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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8. 11. 11. 16:36
[생졸년] 1550년(명종 5) ~ 1574년(선조 7) / 향년 24세
■ 증(贈)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 이공(李公) 묘갈명(墓碣
銘) 병서(幷序)
공의 휘(諱)는 대건(大建)이요, 자(字)는 경지(慶之)이다.
경주 이씨(慶州李氏)는 원래 그 선조가 알평(謁平)이라는 이인(異人)이니, 호암(瓠巖) 아래에서 태어나 실로 신라(新羅)의 개국(開國)을 도왔다고 전해진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대대로 명가(名家)의 전통을 이어왔는데, 급기야 고려(高麗) 말에 이르러서는 문하시중(門下侍中) 문충공(文忠公) 휘 제현(齊賢)이 덕업(德業)과 문장으로 천하에 이름을 드러냈으므로,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익재 선생(益齋先生)이라고 일컫고 있으니, 이분이 바로 공에게 10세조가 된다.
본조(本朝)에 들어와서는 6세조 휘 윤인(尹仁)이 관찰사(觀察使)를 지냈고, 고조 휘 공린(公麟)이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현령(縣令)에 이르렀다.
증조 휘 원(黿)은 예조좌랑(禮曹佐郞)으로 호(號)가 재사당(再思堂)인데, 김 한훤(金寒暄) 굉필(宏弼)과 함께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의 문하에서 노닐었으며, 무오사화(戊午史禍)가 일어나자 김 탁영(金濯纓) 일손(金馹孫)과 함께 처벌을 받았다가 갑자사화(甲子士禍) 때에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뒤에 신설(伸雪)되어 도승지(都承旨)를 추증 받았는데, 남 추강 효온(南秋江 孝溫)의 《사우록(師友錄)》에 그 행적이 드러나 있다. 조부 휘 발(渤)은 좌통례(左通禮)를 추증 받았는데, 이 뒤로는 공의 자제인 지금의 관찰사(觀察使)가 귀하게 된 덕분에 증직(贈職)의 은혜를 받게 되었다.
좌통례는 재사당(再思堂)의 아우인 생원(生員) 휘 타(鼉)의 후사(後嗣)로 들어갔다.
집안이 화를 당한 나머지 형제들이 흩어져 외가(外家)에 거(居)하게 되었는데, 제천(堤川)에 터를 잡고 살게 된 것은 생원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생원 역시 기상이 있고 절조가 있기로 유명하였다.
부친인 휘 경윤(憬胤)은 좌승지(左承旨)를 추증 받았다. 모친 원주이씨(原州李氏)는 병절교위(秉節校尉) 은(垠)의 딸인데, 가정(嘉靖) 경술년(1550, 명종 5)에 제천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남다르게 청수(淸秀)한 면모를 보여 주었으며, 일단 철이 들고 나서는 부형(父兄)의 훈계를 들을 때마다 가슴속에 새기고서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족인(族人)의 집이 주천(酒泉)이라는 이름의 옛 고을에 있었는데, 공이 8세 때에 그곳을 찾아갔다가 한 구절을 지어 말하기를, “주천에 술은 없고 견문만 새롭더라.[酒泉無酒見聞異]”라고 하자, 식자들이 재치 있게 대응하는 그 재주를 기이하게 여겼다.
좌승지공의 생각에, 자신이 활쏘기와 말 타기를 일삼고 있는 만큼 자제를 가르치는 올바른 방도가 못 된다고 걱정하고는, 청주(淸州)에 있는 종숙부(從叔父) 이 징사 잠(李徵士 潛)에게 세 아들을 모두 맡기기로 작정하였다. 그중에 둘째 아들이 바로 공이었는데, 이때 공의 나이 15세였다.
징사가 공의 기상이 호쾌하고 뜻이 순수한 것을 알아보고는, 이런 인재를 얻어서 교육시키는 것을 기쁘게 여긴 나머지 공을 섬계 서당(剡溪書堂)에서 공부하게 하였다.
