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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아시는 하나님(시 139:1-10)
할렐루야! 주님의 보좌 앞에 나온 여러분 모두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믿고 계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토미 워커라는 찬양 사역자가 작사 작곡한 “내 이름 아시죠”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그 찬양을 듣고 전 세계에서 보낸 치유와 회복의 간증을 모아 “내 이름 아시죠”(He Knows My Name)라는 책을 냈습니다.
그 책 가운데 ‘찰리의 점심식사’ 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찰리는 태어날 때부터, 심장에 큰 구멍이 두 개나 뚫려 있는 선천적인 문제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의사는 마지막으로 찰리를 안아주고, 작별인사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중보자들의 기도로 생명을 구했습니다. 찰리는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첫 번째 심장 수술을 받았습니다. 세 살 때, 수술을 두 번이나 더 받았습니다. 그 후에도, 심장 박동을 조절하기 위해, 세 차례나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없이 병원을 드나들며, 정성껏 치료한 결과, 찰리는 힘은 들었지만, 비교적 건강하게 자랐습니다. 그런데 13살 되던 어느 날, 강아지를 좇아가다 넘어지는 바람에, 심장박동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병원으로 옮겨진지, 15분 만에,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그때 가족들의 충격은 너무나 컸습니다. 밀려오는 슬픔과 고통으로 숨조차 쉴 수 없었습니다. 찰리의 장례식장에서 부른 찬양이, 바로 ‘나를 지으신 주님’이었습니다.
나를 지으신 주님 내 안에 계셔, 처음부터 내 삶은 그의 손에 있었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내 흐르는 눈물 그가 닦아 주셨죠.
그는 내 아버지 난 그의 소유, 내가 어딜 가든지 날 떠나지 않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아바라 부를 때 그가 들으시죠.
비록 찰리는 13년의 짧은 생을 살다가, 하늘나라에 갔지만, 하나님은 그를 향한 분명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당시에는 왜 하나님께서, 이런 아픔과 고통을, 찰리와 가족에게 안겨주시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찰리의 아픔과 고통을 통해서, 더 큰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찰리가 세상에 있는 동안, 매일 점심식사를 싸주어야 했습니다. 찰리가 천국에 간 후, 하나님께서는 내가 날마다 찰리에게 싸주어야 했을 점심을, 굶주린 어린이들에게 먹이는 일을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오늘의 ‘찰리의 점심식사’라는 긍휼사역으로 이어져, 매일 12곳에서, 약 1천명의 어린이들에게 점심을 제공하는 사역으로 발전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창조하신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건강하든, 연약하든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살아가면서 나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한 생명을 세상에 보내실 때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2:10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아멘.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안타깝게도 이 사실을 믿지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진화론을 믿느냐, 창조론을 믿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여기서 ‘만드신 바’라는 헬라어는 ‘poiema’(포이어마)입니다. 이것은 ‘작품’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는 말의 뜻은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이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창조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습작품이 아니라 하나님이 최선을 다하여 만드신 걸작품입니다. 우연이 태어난 존재, 태어나지 말아야 할 존재가 아니라, 쓸모없고 버림받은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축복 가운데 태어난 존재라는 것입니다. 아주 귀하고 소중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특별한 존재입니다. 옆에 계신 분을 이렇게 축복합니다.
“권사님(집사님)은 특별한 존재입니다. 권사님(집사님)은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소중한 존재입니다.”
날마다 여러분 자신을 축복하십시오.
