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신학의 관점에서 재정립되어야 할 성화에 관한 연구(A Study of the sanctification that is reestablished by the view points of the biblical theology)
-성화에 대한 개혁주의 신학의 고찰과 성경의 주석적 의미의 바른 해석-
Ⅰ. 성화 교리의 출현에 이어서......
Ⅱ. 교회사적으로 본 성화의 관점
1. 종교개혁 이전의 성화론
성경의 교리적인 원리들을 말해나가며 이를 저술해 나간 것은 3세기 초부터이므로 상당히 오래 전부터 다루어져왔으며 이후 다양한 명칭으로 많은 조직신학이 비중 있게 저술되어 왔다. 그런 까닭에 구원의 순서에서 다루어지는 성화 부분이 교회사적으로 이 시기에서는 어떻게 말해졌는지에 의해서 그 이후에도 성화의 개념과 그 이해를 가져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교회사적으로 먼저 종교개혁 이전에 언급되거나 다루어진 성화의 관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1) 고대의 성화관
박형룡은 그의 저서 ‘박형룡 박사 저작전집 제5권 교의신학 구원론’에서 성화에 관한 역사적 고찰을 다루면서, “초대 교회에서는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신앙과 선행에 의뢰할 것을 가르치는 도덕주의의 긴장이 현저히 나타났다”고 하면서 그에 대한 주석으로, “세례 받기 전에 범한 죄들은 세례 받을 때에 씻어졌으나 그 후에 범한 죄들을 위하여는 신자가 반드시 고해(告解)와 선행(善行)으로 대비하여야 했다. 그는 반드시 도덕생활을 하여서 주의 시인(是認)을 받을 공로를 세워야 했다. 여기서 자연히 수법주의(守法主義), 성례중시주의(聖禮重視主義), 속계(俗界)에서 세력을 펴려는 성직자의 정략(政略), 과도한 수도사적 경건의 결점 있는 개념들이 자라났다. 고행주의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여지게 되었다. 칭의와 성화를 혼동하려는 경향이 있었다.”고 설명하였다. 그의 이러한 견해는 초대 교회 시대인 고대에서는 고도의 도덕생활을 요하는 도덕주의가 성화의 관념을 띠고 행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2) 4세기까지의 구원론의 동향에 의한 성화관
교회사에서 종교개혁 이전에 성화를 직접적으로 언급한 인물은 4-5세기의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354-430) 이다. 그 이전인 초대교회 교부들의 저서에는 성화의 교리에 대한 진술이 거의 없다. 단지 이 당시에는 구원론의 관점에서 그 동향이 어떤 것인지를 통하여 성화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가졌을 것인지를 대략적으로 이해할 뿐이다. 사람은 구원을 받기 위하여 신앙과 선행에 의존해야만 한다는 가르침에서 도덕주의의 경향이 현저히 나타났다. 세례 받기 전에 범한 죄들은 세례 받을 때에 씻어졌으나 그 이후에 범한 죄들에 대해서는 반드시 고해와 선행으로 준비해야만 한다. 그는 반드시 덕스러운 생활을 해야만 하며 그리하여 주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공로를 세워야만 한다. 뻘콥은 이에 대한 스코트(Scott)의 말(The Nicene Theology, p.200)을 소개하여 말하기를, “이와 같은 이원론(二元論)은 성화의 영역을 단지 간접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과 연관시켰다. 그리고 이것은 자연히 죄에 대한 불완전한 개념, 율법주의, 성례주의, 사제술(司祭術), 지나친 수도사적 헌신을 성장시킨 분야(field)였다” 라고 하였다.
이 당시는 금욕주의가 크게 중요시하게 된 시기이나 칭의와 성화를 혼동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 면에서 이때의 칭의와 성화에 대한 관점은 고대의 성화관과 크게 다르지 않다.
3) 어거스틴의 성화관
루이스 뻘콥은 4세기 이후 어거스틴은 성화의 개념을 최초로 발전시킨 사람이라고 본다. 박형룡도 뻘콥의 견해를 그대로 인용하여 같은 견해를 보였다. 어거스틴이 가진 성화의 견해들은 중세기 교회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종교개혁 시기에도,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여전히 그 영향 속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펠라기우스의 주장에 반대하여 아담의 죄와 부패는 자손에게 유전하는 것, 이 죄의 벌로써 죽음이 온 것, 사람은 출생한 그대로의 상태에서는 참으로 선을 행할 힘이 없는 것, 우리가 선택하여 선을 취하고 이를 행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 것, 이 은혜는 사람의 공덕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전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하여 되어지는 것으로 이 선택은 확실불변하여 지속의 힘이 있으며 이 은혜는 결코 잃어버리는 일이 없다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어거스틴은 선을 행할 힘과 여지가 사람에게는 전혀 없다는 것을 말하였다.
