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르모 여행3 - 아랍풍의 노르만 성당을 거쳐 프레토리아 광장에서 예쁜 분수를 보다!
김국진 글
5월 14일 아침에 시칠아의 주도 팔레르모 시내에 있는 Hotel Alessandra 에서 일어나
호텔에서 주는 간단한 아침식사를 한다.
오늘 팔레르모 시내 와 몬레알레 그리고 교외에 조선인 마을 콜레오네 를 보고는...
내일 아침에 우린 기차로 메시나를 거쳐
시칠리아 동남부에 시라쿠사 가는 새벽 기차를 타야하므로 내일 식권 값을 반환받는다.
여자분들은 일단 우리와 헤어져 트라파니 공항으로 가서 몰타 가는 비행기를 타야하므로
기차 시간이 있어 아침은 먹는다기에 우리 부부만 취소한 것이다!
오늘 아침은 갓 구운 패스트리 빵 이 너무나도 맛있어 탐이 나는 데....
울 마눌은 1인당 한 개씩이란다!
너무나도 아쉬운 데.... 조금후에 보니 계속 구워서 나오기에 모첨럼 실컷 먹는다.
출발시간에 여자분들이 방에서 나오지 않고 꾸물거리며 늦기로....
( 나중에 보니 우리에게서 빌려간 휴대용 전기 남비로 밥을 해서는 김밥 을 말고 있었나 보네? )
오늘은 시내의 왕궁이며 몬레알레 교회의 입장 시간 이 있으므로.....
조선인 후예 들이 개척한 마을이자 미국 마피아 알 카포네의 고향인 콜레오네 Corleone 가는 것은 오후로 미룬다.
호텔을 나와 어제 밤 처럼 마퀘다 거리 Via Maqueda 를 계속 걸어서
프레토리아 광장 Piazza Pretoria 에 못미쳐
2개의 성당을 보는데 우선 먼저 보이는게 산 카탈도 교회 이다.
12세기에 아랍-노르만 양식 으로 건축되었으며 예수님이 새겨진 아치형 홀은
메카를 나타내는 미흐랍 처럼 보이고 아랍식으로 무수히 많은 작은 창을 내었다고 한다.
하지만 입장료를 받기로 바로 옆에 있는12세기에 노르만 양식 으로 세워졌다는
라 마르토라나 La Martorana 성당으로 먼저 들어가니 그리 큰 교화는 아니지만 내부장식이 아름답다.
특히 천장 기둥이 겹치는데다가.... 바닥이며 내부에 비잔틴 양식의 모자이크가 볼만한 데,
종탑 아래의 바로크 양식은 16세기에 덧붙여진 것이란다.
이런저런 장식들이 너무나도 예뻐서 한참 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는 데....
독실한 천주교도인 정숙씨는 그새 신부님과 기념 촬영을 하길래 팔레르모의 역사 를 생각해 본다.
이 도시 팔레르모 Palermo 는 비옥한 평야를 배후로 둔 시칠리아 최대의 도시로
BC 8세기경 페니키아 식민도시로 출발해 카르타고 의 지배를 받는다.
이후 BC 3세기에 로마 가 메시나에 상륙해서는 서진하여 카르타고 군을 물리치고
이 도시 팔레르모를 차지하니....
카르타고의 용장으로 한니발의 아버지 하밀카르 가 도시를 회복하려고 공격하기도 한다.
이후 로마에 속해 평화를 누리다가 비잔틴의 지배를 거쳐 9세기에
이슬람 사라센(아랍) 인들이 침략하여 시칠리아 주도로 삼으면서 200여년간 번창한다.
그 때문일러나? 괴테는 이 도시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슬람 도시" 라고 불렀던가?
그후 11세기에 노르만왕 로제르 에게 정복되어 시칠리아 왕국이 건설되자 수도가 된다.
그러니까 남부 이탈리아를 비잔틴으로 부터 해방시킨 로베르토가 시칠리아를 점령한후
시칠리아를 동생 루제로 1세에게 맡겼는 데,
세월이 흘러서는 그 아들 루제로 2세가 1,130년에 시칠리아 왕위 에 올랐던 것이다.
이들 노르만 왕들은 성격 탓인지 아님 워낙 소수의 병사로 200여년 이상이나 아랍인이 통치하던
시칠리아를 정복한탓에 기반이 약햇던지 이슬람인들의 잔류와 종교 및 문화를 인정해 준다.
이후 신성로마 황제 로타르가 시칠리아를 침략하지만 루제르의 후손인
굴리엘모 1,2세와 서자 탄크레디는 힘겹게 방어하다가...
결국 시칠리아 왕국은 신성 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 에게 접수되었던 것이다.
