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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畊山人 박희용의 南禪軒 독서일기 2024년 10월 6일 일요일]
『대동야승』 제13권
[기묘록 보유 상권(己卯錄補遺 卷上) 이장곤 전(李長坤傳)
○ 이장곤은 갑오생(1474년)이고 자(字)는 희강(希剛)이다. 을묘년(1495년) 생원시에 장원하였고 임술년(1502년)에 급제하여서, 벼슬이 우찬성 겸 병조판서에 이르렀는데 파직되었다.
○ 보유 : 공은 스스로 호(號)를 금재(琴齋)라 하였다. 용모가 뛰어났으며 재주는 문무를 겸하여서 젊어서부터 장수의 재질이 있다고 일컬었다. 연산조(燕山朝)에 홍문관 교리로서 거제(巨濟)에 유배되었다.
연산은 항상 공이 어지러운 정사를 뒤엎을 뜻이 있는가 의심하였고, 공은 또 죄를 더하지 않을까 두려워서 몸을 빼쳐 바다를 건너 도망쳤다. 쥐처럼 숨고 새처럼 달아나서 마침내 함경도 지경에 이르렀다.
잡는 데에 상(賞)마저 걸어서 나날이 위급해지니 계책이 없어서 수척(水尺 백정)들에게 의탁하였다. 동류들은 공이 자기들의 직업에 능하지 못함을 비웃었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이 공의 용모를 기이하게 여기고 그 형에게 권해서 딸로서 공의 아내가 되게 하였다.
무릇 노역(勞役)할 때는 반드시 게으른 사위라고 일컬었는데, 그 아내가 노역을 돕고 분담하여 잘 섬겼다. 이 덕분에 편하게 있은 지 거의 1년이 되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와서, “임금이 새로 들어섰는데, 옥문을 열어 죄수를 놓아 보내고 여러 가지 노역도 철폐하였으므로 즐거워하는 소리가 길에 잇닿았다.” 하였는데, 공이 듣고 낯빛이 변하였다. 평소부터 친하게 지내던 자에게 의관을 빌려 차리고 그 사람과 함께 부중(府中)에 갔다. 반정(反正)한 비밀을 분명히 안 다음에 작은 종이 쪽지를 그 사람에게 주면서, “지금 감사(監司)의 하인을 보니 내가 젊었을 때 알던 자이다. 이것을 남에게 보이지 말고 조심해서 주라.” 하였다.
조금 뒤에 관인(官人)이 사방으로 흩어져서 이 교리(李校理)를 찾았으나 알 수 없었다. 온 부중이 소란하였으나, 또한 명함을 통지한 자가 누구인지도 알지 못 하였다. 공이 베옷과 부서진 갓을 쓴 차림으로 문간 옆에 웅크리고 있다가 그제야 응했다. 감사와 여러 관원이 급히 맞이하고는 손을 잡고 울었다. 각자 의관을 주어 고쳐 꾸미니 모습이 전혀 새로워졌다.
조정에서도 공이 살아 있는 것을 알고 특별히 홍문관 교리를 제수하고, 현재 있는 고을에서 호송하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공의 명성이 온 나라에 드높아져서 궁벽한 시골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공은 호걸스럽고 청렴하여서 온갖 괴로움을 다 겪었고, 외방에 나가서는 장수로서, 조정에 들어와서는 정승으로서 그 직에 다 알맞았다.
기묘년 11월에 병조 판서로서 판의금부사를 겸하였는데, 집이 흥인문(興仁門) 밖에 있었다. 남곤(南袞)이 공이 집에 없는 틈을 엿보아 세 차례나 찾아가서 명함을 두고 가버렸다.
15일 저녁에, 남곤이 급한 편지를 보내어, “나라에 큰일이 있으니, 말을 달려 들어오라.” 하였다. 공은 항상 초거(軺車)를 탔는데, 매우 급하므로 어찌할 수 없어서 성 안에서 말을 빌려서 안장과 말을 이대(李對)로부터 빌려 판전(板前) 큰길에 나와서 기다리게 하였다.
남곤의 집에 달려가니, 남곤이, “판서 홍경주(洪景舟)가 비밀 교지를 받고 신무문(神武門) 밖에서 왕명을 기다린다.” 하였다. 보통 때는 궐문 여닫는 것을 승지에게 알리는 까닭으로, 문 열쇠를 정원(政院)에서 출납하는데, 오직 신무문 열쇠는 사약방(司鑰房)에 있는 까닭에 남곤ㆍ심정(沈貞) 등이 승지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서 신무문으로 갔던 것이다.
