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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자대전 제172권 / 묘갈명(墓碣銘)
돈암(遯菴) 선우공(鮮于公) 묘갈명( 墓碣銘) 병서(幷序)
은(殷)이 멸망하고 주(周)가 일어나자 성사『聖師: 기자(箕子)를 가리킴』가 동방으로 와 문교(文敎)를 크게 폄으로써 이(夷)가 변하여 화(華)가 되었다. 그러나 세대가 너무 멀고 서울터마저 황망(荒茫)한 데다 자손까지 미미하여 고증할 수 없기가 하(夏)의 기(杞)보다 더한 데가 있다.
본조(本朝)가 성립된 후 문교가 서쪽까지 미치게 되었는데 거기에 선우씨(鮮于氏)로 휘가 협(浹), 자는 중윤(仲潤)이라는 이가 있었다. 성사의 후예로 성사의 옛 도읍지에 태어나 아득한 원류(源流)를 찾고 이미 없어진 서여(緖餘)를 탐색하였다.
그러나 팔조(八條)의 문서가 없어졌고 홍범(洪範)의 뜻은 깊어서 드디어 염락관민(濂洛關閩)의 서적을 놓고 심성 이기(心性理氣)에 관한 모든 학설을 탐구하였는데, 그것은 성사의 심법(心法)이 송(宋) 나라 선비들을 인하여 크게 밝아졌기 때문에 차근차근 근본을 찾기 위하여 그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공은 훌륭하게도 서쪽 지역의 유종(儒宗)이 되었고 그를 따라 배우려고 하는 문도도 매우 많았다. 이에 공은 자리에 올라 강설하면서 오직 성현(聖賢)의 글로써 그들을 일깨웠고 그 때문에 서쪽 지역 선비들이 성리(性理)의 학설을 알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공은 자기가 독학(獨學)으로 고루(孤陋)한 폐단이 있을 것을 염려한 나머지 동남쪽을 유람하기도 하고 각처의 산천을 두루 살피면서 다니다가 결국 도산서원(陶山書院)에 발길이 닿았다. 거기에서 이 선생『李先生: 이황(李滉)을 가리킴』의 유서(遺書)와 거기 소장된 여러 책들을 열람하고, 다시 인동(仁同)으로 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장 선생(張先生)을 찾은 다음 며칠을 묵다가 돌아와 그 길로 사서(四書) 등에 주력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도(道)가 여기 있는데 딴 데서 찾을 것이 무엇인가.”하고는 제생(諸生)들과 함께 용악산(龍岳山)으로 들어가 강독(講讀)하고 교수하기를 거의 몇 십 년을 하였다.\
나라에서 여러 번 직책을 제수하였지만 모두 나아가지 않았고, 인조(仁祖) 말엽에 성균 사업(成均司業)이 되었다. 인조가 승하하자 궐하(闕下)에 부곡(赴哭)하였다. 그때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김 선생이 부름을 받고 서울에 와 있었는데, 공은 또 예물을 들고 찾아가 뵈었다.
김 선생은 조용하고 정답게 그를 대하면서 매우 정민(精敏)하다는 칭찬을 되풀이하였는데 공은 곧 자기 고장으로 돌아갔다.
효종대왕(孝宗大王)이 사방의 어진 선비들을 불러 모으면서 공을 다시 사업(司業)으로 부르고, 뒤이어 본도(本道)에 영을 내려 빨리 보내도록 하였으나 공은 사양하고, 곧이어 상소하기를,
“《대학(大學)》은 규모가 크고 절목(節目)이 갖추어져 있어 바로 도(道)에 들어가는 문이고 모든 경전의 강령(綱領)이오니, 제왕(帝王)으로서 하루에 1, 2단(段)씩 익히 읽고 정(精)하게 생각하여 그 속에 담겨진 지극한 이치가 자신의 마음과 융합이 되게 한 뒤라야 그것을 응용(應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고, 또 아뢰기를,
“덕성(德性)을 높여 이 마음을 함양(涵養)해야만 대본(大本)이 서는 것입니다.