“나는 창조주 하나님의 걸작품이다. 나는 하나님 앞에 특별한 존재다. 사랑스런 존재이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려움을 당할 때나, 혹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났을 때, “누가 나를 알아주리요.”라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나를 알아 줄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나와 함께 먹고, 함께 자고, 같이 생활하는 식구들도, 나를 완전히 알지 못하며, 나를 낳아주신 부모도, 자식도 아내도 남편도 나를 완전히 알지 못합니다. 심지어 나 자신도 나를 확실하게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의 마음을 아시며, 나의 생각도 아시며, 나의 육체를 아시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읽은 시편 139편은, 다윗의 생애 말년에 쓰여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가 살아오면서 만났던 하나님, 그의 삶에 동행하셨던 하나님, 그의 인생을 통해 실제 경험했던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 가운데에는 그의 온 인생살이를 통해서, 실제 경험으로 검증된 것들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말씀 가운데서 우리 인생과 더불어 행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곧 이 말씀은 우리 인생과 하나님의 관계를 잘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가 만난 하나님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다윗이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삶에 언제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우리 또한 만나고 큰 위로와 은혜를 체험하는 복된 축복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우리 인생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첫 번째 모습은 “하나님은 나를, 우리 인생을 너무나 잘 아신다”는 것입니다.
1-4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아멘.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살펴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앉고 일어서는 것을 아시고, 우리의 생각을 아시고, 우리의 길과 눕는 것을 아시고, 우리의 행위뿐만 아니라, 혀의 모든 말까지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하루 일과와 삶의 목적, 계획, 그리고 살아가면서 가지는 욕망 등과 같은 일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헤아리시는 분이십니다.
다윗은 자신의 삶 전체를 통해서, 함께 호흡하며,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보시는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분명하게 인식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하기를,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6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아시되, 오히려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계신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여러분! 누군가가 나를 잘 안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부담과 두려움입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나에 대해서, 늘 부정적으로 말하는 누군가가, 나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부담이 될 것입니다.
혹은 잘못을 범한 어떤 사람이, 누군가에 의해서, 감시를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두려움이 될 것입니다. 나에게 좋지 않은 계획을 가진 제 3자가, 나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면, 그것은 긍정적인 느낌보다는, 부정적인 느낌이 더 가까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누군가가 나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것은, 때로는 부담과 두려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누군가가 나를 잘 안다는 것이 기쁨과 위로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 역시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나를 잘 알고 있다면, 그리고 나를 주목하고 있다면, 그것은 기쁨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 중에 허우적거리며, 갈 길을 몰라 애태우고 있을 때에, 누군가가 내 형편과 처지를 헤아리고, 나를 돕기 위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큰 위로와 기쁨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힘들 때마다, 돕고 계신다는 것을 또한 느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감시자로서가 아니라, 돕는 자로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확신을 하게 될 때, 그 은혜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다윗의 고백들이 바로 그러한 내용들인 것입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나에 대해 어찌 그리 잘 알고 계십니까? 나도 잘 모르는 부분들까지, 하나님은 다 헤아리고 계시니, 나로서는 그저 놀랄 뿐입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모든 형편과 처지를 너무나 잘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마태복음 10:30절을 보면,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내 머리털이든, 아니면 다른 사람의 머리털이든, 누군가의 머리털을 하나하나 세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다”라는 것은, 하나님은 나에 대해서, 우리에 대해서 모르시는 것이, 전혀 없다는 말씀입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탄 것을 하나님은 아셨습니다(욘 1:3). 또한 배 밑창에 누워서 능청스럽게 잠을 청하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아셨습니다(욘 1:5).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을 무너뜨렸을 때, 아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금덩어리를 몰래 취하여, 자기의 장막에 숨겨 놓은 사실도 하나님은 다 아셨던 것입니다(수 7:21).
그렇습니다. 여러분! 참으로 하나님은 나의 생각을 아십니다. 나의 말을 아시고, 나의 모든 행동을 다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혹시, 이런 사실이, 하나님 앞에 부담이 되지는 않으십니까? 나에 대해서 속속들이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이 느껴지지는 않으십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지금 잘못된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러분! 이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다는 사실이, 부담이요, 두려움이 아니라, 나에게 진정 힘이 되고, 위로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10절)
내가 믿음의 생각만 가져도, 그것을 행하고자 마음만 먹어도,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가상히 여기시고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십니다.
