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무엘상 1장 1- 2절
제목 : 엘가나의 두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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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가나의 두 아내
2008년 7월 13일 본문 말씀: 사무엘상 1:1-2
(삼상 1:1)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자가 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이더라』
(삼상 1:2) 『그에게 두 아내가 있으니 하나의 이름은 한나요 하나의 이름은 브닌나라 브닌나는 자식이 있고 한나는 무자하더라』
우리의 메시아는 상처받은 메시야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상처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면 이는 곧 메시아를 모르는 게 됩니다. 즉 ‘상처없는 메시아’라든지 상처받은 것을 도외시해도 되는 그런 메시아란 모두 가짜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상처없는 말끔한 메시아를 선호합니다.
이는 자신이 그렇게 상처없기는 기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마음의 상처를 없애주는 그런 하나님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상처를 남기는 하나님은 아예 하나님이 아니고 여기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두 여인이 나옵니다. 한 여인은 상처가 없는 여인이요 다른 여인은 상처를 안고 있는 여인입니다.
상처없는 여인이 말합니다. “나는 축복받았기에 자식이 있고 너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기에 자식이 없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한나는 상처를 받습니다. 그녀는 통곡합니다. 그녀는 자식없는 것도 억울하지도 않고 브닌나가 자기를 구박하는 것도 억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답답한 것은 하나님관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는데 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정립하는 것을 중요시 여기지 않는 시대입니다. 그저 눈에 보이는대로 끌어당겨서 자기 것 만드는데 급급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냐’라는 것이 그렇게 중대한 문제가 아니라고 보고 있습니다. 자기 가진 것을 과시하는 재미로 살고 싶어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도시, 하나님이 없는 가정, 하나님이 없는 교회, 하나님이 없는 직장 이 모든 광경이 하등 문제시 안 되는 광경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통탄할 지경입니다. 하나님을 몰라도 용납이 되는 세상은 곧 지옥에서나 있을 일입니다. 왜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지 않을까요?
그것은 헛된 것 가지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브닌나의 잘못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식을 가진 것으로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으로 여긴다는 사실입니다. 이로 인하여 한나는 졸지에 하나님께 복을 받지 못하는 여인으로 분류될 판입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 흔들릴 판입니다.
이제 건성으로 알았던 하나님이 진짜로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바뀔 상황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나를 모진 기도로 몰아넣습니다. 기도란 무능의 표현입니다. 그 어떤 경우라도 ‘나는 무능할 수 밖에 없습니다’를 고백하는 순간이 기도 순간입니다. 자아의 무능을 알때까지 인간은 자신의 본색이 드러날 필요가 있는 겁니다.
즉 자신의 성질대로, 성깔대로 기도하는 겁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따지고 싶을대로 다 따져보게 하는 겁니다. 평소에 아무리 하나님의 영광을 외쳐도 정말 본인이 갖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 얻고자 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비록 하나님의 영광을 빙자한 자신의 영광을 추구해도 어쨌든 본인이 상처를 받는다는 것이 실제 현상입니다.
상처받은 자는 그 한을 바깥으로 폭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본색에는 각가지 경우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한 달 수입이 늘어나게 해달라, 자식의 성적을 향상되게 해달라, 교인 수가 부쩍 늘어나게 해달라, 사업하는 사람들은 장사가 되게 해달라, 교인들을 걱정하는 목사들 같으면 ‘제발 교인들이 예배 시간에 많이 참석하고 진지하게 모임을 중요시하게 해달라’ 등 각종 한 맺힌 것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본색이 드러날 때까지 계속해서 한을 생산해내는 사태를 일으킵니다. 예를 들면, 교인들이 오후 예배까지 참석하고 갔으면 하는데 날이 갈수록 오전 예배만 마치고 하나님께 할 도리 다 한 것처럼 자기네 가족끼리만 놀려 갈 때, 목회자는 좌절감을 갖고, 이 좌절감이 목사에게 한이 되고, 그 한이 곧 목사의 기도로 이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평소에 목사의 본색입니다.
즉 목사는 하나님의 뜻이라든지, 주님의 뜻이라든지 하는 것은 다 구실에 불과하고 실은 자신에게 상처가 되고 한이 되지 않는 방향으로, 늘 기쁨이 충만한 생활을 할 수 있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연히 이 목사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의 상처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지요.
그 상처가 어떻게 생긴 상처인지를 알고 싶어하지도 않습니다. 자기하고 상관없는 상처인 줄 압니다. 그저 자신의 한만 풀어주기만을 하나님께 기도할 뿐입니다. 즉 하나님 상처는 모르고 자기 상처만 크게 느끼면서 사는 겁니다. 하나님은 한나를 이런 식으로 몰아가십니다. 라이벌 브닌나를 통해서 일을 그렇게 하십니다.
비록 한나 곁에 한나를 사랑하는 남편이 있었지만 한나에게 시급한 것은 그런 인간의 정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이 누구신가가 확립하는데 있습니다. 정말 브닌나의 말대로 자식을 가진 것이 하나님이 사랑한다는 증거가 되느냐 하는 겁니다.
사무엘상 2장에 보면, 한나가 사무엘을 얻고 난 뒤에 부른 찬양이 나옵니다. “유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않도다 전에 잉태치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한나의 입에서 이런 찬양이 나오려면, 즉 이런 환희와 기쁨과 행복의 절정이 나오려면 한나는 가난과 없음과 아기 낳지 못함에 동참해져 있어야 하는 겁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은 십자가에 수난을 당했습니다. 이 수난에 동참하지 않고서 구원되는 경우가 없는 이유는, 우리 속에 참된 메시아 상이 정립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없음과 죽음을 품고 살아갔습니다. 그로 인해 ‘있음’과 ‘구원’과 ‘생명’을 노래하는 자들로부터 저주받아 마땅한 인물로 낙인 찍혔습니다. 하나님으로 저주받은 자의 표본으로 간주된 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이야말로 진짜 메시아로 알고 있습니다. 다른 메시아가 없음을 압니다.
참된 메시아 노선에 우리가 소속이 된 자라면 예수님이 세상으로 받은 상처도 함께 받게 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도시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교회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가정과 직장에서 성도는 없음과 죽음의 표본처럼 평가받으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런 와중에서 성도들은 ‘세상을 닮아보기’를 시도하게 됩니다.
즉 “나도 너희들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복받았다. 보여줄까?”라는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실적 같은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기를 고대하게 됩니다. 그것이 기도로 이어집니다. 얼마나 서러웠으면 한나는 통곡하면서 울었을까요. 하지만 이 과정을 겪여야 그동안 우리 자신이 예수님을 얼마나 크게 오해했는지를 압니다. 예수님에게 용서받은 피 이외에 다른 사랑은 없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예수님에게 상처를 입힌 원수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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