참으로 장중하고 겸허하고 엄숙하고 두려워하는 태도로 이 마음을 간직하여 물욕(物欲)이 동요시킬 수 없는 경지가 되면 사리를 관찰할 때 어디를 가거나 통하지 않을 이치가 없고, 그것을 정치에 응용하면 무슨 일을 처리하더라도 맞지 않을 이치가 없을 것입니다.”하였으며, 또 이뢰기를,
“마음이란 일신(一身)의 주인으로서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의 성품을 갖추고 있고, 그것이 발동하여 측은(惻隱)ㆍ수오(羞惡)ㆍ사양(辭讓)ㆍ시비(是非)의 감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른바 ‘마음이 성품과 감정을 통솔하고 있다.[心統性情]’는 것입니다.
마음은 하나뿐이지만 그것이 성명(性命)의 바른 데서 기원했을 때는 도심(道心)이 되는 것이고, 형기(形氣)의 사사로움에서 싹트면 인심(人心)이 되는 것입니다. 왕자는 반드시 경(敬)을 주로 삼고 독공(篤恭)하며 정밀하게 살피고 전일하게 지켜서 언제나 도심이 일신의 주(主)가 되어 인심이 그의 명령만을 듣게 한다면, 인심의 위태로운 것이 안정이 될 것이고 도심의 미약한 것이 확실하게 나타나 무슨 일을 하거나 중(中)이 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대체로 마음이란 허령(虛靈)하고 신묘(神妙)하여 그 체(體)가 방촌(方寸 마음을 말함) 속에 다 들어 있어 크기가 천지(天地)와 같고, 그 용(用)은 눈에 보이지 않은 데서 나와 천지와 흐름을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크기로 말하면 무외(無外)에 극(極)하여 포괄되지 않은 것이 없고 또 작기로 말하면 아무런 형체가 없으면서도 만물이 거기에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처음 외물에 감동되기 이전에는 맑고도 성성(惺惺)하여 마치 거울 그 자체나 형평을 유지하고 있는 저울 같고, 일단 외물에 감동되면 그 감동을 주는 애상에 따라 연치(姸媸 호오(好惡)와 고하(高下)가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어서 비록 사람의 마음이지만 결국 하늘 마음과 합치되어 하늘과 사람이 똑같게 되는 것입니다.”
하였고, 또 아뢰기를, “천도(天道)는 만물을 생육하는 것을 마음으로 삼아 영원히 쉬지 않고, 지도(地道)는 만물을 형성하는 것을 마음으로 삼아 그 일에 쉬지 않고, 왕도(王道)는 하늘과 땅이 하는 일을 마음으로 삼아 그를 본받아 쉬지 않는 것이니, 이 세 가지 쉬지 않음이 본분은 비록 다르지만 이치는 일반입니다.
천지(天地)의 도(道)는 항상 보여 주는 것이고[貞觀], 일월(日月)의 도는 항상 밝혀 주는 것이며[貞明], 왕자(王者)의 도는 항상 큰 본보기가 되는 것이니[貞夫大觀] 이 세 개의 정(貞)도 이치는 일반입니다. 그러므로 천지가 변함이 없이 생육ㆍ형성할 수 있고, 일월이 변함없이 만물을 비출 수 있으며, 성인(聖人)은 도(道)의 변함이 없이 천하(天下)를 화성(化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왕자가 하늘의 도를 본받아 덕(德)을 닦고 도(道)를 융화되게 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하였으며, 또 아뢰기를, “요순(堯舜)은 중화(中和)의 도를 다함으로써 하늘과 땅이 제 위치를 지키게 한, 백왕(百王)ㆍ천성(千聖) 중의 으뜸가는 분입니다.
그의 도는 현미(顯微)의 구별이 없고, 내외(內外)의 구별도 없이 선후(先後)와 본말(本末)이 일관(一貫)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는 절목은 군신(君臣)ㆍ부자(父子)ㆍ형제(兄弟)ㆍ부부(婦夫)ㆍ붕우(朋友)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요순의 마음가짐으로 요순의 정치를 실행한다면 요순이 되기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하니, 상이 답하기를, “마음을 다스리고 이치를 궁구하는 요체가 그보다 더 큰 것이 없겠다. 내 마땅히 가슴에 새겨 잊지 않으리라.”하였다.
