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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이씨(십운과공 장흥계 사복시정공 후손) 역사실 원문보기 글쓴이: 행복한사랑
광주이씨 호송산(狐訟山) 전설의 해석과 史話的背景
호송산(狐訟山) 전설,츨처 에세이 향토사/ 윤종준(성남문화원 상임연구위원)
광주 이씨는 신라 때 이자성(李自成)을 시조로 하여 칠원성(경남 함안)에서 살아오다가
신라 말에 모든 성이 고려 왕건에게 항복한 뒤에도 끝까지 항거하였다.
이에 왕건이 친히 성을 함락시킨 뒤 이씨 성을 가진 일족들을 모두 체포하여
회안(淮安 : 경기도 광주)지방 관헌들에게 노비로 삼도록 하였다.
이들은 덕망과 재주가 있어서 여러 세대를 지나 고려 말 경에 이르러서는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는 사람들도 생기게 되었다. 이 중에
광주고을의 향리였던 생원공 이당(李唐)이라는 이가 원님의 딸과 혼인을
맺어 가문의 번성을 이루게 되었다.
광주 원님이 낮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누런 용 한 마리가 자기 집 뜰에 있는
나무에 서려있었다. 꿈을 깬 원님이 이상히 여겨 뜰에 나가 나무 위를
올려보니 자기의 아전인 당(唐)이 나무 가지에 다리를 걸치고 잠을 자고 있었다.
평소 그의 재능을 아까워하던 원님은 벙어리인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기로 결심하였다.
택일을 하고 혼수준비를 하는데, 마침 채단 끊는 사람이 가위를 잃어버리고
쩔쩔매고 있었다. 이때 벙어리 신부가 갑자기 말문이 터져 “문틀 위에 가위가 있다”
고 말을 하니 사람들이 매우 신기하게 여겼다. 아들 다섯 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고, 이 중 둘째가 둔촌(遁村) 이집(李集)으로
고려 말 정몽주 등과 함께 높은 학문으로 이름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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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시 덕풍동에 있는 생원공의 부인 인화이씨(仁華李氏)의 묘역에는
신기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생원공의 장인은 광주목사(廣州牧使)였는데
밝은 식견이 있었다. 여가가 있으면 신 한 켤레 지팡이 하나로
따르는 사람도 없이 산수를 구경하고 돌아왔으며, 달밤이면
뒷동산에 올라 구경을 하고 남몰래 오래도록 탄식하고 내려오곤
하였다. 생원공은 그때에 통인으로 있으면서 간간이 그 뒤를 따라가서
그 분이 멈추어 선 곳을 살핀 적이 여러 차례 있었다.
목사공이 교체되어 떠나간 뒤에
고을에는 변괴가 있어 새로운 원님이
오면 삼일 만에 부인이 죽거나, 부인을 거느리고 오지 않으면 원님이 죽었다.
이 때문에 고을이 비어 마침내 고을 터를 옮기게 되었다.
그때에 생원공의 부인 인화이씨가 세상을 떴는데, 하루는 생원공이 둔촌을 불러 놓고
폐허가 된 고을의 뒷산에 묘를 쓸 만한 사유를 상세히 일러 주어
둔촌께서 어머니의 산소를 그곳에 모셨다.
그 후 12년에 머리가 하얀 늙은이 셋이
산에 대한 소송을 제기하였는바,
어찌나 말을 잘하는지 마치 물이 흐르듯 하였으므로 당할 도리가 없었다.
둔촌이 외조부인 목사공을 찾아가서 송사의 내막을 상세히 말씀드렸다.
그때에 목사공은 이미 일백세에 가까웠는데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서
“이 송사를 못 막으면 너의 땅이 못된다.
내가 그곳을 보아온 지 이미 오래이나 삼족구(三足狗) 세 마리를 얻지 못하여
도모하지 못하였다.” 하므로,
둔촌께서 엎드려 말하기를 “저희 집에서 기르는 개가
일찍이 발이 셋 밖에 없는 놈을 두 마리나 낳아 하도 이상하여
그대로 기르고 있습니다.” 하니, 목사공이 말하기를 “그곳은 하늘이
너에게 준 땅이다.
내 집에서 삼족구 한 마리를 구했으나 나머지 두 마리를 구하지 못하여
한스럽게도 도모하지 못하였었는데, 이제 네가 세 마리를 구했으니
너의 일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느냐!” 하고
바로 개 한 마리를 내주면서 세 마리를 안고 송정(訟庭)으로 들어가
개를 풀어 놓으면 송사를 이길 도리가 있다고 하였다.
둔촌이 하직하고 돌아와 재판하는 자리에 들어가
삼족구 세 마리를 풀어 놓으니 바로 뛰어나가
각각 한사람씩을 물어 죽이니 노인 셋이 흰 여우 세 마리로 변하였고,
따라서 송사도 끝이 났다. 이 해에 목사공이 세상을 뜨면서
둔촌에게 이르기를
“그 산은 세 번 개국 할 때마다 발복할 땅이니,
너의 집안 홍복(洪福)은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하였다.
이에 세상 사람들이 그 산을 ‘광이 호송산(廣李 狐訟山)’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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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이씨 호송산(狐訟山) 전설의 해석과 史話的背景/ 이민영
가. 서설
전설은 항상 전해져서 내려오는 사실에 근거한 이야기를
상상과 추상으로 주변의 실제와 결합하여 이야기에서 이야기로 오는 것이 설화
또는 전설의 특징이다. 우리 단군의 건국신화를 보면 전부가 실제와 결합된 당시의 국가 건국의
배경이 설정된 것처럼 말이다. 휘 李필행어르신과 휘 후징 선조께서, 얻어서, 지금까지 전해온, 호송산 설화는 매우 중요한 사적자료이다.
이 傳說의 배경과 사화가 말해주는 결론은
-우리 廣州李族은 三足烏민족.天孫민족 東夷족이다
-광주 李族의 역사와 수난사의 과정을 이야기한다
-광주 漢山州가 廣州이족의 世居地 임과 支配 領域이라는 사실과
신분상승과 실지회복의 과정을 나타내고 있다.
-후손들에게 나라에 대한 충성과 봉공공, 역경의 극복, 자기치신으로,
대대흥복이라는 희망을 전하는 메시지이다(3번 開國興福說)
나. 전설의 史實的인 背景
(1). 원래 한산의 회안 통일신라시기의 강주 신주로 나중 한산주로 개칭한 곳으로
왕건에 의해 칠원에 강력한 지지기반을 가지고있는 칠원공 이한희 무리의 새력을 약화시키고
가야와 남해지역의 통치지역을 확대하고자 칠원성주와 그 일족을 강제로 한산주로 이주시킨 것으 로 성주를 한산에 거주케 한 뒤부터 이곳은 칠원공의 영역으로, 廣李족의 땅이었다. 전작권은 고려초부터 고을의 촌장(향임, 영동정.호장)의 지배관리하는 곳이라, 대부분 고을의 동정이 관리하고,
소유와 전작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고을의 동정은 지방관과 조정과는 군신,호장의 관계로
일정 부분의 조세와 군역을 조정과 지방관에게 납부하였다.
