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다큐멘터리 중국관내의 조선민족(26) - 혈흔 中에서
뻬스티 양림(로씨야에서 부르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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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조직사 자료》에는 다음과 같이 기재돼 있다.
중국로농홍군 제1군 군단장 림 표 정치위원 섭영진 참모장 양 림(뻬스티 조선인) 후임 좌 권 정치국국장 라서경
보다 싶이 정강산에서 조선족인 양림은 군급간부로서 중국로농홍군 제1군단의 참모장으로 림표와 섭영진의 버금으로 가는 요직에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양림은 중국공산당이 령도아래 첫 군사조직인 엽정독립퇀의 제3영 영장직을 맡았댔으므로 군대에서의 원로라고 할 수 있다.
1930년 엽정독립퇀의 창시인의 한 사람인 양림동지는 쏘련 모스크바보병학교에서의 학업을 마치고 부인 리추악과 함께 상해로 돌아왔다. 원래는 로상급인 주은래가 령도하는 중앙군위에서 사업하려고 계획하였는데 마침 당시 만주성위에서 중앙에 군사간부를 파견할 것을 요구하였으므로 중앙에서는 동북지구에 익숙한 그를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양림은 조직의 결정에 좇아 만주에 도착하여 성위에 군위를 건립하고 군위서기 임무를 담임했다. 양림이 조선족인 것을 고려하여 만주성위에서는 그를 동만에 파견했다. 연변으로 온 양림은 동만특위 위원 겸 군위서기 직무를 맡고 조선족농민을 조직하여 동북대지에서 처음으로 되는 반일유격대를 조직하였다. 1931년12월, 라등현동지가 정식으로 만주성위서기직을 담임하자 양림은 다시 성위에 소환되여 군위서기 중임을 떠메고 성위서기 라등현을 도와 동북의 항일투쟁을 령도했다.
1932년4월 양림은 성위순시원의 신분으로 남만에 내려가 리동광, 리홍광 등과 함께 중공반석현위를 비롯한 이 지구의 기층 당조직을 발전시키고 항일무장투쟁을 벌렸고 반일무장조직을 일떠 세웠다. 이 무장조직이 바로 양정우가 령도하던 동북항일련군 제1군의 전신이다.
1932년 양림은 성위의 부탁을 받고 사업을 회보하러 상해로 가게됐다. 림시중앙은 군위 주은래의 요구에 따라 양림을 중앙쏘베트구역으로 발령 내렸다. 아마 동북의 소규모 유격전쟁보다는 대전역에 능한 양림의 능력을 고려하였다고 보아진다.
지하조직의 배치에 의해 양림은 광주, 산두로 가서 월동민 산간지대를 지나 공남에 도착한다. 주은래 동지는 그를 보자 매우 기뻐하며 반갑게 맞아 주었다.
1933년4월24일 중앙군위에서는 강서군구의 제3, 제5군구를 합병하여 월공군구를 건립하였다. 군구의 지휘부는 회창균광령에 세웠다가 동년8월 문무파에 옮기게 된다. 군구 사령원으로는 선후로 양악빈, 뻬스티(양림), 장운일, 좌권, 공초, 하장공(정치위원을 겸함)이 맡게 되었다. 양림은 월공군구 사령원으로 임명되였을 때는 아마 회창균광령에 있을 때라고 추정된다. 그 해6월 중국공농홍군 제1군단의 참모장으로 사업하게 되었다. 당시 군단장으로는 림표였고 정치위원으로는 섭영진동지였으며 정치국국장으로는 라서경동지였다. 제1군단에서 세 번째 자리를 차지하는 지위였다. 그가 조동되자 그 후임으로 좌권동지가 참모장으로 임명되는데 좌권동지는 팔로군시기에 팔로군 부총참모장으로 있다가 전투에서 희생된다.
1934년1월에 사업의 수요로 양림동지는 주은래동지가 령도한 중국혁명군사위원회 총동원무장부 참모장으로 사업하게 되는데 주은래동지가 주임을 맡았다. 이로부터 그는 주은래동지와 더욱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된다. 사학자들은 과거 <로전위원회>로 했는데 뜻은 비슷하나 정확히 말하면 중국혁명군사위원회 총동원무장부라고 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총동원무장부는 홍군 총사령부, 총정치부, 총참모부와 같이 군사위원회의 직속부서로서 지금의 중국인민해방군 후근부와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총동원무장부의 과업은 중앙쏘베트지구의 적위대를 령도하여 전선을 지원하고 후방을 보위하는 것이다. 장개석이 중앙쏘베트구역에 대한 제4차 포위토벌을 발동하자 양림은 적위대를 동원하여 전선의 홍군을 지원하였으며 근거지를 지켰다.