나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시고, 용기를 주시며 강하게 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나에 대해서 모르시는 것이 없는 하나님 앞에 우리가 숨길 것이 과연 무엇이 있겠습니까? 무엇을 꼭꼭 숨기겠습니까?
하나님은 나에 대해서, 우리에 대해서 모르시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숨길 것이 무엇이 있겠으며, 또 말 못할 사정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입술을 열어 하나님께 아뢴다면, 하나님은 분명 말씀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무개야! 내가 너의 마음을 다 안단다. 네가 처한 형편을 알고, 네 사정을 다 안단다. 네 마음의 아픔을 알고, 네 가슴에 맺힌 눈물을 다 안단다. 그래서 나는 너 혼자 그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치 않는단다. 어서 속히 나에게 나아와 입술을 열고, 네 마음을 쏟아놓기를 기다리고 있었단다.”
우리의 모든 형편과 처지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우리를 도와주실 줄로 믿습니다. 사랑과 긍휼이 풍성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진정 참된 위로가 되고, 힘이 되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믿는 하나님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서,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 우리를 아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실제 개입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7-10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아멘.
우리는 우리 인생 가운데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7절)
이 말씀을 읽노라면, 아마 하나님의 낯을 피해 다시스로 도망하는 요나를 연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윗이 진정 고백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도망하는 것은 헛수고다. 하나님 앞에 우리는 독 안에 든 쥐다.”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시선,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을 발견하기란 불가능하다.”라는 뜻에서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다윗은 우리 인생 여정 어느 곳에서나, 구체적으로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확신과 기쁨으로 이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11-12절에 보면,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인생 여정에서 만나는 온갖 어려움들 때문에, 우리 성도들이 낙심할 이유가 없다고, 역설적으로 표현하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나를 잘 아신다는 믿음, 나의 형편과 처지를 잘 아신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103:14절에서도 다윗은 고백하기를,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살아가면서 만나는 어둠과 시련 앞에서 때로는 크게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캄캄할 때가 있습니다.
“나에게 왜 이런 고난이 오는가? 정녕 하나님께서 왜 나를 도우시지 않는가?”
그래서 절망하기도 하고, 낙심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불평이라는 것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의 인생 전부를 통해, 실제 경험한 하나님을 고백하면서, 우리에게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큰 낭패와 역경과 위험이 정녕 나를 덮을지라도 내가 낙심하지 않을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내 형편과 처지를 너무나 잘 아시며, 나를 선한 길로 인도하신다는 약속을 믿고, 그리고 실제 그것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과 체험을 통해, 다윗은 14절 말씀에서, 실로 위대한 고백을 하는데,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옛날 성경에는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사전에 보면, “신묘막측”이란 “추측할 수 없을 정도로 신기하고 영묘함”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추측할 수 없을 정도로 신기하고 놀랍다.”라는 것입니다. “상상할 수 없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에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크고 기이해서 나로서는 도저히 측량할 수조차 없습니다.”라는 감탄과 경이로움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 자기 인생 속에서 하나님의 개입하심과 도우심을 확신하는 사람들은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찬송가 288장 3절을 보면, “주 안에 기쁨 누리므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 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아주 가난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주중에는 공장에 나가서 일을 하고, 주일이면 교회를 돌보는 목사님이셨는데, 어려운 형편 중에도, 늘 감사하며 살아가는 목사님이었습니다. 어느 날 직장에서 일하던 목사님이, 점심때가 되서 도시락을 펼쳤는데, 그 속에 메모지가 한 장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부인이 정성스럽게 옮겨 적은 시 한편이 적혀 있었습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시를 읽어 내려가던 목사님은 너무나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목사님은 그 아름다운 시에 자기의 마음을 덧붙여서 더 아름다운 시를 만들고 곡을 붙였습니다. 이런 사연 속에 만들어진 노래가, 찬송가 3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다 형용 못하네”라는 찬송입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날마다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를 기록하고자 할진대,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을지라도, 어찌 다 기록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이러한 고백이 있습니까? 이런 고백은 바로 나의 삶 속에 주인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확신하는 믿음과 그것을 체험한 사람들만이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 가운데, 여러분을 너무나 잘 아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경험함으로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나의 찬송이라고 고백하고,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이러한 고백이 있을 때에,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더욱 신뢰할 수 있게 되고, 또 자신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의탁할 수 있게 됩니다.
