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기전에 꼭 가야 할 명소"로 소문난 장소가 아니라, 그 곳에 가면 왠지 내 마음을 투명하게 비춰볼 수 있을 것 같은 신비로운
기대감으로 찾는 곳이있다. 작가 버지니아 울프가 살았던 런던 볼룸스버리의 한적한 골목길, 철학자 이반 일리치가 말년을 보냈던
독일의 브레멘 등이 그런 곳이었다.
타인의 떠들썩한 소문보다는 내 마음의 본능적인 암실를 따라 정처없이 거닐고 싶은 곳.
스위스루가노와 몬타놀라도 그런 장소다.
헤르만 햇세가 루가노 호수를 바라보며 "유리알 유희", "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싯타르타" 등의 명작을 쏟아내던 곳이
바로 몬타놀라다. 부친의 죽음, 아내의 정신분열증, 아들의 입원, 자신의 우울증으로 고통받던 헷세가 나이 마흔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곳, 헷세가 아마추어 화가로서의 삶을 시작했던 곳도 몬타놀라였다. 독일군국주의가 발흥하던 무렵 제1 차
세계대전에 반대하는 글을 써서 매국노로 비난받았던 헷세는 조국에서 자유로운 창작할동을 금지 당하고, 스위스 베른을 거쳐
몬타놀라에 정착하면서 비로소 마음의 안식을 얻는다.
헷세가 가꾼 영혼의 정원을 찾아가는 내 마음의 긴 여정은 사실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8년전 쯤 헤르만 헷세와 카룰 구스타프 융
이 편지를 주고 받으며 서로의 예술과 철학을 고양시켰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전율을 느꼈다. 그때 나는 영문도 모른채
알 수 없는 본능에 이끌려 융의 자서전과 헷세의 소설들을 겹쳐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은 마치 영혼의 샴 쌍둥이처럼
닮은 아픔을 앓고있었다.
헷세와 융, 두 사람의 아름다운 우정은 아무런 연고가 없는 한국의 한 독자에게도 피할 수 없는 인연의 고리를 만들어주었다.
" 나의 생에는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역사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융의 자선전은 '데미안'의 다음 문장과 똑같은 인류의
화두를 짊어지고 있다. " 모든 사람에게 진정한 소명은 오직 한 가지, 자기 자신에게 도달하는 것이다"
" 일찍이 그 누구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난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2013년 헷세의 고향인 독일 남부 소도시 칼프에서 시작된 나의 여정은 2014년 융 연구소가 있는 취리히, 헷세가 오래동안
창작의 영감을 받았던 루가노 호수, 헷세가 머물던 집 카사카무치와 헷세 박물관이 있는 몬타놀라를 거치며
"내 마음의 헤르만 헷세의 루트"로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취리히 근교의 퀴스나흐트에 있는 융 연구소에서 나는 아직까지도 생생한 탐구열로 융 심리학을 공부하는 학자들을 만났다.
그들은 일요일에도 세미나를 열어 융 심리학의 지적심화와 대중화를 고민했다. 백발이 성성한 한 심리학자는
"볼링엔에 있는 융의 묘소에 찾아갈 수 있는 방법이 없느냐?" 고 묻는 내게
"안타깝게도 그곳은 사유지라 여행자가 들어갈 수는 없다." 고 친절히 귀띔해 주었다.
융은 헷세에게 직접 그림 그리기를 권했다고 한다. 레드북을 통해 내면의 치열한 고뇌를 그림으로 풀어낸 융은 환자들에게도
그림 그리기를 적극적인 자기 치유 과정으로 추천했다. 헷세는 루가노 호수와 모타놀라의 고즈넉한 풍경을 그리며 어떤 글 쓰기
로도 다독일 수 없었던 내면의 고통을 위무한다.
위 글은 정여울 문학평론가의 글이다. 이 분이 지금 나이가 몇인지는 잘 모르지만 어쩜 젊은 날 나와 똑 같은 생각으로
헷세와 융을 만났다는 점에 놀라웠다. 중학시절 한남동집에서 새벽 첫 버스를 타면 남산에 있는 국립도서관에 갈 수가 있었는데
지금도 어둠이 가시지 않은 도서관 앞의 긴 줄이 생각난다.
입장을 하여 자리를 확인하고 도서대에서 그 날 읽을 만큼의 헷세 책을 고른다.
처음에는 헷세만 알았지 카룰 구스타프 융은 알지 못했기에 주로 헷세의 서적만 독파했던것 같다. 헷세를 알면서 자연스럽게
그의 친구인 정신심리의학자 카룰 구스타프 융은 을 알게 되었고 그의 저서는 그 당시로는 이해하지 못하여 고교시설에 접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오늘, 정여울님의 유럽 인문여행기인 스위스 루카노 몬타놀라 기행을 읽으며 새삼 어린시절 헷세와의 만남이 떠올랐다.
한편으로, 문학 평론가라는 직업이 참으로 부럽게 보이고 나도 언제인가 꼭 여행하고픈 지역 이기에 간절함이 실현되기를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