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❷ 나누는 삶, 사회봉사복지 시스템을 만들다
한경직 목사는 한국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여인들이 많아지자 우리나라 최초의 모자 시설인 ‘다비다 모자원’을 설립했고, 52년에는 무의탁노인을 위해 ‘영락 경로원’을 세웠다. 전쟁고아가 많아지자 미국인 선교사 밥 피어스와 함께 선명회(월드 비전)를 만들어 구제와 구호에 힘썼다. 시설을 만들 때는 단순히 건물을 지어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후원자를 모집해 그 시설이 지속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것이 지금의 영락사회복지재단인데, 현재 재단 내 사회복지기관만 13개, 평균 670여명이 보살핌을 받고 있다.
❸ 세계가 인정한 목자, 그러나 “나는 죄인입니다.”
한경직 목사는 지난 1992년 종교 분야의 노벨상이라 할 수 있는 템플턴상을 아시아인 최초로 수상했다. 1973년 테레사 수녀가 첫 수상한 템플턴상 심사위원회는 한경직 목사의 공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한경직 목사는 서울에서 가장 큰 장로교회인 영락교회의 설립자이며, 피난민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그의 사역을 통하여 세계의 이목을 한국의 기독교 성장으로 집중하게 한 지도자이다. 한목사는 20세기가 낳은 한국의 가장 뛰어난 목사일 것이다. 그는 한국에서 전례가 없는 많은 수의 장로교회를 성장시켰을 뿐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그리고 미주 지역에 이르는 해외선교사역을 펼쳐나간 선교의 한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한경직 목사는 우리 사회의 갈 길을 제시했던 시대의 어른이자, 여러 교육기관과 사회봉사기관을 설립한 교육자였으며 사회봉사자로서 사회복지에 기여했던 ‘빈민의 성자’였다.
어려운 시절에도 먹을 것이 생기면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옷이 생기면 거리의 노숙자에게 입혔으며, 믿는 만큼 실천하는 삶을 살았던 한경직 목사. 그러면서도 그는 스스로를 죄인이라 말하던 겸손한 리더였다. 또한 템플턴상 수상 후 상금 102만 달러를 받자마자 북한을 위해 써 달라며 선뜻 선교헌금으로 전액을 내놓았다. 당시 “1분 동안 백만장자가 돼 봤다”며 환하게 웃었다는 한 목사의 일화는 유명하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한 사람, 가진 모든 것을 다 비우고도 사랑으로 꽉 채워진 한경직 목사의 위대한 업적은 그의 정신과 삶을 본받아 실천하려는 이 시대 또 다른 한경직들이 걸어갈 길을 앞서 만들어 놓았다.
➍ “나는 남길 것이 없다”
“나는 아무것도 없다. 땅 한 평, 집 한 칸이 없다. 내가 너희들을 위해 남기는 것은 없지만 너희들을 위해 늘 기도하고 있다.” – 故 한경직 목사가 가족에게 남긴 유언 中 -
98세로 삶을 마감한 한경직 목사가 남긴 것은 일인용 침대와 안경, 헤진 양복 몇 벌 그리고 낡은 성경책이 전부였다. 이런 한경직 목사를 ‘실패한 목회자, 바보 목사’라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의 실패는 청빈한 삶의 결과였으며 기꺼이 바보가 되어 하나님의 종이자 청지기의 사명을 택했던 진실한 목자의 운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