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90년대는 서울대 신드롬이 일었다. 서울대 졸업장은 어디에서나 대접받을 수 있는 든든한 배경처럼 생각됐다. 그러나 인생은 참 신기하다. 학력고사와 수능 점수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이들이 때로는 숱한 패배의 쓴맛을 보며 문전박대를 당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기자가 서울대에 야구부가 있다는 사실을 안 것은 지난 98년. 모 그룹 PR 광고에 서울대 야구부가 나왔다.
“이긴 적이 없다고 이길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불가능이란 대부분 충분히 시도되지 않은 것입니다. 두려움 없이 세상과 맞서세요. 그것이 바로 패기입니다”라는 카피가 인상적인 이 CF는 그해 대한민국광고대상에서 우수상을 차지했다. 서울대 야구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다. 175전 175패.
야구사의 수많은 진기록을 이야기할 때면 서울대의 무승 기록도 사람들의 입에 한 번은 거쳐간다. 그러나 흥미를 갖고 속을 들여다보면 무승 뒤에는 열정으로 똘똘 뭉친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다.
기자는 지난달 29일 ‘그에게 묻고 싶다’ 15번째 주인공으로 꿈의 동대문구장에 서기 위해 삼수로 서울대 문을 통과한 신동걸(20)을 만났다.
●꿈의 동대문구장
4월의 동대문구장 햇살은 밝았다. 전국대학야구 춘계리그에서 중앙대와의 경기를 위해 1시간30분 전에 도착한 서울대 1루수 신동걸은 스파이크를 갈아신고 혼자 그라운드를 한참 동안 뛰었다.
10여년을 꿈속에서 그리며 얼마나 밟고 싶었던 잔디였던가. “동대문구장에 선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운데 9회 마지막 타석에서 첫 안타를 뽑아낸 거예요. 진짜 하늘을 나는 기분이 어떤 건지 알겠더라고요.”
그로부터 4개월 뒤. 처음 스파이크가 닿았던 동대문구장은 이제 그가 몸을 던지는 안방이 됐다.
지난달 28일에 벌어진 전국대학선수권대회 탐라전에서 다이빙캐치를 하다 코가 부러졌다.
“피가 쏟아졌어요. 1루심이 경기를 못 한다며 나가서 지혈을 하라더군요. 그런데 마땅히 바꿀 타자도 없고, 4-3으로 한 점차로 뒤지고 있어 잘하면 1승도 할 수 있을 거 같았어요. 화장실에 가서 재빨리 휴지로 코를 막고 다시 그라운드로 뛰쳐나갔어요.”
어쩐지 처음 봤을 때 콧등이 빨갛고 눈 주위가 부었다 싶었더니 사연이 담긴 상처였다.
●서울대 삼수생
신동걸은 동대문구장에 한번 서 보는 것이 꿈이었다.
어릴 적 동생과 함께 한화 리틀 야구단에서 활약하며 프로야구선수의 꿈을 키웠지만 어머니의 반대로 진로를 바꿨다. 전국대회에 출전한 친구들이 동대문구장에서 뛰는 모습을 보고 보채자 아버지 신흥순씨는 ‘공부를 해서 야구를 할 수 있는’ 한 가지 묘안을 제시했다. 서울대 야구부에서 뛰는 것.
“제가 동대문구장에 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어요. 그때부터 목표는 서울대였습니다.”
세광고를 졸업한 2001년 신동길은 고대 체육교육과에 합격했으나 포기했다. 이듬해에는 서강대 경제학과에 붙었으나 가지 않았다. 모두 서울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삼수를 결심할 때는 꿈을 못 이루는 것이 아닌가 불안했어요. 전 정말 정식 선수가 되고 싶었거든요.”
그러던 올 2월 꿈은 이뤄졌다.
체육교육과에 합격하며 신동걸은 다른 수많은 서울대 삼수생과 함께 신림동행 전철을 탔다.
●야구 삼부자
서울대 삼수가 가능했던 것은 아버지 신흥순씨의 지원이 컸다. 세광고 야구선수 출신인 아버지는 중학교 1학년 때 아들이 자신 앞에서 한 약속을 꼭 지키기를 바랐다.
“10년 동안 아들이 꾼 꿈이었어요. 그것을 꺾고 싶지 않았습니다. ”
대학 입시생을 둔 가족이 그렇듯 삼수를 하는 동안 신동걸의 가족들도 고생을 했다. 집은 대전이지만 서울에서 입시 준비를 했기 때문에 주중에는 아버지가, 주말에는 어머니가 번갈아 오가며 뒷바라지를 했다.
서울대에 합격한 이후 신동걸의 야구에 대한 욕심은 더욱 늘었다. 동생이 뛰고 있던 중앙고 계형철 인스트럭터(전 한화 코치)와 인연이 닿았고 지인들의 소개로 성균관대 야구부와 함께 훈련을 할 기회를 얻었다.
“감독님이 재능은 있다고 칭찬해주시는데, 훈련량이 적고 아직까지 경험이 많이 부족해요.”
동대문구장을 떠올리면 마냥 신나기만 한지 단점을 이야기하면서도 얼굴은 싱글벙글이다.
●문전박대의 서러움
175전 175패의 서울대 야구부는 그동안 ‘야구 사회’에서 설움을 많이 당했다. 열정은 누구보다 강했으나 선발된 선수로 구성된 다른 대학에 비해 실력은 한 수 아래였다.
“법대, 상대 등 선수들의 전공이 다양해요. 야구부원이 15명 정도 되지만 고시 공부를 하거나 중요한 시험과 겹치면 그나마 있는 선수마저 빠져 라인업을 짜는데 고생하죠.”
지원도 풍족할 리 없다. 4월 춘계리그 때는 선수들이 회비를 모아 부족한 부분을 메웠다.
틈틈이 서울대 백학기와 고교 동문야구대회 등의 이벤트를 통해 돈을 모은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힘든 것은 문적박대로 입는 자존심의 상처였다.
“전국대회에서 한 경기를 더 치르려면 그만큼 예산이 더 들잖아요. 거의 매번 콜드게임으로 끝나니 시간도 아깝고요. 올해도 대회 관계자나 대학 감독들이‘불참했으면…’하고 은근히 바랐는데 그럴 순 없었어요. 저희가 한국야구위원회(KBO) 고문으로 계신 정운찬 서울대 총장을 찾아가 꼭 참가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지요.” 노력의 결실일까.
‘야구 사회’에서 따가운 눈총을 받던 서울대 야구부는 드디어 올해부터 리그전에 출전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됐다.
●1승을 위해
기자는 지난달 초 ‘그에게 묻고 싶다’ 13번째로 청각 장애인들로 구성된 성심 야구단을 취재했다.
봉황대기에 처음 출전한 이들의 목표는 1승. 신동걸과 서울대 야구부를 취재하며 문득 성심야구단과 뭔가 비슷한 점을 발견했다. 숱한 패배 끝에 언젠가는 1승을 맛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어 야구가 즐거운 그들.
첫댓글 감동적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