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3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5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19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1절 말씀에 보시면 사랑을 따라 구하라고 하면서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고 합니다. 사랑을 따라 구하는 신령한 것이 무엇입니까? 예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을 하려고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언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 전체에서 예언과 방언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지만 방언은 개인의 덕을 세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통역이 없는 방언은 사용하지 말라고 합니다. 교회에 덕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방언은 혼자서 하도록 하되 금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예언과 방언이 주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이라고 하였습니까?
아직도 성경의 계시가 완성이 되지 않았기에 사도시대에 계시가 예언이나 방언을 통하여 부분적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계시가 완성이 되면 그러한 계시적인 은사인 예언과 방언은 필요가 없게 됩니다. 온전한 것이 왔기 때문입니다. 그 온전한 것이란 계시의 온전함만이 아니라 그 계시의 온전함으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의 완전함을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란 죄인 되고 원수 된 자들에 대한 일방적인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 안에 있는 자는 온전한 자이기에 그 사랑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언하라는 것은 무엇을 예언하라는 것입니까? 우선 예언이 아닌 것을 먼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사람들이 예언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이 장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예언으로 생각합니다. 장래에 나에게 좋은 일이 있을지 불행한 일이 있을지를 알아서 좋은 일은 불러들이고 불행한 일은 피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찾아 가는 곳이 점집입니다.
지난주에 경찰들이 범죄자를 잡는 텔레비전을 보았습니다. 부산의 해운대경찰서에서 점치는 사람을 검거하였는데, 점치는 사람들이 어떻게 장래를 예언하는가 하면 자식들이 피를 토하고 있다고 하거나 사업이 안 된다고 하거나 해서 큰 굿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4억을 넘게 바친 것입니다. 그리고서도 그 집에 식모살이를 하고 잘못하면 얻어맞아가면서 그 무당의 말을 듣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신의 가정에 불행이 찾아온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렇게 무당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교회라는 이름으로 기도원이라는 이름으로 행하여지지는 않습니까? 유명한 기도원이나 기도하는 사람에게 기도 받으러 간다고 합니다. 무당이 하는 짓을 예수의 이름으로 하는 것입니다. 주의 종이라고 하면서 직접 계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걸리면 무당에게 속은 것과 마찬가지로 속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1:20절입니다.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구나!” 왜 이들을 용납합니까? 무당처럼 장래의 일로 위협하는 것입니다.
평소에도 종교성이 많아서 무당에게 속아 살았는데 이제는 또 다른 종교의 이름으로 속고 있는 것은 속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 것입니까? 세상이 어떻게 되어도 나와 내 가정은 잘 되어야 한다는 이기심이 가득한 것입니다. 이러한 욕심이 무엇을 잉태합니까? 죄를 잉태합니다.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 것입니다. 무당에게 속거나 중에게 속거나 목사에게 속는 것은 그 마음속에 자기 욕심이 가득하기에 속는 것입니다. 속이는 자가 나쁩니까? 속는 자가 나쁩니까? 똑같습니다. 그러므로 속이는 자나 속는 자가 함께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런 욕심이 없습니까? 우리의 시간과 물질을 어디에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까? 자신과 가정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을 제일로 사랑한다고 합니다. 얼마나 거짓말하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이런 우리의 심성으로 예언을 알려고 한다면 그 예언조차 자기의 이익의 재료로 삼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종말론을 이야기 하면서 재산을 착취하고 그런 종말론에 빠져서 자기는 구원받아야 하겠다는 것도 역시 인간 누구에게나 있는 보편적인 구원욕망인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의 예언들은 모두가 가짜 예언인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예언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것을 예언이라고 합니다. 창세기 15장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하십니다. 너의 후손이 외국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할 것이면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징치하고 나서 재물을 가지고 나오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언약을 받는 아브라함은 자식도 낳지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언약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내려가서 4백년간 종살이하고서 출애굽을 하게 됩니다.
출애굽기 6:3-9절을 봅니다. “봉독”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신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언약하신 것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기억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시기 위하여 모세를 보내시고 그 언약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합니다. 그런데 모세가 전한 그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평생 종살이나 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무엇 때문에 출애굽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자기 언약 때문입니다. 그 언약을 지키시기 위하여 열 가지 재앙을 내리고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출애굽 하는 것입니다. 홍해 앞에서 가만히 서서 홍해바다가 갈라지는 것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불순종하던 자들이 멸망합니다. 그들의 불순종이 무엇에 대한 불순종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바를 하나님께서 이루실 능력이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들을 멸망시키시지만 결국 자기의 언약을 이루어 내셔서 가나안 땅에 들여놓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언약 완성을 통한 영광을 하나님홀로 받으시는 것입니다.
자기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시는 하나님을 통하여 모세가 계시를 받았습니다. 율법도 받고 장차 일어날 한 선지자에 대한 예언도 받게 됩니다. 신명기 18:15절입니다. “ 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찌니라” 이 말씀은 어디에서 받은 말씀이며 그 내용이 무엇인지 계속 이어지는 말씀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6-22절 봉독” 진짜 선지자는 그 하신 말씀이 반드시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벌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거짓 선지자는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면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를 어떻게 구별합니까? 똑같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지만 그 말의 증험과 성취함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 선지자는 자기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입니다. 그것이 이 땅에서 예언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한 예언자들의 공통점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지적하면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의 언약을 말하면서 예언한 자들은 왜 백성들에게 미움을 당하고 배척을 당하였을까요? 개인의 욕망을 정죄하였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꿈, 가정의 꿈, 자기가 속한 단체가 회사이든, 국가이든, 교회이든 자기들의 욕망을 위한 장래를 꿈꾸면서 자기들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만들어가려는 자들에 대하여 심판을 선고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언을 증거 하는 자들이 받은 선지자들이 어떤 대접을 받는지 보겠습니다. 이사야 50:4-6절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5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열으셨으므로 내가 거역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6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예언을 전하는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알아듣고 학자의 혀로 곤핍한 자를 도와주려고 하는데 그런 예언자를 어떻게 대접합니까? 때리고 수염을 뽑고 뺨을 때리고 침을 뱉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언을 전하는 자에 대하여 이렇게 대접한 것입니다. 이 예언자들의 완성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예언을 하나님 자신이 오셔서 하셨는데 세상이 그를 어떻게 대접하였습니까? 결국 강도보다 더 밉다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아래 저주아래 있습니다. 이제 무슨 예언을 해야 할 것입니까? 이 세상은 멸망합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다 불에 타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 피로 만드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시며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곧 임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에서 돌이키시고 주님의 재림을 대망하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예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실 것을 증거 하는 것이 예언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언을 하려고 하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3절에서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는 것이며 권면하는 것이며 안위하는 것입니다. 즉 교회에 예언을 함으로 교회의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안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무슨 말로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서로 격려하고 안위케 되는 것입니까?
믿음으로 인하여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무엇이 위안이 됩니까? 잠시잠간 후면 오실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것이 위안입니다. 권면이란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이 세상의 물건들은 다 쓰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 중국이나 북한의 지하성도들이 고난 중에 있습니다. 그들에게 무엇이 위로겠습니까? 주님이 곧 오십니다. 이보다 더한 위로는 없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이 위로로 들리십니까? 저주로 들리십니까?
위로로 들리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저주로 들리는 것이 다수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에서 예언이 사라져버린 것이 아닙니까? 세상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주님의 영광의 날을 소망하면서 나그네로 외국인으로 살지 않고 있는 교회라면 이런 예언의 말씀은 저주로 들릴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가는 곳마다 환영 받는 일은 극소수였고 온갖 고난과 핍박과 매 맞음과 헐벗음과 위협 속에 춥고 떨었습니다. 참된 예언자의 길로 갔기 때문입니다.
말라기 4:5-6절입니다. “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구약의 마지막 성경입니다. 돌이키지 아니하면 저주로 땅을 치신다고 합니다. 그 엘리야로 온 자가 세례요한이며 이 세례요한은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증거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키지 아니하시고 그대로 두시면 저주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편안하고 잘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만이 전부인양 살아가는 자들에게 오늘도 예언을 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소돔과 고모라처럼 불살라집니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예언을 믿으시고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예언 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임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4:20-25 방언인 복음 2005. 11. 30
20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21 율법에 기록된바 ㄱ)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찌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22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23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3)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24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25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
내일이 종교개혁 488주년 기념일입니다. 왜 로마교회에서 개신교가 분리되어 나왔는가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이론들이 많지만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고린도전서의 말씀에 비추어보면 계시적인 은사가 사도시대 이후에도 계속 되는가 아닌가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도시대에는 부분적으로 계시가 주어졌습니다. 주어지는 방법이 예언이나 방언이나 방언의 통역을 통하여 주어졌는데 모든 예언과 모든 방언이 다 계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고린도전서 14:26-33절을 보면 서로 제제를 받아야 하고 분별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시대로 계시적인 은사는 완성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사도시대가 마감이 되고 나서 사도들에게 직접 복음을 들었던 사람들을 속 사도라고 부릅니다. 속 사도들은 직접 계시를 받은 사도와 자신들을 엄격하게 구별하였습니다. 그러한 사도시대와 그 이후 3세기까지 엄청난 핍박이 교회에 왔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계속 증거 되어 갔습니다. 그러면 수많은 기적과 계시가 계속 주어졌을까요?
이 부분을 깊이 연구한 워필드에 의하면 속사도 교회의 첫 50년(주후 100-150년) 동안에는 거의 아무런 이적이 있었다는 증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50년(주후 150-200년) 동안에는 조금 그리고 대수롭지 않는 이적들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4세기에 이르러서야 풍성하고 정밀한 이적들이 나타났으며 5세기 이후로는 계속 증가 추세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도시대 이후에는 기적이나 표적인 거의 없었는데 왜 3세기 4세기에 들어가면서 이적과 기적들이 많이 나타났다고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핍박 받는 교회가 힘을 가지게 되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교회가 핍박을 받을 때는 이방인들이 함부로 기독교인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13년에 기독교를 공인하고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392년에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정하면서 기독교는 엄청난 힘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기독교가 핍박을 받는 종교가 아니라 핍박을 하는 종교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온갖 미신적인 것과 신비종교들까지 기독교의 이름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권력과 결탁하게 되고 돈이 많아지게 되니 온갖 부패가 다 드러난 것입니다. 그래서 몇 주 전에 주보 칼럼 란에 손성식 목사님의 글의 제목이 이런 것이었습니다. ‘교회사란 욕망하는 인간의 배설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배설물의 냄새를 맡고서 마틴 루터가 오직 계시는 성경뿐이라고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그리고 구원이란 인간의 선행이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은혜라고 외친 것이 488년 전 10월 31일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종교개혁을 한 개신교는 오직 성경, 오직 은혜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까? 하기는 합니다. 일년에 한번 종교개혁 기념일에 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사란 욕망하는 인간의 배설물인 것처럼 개신교 역시 교회의 역사와 전통을 계시처럼 간주하고 있습니다. 온갖 체험과 성공사례를 성경의 계시보다 오히려 우위에 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경은 뒷전이고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보자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결과물만 그럴듯하면 성경을 가지고 얼마든지 포장해주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성경을 봅시다.
