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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당파 없는 지도자
한 사람의 탁월한 지도자가 세워지기까지 상황은 결코 여유롭거나 녹록하지 않다.
이번 장에는 그 상황과 과정들 그리고 그 속에서 지도자로 세워지는 훈련을 살펴보는 것은 청교도의 길을 걷는 과정에 놀라운 통찰과 지혜를 배우게 된다.
[대추 한 알 - 장 석 주]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낱
참된 지도자가 필요한 상황들
로이드 존스가 항상 가까이 했던 복음주의자들은 1904-1905년의 웨일스의 부흥을 참된 영적 능력과 영적 행복의 시기로 회고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모든 부흥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시기의 각성의 효력들은 다른 것들과 혼합되어 버렸고, 다양한 지역의 전통적인 교회 안에서는 그 열매들이 견고하게 결합되지 못했다. 너무 자주 영적 어린 아이라는 비판을 받고 부흥현상에 공감하지 못한다고 비판을 받은 칼빈주의 메서디스트 사상은 사양길에 접어들어 교인들이 이탈하는 일이 벌어졌고, 웨일스 어떤 지역에서는 침례교회와 “플리머스” 법학을 공부했다가 아일랜드 교회의 성직자가 된 존 넬슨 다비(John Nelson Darby, 1800년 ~ 1882년)를 중심으로 영국 성공회의 지나친 교파주의와 형식적인 교인들의 생활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이 모여 형제단이라는 이름으로 교회 모임을 결성하였고, 이후 영국 플리머스에 본부를 두게 되면서 플리머스 형제단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형제단이 크게 성장했다. 또 스스로 부흥에 대한 메시지를 갖고 있다고 자처하는 오순절 교단도 입지를 확대시켰다. 그들은 다수의 채플들의 냉랭한 예배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1904년 이후에 웨일스에서 복음주의는 산산조각이 났다.
이 상황을 타개할 하나님의 방법은 무엇인가?
복음 지도자로 부르심
샌드필즈 교회의 부흥에 로이드 존스는 놀라움을 느끼지 않았다. 처음부터 복음 설교 아래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예상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사역 초기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들이 일어났는데, 그 중에 하나는 1927년에 하나님이 지역 안에 복음 전도자의 사역을 감당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고 확신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로이드 존스는 그 일을 전혀 원하지 않았다. 그는 천성적으로 평안과 고요 속에서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사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왜냐하면 다른 곳에서 설교해 달라는 부탁이 쇄도하여 도저히 에버라본에서 조용히 안주해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임한지 1년이 안 된 시점인 데도 그는 종종 에버라본을 떠나 두 번의 주중 저녁 예배(화요일과 목요일)와 또 호우 예배에서도 자주 설교를 했으며, 오래전부터 이것이 휴가기간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주간의 통상적인 패턴이 되어 버렸다. 이후로 반세기 동안 한 해도 조용히 지낸 적이 없었다!
로이드 존스의 설교에 대한 반응들
그렇다면 그 반응은 어떠했을까? 이 점에 대해 로이드 존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가 남 웨일스에 갔을 때 반응이 다양했습니다. 웨일스의 대다수 칼빈주의 메서디스트들은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저의 신앙 때문이 아니라 그들 생각에 제가 자기들의 사역을 선전해 주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잉글랜드의 칼빈주의 메서디스트들 다수는 지성주의를 자처하고, 저의 견해와 가르침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 저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무척 상냥하고 공손했지만 저는 그들을 반대자로 느꼈습니다. 침례교도는 대체로 가장 열렬하게 저를 지지했고 두 팔 벌려 환영했습니다. 그들은 감정주의자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복음주의자를 자처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복음주의자가 아니었고, 종종 어떤 신학이나 지식이 없이 무조건 ‘복음을 예찬했습니다.’ 그런데 회중교회 신자들은 또 달랐습니다. 그들은 저에게 의혹의 눈초리를 보냈습니다. 그들 역시 지성주의와 철학자를 자처하면서 의심하고 비판적이었다.”
웨일스와 영어를 사용하는 교단의 분파 사이에 나타나는 차이점은 칼빈주의 메서디스트 교단에는 1497개의 교회에 속해 있었는데, 그 중의 361개의 교회가 영어를 사용하는 교회, 웨일스 어를 일차 언어로 사용하지 않는 교회였고, 이로 말미암아 이들 교회는 장로회가 따로 구성되어 있었다. 영어를 사용하는 장로회는 비교적 전통적인 요소가 약하고, 현대 신학 사상을 상당히 많이 받아들였다.