그해 9월에 또 대장(大葬)에 달려갔다가 돌아왔는데, 상이 교서를 내려 특소(特召)하자 대궐에 이르러 사은하고 며칠을 머물렀으나 인대(引對)하지 못하였다. 공의 처음 생각에는 포의(布衣)로 부름을 받는 것이 고사(故事)가 있는 일이기에 한번 와서 임금을 뵙고 평소 닦았던 학문을 남김없이 개진하려 했던 것인데, 생각대로 되지 않으므로 그대로 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그후 상이 그것을 알고는 그가 떠나는 것을 아뢰지 않았다 하여 후사(喉司 승지(承旨)를 말함)를 꾸짖었는데, 그해 12월 22일 드디어 졸(卒)하고 말았다. 공이 임종할 때 치상(治喪) 범절을 모두 예문(禮文)에 따라 할 것을 유언하고 또 부인들을 모두 나가게 하였다.
서쪽 지방 노소(老小)ㆍ귀천(貴賤)할 것 없이 달려와 울음을 터뜨리는 자들이 길에 잇달았다. 공이 살던 평양부(平壤府) 서쪽 연대산(煙臺山)에 장례를 모시고, 공의 문인들이 묘 앞에다 ‘돈암 선생(遯菴先生)’이라고 썼다. 왕은 부의(賻儀)를 내리도록 명하였다.
그후 연신(筵臣)이 아뢰기를, “선우협(鮮于浹)은 학업이 매우 독실하였고 식견도 높아서 관서(關西) 사람으로서 다소 추향(趨向)을 알게 된 것이 모두 그 사람의 힘이었습니다.”하니, 상께서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를 추증하도록 명하였고, 평양과 태천(泰川) 사람들은 각기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 아들 즙(擑)이 뒤를 이어 숭인전 감(崇仁殿監)이 되었다.
선우씨의 족보에 의하면, 은(殷)의 태사(太師)가 조선(朝鮮)에 와 임금이 되어서 아들 중(仲)을 두었는데 그의 식읍(食邑)이 우(于)여서 인하여 복성(複姓)을 삼았었다. 고려 시대에 이름 정(靖)이라는 이가 중서 주서(中書注書)를 하였고, 석(碩)은 죽주 부윤(竹州府尹)이었으며, 적(廸)은 소윤(小尹)이었다. 본조(本朝)에 와서 경(景)은 신호위 중령별장(神虎衛中領別將)이었고, 그의 아들 선(火+菫)은 건공장군(建功將軍)이었으며, 그의 아들 강(江)은 사정(司正)이었는데, 그가 공의 5대조(祖)이다.
고조(高祖)는 침(琛)이요, 증조는 난(鸞)인데 다 교수(敎授)였고, 조부 춘(春)은 주부(主簿)요, 아버지 식(寔)은 숭인전 감이다. 대대로 태천에 살다가 숭인전 감 때 평양으로 왔다. 숭인전은 평양에 있는데, 태사(太師)의 사당으로 선우씨가 대대로 감(監)이 되고 있다. 어머니는 경주 이씨(慶州李氏)로 어모장군(禦侮將軍) 억수(億壽)의 딸인데, 만력(萬曆) 무자년(1588, 선조21)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정명(精明)하고 단결(端潔)했으며 언제나 언행(言行)을 삼가고, 겨우 여덟 살 때 도보로 몇 백 리를 걸을 만큼 굳세고 힘도 있었다. 항상 족성(族姓)들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은 성인(聖人)의 후손이니 반드시 효(孝)ㆍ제(悌)ㆍ충(忠)ㆍ신(信)을 힘써 행함으로써 선조를 욕되게 말아야 합니다.’ 하니 족성들이 모두 ‘아이가 무엇을 알기에 이런 말을 하는가. 우리들이 노력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한번은 꿈에 태사로 보이는 이가 나타나 시를 주기에 그것을 관부(官府)에 바쳤다. 관부에서는 곧 나라에 청하여 태사의 사당과 분묘를 개수(改修)한 일이 있었는데, 평양부 북쪽에 있는 태사의 분묘가 오랫동안 묵어 있었던 때였다.