즉, 한산주 일대는 회안이씨의 족장인 칠원공(이한희)가문의 소유로
대대로 내려져온 곳이다. 당시의 회안은 광주목사의 치소였다.
그런데 광주목의 치소를 나중에 이전하였다.
(2). 이 전설은 우리 광이의 태동과 흥망과 연관이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삼족오 전통사상에 기초한 삼족구의 등장과 구미호의 등장이다.
삼족오 삼족구 사상은 동이족의 천손사상에 기초한 민간사상으로
단군조선 고구려부터 시작되었다.
광주 회안의 이족을 구해주는 인물로 삼족구의 세마리와
우리를 힘들게하거나 곤경에 빠트린 자들로 세 여우(노인)가 등장한다.
(주, 광이세적과 남원세적)
이 전설의 특징, 삼족구 등장은 이족의 역사를 내포하고 있다
우리가 동이족, 북방에서 남하한 철기 족으로 (신라지역) 시원한다는 것이고
세 마리의 삼족구가 각각 우리 이족을 구하게 된다
(인화, 인주, 인천, 경원)이씨의 광주목사인 외조부가 자신은
이미 1마리가 있는데 2마리가 없어서,너의 이족의 숙원인 실지회복
아직도 구미호를 잡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2마리의 삼족구 현인은,
생원공 둔촌공가의 역사적인 내력 사실에 있었고,
1마리는 외조부인 경원이씨 실력자 목사공에 있는 것으로.
땅의 송사를 이기기 위하여 2가지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3). 廣州 牧使 仁華공은 고려 권신인 인주(慶源)이씨의 이자겸 등
귀족의 후예이다. 원래는 광주 일대가, 딸과 사위의 땅인데
잃어버린 것이다. 즉 원래는 칠원에서 한산에 정착한
칠원공(이한희)부터의 땅이고 대대로 칠원 이족들이 이곳에 모여 살면서
조상을 표식하는 八面碑와 神殿을 세우고 祭祀를 지낸 곳인데
원나라 간섭 후 지위를 잃고, 나중에 사위의 祖父 文이
조정의 王에게 直言을 간하다가, 反對派의 모함으로, 直道의 罰을 받아,
州吏로 신분이 格下되면서, 마찬가지로 일대도 없어진 것이다.
그래서 그 방법을 外孫 遁村에게 이르니, 조정의 실력자 광주 목사공의 힘으로
생원공의 다섯 아들이 등과하고, 신분에 오르니
이가 목사공의 삼족구인 것이다.
(1설 광릉 삼익, 2설 자성공 한희공 목사공. 3설 한희공. 삼익공. 목사공)
3마리의 구미호는(고려왕건, 몽고원나라, 고려말 생원공 조부 문에게
직도충언을 벌주고 신분을 격하시킨 무리들 )
(4) 세 마리의 구미호(노인)
--1차 고려 왕건의 칠원성함락 (경순왕과 투항세력)
--2차 몽고군 침략 원의 속국, 이족을 정향이속 시킨 고려 왕조(한산주에서
회안으로 이속, 失地)
--3차 광릉시대(고려고종조)를 열었으나 선조 諱 文 등의
직도 충언으로 광주목 아전으로 신분 格下. 漢山의 땅을 잃다)
(5)세분의(삼족구) 賢人,주 1 ,구미호를 잡는 개, 三足狗)
---- 이한희公 (칠원공) 칠원에서 廣州로 이거하여 한산주 주인 된 사실
---- 광릉 3익출사, 회안일대 세거,고려 중흥. 한산백의 후손인 사실.
(담로한 대신들이 민망히여겨)
---- 廣州牧使공의 역할, 생원공 다섯아들 등과, 신분회복에 도움 주는 廣州牧使공과 실권자
*한산주에서 터 잡고 부흥운동을 하고, 염현에서 신전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고
이한희 공부터 한산주는 우리 이족의 땅이다.
(6) 광주목의 변괴와 안정
목사공이 교체되어 떠나간 뒤에, 고을에는 변괴가 있어 새로운 원님이
오면 삼일 만에 부인이 죽거나, 부인을 거느리고 오지 않으면 원님이 죽었다.
이 때문에 고을이 비어 마침내 고을 터를 옮기게 되었다.
(목사공의 권세와 위치를 말해준다)
--이 고을은 원래 광리 칠원이족의 땅이었다 칠원에서
이곳으로 이거하면서 팔면비를 세우고
대대로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 당시 광주 이족들이 직도의 벌로, 아전으로 신분이 격하되었고, 지배권도 잃은 상태인지라 칠원공등 선조 영령들이 노하야 새로 목사가 와도 부인이 죽은 것이다.
생원공 唐의 장인인 목사공이 재임 시기에는 이런 변괴가 없었다,
목사공이 이임하자마자 칠원이족의 失地回復의 기회가 없어지고, 타족들이 이곳을
자기들 땅이라하면서 묘를 세우고 경영하니, 일부러 폐허로 만들고, 광주목 치소를 옮기게하고
그리고 사돈인 광주목사 인화공마져 이임을 한 것이라 이땅이 영원히 타족들 소유가 될까보아
선조 영령이 노하여, 부임하는 목사들 부인이 죽는, 변괴가 생긴 것이다.
다행이 생원공의 부인 인화이씨 묘를 쓰고, 땅을 되찾은 뒤에는 변괴가 없어졌다.
--광주가 이족의 땅임을 알게해주고 목사공도 원래 이 일대는
너희 조상의 땅이라고 한것을 보아, 한산 광주일대는 우리 이족의 지역임이 틀림이 없다.
---전설은 실제적인 역사내력과 선조들의 여망이 혼합되어 전설이 된다
우리 이족의 내력을 말해주는 중요한 사료이다
다. 3번 開國마다 代代 興福설
-조선왕조
-대한민국. 북한.
-통일한국
주 1 ,구미호를 잡는 개, 三足狗
삼족구는 삼족오를 접했을 때와는 또 다른 감흥을 전해 준다.
다른 것들은 모두 다리가 넷인데 삼족구만이 다리가 셋이었다는
것은 무엇인가가 부족하다는 느낌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못난 것이지 신비할 것이 없었다.