환영파 : 엘리세우스 하웰스, W. E. 프라이더크
로이드 존스가 영어를 사용하는 교단 장로회에 속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설교 초청은 웨일스어를 사용하는 교단 장로회에서 온 것이었다. 브리지엔드 위편의 한 작은 탄광촌에 영어를 사용하는 엘리세우스 하웰스 목사의 교회가 있었는데, 설교초청 동기는 대체로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호기심은 놀람과 두려움으로 바뀌고 말았다. 예배 시간에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셨기 때문이었다. 하웰스와 로이드 존스는 곧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하웰스는 독서와 옛 세대 사람들로부터 칼빈주의 메서디스트 역사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얻었다. 그 결과, 배우는 데 열심인 로이드 존스에게 메서디스트 책들에 대해 소개해 줄 수 있었다.
로이드 존스를 따스하게 환영해 준 또 하나의 주목할 만한 인물은 W. E. 프라이더크 목사였다. 프라이더크 목사는 1926년에 80살이 넘은 후에도 여전히 설교하고 있었다. 그는 사역 초기에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많은 설교를 했으나 생애 중반에 들어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랑으로 강조점이 현저하게 바뀌었다.
로이드 존스는 이 목사의 설교를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거의 없었다. 1927년 9월에 두 사람이 이틀 동안 함께 설교해야 할 때가 되었는데, 이때 로이드 존스는 프라이더크 목사에 대한 존경이 너무 강해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로이드 존스 목회 초기의 설교를 듣고 나서 “자네는 옛 진리를 설교하지만 그 진리에 새로운 상표를 찍어 전하고 있네.”라고 칭찬함으로서 용기를 준 사람은 바로 프라이더크 목사였다.
건설적인 비판 : 신딜런 존스
그러나 로이드 존스의 설교에 대한 모든 평가가, 심지어는 동조적인 청자들에게서 주어지는 평가라 해도, 항상 호의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다양한 지역에서 설교 초청을 받았기 때문에 얻는 유익 가운데 하나는 때때로 건설적인 비판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1927년 5월 19일 신딜런 존스 목사와 함께 설교를 한 다음에 그는 소중한 충고를 들었다. “내가 자네 설교에 대해 딱 한 가지만 비평하겠네. 자네는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네. 오늘 밤 내가 어떻게 하는지 잘 보게. 나는 한 가지 요점만 말하되, 그것을 세 가지 다른 방식으로 말하지!”라고 말했다. 이것은 시간을 들여 배워야 할 지혜로운 충고였다.
사역에 대한 반응의 양극화
1928년에는 목사와 교회들 사이에서 로이드 존스의 사역에 대한 입장이 양극화되는 경향이 분명히 나타났다. 이와 관련하여 1928년 2월 14일과 15일에 에버리스트위스의 실로 채플에서 로이드 존스가 톰 네핀 윌리엄스 목사와 함께 초청받은 예배는 특별히 기억할 만했다. 열정적인 설교자로 알려진 ‘톰 네핀’목사는 1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에 복무하는 동안 회심한 다음 불타는 전도자가 되어 웨일스에 돌아온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후에 그는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확신에 따라 신학 공부를 했으나 결국은 극단적인 자유의자가 되어 나타났다. 강단에서 그의 웅변은 예전처럼 설득력이 있었지만, 극적인 웅변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것은 성경에서 권위를 두기보다는 최근의 현대 심리학 이론에서 권위를 두는 사람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로이드 존스는 누가복음 3장 16절-“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예수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신다.”는 말씀-을 본문으로 회중에게 ‘여러분은 누구에게 교인으로 세례를 받았느냐?’라고 묻고, 교회가 더 이상 박해를 받지 않는 것은 갖고 있었던 권세를 더 이상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교회의 가장 악한 원수는 세상 속에 있는 믿음 없는 사람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으면서 믿음이 거의 없는 사람이다고 증거했다.
이후 1928년 8월 어느 주일에 두 사람은 랭드린도드 웰스에서 다시 만났다. 이날은 연례 “웨일스 케직 사경회” 주간으로 대회가 끝난 후 주일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도시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로이드 존스는 지역 교회 가운데 한 교회에서 설교하도록 되어있었고, 윌리엄스는 거대한 앨버트 홀에서 설교하도록 되어있었다. 그런데 이 교회는 앨버트 홀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었고, 네핀은 젊은 설교자에게 무척 친절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핀은 앨버트 홀에서 가장 극단적인 설교 가운데 하나를 전했는데, 이 설교에서 그리스도의 신격과 부활을 조롱했다.