양림동지는 모택동동지와 주은래동지의 깊은 배려를 받았다. 모택동동지는 친히 양림의 부인이며 조선족 첫 번째 녀공산당원인 리추악을 동북에서 중앙쏘베트지역으로 전근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1934년 서금에서 열린 제2차 로농병대표대회기간 모택동동지는 중공만주성위대표 허성상을 찾아 리추악의 형편을 료해하고 《리추악동지를 꼭 이곳에 보내여 남편과 함께 사업하도록 하시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여러 가지 원인으로 리추악동지는 정강산으로 가지 못하고 동북항일련군 제3군에서 군장 조상지 등과 어깨 겯고 싸우다가 일제에게 체포되어 무참히 살해된다. 리추악동지는 지금 동북에서 말하는 동북항일영웅 조일만에 못지 않은 녀항일영웅인물임에 불구하고 잘 알려지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
리추악의 본명은 김금주이다. 1901년 조선 평안남도 중화군의 한 애국가정에서 태어난 리추악은 중학교를 다닐 때부터 맑스주의 서적을 읽었으며 1919년의 조선《3. 1운동》에 참가하여 평양학생운동의 기수였던 양림을 알게 되었고 그들 사이에는 사랑이 싹터 백년가약을 맺었다.
양림동지가 중국에 와 혁명에 투신하자 조선에 남아서 반일 투쟁을 계속하던 리추악은 적들의 탄압이 가심해지자 1924년에 압록강을 건너 중국에 망명하여 왔다. 중국에 온 리추악은 황포군관학교 교관으로 있던 양림동지를 찾아 광주로 갔다. 1925년2월 그는 광동혁명군 제1타동정선전대에 참가하였고 그 해 가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는데 조선족 첫 녀성 당원이였다.
1927년 당조직에서는 그들 부부를 쏘련으로 학습 보냈다. 모스크바동방대학에서3년동안 공부한 그들은 1930년에 중국으로 돌아왔다. 양림이 동만특위 군위서기, 만주성위 군위서기로 있는 기간 리추악은 성위 부녀부에 배치되어 양림과 함께 동만, 남만 등지를 다니며 항일투쟁을 령도하였다.
양림이 중앙쏘베트구역으로 조동되자 리추악은 주하현위에 전근되어 두하중심현위 부녀위원으로 사업했다. 당시 리추악은 낳은 지 얼마 안 되는 아들을 어느 한 농민에게 맡기고는 혁명사업에 투신했는데 아들은 돌도 차지 않아 그만 요절하고 말았다. 어려운 시련속에서 단련된 리추악은 훌륭한 지도 일군으로 자라났다. 1934년8월 리추악은 중공연방(흑룡강 연수현과 방정현)현의 특별지부서기로 임명되였다. 어려운 동북항일투쟁속에서 그는 이름을 장일지라고 고치고 조상지를 도와 무장대오를 이끌고 항일투쟁을 견지하였다. 당시 일본제국주의는 《리추악을 잡는 자에게는 높은 상금을 주며 리추악을 빼돌리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라는 포고까지 내붙였다고 한다.
1936년8월27일 반역자의 밀고로 리추악동지는 불행히 적들에게 체포되였다. 리추악이 체포되자 그와 생사고락을 같이 하던 전우들과 군중들은 비분에 잠겼다. 그들은 주하항일유격구에서 이름을 떨친 장일지라고 부르는 이 조선족혁명가를 조일만과 같은 녀 영웅으로 보았다. 적들의 갖은 고문과 유인은 이 억센 공산주의전사의 의지를 꺽지 못했다. 그녀는 반일운동에 종사했다는 것만 말했지 신분을 밝히지 않았으며 자신의 생명으로 동지들을 보호했다.
리추악의 입에서 아무것도 얻어낼 수 없음을 안 놈들은 그를 총살하기로 결정지었다. 목단강지방경무통치위원장 나까무라는 일본중앙경무통치위원장 도죠 히데끼에게 올린 보고에 이렇게 썼다.《피검거자 장일지는 더 고려해 볼 여지가 없고 앞으로 회개 할 희망이 없으므로9월3일에 엄중한 처분(총살)을 주었음.》 1936년9월3일 항일녀영웅 리추악은 통하진 서문밖에서 적들에게 무참히 살해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36살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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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서성 서금으로 가면 엽평이라는 곳이 있다. 1931년11월7일 중화쏘베트공화국정부가 엽평에서 성립되였다. 정부의 산하에 아홉 개 부와 한 개국을 두었는데 인원이 천명 가량 되었다고 한다. 중화쏘베트정부가 엽평에서 사무를 본 시간은 일년 반 좌우로 된다. 전쟁형세, 그리고 국민당의 비행기가 중앙정부소재지에 대한 끊임없는 폭격으로 말미암아 중앙은 정부를 사주파에 옮기게 되는데 사주파는 서금성에서 서북쪽으로6키로메터 가량 떨어져 있다. 1933년4월 모택동, 장문천 등 중앙령도자들과 중앙집행위원회 중앙인민위원회 중앙 각 부서가 이곳에서 사업하게 되였다. 사주파에 가게 되면 당시에 지은 중앙정부 강당이 지금까지 온전하게 보전되여 있고 이곳은 지금 서금의 홍색유람구로 국내외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가이드가 나서서 유람객들을 안내하였다. 《 이 강당은 1934년4월 중앙정부가 엽평에서 이곳으로 옮긴 후 지은 건물입니다. 대형집회를 가질 수 있는 장소입니다. 이곳에서 제2차 전국쏘베트 대표대회가 열렸습니다. 강당은 1933년8월에 준공되였는데 설계가 매우 독특합니다. 구조는8각형 모양인데 홍군의 팔각모자를 상징합니다.》
1934년1월 전국쏘베트 제2차 대표대회가 사주파 중앙강당에서 성대히 거행되였다. 지금 말하는 전국인민대표대회와 마찬가지이다. 양림동지는 이 회의에 참가하였으며 대회주석단 위원으로 선출되였다. 대회에서는 중화쏘베트공화국 제2기 림시중앙정부령도기구를 설립하며 중화쏘베트공화국 중앙집행위원회를 건립한다. 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회 주석으로 모택동동지가 선거되며 부주석으로 항영, 장국도가 선출된다. 박고, 류소기, 엽검영, 소극 등 동지들이 집행위원으로 선거되는데 그 가운데는 조선족인 양림동지도 있다.