공은 22세 때 처음으로 향선생(鄕先生) 김태좌(金台佐)에게 나아가 사서(四書)를 배웠는데 3년 동안 그것을 숙복(熟複)하고 나서야 비로소 《시경(詩經)》ㆍ《서경(書經)》ㆍ《춘추(春秋)》를 배웠다. 공이 《서경》을 배울 때 ‘기삼백(朞三百)’에 이르러 김공이 알 수 없다 하여 그냥 넘기려 하자, 공은 그 길로 문을 닫고 앉아 수십 일을 두고 연구 끝에 결국 알아내었다. 김공은 기뻐서 말하기를, “이 사람은 후일에 반드시 대성(大成)할 것이다.”하였다.
28세에서 32세까지 4년 동안에 연거푸 부모(父母)의 상을 당했는데 초상 때나 제사 때 모든 범절을 《가례(家禮)》대로 하였고, 또 김공의 상에도 아버지 상을 당했을 때와 같이 하니 그의 아내 김씨가 말하기를, “공께서 심상(心喪)을 입는데 나도 그냥 지낼 수 있는가.”하고는 3년 동안 고기를 먹지 않았다.
거처가 비바람을 가릴 수 없었고, 처자가 기한(飢寒)을 면치 못하였지만 처신하는 것은 여유가 있었으며, 혹 인물을 논평하거나 정령(政令)을 시비하는 사람이 있으면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고을 사람들이 누구 할 것 없이 애모(愛慕)하고 화복(化服)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공의 학문하는 방법은 마음을 쏟고 힘을 다하여 조금도 게으른 빛이 없었으며, 알기 전에는 그만두지 않고 기갈(飢渴)까지도 잊었으며, 소득이 있으면 곧 그것을 책에다 적어 놓았다. 밤이면 베개에 기댄 채 눈을 붙이는 둥 마는 둥하다 잠을 깨서는 이불을 끼고 앉아 혹 아침까지도 그대로 앉아 있기도 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학문이 요령을 얻지 못하여 30년 공부를 헛되이 소비하고 늘그막에야 조금 얻은 것이 있었다.”하였고, 또 마음을 간직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말을 하였다. 《태극변해(太極辨解)》ㆍ《태극문답(太極問答)》과 성리(性理)에 관한 저술들이 집에 소장되어 있는데, 그 대의(大義)는 모두 정주(程朱)의 서여(緖餘)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그중에는 아직 정리되지 못한 학설들이 있는데, 하늘이 만약 그에게 수명을 더 주었더라면 반드시 정밀한 정정(訂正)을 가하여 후학들에게 끝없는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아, 지금 태사(太師) 때부터 2천 7백년이나 되었는데도 그 계출(系出)을 역력히 엮을 수 있다는 그 일만도 매우 어려운 일인데, 더구나 그 전해지지 못했던 찾기 어려운 일까지 찾아내기 위하여 자나 깨나 옛일을 더듬으며 분발하고 흥기함으로써 학설을 수립하여 교훈을 남겼고, 《주역》과 홍범(洪範)까지 논술하였다.
기축년(1649, 인조 27) 효종대왕(孝宗大王)에게 진언(進言)했던 것으로 말하면 모두 민락(閩洛)의 학설에서 벗어남이 없이 황극(皇極)의 부언(敷言)까지 거슬러 올라갔으므로 우리 성조(聖祖)는 그를 겸허한 자세로 받아들이고 또 추장하여 ‘내 마땅히 가슴에 새겨 잊지 않으리라.’ 하였으니 대왕의 그 치우침 없이 회귀(會歸)시킨 규모와 도량도 여기에서 함께 엿볼 수 있다 하겠다.
서쪽 지방 사람들이 공의 법도 있는 행동을 보고 처음에는 비웃다가 중간에는 믿었고 끝에 가서는 이의 없이 존상(尊尙)하여, 그들로 하여금 성현(聖賢)을 사모할 줄 알고 성리학도 밝혀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였으니 그의 공로 또한 크다 하겠다. 그것은 성조(聖朝)의 교화가 점진적으로 미쳐 갔기 때문이고 또는 태사의 영령이 말없이 도운 소치이기도 한 것이다.