몇 주 후에, 웨스트 카마던에서 개최된 남 웨일스 교단 총회에서 목사들은 당연히 급진적 행동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이단적인 사설로 유명하게 된 톰 네핀을 제명하게 되었다. 톰 네핀의 소속 장로회는 카마던, 워터 스트리트 교회에서 9월 마지막 목요일 오후와 저녁에 특별 예배를 드리기로 결정했고, 그때 동요하던 교회를 진정시키고자 초청한 설교자는 마틴 로이드 존스였다. 이후로 51년 동안 카마던의 워터 스트리트 교회는 매년 9월 마지막 묙요일에 이 특별예배를 계속 드렸고, 항상 강사는 같은 설교자, 곧 로이드 존스였다.
1929년 한 설교에서 로이드 존스는 19세기 칼빈주의 메서디스트 사상의 영적 쇠퇴를 조사해 살펴본 후에 이렇게 말했다.
“교회가 세속적 기관이 되어 버린 책임은 우리 비국교회 선조들에게 있습니다. 회심과 거듭남은 전혀 언급되지 않고, 부각되어야 할 때 오히려 거부당하는 당혹스런 주제가 되었습니다. 사실상 우리는 평신도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부끄러워하고, 대신 정의와 평화를 부르짖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장로회와 지역 대회를 보면, 이런저런 성공에 대해 곧 시험에 합격하거나 승진하거나 다른 세속적 영예를 얻거나 한 일들에 대해 계속 축하하고 감사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지만 어떤 죄인이 회심하고 돌아온 것에 대해 감사하고 어떤 사람이 죄를 버리고 거룩한 삶을 살게 되었을 때 축하하는 것은 결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교회를 교회로 만드는 일, 곧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습니다!”
로이드 존스가 수시로 설교자로 초청을 받게 된 것은 단순한 그의 이름을 빌려 많은 사람을 끌어 모으려는 기대감에서였다. 또한 그가 설교를 전하는 사상이 지배적인 사상과 전연 다른 상황에 직면해야 했다. 1929년과 1931년에 웨일스 장로회의 연례 컨퍼런스에 초청을 받아 강연을 했을 때, 로이드 존스는 존 칼빈을 한 번 인용한 것 말고는 성경 외에 다른 것을 인용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강사들은 “축자영감 교리는 유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부적합하다.”고 한 말을 찬성하며 인용했다. 다른 강사는 자유주의 신학으로 상당한 바람을 일으키다 후에 지성적 가르침을 포기하고 감정을 일으키는 것을 목표로 새로운 설교방식을 취해 그 결과 더 많은 지지자를 모으는 일들이 일어났다.
사역의 발전이 계기가 된 사건
1920년대 후반 이때쯤 로이드 존스의 사역의 발전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 일이 브리지엔드에서 월요일 밤에 설교를 한 다음에 일어났다. 이날 예배를 드린 교회의 목사는 로이드 존스의 지지자는 아니어서 이 새로운 설교의 생소한 강조점에 당혹감을 느꼈다. 예배가 끝나자 그는 이사하면서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소! 하이퍼-칼빈주의자 칼빈주의자들의 어떤 교리에서는 칼빈보다 좀더 강하게 주장하였다고 하여 만들어진 단어이다. ‘하이퍼 칼빈주의’는 17세기 후반 영국에서 벌어진 ‘신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의 논쟁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즉 ‘신율법주의자들’에 대한 과도한 대응에서 ‘하이퍼(과도한) 칼빈주의’가 태동하게 되었다. 하이퍼 칼빈주의는 균형을 잃은 칼빈주의이다. 1. 예정론의 극단적 강조로 인한 전도의 무시 2. 하나님 주권의 극단적 강조로 인한 인간의 책임 무시 3. 칭의에 대한 극단적 강조로 인한 성화의 무시/율법페지론과 방종주의이다.
인지 아니면 퀘이커 교도인지 판단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로이드 존스는 자기는 절대로 하이퍼-칼빈주의자가 아니라고 확신시키고, 그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는 “목사님은 설교에서 하나님의 활동과 하나님의 주권은 하이퍼-칼빈주의자처럼 말하고, 영적 경험에 대해서는 퀘이커 교도처럼 말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사역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지 않기 때문이오.” 라고 대답했다.