지금도 정강산에 가면 집행위원회의 명단가운데 양림동지의 이름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양림의 명단은 언제나 정확히 진의 원수 뒤에 있었다. 중앙조직사자료에도 그러했고 당시 신문에도 그러했다. 이로 보아 양림의 정강산에서의 지위를 가늠할 수 있었다.
중국관내조선족력사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양림동지를 연구하고 사료를 보던 중 정강산시기 또 다른 군급인물인 조선족 장세걸을 발견하게 되였다. 중공당사출판사에서 출판한 《중국공산당조직사 자료》제2권을 펼쳐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기재돼 있다.
중국로농홍군 제22군 군장 진 의 소 극 라병휘 정치위원 채수범 참모장 조선인 장세걸
양림동지와 똑 같은 군급장령이다.
중국공농홍군 22군 참모장 장세걸에 대한 력사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가 어떻게 되어 중국으로 들어 왔고 중국혁명에 어떤 공로를 세웠으며 그의 일생은 어떠하였을까? 참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당시 정강산에는 모택동이 거느린 추수기의 부대. 주덕, 진의가 거느린 남창봉기 부대, 팽덕회가 거느린 평강기의 부대. 원 정강산의 지방부대 등 여러 개 부대가 있었는데 당시 상황에서 장세걸이 22군 군장 진의동지의 부대 참모장이라는 어마어마한 급별인 것을 보아 남창기의에 참가한 후 주덕, 진의와 함께 정강산으로 들어왔으며 주덕총사령과 진의원수와 어지간한 인연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다. 앞으로 이 수수께끼는 사학자들이 연구해야 할 과제로 될 것이다. 장세걸에 대해 그만하고 본문으로 돌아간다.
1934년 봄 중앙군위에서는 양림동지가 일찍 다섯 차례나 국내외 유명한 군관학교에서 사업한 것을 고려하여 그를 홍군대학에 전근시켜 총교관을 맡고 교무를 주관시킨다. 홍군대학은 주로 당시 중앙쏘베트구역에서 중고급 군사지휘원과 정치사업일군들을 배양하는 최고급 학교였다. 당시 학교교장으로는 홍군 총참모장을 담임했던 류백승동지와 그 후임으로 엽검영동지였다. 학교는 지금의 서금현 사주파향 대부촌에 있었다.
당시는 전쟁시기라 부대의 인사변동도 많았다고 생각된다. 양림을 연구하는 가운데서 필자는 양림의 성품을 다소나마 알 수가 있었다. 강하면서도 대의를 지킬 줄 알며 겸손하고 자기를 잘 나타내려 하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라고 생각된다. 당시 일부사람들은 그가 《엽정독립퇀의 창시인의 한사람이고 자격이 높으며 또 중앙정부집행위원인데 홍군대학에 배치하는 것이 급별이 너무 낮지 않은가》 하는 의견을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양림동지는 이러한 것에 대해 개의치 않고 참답게 자기의 직책을 담당하였다. 신분이 높은 것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받지 않기 위해 이때부터 그는 자기가 로씨아에서 부르던 《뻬스티》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한다.
제작팀이 홍군대학지점을 찾았을 때 서금박물관의 사업일군은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홍군대학은 홍군학교에서 갈라 나온 학교입니다. 5개 학교로 갈랐지요. 1933년10월17일 중앙군위의 명령에 의해서였지요. 이곳은 홍군대학 옛터입니다. 원래 무인지였지요. 학교학원들이 자체로 나무를 베고 흙으로 벽돌을 만들어 세웠습니다.