여러 재상이 궐문에 나아가서 가만히 계하니, 임금이 홍문관ㆍ승정원에 입직한 사람을 가두도록 명한 뒤에 서문(西門)을 열게 하여 이조 낭청(吏曹郞廳) 구수복(具壽福)이 비로소 서문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당초에 정원 서리(胥吏)들이 한갓 서문 여닫는 것만을 알고 있었는데, 지금 정원에 알리지 않았으므로, 특히 가만히 새어들어 왔다는 것으로써 윤 승지에게 알렸고 응교(應敎) 기준(奇遵)이 《일기》에 적었던 것이다.
그러나 홍경주가 남곤ㆍ김전(金銓)과 더불어 어전에서 그 일에 대해서 저희들끼리 시비하면서 북문으로 들어왔다 하였으니, 초경(初更)에 입궐한 것은 신무문으로 들어온 것이 의심할 것이 없다. 《시정기(時政記)》는 심정의 아들인 심사순(沈思順)이 찬술한 것이니, 믿을 것이 못된다.
공이 남곤과 함께 홍경주를 따라 들어가니, 겸 공조판서 김전ㆍ호조 판서 고형산(高荊山)이 이미 입궐하였고 도총관(都摠管) 심정ㆍ참지 성운(成雲)은 각기 입직했던 곳에서 왔다.
합문[閤] 바깥 남소(南所)에 촛불을 벌여 놓고 앉았는데, 위졸(衛卒)들이 전(殿) 뜨락에 에워서서 사람들의 출입을 금하였다. 임금에게 출어(出御)하기를 청하고, 또 내고(內庫)에 있는 병기를 전 뜨락에 벌여 놓도록 하였다. 홍경주가 남곤과 함께 차자(箚子)를 받들고 입대(入對)하였는데, 그 글에, “정광필(鄭光弼)ㆍ홍경주ㆍ김전ㆍ남곤ㆍ이장곤(李長坤)ㆍ고형산ㆍ홍숙(洪淑)ㆍ심정ㆍ손주(孫澍)ㆍ방유녕(方有寧)ㆍ윤희인(尹希仁)ㆍ김근사(金謹思)ㆍ성운들은 엎드려 보건대, 조광조(趙光祖) 등이 서로 당패를 만들어서, 자기 패에 아부하는 자는 인진(引進)하고 자기 패와 다른 자는 배척하여, 명성과 위세를 서로 돕고 권세 있는 요직에 웅거하여 임금을 속이고 사의(私意)를 행하여 꺼림이 없습니다.
후진을 유인하여 속이고 과격한 것이 습속이 되어서 젊은 사람이 어른을 업신여기고 천한 사람이 귀한 이를 업신여겨서, 나라 형세가 거꾸로 되고 조정 정사가 나날이 글러지게 하였습니다. 조정에 있는 자가 속으로는 분한을 품었으나, 그들의 세력을 두려워해서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눈치를 보아 행동하며 발을 모아 섭니다. 사세가 이에 이르렀으니 한심하다 할 수 있습니다. 유사(有司)에게 하부(下付)하여, 그들의 죄를 밝혀 바루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또 속히 승정원과 홍문관에 입직한 관원을 가두도록 청하였다. 이때야 비로소 승정원에서 알고 승지ㆍ주서ㆍ한림이 합문에 나왔다.
승지 윤자임(尹自任)이 문 앞에 나와서, “재상이 입궐하면서 정원에 알리지 않은 것이 과연 무슨 일입니까.” 하고 물었으나, 좌우 사람들은 서로 눈짓하면서 말하지 못했다. 잠깐 뒤에 내시(內侍) 신순강(申順剛)이 성운을 불러 들어가므로, 주서 안정(安珽)이 뒤쫓아가니, 신순강이 문지기를 시켜 금단하였다.
조금 있다가 성운이 나와서 소매 안에서 종이 쪽지를 내어 공에게 주면서, “이 사람들을 빨리 옥에 가두시오.” 하는데, 승지 공서린(孔瑞麟)ㆍ윤자임ㆍ주서 안정ㆍ검열(檢閱) 이구(李構)ㆍ응교 기준(奇遵)ㆍ수찬(修撰) 심달원(沈達源)을 조옥(詔獄)에 가두라는 명이었다.