“아침에는 네 발로 걷고, 낮엔 두 발로 걷고, 저녁 무렵에는 세 발로 걷는 것은 무엇이냐?”
이 수수께끼는 스핑크스가 오이디푸스에게 냈던 것으로 신화에 나오는 수수께끼 중 가장 유명하다. 이 질문에서 사람들을 가장 당황케 하는 대목은 ‘저녁 무렵에는 세 발로 걷는 것’이라는 부분이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세 발로 걷는 동물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답은 실제가 아니라 은유 속에 있었다.
“그건 사람이지! 어릴 때는 두 손과 두 발로 기어 다니고, 커서는
두 발로 걸어 다니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면 지팡이를 짚어서 세 발로 걸어 다니게 되니까."
달에 사는 유일한 생명체는 계수나무 아래에서 방아를 찧고 있는 토끼인줄로만 알고 있다가 그 옆에 벌을 받은 항아가 변신한 두꺼비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만 해도 설마 그 뜨거운 태양 속에도 동물이 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 했다. 그런데 그 태양 속에 ‘삼족오(三足烏)’라 불리는 다리가 셋 달린 까마귀가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스핑크스의 수수께끼가 생각났다. 인간에 대한 은유로서가 아닌, 진짜로 세 발 달린 동물이 신화 속에서는 뚜렷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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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2.이필행
李必行 ,출생1589년(선조 22) ,사망1645년(인조 23) ,
병조좌랑, 형조좌랑, 보성군수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이원(而遠), 호는 천미(天微). 영의정 이윤경(李潤慶)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예열(李禮悅)이고,
아버지는 예빈시정 이사수(李士修)이며, 어머니는 종친부첨정 김선(金銑)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23년(인조 1)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분관(分館)되었고
1626년 승문원정자를 거쳐 저작에 올랐다. 이듬해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도(江都)에까지 호가했고,
곧 박사가 되었다가 환도한 뒤 병으로 사직하고 향리인 여주로 돌아갔다.
1628년 다시 박사를 제수받은 뒤 전적을 거쳐 감찰이 되었고,
이어 예조·병조·형조좌랑을 역임하였다. 1
632년 경성판윤(鏡城判尹)으로 나갔다가 이듬해 돌아와
호조·형조좌랑을 역임하고 다시 보성군수로
나가 곧 병으로 물러났다가 다시 경상도사에 제수되었다.
1635년 대동찰방(大同察訪)·형조정랑에 제수되었지만 병으로 취임하지 못하였다.
이듬해 통례원상례가
되었으나 3개월만에 병으로 체직되어 여주에 우거하였다. 그 해 12월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들어갔음을 듣고 호가를 위해 곧 갔으나 도중에 청병(淸兵)을 만나 좌절되고,
지평에서 의병을 모은 전 판서 이현영(李顯英)과 함께 춘천·양양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637년 이후 장령·예조정랑·군기시정·봉상시정 등과 네 번의 사간의 임명,
두 번의 홍문관응교의 제수,
승문원판교·사복시정·집의 등의 임명에 모두 병을 핑계로 거절하고
여주에서 머물다가 죽었다.
사신(史臣)은, 그가 국가에 변란이 있을 때만 일시
출사했다가 곧 향리로 돌아갔고, 광해군 때의
폐모사건 이후 출사하지 않은 영남의 김령(金坽),
호남의 신천익(愼天翊)과 더불어 벼슬에 뜻이
없는 청정의 선비이다.,생전에 선조들로 내려오는, 조상의 시원과
각종 전설을 집성한 남원세적,
지금의 광이세적(1987년 광이대종회에서 재간 재편집이 있다
광이 호송산 전설은 광이세적에 있다.
주3. 이필행 이후징가 소개/장달수(한국학)
묘갈명
통훈대부 행 통례원 상례 이공의 묘갈명 병서 〔通訓大夫行通禮院相禮李公墓碣銘 幷序〕
윤모(尹某)는 이공 이원(李公而遠)과 나이도 서로 비슷하고 인근에 거처하였으며 배우는 것도
함께 하고 뜻도 하나같아서 소싯적부터 가장 친하게 지냈는데, 학식은 공이 외람되게도
나에게 양보하였고, 덕행은 내가 실로 공을 경외하였다.
대개 공은 천자(天資)가 순수(純粹)하고 기국(器局)이 준정(峻整)하였다. 청약(淸約)으로
자신을 지켰을 뿐, 꾸미려 하거나 괴팍한 작태를 보이지 않았으며, 패만(悖慢)한 행동이
몸에서 끊어지고 효우(孝友)의 성품이 천성적으로 우러났으니, 엄의(嚴毅)하고 방정(方正)하여
절벽이 천 길 높이 우뚝 선 것과 같은 기상에는 자못 동고(東皐) 상공(相公)의 유풍(遺風)이
있었다.
벼슬길에 올라서는 하나같이 염근(廉謹)한 마음가짐을 지니고서 출입을 드물게 하고 교유를
끊었으며, 입으로는 명리(名利)의 말을 내놓지 않았고 발은 권세(權勢)의 문을 밟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세상의 꺼림을 받아 환로(宦路)가 험난하였으나, 공은 이를 개의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본래 벼슬로 출세할 생각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내외의 관직 가운데
오래도록 그 자리에 거한 적이 없었으며, 병자년(1636, 인조14)의 변란 이후로 여러 차례
불렀어도 응하지 않다가 결국은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아, 관작(官爵)과 봉록(俸祿)을 사양하는 것은 예로부터 어렵게 여기던 일인데, 하물며
말세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내가 본 바에 의하면, 계축년(1613, 광해군5) 이후로
벼슬하지 않은 자는 오직 김공 령(金公坽)이 있을 뿐이요, 병자년 이후로 벼슬하지 않은
자는 오직 우리 이공(李公)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김공은 먹고살기 어려운 사람이
아니었던 반면에, 이공은 쌀독이 자주 빈 나머지 때때로 미음과 죽으로도 끼니를 잇지
못하여 소나무 껍질을 짓찧어 양식으로 삼으면서도 오히려 태연히 지내면서 더 이상
봉록을 받기 위한 벼슬을 하지 않았으니, 또한 더욱 하기 어려웠던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지금도 두 분 공을 생각하노라면, 그때마다 맑은 바람이 삽상하게 좌우(左右)에서
일어나는 것을 느끼곤 한다.
공의 고자(孤子)인 생원(生員) 이후징(李厚徵)이 공의 묘갈(墓碣)을 써 달라고
나에게 요청하였는데, 내가 글솜씨가 졸렬하고 명위(名位)가 무너져서 감히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이유로, 누차 요청했는데도 누차 사양한 것이 지금 거의 10년이나 되었다.