14:20절입니다. 지혜에는 어린아이가 되지 말고 장성한 자가 되라고 합니다. 지혜에 장성한 자가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교회에 주어진 은사들이 교회에 덕을 세우는 것이어야 하는데 자기를 과시하는 자기 증명용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책망하는 것입니다. 은사가 주어졌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자기의 몸 된 교회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친히 다스리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보내시고 성령의 은사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사가 임하였다는 것은 성도가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사를 받은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얼마나 가당찮은 이야기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자기에게 무슨 은사가 임하였다 그러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나는 무언가 특별하니까? 이런 은사를 받았지! 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가장 고질적인 모습이 목사입니다. 얼마나 부족하였으면 목사로 은사를 다 주었겠느냐고 생각해야 합니다.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은 그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나은 게 있어서 사도가 되었습니까? 다른 사람보다 못났기에 사도로 세운 것입니까?
디모데전서 1:15-17절입니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17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
이것이 은사 받은 자의 고백입니다.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단 한마디라도 나오지 않습니다. 죄인중의 괴수였는데 주님의 긍휼을 입은 까닭은 자기 후에 주님을 믿어 영생 얻는 자들의 본이 되게 하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나 같은 죄인도 용서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은혜와 은사를 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일절 자기의 자랑은 없고 오직 하나님께만 존귀와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21-22절을 봅니다. 22절에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흔히 방언을 하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방언을 하는 것을 보고 저 사람은 신적인 간섭이 있고 신과 직통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그렇게 본 것은 오늘 본문의 말씀과 정 반대로 본 것입니다.
21절의 말씀은 이사야 28:1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사야 28장의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이 전하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이 교만하여 질대로 교만하여 진 것입니다. 그래서 28:1절에서 에브라임의 교만한 면류관이여! 라고 책망합니다. 교만을 면류관처럼 쓰고 있으니 교만의 절정입니다. 그러니 하나님도 안 중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말씀이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심판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 심판의 결과가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하여 망합니다. 앗수르 사람들이 쳐들어와서 무슨 짓을 하였겠습니까? 하는 온갖 약탈을 다 하였습니다. 온갖 약탈을 다하면서 그들이 한 말이 입술이 생소한 다른 방언이었습니다. 그러니 방언이 나타난 것이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남쪽 유다는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합니다. 그러니 역시 다른 방언이 나타났다는 것은 심판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방언을 말하면서 왜 이사야 28장을 인용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방언한다고 떠들어 되는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지금 너희들이 하는 모습이 이방인들이 쳐들어와서 방언을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어디에 있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이방인이 쳐들어와서 방언하는 것이 해만 끼치듯이 너희들이 전부 방언만 한다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 미쳤다고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은 통역이 되면 교회에서 하지만 통역이 되지 않으면 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일만 마디 방언보다 다섯 마디 하는 것이 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언을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교인들이 다 예언을 하라고 합니다. 이 예언이란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 언약이 이제 새 언약으로 완성이 되었기에 온 세상을 예수 그리스도로 통일하시며 모든 권세와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임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이름에 무릎을 꿇는 것이 복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철장권세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24절입니다. 방언이 아니라 예언을 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에 숨은 일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방언을 한다고 온 교회가 왕왕거리면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 미쳤다고 하겠지만 모든 교인이 다 예언을 하면, 다시 말씀드리지만 예언이란 점치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과 하실 일을 증거 하는 것이 예언입니다. 그 예언을 들으면 그들의 마음의 숨은 죄가 드러나고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였을 때에 복음을 들은 자들이 어찌할꼬! 하면서 탄식을 한 것입니다. 물론 핍박하고 배척하는 자들이 더 많았지만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회개하며 나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증거 하기를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의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임을 증거 하게 되면 반드시 죄에 대하여 책망이 나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숨겨진 것들이 복음으로 다 들추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무엇을 꼬깃꼬깃 감추어 두고 있는지를 하나님의 말씀이 드러내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12-13절입니다.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뜻을 감찰하셔서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내십니다. 이렇게 벌거벗은 듯이 드러나면 무엇을 원하겠습니까? 라오디게아 교회에 흰 옷을 사 입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부자라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였으나 실상은 가련하고 벌거벗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또다시 복음을 듣고서 책망을 받아야 합니다.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만족하고 있습니까? 무엇이 있으면 만족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 앞에 벌거벗은 듯이 드러나야 우리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알고 흰 옷을 사 입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 앞에 벌거벗은 듯이 드러나게 되어 책망과 판단을 받게 되면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 하나님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과연 너희 중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게 될 것입니다.
너희 중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이 말씀은 구약 성경 스가랴 8:23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는 방언이 다른 열국 백성 열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시면 이렇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은혜를 구하러 와서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신다는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때 돌아오는 자들이 방언이 다른 열국 백성이 돌아올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알아듣지 못하고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고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복음은 방언입니다. 이상한 소리가 방언이 아니라 은사를 받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방언인 복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구원이 오직 은혜로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선행이나 공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한 것이 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런 방언을 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4:26-40 잠잠 하라 2005.11.6
26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27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28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29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30 만일 곁에 앉은 다른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찌니라 31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32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33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4)하나님이시니라 34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것 같이 ㄴ)오직 복종할 것이요 35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찌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 36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37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줄 알라 38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5)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39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40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성도에게 은사를 주신 것은 주의 몸 된 교회를 섬기기 위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몸이란 여러 지체가 서로 도우면서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님의 몸으로서의 교회에도 여러 지체들이 서로 덕을 세우기 위하여 은사가 주어진 것입니다. 덕을 세운다는 것은 형제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나의 유익과 만족이 아니라 형제의 유익을 위한 것이기에 어떤 은사를 받았다고 해서 자기를 내세우거나 자랑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26절을 봅니다. 어찌할꼬! 왜 이런 말이 나오는 것입니까? 은사란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주어진 것인데 자기를 과시하고 자랑하고 있으니 탄식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모일 때에 여러 가지 은사가 있으나 그 모든 은사는 덕을 세우기 위하여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은사 중에 찬송시도 있고 가르치는 말씀도 있고 계시와 방언과 통역도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도 계시가 주어지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시대와 다릅니다. 사도의 사도됨이란 계시를 위하여 세움을 입은 것입니다. 바울시대는 아직도 계시가 부분적으로 주어지고 있었기에 계시가 있고 방언과 통역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방언이나 예언을 어떤 식으로 생각하는가 하면 무당이 입신한 상태에서 자기의 의식과 상관없이 나오는 말로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으니 요즈음도 이상한 말하는 사람이 예언한다고 그러면 꼼짝없이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시와 예언과 방언이 부분적으로 주어질 그때도 의식 없이 무질서하게 하는 것을 금하였습니다. 27-28절입니다. 너희가 모일 때에 라고 하였으니 교회 안에서 방언을 하게 될 때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 세 사람이 차례대로 할 것이며 한 사람은 통역하고 통역이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라고 합니다. 왜 잠잠 하라고 합니까? 그것은 교회에 덕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잠잠 하라는 말씀이 오늘 본문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29-30절입니다. 예언도 두 세 사람이 차례대로 말하면 다른 사람은 분변할 것이라고 합니다. 예언한다고 다 옳은 예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변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곁에 있는 사람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하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잠잠하라고 합니다. 왜 잠잠하라고 합니까?
31-33절입니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예언하라고 합니다. 만약 두 세 사람이 예언을 받은 것이 있다고 한꺼번에 말해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의 제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을 분별하고 제제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한 사람씩 차례로 말하여 모든 사람이 배우고 권면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요 화평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34-36절입니다.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합니다. 다른 교회에서도 그렇게 하는 것처럼 고린도 교회의 여자들도 잠잠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세 번째 잠잠 하라는 말씀입니다. 무엇을 배우려면 집에 가서 자기 남편에게 물으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듣는 여자 분은 기분이 어떻습니까?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 하라는 것에 대하여 많은 여자들이 반대하고 나섭니다. 왜 여자들은 잠잠하라고 하는지 이 부분에 대하여 좀더 말씀을 봅니다.
디모데전서 2:8-15절입니다. “8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9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10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11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12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찌니라 13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14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15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여자들의 마땅한 자세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여자가 교회에서 잠잠해야 합니까?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가 무질서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자가 남자에게 복종하라는 말씀도 질서의 차원입니다. 또 한 가지는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여자가 남편의 말을 듣고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여자들이 남자를 주장하기 위한 말들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말이 많은 것입니다. 자기들이 신령한 은사를 받았다고 하면서 바울사도 너만 계시를 받느냐면서 무시하는 자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마치 모세를 비난한 사람들처럼 바울사도의 말을 무시하기에 무어라고 합니까? 37절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고 합니다. 누가 감히 이렇게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사도의 권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는 완성되어 기록된 이 성경의 말씀만을 하나님의 계시로 믿는 것입니다.
여자 분들에게 묻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서 잠잠하시겠습니까? 은사를 받았다고 하면서 분별없이 나서서 말하는 것을 바울사도가 금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자가 잠잠 하라는 것은 여자를 무시하거나 깔보는 것이 아닙니다. 잠잠해짐으로 보여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그리스도 앞에서 잠잠한 신부가 된다는 것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앞에서는 여자만 잠잠할 것이 아니라 남자도 잠잠해야 하는 것입니다. 방언과 예언을 하는 남자들도 순서에 따라 하고 다른 사람이 하게 되면 잠잠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판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8절에서도 잠잠하라고 하고 30절에서도 잠잠하라고 합니다. 여자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특히 여자에게 잠잠하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신부가 신랑을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부는 신랑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 앞에서 잠잠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잠잠해야 할 일은 잠잠하지 않고 잠잠하지 말아야 할 일은 잠잠한 것이 문제입니다. 처음에 은사를 말씀하면서 교회로 모인 성도란 모두가 다 은사를 받은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교회에서 드러나 보이는 은사가 있고 숨겨진 은사들이 있습니다. 누가 더 높고 낮음이 아닙니다.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은사가 아닙니다. 모든 은사는 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봉사하기 위하여 주어진 은사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받은 몸을 가지고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모든 은사란 덕을 세우기 위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덕을 세운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유익하게 하는 것입니다. 형제자매를 유익하게 하는 일에 우리의 몸이 사용되고 있습니까? 내가 말하는 한 마디가 교회의 유익을 주고 있습니까? 내가 하는 행동이 교회의 유익을 주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값으로 주고 사신 것이기에 여러분의 마음대로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편한대로 사용하라고 주신 몸이 아닙니다.