이 때에 와서 궐문이 비로소 열렸고, 비밀리 계사(啓辭)에 이름이 기록된 여러 신하도 모두 예궐하였다. 특명으로써 남곤을 이조 판서로, 김근사ㆍ성운을 가승지(假承旨)로 삼고, 김근사가 봉상시 직장(奉常寺直長) 심사순(沈思順)을 패초하여 가주서(假注書)로 삼았다. 또 승정원ㆍ홍문관ㆍ양사(兩司) 및 한림을 모두 갈아치우고, 다시 차출하도록 명하였다.
입대하였던 여러 사람이 모두 두렵고 놀라운 일로써 임금을 크게 놀라게 하고, 이어 속히 선전관(宣傳官)ㆍ금오랑(金吾郞)을 부장(部將)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당패 사람들을 잡아 궐문에 와서 주살(誅殺)하도록 주청하였다.
공이 비로소 이 밤에 이 사람들을 쳐서 죽이려는 모략을 알고 깜짝 놀라 나아가서 계하기를, “임금으로서 도둑과 같은 꾀를 행할 수 없고 또 수상(首相)도 모르게 국가 대사를 행할 수 없으니, 대신과 함께 논의해서 죄를 다스리더라도 늦지 않습니다.” 하면서, 반복하여 극간하였다. 홍경주가 무엇을 계하려고 움직이는 기색이 있으니, 공이 문득 손을 저어 물리치면서, “공이 어찌해서 이런 지경에 이르게 하오.” 하며, 앉은 자리를 떠나지 못하도록 하여 간계 부리려는 것을 막았다.
임금의 화가 조금 누그러져서 영의정 정광필을 부르도록 명하였다. 이 때문에 일이 느긋하게 되었다.
영상이 추국(推鞫)해서 죄를 정하기를 청하였다. 남곤ㆍ심정ㆍ김전과 공이 함께 죄목에 대한 전지초(傳旨草)를 논의하는 참에 남곤이 핑계를 대고 나가 버렸는데, 밤 누수(漏水)는 4경이었다.
날이 밝자, 임금이 두 번이나 이조판서 남곤을 불렀으나 오지 않았다. 두 의정(議政)에게 명하여 대간ㆍ시종ㆍ예조 판서ㆍ형조 판서ㆍ양사 장관을 차출하도록 하였는데 모두 특지였다.
공이 김전 및 대간ㆍ승지와 함께 조광조 등을 추문(推問)하여 시추(時推 당시에 추문함)한 조광조 등 4명을 사율(死律)로 정하고, 박세희(朴世熹) 등 4명을 장류(杖流 형장으로 때린 다음 유배함)하여서 종으로 삼도록 하였다.
임금이 그 장본(狀本)을 보류하고 아직 판하(判下)하지 않았는데, 유생들이 궐정(闕庭)에서 통곡하고, 약도(約徒)는 궐문에서 소장을 올렸다. 이런 일들이 도리어 임금을 협박하였다는 말을 사실인 것처럼 만들어 버렸으므로, 임금이 조광조와 김정(金淨)에게 사사(賜死)하면서 김근사에게 판부하도록 명하였다. 김근사가 사관(史官)의 붓을 빼앗고, 용기를 내어 적었다. 봉교(奉敎) 채세영(祭世英)이 그들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적극 간하고, 김근사가 빼앗아 간 붓을 도로 빼앗으니 좌우가 숙연(肅然)하였다. 영상과 우상이 면대하기를 청해 적극 간하니, 사율을 감해서 장배(杖配)하도록 명이 내렸다.
공은 시일이 얼마 안 되어서 금부를 사직하였다. 그 뒤에 대간이 전일 조광조 등을 추문할 때에 공이 금부 당상으로 있으면서 죄인이 성명을 자(字)로 부르는 것을 금하지 않아서, 능만(凌慢)하게 하였다는 것으로 파직하도록 청하였다.
창녕(昌寧)에 우거(寓居)하였는데 살림이 넉넉하였다. 악공(樂工)과 가희(歌姬)를 두고 술과 고기를 풍부하게 갖추어서 날마다 놀이하며 매와 개를 부려서 사냥하는 것을 일삼았다. 편하고 한가롭게 세상을 마쳤으니 일생 부귀에 모자람이 없었다. 다만 적가(嫡家)에 자녀가 없어 공의 아름다운 행실을 후세에 전하지 못하게 되었음이 한스러우니, 한탄을 금할 수 있으랴.