로이드 존스가 비판자에게 구체적으로 지적 받은 교리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이 시점에서 회중교회 소속으로 브리나먼 교회의 목사로 훗날 브레콘의 웨일스 회중교회 칼리지의 학장이 된 베넌 루이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당시 그가 추천한 책의 저자들 가운데 두 명의 잉글랜드 회중교회 소속의 목사가 있었는데, P. T. 포사이스와 R. W. 데일이 있었고, 이 때 로이드 존스의 사고에 특별히 도움을 준 책은 포사이스의 [십자가의 중대성]이었다. 로이드 존스는 이 저자들의 성경의 완전영감 견해에 약점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나 그것이 그의 연구 주제는 아니었고, 또 저자들의 이런 견해 때문에 그가 전체 성경을 오류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느낀 것도 아니었다.
지도자의 결심과 사역결정의 원리들
R. B. 존스
1904년 이후에 웨일스에서 복음주의는 산산조각이 났고, 일부 지도자들은 정규 교회나 교단의 영역을 벗어나 활동하는 데 더 큰 비중을 두었다. 이런 사람 가운데 하나가 포스 교회의 R. B. 존스 목사였다. 그는 1904년 부흥 당시에 아주 활발하게 활동하던 유능한 설교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교단이 현대주의를 용납한다는 이유로 교단에서의 정규 활동을 중단하고 탈퇴한 다음, 4개의 독립교회를 통합시켜 자신의 관할 아래 두었다.
로이드 존스는 목회 사역 첫해에 R. B. 존스와 친해졌고, 그에게 함께 일하자는 권면도 받았다. 그러나 R. B. 존스는 칭찬할 점도 많이 갖고 있었지만 동시에 자신이 웨일스 교계에서 고립된 위치에 있게 된 것은 오직 자신만이 하나님 말씀과 경험적 기독교를 대변하는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이라고 잘못된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가 성경을 전적으로 믿은 것은 확실하지만, 참된 신학적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해 아무 관념이나 쉽게 휩쓸리는 경향이 있었다. 근본주의의 영향을 받아 부정적이고 반지성적인 이미지로 그 지역에 기독교 쇠퇴의 원인을 제공했다.
플리머스 형제단
이 시기에 웨일스 복음주의자들 사이에 “성결” 운동 집회가 인기가 있었던 것처럼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예언에 대한 세대주의 전(前)천년왕국설을 지지하는 운동 역시 인기가 있었다. 많은 지역에서 그리고 거의 보편적으로 플리머스 형제단 안에서는 스코필드 성경의 예언에 대한 관주를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여 선포했다. 그런데 1929년 12월에 랭널리에서 일어난 희한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로이드 존스가 형제단에게 소개되었다.
한 비신자인 실업가 부부가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선교사가 되기 원한 자기 아들의 마음을 효과적으로 돌려준 것에 감사해서 로이드 존스 부부를 초대했다. 사실 그들의 아들은 영적 관심이 아니라 감상적인 생각에서 외국에 나가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때 존스에게 그날 밤 9시에 그 가족과 함께 모여 갖게 될 파티에서 그들에게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이유가 무엇일ㄲ요?”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그는 초면에 실례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얼른 이 관념을 물리쳤다. 그러나 자기가 이곳에 온 것은 이 말을 하기 위해서라는 생각을 피할 수 없었고, 그의 내적 갈등은 무릎을 꿇고 그렇게 하겠다고 하나님께 약속하기까지 해소되지 않았다.
드디어 밤이 되었다. 로이드 존스는 그 질문을 던지자 아무도 그 질문에 정확히 대답하지 못하자, 그는 설명을 시작했고, 계속해서 큰 토론이 벌어졌다. 드디어 집주인이 무릎을 꿇고 용서의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고, 아내와 딸과 마침내 아들도 자기가 지금까지 들은 진리를 믿었다면 자신의 삶의 방식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자 오히려 진리에 대한 저항이 더 강해졌다. 그것은 부모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보모는 복음주의 신앙으로 돌아섰고, 아들은 목회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 가정의 식구들은 랭널리에서 유명한 상인들이었고, 1929년 크리스마스 저녁에 그 가정에서 일어난 일은, 곧 그 지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특히 플리머스 형제단은 이 비범한 칼빈주의 메서디스트 설교자에 도전을 받아 그 사역을 인정하고 열심히 도와주겠다고 제안했다. 스코필드 성경을 선물로 주고, 예언을 믿는 믿음의 중요성도 주목하라고 권면을 받았다.