그렇지만 그러한 어거스틴은 사람의 성질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부패되었다고 믿기 때문에 성화를 신적 생명의 새로운 초자연적 부여에 의한 능력으로 생각하였다. 이런 생각은 신적 은혜가 사람의 영혼에 새롭게 주입(注入)된 능력이라고 여기는 것으로, 이 은혜는 일종의 ‘부가적 선물’로서 실유(being)를 새로운 수준 또는 보다 더 높은 질서에로 들어오려 하나님을 알고 소유하며 즐기는 천적인 운명을 성취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장수민은 그의 저서 ‘칼빈의 기독교강요 분석’에 부록으로 실은 기독교강요인명록의 어거스틴에 대한 설명에서, “칭의의 은총은 인간의 재창조이며 갱신이다. 이 은총은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인 사랑의 주입과 자신 안에 초자연적 능력의 전달을 내포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인간의 행위를 초자연적으로 선하게 만들며, 하늘에서 보상을 받게 한다. 이러한 새로운 능력들이 인간에게 진정한 의지의 자유를 부여한다. 즉 초자연적인 선의 연습을 위한 능력을 부여해 준다.” 라고 하였다.
어거스틴이 이와 같은 견해를 갖는 것은 칭의를 단번에 되어지는 사건으로 보는 동시에 계속적으로 의롭게 되어가는 과정으로 보고서, 여기에 성화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개념으로 이해하려고 한 때문이다. 즉, 칭의는 하나의 사건으로 시작하며 전 삶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의를 추구해 나가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칭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 과정을 포괄한다고 할 수 있다. 성화는 여기에 있게 되는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의 역사의 열매로 나타나는 것으로, 은혜의 선물을 통한 하나님의 행위인 것이다. 어거스틴이 가진 이러한 성화의 관점은 이후에 성화론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는데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에게 신적 능력이 임하여 그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상태에 있게 하는 것으로 인식케 하였다.
4) 중세 시대의 로마카톨릭교회의 성화관
어거스틴에게서 나타난 성화의 개념은 중세기 시대의 로마카톨릭교회가 가진 신학에서 좀 더 그 개념이 명확해진다. 그것은 어거스틴은 성화의 개념을 최초로 발전시킨 사람이었기에 그의 견해들은 중세 시대의 로마카톨릭교회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중세 시대의 로마카톨릭교회에서의 성화관이 어떤 것인지는 이 시대의 신학 사상을 집대성한 사람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저서들에서 가장 발전된 형식으로 발견되었다. 이 발전 과정 속에서 성화의 은총적이고 에너지적인 측면이 강조되면서, 이것이 교회의 성례전적인 시행을 통하여 신자들에게 분여된다는 교리가 확고해졌다. 그들의 교리는 트렌트공의회의 선언을 통하여 더욱 구체화되었는데, 정상적인 인간성은 죄와 불가분의 관계이고, 인간의 공로만을 통한 구원은 불가능하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초자연적인 은총이 필요한데, 이것은 인간이 이미 지니고 있는 자연적인 본성에 선물로서 더해지는 초자연적인 은사로서 이로 말미암아 인간은 보다 초자연적인 존재로 승화되며 이로써 하나님을 이해하고 교제하며, 그에게서 오는 복을 누리게 되는데 교회가 바로 그러한 구원의 은총을 부여하는 하나님의 대리자라고 보았다. 성화 역시 이러한 신학적인 맥락에서 이해하였다. 즉, 죄인을 성화시키는 은총의 에너지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로를 자원으로 삼아서 교회의 분여를 통하여 성례전이라는 수단을 통로로 죄인들에게 주입되는데, 이것을 통해서 신자들은 거룩한 삶을 살게 되고 여기서 성령의 열매가 맺힌다고 보았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서 더 나아가 신자들의 마음에 주입된 죄인을 성화시키는 은총의 에너지는 신자들을 공덕(supererogation)의 행위를 수행할 수 있게 하여서 자기 자신들의 구원에 필요한 것보다 더 할 수 있으며 그리하여 다른 사람의 이익에 보충할 만한 선행을 쌓을 수 있다고 한다.
중세 시대의 로마카톨릭교회의 성화관은 그들이 갖는 점진적 과정의 칭의관과 일맥상통하여 점진적 과정의 성화관을 갖는다. 도머(Domer)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칭의는 점진적 과정이다. 신자의 생활의 전과정을 통해 계속된다. 죄의 고백과 각종 징계가 칭의를 확보하는데 필요하다. 사람들은 거룩해진 것만큼 의롭게 된다. 그 결과 인간은 현재 생애에서 구원을 확신할 수 없다. 칭의는 계속 과정이기에 칭의가 기초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구속적 죽음도 반드시 계속적 과정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미사가 계속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칭의는 이 세상에서 결코 완성되지 않은 것이 분명하므로 누구도 완전한 의로운 자로 죽을 수 없다. 그래서 연옥설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