그러고는 자유롭게 노닐면서 스스로 공부하도록 그냥 놔두었을 뿐, 날마다 과정(課程)에 따라 학업을 닦도록 심하게 다그치지 않았는데, 마침내는 일취월장(日就月將)하여 몇 년이 채 지나지 않은 사이에 글과 품행 모두가 몰라보게 발전하였다.
이때 섬계에 와서 공부하는 자들이 항상 수십 명을 밑돌지 않았는데, 공을 앞서는 자는 한 명도 있지 않았다.
무진년(1568, 선조 1)의 증광(增廣) 향시(鄕試)에 응시하여 생원과(生員科)와 진사과(進士科) 모두에 입격(入格) 하였으나, 예부(禮部)의 시험에는 낙방하였다.
이듬해에 목백(牧伯) 유중영(柳仲郢)이 한 지방의 사자(士子)들을 모아 기예(技藝)를 시험하였는데 공이 수석을 차지하였다. 이때 서애 유성룡(西厓 柳成龍) 상공(相公)이 수찬(修撰)으로 재직 중에 어버이를 뵈러 내려와 있다가, 공의 글을 보고는 훌륭하다고 칭찬하면서 앞으로 국사(國士)가 되겠다고 장려하였으므로, 이로 인하여 공의 명성이 한 지방 안에 널리 퍼졌다.
경오년(1570, 선조 3) 무렵에 수암(守庵) 박지화(朴枝華)가 청연「淸淵 청안(淸安)의 옛 이름/오늘날 충북 괴산의 옛 지명」의 오촌(烏村)에 우거(寓居)하고 있었다. 이에 공이 나아가서 《논어(論語)》에 대해 질의하였는데, 의심할 만한 곳을 의심하고 질문할 만한 곳을 제대로 질문하면서 확실히 알 때까지 포기하지 않자, 수암이 입이 닳도록 칭찬하면서, “우리 수재(秀才)가 앞으로 얼마나 발전할지 헤아릴 수가 없다.”고 하였다.
공은 글을 읽을 줄 알면서부터 옛사람이 말한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이미 뜻을 두고 있었다.
그러다가 《논어》를 읽게 되자 그 뜻을 탐구하며 음미하는 데에 온 정신을 쏟으면서 내면으로 마음을 함양(涵養)해 나가고 외면으로 행동을 교정(矯正)해 나갔다.
그리하여 날마다 새롭게 변화되는 것을 자각하는 가운데 다시는 이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으니, 공이야말로 손으로는 춤을 추고 발로는 굴러서 뛰는 경우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 뒤로는 비록 어버이의 명을 받들어 과거 공부를 그만둘 수는 없었지만 그 뜻만은 어떤 상황에서도 동요되지 않았다. 임신년(1572, 선조 5)에 도회소(都會所/조선시대, 선종과 교종의 본산)에서 여름철 시험을 보일 때 공이 매번 출중한 성적을 거두자 함께 응시한 자들이 시기하는 발언을 하였다.
이에 공이 그들과 선두를 다투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응시를 그만둔 적도 있었으나 결국에는 공이 수석으로 뽑히게 되었고, 또 이를 통해서 응시 자격을 얻어 계유년(1573)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그리하여 일단 태학(太學)에서 노닐게 되자, 사방의 선비들이 벗으로 지내기를 청하면서 혹시라도 남에게 뒤질까 공에게 모여들었는데, 이는 대개 공의 문장 실력을 부러워해서였을 뿐만이 아니라 공의 도의(道誼)가 그들보다 앞섰기 때문에 이처럼 믿고 따르는 자들이 많았던 것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는 조정의 어진 사대부들도 공을 인정하며 예우하기에 이르렀는데, 일찍이 교외(郊外)에 나가 얼음을 밟으면서 지은 절구(絶句) 한 수를 보면 공의 학문이 얼마나 공경(恭敬)을 위주로 하고 있었던가를 알 수가 있다.