병진년과 정사년은 어찌 할 수 없는 해 / 丙辰丁巳奈何天
배권을 통곡한 지 20년이네 / 痛哭杯棬二十年
황각(의정부)에 2공이 되었음은 선조가 적선한 덕이었고 / 黃閣貳公由積善
흰 머리로 세 번이나 파출되었음은 많은 허물을 저질렀던 탓이다 / 白頭三黜坐多愆
송추는 막막하게 무덤을 에웠고 / 松楸漠漠圍雙壟
지척이건만 망망하게 구천(황천)을 격했다 / 咫尺茫茫隔九泉
전(奠) 드리기를 마치니 해가 서산에 저무는데 / 奠罷□□山日暮
아우와 형이 동문 앞에서 눈물 뿌린다 / 弟兄揮淚洞門前
하였다.
이 시는 공이 성묘하고서 느낌이 있어 지은 것이다.
[주-D001] 배권 : 어머니가 사용하던 잔과 광우리를 어머니가 죽은 뒤에는 차마 사용하지 못한다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어머니를 사별(死別)했다는 뜻으로도 쓰임.《禮記》〈玉藻篇〉
[주-D002] 황각 : 한(漢) 나라 승상의 청사(廳事). 궁궐 문을 주색(朱色)으로 칠했으므로 승상의 처소는 황색으로 칠해서 분별되게 하였다 함.
[한국종함고전DB]
* 이장곤 (李長坤 1474 ~ 1519)
조선전기 대사헌, 이조판서, 우찬성 등을 역임한 문신.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492년 4월 1일 무재가 있는 장수를 뽑는 일을 논하던 중에 유자광이 19살 나이에 강궁(強弓)을 잘 당기고 용모가 뛰어난 사람이 있다고 하며 이장곤을 유장(儒將)의 적격자로 천거하여 성종 앞에서 직접 활을 당기고 시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1495년 생원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1504년 교리일 때 이극균에게 사사로운 일로 천거를 받은 적이 있다는 이유로 연산군의 의심을 받아 옥사를 겪고 고문을 당했다. 이장곤은 활쏘기 시험에서 여러 차례 수석을 차지해서 천거를 받았다고 변명했지만 더 심하게 고문을 당했다.
1495년(연산군 1)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502년 알성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04년 교리로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이듬 해 거제도에 유배되었다.
이후 행적을 감추었는데 나중에 중종반정 때의 기록에 보면 연산군이 이장곤이 반란을 일으킬까 의심해서 잡아 죽이려 했기 때문에 도망쳤다고 되어 있다. 이장곤이 도망치자 연산군은 이장곤의 형인 이장길에게 연좌제를 적용하여 잡아오도록 명령했다. 만약 잡아올 경우 남해 현감을 벌주고 이장곤의 흉악함을 비난하는 어제시를 내리며 이장곤을 잡아들이는 자는 죄인이라도 죄를 면하게 해주겠다고 하였다. 이장곤은 모습을 감추었지만 무용과 계략이 뛰어난 사람이라 잡혀 죽지는 않을 것이라는 소문이 저잣거리에 파다하게 퍼졌으며 이장곤이 무리를 모아 거병할 것이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는데 이런 소문이 중종반정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자유의 몸이 된 뒤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1508년(중종 3) 박원종(朴元宗)의 추천으로 다시 기용되어 홍문관부교리 · 교리 · 사헌부장령을 거쳐 이듬 해 동부승지가 되었다.
1518년 대사헌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고, 이듬 해 우찬성으로 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이 되고 병조판서를 겸임하였다. 이 때 심정(沈貞) · 홍경주(洪景舟) 등에게 속아 기묘사화를 일으키는 데 가담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목적이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신진 사류들의 숙청임을 알고 이들의 처형을 반대하였다. 이 때문에 심정 등의 미움을 사서 결국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조광조 등의 사림과 가깝게 지냈으나 기묘사화에 연루되지는 않았다. 조광조를 심문할 때 심문관으로 참석하였으나 이후 조광조를 사사하는 것에는 반대하는 등의 모습을 보면 숙청에 적극적으로 찬성하지는 않은 것으로 추정한다.
심문할 당시 조광조는 크게 배신감을 가졌는지 술에 취해서는 "희강(希剛, 이장곤의 자) 이 사람아! 나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못난 사람 같으니."라며 반말을 하며 대청에 오르려 한 통에 김전 등이 사람을 시켜 붙잡게 했다고 한다. 기묘사화로 사림이 몰락한 뒤인 1520년에 병을 핑계로 체직해 은퇴했다.
