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국회의원 중 치치올리나라는 여성 국회의원이 있었습니다. 포르노 배우 출신인 그녀는 알몸을 드러내며 선거유세를 했고 일부에서는 거센 비난을 받았지만 결국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습니다. 또 미국의 저명한 전위화가 제프 쿤스와 결혼하여 화제를 뿌리기도 했습니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이나, 그리스의 문화성 장관이었던 멜리나 메리꾸리, 그리고 필리핀이나 남미의 몇몇 대통령들이 영화배우 출신입니다.
현대의 정치지망생 중에는 이렇게 대중스타 출신, 연예인 출신 정치인이 자주 늘어나고 있는 추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현재 감독 출신인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이 있는데요, 그러나 대중 배우이기는 하지만 포르노 배우 출신이 국회의원이 된 경우는 치치올리나처럼 아주 특별한 케이스 이외에는 없습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하지만, 공식적으로 매춘이 금지된 나라에서 사창가 출신 여성이 국회의원에 도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는 불가능이란 없습니다. 지금부터 사창가 출신 최초의 국회의원 고은비 의원을 만나보시죠.
대한민국 헌법 제1조를 알고 계십니까? 1.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2.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것이 우리의 헌법 제1조입니다. 영화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당연하게 생각되는 우리의 헌법 제 1조를 제목부터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헌법 맨 앞에 명시되어 있는 이 당연한 조항이 그동안 잘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강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제가 제목을 통해 강력하게 드러날만큼 영화는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제작되었다고 믿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주제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하여 국회의원에 출마한 사창가 여자를 등장시켜 대중적 흥미를 자극합니다.
고아로 자라나 사창가에서 잔뼈가 굵은 고은비(예지원 분)는 동료인 사창가 여자가 폭행을 당했지만 경찰도 사회도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자 분노합니다. 이때 마침 여야 동수로 팽팽하게 대치된 정국에서 야당의 한 국회의원이 여당총재가 보낸 자객에 의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사창가를 중심공간으로 설정한 영화답게 이 정치적 자객은, 칼이나 흉기로 야당 국회의원을 살해한 것이 아니라 뛰어난 방중술 테크닉을 구사해서 상대 남자인 국회의원을 심장마비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보궐선거가 치러지고 여야 모두 캐스팅 보트를 쥘 수 있는 절대절명의 기회 앞에서 사력을 다해 후보를 내고 선거전에 임합니다. 그때 고은비는 선거야말로 억울하게 폭행당하고 잊혀진 동료의 문제를 세상에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출마할 것을 결심합니다. 물론 공탁금 1,500만원이 문제입니다만 15%의 득표만 하면 다시 되돌려 준다는 것을 알고 도전하게 됩니다. 무론 선거 참모는 동료 사창가 여자들입니다.
자, 과연 그녀의 도전이 성공할 수 있을까요? 사회의 소외된 비주류 계층에서 후보자가 나와 온갖 역경을 뚫고 정치적 목적을 달성한다는 과정을 생각해보면 이 영화는 정치영화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치적 이해관계가 맞부딪치고 음무술수가 난무하는 비열하고 살벌한 정치판을 그리면서도 영화는 긴장감이 없습니다. 비현실적인 상황 설정이나, 구체적인 캐릭터 묘사, 논리적이고 인과관계가 뚜렷한 서사적 전개 대신 막연한 감성에 호소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논리적 허점이 많이 드러나면서 이야기를 급하게 전개시킨 것을 우리는 지적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사회적 소외계층인 노인들이나 장애인들과 동지적 관계를 맺고 급기야 전세를 역전시킨다는 설정은 너무 만화적입니다. 고은비를 비롯한 사창가 여자들은 평소 신부님과 함께 자원봉사를 했던 인연으로 노인과 장애인의 몰표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대역전 드라마로서는 허술하기만 합니다. 탄탄하게 짜여진 극본을 기대했다면 실망하기 쉽습니다. 또 삶의 어두운 곳을 들춰내고 위장된 거짓 시선을 햇빛 아래 들춰내며 치부를 찌르는 예리한 비판과 풍자로 가득찬 정치영화를 기대했다면 역시 실망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거칠고 투박하지만 그래도 이야기의 큰 뼈대를 놓치지는 않습니다. 만화적 설정이고 코믹한 전개이지만, 송경식 감독은 우직하고 투박하게 이야기를 끌고 가서 적어도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지는 않습니다.
1999년 영화진흥위원회 시나리오 공모전에 당선된 원작을 5명의 각색자가 1년 넘게 수정해서 완성한 대본은, 정치적 권모술수가 섬세하게 그려져 있지는 못합니다. 가령, 미국의 국회의원 선거 과정에서 일어나는 음모를 다루고 있는 팀 로빈스 감독의 [밥 로버츠]라든가, 할리우드 감독들을 동원해 전쟁을 통해 지지율을 높이고 대중 이미지 조작으로 정치를 하는 왜곡된 정치인상을 드러내고 있는 [웩더독] 같은 정치영화와 비교하면 아쉬움이 큽니다.
홍상수 감독의 [생활의 발견]에서 예측불허의 도발적인 무용강사를 맡았던 예지원이 이 영화에서는 고은비 역을 맡았구요, 방송진행자 겸 탈랜트 출신 임성민이 고은비의 싱크탱크 역할을 하는 사창가 동료로 영화 데뷔전을 치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캐릭터 중의 하나는 베드로 신부 역의 남진입니다. [기러기 남매]는 80여편의 영화에 출연한 영화배우이기도 했던 가수 남진은 걸죽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신부로 등장해서 소탈한 웃음을 안겨줍니다.
사창가를 소재로 한 우리 영화 중에서는 김기덕 감독의 [나쁜 남자] 임권택 감독의 [창] 등이 있지만 사랑의 문제를 갖고 매달렸지 이렇게 대담한 정치영화는 아니었습니다. 뚜렷한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제작되었음에도 상식적 전개가 식상하게 만드는 단점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무시할 수 없는 주제를 담고 있는 영화 [대한민국 헌법 제1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