그 지방 사람들이 그의 사당에 사액(賜額)을 청하는 상소를 하였는데, 조정 논의가 쉽게 결정되지 않았다. 내가 동춘 송준길과 함께 홍명하(洪命夏)에게 말하기를, “그가 서쪽 지방의 우뚝한 인물로 뜻을 돈독히 하고 애써 실천하여 결국 성리의 학설로 그 지방 사람들을 일깨웠으니 참으로 호걸스러운 선비이다. 국가에서 표장(表章)할 데가 그보다 더한 데가 어디 있겠는가.”하였더니, 홍공이 말하기를, “그들이 만약 다시 청해 온다면 내가 힘써 주장하겠다.”하였다.
이번에 공의 문하(門下) 사람들이 공의 묘 앞에 비석을 세우려면서 이군 담(李君橝)이 쓴 행장을 들고 와 나에게 이 글월을 청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기자가 은(殷) 나라 망하매 / 箕子明夷
동으로 와 홍범구주 폈네 / 東來敍疇
멀고 먼 그 전통이 / 遙遙厥緖
그 원류 있었기에 / 厥有源流
오직 공이 그를 이어받는 것 / 惟公寔承
우 임금에 구양씨 같았네 / 如禹之歐
어찌 애경하지 않을 건가 / 曷不愛敬
더구나 그후인 것을 / 矧惟其侯
항상 분연한 말로 내가 / 恒奮曰余
전통이야 비록 멀지만 / 玄緖雖悠
전래된 기운이 같고 / 一氣攸傳
성품도 서로 같은데 / 性亦相猶
감히 그 길을 버리고 / 敢棄其道
즐겨하지 않고 가지 않을 것인가 / 不耽不由
더구나 정자(程子) 주자(朱子)가 있어서 / 況有程朱
오묘한 이치 밝혀 놓았거늘 / 闡發眇幽
본받을 법이 매우 가까워 / 觀法甚近
그 길로 가면 되는 것을 / 由此可求
성의 다하여 사색하며 / 覃思苦索
조금도 쉴 줄 몰랐다네 / 罔或敢休
깊고 은미한 그 이치를 / 其奧其微
찾고 또 찾아내어 / 式探式鉤
학문이 높아지자 / 學旣有得
스승되기에 족하였네 / 爲師則優
예와 효제의 법 / 禮順孝悌
공 때문에 닦아졌고 / 由公而修
횡포하고 방종한 무리 / 暴傲誕逸
공 때문에 움츠렸다네 / 由公而羞
높은 이름 멀리 퍼져 / 皐音旣亮
임금 귀에 들리더니 / 爰徹冕旒
두 번 세 번 벼슬로 불러 / 旌招鼎至
좋은 계책 아뢰라 하니 / 盍告嘉猷
요순의 법 다 아뢰고 / 上陳堯舜
주공(周公) 공자(孔子)의 도와 함께 / 下曁孔周
민중(閩中) 낙양(洛陽) 다 들먹여 / 以及閩洛
임금의 뜻 일깨우니 / 以啓以抽
임금이 옳다 하고 / 上曰兪哉
덕의 은미함 털 같다 했네 / 實如毛輶
임금의 사랑 높아갈 즈음 / 睿眷斯隆
공이 갑자기 세상을 뜨니 / 公魂忽遊
백부가 복을 입고 / 百夫緦麻
서쪽 고을이 모두 슬픔에 잠겼네 / 痛纏西陬
훌륭한 행장 밝히려 하여 / 侔高狀明
무덤 앞에 비를 세우고 / 有碣斯丘
내가 이 명을 지어 / 我作銘文
천추에 알리는 것이네 / 以詔千秋