형제자매를 섬기는 일에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아기를 둔 엄마도 직장을 가진 분도 마음만 있다면 얼마든지 섬길 수가 있습니다. 시간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몸을 섬기고 자기 이익을 앞장세우기에 섬기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란 한 몸으로 부름으로 받은 것입니다. 우리 몸의 지체가 서로 섬기듯이 교회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서로 섬기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 섬김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마음을 더욱 알아가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빠져 나가는 것이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기에 좋다고 여기십니까? 그러나 함께 부딪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서 몸에 분쟁이 없어야 하는데 몸에 온갖 분쟁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서 자신의 죄를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온갖 죄인들이 모인 곳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잠잠하지 못하는 인간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무언가 조그마한 것이라도 잘한 것이 있으면 잠잠하지 못하고 자랑하고 싶고 조금 억울한 일이 있으면 몇 배를 부풀려서라도 말하고야 마는 자신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저의 이야기를 또 해야겠습니다. 여러분이 돌아가시고 나면 월요일 제가 청소를 합니다. 청소를 하다보면 나 같은 죄인이 그리스도의 몸을 섬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하면서 청소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청소하다가 보면 화가 나는 것입니다. 먹다 남은 커피 잔 씻고, 아이들이 먹다 버린 사탕이나 껌을 떼고, 화장실 휴지와 아이들 똥 귀저기까지 버리다보면 은근히 화가 나기도 합니다. 그렇게 화가 날 때에 누구를 생각해야 합니까?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섬기셨는가를 생각하면 나의 죄를 알게 되고 주님께 회개의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함께 부딪히지 않고서는 이런 은혜를 맛보지 못할 것입니다. 때로는 화가 나서 씩씩거리기도 하고 교회 안 오면 이런 꼴 보지 않아도 되겠지! 하고 싶은 마음도 들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주님께서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어떤 은혜를 주시겠습니까?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53:7절을 봅니다. “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께서 곤욕을 당하고 괴로움을 당하셨습니다. 자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우리의 허물과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대신 곤욕을 당하시면서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처럼 그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이 주님 앞에 우리는 입이 열개라도 할말이 없는 죄인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 이런 죄인이기에 주님께서 대신 죽으시지 않고서는 어떤 가능성도 없는 인간입니다. 하면서 주를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언도 그치고 방언도 그치지만 주님 오시는 날까지 복음은 계속 됩니다. 복음 앞에 우리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됨으로 회개하고 주님을 믿게 되는 것이 이 시대의 은사요 기적인 것입니다. 복음을 듣고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신은 잘하는 것이 있는 줄 알았는데 복음을 듣고 보니 나 행한 것이 죄 뿐이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의롭게 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만 주어지는 것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고백을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이며 이런 교회에서 서로 섬기게 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을 더 깊이 알아가고 예수 그리스도의 완벽한 섬김을 받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마태복음 20:28절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런 은사와 기적을 날마다 맛보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5:1-11 복음을 알게 하노니 2005. 11. 13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2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이는 잠들었으며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9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11 그러므로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1절 말씀에 너희에게 복음을 알게 한다고 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복음을 받지 않아서 복음을 알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전한 복음을 다시 알게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이라고 합니다. 이미 전한 복음을 받았고 그 가운데 섰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다시 복음을 알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로마서가 복음의 핵심을 잘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도 로마에 이미 복음을 듣고 있는 자들에게 다시 복음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란 한번 듣고 섰다고 해서 다음의 단계로 가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교회의 시작이요 끝이며 전부인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복음이 구원의 능력입니다.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하며 의인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 복음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미 복음을 듣고 그 가운데 섰다고 하는 고린도 교회에 왜 또 복음을 알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 지금까지 수많은 문제들이 고린도 교회에 일어났습니다. 그 문제들이란 파당이 생긴 문제, 음행의 문제, 우상제물의 문제, 그리고 지난주 까지 보았던 은사의 문제들입니다. 이런 문제투성이인 고린도 교회를 바르게 세우는 것은 오직 복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복음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2절입니다.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고 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을 굳게 지키고 헛되지 믿지 않아야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은사와 방언과 통역과 예언들이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구원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 복음을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않아야 하는데 이미 복음을 들었다고 하면서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복음을 듣고 믿어서 이미 구원은 챙겨놓았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더 신기하고 놀라운 것들을 경험해보자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나라 식으로 말하자면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행함으로 복을 받자는 이야기입니다.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제부터 믿는 자로서 다른 사람들보다 무언가 더 나은 것이 있어야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더 뛰어나고 특별한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표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믿지 아니한 사람과 분명히 다른 것이 있습니다. 그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세상 모든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삶의 목표를 향하여 달려갑니다. 즉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세상이나 세상의 속한 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하는 모습은 이 세상을 나그네처럼 사는 것입니다. 외국인처럼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물건은 다 쓰지 못할 것처럼 사는 것입니다. 아내 있는 자는 아내 없는 자처럼 여기라고 합니다. 이 눈에 보이는 세상이 멸망할 것을 알고 이미 완성된 세계, 그 아들의 피로 만든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런 구별과 차이가 분명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합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그래 예수 믿는 사람들이 좀더 착하게 살아야지! 그렇게 정리하시는 분이 계시는데 착하게 살아서 이 세상을 좀더 살맛나게 만들어야지 그런 생각은 불신자들도 다 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들의 구별됨이란 어떤 것입니까? 이 시대가 노아 홍수 때와 같음을 알아야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시대와 같은 곳임을 알아야 합니다. 아니 그때 보다 더 악한 심판의 장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살해된 이 땅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1:8절입니다. “저희 시체가 큰 성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두 증인이 이 땅에서 죽임을 당하여 길거리에 사흘 반 동안 전시가 되고 구경거리가 됩니다. 왜 죽임당하는 것입니까? 이 땅에서 들어붙어 살고자 하는 자들을 괴롭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죽임당한 곳이 영적으로 말하면 소돔이며 애굽이며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입니다. 이런 세상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불살라버리실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3-4절입니다. 내가 받은 것을 너희에게 증거 하였다고 합니다. 그 증거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복음입니다. 왜 그것이 복음이 되는가 하면 로마서 4:23-25절을 봅니다. “23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의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 주심이 되었습니다. 그의 살아나심은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속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의롭다고까지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것은 하나님께서 없는 가운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을 믿은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란 우리에게는 전혀 없는 의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새롭게 창조하여 내신 것입니다. 이것을 은혜로 받게 된 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편을 가르고 서로 시기 경쟁하고 있다면 어떻게 복음을 들은 자의 모습이냐는 것입니다. 은사를 주신 것도 성도의 유익을 위하여 주신 것인데 자기 자랑하고 자기 자존심 세우는 방향으로 가는 것은 이미 복음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복음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 앞에서 입을 닫고 회개할 수밖에 없는 것이 성도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얼마나 자기 잘난 체 하며 삽니까? 자기 자존심을 세우며 살고 있습니까? 눈만 뜨면 생각하는 것이 어떻게 이 세상에서 한번 보란 듯이 살아볼까 하는 마음으로 살지 않습니까? 눈앞에 닥친 이 어려움을 속히 해결하고 그 보다 열배 백배 더 나은 입지에 서서 보라 내가 예수 믿고서 이렇게 복을 받았다고 하면서 큰소리 한번 치고 싶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왜 나에게는 이렇게 형편을 어렵게 하십니까? 내가 무엇을 잘못하였나요? 하나님께 물으니 응답이 없습니다. 그러면 누구에게 묻습니까? 목사님 좀 알려주세요! 우리 아들만 일류대학에 합격을 한다면 내가 새벽기도인들 철야인들 금식인들 못하겠습니까?
여러분이 목사라면 무어라고 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집사님이 믿음으로 기도하시면 들어주실 것입니다. 저도 특별히 기도하겠습니다. 이렇게 대답해야 합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런 말을 해야 합니까? 아니 지금 시험이 발등에 떨어진 불인데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런 마음이 들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믿는 자라면 세상에 일어나는 어떤 문제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앞에서 할말이 없어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고린도 교회에 그렇게 난다. 긴다 하는 잘난 사람들에게 바울사도가 무엇을 제시하는 것입니까? 바울 파, 베드로 파, 아볼로 파라고 말하는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누가 십자가를 졌느냐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어떻게 자기 자랑이 나오고 시기와 경쟁이 나올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계속하여 나왔고 지금도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다시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복음을 들으면 나오지 않습니까? 나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숨겨진 것 까지 더 드러납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래야 회개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사도 자신이 복음을 받게 되고서 어떻게 되었는지를 봅시다. 5-9절입니다. 왜 부활의 목격을 이야기 하는가 하면 고린도교인들 중에 부활이 없다고 하는 자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 부활하신 주님을 베드로가 만났고 열두 제자에게 보이시고 오백여명의 제자들에게 보이시고 그 중에 태반이나 지금도 살아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맨 나중에 바울에게도 보이셨다고 합니다.
요즈음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는 사람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닌데 그러나 바울사도가 맨 나중이라고 하면 그 뒤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낸 나중인데 또 더 있다면 맨 나중이 아니지요! 그러므로 사도바울 다음에 누가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거나 어디에 예수님이 있다고 하여도 믿지 마시고 따라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런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것은 바울이 열심이 특별하였거나 다른 사람보다 나아서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무어라고 합니까? 만삭되지 못하여 태어난 자라고 합니다. 칠삭둥이 팔삭둥이라는 것입니다. 글자 그대로 보자면 조산된 자요 유산된 자입니다. 보통 사람보다 더 못난 자라고 합니다. 자신은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여 사도라 칭함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기를 도구로 삼아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을 받은 자의 특징입니다.
그러면 다른 사도들을 나은 것이 있었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에 다 도망갔습니다. 베드로는 세 번이나 저주하며 맹세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의 사도됨이란 결코 자기를 자랑할 수가 없는 자들입니다. 하물며 사도들도 자기들을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이 복음인데 그 복음을 듣고서 자기를 자랑한다는 것이 있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어떤 인간도 복음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구원될 자가 한 명도 없다는 것입니다.
10절입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자신이 복음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이 좋아서 어떤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 하였지만 그러나 자신이 아니라고 합니다. 내가 아니요! 자기 부인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겸손해서 일부러 하는 말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제대로 받고 그 복음에 선 자들은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죽도록 충성하고서도 내가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그렇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11절입니다. 그러므로 내나 저희나 여기서 내는 바울사도입니다. 저희란 다른 사도들입니다. 모든 사도들이 다 어떻게 믿게 되었습니까? 은혜로 믿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도 이런 고백이 나옵니까? 우리가 믿게 된 것이 은혜로 된 것입니까? 그렇다면 그 믿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성경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성경대로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이 간단하고 기초적인 내용을 왜 은사가 풍성한 고린도 교회에 다시 알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그 십자가에 나타난 죄에 대한 징벌과 용서와 부활하심으로 믿는 자를 의롭게 하시는 복음의 비밀이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 복음을 받은 자의 반응은 지옥가야 마땅할 죄인이 예수님의 피로 용서를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모든 것을 은혜로 받고 사는 것입니다. 어느 것 한가진들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은혜가 희미하면 복음이 희미한 것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다!
고린도전서 15:12-19 부활이 없으면 2005. 11. 20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 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고린도교회에 수많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그 문제들을 바울사도는 복음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성도라면 복음으로 해결이 되지 않는 문제란 없는 것입니다. 그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 죽으심이 우리의 죄를 사하심이요 그 살아나심이 우리를 의롭다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복음을 믿으십니까? 이 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12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다고 전파되었는데도 고린도 교인들 중에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고 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이 지금 태반이나 살아있다고 하면서 부활에 대하여 증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말씀을 보면서 아니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어떻게 부활을 믿지 않을 수가 있는가라고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사도신경을 외우면서 교회를 다녔습니다. ‘장사한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다 외우고 그렇게 믿는다고 입술로 고백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십니까? 입술로만이 아니라 여러분의 삶으로 부활을 믿으시는가 하는 말입니다.
이제 점검을 해봅시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이 눈에 보이는 세상을 목표로 하지 않고 보이지 아니하는 부활의 세계를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이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손해를 보게 되고,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나는 부활을 믿는 사람이기에 그런 손해를 감수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여도 상대방을 향하여 축복하고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돈은 떨어지고 몸은 아프고 배는 고프고 추운데도 부활로 인하여 감사하며 살고 계시지요? 그것이 부활을 믿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우리가 아멘이라고 할 사람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부활을 믿는다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가증스러운 모습입니까? 사소한 손해 본 것 참지 못하고 조그마한 자존심 하나 상한 것을 견디지 못하면서 내세를 믿고 부활의 세계를 믿는다는 거짓말을 뻔뻔스럽게 하고 살아왔습니다.