그러다가 경자년(1660, 현종1) 여름에 내가 삼수(三水)에 유배되었을 적에,
이 상사(李上舍)가 글을 보내 간절히 요청하는 한편 또 가승(家乘)을 보냈기에,
내가 사양할 수 없어서 무릎을 꿇고 그 가승을 살펴보게 되었다.
공의 성은 이(李)이다. 휘(諱)는 필행(必行)이고, 자(字)는 이원(而遠)이고,
호(號)는 천미(天微)이며, 계보(系譜)는 광주(廣州)에서 나왔다.
공의 고조(高祖)는 증(贈)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
행 홍문관부수찬(行弘文館副修撰)으로 휘(諱)가 수정(守貞)이다.
증조(曾祖)는 의정부 영의정으로 시호(諡號)가 충정(忠正)이고
호(號)가 동고(東皐)인 휘(諱) 준경(浚慶)이다. 그는 학문, 덕행, 문장(文章),
사업(事業)이 만대토록 군자의 모범이 될 만하여, 내가 평생토록 높이
앙모(仰慕)하는 분이기에 여기에 첨가하여 기록하게 되었다. 조부는
증(贈) 이조 참의(吏曹參議) 행 광흥창 수(行廣興倉守) 휘 예열(禮悅)이다.
부친은 증(贈)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행 예빈시 정(行禮賓寺正)
휘 사수(士修)이다. 모친은 증(贈) 정경부인(貞敬夫人) 김씨(金氏)이니,
풍산(豐山)의 망족(望族)인 문적(文迪)의 후손이요, 종친부 전첨(宗親府典籤)
휘 선(銑)의 딸이다. 모친의 조부 휘 순정(順貞)은 관직이 부정(副正)이요,
증조 휘 양진(楊震)은 관직이 참판(參判)이다.
광주 이씨가 흥한 것은 대개 둔촌(遁村)으로부터 비롯된다. 둔촌은 휘(諱)가
집(集)으로, 고려 말기에 등제(登第)하여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지냈으며,
학문과 지절(志節)로 세상에 이름이 있었고, 목은(牧隱)ㆍ포은(圃隱)ㆍ
도은(陶隱) 등 삼은(三隱)과 가장 친하게 지내며 서로 추중(推重)하였다.
적승(賊僧) 신돈(辛旽)의 미움을 받아 화(禍)가 장차 자기에게 미치려 하자
부친을 등에 업고 피난했다가 신돈이 복주(伏誅)되자 다시 나와서 호(號)를
그대로 둔촌이라고 하였다.
둔촌은 아들 셋을 낳았는데, 모두 등제하였다. 장남은 휘(諱)가 지직(之直)이니,
소도(昭悼)의 변(變)에 고마(叩馬)하였으므로 공정대왕(恭定大王)에게 견책을
받아 광릉(廣陵)의 촌사(村舍)에 물러나 거하였다. 태종(太宗)이 말년에 동궁(東宮)에게
당부하기를 “이모(李某)를 버리면 안 되니, 너는 그를 거두어 쓰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이에 세종(世宗)이 즉위하여 곧바로 그를 불러 형조 우참의(刑曹右參議)와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에 임명하였으나 미처 조정에 돌아오기 전에 집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청백리(淸白吏)에 뽑히기도 하였다.
참의(參議)의 세 아들도 모두 등제하였는데, 차남인 휘 인손(仁孫)은 우의정(右議政)으로
시호(諡號)가 충희(忠僖)였으며, 숙덕(宿德)과 중망(重望)이 있었다. 충희의 다섯 아들도
모두 등제하여 대관(大官)에 이르렀다. 휘 극감(克堪)은 차남이니, 문장(文章)과
재행(才行)이 한세상에 으뜸이었다. 관직은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으며,
좌익 공신(佐翼功臣)으로 광성군(廣城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문경의 세 아들도 모두 등제하였다. 휘 세좌(世佐)는 그의 장남이니,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광양군(廣陽君)을 습봉(襲封)하였다.
이분이 바로 공의 오세조(五世祖)이다.
공은 만력(萬曆) 기축년(1589, 선조22) 7월 28일에 경성의 저택에서 태어났다.
공은 어려서부터 기도(氣度)가 범상치 않아서 찬성(贊成) 부군(府君)과 정경부인(貞敬夫人)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그리고 공을 교도(敎導)할 때에는 반드시 《소학(小學)》을
기준으로 삼았는데, 이는 바로 동고(東皐) 상공(相公)의 가법(家法)이었다. 공은 바로
그 가법을 어김없이 그대로 이어받았다.
정미년(1607, 선조40)에 백씨(伯氏)인 교리공(校理公)의 상(喪)을 당하여 너무 슬퍼한
나머지 병을 얻어 거의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 갑인년(1614, 광해군6)에
대부인(大夫人 모친)의 병세가 위독해지자, 공이 허벅다리 살을 베고 피를 뽑아서
약에 섞어 올렸으나 끝내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는데, 매양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키지
못했다면서 애통해하였다. 이상 두 가지 일이 도리에 맞는 일이 아니기는 하지만,
공의 효우(孝友)의 정성이 흉중에 가득해서 도리를 정밀하게 살필 겨를이 없었던 것을
귀하게 여긴 까닭에 여기에다 기록하였다.
천계(天啓) 신유년(1621, 광해군13)에 공이 석갈(釋褐 과거 급제)을 하였는데,
이때는 바로 광해조(光海朝)였다. 그런데 당시에 권귀(權貴)의 자제 중에 또한
등제한 자가 있었는데, 그의 부형(父兄)이 바야흐로 상중(喪中)에 있었기
때문에 뒤로 미루다가 3년이 되도록 방방(放榜 합격 발표)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계해년(1623, 인조1)에 인조(仁祖)가 반정(反正)하고 나서 다시
복시(覆試)와 전시(殿試)를 치르고는 승문원(承文院)에 소속되었다.
그해 10월에 외간(外艱 부친상)을 당하였다. 그때 시골 농장에 우거하다가
중도(中道)에서 부음을 들었으므로 종신토록 비통하게 여기고는 전후의
상례(喪禮)를 집행할 적에 모두 정례(情禮)를 극진히 한 나머지 슬픔으로 몸을
해쳐서 거의 지탱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을축년(1625)에 상복(喪服)을 벗었다.
병인년(1626)에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에 임명되었고, 겨울에 저작(著作)으로 승진하였다.