어느 날 ‘제외 양중 잠(制外養中箴)’이라는 제목으로 과시(課試)를 보일 때 공의 작품이 2등을 차지하였는데, 좨주(祭酒)인 허 초당「許草堂 허엽(許曄)」이 이치를 깊이 궁구한 공의 글을 사랑한 나머지 여러 번이나 사람들에게 거론하면서 더욱 특별히 공을 예우하며 중하게 여겼다.
갑술년(1574, 선조7) 정월에 청주(淸州)의 향리로 돌아갔다가 섬계서당(剡溪書堂)에서 병에 걸리고 말았는데,병중에도 아끼는 벗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직접 붓을 잡고 애써 제문(祭文)을 지어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병세가 마침내 위독해진 나머지 그해 3월 20일에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때 공의 나이 25세였다. 이에 공의 형제와 친구들이 공의 시신을 청주 북쪽 목령(鶩嶺) 아래에 초빈(草殯)하였다가 한 달이 지나고 나서 이 산에다 안장(安葬)하였다.
여기에서 공의 뜻과 행실을 살펴본다 하더라도 공의 일생에 비추어 보면 열에 둘이나 셋도 못 된다고 하겠지만, 그런 중에서도 뚜렷하게 사람들의 눈과 귀에 남아 있는 것들을 예로 들어 소개해 볼까 한다.
공은 친가(親家)가 매우 빈한하였으므로,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도 항상 자기가 가지 못하는 대신 노복(奴僕)으로 하여금 쌀을 짊어지고 가서 어버이에게 바치게 하였으며, 맛 좋은 식료품이나 의복 감 하나를 얻었을 때에도 먼저 어버이에게 바치지 않고서는 차마 자기가 먼저 손대지 못하였다.
그런가 하면 형인 군수공(郡守公) 대수(大遂)가 공보다 겨우 세 살 위였는데도 마치 엄부(嚴父)를 대하듯 깍듯이 섬겼으며, 아우인 대적(大迪)의 공부가 늦어지자 온 마음을 기울여 우애 있게 가르쳐서 둘이 함께 상사(上舍)에 오르기도 하였다.
공은 또 모친을 일찍 여의었는데도 추복(追服)을 입지 못한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 나머지, 기일(忌日)이 돌아올 때마다 예법에 지나칠 정도로 재계(齋戒)하고 소식(素食)하는 일에 정성을 쏟았다. 그리고 징사공(徵士公)에 대해서도 삼여일(三如一)의 의리에 입각하여 극진하게 섬기려고 노력하였다.
배필(配匹)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가까이 지내야 할 때와 떨어져 있어야 할 때를 분별해야 하는 도리에 충실하였다.
그리하여 병이 들어 장차 목숨이 끊어지려 할 때, 부인과 고작 20리 거리에 떨어져 있었는데도 찾아오지 못하게 하고서 마지막 가는 길을 바르게 하였다.
공은 또 뜻을 같이하는 벗이 위급한 상황을 맞았을 때에는 반드시 구해 주려고 노력하였는데, 그가 비록 전염병에 걸렸더라도 구애받지 않고 반드시 달려가서 문병하였으며, 평소에 서로 약속한 일에 대해서는 반드시 실천에 옮겼다.
이러한 일들 모두가 공으로서는 심상한 일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지만, 보통 사람들로서는 해내기가 어려운 일이었다.
공이 죽자 장례에 필요한 물품들을 모두 경외(京外)의 친구들이 주선해 주었으며, 애도하는 글을 지어 먼 지방에서 찾아온 계서(雞黍)의 벗들도 적지 않았다. 공의 배필인 안동김씨(安東金氏) 부인은 상락공(上洛公) 방경(方慶)의 후손인 부사직(副司直) 도(燾)의 딸이다.
슬하에 2남을 두었으니, 장남인 시발(時發)은 기축년(1589, 선조 22) 문과(文科) 출신으로 현재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이고, 차남 시득(時得)은 유복자(遺腹子)로 태어나 병오년(1606, 선조 39)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지금 현감(縣監)으로 있다.
관찰사는 진사(進士)인 여흥(驪興 여주(驪州)의 옛 이름) 민경남(閔敬男)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3녀를 낳았는데, 딸은 이정(李竧)에게 출가하였고 나머지 딸과 아들은 아직 어리며, 측실 소생의 3남도 모두 어리다.