디도서 1:16절입니다.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 부인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다고 시인을 하지만 행위로 부인하는 것은 가증한 것이며 복종치 아니하는 것이며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믿는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부활하실 정도로 전능하신 예수님이라면 왜 나의 삶에 쨍하고 해뜰 날을 주시지 않는 것입니까?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고 속담에도 말하는데 어떻게 나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여도 한평생 허리한번 펴지 못하게 만드시는 것입니까? 내가 무엇을 잘 못하였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부활의 주님을 믿고서 세상에서 잘 된다고 하는데 나는 이게 무슨 꼴입니까? 이런 생각으로 부활의 주님을 부르지는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성경에서 부활을 믿은 사람들의 모습이 어떤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1:24-26절입니다.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가 세상의 보장된 부귀영화의 삶을 버리고 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원하였습니까?
그것은 애굽의 영광이나 보화란 죄악의 즐거움이기 때문입니다. 그 죄악의 즐거움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긴 것입니다. 이렇게 한 것은 상 주심을 바라본 것입니다. 여기서 상이 무엇입니까? 애굽의 모든 보화, 그 당시 세계 최고의 강대국의 보화보다 더 나은 보화란 이 세상의 물질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상이 아닙니다. 그 상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상인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히브리서 11:35절을 봅니다. ‘더 나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면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사람들이 부활을 믿었기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과 결박과 옥에 같이는 시험과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유리하고 궁핍하며 환난과 학대를 받았습니다. 무엇을 믿었기에 그렇게 한 것입니까? 부활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자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죽인다고 하여도 달게 받아들인 것입니다. 무엇을 믿었기에 그렇게 되었습니까? 부활의 예수를 믿었기에 그렇습니다.
빌립보서 3:1-17절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가 옛날에 자랑거리로 삼았던 것들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합니다. 배설물은 때로 거름으로도 사용합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자기에게 유익하던 것들을 해로 여긴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부활을 믿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바울사도가 해로 여긴다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영광이나 돈을 사랑함이나 세상의 쾌락 사랑함을 해로 여긴다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이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베냐민 지파라는 것입니다.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을 만큼 지킨 것입니다. 얼마나 대단한 자랑거리입니까? 이것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배설물이요 오히려 해로 여긴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앞에서 그 모든 것들이 해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 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고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권능에 참예함을 아는 것은 그의 죽으심에 참예하는 것으로 안다는 것입니다. 내가 부활에 참여하고자 함을 알게 되려면 이 세상에서 죽음에 넘겨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죽으라는 말입니다.
바울사도는 고린도전서 29:31절에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이 세상과 전혀 다른 세상을 믿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 이미 죽은 세상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세계는 생명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다는 사람이 예수님의 부활이 없고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라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을 다시 봅니다. 12-18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 하면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만약에 없다면 어떻게 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가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 우리의 전파하는 복음이 헛것이요, 너희의 믿음도 헛것이요,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아직도 죄의 권세 가운데 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는 곳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생명이 왕 노릇하는 세계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이 없다면 구약에서 그렇게 더 나은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핍박받고 죽어간 성도들과 신약에서 역시 부활의 예수님을 믿고 순교당하고 핍박받아 죽어간 그들이 얼마나 불쌍한 사람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부활의 세계고 무어고 간에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서 한번 보란 듯이 성공하고 싶지 않습니까? 나를 무시하는 자들의 코를 납작하게 하고 싶은 욕망이 우리 속에 얼마나 많이 들어 있는지 아십니까? 그런데 부활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간에 어떤 모습으로 이 세상을 살았습니까? 세상의 영광을 누리며 살았습니까? 세상의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며 살았습니까? 보통 사람들도 더럽다고 여기는 부도덕한 일들만을 더럽다고 한 것이 아니라 자기는 가장 고상하고 아름답게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살았다고 하는 것조차 배설물과 해로 여기는 것이 부활을 믿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주변의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다고 하면서 무엇이 증거 되고 있습니까? 예수를 믿으면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게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 세상은 죽은 세상이고 부활의 세계 생명의 세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믿기에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핍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신구약에서 공통으로 증거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하여 확인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난 한 주간 라디오 방송에서 나오는 설교를 세편이나 들었는데 세편이 다 감사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가 얼마나 감사한 것이냐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론은 그 감사를 어떻게 나타내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번 주를 한국교회 대부분이 추수감사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결국 오늘 헌금 정성껏 하라는 결론이었습니다. 그렇게 감사하는 자에게 더 큰 복을 주셔서 세상에서 성공하게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방금 본 성경과 다릅니다. 그런데 왜 그런 말씀에 아멘하고 따라갑니까? 이 세상에서 살려고 하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을 믿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빌립보서 3:17-21절입니다. “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 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우리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다고 하면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멸망 받을 세상의 영광을 바라보았다면 그것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침은 멸망입니다. 저희의 신은 배입니다. 욕망이 그들의 신인 것입니다. 그들의 땅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누구 입니까?
저와 여러분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날마다 바라는 것이 땅의 영광이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이 원수가 바로 오늘 저와 여러분이심을 인정하십니까? 그렇다면 부활의 소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근호 목사/고린도전서 15:16-19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누구든지 제 자리 빼앗기면 대단히 기분 나쁩니다. 옛날부터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구원받고 부활된다고 확신했습니다. 이대로 물러 설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하늘과 땅 사이에는 자신들이 서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셔도 꼭 자신들을 통과해서 일하신다고 믿었던 것이 그들이었습니다.
흔히 요즈음 유행하는 말처럼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도 꼭 인간을 통해서 하신다" 생각도 그들 역시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도 중요하시지만 인간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서 일하시기 때문에 인간들, 자기 자신들이 없이 무슨 일을 해낼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이 드디어 무너질 날이 온 것입니다. 즉 부활의 중심체가 자기 자신들이 아니라 예수님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일하시는 절대로 인간을 통해서 일 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이 만 천하에 드러나고 만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을 통해서 일해 오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통해서 일한다는 것이 인정된다면 자신들도 어느 정도 으쓱하면서 지낼 수가 있는데 아예 하나님이 자신들을 도외시하고 예수님만 손잡고 일해버리시는깐 자신들의 존재 가치가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흔히 인간들은 자신이 존재한다는 시실 자체를 두고 거기에서 뭔가 진리를 끄집어내려고 시도합니다. 즉 "나는 살아 있다. 하나님도 살아 있다. 하나님이 나를 살리고 있다.
그러니 나는 하나님에게 대단히 중요한 존재이다. 하나님도 내 없이는 일이 안될 것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를 이 세상에 아마 오래 살게 할 것이다. 내가 없이는 하나님도 손해 날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엄청나게 하나님의 일을 오산한 결과입니다. 인간의 존재는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인간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인간들이 지어낸 개념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죄인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결국 모두를 흙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죄인일 뿐입니다. 인간이 존재하고 하나님이 살리시는 이유도, 죄인이 주의 일을 있는 경우는 완전히 없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즉 예수님을 그들 앞에 보내시므로 말미암아 예수님과 그들 자신과의 차이에 눈을 떠라 는 것입니다. 무슨 가치가 대단해서 살려 주시는 것이 아니라 정말 무가치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가치 있는 아들과 인간은 예수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살려 두고 있는 것입니다. 죄 때문에 죽으셨다가 죄와 무관하게 부활하신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부활의 첫 열매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전에도 죽음을 보지 않고 바로 하늘로 간 사람도 있고 죽었다가 다시 소생한 사람들도 있지만 이들은 모두 예수님의 부활을 말하기 위해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부활 세계의 첫 시작은 역시 예수님 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에게 일어났던 그 하나님의 일 속에 같이 뛰어드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부활이라는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다른 사람은 안됩니다. 다른 사람을 통해서는 하나님께서 일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믿어서는 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바깥 사람들은 예수님에서 생겨난 하나님의 일을 무시하고 없애 버리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습니다. 즉 예수님은 부활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인간도 죽었다가 부활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라는 분이 꼭 부활되지 않더라도 기존에 믿던 식대로 믿으면 구원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기존의 인간들과 예수님의 차이점을 가지고 믿음을 방어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란 죄를 해결하시는 분입니다. 인간이 죽는 것이 죄 때문이라면 만약 그리스도가 무사히 죄 문제를 해결했더라면 그리스도는 반드시 부활될 것이고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믿는 자도 역시 죄문제가 해결되어 부활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이미 그리스도를 믿었던 사람들도 여전히 죄 아래 놓이게 되고 믿었던 모든 것이 와해되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처량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큰 사기극에 말려든 셈이 되고 또한 남들에게도 거짓말을 유포시킨 잘못을 저지른 것이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께서 정말 제대로 완벽하게 죄씻는 문제를 해결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부활이 실제로 있다고 한다면 십자가의 피의 효과는 너무나도 분명하고 그렇게 된다면 율법을 지켜야 구원이 되고 복을 받는다는 모든 부담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국면입니다. 정말 새 술에 새부대에 담는다는 주님의 평소의 말씀이 그대로 실현된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운명을 좌우하는 엄청난 일인 것을 실감합시다.
고린도전서 15:20-28 부활의 첫 열매 2005. 11. 27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24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25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 노릇 하시리니 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27 ㄱ)만물을 저의 발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저의 아래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28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1)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19절 말씀에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라고 합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영광이 목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세상에서 복 받고 잘 된다는 이야기가 전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성경에서 나타난 믿음의 사람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는가를 보았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온통 환난과 핍박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믿음을 버리지 아니한 것은 더 나은 부활의 세계를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부활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는 것은 이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추구하는 영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광이 배설물이요 해가 됨을 아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수능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좋은 성적을 받고 좋은 대학에 합격하였다면 얼마나 영광스럽게 여기겠습니까? 더군다나 학교를 다니면서 고시를 패스하고 높은 관직에 있다가 대학의 총장을 지낸다면 얼마나 가문의 영광으로 여기겠습니까? 우리가 만약 바라는 것들이 그런 것이라면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대학총장, 도지사, 시장, 회장, 회장의 셋째 딸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자살하였습니다. 세상의 영광의 정점이라고 하는 곳에서 자살 한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세상의 것이라면 이미 그런 것들을 누리는 사람들이 자살하는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무엇이 부족해서 자살하겠습니까? 그들이 쌓아놓은 사회적 명성, 그 이름이 수치스러워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여 자살한 것입니다. 또는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자살한 것입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서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한 것입니다. 만약 오늘 저와 여러분이 그러한 사람들을 부러워하면서 달려간다면 지옥에 가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의 약속의 세계, 부활의 세계를 믿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은 은혜로 주셔야만 되는 것이지 노력해서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어떤 부끄러움을 당하더라도 상관없다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세상에서 보잘 것 없는 모습이라고 해서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혀온 여인이 예수님 앞에서 부끄러워서 자살하였습니까? 용서받고 정죄하지 않는 다는 기쁨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여리고성의 기생 라합이라고 그 직업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기생이 예수님의 족보에 올랐습니다.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는 자신을 세리라고 드러내고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자신의 약함을 자랑한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은 살인자요 포행자라고 합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왜 하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세계는 그런 것들이 다 용서되고 영광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부끄러운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부활의 세계에서 부끄러운지 영광스러운지가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서 부끄럽다고 자살한 사람들이 그것이 끝이겠습니까? 그런 자들까지 하나님은 다시 살려내십니다. 그래서 영원한 부끄러움에 집어넣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영원한 영광에 참여시키실 것입니다.