정묘년(1627) 1월에 호란(胡亂)이 일어났다. 이때 경기(京畿)의 농장에 있다가
변란의 소식을 듣고는 곧바로 강도(江都)로 달려가서 호가(扈駕)하였다. 2월에
박사(博士)로 자리를 옮겼다가, 대가(大駕)가 환도(還都)하자 즉시 병으로 사퇴하고
돌아왔다. 숭정(崇禎) 무진년(1628)에 또 박사를 제수받고, 성균관 전적
(成均館典籍)에 올랐으며,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로 옮겼다.
기사년(1629)에 예조 좌랑(禮曹佐郞)으로 옮겼다가 얼마 뒤에 파직되었다.
신미년(1631)에 병조 좌랑(兵曹佐郞)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뒤에 해임되었으며,
7월에 형조 좌랑(刑曹佐郞)에 임명되었다가 10월에 다시 기조(騎曹 병조)에 들어갔다.
임신년(1632) 1월에 경성 판관(鏡城判官)으로 나갔다가 7월에 무슨 일 때문에 그만두었다.
계유년(1633, 인조11) 4월에 남조(南曹 예조)의 좌랑(佐郞)이 되었다가, 5월에
추부(秋部 형조)의 정랑(正郞)으로 옮겼다. 그해 7월에 보성 군수(寶城郡守)로
나갔다가, 갑술년(1634) 봄에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왔으며, 그해 겨울에 경상도
도사(慶尙道都事)에 임명되었으나, 을해년(1635) 여름에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왔다.
그해 겨울에 대동 찰방(大同察訪)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였으며,
또 형조 정랑(刑曹正郞)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병으로 체직(遞職)되었다.
병자년(1636) 6월에 통례원 상례(通禮院相禮)에 임명되었으나 9월에 병으로 체직되어
여주(驪州)의 장사(莊舍)에 우거(寓居)하였다. 12월 인열왕후(仁烈王后)의 소상(小祥)
때에 궐문(闕門)에서 회곡(會哭)하고는, 그날 바로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그 길로
청주(淸州)에 가서 종모(從母)의 장례에 참석하였다.
그달 15일 밤에 청병(淸兵)이 국경을 침범했다는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
여장(驪莊 여주의 농가)에 도착한 뒤에, 대가(大駕)가 남한산성(南漢山城)에
행행(幸行)했다는 말을 듣고는 곧장 남한산성으로 들어가서 호종(扈從)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천(利川)까지 갔을 때 적병(賊兵)에게 길이 막히자,
강원(江原)의 방백(方伯) 조정호(趙廷虎)가 원주(原州)에 있다는 말을 듣고는
행재소(行在所)의 소식을 들어 보려고 곧장 한 명의 동자와 한 필의 말로 그곳을 향해
가다가, 전임 판서(判書) 이현영(李顯英)이 지평(砥平)에서 의병을 모집한다는
말을 듣고는 곧장 가서 그를 따랐다.
정축년(1637) 1월 20일이 지나 춘천(春川) 지역에 이르렀으나 적병의 핍박을 받고
간신히 산으로 올라가서는 5일 동안 눈 속에서 묵었다. 추위와 굶주림으로 거의
죽을 임시에 홀연히 눈 위에 찍힌 사람 발자국을 보고는 그 발자국을 따라가서
사람을 만나 들어 보니, 수십 리 밖에 촌락이 있다고 하기에 마침내 그곳으로 갔는데,
그곳은 바로 양양(襄陽) 땅이었다.
거기에서 방향을 바꿔 강릉(江陵)에 가서 중씨(仲氏) 일행을 만났다. 대개 참찬공(參贊公)이
가도(椵島)의 심 도독(沈都督 심세괴(沈世魁))을 접반(接伴)하는 임무에서 교체되어
환조(還朝)하는 중로(中路)에 난을 만나 전전(輾轉)하다가 여기까지 온 것인데, 공이
이렇게 해서 만난 것 또한 천운(天運)이었다.
또 방향을 돌려 서쪽으로 가서 정선군(旌善郡)에 이르렀을 때 상이 산성을 나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이때가 숭정(崇禎) 10년 정축년(1637, 인조15) 2월 초이레였다. 즉시
궐문(闕門)에 나아가 관수(官守)에게 분문(奔問)하고 나서, 예천(醴泉)으로 가속(家屬)을
찾아갔다가 병이 들어 곧장 북쪽으로 돌아오지 못하였다. 그해 3월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소명(召命)에 응하지 못하였으며,
여름에 비로소 여장(驪莊)으로 돌아와서 마침내 노년을 여기에서 마칠 계책을 세웠다.
그 사이에 예조 정랑(禮曹正郞), 군기시 정(軍器寺正), 봉상시 정(奉常寺正) 등의 임명을
받았고,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의 소명(召命)을 받았으나 모두 병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11월에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의 명을 받고는, 명나라 신종황제(神宗皇帝)의 은덕을
잊을 수 없다는 뜻을 진달하려 하였다. 그런데 소(疏)를 이미 작성해 놓고는 둔괘(遯卦)를
만나 실제로 올리지 못하였는데, 공의 본의(本意)는 그러하였다.
마침내 질병이 고질화되어 더 이상 세상에 나갈 수가 없었으므로 소장을 올려 사직하였다.
그 뒤에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校)와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임명되었고, 사간(司諫)에
네 차례, 집의(執義)에 한 차례,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에 두 차례 부름을 받았으나
모두 일어나지 못하였다.
을유년(1645, 인조23) 1월에 병에 걸려 2월 초사흘에 여주(驪州)의 장사(莊舍)에서 숨을 거두니,
향년 58세였다. 그해 10월에 양근군(楊根郡) 치소(治所)의 북쪽인 미원현(迷源縣) 울업산(蔚業山)
무돈곡(茂敦谷)의 간방(艮方 동북방)을 등지고 곤방(坤方 서남방)을 향한 언덕에 장사 지내었다.
공은 두 번 외직(外職)에 임명되어 지극히 간소하고 절약하는 데에 힘썼으나, 구례(舊例)의
봉름(俸廩)에 대해서는 반찬 하나와 같은 사소한 것이라도 결코 감손(減損)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나 자신을 높이려고 받는 것이 아니요, 바로 예로부터 내려오는 규례이니,
어찌 나로부터 감해져서 공가(公家)의 체면을 손상시켜서야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경내(境內)에 떠돌다가 우거(寓居)한 사람이나 친지(親知)와 고구(故舊)가 왕래하는
경우에도 마음을 다하여 주휼(賙恤)하며 말하기를 “나 자신이 탐비(貪鄙)하지 않으면
그만이지, 어찌 차마 인정에 벗어나는 일을 하여 이름을 낚으려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매달 반드시 사람을 지정하여 종모(從母)와 중씨(仲氏)를 문후(問候)하는 일을
전담케 하며 말하기를 “나는 어버이를 봉양할 겨를이 없었는데, 지금 오직 종모 한 분과
형님 두 분이 계실 뿐이니, 어찌 하인이 수고하는 것을 꺼려서 나의 정리(情理)를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또 일찍이 자제에게 말하기를 “나는 범
문정공(范文正公)이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을 때에 여러 아들에게 고한 말을 항상
생각하고 있다. 비록 관직에 거하는 때라고 할지라도, 차마 너희들로 하여금 풍족한
생활을 누리게 하지는 못하겠다.”라고 하였다. 말년에 천미거사(天微居士)라고
자호(自號)하고는, 날마다 약초를 심고 글을 읽는 것을 낙으로 삼으면서도,
《소학(小學)》 한 책은 항상 책상 위에 두었으니, 이는 또한 동고(東皐) 상공(相公)의
유풍(遺風)이었다.
