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왜성 천수대에 서서
오래 벼른 끝에 가 본 순천왜성은 상전벽해(桑田碧海)란 말 그대로였다. 바다가 변하여 공단과 항구가 되었으니, 뽕나무 밭으로 변한 것보다 어찌 작은 변화라 하리오! 지금 우리 땅 어디고 그렇지 않은 곳이 있으랴만, 옛 모습은 흔적조차 남지 않은 그곳이 아마도 상전벽해란 말을 대변하지 않을까 싶었다.
성 안으로 바닷물을 끌어들이고 다리를 놓았다 하여 왜교성(倭橋城)이라 불렸다는 옛 이름과 너무도 딴판이었다. 8월 마지막 토요일 한낮 택시를 내리자 성터 옆에 현대제철 간판이 돋보이는 건물이 눈길을 끌었다. 옛 성터에 웬 공장건물인가 싶었다. 따가운 볕을 무릅쓰고 허위허위 성터에 올라서 조망한 모습은 그보다 더 놀라웠다.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 바닷가에 있는 성터다. 성 위에 서면 광양만 물결이 출렁거릴 것이라는 기대와 예상은 산산이 흩어졌다. 현대제철 하나만이 아니었다. 무수한 공장건물이 들어선 드넓은 공단이 시야에 넓게 퍼졌다. 저 넓은 공단이 옛날에는 바다였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뒤에 인터넷 상세지도를 찾아보니 그곳은 율촌 산업단지였다.
역사의 기록에 나오는 장도(獐島)라는 섬도 뭍으로 변하였다. 더 멀리 광양 항 크레인이 보이지 않았다면 바닷가라는 인식도 틀린 것이 될 판이었다. 거대한 기린이 줄지어 선 듯 한 오렌지 색 크레인 무리 너머로 흰 연기를 내뿜는 광양제철 공장 건물 몇이 보였다. 그 너머로는 여수와 광양을 잇는 이순신대교 트러스가 보였다. 아, 이순신 장군이 여기에 살아나셨구나 싶어 겨우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근년에 대대적으로 정비했다는 성터는 말끔해 보였다. 수풀 너머 나지막한 구릉 자락에 문루 터가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가 보니 제1 문지(門趾)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제1성문 자리인데, 문루는 사라지고 돌로 쌓은 기단만 남은 것이다. 그것도 허물어져 수풀 속에 숨었던 것을 근래에 다시 쌓은 것이다. 색깔이 검은 돌은 옛것이고, 흰 것은 다시 깎은 것이리라. 옛것과 새것의 부조화가 어색해 보였다.
얼마 가지 않아 제2문지가 나오고, 거기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한참을 오르니 병사(兵舍)들이 줄지어 있었을 병영구역이 나왔다. 역시 옛 돌과 새 돌이 뒤섞인 복원성곽 지대다. 거기서 한 단 위는 지휘부 건물들이 있었을 혼마루[本丸] 구역. 학교 운동장만한 넓이로 보아 1만 3000 병력이 상주하였다는 기록에 믿음이 갔다.
혼마루 구역 저편 끝에 천수각(天守閣) 자리가 우뚝하였다. 천수각이란 일본 성곽 건축물의 상징이다. 제일 높은 곳에 높이 쌓아올려, 적의 동태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권위와 실용의 상징이다. 우리로 치면 장수가 전투를 지휘를 하던 장대에 해당하는 건축물이다. 일본 옛 번의 천수각에는 영주와 그 가족이 거처하였으니 그 호화로움에 짐작이 갈 것이다.
천수대 안내문에 ‘정왜기공도’라는 화첩을 인용하여 건물 1층에 ‘오층망해루(五層望海樓)’란 현판이 걸려있었다고 적혀 있다. 천수각이 목조 오층 건물이었던 모양이다. 당시 왜병 화수(畵手)가 그린 조감도 화폭을 보면 천수각 밑은 바로 바다였다. 가파른 비탈 아래 접안시설이 있고, 그 곁에 수많은 왜선이 정박해 있다.
물론 천수각 건물은 지금 없다. 이순신 장군의 공격을 받아 급하게 도망치며 불을 질렀다는 기록으로 보아 1598년 말에 소실되었다. 418년 전의 일이다. 그 사이 비바람과 인간의 발길에 의하여 성은 수풀 속으로 숨어들었다가 다시 나타났다.
순천왜성 혼마루 기단이 천수각 옛 모습을 짐작케 해주었다. 넓이가 가로 18m 세로 14m라니 그리 웅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높은 탑 모양의 건물이 성 한쪽에 우뚝하였을 모습이 뇌리에 그려졌다.