한편 후대 인물인 교산 허균은 자신의 저서에서 권근, 김종직, 남효온 등을 비판하면서 이장곤도 기묘사화에 참여해 조광조 일파를 숙청하는 데에 일조하고 평생을 시류에 영합한 기회주의자라며 혹평한 적이 있다.
그 뒤 경기도 여강(驪江)과 경상도 창녕에서 은거하였다. 저서로는 『금헌집(琴軒集)』이 있다. 시호는 정도(貞度)이다.
[daum백과사전. 나무위키]
[팔경논주]
기묘사화는 중종 이역의 각본에 따라 홍경주, 심정, 남곤, 김전 등이 기획, 연출, 주연과 조연을 한 친위쿠테타였고, 한밤중에 갑자기 차자를 받고 입대한 정광필(鄭光弼)ㆍ이장곤(李長坤)ㆍ고형산ㆍ홍숙(洪淑)ㆍ손주(孫澍)ㆍ방유녕(方有寧)ㆍ윤희인(尹希仁)ㆍ김근사(金謹思)ㆍ성운 등은 원치 않게 동원된 엑스트라였다.
반정군에 업혀 왕이 된 행운을 누린 중종은 시간이 흐르면서 훈구대신들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고 싶어 조광조를 등용하여 개혁정치를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조광조 등 사림파가 워낙 꼼꼼하고 과격한 개혁을 개혁을 추진하면서 중종과 조정 대신들 모두가 개혁피로감을 느끼게 되었다. 조광조파가 지나치게 득세하여 중종 자신까지 옥죄려 하자 왕권의 위협을 느낀 중종은 훈구파와 온건 사림파를 부추겨서 조광조 일파를 숙청하려고 하였다. 그러한 낌새를 느낀 조광조가 몇 번이나 사직을 청하였으나 중종은 저울질을 하면서 자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주저하는 중종의 심화를 건드려 폭발시킨 자는 홍경주와 심정이었다. 홍경주는 딸인 희빈홍씨를 사주하여 조광조를 모함하는 말을 베겟머리 송사를 통해 중종에게 심었다. 또한 심정은 아들 복성군을 세자로 만드려는 경빈박씨를 부추겨서 꿀물로 ‘走肖爲王’이라 써서 개미들이 갉아먹도록 한 나뭇잎을 중종에게 보여줘서 마침내 의심이 폭발하도록 만들었다.
<이장곤 전(李長坤傳)>을 보면 급박했던 1519년 음력 10월 15일 밤의 상황이 한눈에 드러난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명료하게 알 수 있다.
병조판서 이장곤은 남곤이 보낸 급한 편지 때문에 아무 것도 모른채 신무문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군사를 거느리고 당패 사람들을 잡아 궐문에 와서 주살(誅殺)하도록 하라는 왕명을 보고는 비로소 이 밤에 이 사람들을 쳐서 죽이려는 모략을 알고 깜짝 놀랐다.
용기를 내어 나아가서 영상이 아직 안 왔는데 함부로 할 수 없고, 대신들과 함께 논의해서 죄를 다스려도 늦지 않다고 청하였다. 곧 홍경주가 나서서 주살을 즉시 시행하도록 하자는 간계의 말을 하려는 것을 꾸짖어 물리쳤다. 임금의 화가 조금 누그러져서 영의정 정광필을 부르도록 명하였다. 입궐한 영상 정광필이 추국(推鞫)해서 죄를 정하기를 청하였다. 이 때문에 일이 느긋하게 되었다.
이장곤이 큰일을 했다. 어명대로 시행했으면 그날 새벽 신무문 앞은 조광조와 30여 명 사대부들의 목이 떨어지는 피바다가 되었을 것이다. 이장곤이 이치에 맞는 말을 했다. 영의정도 없으며 대신들과 의논도 없이 현장에서 주살하기엔 아무리 절대 왕권을 가진 중종이라 해도 과격하개 실행하긴 난감했을 것이다. 영상 정광필도 큰일을 했다. 그래서 『기묘록 보유 상권(己卯錄補遺 卷上)』의 앞자리에 있다.
이럭저럭 하여 새ㅔ벽 4시경에 중종은 들어가고, 이장곤은 남곤, 심정, 김전과 함께 죄목에 대한 전지초(傳旨草)를 논의하게 되었는데, 일이 처음의 계획대로 돌아가지 않고, 이후와 후세에 큰 비판을 받을 것을 눈치 챈 영리한 남곤은 핑계를 대고 빠져버렸다. 날이 밝자, 임금이 두 번이나 이조판서 남곤을 불렀으나 오지 않은 것을 보면 아차 싶었던 모양이다.
