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안의
세계로 가는 절집-남해 용문사
남해에는
유명한 '보리암'이 있다. 사찰보다 훨씬 큰 암자이고, 기도발이
좋다고 해서 전국의 불자들이 몰려든다. 그리하여 조용한 분위기를 기대하기는
무리다.
남해에는 그보다야 화려하지
않지만 그에 버금가는 아름다움을 지닌 절집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용문사다. 화려한 바위의 향연을 내품는
보리암이 부자집 미인이라면 용문사는 순수하고 질박한 시골 여인네다. 그
만큼 편안하고 부담이 없다. 세속을 잊고 몸만 내맡기면 그만이다.
자연에 거스르지 않고 순응해가는 가람 배치는 감동 그 자체다.
경내로 들어갈수록 선의 세계로 빨려들어갈 것 같은 분위기 때문이다.
용문사에
오르려면 미륵이 탄생하여 맨 처음 몸을 씻을 용의 연못이 있다는 용소마을을 가로질러
호구산을 올라가야한다. 이 곳이 남해에서 가장 습한 곳이라고 한다. 그 소리를 듣기
전까지 시원한 느낌을 받았는데 이젠 음산함으로 바뀐다. 이렇게
사람의 마음은 간사하다.
섬 답지
않게 나무가 우거지고 수량 또한 풍부하다. 동네 아이들은
벌써 훌러덩 웃옷을 벗고 더위를 씻어내고 있다. 싱긋 미소를 던저주고 길을 재촉한다.
자연이 만들어낸 물의 화음을 맞춰 뚜벅 뚜벅 걸었다. 뱀처럼
휘감아 돌아가는 오솔길이 환상적이다.
가장 먼저 맞이 해주는 것이 장승이다. 비바람에
머리털이 삐쭉 올라 섰지만 생긋 웃는 모습에서 남해인의 천진난만함을
읽을 수 있다. 경남에서 가장 오래된 장승이란다. 그 옆엔 우렁차게
생긴 남근석이 하늘을 향하고 있다. 불교에 관한 것이 아니라 토속
신앙의 산물들이다. 권위보다 민초와 함께 하는 모습이
정겨워보인다
.
듬직한 자연석 바위 위에 비가 서 있다.
바위에는 시와 이름으로 가득차 있다. 요새 말하면 낙서라고 할
수도 있는데..그나마 돌이끼가 그 품격을 높여주고 있다.
바로 옆에 내따뜻한
감동을 심어준 부도밭이 나온다. 10여기의 부도가 올망졸망 모여서 시원한
눈맛을 즐기며 맑은
공기를 마시고 있다. 손 끝에 닿는 돌 촉감이 부드럽다. 여기저기 둘러보다
멋진 부도를 발견했다. 하단부에 사람 얼굴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월정사부도비 거북머리가 사람얼굴과 닮았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부도에
이렇게 사람 얼굴이 여럿 나온 것은 처음 본다. 그 표정 하나하가 제각각이다.
생전에
중생을 교화하지 못한 미련 때문일까 아니면 스님의 덕을 받은 민초들의
얼굴일까?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가며 나름대로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본다.
용문사에서 가장 감명깊었던
부분이 바로 절묘한 가람배치다. 대개 사찰의 축선이 일직선인데 반해
이 곳은 용이름을 반영했는지 길 자체가 용이 휘감아도는 모습이다.
일주문을 거치면 계곡이 가로 막는다. 둥근 아치형 다리를 건너 천왕각을 만나고 다시
계곡을 건너 봉서루가 닿는다. 누각 밑에서 계단을 오르면서 대웅전의 자태가
서서히 드러난다.
이런
축선이야말로 단조로움에서 벗어나 끊임 없이 신선함을 수혈받는다.
물소리 때문에 귀가 즐겁다. 둥근 다리를 건너면서 세속을 털어낸다.
산문에 빨려들어 가면서 어느새 깨끗하게 정화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천왕각을 지나친다.
사천왕의 발밑에는 악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양반과 탐관오리가 누어있다.
백성을 잘
다스리라는 민초들의 염원이 적극 반영된 것이 아닐까? 생각보다 탐관오리가 잘
생겨서 그렇게 나쁜 짓을 할 것 같지 않아 보인다.