홍군대학을 사람들은 일명 《로농홍군 호시스대학》라고도 부른다. 이는 쏘련공산당원이며 광주주재 쏘련령사관 부령사 호시스가 광주폭동에 참가했다가 적들에게 살해되였는데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홍군대학을 《로농홍군 호시스대학》이라고 명명했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제작팀은 사주파에서 이름난《홍정》을 찾았다. 이 우물은 모택동을 비롯한 당시 서금의 중앙동지들이 판 우물이다. 근거지 인민들은 이곳에 비석을 세워놓고《물 마실 때 우물 판 사람을 잊지 말고 시각마다 모주석을 기념한다》는 글을 새겨 놓고 후대들에게 혁명전통교육을 진행한다고 한다. 우물의 물을 마시며 우리는 중국의 혁명을 위하여 이곳까지 와서 피를 흘리며 싸우던 양림동지와 같은 조선족용사들을 생각하노라니 감개무량함을 금치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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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들의 발광적인 진공으로 1934년7월 중화쏘베트공화국 중앙정부는 사주파로부터 운석산중에 있는《운산고사》로 옮겨게 되는데 중앙집행위원회 주석 모택동과 인민위원회 주석 장문천동지가 이곳 옛 절간에서 사업하게 된다.
운석산은 서금성에서 서쪽으로 19키로 메터 상거한 곳에 있다. 기괴한 바위들이 수풀처럼 일어서 있고 록음이 무성한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다. 절간은 괴석속에 자리잡고 있는데 산아래로부터 산꼭대기에 이르는 길이 오직 하나밖에 없고 오불꼬불한 좁은 길은 백여개의 석판으로 깔려 있으며 도중에 두 개 석문을 지나야 한다고 한다. 그야말로《한사람이 지키면 만사람도 들어갈 수 없는》난공불락의 요새지이다. 산속에 몸을 담그고 있노라면 《석산일영 상루화, 고사림심 불로춘》다시 말하면 《수풀같이 일떠 선 석림은 그림처 럼 아름답고 엣절과 깊은 수림속에서 청춘이 늙지 않는다.》는 시흥이 절로 나온다.
1934년7월15일 모택동, 주은래동지는 중화쏘베트중앙정부와 중국로농홍군 군사위원회를 대표하여《중국로농홍군 북상항일선언》을 발표하였다.
1934년10월 적들의 발광적인 진공과 당의 좌경기회주의 로선의 영향으로 제5차 반포위토벌의 실패로 홍군은 중앙쏘베트구역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였다. 중앙홍군과 중앙령도기구 기관의 지도자들은 이곳에서2만5천리 장정의 첫발자국을 떼게 되었다. 이로부터 사람들은 운석산을 《장정제일산》이라고 부르게 된다.
1934년10월 중앙에서는 장정의 수요에 의하여 홍군대학, 홍군팽양보병학교, 홍군공략보병학교, 홍군특과학교를 합병하여 중국로농홍군학교로 만들었다. 홍군제1방면군 주력이 장정을 시작하자 중앙군위에서는 중국로농홍군학교의 사생들로 간부퇀을 건립하여 중앙종대를 따라 함께 행동하기로 결정지었다. 진갱동지가 퇀장으로 송임궁동지가 정치위원으로 양림동지가 참모장으로 각기 임명되며 정치처 주임에 막문화, 당총지부서기에 방강이 임명된다. 간부퇀 산하에4개영, 한 개간부대, 세 개과를 두었는데 원 팽양보병학교를 제1보병영으로, 원공략보병학교를 제2보병영으로 제3영을 정치영으로, 원 특과하교를 제4영으로, 원홍군대학을 상급간부대로 그 외에 지휘과, 정치과, 지방사업과를 두었다. 간부퇀의 전사들은 모두다 군관으로서 련급이상이였다. 간부퇀은 중앙지도자들과 함께 장정의 길에 오르게 된다.
1935년4월29일 중앙군위는 간부퇀에 금사강 권양기나루터를 탈취하라는 명령을 내리였다. 군위부주석 주은래, 군위 총참모장 류백승, 엽검영 등 동지들은 간부퇀에 와서 전투임무을 포치했고 중공중앙 총서기 장문천동지는 친히 동원연설을 하였다.
금사강대안의 나루터와 그 뒤쪽에 있는 통안진탈취전은 홍군의 북진전략방침을 완수함에 있어서 결정적인 의의를 갖고 있다. 양림은 진갱, 송임궁동지들과 함께 전퇀을 인솔하여 일주야에 180리 길을 강행군하여 금사강 역에 닿았다. 양림은 정찰병을 파견하여 부근의 적정을 탐지한 후 작전방안을 내놓았다. 그의 방안에 근거하여 홍군전사들은 나루터를 진공하여 60여명의 적을 사로잡고《5. 1》절 전야에 금사강의 천험나루터를 점령하였다.