다니엘서 12:1-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2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마지막 날의 비밀을 예언한 것입니다. 영생을 얻는 자와 영원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가 있을 것입니다. 영생을 얻는 자란 구원을 얻는 자인데 이런 자는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입니다. 그렇지 아니한 자들은 무궁한 부끄러움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이런 계시와 예언을 내용을 듣고 믿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소망하여 살고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부끄럽지 않고 멋있게 살고 싶은 것입니까? 아니면 영원한 영광의 세계에 살고 싶습니까? 두 가지 다 하고 싶겠지만 그렇게는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사는 늘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의 영광에 있으니 자신의 부끄럽고 연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고삼에서 대학에 가면서 교회에 나오지 않는 학생들이 많이 생깁니다. 대학에 떨어지거나 재수를 하게 되면 부끄럽다고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자존심 상하면 오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의 약함을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온갖 말이 다 나오니 모두 가면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 홈페이지 교회 소개란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교회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에게는 일체의 선함과 의로움이 없음을 고백하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는 곳입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세상의 영광을 구하는 곳이 아니라 그리스도 영광의 날을 소망 하는 곳입니다. 원본은 이러한데 관리집사님이 고쳐 놓았습니다. 그런 곳이 늘푸른 교회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그렇지 않지요!
그러면 우리는 다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자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영광에도 참여 못하고 세상의 영광도 없고 가장 불쌍한 사람들 중에 더 불쌍한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러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20절을 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이 말씀이 소망을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첫 열매가 되셨기에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첫 것은 하나님께 드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곡식의 첫 열매만이 아니라 짐승도 첫 것의 수컷은 여호와께 드려야 합니다. 사람도 장남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모든 장남을 대신하여 레위지파가 드려집니다. 출애굽기 13장에 보시면, 왜 처음 것을 드리라고 합니까? 애굽에서 10번째 재앙이 장자의 죽음입니다. 그러나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집은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장자와 첫 수컷은 여호와께 구별하여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 드려짐이란 희생을 뜻합니다.
성경에서 장자의 개념이란 자기의 희생으로 나머지를 살려내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 장자는 르우벤 이지만 장자의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11번째 요셉이 장자의 몫인 두 몫을 받는 것은 요셉이 희생으로 형제들을 살려내기에 장자의 명분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혈통적인 서열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희생하는가의 문제인 것입니다.
에스겔 44:30절입니다. “또 각종 처음 익은 열매와 너희 모든 예물 중에 각종 거제 제물을 다 제사장에게 돌리고 너희가 또 첫 밀가루를 제사장에게 주어 그들로 네 집에 복이 임하도록 하게 하라” 에스겔서는 새 성전과 새 언약을 말합니다. 옛 성전이 우상으로 가득하여 하나님이 신이 떠나버리고 새로운 성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처음 익을 열매와 첫 밀가루를 제사장에게 주어 네 집에 복이 임하도록 하라고 합니다. 처음 것이 제물로 희생되어져야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1:16절입니다.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하면 떡 덩이도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말씀이 연결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까? 그것은 다니엘서의 말씀대로 기록된 책에 있는 자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맡겨주신 자들을 살려내기 위하여 첫 열매로서 희생하셨습니다. 희생만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셨기에 그 첫 열매의 영역 안에 있는 자들은 다 살려내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21-22절입니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기에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아담의 후손으로 사망의 권세아래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생명을 얻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믿고서 죽은 자들을 죽었다고 하지 않고 잔다고 합니다.
23-24절입니다. 여기서 순서가 나오는데 순서를 말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의 첫 열매임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첫 열매의 희생과 부활이 있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이니 지금 예수를 믿는 자들이나 다 부활의 능력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순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이 먼저이고 그 다음은 예수님의 재림하실 때에 살아서 믿는 자들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3-18절입니다. “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찐대 이와 같이 2)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8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위로가 되십니까?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여 성도가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환난을 당하여야 이 말씀이 위로가 되겠습니까? 모퉁이 돌 선교회에서 소식지가 올 때마다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호사스러운 것입니다. 도대체 믿음으로 인한 고난과 환난과 핍박이 있기나 한 것입니까? 그러니 성경의 이런 말씀이 위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저 내가 괴롭고 외로우니 사랑해달라는 투정 외에 무엇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주님의 일을 이루어가십니다. 25-27절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 노릇 하실 것입니다. 불가불이란 이중 부정으로 강조한 것입니다. 반드시 예수님이 왕 노릇하시는 것입니다. 재림하셔서 제일 나중에 멸망시켜버릴 것이 사망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미 사망을 이기시고 왕 노릇 하고 계십니다. 그 주님이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 말씀이 위로가 되시고 소망이 되십니까? 그런 사람은 28절의 말씀을 맛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만유의 주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만유란 모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든 것의 주가 되십니까?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의 희생과 노력이 그렇게 만드시고야 마실 것입니다. 그 주님을 믿고 사시기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5:29-34 날마다 죽노라 2005. 12. 4
29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 30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32 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33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34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부활이 없다면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의 영광의 목표가 아니기에 세상의 영광이 주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이 없으면 가장 불쌍한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지만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지난주에 보았던 하나님이 만유의 주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만유의 주가 되시지만 그 사실을 믿는 자만 아는 비밀인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재림과 함께 모든 자가 다 부활하게 될 때에는 믿지 아니하는 자도 예수님이 주가 되심을 인정하고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것 보다 더한 복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하나님의 일이며 하나님의 영광인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 이러한 부활이 없다고 하는 자들이 있기에 이제 다시 부활에 대하여 증거 하는 것입니다. 29절에서 그 한 예로 너희가 죽은 자를 위하여 세례 받는 자들이 무엇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고 합니다. 이 말씀은 아직도 해석이 분분한 내용입니다. 죽은 자를 위하여 세례를 받는다는 이 말씀이 이곳 한 곳에만 나오고 다른 성경에서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의 그 어떤 기록에도 죽은 자의 세례에 대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추정을 합니다. 예수를 믿다가 죽었는데 세례를 받을 기회가 없어서 죽은 자를 위하여 세례를 베풀었는데 이것이 미신적이고 이방적인 것이기에 바울사도가 나중에 귀정하였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를 바로잡는 중에 어떤 문제들은 직접 가서 바로잡겠다는 말씀이 고전11: 34절에 나옵니다. 이 문제도 바로 잡았을 것이라고 추정을 합니다. 그 뒤로는 이런 문제가 전혀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오늘 본문에서 이런 말씀을 부활을 증거 하고자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들이 잘하고 있다고 이 말씀을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부활이 없다면 그런 행위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하는 의미로 죽은 자의 세례를 언급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에 나와 있는 말씀이라고 무조건 그것은 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앞뒤 보지도 않고 성경에 있는 내용이라고 우기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서 성경을 보기에 그렇게 이용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이란 우리가 다시 살아서 영생을 얻는 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지 우리의 마음을 좋게 하기 위하여 죽은 자를 위하여서 세례도 받고 기도도 하고 헌금도 하고 공적도 쌓으면 연옥에 있는 자들이 천국으로 올라간다는 이런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교리의 근거를 가지고 교인들을 미혹한 것이 중세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며 지금도 그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것이며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임을 어떤 성경을 보더라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나를 좋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이 우선이 아닙니다. 우리가 편하고 기분 좋은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이란 창조주를 위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주를 위하여 사용되어지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본분인 것입니다.
골로새서 1:16-18절을 봅니다.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예수님을 위하여 만물이 창조 되었습니다. 그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즉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심은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시기 위함입니다. 그 사실을 지금은 그의 몸 된 교회만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가난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죽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만물의 주가 되시는 분이 우리의 머리가 되신 다는데 무엇이 부족합니까? 몸이란 머리에 종속 되는 것입니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합니다. 머리가 좋으면 몸도 덜 고생합니다. 머리가 영광스러우면 몸도 영광스럽게 됩니다. 그러나 머리가 없다면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다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전부라는 것입니다. 즉 만유의 주가 되십니다.
30-31절입니다. 부활의 주님, 우리의 머리가 되신 주님이 계시기에 때마다 위험을 무릅써도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합니다. 왜 날마다 죽는다고 말합니까? 죽어도 상관이 없는 세계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에게 왜 사느냐고 물어보면 무어라고 대답합니까? 살기 위하여 산다고 합니다. 자기를 살리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태어나서 산다고 생각하니 자기를 살리는 방향이 진리인양 여기고 삽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지 않아야 할일을 하였을 때 궁색한 변명이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생존권이 가장 중요한 권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죽는다는 말, 끝이라는 말은 금기시 되고 터부시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전도서 7:1-4절입니다. “1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3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4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고 합니다. 그런데 생일 축하는 하는데 죽은 것에 대하여 축하는 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모든 사람이 어리석어서 그렇습니다.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가 있습니다. 왜 그것이 지혜로운 자 입니까? 모든 사람의 결국이 죽음임을 알고 있기에 지혜로운 자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죽음에서 인생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무엇을 자랑한다고 합니까? 날마다 죽는 것을 자랑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죽는 것을 자랑하는 것입니까? 부활의 세계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고 즐기자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어리석은 자기 되지 말라고 합니다. 무엇을 위하여 죽을 것인가를 아는 사람이 참으로 산자인 것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는다는 말씀이 세상이 말하는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요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라는 말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불멸의 이순신이라는 드라마에서 필사즉생(必死卽生) 필생즉사(必生卽死)라는 글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런 죽고자 함이란 결국은 자기를 살리는 것으로서 죽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 죽음은 비록 죽을 지라도 나라가 기억하고 백성이 기억하여 충신의 반열에 오르는 죽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위하여 죽는 죽음이란 어떤 죽음입니까? 세상에서 아무른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힘입니다. 가족에게서도 외면당하고, 마을에서도 배척받고, 나라에서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 십자가에 처형시키라고 고함지른 그 죽음에 함께 죽임 당하는 것이 예수님을 위하여 죽는 죽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가족이 이해합니까? 제자들이 이해합니까? 모두가 힘을 얻고자 따라 왔다가 아무른 힘을 주지 못하고 약하심으로 달려 죽어가는 그 십자가 앞에서 모두가 부인하며 돌아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가 주를 위하여 사는 모습은 바로 세상에서 죽는 모습입니다. 고린도후서 1:8-9절입니다.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되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10-15절입니다. “봉독” 이 두 곳의 말씀만 보아도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어떤 모습입니까? 죽는 모습입니다. 비참합니다. 날마다 죽음에 넘겨집니다. 죽으려고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주님께서 죽음에 넘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날마다 죽는다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사도라면 능력이 나타나고 세상에서 보란 듯이 권세와 영광이 나타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사도가 그런 모습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죽는 자의 모습으로 나오는 것이라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십자가의 증인인 것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의 모습에서 자기를 발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 모든 세상의 자랑거리라는 것은 헛된 영광이며 허상인 것입니다. 죄인인 인간의 실상이 저주받아 죽은 그 십자가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자기를 시작하지 않으면 전부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합니다. 이제 사는 것은 나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나를 위하여 살지 않는다는 것은 내 의지로 나를 위하여 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은 다 자기를 살리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 다는 말씀을 내가 주를 위하여 목숨 바쳐 살면 영생을 얻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를 살리기 위하여 주를 위한다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노력해서 될 일인지 다음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0:34-39절입니다.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2)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이 말씀을 우리가 노력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자기 백성을 오늘도 주님의 죽음에 합류시키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살려도 발버둥쳐도 결국은 죽음으로 끌려갈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부르는 십자가의 죽음은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사신분이 부르시는 곳입니다. 우리를 날마다 죽음에 넘깁니다. 그러나 그 끝이 죽음이 아니라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 것입니다. 부활의 세계로 이끌어 들이고 있는 것이 날마다 죽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죽음에 넘기는 일을 너무 큰 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주 사소하고 작은 일로서도 나타납니다. 전에는 죄인 줄도 몰랐는데 갈수록 자신의 죄의 깊이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다른 사람의 죄가 아니라 자신의 죄로 인한 대신 죽음임을 믿게 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생활에서 날마다 자기 의와 자기 정당성을 가지고 분노하는 우리를 날마다 십자가에 넘기실 것입니다. 그 앞에서 사시기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5:35-49 살려주는 영 2005. 12. 18
35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36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37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 뿐이로되 38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39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40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41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42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45 기록된바 ㄴ)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48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지난 주 설교제목이 혹 생각이 나십니까? ‘날마다 죽노라’였습니다. 제목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얼마나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하면서 사셨습니까? 한 주간을 돌아보면 우리는 자기를 살리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행동해 오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하고 아니한 것의 기준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 기준이 주를 위하여 예스와 노를 하셨습니까? 아니면 자기를 살리고자 행동한 것입니까? 아마 자기를 살리는 방향으로 사셨을 것입니다. 왜 그렇게 살았는지 그 이유를 아십니까?
