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성회
1951년생으로 서울대학교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한뒤 1970년대에는 금성사와 현대자동차 디자인실에서 근무했고, 1980년부터 3년 동안 공간사에서 일했다. 건축과 디자인 그리고 미디어 아트 등 세상 모든 것에 관심이 많아서 늘 여기 저기를 기웃거렸다. 한국 산업디자이너 협회 주최 디자인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으며,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의 멀티스크린, 88올림픽환경디자인, 목동성당,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페스티발 디자이너, 인사동 환경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의 작업을 했다. 현재 1989년에 설립한 프론트 디자인 대표로 있고 경영인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디자인 마인드>라는 책도 썼다.(월간디자인에서)
(다음 글은 국립부산기계공업고등학교 대구동문회 카페에서 발췌된 자료임)
실력이 나의 배경, 1회 구성회 선배| 부산기공인물
장충동 | 2013.02.21
실력이 나의 배경, 1회 구성회 선배
필자의 소개와 기획의도
저는 직업이 변호사입니다. 변호사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비즈니스가 시작되는 직업입니다. 고향이 부산인 저는 서울에서 개업을 했고 재경동문회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동문회 활동을 하면서 동문들이 서로의 기수에 상관없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거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희 부산기계공고 출신들은 고등학교 동문이라는 공통점뿐만 아니라, 어려운 환경에서 주위의 배경 없이 혼자서 세상을 돌파해 나가야 했다는 점에서 모두 동질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막 40에 접어들면서, 어려운 시절에 우리 선배님들은 어떻게 세상의 거친 풍파를 뚫고 지내 오셨는지 생생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 이야기를 동문들에게 전해 주어 모두가 공감할 수 있고, 또한 삶의 지혜와 용기도 나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선배님들의 개인 이야기를 한 번 써 보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장산골 출신 이야기’입니다. 이제부터 편하게 인간극장에서 나래이션을 듣는다고 생각하시고 귀를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인터뷰를 시작하며
구성회선배의 사무실에 처음 방문했다. 프론트라는 구성회 선배의 사무실은 신사동 골목의 주택가에서 빨간 타일의 5층 건물 지하 1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혼자서 일하시는 곳인데, 전혀 고급스럽지 않게 인테리어가 되어 있는 창고 비슷한 느낌의 작업실이었다. 그러나 하나씩 꼼꼼히 살펴보니 대가의 손길이 느껴지는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니었다. 구성회선배는 디자이너이다. 이제 구성회선배의 삶을 한 번 들여다 보고자 한다.
“제품 디자이너의 영역 바늘에서 우주선까지이다.”
“우리나라에는 우주선이 없어서 비행기까지는 디자인 해 보았다.”
어린 시절
구성회 선배의 고향은 서울이고, 독자로 태어났다. 어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중학교까지는 어머니께서 시계장사를 하면서 여기저기를 다녔다. 3살 때 대구에서 살다가, 6살 때 서울로 가서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제주에서 초등 5학년, 6학년을 보냈고, 중1, 2 때 애들이랑 너무 많이 싸워서 어머니께서 구성회선배를 부산으로 보냈다. 보기에는 키도 작고 왜소한 체형인데 싸움을 즐겨 하였다니 사람을 외모로 보고 평가할 것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한다.
구성회 선배는 제주에서 중학교 다닐 때 싸움을 해도 지독하게 해서 각목 들고 싸웠고, 돈까지 걸었다. 그러니 싸움이 살벌해 질 수 밖에. 구성회선배는 ‘운이 나빠서 각목으로 허리를 쳤는데 상대가 낭떨어지에 떨어져서 몇 개월을 일어나지 못했다’고 하였다. 치료비 일체를 물려주게 되었다. 그런데 이건 운이 나쁜 게 아니다. 흉기를 들고 사람을 저 정도로 때리면 구속감인데...
지금도 그렇듯이 항상 사기꾼은 있기 마련이다. 구성회선배의 어머니는 구성회선배를 부산의 명문인 경남중학교 넣기 위해 브로커에게 당시로서는 아주 큰 돈인 60만원 주었다. 그러나 브로커는 돈만 받고 소식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구성회선배는 대동중학교 야간에 들어가서 졸업을 했다. 변호사로서 사기를 당한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된다. 사기를 당하지 않은 방법이 있다. 정도(正道)로 가면 된다. 꼼수를 쓰려고 할 때 당하게 된다.