간부퇀의 정치위원이였던 송임궁동지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양림은 비록 우리들보다 나이가 더 있었지만 맡은 사업을 진지하게 완수하였고 진갱동지와 내가 작전을 지휘하는 걸 열성적으로 도와 주었다. 간부퇀이 지략으로 금사강을 도하한 후 양림은 진갱과 함께 후비부대의 주력을 거느리고 적들과 격전을 하면서 안주를 들이쳤다. 작전에서 용감했던 그는 부대를 거느리고 거리에 들어가서 적들의 박격포를 로획했다. 》
위대한 장정에서 홍군의 로장인 양림동지는 두 다리로2만리를 걸었고 보통간부전사들과 함께 설산과 초지를 지나 1935년10월에 승리적으로 섬북에 도착하였다. 30만명의 장정대오는 섬북에 도착 후 겨우3만명이 남았다고 한다.
양림동지는 정강산시기로부터 중앙홍군의 고급간부로 활약했다. 그런데 어떻게 되어 양림장군이 악예환근거지에서 온 서해동의 부대에 편입되였으며 사급참모장의 자리밖에 안 되였는가를 많은 사학자들이 궁금해하고 있다.
당시 장정을 거친 홍군에는 고급간부대오가 매우 박약했다. 정규적인 중앙홍군을 내놓고 기타 근거지에서 온 대오는 더욱 그러했다.
당시 서해동이 령솔하는 제15군단은 악예환근거지에서 왔는데 군단을 묶어 놓고 사급 간부를 배치하고 보니 사람이 모자라 중앙군위에 고급간부를 요구했다. 이렇게 되어 이미 안배한 기초상에서 75사참모장이 모자라자 군위에서는 오래 동안 군관학교에서 인재를 양성하던 경험 많은 양림장군을 홍군 제15군단 75사의 참모장으로 임명했던 것이다.
75사 참모장으로 임명된 양림은 중앙홍군의 훈련방법과 작전방법을 악예완근거지에서 온 이 홍군대오에 전수하는 한편 전투에서 언제나 중앙홍군의 전통을 발휘하여 앞장에 섰기에 15군단의 여러 수장들과 전사들의 존경과 애대를 받았다. 이는 해방 후 로홍군 장병들의 회억록에서 많이 느낄 수 있다.
4. 1931년 《9. 18사변》이후 장개석국민당의 기본국책은 독재, 내전, 매국, 일본에 타협하는 것으로서 《외세를 밀어내려면 내세가 안정해야 한다》는 《공산당》토벌정책을 실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공산당은 반드시 장개석을 반대하지 않으면 항일할 수 없었다.
섬북은 소홍군의 좋은 근거지이고 대홍군의 발붙이는 곳이기는 하지만 경제가 락후하고 교통이 불편한 곳이다. 동쪽으로는 황하가 있고 북쪽으로는 사막과 잇대여 있으며 서쪽은 황량한 지방이라 인가가 적은 곳이다. 비록 적들이 이곳을 사면포위 하려면 쉽지 않지만 홍군의 발전에도 매우 불리한 고장이다. 남쪽으로 발전하려면 국민당의 동북군과 서북군이 있고 락양에 또 진성이 지휘하는3개군의 병력이 있는데 이는 모두 홍군을 견제하기 위해 준비해 놓은 부대였다. 당시 상황에서는 동쪽으로 황하를 건너 려량산근거지를 개척하고 진중과 진동남으로 발전하는 것이 비교적 리상적이였다.
1935년12월25일 중앙정치국은 와요보에서 회의를 열고 동정할 결정을 지었다. 동정을 하게 되면 화북으로 진출하여 일제와 싸울 수 있고 화북근거지를 개척하면 부대공급도 해결할 수 있으며 홍군을 확대할 수 있고 돈과 기타 물자를 해결할 수 있었다. 1936년 당중앙과 모주석은 동쪽으로 황하를 건너 염석산이 지키고 있는 여량산맥을 탈취하여 새로운 근거지를 개척할 것을 결정했다.
동정은 우리군의 새로운 군사, 정치로선의 집행이였다. 와요보회의 후 당의 주요사업은 민중을 불러 일으켜 항일하는 것이였으므로 동정을 통하여 여량산맥에 혁명근거지를 건립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1936년2월 홍군은 당중앙의 령도아래 위대한 동정항일을 시작하였다. 동정의 첫 난관은 황화를 건너는 것이다.
당시 산서에 둥지를 틀고 있던 염석산은 황하연안 20여 개 현을 소위 공산당을 방지하는 구역으로 정했다. 하가와일대에의 황하 연선에 적들의 또치카가 많았는데 황하 천험의 대안 500키로메터 연선에 매500메터를 사이 두고 또치카 하나가 있었으며 두 또치카 사이는 보총사격권 안에 들어 있었다. 또치카마다 강한 화력을 배비했고 상호간에 련락도 할 수 있었는데 적들은 또 강안을 수시로 순라하였다. 염석산은 우쭐거리며《황하는 철벽처럼 든든하기에 새가 날아온다 해도 어림없다. 》고 했다.
팽덕회원수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모주석을 따라 무정하 이북의 대상촌에 온 후 무전대를 거느리고 무정하구 상하 몇 십리를 답사하며 도하지점을 상세히 정찰했다. 나는 일곱 날 밤을 리용하여 제1군단과 제15군단의 두 개 도하지점을 정찰하고 적정도 살폈다. 적들의 표면공사구축병력, 화력배치를 료해 했을 뿐만 아니라 적들의 진실한 종심배치도 장악했다.