히브리서 2:14-15절입니다. “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예수님께서 왜 혈육에 함께 속한 자로 오셔서 죽으신 것입니까? 사망으로 사망을 없이하시기 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일생동안 죽기를 무서워하며 죽음의 종노릇하는 해방시켜 생명의 종으로 삼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증거 되는 이런 말씀이 여러분의 귀에 들어오고 있습니까? 눈이 초롱초롱해지면서 관심이 가집니까? 주일학교에서 설교하면 예화시간에 눈이 반짝거리다가 ‘예수님’ 이야기만 나오면 이상하게 눈이 풀리고 행동이 흩트려지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여러분은 그렇지 않을 것 같습니까? 어른은 속으로는 싫으면서도 겉으로는 안 그런 척 할 수 있는 것이 어른입니다. 여러분이 싫어하든 좋아하든 우편배달부는 그대로 전할 뿐입니다.
왜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심이 없는 것입니까?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이며 진짜 현실인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기에 멸망 받을 세상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 믿는다고 교회에 나온 사람들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심이 없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입니까? 주님 오실 때까지 주님의 살과 피를 기억하고 증거 해야 할 교회가 이방축제인 크리스마스를 지킨다고 온 세상이 난리입니다.
크리스마스는 생일이라면 주님의 죽으심은 장례식입니다. 지난주 본 잠언에는 태어나는 날보다 죽는 날이 났다고 했습니다. 도대체 이 세상이 어떤 곳이기에 죽는 날이 낫다고 하겠습니까?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실감이 나십니까? 그런데도 세상이 좋다고 세상에서 살려고 바동거리는 우리의 모습이 바로 죽음에 매여 종노릇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을 예수님께서 사망으로 사망을 잡으시고 사망의 종인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 첫 열매로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죽은 자가 어떻게 살며 어떤 몸으로 오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35-41절입니다. 식물의 씨앗을 뿌려서 자라게 되면 완전히 다른 형체로 나오는 것을 예로 들어 부활을 말합니다. 사과씨앗 하나를 뿌려서 그 씨앗이 죽으면 사과나무가 나오게 됩니다. 전혀 다른 형체가 나오는 것을 예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식물이 아닌 동물도 육체가 다르다고 합니다. 사람과 짐승과 새와 물고기가 다 육체이지만 같은 육체가 아니듯이 부활의 몸이란 세상의 육체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영광이 따로 있는 것입니다. 해와 달과 별의 영광이 다 다르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부활의 몸이 얼마나 영광스러울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늘에 속한 형체가 따로 있다고 말씀합니다. 헬라 이원론에서는 물질은 더럽고 정신은 깨끗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이원론이 없습니다. 분명히 하늘에도 하늘에 속한 영광스러운 형체가 있는 것입니다. 무슨 유령처럼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는 것은 무슨 영광밖에 보지 못하고 삽니까? 땅에 속한 영광만 보는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영광을 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금 우리가 하늘의 영광을 보게 되면 죽게 됩니다. 그래서 다 보여주시지 않고 성경에서 몇 사람에게만 하늘의 영광을 보여 주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삼손의 부모가 보았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보았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동시에 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보았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이었습니까?
먼저 죽은 자와 같이 되었습니다. 땅의 형체를 가진 자가 하늘의 영광을 보았기에 죽은 자처럼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죽지 아니한 것은 하나님의 긍휼을 나타내시면서 계시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변모하시는 것을 보고서 너무나 좋아서 세상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여기사 좋사오니! 하면서 그곳에서 살고 싶어 했습니다. 지금 산 밑의 가족들과 다른 제자들이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늘의 영광보다는 이 세상의 영광이 좋사오니! 하면서 퍼지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닙니까?
바울사도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서 눈이 멀어버렸습니다. 삼일 만에 아나니아가 기도함으로 눈이 열렸습니다. 그러자 지금까지 보았던 세상의 영광, 인간이 율법을 지킴으로 이룰 수 있다고 여긴 그 영광들이 배설물이며 해로운 것임을 알고 십자가의 영광만이 참된 영광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셋째 하늘에 끌려 올라가 그 영광을 보았는데 무어라고 합니까? 고린도후서 12:4절입니다.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도저히 사람의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는 영광인 것입니다.
42-44절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어떻게 됩니까? 계속하여 대비하는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썩을 것과 썩지 아니할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썩을 것입니다. 점점 썩어가고 있습니다. 겉으로 아무리 성형수술을 하여도 속에서 썩어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썩어가는 것을 방지할 방법이 없을까요?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진 인간이 자기 몸을 영원히 살리기 위하여 무슨 짓을 못하겠습니까?
진나라 시황제가 불노초를 구하려고 하였다는 이야기를 어려서부터 들었습니다. 지금은 과학시대입니다. 그래서 복제를 하면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나라가 아니 세계가 황우석 교수의 논문이 사실인지 아닌지 논란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난치병 환자를 위한다고 하지만 그러나 난치병 환자의 절대다수는 가난하여 그 의료혜택을 받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결국은 부자들이 자신들의 몸을 더 건강하고 오랫동안 유지하기 위하여 사용될 것이기에 엄청난 경제적인 가치가 있는 기술이 복제기술입니다. 그래서 나라서 지원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황우석 교수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썩을 것입니다.
우리의 현재의 몸은 썩을 것이며 계속하여 썩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욕된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몸은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 것입니다.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 것입니다. 육의 몸이 있기에 신령한 몸도 있습니다. 신령한 몸이라고 하여 유령 같은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24:39절입니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 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이 믿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영인 줄 알았습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유령이 나타난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만져 보라고 하시면서 음식도 드셨습니다. 부활하신 몸을 만질 수 있고 음식도 드실 수 있는 형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몸은 아직 영광의 몸이 아닙니다. 부활하셔서 영광의 몸이 되신 것은 바울사도가 보았고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에서 기록합니다. 그 영광 앞에서 죽은 자와 같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무슨 몸으로 살고 있습니까? 45-49절입니다.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고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입니다. 산 영이란 스스로 살수가 없고 누가 살려주어야만 사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아담입니다. 우리는 모두 아담의 후손입니다. 아담이 범죄 함으로 우리가 그 안에서 다 범죄하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살릴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자신을 살리려고 해도 자신을 살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아담의 후손의 흙에 속한 형상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입니다. 살려주는 영이 되기 위하여 흙에 속한 형상으로 오셔서 죽으셔야 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시 살아나심으로 살려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게 된 것입니다. 그 하늘에 속한 형상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그 영광을 본 바울사도의 삶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하루라도 빨리 죽는 것입니다. 이 몸을 떠나 영광의 몸을 입기를 그렇게 소원한 것입니다. 그런데 빨리 죽지 못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하여서 죽지 못한 것이지 자기는 소원이 하루라도 빨리 그 나라에 들어가기를 소원한 것입니다. 우리가 바울과 같은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면 바울이 사모한 그 죽음을 우리도 사모할 것입니다. 부활의 영광이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동안에는 자신의 죽음에 계속하여 넘겨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1:21-24절입니다. “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찐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23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24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부활을 믿는 바울 사도의 삶의 자세입니다. 한 곳 더 말씀을 보겠습니다.
빌립보서 3:18-21절입니다. “봉독” 십자가의 원수는 땅의 일을 생각하고 땅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하늘에 시민권이 있는 사람은 십자가를 영광으로 삼고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하루라도 빨리 죽는 것이 소원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냥 죽지 마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시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입니까? 주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사시는 것이 죽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시키시는 일은 이 세상에서 죽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세상에서 살려면 돈이 있어야 하는데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합니다. 돈이 없으면 비참해지는데 자존심 상하는데요! 그런 우리의 자존심을 죽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에 대하여 이 일을 이루시는 일에 실패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살 수 없는 사람이지만 예수님은 살려주시는 영 이시기에 우리를 죽여서도 살려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어도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낮을 몸을 그의 영광의 몸으로 변하게 하실 그 주님을 믿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5:50-58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 2005. 12. 18
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53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ㄷ)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55 ㄹ)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고린도전서 15장으로 오늘 일곱 번째 설교를 합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이 고린도 교회에 있어서 바울사도가 이렇게 길게 여러 가지 예증을 들어가면서 부활을 증거 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들이 전한 복음이 헛된 것이며 믿음도 헛된 것이며 여전히 죄 가운데 살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자에게 부활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왜 불쌍한 자가 됩니까? 그것은 세상의 영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영광은 쇠하여지고 더러워지고 썩어질 것들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가 부활을 믿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연 세상의 썩어질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고 썩지 아니할 그 영광의 나라, 그 부활의 나라, 그 아들의 나라를 구하고 있습니까? 그 약속을 은혜로 받았기에 세상의 형편과 상관없이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주님의 날이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믿음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부활을 믿었던 사람들은 세상의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는 것을 세상의 그 어떤 영광보다 더 귀하여 여겼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재물보다 더 나은 상을 바라보았기에 죽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을 나그네로 거류자로 살았습니다. 바울사도는 하루라도 빨리 죽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세상 살기가 괴로워서가 아니라 부활의 영광을 보고 왔기에 그렇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부활하게 되는가 하는 것은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오늘은 그 부활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유업으로 받는가 하는 면을 보고자 합니다. 우선 50절입니다.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받지 못합니다. 혈과 육이란 우리 인간의 전 존재를 말합니다. 이미 죄로 인하여 사망아래 살고 있는 인간은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 전제가 됩니다.
요한복음 1:9-1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으나 아무도 영접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전도하라고 하면서 이 말씀을 인용합니다. 얼마나 열정적으로 말하는지 영접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자녀가 되면 권세가 주어지기에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는다고 합니다. 지난주에도 어떤 방송설교를 들으니 이 본문을 결론으로 전하는데 12절까지만 전하고 마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해서 영접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마치면 혈과 육이 됩니다.
