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朝人物考續七 / 倭討
증 병조참판 김공 신도비명 병서(贈兵曹參判金公神道碑銘 幷序)
신정하(申靖夏) 찬(撰)
예전에 우리 선조(先祖) 순변사공(巡邊使公, 신립(申砬)이 북변(北邊)을 진무(鎭撫)할 때에 옛날 명장(名將)의 기풍이 있었다고 칭송하며, 그 한두 번의 전공(戰功)은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빛나고 있다. 나의 생각에는 당시에 반드시 용맹과 지략이 뛰어난 인사가 있어 병법을 계획하는 사이를 드나들면서 함께 위대한 공적을 성취시킨 분이 있었을 터인데, 얻어들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뒤에 비로소 김공(金公)을 알게 되었다.
공의 휘(諱)는 경복(慶福)이고, 자(字)는 백유(伯緌)이며, 신라왕(新羅王) 부(溥)의 후손으로 관향(貫鄕)은 경주(慶州)인데, 대대로 쌍성(雙城)의 영인(寧仁)에 살았다. 5대조(代祖)의 휘는 영로(榮老)인데, 정해년(丁亥年, 1467년 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반란에 난리를 구제한 공으로 벼슬이 고산 찰방(高山察訪)이었다. 고(考)의 휘 수경(守經)은 만호(萬戶)이고, 비(妣)는 오씨(吳氏)로 윤성(允城)의 딸이다.
공이 가정(嘉靖) 경술년(庚戌年, 1550년 명종 5)에 태어났다. 사람됨이 기이하고 헌걸차며 소탈하였는데, 젊어서는 글공부를 일삼다가 곧장 버리고 만력(萬曆) 경진년(庚辰年, 1580년 선조 13)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순변사공이 당시 은성 부사(檼城府使)로 있으면서 공의 명성을 듣고 거두어다 막속(幕屬)으로 삼았는데, 계미년(癸未年, 1583년 선조 16)에 번방(蕃方)의 오랑캐 이탕개(尼湯介)가 훈융진(訓戎鎭)을 포위하자, 공이 순변사공을 따라 힘껏 싸워서 적의 목을 벤 것이 매우 많았다.
이에 조정에서 그 공을 가상히 여겨 순변사공을 발탁하여 북병사(北兵使)로 삼았는데, 순변사공은 또 ‘공의 공로가 첫째이니 당연히 포상(褒賞)이 있어야 한다’고 아뢰자, 선조[宣廟]가 공을 불러다 보고 손수 정충록(精忠錄)을 내려주고 그 자리에서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에 임명하였다가 얼마 안 되어 외직으로 나가 장연 현감(長連縣監)이 되었다.
을유년(乙酉年, 1585년 선조 18)에 이성 현감(利城縣監)으로 옮겼는데, 당시 전호(錢胡)가 자주 국경을 침범하므로 공이 또 북병사 이일(李鎰)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습격하여 그들의 소굴[巢穴]을 불태우고 돌아와 전승도(戰勝圖)를 만들어 올렸더니, 선조[宣廟]가 더욱 장려하며 감탄하였다.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 왜적의 변란에는 평사(評事) 정문부(鄭文孚)가 의병(義兵)을 일으키자 공이 무리를 모아 달려가 자신이 선봉(先鋒)이 되어 길주(吉州)와 쌍포(雙浦)에서 왜적과 전투를 벌여 크게 깨뜨렸다. 그 일이 알려지자 발탁되어 종성 부사(鍾城府使)에 임명되었으며, 조금 있다가 영원 군수(寧遠郡守)로 옮겼다.
천계(天啓, 명 희종(明熹宗)의 연호) 임술년(壬戌年, 1622년 광해군 14) 3월 1일 병으로 졸(卒)하였는데, 수(壽)가 73세였다. 그 뒤 갑인년(甲寅年, 1674년 현종 15)에 지금의 봉조하(奉朝賀)인 정승 남구만(南九萬)이 관찰사가 추가로 게시(揭示)한 공의 공적을 조정에 아뢰어 특별히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을유년(乙酉年, 1705년 숙종 31)에 고을의 인사들이 종성부 치소(治所)의 북쪽에다 사우(祠宇)를 지어 봄ㆍ가을로 제사를 받든다.
공의 눈은 눈동자가 겹으로 되어 위엄스러운 모습이 있어 보는 자로 하여금 떨게 할 수 있었고, 날래면서 전투를 잘하여 전투 때마다 번번이 먼저 그가 타던 흰 색깔의 말을 탔다. 그가 순변사공을 따라 출전(出戰)하였을 때에는 적이 순변사공의 깃발과 공이 탄 흰색의 말을 보면 번번히 피하여 도망하였으므로, 그가 향하는 곳에는 대적할 이가 없었다.
그러나 집안에 있으면서는 효도하고 우애하며 예(禮)를 익혀 질서 정연하여 선비의 기풍이 있었다. 묘(墓)는 영인(寧仁)의 신동(新洞) 간방(艮方)을 등진 터에 있다. 배위(配位)는 진씨(陳氏)로 담(霮)의 딸이며, 참교(參校) 문한(文翰)의 손녀(孫女)이다. 공보다 3년 먼저 태어나 공보다 10년 뒤에 몰(歿)하였는데, 묘는 공과 같은 혈(穴)이다.