봉서루 밑에는 '구시통'이 길게 잘리잡고 있다. 100여명의 식기를 한꺼번에
씻을 수 있는 정도의 크기다. 그 규모만 봐도 얼마나 사세가 컸는지 알 수 있다.
아마 왜구가 쳐들어 왔을 때는 승병들이 밥을 먹고 식기를 이곳에 씻었을거다.
남해안의
많은 사찰에서 스님들이 칼과 창을 들었다.여수 흥국사가 그렇고 고성
옥천사가 그렇다. 그리하여 절집 배치가 대단히 폐쇄적이다. 언제든지
적과 싸울태세를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용문사 역시 그렇다. 사방으로
바위 벼랑이 높고 험하여 성채처럼 이루어져 있어 유의양이란 사람은
'산사람이 문을 막았으면 일만 사람이 열지 못할 땅' 이라고 할
정도다.
남해는
알다시피 군사적 요충지다. 동해에서 남해를 통해 서해로 가는 가장
가까운 해로이기 때문이다. 고려 때 관음포 싸움이 있었으며 임진왜란때는
충무공이 순국할 정도로 놓칠 수 없는 군사적 요충지다.
숙종때는
守國寺로 지정되어 왕실로부터 보호를 받는 사찰이며 금패와 번을 하사
받았다고 한다.
대나무밭 사이에 놓여진 돌계단이 참 아늑하다. 딱딱한
돌이 모여 생동감있는 구조물로 바꾸어 놓았다. 밟을수록 돌이 부드럽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대웅전이 환하게 빛을
내고 있다. 신라 원효대사가 금산을 찾아와 보광사를 짓고 그 산을 보광산이라 명하고,
금산에 있던 보광사를 이곳으로 옮겼다고 전해진다. 절집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지만
호구산의 능선과 그렇게 잘 어울릴 수 없다. 돌계단을 올라 화려한 포작을 감상한다.
용이 들어가는 산문답게 용조각이 하늘을 수 놓는다.
단청이 바래 그 속살이
드러났지만 그 윤곽만으로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법당 앞 쪽 공포에
용머리를 조각했고, 뒤쪽 공포에 용꼬리를 달았다. 그리하여
이 법당은 용이 이끌고 가는 반양용선임을 보여준다. '반야용선'은
사바세계에서 피안의 극락정토로 건너갈 때 타고 가는 상상의 배를 말한다.
반야용선이
앵강만을 거쳐 남해바다를 유영하다가 세존도에 들어가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내부역시 용으로 가득차 있다. 화려한 닫집밑에는 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대웅전
오른쪽의 명부전에 꼭 들려야한다. 용문사는 우리나라 3대 지장도량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고풍스런 유물은 찾을 수 없지만 그 의미를 생각해
본다.
연이어 지은 건물이 특이하다. 왼쪽의 신축 요사채는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오른쪽 건물은 맛배지붕을 하고 있다. 두 지붕이 사이좋게 머리를 맞대고
있는 것이 친근하다.
용문사의 돌계단과 돌담은 참 아늑하다. 질박한 남해사람의 심성을
보여주고 있다.
작은 돌담안에는 공양에 쓸 된장 항아리가 넉넉하게 자리잡고 있다.
어려움을 당했을 때
현실을 떠나 산사에 몸을 맡기고픈 충동을 느낀 적이 있을것이다.
바로 용문사란 절이 그런 곳이다. 마음속의 남아있는 휴식처라고
할까? 입구 계곡부터 시작해서 꼭대기 텃밭까지 욕심이
없다. 겸양만을 배울 뿐이다. 그저 걷기만 해도 가슴속에 시원한
생명수가 쏟아진다.
용문사..다시
가고픈 절집이다. 그 오솔길에 몸을 의탁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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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지리산에 아는 분이 살고 있어서 이달말에 휴가를 가려고 합니다. 남해를 들러 오려고 계획했던터라 용문사 얘기에 눈이 번쩍 뜨입니다^^ 어디메쯤 있는지 가는 길좀 알려주시와요^^
용문사를 가실려고 승용차로 남해읍-이동면(우회도로)-금산 입구 가기 500여미터(군민동산 가기전 언덕길) 전에 언덕길에서 우회전하셔서 10여분정도 가시면 있습니다. 근처에서 여쭤 보세요. 그게 지름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