이런 남곤의 행적에 대해 근래의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보면, 남곤이 조광조를 구명하기 위해 정광필과 함께 간언을 했으므로 그렇게 간신은 아니라는 변명이 꼭 몇 줄씩 붙어 있다. 남곤이 후손들인가? 홍경주의 후손들도 지금 유명인물 불천위 남양공의 후손이라고 떵떵대고 있다.
그러나 <음애일기>에도 나와 있듯이 남곤은 홍경주 등과 함께 기묘사화를 꾸미면서, 조광조의 과격한 개혁정치에 불만을 갖거나 반대하는 조정 대신들 중에서 정광필, 이장곤 등 홍경주나 심정이 나섰으면 포섭할 수 없는 사람들을 상대로 계획적으로 포섭하는 데 앞장섰다. 기묘사회을 벌이는데 중요한 한 축을 담당했다. 야사에 보면 57세로 죽기 직전에 기묘사화를 일으켜 수많은 신진 사대부들을 죽인 것을 후회하며 자기가 지은 글을 모두 불태웠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한국사에서 지은 죄로 인하여 낙인된 ‘己卯三奸’은 절대로 씻어질 수 없다.
이장곤이 남곤처럼 영악했으면 전지초(傳旨草)를 논의하는 자리를 피했어야 했다. 영의정 정광필은 피했다. 고형산, 홍숙, 손주, 방유령, 윤희인, 김근사, 성운 등 다른 대신들도 다 피했다. 그런데도 대신 급은 혼자만 참여했으니, 어쩌면 용맹하나 어리석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장곤은 김전 및 대간ㆍ승지와 함께 조광조 등을 추문(推問)하여 시추(時推 당시에 추문함)한 조광조 등 4명을 사율(死律)로 정하고, 박세희(朴世熹) 등 4명을 장류(杖流 형장으로 때린 다음 유배함)하여서 종으로 삼도록 하였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정광필과 이장곤을 『기묘록』의 제일 앞자리에 올린 김안국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어받아 『기묘록 보유 상권(己卯錄補遺 卷上)』에서 두 인물의 행적을 자세하게 쓴 안로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덕분에 그날 새벽에 목이 모두 떨어지지 않았다는 고마움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인물을 기묘록에 올릴 필요가 있었을까? 남곤이 동원할 정도면 이심전심이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 아닐까?
정광필과 이장곤은 조광조와 사이가 안 좋았다. 과격한 개혁정치에 대한 비판을 서슴치 않았다. 그러나 조광조와 사림파 사대부들이 죽일 정도로 나쁜 죄를 지었다고는 여기지 않았다. 유배와 파직 정도가 알맞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전지초(傳旨草)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유배와 파직을 주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왕명으로 조광조 일파를 숙청하려고 하는 홍경주, 심정의 패거리들의 거센 주장에는 불가항력이었을 것이다.
기묘사화, 한국사에서 참 안타까운 참화이다. 조광조의 개혁정치에 대한 후세의 평가가 엇갈리지만, 조광조를 등용해 훈구파의 권세를 제어하려고 한 초심을 잃고 개혁정치에 피로감을 느끼고는 간신들과 총애하는 후궁들의 참언에 넘어가 기묘사화 친위쿠데타 참극을 벌린 중종 이역의 잘못이 전부이다. 전주이씨 왕족 자체가 고려 의종 때 문신 150명을 참살한 이의방계의 후손이다. 그러니 신하들 죽이기를 쉽게 여긴다.
어찌하여 조선의 왕들은 대를 이어 올곧은 선비들을 몰살시키는가. 가뜩이나 작은 국토에 적은 인구에 적은 인재들인데, 수시로 죽여대니 조선 말기에는 좋은 인물들의 씨가 말라버렸다. 겨우 살아남은 충신들과 좋은 선비들의 후손들은 깊은 산으로 숨고, 간신들과 중용이니 중도니 하는 보신 제일주의자들만 씨를 많이 남겼다. 무능한 왕과 간신들의 후손이 득세하는 세상은 결국 망국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자들과 후손들은 일제시대에도 훈작을 받아 잘 살았다. 식민지, 분단, 전쟁, 독재의 고초는 오롯이 백성들의 몫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