두 아들을 두었으니 김자(金磁)와 김여(金礪)로 모두 아들과 손자가 있는데, 많아서 다 기재할 수 없다. 공의 증손(曾孫) 김수(金璲)에 이르러 처음으로 공의 행의(行誼)와 실적(實績)을 분류하고 공의 묘소에 비(碑)를 세워 영원토록 전하려고 도모하면서, 정하(靖夏)가 순변사공의 후손이라고 하여 그의 족자(族子) 김성구(金成九)를 시켜 와서 명문(銘文)을 청하였다.
정하가 이미 의리로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고, 또 가만히 순변사공이 인사(人士)를 얻은 것과 공이 끝까지 국가에 충성을 다하면서 순변사공이 알아줌을 저버리지 않은 데에 감격하여, 드디어 위와 같이 차례로 서술하고 위하여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병기와 갑옷을 깔고 자다가 죽어도 싫어하지 않는 것은 이를 북방(北方)의 강함이라고 하는데, 공은 그렇게 지내다가 충성으로 성취시켰도다. 그가 적의 예봉을 꺾고 진(陣)을 함락시키면서 분발하여 자신을 돌보지 않았던 것은, 뜻이 임금을 위하여 원한을 풀려고 하는 데 있어서였으며, 애당초는 대개 공을 세우려고 기약하지 않았지만, 그분을 알아준 이는 우리 선조(先祖)였고 그를 등용한 이는 선조[穆廟]이었도다.
등용하기를 다하지 못하였다고 직질(職秩)이 겹쳐 내린 특별한 은전은, 사사로움이 아니고 공정한 것으로 후세 사람을 권면한 것이니, 이 명(銘)을 보는 사람은 오히려 분발하기를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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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贈兵曹參判金公神道碑銘 幷序。
昔我先祖巡邊公之鎭北邊也, 稱有古名將風, 其一二戰功, 至今爀爀人耳目。 余意當時必有英勇智謀之士, 出入其籌畫韜鈐間, 以共成偉績者, 而莫得而聞, 後始得金公焉。
公諱慶福, 字伯綏, 新羅王溥之後, 貫慶州, 世居雙城之寧仁。 五代祖諱榮老, 丁亥施愛之亂有濟難功, 官高山察訪。 考諱守經, 萬戶。 妣吳氏, 允城之女。 公以嘉靖庚戌生。 爲人奇偉嚄唶, 少事鉛槧, 卽棄去, 中萬曆庚辰武科。 巡邊公時爲穩城, 聞公名, 收爲幕屬。 癸未, 蕃胡尼湯介圍訓戎鎭, 公從巡邊公力戰, 斬獲甚衆。 於是朝廷嘉其功, 擢巡邊公爲北兵使, 而巡邊公又啓奏: “公功爲第一, 宜有褒賞。” 宣廟召見公, 手賜《精忠錄》, 立拜通禮院引儀, 居無何, 出爲長連縣監。
乙酉, 移利城縣監。 時錢胡數犯境, 公又與北兵使李鎰將兵襲之, 焚其巢穴而還, 作《戰勝圖》以上, 宣廟益加奬歎。 壬辰倭變, 評事鄭文孚擧義兵, 公悉衆赴之, 自爲先鋒, 與倭戰於吉州、雙浦, 大破之。 事聞, 擢拜鍾城府使, 尋移寧遠郡守。
天啓壬戌三月一日病卒, 壽七十三。 後甲寅, 今奉朝賀南相九萬以道伯追揭公績, 啓聞于朝, 特贈兵曹參判。 乙酉, 邑人士爲創祠於府治北, 祀以春秋焉。 公目重瞳, 有威容, 能使見者已瘧。 驍而善戰, 每戰輒先登, 所乘馬常色白。 其從巡邊公出戰, 賊見巡邊公旗號與公馬色, 輒避去, 以故所向無敵。 然居家孝友習禮, 循循有儒士風。 墓在寧仁新洞負艮之原。
配陳氏, 霮之女, 參校文翰之孫。 先公三年生, 後公十年歿, 實同兆焉。 有二子曰磁、礪, 皆有子孫, 多不能載。
至公曾孫璲, 始類公行實, 欲立石公墓, 爲永久圖, 以靖夏於巡邊公爲孫也, 而使其族子成九來請銘。 靖夏旣義不敢辭, 而又竊感夫巡
邊公之得士與夫公之終能盡忠於國而不負巡邊公知也, 遂序次如右, 而爲之銘。 銘曰。
衽金革死而不厭, 是謂北方之强, 公則居之, 濟之以忠。 夫其摧鋒陷陳, 奮不顧身者, 志在於敵愾, 初蓋不期乎爲功。 知之者我先祖,
用之者穆廟。 用之不盡, 而爲貤秩之殊典。 匪私于公, 爲後之勸。 視此銘者, 尙宜思奮。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