현감은 사과(司果)인 문화(文化) 유희연(柳希淵)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신축년(1601, 선조 34)에 관례에 따라 공에게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추증하였고, 을사년(1605, 선조38)에 다시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올려 추증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호암에서 상서로운 분 태어나면서 / 瓠巖降祥(호암강상)。
신라의 운세가 펼쳐지기 시작했고 / 羅運伊始(라운이시)。
고려조에 익재 선생이 출현하시어 / 益齋于麗(익재우려)。
문풍(文風)이 쇠했다가 다시금 일어났네 / 文衰爲起(문쇠위기)。
우리나라 일천 오백 년 역사 중에 / 千若五百(천약오백)。
이씨처럼 계속 번창한 경우가 있었던가 / 孰緜如李(숙면여이)。
본조에서도 우뚝한 분이 계셨나니 / 有聳本朝(유용본조)。
절의(節義)로 이름 떨친 우리 재사당(再思堂) / 再思名義(재사명의)。
사필(史筆)과 관련된 참혹한 화를 당해 / 讐以史禍(수이사화)。
하늘이 과연 옳은지 알 수가 없었는데 / 茫乎天意(망호천의)。
증조부의 그 뜻을 독실히 이어받은 / 曰篤厥緖(왈독궐서)。
우리 진사에게 모두들 기대하였어라 / 咸望進士(함망진사)。
섬계서당에서 학문의 길 시작하여 / 發學剡溪(발학섬계)。
수사의 연원 찾아 탐구해 나갔나니 / 源尋洙泗(원심수사)。
논어 한 권을 처음 손에 들자마자 / 一部論語(일부론어)。
공자님이 거기에 계신 것을 알았다오 / 聖師在是(성사재시)。
공자님의 제자였던 우리의 벗은 / 昔者吾友(석자오우)。
그 당시에 어떤 일에 종사했던가 / 何所從事(하소종사)。
그럼에도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는 / 時俗之見(시속지견)。
세상의 유행과 다르다고만 여겼다네 / 秪以世異(지이세이)。
천품이 아름답고 거기에 또 호독한데 / 質美好篤(질미호독)。
굳이 일정(日程) 세워 학업을 성취할까 / 曷程其至(갈정기지)。
어버이 명에 따라 과거 시험은 보았지만 / 屈從親命(굴종친명)。
원래의 그 뜻만은 뺏을 수가 없었다오 / 安有奪志(안유탈지)。
삼십 년만 살았어도 위로가 되련마는 / 三十庶幾(삼십서기)。
이십 대 중반에 그만 세상을 떠나다니 / 乃訖卄四(내흘입사)。
꽃 피우고 열매를 맺지 못한 슬픔이여 / 秀而不實(수이불실)。
누구를 붙잡고서 하소연을 한단 말인가 / 慟誰宜爲(통수의위)。
훌륭한 자손이 나올 것은 필연의 이치 / 理有可必。
진사가 뒤에 남긴 두 아들만 보더라도 / 遺以二子。
하나는 가업을 이어받은 문관이시요 / 文故家傳。
하나는 또 선조를 닮은 무관이로세 / 武亦尙類。
문무를 겸비한 큰 그릇을 찾는다면 / 兼資而大。
오늘날 우리 관찰사가 바로 그런 분 / 惟觀察使。
웅장한 한 지방의 장관이 되셨나니 / 處得地雄。
두루 거친 관직 모두 기대에 부응했네 / 汔愜歷試。
생사 간에 어버이 받드는 그 일 역시 / 幽明之奉。
영예와 효성 바칠 마음 극진하리니 / 榮孝兩至。
판서의 지위에까지 증직이 되었지만 / 賚有正卿。
그것만으로는 아직 보답이 안 됐으리 / 償塞則未。
예로부터 묘소에 세워진 비를 보면 / 終古松楸。
조정에서 받은 시호(諡號) 내세우나니 / 易名表隧。
효자의 도리를 끝까지 행하려면 / 要孝之終。
부친의 미덕을 일컫게 해야 하리 / 必稱先懿。
나의 묘갈명에 잘못된 점 없나니 / 我銘不爽。
여기 오는 이들 부디 살펴볼지어다 / 來者所眡。
줄기차게 권면하는 내용이 무엇인가 / 悠悠何勸。
그것은 바로 인인과 효자로세 / 仁人孝子。
<끝>
[註解]
[주01] 위기지학(爲己之學) :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공부하는 위인지학(爲人之學)에 상대되는 말로, 오직 자신의 덕성을 닦기 위해
공부하는 것을 말한다. 《논어》 헌문(憲問)에, “옛날의 학자들은 자신을 위한 공부를 하였는데, 지금의 학자들은 남을 위한 공부만
한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라는 말이 나온다.