이어지는 13절을 보아야 합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혈통과 육정, 즉 사람의 뜻으로는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사람은 안 됩니다.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할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혈과 육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범죄 한 아담의 후손들입니다. 온 몸이 다 썩어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먹고 바른다고 하여도 썩어지는 몸을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969세를 살았던 므두셀라도 썩어졌습니다. 부활을 증거 한 다윗도 죽어서 무덤에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누가 썩지 아니함을 입었습니까?
사도행전 13:34-41절입니다. “34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저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가라사대 ㄷ)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35 그러므로 또 다른 편에 일렀으되 ㄹ)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36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37 하나님의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 38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39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40 그런즉 너희는 선지자들로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 41 일렀으되 ㅁ)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이를찌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바울사도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한 내용입니다.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신다는 예언을 한 다윗은 무덤에 묻혀 썩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심으로 썩음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이 분이 살려주는 영이 되셔서 그를 힘입어 죄 사함을 입는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던 자들이 예수님을 힘입어 의롭다 함을 입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믿지 못할 자들이 있다는 것을 선지자들이 이미 예언하였는데 그 말씀이 41절입니다. 너희는 놀라고 망하라고 합니다. 너희에게 이를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다 말씀이 응하기 위하여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51-53절입니다. 이것은 비밀입니다. 비밀이란 아무나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은혜를 입은 자만이 알고 믿게 됩니다. 그 내용은 마지막 나팔에 불면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 도 변화하리니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할 것입니다. 나팔을 부는 것은 신호입니다. 하늘에서 천사들이 나팔을 불게 됩니다. 왕의 행차를 알리는 것입니다. 그 나팔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부활의 몸으로 영광의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만약 지금 이 시간에 주님의 재림이 일어난다면 우리가 순식간에 변화될 것입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이런 말로 위로를 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몸이 아프신 분은 위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위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모르는 비밀을 성도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죽을 몸이 주님의 재림과 함께 홀연히 순식간에 죽지 않고 썩지 아니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이 세상에서 주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면서 탄식하며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만물의 피곤함을 세상이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병원을 가보시면 온통 신음과 고통소리가 가득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아픈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탄식의 소리가 특별히 아픈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이 온 세상에서 가득한 것입니다. 만물의 탄식소리를 들리십니까?
로마서 8:18-25절입니다. “봉독” 지금은 탄식하며 기다립니다.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아니합니다. 우리는 보이지 아니하는 이런 약속을 믿을 믿음이 없습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 줄도 모르기에 이어지는 말씀 26-30절에 보시면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성도 안에서 친히 기도하심으로 성도에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데 그 결과가 하나님이 미리아신 자들로 하여금 그 아들의 형상을 본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미 성령 안에서 약속이 주어졌는데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이미 영화롭게 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것은 아직 영화롭지 못한 몸입니다. 그러나 이미 성령으로 주어진 약속이기에 반드시 응하게 될 날이 있습니다. 언제 그렇게 됩니까? 마지막 나팔소리와 함께 홀연히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우리를 영화롭게 하기 위함이 목적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의 성취차원에서 그렇게 일어나고야 말 것입니다.
54-56절입니다.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하신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응하게 됩니다. 사망이 잡아먹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미 사망의 권세를 이겨 버렸습니다.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해버린 것입니다. 이미 창세기 3:15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응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이 미리 보는 고로 예언한 것입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한 호세아 선지자의 말씀도 응하게 된 것입니다. 사망이 무엇을 향하여 화살을 쏘듯이 쏘는 것입니까? 죄를 향하여 쏘는 것입니다. 죄가 있는 곳에 사망이 있습니다. 죄란 하나님을 반역하고 하나님과 원수 되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죄라고 합니다. 이 죄로 인하여 아담이 죽게 되고 아담의 후손이 죽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죄로 인하여 죽는다는 것을 규정한 것이 율법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권능은 율법인 것입니다. 율법이 가입하지 않았으면 죄를 죄로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죄가 무언지는 법이 투입하게 되면 자기에게 없다고 생각한 죄들이 다 튀어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와 사망과 법이란 함께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누구도 여기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죄 아래 있다는 것은 스스로 법을 만들어서 자기를 살리고자 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율법이 투입되면 율법을 이용하여 자기를 살리고자 나갑니다. 교회에서 무엇을 시키면 그것도 역시 법으로 바꾸어서 적절하게 조절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정도만 하면 되겠지! 스스로 법을 만들고 기준을 정하여 자기가 점수를 더하고 빼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와 사망아래 있는 모습입니다. 이런 죄와 사망과 법에 사로잡힌 자들을 놓아주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무엇에서 해방된 것입니까? 죄에서 사망에서 율법에서 해방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하신 것이지 우리 구원이 목적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해방된 자들은 무엇이라고 고백하게 됩니까?
57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 고백과 감사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58절입니다. 이 말씀에 견고하며 흔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여러 말씀을 서로 권면하며 격려하며 주의 날이 가까운 것을 볼수록 더욱 권하여 모이기를 힘쓰라고 히브리서 10:25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무엇을 위한 수고를 하고 있습니까? 주 안에서의 수고만 헛되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일을 구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성도라면 반드시 이렇게 살도록 이김을 주실 것입니다. 세상의 헛된 일을 버리게 하시며 주의 일, 십자가를 붙들게 하십니다. 그렇게 되는 것은 죄와 사망과 법을 이겨버리신 그 주님의 이기심을 선물로 주셨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 이김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6:1-12 연보는 은혜다 2005. 12. 25
1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2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3 내가 이를 때에 너희의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4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저희가 나와 함께 가리라 5 내가 마게도냐를 지날터이니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나아가서 6 혹 너희와 함께 머물며 과동할 듯도 하니 이는 너희가 나를 나의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
7 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주께서 만일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유하기를 바람이라 8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유하려 함은 9 내게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리고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니라 10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저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저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니라 11 그러므로 누구든지 저를 멸시하지 말고 평안히 보내어 내게로 오게 하라 나는 저가 형제들과 함께 오기를 기다리노라 12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저더러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되 지금은 갈 뜻이 일절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영생이나 부활을 꿈꾸며 삽니다. 어떤 영생이나 부활을 말하고 있습니까? 현재의 내 모습이 더 완벽하게 되어서 영원히 유지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야구 투수가 침체에 빠져 있다가 다시 잘하게 되면 강속구가 부활했다고 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살면서 성경을 보니 성경의 부활도 세상의 방식으로 보는 것입니다. 황우석교수를 열렬히 지지하던 사람들은 지금도 무엇을 기도하겠습니까? 기적적으로 배아줄기세포가 살아나서 확인되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런 것을 부활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부활은 죽음을 전제로 합니다. 죽어야한다는 것입니다. 묻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죽을 몸, 썩을 몸, 약한 몸입니다. 혈과 육이기에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게 하셨습니다.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을 율법인데 그것을 이기신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기 백성을 해방시켜 의와 생명의 법으로 옮기셨습니다. 그 안에서는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할 수가 없습니다. 비록 죄를 짓고 죽어가는 몸이라고 하여도 우리의 몸을 죄와 사망이 주장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로 승리하신 주님께서 자기 소유물을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으로 주어졌기에 우리는 세상에서 실패나 약함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지난주에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예배당 문을 나서면서 무슨 생각이 났습니까? 아이고 추워라! 보일러에 기름 넣어야겠는데, 결혼식에 가야 되는데, 망년회는 어떻게 하지하면서 땅의 생각으로 정신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부활의 영광에서 갑자기 땅으로 추락한 느낌이 듭니다. 그렇게 또 한 주간을 열심히 사셨지요! 그렇게 추락한 느낌처럼 부활의 영광을 이야기 하고서 이제 16장에서 마무리를 하는데 무슨 이야기를 합니까?
연보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영원한 부활의 영광을 이야기 하다가 그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 합니다. 그것이 헛되지 아니하다고 합니다. 헛되지 아니하는 주의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로 마치면 될 텐데 갑자기 돈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땅에 내려온 기분이 듭니까? 부활의 영광을 이야기 하다가 찬바람 쏘이고 나서 현실에 눈뜨지는 기분이 듭니까?
금요일 성경공부를 지난주에 종강하였습니다. 마치고 식사를 하는데 예수님은 좋은데 복음은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복음인데 이상하게 들리지요! 그래서 제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좋다는 것은 여러분들이 상상한 예수님이기에 그렇고 복음이 좋지 않다는 것은 복음이 우리를 죽이는 것이기에 싫은 것이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우리를 죽이지 않는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것이 언제나 전제가 됩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기에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살려고 퍼드덕 되고 있으니 날마다 우리를 죽음에 넘기시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십자가 안에 그리스도의 사심과 부활과 영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복음이 싫은데도 왜 아직까지 앉아있습니까? 돈 내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 그나마 참아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바울사도가 고린도전서를 마감하면서 연보를 하라고 합니다. 매주일 첫날에 각 사람이 이익을 얻은 대로 연보를 하여 모아두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연보를 보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갈라디아 교회나 다른 교회도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방인 교회가 예루살렘교회를 위하여 연보를 하고 예루살렘교회가 연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굉장한 사건임을 사도행전을 통하여 이미 보았습니다.
어떻게 개로 여기는 자들에게서 돈을 받을 수가 있느냐는 것이 유대인들의 생각인데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이 없다는 것이 연보를 주고받음으로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와 자매라면 자존심의 문제가 아닙니다. 저도 청년 때에 몸이 아프고 할 때에 구제헌금을 받은 적이 한번 있습니다. 그때 저의 집사람은 저를 위하여 구제헌금 한 사람이 됩니다. 그래도 결혼해서 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연보란 내가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기에 은혜를 갚자는 차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연보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에서 봉사를 하는 것이 은혜를 받았으니 은혜를 갚자는 차원에서 나오면 안 됩니다. 갚을 수 있는 은혜는 은혜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여러분들이 정말 자원하는 마음으로 연보가 된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잘남이 아니요 지금도 주님께서 은혜를 베풀고 계시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억지나 인색함으로 하셨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닌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절을 봅니다. 성도를 위하는 연보를 매 주 첫날에 하라고 합니다. 우리식으로 일요일입니다. 초대교회 때는 날마다 모였습니다. 그런데 한 주간의 이익을 얻었다면 각 사람이 연보를 하여 모아두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루살렘교회가 어렵기에 그곳으로 보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보내는 연보를 3절에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은혜라고 합니다. 돈을 보내는 것을 가지고 은혜를 보낸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연보자체가 은혜요 선물인 것입니다.
