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羌)족 :
뵈(서양에서는 ‘티베트’로 알려진 민족의 진짜 이름. 이는 ‘코리아 공화국 Republic of Korea’의 진짜 이름이 ‘한국’인 것과 같다. ‘티베트’는 몽골초원에서 살던 유목민들이 뵈 사람에게 붙인 이름이고, 이것이 중앙아시아와 아랍으로 건너갔으며, 나중에 아랍인과 접촉한 서양인들이 이 이름을 받아들였다) 계통인 유목민. 원래는 튀르크(투르크의 터키어 발음)계의 나라인 흉노(匈奴. 실제 발음은 ‘훈Hun’이나 ‘훈나Hunna’로 추정된다) 제국과 사이가 좋았으며 뵈의 동북쪽에 살고 있었으나, 한(漢)나라가 흉노를 쳐서 이긴 뒤 한나라 땅으로 끌려와 살게 되었다.
한족이 이들을 깔보고, 깎아내리고, 부려먹고, 쥐어짰기 때문에 자주 들고 일어났고 그때마다 한나라의 군사에게 죽임을 당했다. 강족은 동한(東漢. 후한後漢을 가리키는 말. 수도가 ‘동쪽’인 낙양에 있다고 해서 이렇게 불리었다)의 멸망을 앞당긴 민족이기도 하다.
서진(西晉)말기에 다른 유목민족들과 함께 들고 일어나 서진을 무너뜨렸고, 그 뒤 유목민족이 세운 왕조(전진이나 북위)의 백성으로 살다가 북위(北魏)의 군주인 탁발굉(시호 효문제. 훗날 이름을 원굉으로 바꿈)이 한화정책을 펼칠 때 북중국의 한족으로 동화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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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7월(음력이다. 오늘날 쓰는 달력인 양력으로는 8월이다 - 인용자 잉걸. 이하 ‘인용자’), ‘단경’이 병사 1천 명에게 명하여 서현(西縣 : 중국 감숙성 천수시 서남쪽)에서 나무를 베어 폭 20보(步. ‘걸음’을 뜻하는 말. 예를 들어 ‘50보’는 ‘한 사람이 쉰 걸음을 걸어가야 할 만큼 긴 거리’를 일컫는 말이다 - 옮긴이)에 길이가 40리나 되는 나무울타리를 쳐 강(羌)족이 달아날 길을 완전히 막게 했다.
그리고 (단경은 - 인용자) ‘전안’과 ‘하육’ 등에게 군사 7천 명을 이끌고 함매(銜枚. 함銜은 말에게 물리는 재갈을 가리키는 말이고, 매枚는 젓가락처럼 생긴 사람이 무는 재갈을 가리키는 말이다. “함매를 하게 되면 말이나 사람 모두 불편하여 소리를 거의 내지 못하게 되어 있다.[신동준 21세기 정치연구소 소장의 주석]” 소리를 내지 않고 움직여서 마음을 놓고 있는 적을 덮칠 수 있으므로 매복이나 기습전에 자주 쓰였다 - 인용자)한 채 밤을 노려 서쪽 뫼(:산山을 일컫는 순우리말 - 인용자)로 기어오르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어 단경이 적과 1리쯤 떨어진 곳에 영채(營寨. 군대가 집단적으로 거처하는 집. 군영軍營 - 인용자)를 세운 뒤 다시 사마인 장개(張愷)에게 병사 3천 명을 이끌고 곧바로 동쪽 뫼로 곧장 오르라는 명령을 내리자 강족이 비로소 (한漢나라 군사에 - 인용자) 에워싸인 것을 알게 되었다.
단경이 장개와 함께 군사를 나눠 동서(東西)에서 (강족을 - 인용자) 함께 쳐서 사호곡의 위 아래에 있는 입구까지 뒤쫓은 뒤 강족을 깊은 산골 속으로 몰아넣고 강족의 장수들을 포함해 모두 1만 9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풍선’이 항복한 강족 4천 명을 흩뜨려 각각 안정(安定)과 한양(漢陽), 농서(隴西 : 감숙성 임조현) 세 군(郡)에 살게 함으로써 동쪽의 강족을 모두 평정하게 되었다. 이 싸움에서 단경은 모두 180 번을 싸워 모두 3만 8천 명을 죽였고 (강족에게서 - 인용자) 온갖 길짐승(길들인 짐승이라는 뜻. ‘가축家畜’을 일컫는 순우리말이다 - 인용자) 42만 7천여 두(頭)를 빼앗았다. 전비(戰費. 전쟁 비용 - 인용자)로는 44억 전(錢)을 썼으나 (한나라의 군사 가운데 - 인용자) 죽은 이는 겨우 4백여 명 뿐이었다. 이로써 단경은 다시 신풍후(新豊侯)로 봉해져 식읍(食邑. 나라가 공을 세운 신하에게 주는 땅. 또는 그 땅에 있는 고을을 가리키는 말이다. 식읍을 받은 신하는 그 식읍에서 나오는 조세를 받아서 쓸 수 있었다 - 인용자)의 규모가 1만 호(戶)에 다다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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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臣) 사마광(司馬光. 북송의 정치인이자 역사가. 조수들과 함께『자치통감』을 썼다 - 인용자)은 (북송北宋의 황제인 신종神宗 조욱趙頊에게 - 인용자) 아뢰고자 합니다.
“『서경(書經. 공구孔丘[존칭 공자孔子. ‘자子’는 ‘존경할 만한 선생님’이라는 뜻이다]가 요순시대부터 서주西周 시절에 이르기까지 쓰여진 나랏일을 다룬 글들을 모아서 펴낸 역사책. 상서尙書라고도 불린다. 유교의 다섯가지 경전 가운데 하나다 - 인용자)』에서 말하길, ‘하늘과 땅은 모든 것의 어버이고 사람은 모든 것을 이루는 신령스러운 기운이다. 참으로 슬기로우면 임금이 될 수 있고 임금은 씨알[:백성百姓을 일컫는 순우리말 - 옮긴이]의 어버이가 된다.’고 하였습니다(『서경』「주서/태서 상」- 신동준의 주석).
