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3주간 목요일 강론>(2024. 9. 12. 목)(루카 6,27-38)
복음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27-3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7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29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두어라.
30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31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32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33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
34 너희가 도로 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 꾸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서로 꾸어 준다.
35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36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37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38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원수란, 내가 내 마음대로 원수라고 생각하는 이웃입니다.』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 너희가 도로 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 꾸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서로 꾸어 준다.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27-36).”
1)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은, 지키기 어려운
계명이다.” 라는 생각을, 또는 “그 계명을 지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런 생각은 일종의 고정관념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지키지도 못할 계명들을 주신 분이
아니라, 누구나 지킬 수 있는 계명들을 주신 분입니다.
<할 수 있으니까 하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우리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라고 우리에게
시키셨다면, 신앙생활은 아주 적은 수의 성인 성녀들이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소수의 정예 요원들만 할 수 있는 생활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생활입니다.>
2)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을,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루카 10,30).”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루카 10,33-35).”
강도당한 사람은 ‘유대인’일 것입니다.
그 당시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박해하는 쪽이었고,
박해를 받는 사마리아인들의 입장에서는
유대인들이 ‘원수’였습니다.
그래서 ‘착한 사마리아인’의 사랑 실천은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을 실천한 일입니다.
3) 사마리아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강도당한 사람’은
원수 같은 유대인이고,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를 사랑하는 이가 아니었는데도, 또 자기에게
잘해 준 이가 아니었는데도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무슨 ‘대가’나 보상금을 바라고 한 일도 아닙니다.
치료를 하느라고 사용한 돈을 돌려 달라고, 또는 갚으라고
요구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돌려받는 것 자체를 기대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우선 당장 목숨이 위험하니까 응급조치를 한 것이고,
치료와 간호가 필요하니까 그것을 한 것입니다.
그 일에 무슨 이유나 욕심 같은 것은 없습니다.
<“사랑 실천에는 사랑 말고는 다른 이유가 없다.” 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4) 31절의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라는 말씀은,
산상설교에도 있는 ‘황금률’입니다(마태 7,12).
이 ‘황금률’을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적용하면,
사마리아인의 사랑 실천은 ‘자기 입장에서’가 아니라,
‘강도당한 사람의 입장’에서 한 일입니다.
<“만일에 내가 강도당해서 죽어가는 상황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내가 간절하게 바라는 일들을 ‘착한
사마리아인’이 나에게 해 주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에게 원수 같은 사람인데, 그와 나는 전혀 모르는
사이인데, 그가 베풀어 준 일들을 보답하거나 보상할
능력이 나에게는 전혀 없는데, 그런데도 그는 나를 살리기
위해서 응급조치를 해 주고, 가던 길을 멈추고 자기 시간과
자기 돈을 들여서 밤새워 나를 간호하고,
나의 치료비와 숙박비를 대신 내주고......
사랑이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기.
내 입장과 내 기준으로 판단해서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상대방에게 필요한 것을 주는 일.>
5) 하느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다 이웃이고, 형제입니다.
원수란, 원래 없습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원수라고 생각하는 이웃이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원수를 사랑하여라.”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는, ‘같은 계명’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사랑 실천은, 원수를 사랑한 일이면서
동시에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한 일입니다.>
[출처]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