산서성 석루현의 당사를 연구한 전보왕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1936년2월20일 저녁8시에 모주석께서는6개 도하지점에서 동시에 도하 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당시 홍1군단은 섭영진, 림표, 라영환의 령솔하에 삼교진 평촌으로 도하했는데 지금 그곳은 유림현에 속합니다. 15군단은 서해동군단장과 정자화정치위원의 령솔하에 청간현의 맞은쪽인 산서성 석루현 하가와촌에서 도하작전을 벌렸습니다.》
황하의 천리 방어진지를 돌파하는 임무가 양림이 거느린 부대에 떨어졌다.
15군단의 참모장이였던 주사제상장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15군단이 강변에 집결한 후 일체준비사업은 음페적으로 진행됐다. 뻬스티동지는 농민으로 가장하고 강 부근의 산에 올라 정찰했다. 그는 친히 망원경을 들고 대안 적들의 또치카, 지형, 도로와 활동정황을 관찰하고 우리 군의 등선지점을 택하고 매차 운송해야할 왕복시간과 한배에 몇 사람이 탈 수 있는가 하는 등을 구체적적으로 계산하였다. 》
도하 전 지도부에서는 75사223퇀의 한 개영을 선발하여 선두영으로 만들고 사부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는 선봉대로 결정했다.
당시 도강작전의 순리로움을 보장하기 위하여 지도부에서는 전투경험이 풍부하고 장정시기부터 여러 차례 도강작전을 지휘해 온 양림동지를 황하 도강작전의 지휘로 임명했다.
중공 석루현 조직부 부부장 류원동지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사 참모장이 영에 내려와 직접 지휘했습니다. 기재에 의하면 도강작전을 완수하기 위하여 상급의 지도자가 기관에 내려와 직접 지휘했습니다. 뻬스티는 제75사의 참모장이였지요. 그는 선두부대를 지휘하여 제일 먼저 도강한 사람입니다.
상급에서 뻬스티동지를 매우 신임했으므로 그가 친히 선두영을 지휘하기로 했다. 선두영이 군위의 명령에 따라 먼저 도하하여 주력부대를 엄호임무를 접수할 때양림은 전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모주석께서 이곳으로 강을 건너게 됩니다. 우리는 꼭 도하의 성공을 보증해야 합니다》. 20일 저녁 10시 선두영이 하구에서 배우에 오를 때 그는 지도부에 《한개련만 대안에 오르면 도하는 보증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중공 석루현 조직부 부부장 류원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양림은) 퇀에서 수영 잘하는 전사 40명을 골라 선견대를 조직했습니다. 그들은 건너 간 다음 제일먼저 산꼭대기를 점령했습니다. 기재에 의하면 이 선견부대내의 40명은 큰 배 두 척과 작은 배5척에 앉아 도강했습니다. 적들의 화력을 분산시키기 위하여 여러 배에 갈라 탔지요. 8시경에 도강한 후 하가와에 있는 적 한 개 련과 맞붙었지요. 》
뻬스티가 선두영을 거느리고 배에 올라 저쪽 대안과 몇십메터 거리에 이르렀을 때 적의 순찰대가 아군을 발견하고 총을 쏘기 시작했다. 이때 뻬스티는 배를 재빨리 대안에 댈 것을 명령하였다. 전사들은 저마다 물에 뛰어 들어 대안을 향해 진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은 뿔뿔이 도망쳤다. 뻬스티는 부대를 지휘하여 하가와를 향해 진공하였다. 격렬한 전투를 거쳐 하가와촌 길목의 적또치카를 격파한 후 적 진지중심을 향해 진공을 들이댔다. 하가와촌을 완전히 점령하고 전장을 수습할 때 산어느 모퉁이에서 총알이 날아와 양림동지의 복부를 명중했다. 지세가 복잡한 곳에 숨어 있던 잔여 비적들이 쏜 탄알이였다. 양림동지는 복부에 중상을 입고 쓰러졌다.