고등학교 진학
구성회선배가 고등학교를 갈 무렵, 어머니께서 시계 밀수하다가 단속에 걸려서 크게 망했다고 한다. 혼자서 생계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으니, 그래서 고등학교를 선택할 때 조건은 다른 것이 없었다. 돈이 들지 않아야 하는 것. 구성회선배가 국립한독직업학교(현 부산기계공고)를 선택한 이유였다. 필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고, 대부분의 우리 부산기계공고 동문들이 공감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구성회선배는 전기과에 들어갔다가 일주일 만에 손을 들고 못하겠다고 하였다. 복잡한 전기 저항값 내는 계산식을 보고 염증을 일으켰던 것. 선생님께 엄청 두들겨 맞고 교무실에 3일 정도 꿇어 앉아 있으니 기계과로 옮겨 주셨다고. 처음 알았다. 몸으로 때우면 과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당시에는 고등학생이 당구장에 출입하는 것은 금지되었는데, 그렇다고 가지 않을 우리학교 선배들이 아니다. 형사들이 당구장 단속을 하는데, 모두 단속이 떳다고 하면 새처럼 날아서 화장실 창문으로 도망갔는데 잡히는 건 항상 구성회선배였다. 그러면 학교로 넘겨지고 교무실에서 모든 선생님의 샌드백이 되었다가, 운동장의 풀을 뽑는 벌을 섰다고 한다. 상상이 가는 모습이다. 교무실에서 벌 서고 있을 때 지나가는 선생님들의 뜨거운 관심이...
하지만 구성회선배가 교무실에서 벌을 서게 된 것이 평생의 직업을 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날도 당구장 단속에 걸려서 교무실에서 벌을 서고 있는데, 기능대회의 관계자들이 학교를 찾아와서 기능대회에 기계분야는 참가선수가 많은데 도장부문에는 아무도 없으니 한 번 참가해 보라고 권유를 하였다. 그래서 당시 강선보선생님께서 구성회선배에게 네가 그림에 소질이 있으면 한 번 해보라고 하였고, 그리기를 좋아하였던 구성회선배는 하겠다고 하였다. 아마 벌서기 싫어서 하겠다고 한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구성회선배는 초등학교 때부터 혼자서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였는데, 재능이 있었는지 고 3때 지방대회에 나가서 동메달을 따고, 같은 해 전국대회에 나가서 금메달을 땄다. 기계제도를 배운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자동적으로 세계기능대회에 나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고, 금성사의 지원을 받고, 학교에서 실기교사자격으로 있으면서 1971년 스페인에서 열리는 세계대회를 준비했다.
세계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은 너무 힘들었다고 한다. 심사위원들이 매달 심사를 하여 탈락이 되면 그 다음 선수에게 기회가 넘어가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구성회선배는 필사적으로 연습에 매달렸다. 우울증 증세가 와서 신경안정제를 2달간 복용하였고, 여름에 온 몸에 습진이 걸렸는데도 더운 줄 모르고 지냈다. 하지만 구성회선배의 이러한 노력은 아름다운 열매를 맺었다.
구성회선배의 질주는 세계대회에서 도장부문 은메달을 목에 걸기에 이르렀다. 약 3 년 사이에 도장부문에서 세계적인 기능인이 되었고, 새로운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대학 진학
구성회선배의 질주는 세계대회 은메달에 머물지 않았다. 구성회선배는 대학을 가고 싶어했다. 세계대회를 준비할 때 구성회선배를 지도해 주신 서울대학교 미대교수님이신 김세만선생님께 가서 서울대 미대를 가고 싶다고 상담을 하였다. 김세만선생님은 말리셨다. 대학은 실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학점을 받지 못하면 졸업을 못하니 구성회선배에게는 힘들거라고 하셨다.