23-24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아멘.
이 시는 다윗이 자기의 인생 가운데서, 친히 경험한 하나님을 노래하고 있는 시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다윗은 베들레헴 들에서 양을 치던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덟 형제의 막내로 태어났지만, 형제들과 부모에게조차 별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자랐습니다. 그러나 들에서 양을 돌볼 때에, 사자와 곰을 이기고, 또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쳐부수는 구체적인 사건들을 통해서, 자기 인생과 이스라엘 역사 속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만약 우리에게 다윗과 같은 이러한 경험들이 있었다면, 어떠했겠습니까? 어쩌면 평생의 간증거리가 되고, 이로 인해서 아주 능력있는 성도로써, 아무런 문제없이 살아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러나 다윗은 여전히 약하고 흔들리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악한 자들을 가까이 했을 때, 피를 흘렸고, 궁궐 옥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을 때, 밧세바를 범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연약함을 알게 된 다윗은, 그래도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찬양하면서, 동시에 하나님과 함께 하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23-24절)
“하나님, 나로서는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다만 주님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나와 함께해 주십시오.”
학생이 공부를 하기는 하되 억지로, 성의 없이, 마지못해서 하는 시늉만 한다면, 뒷바라지하며, 지켜보는 부모의 속이, 상하고 보람이 없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부릅니다.
“아들아, 공부하는데 힘들지? 어려운 문제 있으면 내가 도와줄게.”
그러자 아들이 대답합니다.
“됐어요, 아버지가 뭘 안다고 그러세요. 제 공부에 간섭하지 마세요.”
그리고는 매번 0점짜리 성적표만 들고 온다면, 부모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반대로 이런 자녀도 있습니다. 공부를 하던 아이가 부모에게 달려옵니다.
“엄마, 이 문제를 잘 못 풀겠어요. 좀 가르쳐 주세요.”
자원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성실하게 공부하는 자식이 있다면, 혹 답이 틀렸을지라도, 부모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잘 지도할 것입니다. 문제의 답이 틀렸습니다. “왜 틀렸을까?”라고, 다시 그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는 도움을 줄 수 있는 누군가를 찾아서 답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알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은 거듭해서 같은 문제로 넘어지지 않습니다. 같은 문제가 계속해서 출제되는데도, 거듭해서 답이 틀린다면, 그 사람은 뭔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의 인생 문제지를, 하나님께 들고 나갑니다. 그리고 이런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 내 인생의 문제를 하나님께서 자세히 살펴 주십시오. 혹 틀린 답이 있으면 고쳐 주시고, 나를 제대로 된 길, 하나님의 길로 인도해 주십시오.”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 계십니다. 살아 계실 뿐만 아니라, 나를 잘 알고 계십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나를 아시되,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형편과 처지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이것을 반드시 이루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서,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가 늘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그리도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인생으로 지어주셨고, 내 곁에 다가와 동행하시나, 나는 때때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내 마음대로, 행동하는 가운데, 내 스스로 하나님의 계획과 기대를 버리며, 살고 있는 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나보다 나를 잘 아시는 주님, 우리를 살펴주시옵소서. 우리를 새롭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발걸음을 영원한 믿음의 길에, 생명의 길에, 굳게 세워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첫댓글 말씀에 큰 은혜 받습니다.
목사님 정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