훗날 자기와 하나라고 종종 생각할 정도로 기꺼이 참석했던 단체에서 발을 뺀 것에 대해 설명하면서 로이드 존스는 그런 결정을 하도록 만든 두 가지 원리에 대해 말했다.
“하나는 성경에 대한 이해였고, 다른 하나는 18세기의 칼빈주의 메서디스트 부흥에 대한 지식때문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가 저를 지배했고, 어떤 것이 제 앞에 주어졌을 때 만약 이 두 원리에 부합하지 않으면 어떻게 처리할지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메서디스트 선조들의 고결한 영성과 깊은 경건과 전연 다른 어떤 것을 보면, 그것을 따를지 여부를 놓고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신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초기 목회 사역에 있어서 그리고 평생에 걸쳐 복음주의 진영에서 통상적으로 받아들인 것들 가운데 많은 사실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사람들이 그의 독자성을 개인주의로 몰아붙일 때에도 이 신념 때문에 역사의 교훈들을 널리 알리는 데 더 큰 열심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1927년 이후로 과거의 교훈들은 로이드 존스의 설교의 목적을 이해하는 데 절대적으로 기본적인 역할을 했다. 훗날 로이드 존스는 “18세기로 가십시오!”라고 설교자에게 권면했다. “다시 말하면 18세기에 경험한 성령의 큰 물결과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십시오. 설교자에게 그것은 절대로 헤아릴 수 없는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설교에 있어서 교회 역사와 전기를 읽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1920년대 후반이 웨일스의 상황을 살펴본 다음 로이드 존스는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자신이 할 일은 칼빈주의 메서디스트 사상 안에 굳게 서 있는 것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선교와 집회를 좋아하고 세분된 그룹을 지향하는 개인주의보다 정규적이고 정상적인 은혜의 수단을 강조하는 칼빈주의 메서디스트의 교회 중심 제도를 선호했다. 그의 소망은 웨일스 장로교단이 본래의 위치를 돌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당시에는 이미 무대에서 사라졌지만 그들의 사역에서 큰 도움을 받았던 이전 세대 목사들을 높이 평가했다.
로이드 존스의 사상의 두드러진 특징은 특수 세부 사실보다는 일반 원리에 훨씬 더 큰 관심을 갖고 있었고, 일단 원리 분에 있어서 확신을 갖게 되면 그것이 그의 생각의 기본이 되므로 이 주요 사실을 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이처적인 문제들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으로 무시할 수 있었다. 때때로 이 절차에 대해서는 잘못을 저지를 수 있었지만, 그를 금방 아주 유명한 지도자로 만든 것은 의심할 것 없이 근본적이고 일차적인 진리의 지배적인 중요성을 포착해 내는 능력에 있었다. 로이드 존스는 아무도 그토록 오랫동안 시도한 적이 없는 철저함을 갖고 신앙적 상태를 분석했고, 그가 오랫동안 확립되어 있고 또 다양한 웨일스의 종교적 진영 가운데 우뚝 설 정도로 높은 위치를 차지한 것은 이런 사실의 결과였다.
반대에 직면했을 때 위로를 얻는 법
로이드 존스의 사역에 빈번하게 나타나는 놀라운 역사가 있었지만 반대에 직면했을 때 사실은 동요를 느꼈다. 한 번은 한 목사가 특히 악의적인 태도로 자신을 공격했을 때 로이드 존스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신실한 제자도에 대해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고 권면한 말씀에 확신을 가짐으로써 큰 위로를 받았다.
신앙부흥을 위한 형제들 모임
그리고 초기 사역에 큰 용기를 준 요소 가운데 하나는 조용히 상호 지지와 교제를 위해 같은 마음을 품은 형제들의 작은 모임이 결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복음의 진리를 믿고 선포하는 사람들의 분명한 행동과 상호협력의 필요성을 느끼는 다음 형제들이 신앙의 부흥을 촉진시키기 위한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1930년 12월 30일 화요일에 에버라본의 샌드필즈 교회에서 함께 모였다.
로이드 존스 목사, F. W. 콜 목사, A. 윈 토머스 목사, D. W. 하웰, 엘리세우스 하웰스 목사, W. R. 제임스 목사, 이언 필립스 목사, 아벨F. 윌리엄스 씨, T. 킹 데이비스 씨, A. E. 돌턴 씨, W. M. 존스 씨.
