장애가 마음에 걸려 들곤 했다.
용두산 공원과 맞닿은 옛 동광초등학교 정문 앞의 적산가옥 한 쪽에
자리한〈계림〉이란 대폿집, 지금도 그 자리에서 젊은 낭만파들의
발길을 모으고 있는 그 집의 추억을 이진석 씨는 잊지 못할 것이다.
당시 그는 부산 패션계의 유명 디자이너에 소속된 수석재봉사로 일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부모들은 장애가 있는 그에게 평생
을 밥 먹고살 수 있는 기술을 익히도록 했던 것이다. 그런 연유로
발을 들여놓은 재봉사로의 길이었지만 그는 한시도 기타를 놓을 수
없었고 노래를 그만둘 수 없었다. 아니 노래를 부르면서 살 수 있는
길을 찾아 방황했다.
그러던 중 1986년에는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두고 통기타무대에
뛰어들기도 했으나 호구지책의 방책은 되지 못했다. 그러기 를 20여
개월 다시 재봉사로 복귀한 이력이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을 대변
하기에 족하다. 재봉사로 마음을 다잡고 직장에 다니면서 거의 밤
마다 허전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계림〉을 출입하던 그에게 뜻밖의
기회가 주어졌다.
평소 그 곳에 자주 출입하는 사람들이 그의 노래실력을 빛 내주기
위해 콘서트를 열어주기로 하고 힘을 모은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인 도움으로는 한계가 있어 부산의 대표적인 시민
단체인 「부산을 가꾸는 모임」이 비용을 스폰서하면서 주최하기로
협의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1996년 부산의 가톨릭 센터 소극장에서 개최된 그의 콘서트는 뜻
있는 부산의 시민단체와 시민들에 의해 마련되는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것이다.
그의 생애 첫 콘서트는 이진석이란 가수를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그의 존재가 알려지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이후 그는 많은
자리에 불림을 받았다.
개런티가 얼마가 되었건 아니 한 푼의 개런티가 없어도 그를 필요로
하면 그는 어디든 불편한 몸을 아랑곳하지 않고 노래를 실어 날랐다.
첫 콘서트를 가진 2년 후인 1998년에 두 번째 콘서트를 가진 후인
1999년 그는 젊은 연인들이 많이 모이는 해운대에서도 달맞이 고개
의 현재 자리에 통기타 라이브 음악을 연주하는 카페를 시작한 것
이다.
올해 마흔 일곱인 그가 아직 결혼도 안한 채 카페를 경영하는 것은
단순한 돈벌이가 아니었다. 아름다운 청사포가 이국의 풍경처럼
눈에 차는 그의 카페는 하루종일 그의 구성진 목소리로 채워져 있다.
노래를 계속하기 위해 라이브 카페를 경영한다고는 하지만 불황이
격심한 최근에는 어려움이 쌓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의 노래가 필요한 곳, 특히 어려운 이웃이나 시민단체들
의 가난한 행사에 몸을 아끼지 않으면서 봉사하는 것을 즐기고 있는
듯 했다.
그러다가 밤이 되면 자신의 카페로 돌아와 아담한 무대 위에서 세상
사 시름 모두 노래에 실려 보내고 청사포 밤바다에 띄워 보내면서
자신의 삶에 빠져 있는 가수 이진석,
그에게 장애가 짐이 되지 않는 아름다운 삶이 늘 함께 하기를…
글: 김은옥(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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