4-11절입니다. 그 연보를 고린도 교회에서 인정한 사람이 예루살렘교회로 가져갈 때에 바울사도가 편지를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가는 것이 합당하면 함께 가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편지를 보내는 것은 지금 바울사도가 에베소에서 사역을 하고 있는데 에베소 전도의 문에 활짝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전도의 문에 열려있다는 것은 대적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대적이 있지만 주님께서 아직도 그 성에 자기 백성이 있기에 문을 닫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전도를 하고 마케도니아를 거쳐서 고린도에 올 것인데 그러면 겨울을 함께 지나고 또 다른 곳에 전도하려 갈 여비를 마련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고린도전서 9장에서 자기는 죽을지언정 자기에게 무엇을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연보를 하고 또 자기가 가는 것에 대하여도 연보로 도우라고 합니다. 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이 바울의 사사로운 일이 아니라 주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역하는 일이기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디모데가 이르면 그도 바울과 함께 주의 일에 힘쓰는 자이기에 조심하여 두려움 없이 지내게 하라고 합니다. 이 말씀도 연보가 필요한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가 말하는 연보란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은혜로 연보를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4:14-20절입니다. “14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2)참예하였으니 잘하였도다 15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 일에 2)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16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번 두 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17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18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20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돌릴찌어다 아멘”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이 연보를 안 하는 것이 무슨 의가 되는 것인 양 여기는데 교회가 워낙 돈을 이야기하고 바치면 복 받는다고 하니 그것이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연보를 안 하고 있는 자기를 정당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것이 누구의 것입니까? 내 것을 가지고 드린다면 아까울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가 임하면 내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런 은혜가 임한 자의 모습을 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8:1-15절입니다. “봉독”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무엇으로 나타났습니까? 환난의 많은 시련과 극한 가난가운데서도 넘치는 기쁨으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은혜를 받기를 원하십니까? 제발 이런 은혜는 임하지 않았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의 남편이나 아내나 자식이 이런 은혜를 받았다면 말리고 싶지 않겠습니까?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예하게 된 것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도들에게 주었다는 것입니다. 너희의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 즉 연보에도 풍성하라고 합니다. 연보가 은혜임을 보게 됩니다. 은혜가 아니면 누가 이렇게 하겠습니까? 그러면 이런 은혜가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9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요하신 자로서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우리로 부요하게 하려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요함이란 세상에서 부자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부요하고 은혜에 부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믿음과 은혜가 풍성한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았습니까?
환난과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이들의 환난과 극심한 가난이 어느 정도였겠습니까? 나는 아파트 한 채 뿐인데 다른 사람은 세 체가 되니 나는 극심하게 가난하다고 여기는 것입니까? 상대적인 빈곤감이 아닙니다. 절대적인 빈곤입니다. 하루 끼니를 걱정해야하는 그런 가난입니다. 그런데도 형제 섬기는 연보에 대하여는 힘에 지나치도록 기쁨으로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으로 가능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연보란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지금도 계속하여 은혜가 주어져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어떻게 주어졌습니까? 하늘 보좌에서 낮고 낮은 말 구유에 오셨습니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기에 멸망하는 짐승과 같이 자기만 알고 자기 배만 섬기는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살과 피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부요하신자로서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를 부요케 하시기 위한 연보의 삶이었습니다. 그의 부요를 자기의 형제들에게 나누어 주심으로 우리도 그 부요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연보할 때마다 이 주님의 연보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연보는 자랑이 아니라 연보하고서 회개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연보는 자신의 살과 피를 주셨는데 우리는 어떤 연보를 하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제대로 된 연보는 은혜로만 됩니다. 은혜로 연보하게 되면 죽도록 충성하고서도 자기는 무익한 종이며 오직 주의 은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에게도 있기를 소원합니다
고린도전서 16:1-12 연보는 은혜다 2005. 12. 25
1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2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3 내가 이를 때에 너희의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4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저희가 나와 함께 가리라 5 내가 마게도냐를 지날터이니 마게도냐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나아가서 6 혹 너희와 함께 머물며 과동할 듯도 하니 이는 너희가 나를 나의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
7 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주께서 만일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유하기를 바람이라 8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유하려 함은 9 내게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리고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니라 10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저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저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니라 11 그러므로 누구든지 저를 멸시하지 말고 평안히 보내어 내게로 오게 하라 나는 저가 형제들과 함께 오기를 기다리노라 12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저더러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되 지금은 갈 뜻이 일절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영생이나 부활을 꿈꾸며 삽니다. 어떤 영생이나 부활을 말하고 있습니까? 현재의 내 모습이 더 완벽하게 되어서 영원히 유지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야구 투수가 침체에 빠져 있다가 다시 잘하게 되면 강속구가 부활했다고 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살면서 성경을 보니 성경의 부활도 세상의 방식으로 보는 것입니다. 황우석교수를 열렬히 지지하던 사람들은 지금도 무엇을 기도하겠습니까? 기적적으로 배아줄기세포가 살아나서 확인되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런 것을 부활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부활은 죽음을 전제로 합니다. 죽어야한다는 것입니다. 묻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죽을 몸, 썩을 몸, 약한 몸입니다. 혈과 육이기에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게 하셨습니다.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을 율법인데 그것을 이기신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기 백성을 해방시켜 의와 생명의 법으로 옮기셨습니다. 그 안에서는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할 수가 없습니다. 비록 죄를 짓고 죽어가는 몸이라고 하여도 우리의 몸을 죄와 사망이 주장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로 승리하신 주님께서 자기 소유물을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으로 주어졌기에 우리는 세상에서 실패나 약함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지난주에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예배당 문을 나서면서 무슨 생각이 났습니까? 아이고 추워라! 보일러에 기름 넣어야겠는데, 결혼식에 가야 되는데, 망년회는 어떻게 하지하면서 땅의 생각으로 정신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부활의 영광에서 갑자기 땅으로 추락한 느낌이 듭니다. 그렇게 또 한 주간을 열심히 사셨지요! 그렇게 추락한 느낌처럼 부활의 영광을 이야기 하고서 이제 16장에서 마무리를 하는데 무슨 이야기를 합니까?
연보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영원한 부활의 영광을 이야기 하다가 그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 합니다. 그것이 헛되지 아니하다고 합니다. 헛되지 아니하는 주의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로 마치면 될 텐데 갑자기 돈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땅에 내려온 기분이 듭니까? 부활의 영광을 이야기 하다가 찬바람 쏘이고 나서 현실에 눈뜨지는 기분이 듭니까?
금요일 성경공부를 지난주에 종강하였습니다. 마치고 식사를 하는데 예수님은 좋은데 복음은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복음인데 이상하게 들리지요! 그래서 제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좋다는 것은 여러분들이 상상한 예수님이기에 그렇고 복음이 좋지 않다는 것은 복음이 우리를 죽이는 것이기에 싫은 것이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우리를 죽이지 않는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것이 언제나 전제가 됩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기에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살려고 퍼드덕 되고 있으니 날마다 우리를 죽음에 넘기시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십자가 안에 그리스도의 사심과 부활과 영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복음이 싫은데도 왜 아직까지 앉아있습니까? 돈 내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 그나마 참아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바울사도가 고린도전서를 마감하면서 연보를 하라고 합니다. 매주일 첫날에 각 사람이 이익을 얻은 대로 연보를 하여 모아두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연보를 보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갈라디아 교회나 다른 교회도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방인 교회가 예루살렘교회를 위하여 연보를 하고 예루살렘교회가 연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굉장한 사건임을 사도행전을 통하여 이미 보았습니다.
어떻게 개로 여기는 자들에게서 돈을 받을 수가 있느냐는 것이 유대인들의 생각인데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이 없다는 것이 연보를 주고받음으로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와 자매라면 자존심의 문제가 아닙니다. 저도 청년 때에 몸이 아프고 할 때에 구제헌금을 받은 적이 한번 있습니다. 그때 저의 집사람은 저를 위하여 구제헌금 한 사람이 됩니다. 그래도 결혼해서 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연보란 내가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기에 은혜를 갚자는 차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연보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에서 봉사를 하는 것이 은혜를 받았으니 은혜를 갚자는 차원에서 나오면 안 됩니다. 갚을 수 있는 은혜는 은혜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여러분들이 정말 자원하는 마음으로 연보가 된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잘남이 아니요 지금도 주님께서 은혜를 베풀고 계시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억지나 인색함으로 하셨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닌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절을 봅니다. 성도를 위하는 연보를 매 주 첫날에 하라고 합니다. 우리식으로 일요일입니다. 초대교회 때는 날마다 모였습니다. 그런데 한 주간의 이익을 얻었다면 각 사람이 연보를 하여 모아두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루살렘교회가 어렵기에 그곳으로 보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보내는 연보를 3절에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은혜라고 합니다. 돈을 보내는 것을 가지고 은혜를 보낸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연보자체가 은혜요 선물인 것입니다.
4-11절입니다. 그 연보를 고린도 교회에서 인정한 사람이 예루살렘교회로 가져갈 때에 바울사도가 편지를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가는 것이 합당하면 함께 가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편지를 보내는 것은 지금 바울사도가 에베소에서 사역을 하고 있는데 에베소 전도의 문에 활짝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전도의 문에 열려있다는 것은 대적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대적이 있지만 주님께서 아직도 그 성에 자기 백성이 있기에 문을 닫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전도를 하고 마케도니아를 거쳐서 고린도에 올 것인데 그러면 겨울을 함께 지나고 또 다른 곳에 전도하려 갈 여비를 마련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고린도전서 9장에서 자기는 죽을지언정 자기에게 무엇을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연보를 하고 또 자기가 가는 것에 대하여도 연보로 도우라고 합니다. 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이 바울의 사사로운 일이 아니라 주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역하는 일이기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디모데가 이르면 그도 바울과 함께 주의 일에 힘쓰는 자이기에 조심하여 두려움 없이 지내게 하라고 합니다. 이 말씀도 연보가 필요한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가 말하는 연보란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은혜로 연보를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4:14-20절입니다. “14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2)참예하였으니 잘하였도다 15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 일에 2)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16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번 두 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17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18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20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돌릴찌어다 아멘”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이 연보를 안 하는 것이 무슨 의가 되는 것인 양 여기는데 교회가 워낙 돈을 이야기하고 바치면 복 받는다고 하니 그것이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연보를 안 하고 있는 자기를 정당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것이 누구의 것입니까? 내 것을 가지고 드린다면 아까울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가 임하면 내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런 은혜가 임한 자의 모습을 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8:1-15절입니다. “봉독”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무엇으로 나타났습니까? 환난의 많은 시련과 극한 가난가운데서도 넘치는 기쁨으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은혜를 받기를 원하십니까? 제발 이런 은혜는 임하지 않았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의 남편이나 아내나 자식이 이런 은혜를 받았다면 말리고 싶지 않겠습니까?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예하게 된 것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도들에게 주었다는 것입니다. 너희의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 즉 연보에도 풍성하라고 합니다. 연보가 은혜임을 보게 됩니다. 은혜가 아니면 누가 이렇게 하겠습니까? 그러면 이런 은혜가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9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요하신 자로서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우리로 부요하게 하려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요함이란 세상에서 부자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부요하고 은혜에 부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믿음과 은혜가 풍성한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았습니까?
환난과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이들의 환난과 극심한 가난이 어느 정도였겠습니까? 나는 아파트 한 채 뿐인데 다른 사람은 세 체가 되니 나는 극심하게 가난하다고 여기는 것입니까? 상대적인 빈곤감이 아닙니다. 절대적인 빈곤입니다. 하루 끼니를 걱정해야하는 그런 가난입니다. 그런데도 형제 섬기는 연보에 대하여는 힘에 지나치도록 기쁨으로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으로 가능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연보란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지금도 계속하여 은혜가 주어져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어떻게 주어졌습니까? 하늘 보좌에서 낮고 낮은 말 구유에 오셨습니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기에 멸망하는 짐승과 같이 자기만 알고 자기 배만 섬기는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살과 피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부요하신자로서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를 부요케 하시기 위한 연보의 삶이었습니다. 그의 부요를 자기의 형제들에게 나누어 주심으로 우리도 그 부요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연보할 때마다 이 주님의 연보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연보는 자랑이 아니라 연보하고서 회개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연보는 자신의 살과 피를 주셨는데 우리는 어떤 연보를 하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제대로 된 연보는 은혜로만 됩니다. 은혜로 연보하게 되면 죽도록 충성하고서도 자기는 무익한 종이며 오직 주의 은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에게도 있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