ⓒ한국고전번역원 | 양홍렬 (역) |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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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遯菴鮮于公墓碣銘 幷序
殷滅周興。聖師東來。文敎聿敷。變夷爲華。然曆世綿遠。則邦畿荒茫。子姓陵替。其不足徵。有甚於夏之杞矣。本朝受命。文敎西被。乃有鮮于公諱浹字仲潤。以聖師之裔。崛起於麥秀之地。寤寐玄源。探賾墜緖。然而八條籍去。洪範義奧。遂從濂洛關閩之書。求其心性理氣等諸說。蓋聖師心法。得宋儒而大明焉。沿流而溯源。自有次第也。於是公蔚然爲西土儒宗。徒弟之從而學焉者甚衆。公遂升席講說。一以聖賢之書啓迪焉。自是西土之士。能知性理之說矣。公猶自病其獨學而孤陋也。遂遊東南。旣遍觀山川。而卒至陶山書院。閱李先生遺書及院中所藏編帙。因往仁同。拜張旅軒先生。數日而歸。遂溫燖四子等書曰。吾道在是。何暇他求。遂與諸生入龍岳山。講讀敎授者。殆數十年矣。朝廷屢授以職而不就。仁祖末年。嘗以爲成均司業。仁祖昇遐。赴哭闕下。時愼獨齋金先生赴召在京。公又執贄進謁。先生從容款晤。亟稱其精敏。卽西歸。孝宗大王收召四方賢士。復以司業召公。仍令本道敦遣。公辭。因上疏曰。大學一篇。規模大而節目備。乃入道之門戶。群經之綱領。爲帝王者。一日只將一二段 。熟讀精思。硏幾至理。與心爲一。然後可以致其用矣。又曰。尊德性以涵養此心而後。大本立矣。誠能嚴恭寅畏。常存此心。而不爲物欲之所侵亂。則以之觀理。將無所往而不通。以之爲政。將無所處而不當矣。又曰。心爲一身之主。而具仁義禮智之性 。發而爲惻隱羞惡辭讓是非之情。此所謂心統性情者也。心一也。而原於性命之正者則爲道心。生於形氣之私者則爲人心。王者必居敬篤恭。精以察之。一以守之。使道心常爲一身之主。而人心每聽命焉。則人心之危者安。道心之微者著。而見於事爲者 。無不得其中矣。蓋心之爲物。虛靈神妙。其體具於方寸。而與天地同其大。其用發乎至微。而與天地同其流。是故其大極於無外而無不包。其細入於無倫而無不貫。方其物之未感也。澄然惺惺。如鑑空而衡平。及其旣感也。姸媸高下之應。無不當者。則人心可以合天心。而與天爲一矣。又曰。天道以生物爲心。而於穆不已。地道以成物爲心。而塡嶷不已。王道以生成爲心。而純亦不已。此三不已者。分雖殊而理則一也。天地之道。貞觀者也。日月之道。貞明者也。王者之道。貞夫大觀者也。此三貞者。亦一理而已。是故天地恒久而能生成。日月恒久而能照物。聖人恒久於道而能化成天下。王者可不體天道而修德凝道乎。又曰。堯舜天地中和之至。而爲百王千聖之祖宗者也。其爲道無顯微無內外。先後本末。一以貫之。而其目不出乎君臣父子兄弟夫婦朋友之間而已。以堯舜之心。行堯舜之政。則其爲堯舜也何有。上答曰。治心窮理之要。莫此爲大。予當服膺而勿忘也。其九月。又赴大葬而還。癸巳。上下敎特召之。詣闕謝恩。留數日。未蒙引對。公始意布衣被徵。自有故事。蓋欲一至殿陛。陳說所學。而不如所圖。故遂退歸。後上覺之。責喉司以不以其去上聞也。是年十二月二十二日卒。卒時遺命治喪。一從禮文。麾去婦人。西人無老少貴賤。奔走來哭者。屬於道。葬于所居平壤府之西煙臺山。門人題其墓曰遯菴先生。上命致賻儀。後筵臣啓曰。