[주02] 손으로는 …… 경우 : 《논어집주(論語集註)》 서설(序說)에 인용된 정자(程子)의 말 가운데에, “《논어》를 다 읽고 나서는 너무도
기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춤을 추고 발을 구르며 뛰는 이들도 있다.[有讀了後 直有不知手之舞之足之蹈之者也]”라는
구절이 나온다.
[주03] 쌀을 짊어지고 가서 : 자기보다는 항상 어버이를 먼저 생각하는 지극한 효성을 바쳤다는 말이다. 공자의 제자 자로(子路)가 자신은
나물을 뜯어 먹으면서도, 어버이를 위해서는 백리 밖까지 나가서 쌀을 구한 다음 먼 길을 짊어지고 와서[爲親負米百里之外] 쌀밥
을 해 드렸다는 고사가 있다. 《孔子家語 卷2 致思》
[주04] 삼여일(三如一)의 의리 : 임금과 스승과 어버이의 은혜는 같다는 뜻의 ‘군사부일체(軍師父一體)’의 도리를 말한다. 《국어(國
語)》 진책(晉策) 1권에, “사람은 세 분의 은혜로 살게 마련이니, 그분들을 똑같이 섬겨야 한다.
어버이는 낳아 주신 분이고, 스승은 가르쳐 주시는 분이고, 임금님은 먹여 주시는 분이니,……똑같이 섬겨야 하는 것이다.[民生于
三事之如一 父生之 師敎之 君息之……故壹事之]”라는 말이 나온다.
[주05] 계서(雞黍)의 벗 : 진정으로 자신을 알아주어 죽음도 함께할 수 있는 참다운 벗을 말한다.
후한(後漢) 범식(范式)이 장소(張劭)와 헤어질 때, 2년 뒤 9월 15일에 시골집에 찾아가겠다고 약속을 하였으므로, 그날 장소가 닭
을 잡고 기장밥을 지어 놓고는[殺雞作黍] 기다리자 과연 범식이 찾아왔으며, 또 장소가 임종(臨終)할 무렵에, “죽음까지도 함께할
수 있는 벗을 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恨不見死友]”고 탄식하면서 숨을 거두었는데, 영구(靈柩)가 꼼짝하지 않다가 범식이 찾
아와서 위로하자 비로소 움직였다는 고사가 있다. 《後漢書 卷81 獨行列傳 范式》
[주06] 수사(洙泗) : 유학(儒學)을 뜻하는데, 공자가 자신의 향리인 그곳에서 학생들을 지도했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주07] 공자님의 …… 종사했던가 : 우리의 벗은 공자의 제자 안회(顔回)를 가리킨다. 증자(曾子)가 안회를 평하면서, “유능하면서 무능한
사람에게도 묻고, 박학(博學)하면서 과문(寡聞)한 사람에게도 묻고, 도를 지녔으면서도 없는 듯, 덕이 가득 찼는데도 텅 빈 듯 겸손
하였나니,……옛날에 우리의 벗은 일찍이 이런 일에 종사했었다.[昔者吾友嘗從事於斯矣]”라고 칭찬한 말이 《논어(論語)》 태백
(泰伯)에 보인다.