성 돌은 대개가 자연석이다. 모양이 서로 다른 돌을 엇갈려 쌓은 기법은 옛 축성법 그대로지만, 모서리는 바위를 깎아 쌓았다. 쐐기질로 깎았다는 설명으로 보아 큰 돌에 틈을 내고 쐐기를 박아 쪼갠 것이리라. 그 많은 돌을 깎고 자르고 운반하고 놓는데 얼마나 많은 공력이 들었을 것인가! 돌 다루는 기계나 장비는커녕 리어카조차 없었을 시대, 왜병들의 채찍 아래 그 일을 하지 않고는 살아남지 못 하였을 고역이 다 인근 백성들 몫이었을 것 아닌가.
성의 규모는 외성 3첩에 내성 3첩이다. 그 방대한 구조물이 다 돌과 흙으로 이루어졌으니 그 노역의 고통에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천수대 주변 땅속에서는 지금도 색깔이 서로 다른 와편들이 출토된다 한다. 왜병들이 근처 절집이나 관공서 건물 기와를 걷어다 천수각 지붕에 올린 것이리라. 여러 건물에서 걷어낸 것이니 재질과 색깔이 제각각일 터이다.
축성에는 3개월이 걸렸다는 기록이 있다. “행장(行長) 등 적이 구례를 거쳐 순천으로 향하여 왜교에 결진, 성을 쌓고 막사를 지었다”는 <난중잡록> 정유년 9월 기사에 따르면 1597년 9월에 착공한 것을 알 수 있다. 그해 12월 초 고니시 유키나가가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에게 보낸 축성보고 서장에 따르면, 그 달에 축성이 끝났다고 했으니 공사에 3개월이 소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침략군이 호남공략의 거점으로 삼았던 이 성을 바닷가에 쌓은 것은 병참보급과 유사시 탈출을 염두에 두었던 탓이다. 원활한 병참보급에는 바닷길과 맞닿은 요충지가 필요했을 것이다. 남해, 사천, 고성, 창원, 울산 등 남해안에 줄지어 있는 왜성들과 바닷길로 연결되어 왕래도 쉬웠을 것이다.
당시의 그림으로 본 성의 규모는 실로 엄청나다. 해발 30m 쯤 되어 보이는 혼마루를 중심으로 수많은 건물이 배치되었다. 성을 들고 나는 병력이나, 성내에서 출진준비와 작업에 동원된 왜병들이 마치 개미떼처럼 그려져 있다. 성 한가운데 물길을 내고 두 개의 다리가 놓였는데, 밤이면 다리가 걷혀 본성과 부속성이 물길로 갈리었다. 그래서 왜교성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밤에 다리를 끌어당겨 물길을 이었다고 해서 예교성(曳橋城)이라고도 불렸다.
물길은 외부공격을 차단하는 해자의 역할을 하였다. 다리를 끌어 들이면 본성지역은 섬이 되었다. 그 물길은 지금 흔적만 남았다. 성 입구의 주차구역에서 보면 갈대가 무성한 연못이 보이는데, 이것이 그 흔적이다.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한 그루 배롱나무 꽃의 선홍색은 왜의 세상을 살면서 억울하게 죽어 간 순천 백성 원혼의 발현이 아닐까 한다. 생긴 지 얼마 안 되는 무덤을 혼자 지키는 것 같지만, 축성공사에 동원되었다가 천명을 누리지 못 한 사람들의 혼령이 그런 빛깔로 살아났다는 생각은 견강부회일까?
귀로에 고니시 유키나가 전승비라는 것을 찾아 본 것은 뜻밖의 수확이다. 순천 터미널 관광안내소에서 신성리 왜성 가는 길을 물었더니, 친절한 안내원은 “성터만 보지 말고 충무사에 복원해 놓은 비석도 보고 오시지요.” 하였다. 1930년 조선군사령관을 지낸 하야시 센주로(林銑十郞)가 천수대 꼭대기에 세웠었다는 비석은 광복 후 지역주민들 손으로 철거되어 논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광복 후 면사무소 창고에서 발견되어 2013년 충무사 관리인 숙소 앞마당에 되세워졌다. 전면에 ‘小西行長之城’이라 쓰였는데, 다듬어지지 않은 뒷면의 글자는 보이지 않았다.
오욕의 역사도 역사라는 점에서 비석의 재건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되세운 장소를 이순신장군 사당 옆으로 정한 데는 뜻이 있겠지만, 천수대 꼭대기만은 절대 안 된다는 결기가 읽힌다.
