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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무주군에 있는 ‘나제통문’을 경계로 신라와 백제의 영역이 나뉘었다. 지금도 나제통문 동쪽의 전북 무주군 무풍면 사람들은 경상도 말을 즐겨쓰고 있으며 김천과 대구를 생활권 삼아 삶을 꾸려가고 있다. |
김천시 대덕면과 부항면을 에워싼 백두대간을 넘으면 전북 무주군 무풍면(茂豊面)에 닿는다. 행정구역상 전북인 무풍은 엄연한 호남의 영역이지만, 영남 중에서도 김천과 가까운 정서를 지닌 이들이 많아 눈길을 끈다. 지금도 무풍 사람 상당수는 경상도 사투리를 즐겨 쓰고 있으며, 경상도와 인적·물적 교류가 활발해 ‘호남 속의 영남’으로 불린다.
이 때문에 무풍과 감천(甘川)의 인연도 각별하다. 김천장, 지례장 등 감천 주변에서 열린 장시는 무풍 사람들을 김천 생활권으로 묶었고, 감천 물길을 따라 들어온 새로운 문물은 무풍으로 향했다.
무풍면의 언어와 풍습이 영남권에 가까운 이유는, 삼국시대 당시 신라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고립된 무풍은 지역 간 경계인 백두대간 서쪽에 위치했음에도 신라의 역사와 궤적을 함께 했다. 고려 성종(981~997) 때 호남권으로 편제되기 전까지 영남의 일부였다. 신라와 백제의 국경으로 유명한 ‘나제통문(羅濟通門)’ 역시 무풍면 서쪽 설천면에 위치해 있어 무풍 사람들이 지리·심리적으로 영남과 가까워질 수 있는 배경이 됐다. 김천 150리를 관통하는 감천의 뒤뜰 무풍을 지나칠 수 없는 이유다.
◆ 김천 생활권인 전북 무주군 무풍면
무주군 무풍면의 언어와 풍습이 아직도 영남권에 가까운 이유는,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국경역할을 했던 나(라)제통문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나제통문은 신라(新羅)의 ‘라(羅)’자와 백제(百濟)의 ‘제(濟)’자를 합쳐 만든 이름이다. 무풍면과 인접한 무주군 설천면 두길리 신두(新斗) 마을과 소천리 이남(伊南) 마을 사이의 암벽을 뚫어 만든 통문이다. 규모는 대형차량 한 대가 통과할 정도로 여유롭다. 통문의 굴은 일제강점기 때 뚫린 것이란 주장도 있다. 하지만 통문 위에 적혀 있는 나제통문이라는 글귀는 이곳이 삼국시대 삼엄한 국경의 역할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나제통문은 무풍면의 서쪽인 설천면의 북쪽지점에 있다. 지금은 두 곳(무풍면·설천면) 모두 전라도 무주 땅이지만, 삼국시대 당시에는 나제통문을 사이에 두고 신라와 백제의 영역이 갈렸다. 무풍면 사람들이 아직도 경상도 사투리를 쓰고, 마을의 풍속이 영남권에 가까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반면 설천면 주민 상당수는 경상도(김천)가 아닌 전주와 대전을 생활권으로 삼았다.
설천면에 있는 나제통문 안내판을 읽어보면 이해는 더 빨라진다. 안내판에는 “삼국시대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무풍면 일대가) 풍속과 문물이 판이한 지역이었던 만큼 지금도 언어와 풍습 등 특색을 간직하고 있다. 설천장날에 가 보면 사투리만으로 무주와 무풍 사람을 가려낼 수 있다”고 적혀 있다.
무풍이 신라에 편입된 시기는 서기 231년으로 추정된다. 당시 김천지역의 소국인 감문국(甘文國)을 정벌한 신라가 무풍까지 점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주군지(茂朱郡紙)에 따르면 “신라는 지금의 무풍면 일대에 성을 쌓고 치소(治所-행정기관)를 설치해 ‘무산성’이라 이름 짓고 백제와 대치했다”고 적고 있다. 이같은 대치상황은 신라가 백제를 무너뜨릴 때까지 이어진다. 신라가 가야를 흡수한 뒤 소백산맥을 경계로 백제와 맞섰던 역사적인 배경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무주군지에는 나제통문을 무대로 벌어진 신라와 백제의 전투에 대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던지 이곳 주계(나제통문 서쪽)를 ‘붉은 내’, 즉 적천(赤川)이라 했고, 신라가 후에 이곳을 단천(丹川)이라 고쳤으나, 역시 ‘붉은 강’이란 뜻”이라고 기록돼 있다.
정치격동기 때 동·서 대립의 중심이었지만, 무풍의 민초들에게 영·호남의 구분은 무의미했다. 1945년 광복 후에도 무풍 사람 상당수가 김천과 대구 등지로 유학을 가거나 취업하면서 대구·경북과 인연을 계속 이어왔다. 늘어난 자가용 탓에 운행 빈도가 줄긴 했지만, 김천과 무풍을 잇는 버스는 지금도 백두대간을 넘고 있다.
특히 산촌의 척박한 자연환경은 무풍 사람들을 밖으로 향하게 했다. 산으로 둘러싸여 경지면적이 좁았던 탓에 대처로 나가 살지 않으면 생활을 꾸려가기 어려웠다. 그때 무풍 사람들이 향했던 곳이 바로 김천을 비롯한 대구·경북이었다. 행정구역상 전라도 땅이었지만, 삼국시대부터 경상도 생활권이었던 무풍 사람들에게 그것은 당연해 보였다.