[주08] 호독(好篤) : 호학(好學)과 독신(篤信)의 준말로 《논어》 태백에, “독실하게 믿으면서 배우기를 좋아해야 한다.[篤信好學]”는 공
자의 말이 나온다.
[주09] 삼심 년만 …… 되련마는 : 공자가 가장 아끼던 제자 안회(顔回)가 30대 초반에 죽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논어》 옹야(雍也)의 주희(朱熹) 집주(集註)에, “안회가 32세에 죽었다.[顔子三十二而卒也]”는 해설이 나온다.
[주10] 꽃 …… 슬픔이여 : 《논어》 자한(子罕)에, “싹이 나고는 꽃 피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꽃은 피었건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도 있
다.[苗而不秀者 有矣夫 秀而不實者 有矣夫]”는 공자의 말이 나오는데, 이에 대해서 황간(皇侃)은 안회가 대성(大成)하지 못하고
서 일찍 죽은 것을 비유한 것이라고 하였다.
[주11] 효자의 …… 하리 : 조정에서 부친의 시호를 내려 받아 비석에 새겨 넣어야 할 것이라는 말이다.
《효경(孝經)》 1장에, “신체발부(身體髮膚)는 부모님에게서 받은 것이니 감히 다치지 않게 하는 것이 효의 시작[孝之始]이요,
입신양명(立身揚名)해서 부모의 이름을 드러내 영광스럽게 해 드리는 것이 효의 끝[孝之終]이다.”라는 유명한 말이 나온다.
한편 조선조에서는 판서(判書) 등 정2품 이상에게만 조상의 시호를 받을 자격을 부여하였다.
<간이집 제9권[희년록(稀年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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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成均進士李公墓碣銘 幷序
公諱大建。字汝立。慶之李氏。自其先異人名謁平。生于瓠巖下。實佐開國新羅。而世遂爲聞家。及高麗季。有門下侍中文忠公諱齊賢。以德業文章。顯於天下。至今人稱益齋先生。於公十世祖也。入本朝而六世祖諱尹仁。觀察使。高祖諱公麟。筮武仕至縣令。曾祖諱黿。禮曹佐郞。號再思堂。與金寒暄一時游於佔畢齋之門。戊午史禍起。與金濯纓同得罪。死於甲子之獄。旣經湔雪。追贈都承旨。南秋江師友錄。著其行。祖諱渤。贈左通禮。自此而下。用公之胄今觀察使貴。推恩也。左通禮後於再思公之弟生員諱黽。家禍之餘。昆季散之外莊。其家堤川。自生員始。而亦以氣節有名。考諱憬胤。贈左承旨。妣原州李氏夫人。秉節校尉垠之女。以嘉靖庚戌。生公于堤川。公自幼淸明秀異。及旣省。聞父兄訓說。輒入于心。未嘗忘失。族人家在酒泉故縣。公八歲造焉。屬一句云酒泉無酒見聞異。識者異其機警。左承旨公自以事弓馬。恐訓誨無方。爲之詣于淸州從叔父李徵士潛許。托以三子焉。第二卽公。而時年十有五也。徵士見公氣豪而志醇。樂得而敎育。處之于剡溪書堂。恣其婆娑嬉游。不甚程業。而日開月益。不數年。文與行俱進。是時剡上學子常不下數十輩。而莫之或先也。戊辰。增廣鄕試。俱占兩場。而屈於禮圍。明年。柳牧伯仲郢聚一州士子較藝。而公作居首。西厓相公方爲修撰省親。贊其奬美。期以國士。由是藉甚一道。庚午間。朴守庵枝華寓于淸淵之烏村。公就質論語。善疑善問。不知不措。守庵稱之不容口曰。