그전에 시칠리아 노르만 왕실의 공주 콘스탄츠가 저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에게 시집가서....
태어난 아들 프리드리히 2세 시대에는 유럽의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후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가 되어 6차 십자군을 이끌고 오리엔트로 가서는
이집트와 평화조약을 맺는 일로 로마 교황청으로 부터 파문 을 당하는 인물이다.
그전인 5차 십자군에서 이집트 다미에타 공략에 성공하고 이슬람 술탄과 평화협정으로
예루살렘 양도 를 받을수 있었지만 거부 했던 것이라!
로마교황청은 예루살렘은 이교도의 피를흘려 정화해서 얻어야지 평화적으로 얻는것은 무의미하다고 본 것이네?
그는 시칠리아 노르만왕국의 공주가 독일 신성로마제국 황제에게 시집을 가서 태어난 아들이지만
어릴때 부모를 잃고 여기 팔레르모에서 성장하며 아랍어와 문화 를 익혔다.
그의 아들 치세인 1,266년에는 프랑스 앙주 백작 샤를 1세에게 침략당해 망하는 데,
민중들의 반란이 일어나자 스페인 아라곤왕 페드로 3세가 시칠리아를 정복한다.
이후 사보이· 부르봉등 외래 왕조의 지배가 뒤따랐는데 1860년 가리발디에게 점령되면서
통일 이탈리아가 되었으며 오늘날에도 노르만-아랍풍 건축 양식 을 찾아볼 수 있다.
교회 안내원인 바르바라 리초 씨는.....
“우리는 이탈리아인 이전에 시칠리아인 이기에 모든 종교와 문화를 열린 마음으로 포용한다" 고 자랑하네?
성당을 나오니 큰 건물은 아마도 시청사 Municipio 인 모양이고.....
돌아서 앞쪽으로 가니 거기 프레토리아 광장 Piazza Pretoria 에 큰 분수가 있는 데!!!
남녀 나체 조각들이 어찌나 사실적인지 입을 다물수가 없네?
중세 가톡릭이 위세를 떨치던 시절에는 저런 특히나 여자들의 나체 조각 들은 만들 수 없었을테니....
그럼 근대화 된 이후 바로크 시대의 산물 일러나?
여행 가이드 북을 보니 16세기에 만들어졋졌니 그럼 바로크시대 이전인 르네상스 시대 인 데???
분수는 16세기 당시에 르네상스를 주도하던 멀리 피렌체의 조각가 카밀리아니를 초빙해 만든 것으로
그 섬세함이나 화려함이 뛰어나게 눈부시다!
공개당시 격렬한 노쟁이 일었으니 분수 조각상들 사이에 서있는 님프 조각상 들의 도발적인 나신 때문이라?
가톨릭 미사를 드리기 위해 광장을 지나던 독실한 신자들 눈에는 눈꼴 사나운 천박함 으로 비추어졌으리라!
그래서 당시에는 "치욕의 분수" 로 불렀는 데.....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하니 지금은 이탈리아 어느 분수보다도 시민의 사랑을 받고 잇단다!
가리발디의 통일운동에 동참했던 시칠리아인들을 떠올리며 한 블록을 돌아가니 거긴
벨리니 광장 Piazza Bellini 인 데, 콰트로 칸티 Quattro Canti 라고 해서....
시청사 앞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거리와 마퀘다 거리가 교차하는 사거리로 스페인 바로크 양식의 건물 은
원호 를 그려 원형 공간을 만들어 내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는 18~ 19세기에 이 도시를 다스렸던 스페인계 부르봉 왕조의 왕들이 마차를 타고 지나가며 보았던 풍경이라!
이탈리아 감독 타비아니 형제가 이 도시 팔레르모등 시칠리아를 배경으로 만든 영화가 있으니.....
"카오스 시칠리아 이야기" 인 데 원제는 "카오스" 라....
그리스 신화에 태초의 카오스(혼돈) 로 부터 에레보스(어둠) 와 닉스(밤) 가 생겨났다고 했으니!!!
오스트리아와 스페인계 부르봉 왕조 그리고 프랑스 지배에 갈가리 찓긴 "이탈리아의 분열이 카오스" 이니....
영화에서는 그 카오스를 통일로 이끈 리소르지멘토 의 상징이 가리발디 라?
이탈리아에서는 시칠리아 해방 영웅 가리발디를 남미 혁명의 상징인 체 게바라에 비유하는 모양이네?
그러고는 커트로 콴티를 뒤로하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거리 Corso Vittorio
Emanuele 를 천천히 걸어서 대성당 까테뜨랄 Cathedrale 로 향한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