공의 배필인 숙인(淑人) 윤씨(尹氏)는 파평(坡平)의 대족(大族)으로, 고려의 개국 공신인
휘(諱) 신달(莘達)의 후손이다. 증조(曾祖)는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인 휘 개(漑)요,
조부는 생원(生員)에 장원(狀元)을 한 휘 비(棐)요, 부친은 증(贈) 이조 참판(吏曹參判)
행 승정원 도승지(行承政院都承旨)인 휘 담무(覃茂)이다. 모친은 정부인(貞夫人)
전주 유씨(全州柳氏)로, 증(贈)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행 회양 부사(行淮陽府使)
휘 연(埏)의 딸이다. 숙인은 만력(萬曆) 무자년(1588, 선조21) 7월 11일에 태어나
숭정(崇禎) 경오년(1630, 인조8) 7월 27일에 죽으니, 향년 43세였다.
숙인은 성품이 자인(慈仁)하고 단숙(端淑)하여 군자를 섬김에 어기는 일이 없었고,
재용(財用)을 절제함에 방도가 있었으며, 비록 몸에 병이 들어도 방적(紡績)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처음에 괴산(槐山) 땅에 장사 지냈다가, 을유년(1645) 10월에 이장하여
부군(府君)과 같은 묘지에 묻혔다.
공은 2남 1녀를 낳았다. 장남 명징(明徵)은 부사(府使) 정기숭(鄭基崇)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일찍 죽었다. 딸은 참봉(參奉) 이사량(李四亮)에게 출가하였다. 차남 후징(厚徵)은
생원(生員)으로, 사인(士人) 송휘길(宋暉吉)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측실(側室)의 소생으로
3남 1녀가 있다. 그 이름은 하징(下徵)과 종징(從徵)과 서징(庶徵)인데, 아직 모두 결혼하지 않았다.
이사량은 2남 2녀를 낳았다. 장남 이화봉(李華封)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관직이
병조 좌랑(兵曹佐郞)에 이르렀으나 일찍 죽고 후사가 없다. 다음 이만봉(李萬封)은
진사(進士)로, 전적(典籍) 조익구(趙益久)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장녀는
사인 윤이후(尹爾厚)에게 출가하였다. 다음은 어리다. 후징(厚徵)은 4남 2녀를 낳았다.
장남은 이름이 학만(學晩)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팔란과 육비는 / 八鑾六轡
말이 꾀하는 것이 아니요 / 非馬之謀
희준과 청황은 / 犧樽靑黃
나무가 구함이 아니라네 / 非木之求
공이 스스로 폐하였거니 / 公之自廢
이것이 어찌 공의 수치리오 / 豈公之羞
그 누가 말하는가 시운일 뿐이니 / 誰謂時運
사람을 탓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 人不可尤
시운이 하늘의 일이라 할지라도 / 時運雖天
하늘도 사람을 따르는 것이라오 / 天亦人由
몸은 험난해도 도는 형통하고 / 身坎道亨
사람은 떠나도 이름은 남았나니 / 人去名留
그 인이 독선을 했을지라도 / 仁雖獨善
천추토록 일깨울 수 있으리라 / 可警千秋
양심이 땅에 떨어지지 않은 것도 / 秉彝不墜
공의 아름다운 덕에 힘입었나니 / 賴公之休
관중이 세운 공 따위야 / 管仲之功
어찌 감히 여기에 끼이리오 / 其敢與儔
............
尹某與李公而遠。年相若而居相竝。學則同而志則一。自少最相親也。學識則公猥推我。
德行則我實畏公。蓋公天資純粹。器局峻整。以淸約自守。而不爲修飾矯激之態。
悖慢之行絶於身。孝友之性出於天。其嚴毅方正。壁立千仞。頗有東皐相公之遺風。
及登仕路。一以廉謹爲心。罕出入絶交遊。口不出名利之言。足不蹈權勢之門。遂爲世忌。
宦途蹭蹬。而公非但不以介懷。素無仕進之念。以故內外之官未嘗久居位。自丙子變後。
屢召不起。竟卒于家。嗚呼。爵祿之辭。自古所難。況末世乎。以我所見。
則癸丑之後不仕者惟金公坽。丙子之後不仕者惟我李公。然金公非艱食之人也。李公屢空。
有時饘粥不繼。擣松皮爲糧。而猶能晏如。不復祿仕。不亦尤難。余至今想見二公。
每覺淸風颯爽於左右也。公之孤生員厚徵請余爲公之墓碣。余以文拙名頹不敢承當。
屢請屢辭今幾十年矣。庚子夏。余謫三水。李上舍抵書以懇。又送家乘。某不獲辭。
跽考其家乘。公姓李。諱必行。字而遠。號天微。系出廣州。
公高祖贈議政府領議政行弘文館副修撰諱守貞。曾祖議政府領議政諡忠正。號東皐。諱浚慶。
其學問德行文章事業。可爲萬代君子之模範。是某平生所景仰。故爲之添記。
祖贈吏曹參議行廣興倉守諱禮悅。考贈議政府左贊成。行禮賓寺正諱士修。妣贈貞敬夫人金氏。
豐山望族文迪之後。宗親府典籤諱銑之女。祖諱順貞。官副正。曾祖諱楊震。官參判。廣李之興。