鮮于浹學業甚篤。見識亦高。關西士子稍知趨向者。皆此人之力也。上命贈司憲府執義。平壤及泰川人。各立祠俎豆之。所後子檝嗣爲崇仁殿監。鮮于譜曰。殷大師君于朝鮮。而有子仲食邑於于。因以爲複姓。高麗時有名靖。爲中書注書。碩爲竹州府尹。迪爲少尹。本朝。景爲神虎衛中領別將。其子熯爲建功將軍。其子江爲司正。於公爲五代祖。高祖琛。曾祖鸞。皆爲敎授。祖春主簿。考寔崇仁殿監。世居泰川。至崇仁公。始還平壤。崇仁殿在平壤。是大師廟。鮮于氏世爲監。妣慶州李氏。禦侮將軍億壽女。 萬曆戊子生公。公自幼精明端潔。言行常謹。八歲時。能徒步數百里。其強有力又如此。常謂族姓曰。吾輩聖人之後也。必須敦行孝悌忠信。期以無忝矣。族姓皆曰童子何知。而其言如此。吾輩敢不自飭。嘗夜夢若有大師贈詩者。遂以呈官府。官府卽請於朝 。修大師祠墓。大師墓在平壤府之北。其蕪沒蓋久矣。二十二歲。始就鄕先生金公台佐學。四子熟複三年。而始受詩書易春秋。其受書傳也。至期三百。金公辭以不能解。公遂閉門尋究數十日而通曉。金公喜曰。此君他日必能大成。自二十八歲。至三十二四年之間。連遭考妣喪。其喪祭一如家禮。又於金公。若喪其父焉。其內子金氏曰。公旣行心喪。吾何心獨如平日。亦三年不肉 。所居不蔽風日。妻子不免飢寒。而處之裕如。或有評論人物是非政令者。則輒閉口不答。以故鄕人無愚智。無不愛慕而化服焉 。蓋公爲學。苦心極力。未嘗少懈。不得不措。至於飢渴都忘。有得則筆之於書。夜則倚枕假寐。旣寤則擁衾而坐。或至達朝。嘗曰。學不得其要。枉費三十年工夫。旣老而稍有所得。又嘗言操心之甚難。所著有太極辨解,太極問答,性理諸書藏于家。蓋其大義悉本於程,朱之緖餘。而其少有出入者。則未及訂定焉。使之天假之年。則必加精密。以幸後學於無窮矣。嗚呼。今去大師之世二千七百年之遠。而其系出歷歷可譜。斯已難矣。而矧其不可傳者。益難尋矣。乃能奮發興起。寤寐古昔。立言垂訓。論說易範。至於己丑之歲。所以進言於孝廟者。不出於閩洛之緖言。而上溯乎皇極之敷言矣。我 聖祖虛受而嘉奬。至曰予當佩服。其蕩平會歸之規模度量。此亦可見矣。西土之人。見公之繩趨尺步。始而笑。中而信。其終也翕然尊尙之。皆知聖賢之可慕而性理之可明。其功盛矣。斯蓋聖朝漸被之化。而亦豈非大師之靈默佑而致然耶。西人嘗上疏請賜祠額。朝議靳之。余與同春宋公浚吉言於洪公命夏曰。此人崛起西土。篤志力行。能以性理之說。啓發群蒙。眞所謂豪傑之士也。國朝表章之地。豈皆踰於此乎。洪公曰。彼若更請則將力爲主張云矣。今公門下諸人。將樹石于公墓。而以李君橝之狀。來請余文。銘曰。
箕子明夷。東來敍疇。遙遙厥緖。厥有源流。惟公寔承。如禹之歐。曷不愛敬。矧惟其侯。恒奮曰余。玄緖雖悠。一氣攸傳。性亦相猶。敢棄其道。不耽不由。況有程,朱。闡發眇幽。觀法甚近。由此可求。覃思苦索。罔或敢休。其奧其微。式探式鉤。學旣有得。爲師則優。禮順孝悌。由公而修。暴傲誕逸。由公而羞。皐音旣亮。爰徹冕旒。旌招鼎至。盍告嘉猷。上陳堯舜。下曁孔周。以及閩洛。以啓以抽。上曰兪哉。實如毛輶。睿眷斯隆。公魂忽遊。百夫緦麻。痛纏西陬。侔高狀明。有碣斯丘。我作銘文。以詔千秋。<끝>
宋子大全卷一百七十二 / 墓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