만이융적(蠻夷戎狄. 만蠻은 남南중국의 원주민과 동남아시아 사람을 깎아내리는 말이고, 이夷는 북중국에서 보았을 때 ‘동쪽’에 있는 사람들, 그러니까 만주나 연해주나 한/조선반도나 일본열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깔보는 말이며, 융戎은 오늘날의 동東 투르키스탄[:위구르족이 사는 곳. ‘신강新疆’이라는 말은 ‘새로 얻은 땅’이라는 뜻이고, 청나라가 이곳을 정복한 뒤 붙인 이름이므로 정치적으로 올바른 이름이 아니다]이나 중앙아시아 사람들을 깔보는 말이고, 적狄은 몽골초원이나 바이칼호에서 살고 있는 유목민족/수렵민족을 욕하는 말이다. 단, 족속과 상관없이 순전히 중국에서 본 ‘방향’만으로 이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발해는 ‘동이’로 불리웠던 고구려의 후속국가지만, 당나라는 발해를 ‘동이’가 아니라 ‘북적’으로 불렀다 - 인용자)이 비록 (한족과는 - 인용자) 다른 족속이기는 하나 이익을 좇고 손해를 피하며,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우리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사옵니다.
그들을 아픈 곳을 보듬어주고,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방법으로써 다스리면 그들도 곧 따를 것이고, 그런 이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들은 곧 들고 일어나는 것이니, 이는 마땅히 그러한 것이옵니다.
그래서 옛 임금께서는 들고 일어나면 토벌하되, 무릎 꿇고 들어오면 어루만지고 잘 달래어 국경지대 가운데 여러 곳에 살게 함으로써 예의를 받드는 나라인 중원을 소란케 하지 못하도록 다스리신 것이옵니다. 만일 그들을 풀이나 나무나 짐승처럼 (하찮게 - 인용자) 여기고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따르는 이와 거스르는 이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죽이면 이 어찌 씨알의 어버이가 품는 마음이라 할 수 있겠사옵니까? 하물며 강족의 반란은 해당 고을 사람들(한족[漢族] - 인용자)이 (강족을 - 인용자) 침범하여 해를 끼치고 업신여기매 (이것이 강족의 - 인용자) 원망을 낳아 일어난 것이니 더 이상 얘기할 것도 없사옵니다.
반기를 든 자를 그 때 곧바로 처결하지 못한 까닭은 제대로 된 장수를 뽑지 못했기 때문이옵니다. 만일 뛰어난 장수를 가려 뽑아 적을 국경지대 밖으로 몰아낸 뒤 훌륭한 벼슬아치로 하여금 그들을 다독이게 했다면 어찌 국경을 지키는 군인이 (이민족을 - 옮긴이) 많이 죽이는 것을 속 시원하다고 여길 수 있었겠사옵니까?
만일 다스리는 방법이 도리에 맞지 않는다면 설령 화하(華夏. 중국을 일컫는 말이다. 중화中華인 하夏나라라는 뜻이다. 중국인들은 최초의 고대국가가 하 夏왕조라고 믿어서 이런 말을 썼다 - 인용자)의 한인(漢人)일지라도 들고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을 터인데 어찌 능히 이들을 모조리 없앨 수 있겠습니까? 단경이 비록 뛰어난 장군으로 적을 이긴 공로가 있다 하더라도 군자로서는 그가 한 일을 추켜세울 수 없는 것이옵니다.
―『자치통감(資治通鑑)』건녕 2년(서기 169년)의 기사(記事)
*인용자(잉걸)의 말 :
사마광은 서기 1066년에『자치통감』을 쓰기 시작해서 서기 1084년에 다 썼으므로, 그의 논평은 서기 1066년에서 서기 1084년 사이에 쓴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서기 1084년에 이 논평(자주색으로 표시한 부분)을 썼다 하더라도 대략 927년 전에 쓴 글이라는 이야기다. 나는 이 기사를 서기 2004년 신동준 21세기 정치연구소 소장이 우리말로 옮긴『자치통감 - 삼국지』[상]에서 인용하였으며, 원문에 쓰인 말을 순우리말이나 지금 쓰고 있는 쉬운 말로 바꿔 쓰긴 했지만 글의 내용 자체는 바꾸지 않았음을 밝힌다.
첫댓글 끝없이 이어지는 중화사상으로 인해 현재 까지 고통받고 있는 티벳국민들을 생각하면 안타깝네요.
감사합니다.
참고로 강(羌)족은 한나라에게 시달렸지만, 당시 티벳 고원(오늘날의 뵈)에 살던 뵈족은 독립을 누렸습니다. 티벳 고원의 뵈족이 독립을 잃은 건 청나라 때의 일이고, 그나마 간접 지배였기에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어요. 신해혁명(서기 1911년)으로 청나라가 무너지자 뵈족은 독립을 선언했고, 이후 서기 1949년까지는 독립을 유지했습니다. 서기 1959년 중국 공산당이 홍군(오늘날의 중국군)을 이끌고 쳐들어온 뒤부터 뵈는 중국에 완전히 점령당했고(이 때부터 한족漢族의 직접 지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때 달라이 라마와 그를 따르는 뵈족이 바라트(인도)의 다람살라로 망명해 망명정부를 세웠답니다.
상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제 짧은 설명이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네요. 앞으로도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보세요. 제가 아는 한에서 대답해 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