蓋自遁村。遁村諱集。麗季登第。判典校寺事。以學問志節名于世。最善牧,圃,陶三隱相推重。
忤賊僧辛旽。禍將及己。負父逃難。旽誅乃出。仍號遁村。遁村生三子。俱登第。其長諱之直。
叩馬於昭悼之變。被譴于恭定大王。退居廣陵村舍。太宗末年。屬東宮曰。李某不可棄。
汝其收用。世宗踐阼。卽召拜刑曹右參議,寶文閣直提學。未及還朝而卒于家。被淸白選。
參議三子。俱登第。其次諱仁孫。右議政。諡忠僖。有宿德重望。忠僖五子。俱登第至大官。
諱克堪其次也。文章才行冠絶一世。官至刑曹判書。以佐翼功封廣城君。諡文景。文景三子。
俱登第。諱世佐其長也。判中樞府事。襲封廣陽君。卽公之五世祖也。
公以萬曆己丑七月二十八日生於京第。公自在孩提。氣度不凡。贊成府君及貞敬夫人鍾愛。
而其敎導必以小學爲準。是東皐相公家法也。公乃奉承無違。丁未。遭伯氏校理公之喪。
哀戚成疾。幾至危域。甲寅。大夫人疾革。公割股出血和藥以進。而終未取效。
每以誠不格天爲痛。右二事非中道。而貴公孝友之誠爲主於胸中。而不暇精察於理。故錄之。
天啓辛酉。公釋褐。卽光海朝也。時權貴子弟亦有登是第者。而其父兄方在喪中。故爲遷退。
以至三年不放榜矣。癸亥仁祖反正。更爲覆試,殿試。屬承文院。其年十月。丁外艱。時寓鄕莊。
中道聞訃。以爲終身之痛。前後執喪。皆盡情禮。毀戚幾不能支。乙丑服闋。丙寅。
拜承文院正字。冬陞著作。丁卯正月有胡亂。時在畿莊。聞變卽馳。扈駕于江都。二月。
遷博士。及大駕還都。卽謝病而歸。崇禎戊辰。又授博士。陞成均館典籍。移司憲府監察。
己巳。遷禮曹佐郞。未幾而罷。辛未。拜兵曹佐郞。未久而解。七月。拜刑曹佐郞。十月。
復入騎曹。壬申正月。遷鏡城判官。七月。因事投紱。癸酉四月。爲南曹佐郞。五月。
移秋部正郞。七月。出寶城郡守。甲戌春。以病謝歸。冬拜慶尙道都事。乙亥夏。辭疾而歸。
其冬。除大同察訪。病未赴。又拜刑曹正郞。亦以病遞。丙子六月。拜通禮院相禮。
九月病遞。寓居驪州莊舍。十二月。會哭仁烈王后小祥于闕門。卽日還鄕。仍往淸州。
會從母葬。其月十五日夜。聞淸兵犯境。馳到驪莊。聞大駕幸南漢山城。卽向南漢。
爲入扈計。行到利川。阻於賊兵。聞江原方伯趙廷虎在原州。欲知行在所消息。
卽以單童匹馬赴之。聞前判書李顯英募義於砥平地。卽往從之。丁丑正月念後到春川地。
爲賊所逼。僅得上山。五日雪宿。凍餒將死。忽見雪上人跡。尋跡而行。逢人聞數十里外有村落。
遂往焉。乃襄陽地也。轉至江陵。遇仲氏之行。蓋參贊公遞椵島沈都督接伴之任。還朝中路遇亂。
輾轉至此。公乃遇之。亦天也。又轉而西。至旌善郡。聞上出城。時崇禎十年丁丑二月初七日也。
卽奔問官守於闕門。仍訪家屬於醴泉。有疾未卽北還。三月。拜司憲府掌令。病未赴召。
夏始還驪莊。遂爲終老之計。其間有禮曹正郞軍器寺正,奉常寺正之拜。司憲府掌令之召。
皆病未赴。十一月。有司諫院司諫之命。欲陳神宗皇帝恩德不可忘之意。疏旣成。遇遯不果上。
而公之本意則然也。遂以疾病已痼。無復行世。上章辭之。其後拜承文院判校司僕寺正。
四以司諫。一以執義。再以弘文應敎被召。而幷不起。乙酉正月感疾。二月初三日。
卒于驪州莊舍。享年五十八。冬十月。葬于楊根郡治北迷源縣蔚業山茂敦谷背艮向坤之原。
公兩授外職。務極簡約。而至於舊例之俸則雖一饌之微。絶不減損曰。此非吾自崇之奉。
乃自古流來之規。豈可自吾而減。以損公家體面乎。境內流寓人及親舊往來者。極意賙恤曰。
吾自不爲貪鄙而已。豈忍爲情外之事以釣名乎。每月必專人問候於從母及仲氏曰。吾養不及親。
惟有一從母兩兄在耳。寧憚下人之勞。不盡吾情事耶。嘗語子曰。
吾每念范文正公爲參知政事時告諸子之言。雖當居官之時。不忍使汝享豐美之奉也。
末年自號天微居士。日以種藥讀書爲娛。而小學一部嘗在案上。是亦東皐相公遺風也。
配淑人尹氏。坡平大族。麗代開國功臣諱莘達之後。曾祖議政府左議政諱漑。
祖生員狀元諱棐。考贈吏曹參判行承政院都承旨諱覃茂。妣貞夫人全州柳氏。
贈議政府左贊成行淮陽府使諱埏之女也。萬曆戊子七月十一日生。崇禎庚午七月二十七日卒。
享年四十三。性慈仁端淑。事君子無違。制財用有方。雖疾病在身。紡績不離於手。
初葬于槐山地。乙酉十月。遷柩與府君同兆焉。生二子一女。男長明徵。娶府使鄭基崇女。
早夭。女適參奉李四亮。男次厚徵。生員。娶士人宋暉吉女。側室有三子一女。曰下徵。
曰從徵。曰庶徵。竝未婚嫁。李四亮生二男二女。長華封。登文科兵曹佐郞。早世無後。
次萬封。進士。娶典籍趙益久女。女長適士人尹爾厚。次幼。厚徵生四男二女。長曰學晩。
餘幼。銘曰。
八鑾六轡。非馬之謀。犧樽靑黃。非木之求。公之自廢。豈公之羞。誰謂時運。人不可尤。
時運雖天。天亦人由。身坎道亨。人去名留。仁雖獨善。可警千秋。秉彝不墜。賴公之休。
管仲之功。其敢與儔。
[주-D001] 소도(昭悼)의 변(變) : 1차 왕자(王子)의 난을 말한다. 소도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여덟 째 왕자인 이방석(李芳碩)의 시호(諡號)이다.
1392년(태조 원년)에 정도전(鄭道傳) 등의 추대로 세자(世子)에 책봉되었으나,
1398년 1차 왕자의 난으로 이방번(李芳蕃)과 함께 이방원(李芳遠) 일파에게 살해되었다.
이방원은 태종(太宗)의 이름이고, 공정(恭定)은 태종의 시호(諡號)이다.[주-D002]
고마(叩馬) : 말고삐를 붙잡고 말린다는 뜻으로, 충언(忠言)하며 직간(直諫)하는 것을 말한다.