석루현 작가 전보왕선생은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당시 마을에 적의 토치카가7개 있었지요. 그 중에서 국민당 영장이 차지한 토치카의 적들은 투항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뻬스티는 친히 부대를 거느리고 맹렬한 공격을 하자 할 수없이 투항했습니다. 두 문의 박격포와6정의 중기관총을 로획하고 100여명의 적을 포로했지요. 뻬스티는 이때에 부상당했는데 중상을 입었습니다. 가슴에 맞았지요. 뻬스티는 포로를 처리할 때 총에 맞았습니다. 전투가 격렬할 때가 아니였지요. 전투장을 수습할 때 중상입었습니다. 주사제동지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그를 하가와촌에서 치료하게 하였다. 나는 21일 오후 하가와에 가서 그를 보았는데 구들에 앉아 있는 그의 낯색은 창백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전방의 정황은 어떻소?>라고 물었다. <75사는 지금 의첩진으로 향했는데 오늘 저녁이면 의첩진을 점령할 것 같습니다. 군단부 및78사는 지금 의첩진 부근에 있으며 래일 75사와 78사가 군단부와 함께 석루현에 도착할겁니다><하가와에는 지금 한 개련이 경계를 담당하고 있는데 군위기관이 지금 도하중입니다.>내가 대답하자 그는 다급히<모주것께서 강을 건느셨소?>라고 물었다. <모주석께서는 이미 강을 건넜습니다. 지금 의첩진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모주석께서 강을 건넌 후 제가 강을 건넜습니다.>라고 내가 말하자 그의 얼굴에는 대뜸 희열이 비꼈다. <빨리 가오!》그는 나를 재촉했다. 나는 원래 그가 자는 구들에서 그와 더 있으려 했으나 그의 정신이 모주석의 도하와 부대 그리고 의첩진의 상황에 팔려 있었으므로 가지 않으면 그가 급해 할 것 같아 괴로움을 참으며 그의 손을 잡고 작별의 인사를 올렸다.》
그 날 저녁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때 그의 나이는 36세밖에 안 됐다. 산서성태원에서 서남쪽으로 여량산맥을 가로질러 580여리 가면 석루라는 자그마한 현성이 있다. 석루현은 여량산 서쪽에 위치해 있는데 서쪽으로는 황하를 사이 두고 섬서성 청간현과 맞대어 있는 고장이다. 교통이 불편하여 거의 세상과 동떨어진 고장이라는 감이 든다.
현성은 굴산하와 담장하두 강의 교차점에 위치해 있는데 집 건물은 전부 토굴집이였다. 그런데 이곳이 중화민족의 발상지라고 하니 놀라움을 금할 길 없다.
신석기시대부터 이곳은 이미 인류가 집거해 살던 곳이며 상나라 때에는 중심구역이며 춘추시기에는 이곳을 굴읍이라고 불렀고 한나라 때에는 토군후를 설치했으며 수나라 때부터 지금까지 석루라고 불렀다.석루 또한 강태공이라고 부르는 강자아가 출생한 곳이기도 하다. 항일전쟁시기 이곳은 또한 혁명로근거지였다. 1936년2월 모택동이 중국공농홍군을 이끌고 황하를 건너 동정을 하여 도착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고장이 얼마나 편벽하고 교통이 불편하였던지 이 고장을 찾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산서성 태생이며 중앙인민방송국 산서성 주재기자소의 소장도 이곳을 와 본적이 없다고 했다. 외지 취재팀으로서는 우리 일행이 처음이라고 한다.
태원에서 우리가 석루로 가야 한다고 차비를 해 나서자 그들은 할 수 없이 따라 나섰다. 마침 석루현정부 부현장 임석평동지가 태원으로 오셨다고 돌아가는 길이라 그는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차를 타고 다섯시간의 로정을 거쳐 석루현성에 이르렀다. 현성이라고 해야 골안에 량쪽에 토굴집 뿐 가로등 하나 볼수 없는 편벽한 곳이였다. 우리는 행장을 풀어놓을 짬도 없이 석루현 《홍군동정기념관》을 찾아보았다.
기념관에는 강택민 총서기가 친필로 써놓은 동정기념관이라는 액틀이 걸려 있었다. 기념관에서 우리는 양림동지의 사적관을 찾았다. 양림동지의 초상아래에 뻬스티라고 밝혔다. 우리를 안내한 석루현정부 임석평(ÈÎÊ?ƽ)부현장에게 뻬스티가 누군가고 물었더니 동정에서 희생된 저명한 영웅인물이며 조선사람인데 이 고장에서 다 인물이라고 했다. 필자가 그의 원명과 그의 간력을 물었더니 그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었다.
원 석루현 인대상무위원회 부주임이고 임석평부현장의 아버지 임협혜로인은 로홍군전사로서 금년에 88세의 고령이다. 1936년 양림동지를 선두부대로 동정이 성공하는 그 날 홍군이 이 고장에 오니 그 날 입대했다고 한다. 양림을 보지 못했지만 입대하여 홍군장령 뻬스티에 대해서는 많이 들었다고 한다. 인터뷰가 시작되였다.
기자: 뻬스티를 알아요? 임협혜: 하가와를 칠 때 희생됐지요. 그는 외국인이지요. 기자: 어디 사람이지요? 임협혜: 그는 조선사람입니다.
이야기는 많이 주고받았지만 고령이고 어찌나 산서 방언을 쓰는지 도무지 알아들을 길 없었다.