무풍면 김진표 부면장은 “1960년대부터 무풍 사람들이 대구로 많이 이주했다. 당시 섬유산업이 발달한 대구에는 일자리가 많았고, 지금도 대구시 북구 칠성·비산·산격동에는 무풍 사람들이 많이 산다”고 말했다. 김 부면장 역시 자녀들을 김천으로 유학보냈다.
같은 생활권이었기 때문에 김천과 무풍지역에 전해져 오는 이야기도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대표적인 이야기가 대덕산 감투봉 전설이다. 감투를 닮은 봉우리의 기운이 대덕산 아래 사람들의 벼슬길을 열어준다는 것이 이야기의 큰 줄기다.
실제로 1993년 문민정부의 초대 국무총리 황인성씨와 5선 국회의원으로 2013년 2월 별세한 김광수 <주>미래엔(옛 대한교과서) 명예회장이 무풍 출신이다. 하지만 김천시 대덕면의 일부 주민들은 아쉬움이 크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대덕면 일대의 봉우리마다 쇠말뚝을 박아 감투봉의 기운이 대덕면 방향으로 고루 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무풍면에 비해 대덕면에는 큰 인물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 효자와 열부가 넘쳐났던 김천 덕산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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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 대덕면 덕산마을은 예로부터 효자와 열녀가 많기로 유명한 곳이다. 김경직 효행비(왼쪽)와 밀양박씨 효열비. |
“마을 주민 모두가 한 가족이죠.”
김천시 대덕면 소재지에서 30번 국도를 따라 덕산재에 이르면 대덕산과 국사봉 사이 비탈에 자리 잡은 덕산(德山)마을이 있다. 덕산재만 넘으면 전북 무주군 무풍면이다.
덕산마을은 조선시대 단종복위 사건과 연루된 인물들이 이곳에 모여들면서 형성한 김녕김씨 집성촌이다. 예로부터 효자와 효부, 열녀가 많이 난 곳으로 유명하며, 이곳에서 발원한 덕산천은 감천으로 흘러든다.
대표적인 효자로는 김경직이 있다.
1885년(고종 20년)쯤의 일이다. 김경직은 싸리나무를 베러 갔던 아버지가 호랑이에 물려가자, 끝까지 호랑이를 추격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숨이 끊어진 채 발견됐고, 이후 부친상을 치른 김경직은 눈물을 머금고 복수를 다짐한다.
어떻게 복수를 할 것인지 고민하던 김경직은 아버지를 해친 호랑이를 잡기 위해 함정을 설치한다. 곧 호랑이가 잡히긴 했지만, 자세히 보니 자신의 아버지를 해친 호랑이가 아님을 확인했다. 두 번째 잡힌 호랑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김경직은 포기하지 않고 호랑이 사냥에 나섰고, 마침내 자신의 아버지를 해친 호랑이를 잡아 죽일 수 있었다. 김경직은 잡은 호랑이를 아버지의 산소에 바치며 복수가 끝났음을 고한다.
후세의 유림과 덕산마을 사람들은 마을 입구 아름드리 느티나무와 전나무 숲 가운데 ‘장릉참봉김녕김공경직효행비(莊陵參奉金寧金公慶直孝行碑)’를 세우고(1931년) 김경직의 효행을 기리고 있다.
열녀 밀양박씨의 이야기도 눈길을 끈다.
조선시대만큼 여권(女權)이 약했던 시기도 없었다. 고려시대만 해도 남편을 잃은 여성이 재가하는 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겨졌다. 남녀를 불문하고 자유로운 연애와 결혼이 허용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성리학적 학풍을 중시했던 조선의 통치체제 아래에서 여성의 인권은 현재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열녀를 칭송하는 글과 비문은 많지만, 내용을 천천히 살펴보면 여성의 일방적인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반면 수많은 열녀, 효부 속에서 열부(烈夫)는 찾아보기 힘들다. 평생 한 명의 지아비를 섬겨야 하는 일부종사(一夫從事)의 도덕적 계율에 갇힌 여성들만이 청상과부로 살아야 했다.
남편을 따라 죽음을 선택한 여성들은 열녀로 칭송받았고, 가문의 영광은 드높아졌다. 결론적으로 대부분의 열녀 스토리는 ‘해피엔딩’이 아닌 ‘새드엔딩’이었던 셈이다.
덕산리의 열녀 밀양박씨의 사연은 다행스럽게도 해피엔딩이다. 박씨 부인은 남편이 병 들자 자신을 돌보지 않고 극진히 남편을 간호했다. 하지만 남편의 병이 호전되지 않자 제단을 쌓고 기도에 나선다.
기도 백일째 되는 날 커다란 하얀 새 한 마리가 박씨 주변을 맴돌며 떠나지 않았다. 이에 박씨의 기도하는 모습을 본 한 스님이 “흰 새는 상스러운 징조이니 이것은 필시 부인의 정성에 하늘이 감응해 남편을 구할 약으로 내려준 것”이라고 한다. 스님의 말을 들은 박씨는 곧바로 흰 새를 잡아, 정성스럽게 달여 남편에게 먹인다. 그러자 남편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이에 인근 마을에서 부인의 열행을 칭송하는 목소리가 높았고, 지역 유림에서는 열행비와 보호각을 세우고 본으로 삼게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