주 무왕(周武王)이 “동쪽으로 주왕(紂王)을 정벌할 적에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말고삐를 붙잡고 간했다.〔東伐紂 伯夷叔齊叩馬而諫〕”라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史記 卷61 伯夷列傳》[주-D003] 분문(奔問) : 난리를 당한 임금에게 달려가서
문후(問候)하는 것을 말한다. 주(周)나라 양왕(襄王)이 난리를 피해 정(鄭)나라 시골
마을인 범(氾)에 머물면서 노(魯)나라에 그 사실을 알리자, 장문중(臧文仲)이
“천자께서 도성 밖의 땅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계시니, 어찌 감히 달려가서
관수(官守)에게 문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天子蒙塵于外 敢不奔問官守〕”라고
대답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春秋左氏傳 僖公24年》 관수는 왕을 좌우에서
모시는 신하들을 가리키는데, 지존(至尊)인 천왕(天王)을 직접 거론할 수 없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주-D004] 둔괘(遯卦)를 만나 : 상소문을 다 써 놓은 뒤에
무슨 불가피한 사정이 생겨서 올리지 못할 때에 쓰는 표현이다. 송(宋)나라
영종(寧宗) 1년(1195) 5월에 주희(朱熹)가 한탁주(韓侂冑)의 간악한 정상을 논하는
장문(長文)의 봉사(封事)를 올리려고 하자, 자제와 문인들이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여
만류하였으나 주희가 듣지 않다가, 채원정(蔡元定)의 건의에 따라 점을 친 결과,
“둔지가인(遯之家人)을 얻어 둔미호둔(遯尾好遯)의 점사(占辭)가 되었으므로
마침내 그 초고를 곧바로 불태웠다.〔得遯之家人 爲遯尾好遯之占 遂亟焚藳〕”라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晦菴集 別集 卷1 劉德脩》 《朱子大全 附錄 卷6 年譜》
둔지가인 운운은, 천산둔(天山遯)의 괘에서 초육(初六)의 음효(陰爻)와 구사(九四)의
양효(陽爻)가 각각 양효와 음효로 변하여 풍화가인(風火佳人)의 괘가 되었으므로,
변효(變爻)가 두 개 생겼을 때의 점치는 법에 따라, 둔괘 초육의 ‘둔미(遯尾)’와
구사의 ‘호둔(好遯)’의 점사가 되었다는 말이다. 둔미는 둔의 꼬리와 같은 격이라서
위태로우니 가는 바가 있게 하지 말고 가만히 숨어 있는 것이 좋다는 뜻이고,
호둔은 구사가 초육과 응하여 좋아하지만 과감히 떼어 버리고 숨어야 한다는
것으로서 군자는 길하고 소인은 나쁘다는 뜻이 들어 있다.
[주-D005] 범 문정공(范文正公)이 …… 말 : 문정(文正)은 송나라
범중엄(范仲淹)의 시호(諡號)이다. 그가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을 적에
여러 아들을 불러 놓고는 “내가 가난할 때에 너희 어머니와 함께 우리
어버이를 봉양하였는데, 너희 어머니가 몸소 불을 때어 밥을 지었어도, 우리 어버이는 달고 맛있는 음식을 충분히 드신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후한 녹봉을 받고서, 어버이를 봉양하고자 하나 어버이가 계시지 않고, 너희 어머니 또한 일찍 세상을 떠났으니, 이것이 바로 내가 가장 한스럽게 여기는 점이다. 그러니 어떻게 차마 너희들로 하여금 부귀의 즐거움을 누리게 할 수 있겠느냐.
〔吾貧時 與汝母養吾親 汝母躬執爨 而吾親甘旨未嘗充也 今而得厚祿 欲以養親 親不在矣
汝母亦已早世 吾所最恨者 忍令若曹 享富貴之樂也〕”라고 말한
고사가 《소학집주(小學集註)》
〈가언(嘉言)〉에 나온다.
[주-D006] 팔란(八鑾)과 …… 아니요 :
말은 자유롭게 살고자 할 뿐이요, 인간의 손에 이끌려서
구애받는 삶을 살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팔란은 네 필의 말 머리에 매단 여덟 개의 방울이라는 뜻으로,
보통 천자의 거가(車駕)를 가리킨다. 육비(六轡)는 여섯 개의
고삐라는 말인데, 말 네 필의 여덟 개의 고삐 중에서 양편 참마(驂馬)의
두 고삐는 식(軾)의 고리〔觖〕 속에 넣고 손에는 여섯 개의 고삐만 쥐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시경》 〈사철(駟驖)〉에 “검붉은 네 필의 말 통통하게 살졌나니, 여섯 개의 고삐를 손 안에 쥐었도다.〔駟驖孔阜 六轡在手〕”라는 말이 나온다. 또 소식(蘇軾)의 시에 “팔란과 육비는 말이 꾀하는 것이 아니거니, 예로부터 서쪽 산과 동쪽 구릉에 살았다오.〔八鑾六轡非馬謀 古來西山與東邱〕”라는 말이 나온다. 《蘇東坡詩集 卷44 韋偃牧馬圖》
[주-D007] 희준(犧樽)과 …… 아니라네 :
나무도 자기의 본성을 온전히 보전하고 싶어 할 뿐, 인간에 의해
좌우되는 일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장자(莊子)》
〈천지(天地)〉에 “백 년 된 나무를 깎아서 술 그릇〔犧樽〕을 만들고 거기에 청황(靑黃)으로 꾸민 다음, 나머지 토막들은 구덩이 속에 내버리는데, 술 그릇과 그 토막들이 미추(美醜)의 차이는 있다 해도, 본성(本性)을 잃은 점에서는 똑같다고 해야 할 것이다.”라는 말이 나온다.[주-D008] 독선(獨善) : 자기 몸 하나만 선하게 하는 것으로 그쳤다는 말이다. 《맹자》 〈진심 상(盡心上)〉의 “곤궁할 때에는 홀로 자기 몸을 선하게 하고, 뜻을 얻으면 천하 사람들과 그 선을 함께한다.〔窮則獨善其身 達則兼善天下〕”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주-D009] 관중(管仲)이 세운 공 : 어떤 사람이 증자(曾子)의 아들 증서(曾西)에게 관중과 비교해서 누가 더 훌륭하냐고 묻자, 대뜸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당신이 어떻게 나를 관중 따위에 견주는가.
〔爾何曾比予於管仲〕”라고 대답하고는,
그의 패도정치(霸道政治)를 낱낱이 비판한 내용이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나온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2015
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 樂民(장달수)
주 4 광이세적 (1998.06.30 광이대종회)
주5 보초별보, 이의만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