구성회선배는 김세만선생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대학진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새벽 3시 반이면 일어나서 신사동 이모집에서 남산 국립도서관까지 걸어 가서 공부를 하였다고 한다. 1년을 준비하여 중앙대 건축미술학과가 생기면서 중앙대 본고사를 쳐서 전체에서 2등을 했다. 그러나 중앙대 건축미술학과 교수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유학도 보내주고 교수도 시켜주겠다는 제의를 뿌리치고 중앙대 진학을 포기했다. 구성회선배는 한 해 더 재수를 하여 서울대 미대에 당당히 입학을 하였다.
서울대미대에 합격이 되었지만 기쁘지 않았다고 한다. 대학등록금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항상 길은 있기 마련이다. 국세청에서 납세포스터 공모를 했다. 구성회선배는 김세만선생님의 서재에 있는 자료를 몰래 연구하여 공모에 응모를 했고, 그 결과 장원을 해서 상금 30만원을 받았다. 당시 서울대 입학금이 8만원이었으니 충분한 금액이었다. 마치 영화에서 나올 법한 이야기다.
사회생활
구성회선배는 1978년 서울대 미대를 졸업하고 울산 현대자동차 디자인실에 취업을 하였다. 하지만 곧 팀장이 되어 디자인보다 관리업무를 더 많이 맡게 되었다. 당시 포니2 리모델링 중이었는데 디자인에 매력을 느껴 디자인만을 하기 위해 현대자동차를 그만두었다.
구성회선배는 정말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구속받는 것,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못하는 분이었다. 그 후 1980년 김수근씨 공간연구소에서 4년간 건축디자인을 하면서 많이 배웠고 특히 목동 8단지에 있는 성당은 구성회선배의 작품이고, 인사동 거리의 디자인도 구성회선배가 구상한 것이다. 구성회선배는 88올림픽 때 국가의 용역을 받아 각 종 거리의 디자인에도 참여하는 등 디자인 분야에서 상당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굵직한 일을 많이 한 구성회선배도 이제 일이 뜸해 졌다고 한다. 요즘도 일거리가 많이 있으면 좋겠다고. 세월 앞에는 장사가 없는 것일까?
구성회선배에게 우리학교란?
아마 형편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면 필자를 포함하여 구성회선배도 우리학교를 선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구성회선배는 당시 희망도 없고 어떻게 해서든 굶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에서 선택한 것이 한독직업학교이다.
그래서 구성회선배에게 우리학교는 너무나 소중한 추억이다. 우리학교에서 기계제도 1급 대한민국 7호 자격을 취득했고, 이를 통해 도장, 디자인, 세계대회 은메달, 서울대학교 지금은 디자이너로 인생을 살게 되었다.
강선보선생님, 고순옥선생님은 아버지가 없는 구성회선배에게 아버지 같은 분들이었다. 당시 어른들은 은행취직이나 선생님이 되면 제일 성공한 것이라고 말하였는데, 이 분들은 나보다 더 높은 곳을 보라고 하셨고, 이런 선생님의 말씀이 은은히 구성회선배를 지켜주었다.
구성회선배는 우리 학교는 재능 있는 사람들이 많이 들어오는 곳이고, 가능성 있는 인재들이 모이는 학교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자신이 관심 있는 곳에 직업이 무궁무진하다고 구성회선배는 후배들에게 조언해 주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구성회선배는 매우 부드러운 분이셨다. 하지만 고등학교진학 때 가정이 힘들어서 우리학교를 선택하였고, 그 이후 철저하게 실력으로 헤쳐 나온 분이셨다. 우리학교의 미개척 분야인 도장부문에서 시작해서 세계대회까지 출전하여 은메달을 목에 걸고, 서울대 미대에 당당히 합격을 하였고, 화려한 경력의 디자이너가 되었다. 경제적인 배경이 뒷받침되지 않았고, 주위에서 지속적인 후원을 해주는 분도 없었다. 하지만 실력으로 승부를 보는 곳에서 구성회선배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구성회선배의 눈에서 아직도 건축디자인에 대한 각종 구상과 아이디어가 가득 차 있는 것을 보았다.
글쓴이 : 부산기계공고 재경동문회 23회 김상수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