석루현성에서 하루 밤 묵고 우리는 중공 석루현당위 선전부 부장의 인도에 따라 찌프차를 타고 아침 일찍 길을 떠나 홍군 15군단과 당중앙 모주석께서 황하도강을 해서 건넜다는 하가와를 향했다. 현성에서 하가와까지의 거리는 불과 100여리 밖에 안되였지만 이곳은 산세가 험하고 길이 나있지 않아7시간이 정도 걸렸다. 산서 황토고원은 수토류실이 어찌나 심한지 풀 한포기 찾아보기 힘든 고장이다. 수천년 동안 비에 씻겨 산은 올망쫄망한 골짜기로 그 골짜기를 에돌다 나니 어디가 어딘지 분간하기 힘든 고장이다. 길잡이가 없다면 도저히 찾기 힘든 고장이다. 어느 의학 고서에서 태항산에서 인삼이 났다는 기재를 보았지만 그것은 아마 몇천년전의 일이 였을 것이다. 지금은 생태균형이 완전히 파괴된 실정이였다.
오전9시에 길을 떠나 도중에 어느 한 향정부에 들려 점심을 먹었는데 향 지도 일군이 나와 열정적으로 향정부(토굴집)에서 점심식사를 대접했다. 먼 곳에 온 손님이라고 접대를 잘한다는 것이 맨물에 밀국수 한 그릇, 그것도 양념 한 점 없었다. 실로 피를 흘리며 강산을 개척한 로혁명근거지였지만 그들의 생활은 말이 아니였다.
오후 세시쯤 하가와마을에 도착했다. 20여 세대가 살고 있는 이 마을은 황하 천험속에 자리잡은 황량한 고장이다. 당시 이곳에는 염석산부대의 한 개영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산발이 어찌나 험한지 그 누구도 이곳으로 홍군이 건너오려니 생각을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첩첩한 산봉에 보루를 세워놓고 훤히 내려다보이는 황하를 겨냥해 사격한다면 날아다니는 새들도 얼씬하기 어려운 곳이다. 보루라고 평원에서처럼 따로 세워 놓을 필요도 없이 산꼭대기에서 지키면 그만이다. 한 봉우리에 올라가 보니 과연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마을사람들의 소개에 의하면 이 곳에 이런 또치카가 매우 많았다고 한다. 하가와 마을에 들어서니 대추나무가 많이 보였다. 중공석루현선전부장의 소개에 의하면 이 고장의 대추는 3000년 력사를 갖고 있으며 우리나라 대추의 발원지라고 한다. 수당시기에 이 고장에서 생산한 대추는 조정에 올리는 공물이였다고 한다. 먼 옛날 이고장은 산좋고 물맑은 고장이었지만 수천년 내려오며 인류에 의해 생태환경이 파괴 될 대로 되었다고 한다. 11기3중 전회이래 퇴경환림환초의 방침아래 생태자연공정을 진행하여 산에 나무를 심기 시작했는데 사름률이 매우 낮아 문제라고 한다.
당년 양림이 거느린 홍군도강 선발대가 제일 처음 점령한 마을이 바로 이 하가와 였다. 전투가 끝나고 전장을 수습하는데 총알이 날아와 불시에 양림동지의 가슴에 박혔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숨기 쉽고 찾기 힘든 복잡한 지형이였다. 아마 전투에서 살아남은 적들이 복잡한 이곳 지형을 리용하여 숨어 있다가 쏜 것으로 추측된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조선반도를 떠나 동북의 청산리 전역에서, 가렬처절한 북벌전쟁에서, 정강산 반포위토벌에서, 2만5천리 장정을 하며 수없이 전투를 겪어왔던 양림장군이 이 고장에서 쓰러져 이슬로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도무지 믿어지질 않는다.
이 고장의 토배기라고 하는 류지준(76세)로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 자: 홍군을 본 적이 있습니까? 류지준: 보구 말구요. 머리에 팔각모를 썼더군요. 많이 왔습니다. 기 자: 당시 홍군이 도강할 때 상황을 기억하나요? 류지준: 싸움이 치렬했습니다. 하늘에 비행기까지 날아와 폭탄을 떨궜습니다.
하가와 촌을 떠나 우리 일행은 황하나루터로 행했다. 황하를 사이에 두고 하가와 촌은 산서성이고 대안은 섬서성 하구촌이다. 당년 이 고장은 섬북근거지에 속했다. 하구촌은 황하와 무정하의 합수목에 자리잡고 있다고 하여 지은 이름이다. 우리 일행은 하가와 마을에서 벼랑길을 에돌아 황하 나루터에 내렸다. 그 옛날 홍군들이 동정을 했다면 우리 일행을 거꾸로 서정을 하는 셈이다. 지금 나루터에는 작은 목선에 발동기를 단 배가 강을 건너다니는 사람들을 태워주고 있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중공석루현선전부장을 비롯한 일행과 헤어진 우리 일행은 짐을 챙기고 배에 올랐다. 중화민족의 발상지이며 어머니 강이라고 불리 우는 황하였다. 홍군의 발자취를 더듬어 황하를 가로 건너며 흐르는 물결을 바라보노라니 홍군들이 밤도와 도강하던 노젓는 소리가 귀에 들려 오는 것만 같았다.(다음기 이음)
서봉학/연변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