하야시 센주로는 중장 시절인 1930년 조선군사령관으로 부임하였다. 이듬해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본국 허가도 없이 휘하 부대를 만주에 파견한 일로 일본정계에 물의를 일으켰던 자이다. 만주국 창설에 세운 공으로 승승장구, 1937년 제33대 일본총리까지 올랐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을 정당화하고 찬양하는 마음으로 세운 것이라 하여 그 비석은 ‘소서행장 전승비’로 불렸다. 남해안을 물샐 틈 없이 장악하였던 이순신 장군에게 퇴로가 막혀 죽은 듯이 엎드려 있다가,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과 제독 진린(陳璘)에게 뇌물을 쓰고 쥐새끼처럼 야반도주한 사실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극우주의 국수주의에 물든 군인들이란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역사에 오점을 남기기 마련이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구사일생으로 순천왜성을 탈출한 이야기는 임진왜란이 일본에게 얼마나 치욕스런 전쟁이었는지를 증언하는 웅변이다.
그는 인근에 주둔하였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와 다치바나 무네시게 (立花宗茂)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납작 엎드려 때를 기다렸다. 명나라 장수들에게 쓴 뇌물이 들었는지, 육지가 조용해지고, 노량에서 이순신 장군이 목숨을 바쳐 가며 왜군과 총력전을 펴는 틈을 타 그는 남해 섬을 멀리 돌아 부산으로 탈출하였다.
임진년 조선침공 당시의 선봉대장이요, 도요토미 히데요시 최측근인 그가 그렇게 제 땅으로 도망쳐 간 이야기는 일본에서도 화제가 되었는지, 자세한 기록으로 남았다. 술수와 지략이 뛰어난 인물이 아니었다면 그는 귀국하지 못 하였을 것이다.
광양만 일대가 이순신 수군에게 물 샐 틈 없이 봉쇄되어 탈출의 기약이 없어지자 그는 뇌물공세로 진로를 모색하였다. 도요토미의 죽음을 통보 받은 그는 1598년 11월 10일을 철수작전 개시일로 잡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조선과 명 수군은 합동작전으로 그들의 퇴로를 끊기로 결정하였다.
광양만 바다 사정을 알아보려고 보낸 척후선이 조선수군의 공격을 받아 혼비백산해 돌아오자 고니시는 즉각 뇌물작전에 착수하였다. 일본 작가 기리노 사쿠진(桐野作人)의 <노량해전>에 따르면, 14일 밤 붉은 깃발을 올린 왜선 2척이 명 수군진영으로 들어갔다. 명 수군제독 진린은 통역을 대동하고 배를 맞았다. 그 때 일본군은 돼지 2마리를 그에게 바쳤다.
그날 이후 양 진영에 사자(使者)의 왕래가 있었는데, 16일 진린이 순천에 보낸 사자에게 일본 측은 창 칼 등 무기류 3척분을 바쳤다.
이런 사실은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도 기록되었다. 14일자 “왜선 2척이 강화할 차로 바다 가운데로 나오니 도독이 왜말 통역관을 시켜 조용히 왜선을 마중하여 붉은 기와 환도 등을 받았다. 오후 8시에 왜장이 작은 배를 타고 도독부로 들어와서 돼지 2마리와 술 2통을 바치고 갔다”는 게 그것이다.
16일자 일기에는 “도독이 陣文同을 시켜 왜영으로 들여보내니, 왜선 3척이 말 1필과 창 칼 등을 도독에게 바쳤다”고 적혀 있다.
그 뒤로 진린은 이순신에게 “적이 화의를 요청하고 있으니 강화를 맺으면 어떨까?” 하는 의중을 피력하였다. 뇌물을 받은 16일 밤 그는 왜선 1척의 광양만 통과를 허락하였다. 그 배는 남해와 사천에 주둔한 동료장수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메시지를 지니고 있었다. 이순신은 원군이 오기 전에 맞아 싸우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내리고 17일 물목이 좁은 노량 앞바다에 진을 쳤다. 진린도 따라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이순신이 순국한 노량해전이었다.
시마즈 다치바나 양 진영에서 출진한 왜선 500척과, 조선과 명군 진영 500척의 대회전이었다. 노량 앞바다가 피와 포연으로 물든 틈을 타 고니시는 순천을 탈출하여 무사히 돌아갔다. 육상을 맡은 유정에게도 미리 손을 써 놓아 육지가 조용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카이(堺·오사카) 거상의 아들인 고니시는 조선과의 전쟁을 막으려고 쓰시마(對馬島) 영주 소 요시토시(宗義智)와 짜고 가짜 일본사절을 조선 조정에 보내는가 하면, 침략전쟁 중에도 화의를 맺어 일찍 전쟁을 끝내려고 온갖 술수와 지모를 발휘한 인물이다. 호랑이 같은 무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를 견제하여 일생을 원수로 지낸 이야기인 엔도 슈샤쿠(遠藤周作)의 소설 <숙적>으로 한국인에게 인기 있는 지장이었다. (2016, 8,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