우리는 이 모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합의했다.
1. 우리는 교제를 위해 함께 모일 때마다 서로 솔직하게 생각과 경험을 나누고, 잘못과 실수를 고백하는 데 특별한 관심을 가질 것을 서약한다.
2. 우리는 “믿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이므로” 믿음에 속하지 않는 것은 어떤 실천이든 금하기로 서약한다.
3. 우리는 매일 30분 동안 하나님께 기도하되, 특히 다음과 같이 기도하기로 서약한다. (1) 신앙의 부흥을 위해 (2) 서로를 위해
4. 우리는 웨일스 장로교회의 신앙 선언을 받아들이고 동의하지만, 추가로 다음가 같은 문제들은 우리의 목회의 사역에서 특히 강조되고 유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1) 결단을 위한 소명, 회심, 거듭남을 회중에게 촉구한다. (2) 모든 신자는 죄사함과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 (3) 모든 신자는 거룩하게 되고, 성령을 받고, 삶 속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갈5:22)을 하나님의 뜻으로 가르침을 받고 교육받아야 한다.
5. 교회는 바자회, 콘서트 등과 같이 진리를 유지하는 모든 세속적이고 의심스러운 수단들을 물리쳐야 한다.
6. 우리는 1931년 4월 금요일에 펜코드에서 다시 만나기로 한다.
어떤 면에서 1730년대의 메서디스트 “홀리 클럽”과 비슷한-주로 젊은 사람들고 이루어진- 이 그룹은 교단 내에서는 공개적인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영적 영향력을 미치는데 있어서는 중심 역할을 했고, 같은 비전을 품고 참여한 자들의 확신을 강화시켜 주었다.
퀘이커 교[ -敎, Quarkers ]
1647년 영국인 조지 팍스(George Fox, 1624-91년)가 창설한 프로테스탄트의 한 교파. 영국과 식민 아메리카 등지에서 일어난 급진적 청교도 운동의 한 부류다.
조지 팍스는 11세에 구두방, 목축업자 집에서 일하며 가난하게 지내 학식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진실하고 경건하며 성실하여 19세에 진리의 빛을 찾아 집을 나서 22세인 1646년에 진리를 깨달았다. 그는 성직자나 기존 교회가 지닌 형식이 없어도 내면의 빛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며 성령의 감동을 중시하였다.
1647년 팍스는 자신이 깨달은 진리의 빛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성경보다는 내적 계시를 중시하고 별도의 교리도 만들지 않았다. 예배 시간에도 인도자 없이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처소에서 침묵과 명상을 하였다. 그는 진리는 변화된 성스러운 생활 가운데 나타나는 것이라 하여 노예, 전쟁, 사형 제도를 반대하는 사회 개혁에 주력했고, 금주(禁酒)와 검소한 생활을 강조했다. 모든 형식주의를 배격하고 내적이며 정신적인 경험을 중시했다.
그의 이런 가르침과 방식은 많은 반발을 불러와 그는 여러 차례 투옥되었지만 그의 순수한 열정과 진실한 면모는 당시 많은 청교도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래서 1652년 '친구들의 모임'(Society of friends)이라는 퀘이커 공동체가 생겼다. 팍스는 진리의 말씀을 듣거던 '떨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퀘이커 파는 사람들 사이에 '떠는 자'(Quaker)로 조롱받았고, 훗날 이것이 교파의 이름이 되었다.
1654년 그는 첫 개종자며 미망인인 마가렛 펠(Margaret Fell, 1614-1702년)과 결혼하여 그의 집을 퀘이커 본부로 사용하였다. 1658년에는 영국 도처에 '친구들의 모임'이 생겨났다. 그러나 각지에서 많은 반대에 부딪혀 1661년까지 거의 3,000여 명이 투옥되었다. 하지만 이들의 선교열은 대단하여 예루살렘을 비롯한 서인도 제도, 독일, 오스트리아, 홀랜드 등지에 수많은 선교사를 파송하였고, 1656년에는 펜실페니아 주를 창설한 윌리엄 펜(William Penn, 1644-1718년)에 의해 미국에 퀘이커교가 전파되었다.
현재 미국과 캐나다에 약 13만여 명의 교도가 있으며 우리나라에는 1955년 2월에 전파되었는데, 함석헌(咸錫憲)이 대표적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