秀才。他日其進未可量也。公自知讀書以來。已有志於古人所謂爲己之學。及讀論語。極意玩繹。中涵外揉。自覺日新。不復輟此書。殆所謂手舞足蹈之者。自後雖以親命不得廢擧業。而志不爲所奪也。壬申。都會夏課。公之每作出倫。同進有忌言。公恥與爭之先去。然公竟首焉。亦由以擧中癸酉進士試。旣游大學。四方之士求與之友。如恐或後。蓋不獨艶慕。而道誼所先。信從者衆也。朝之賢士大夫。稍亦延禮之。嘗出郊履氷。有一絶句。足驗公之學已主於敬云。一日課試以制外養中箴。公作在第二。而祭酒許草堂愛其造理特深。數擧以語人。殊加禮重焉。甲戌正月。歸淸鄕。感疾于溪堂。病中聞所愛友訃。自力作祭文送之。疾遂革。至三月念日不起。得年方二十五。公之兄弟若親朋。以公之喪殯于州北鶩嶺下。踰月而葬于是山。觀志觀行。卽公一生。什不能二三。而表表在人耳目。如爲親家貧甚。其在違遠。常使一力代己負米。幷所得美味。一衣一服。不經親體。則不忍先加之已。於兄郡守公大遂。生少三歲。而事之如嚴父。悶弟大迪之晩學。盡心友敎。與之同升上舍。痛早哭所恃。而未遂追服之悃。每諱日將至。齋素過禮。事徵士公期盡於在三如一之義。配匹之際。謹摯別之道。病且絶日。相去二十里地。不要相見。以正其終。同志之友。有急必周。雖染疫必救視。相與素講必行。此皆公之尋常。而人所不能也。公之歿也。襄事諸具。皆京外朋知所經紀。而鷄黍誄挽。多自遠方來者。公配安東金氏夫人。上洛公方慶之後。副司直燾之女。生二男。長曰時發。己丑文科。今平安道觀察使。次曰時得。遺腹而生。丙午武科。縣監。觀察娶進士驪興閔敬男女。生一男三女。女適李竧。餘及男幼。側出三男皆幼。縣監娶司果文化柳希淵女。生一男二女。皆幼。辛丑。例贈公戶曹參判。乙巳。加贈吏曹判書。銘曰。
瓠巖降祥。羅運伊始。益齋于麗。文衰爲起。千若五百。孰綿如李。有聳本朝。再思名義。讐以史禍。茫乎天意。曰篤厥緖。
咸望進士。發學剡溪。源尋洙泗。一部論語。聖師在是。昔者吾友。何所從事。時俗之見。秪以世異。質美好篤。曷程其至。
屈從親命。安有奪志。三十庶幾。乃訖廿四。秀而不實。慟誰宜爲。理有可必。遺以二子。文故家傳。武亦尙類。兼資而大。
惟觀察使。處得地雄。汔愜歷試。幽明之奉。榮孝兩至。賚有正卿。償塞則未。終古松楸。易名表隧。要孝之終。必稱先懿。
我銘不爽。來者所眡。悠悠何勸。仁人孝子。<끝>
간이집 제9권[희년록(稀年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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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贈參判李公 大建 行狀 - 西溪 李得胤 撰(서계 이득윤 찬)
公諱大建。字汝立。姓李氏。慶州人。新羅始祖赫居世佐命功臣謁平之後。代有簪纓。至于麗末。門下侍中文忠公齊賢。於公十代祖。卽益齋先生也。曾祖諱黿。號再思堂。禮曹佐郞。罹戊午禍。後乃湔雪。追贈都承旨。南秋江師友錄。詳著志行。祖諱渤。學生。以成均生員鼉。侍養子。自京移居堤川。考諱憬胤。忠順衛。其後以公之子時發貴。故學生贈左通禮。忠順衛贈左承旨。承旨公娶原州李氏。秉節校尉垠之女。嘉靖庚戌某月日。生公。公生而淸秀。穎悟不凡。若聞訓說。輒記不忘。八歲。往于酒泉外從大父家。作一句云。酒泉無酒見聞異。人皆驚歎之。然承旨公不事詩書。游藝弓馬。故敎道之方。未能一遵儒術。恒自歉也。歲甲子。來拜于淸州從叔父李徵士潛。因以三子伯仲季。請業焉。仲卽公。時年十有五也。徵士公。見其才豪氣銳。知將有成。愛如己子。樂而敎育之。春夏子史。秋冬經傳。數年之間。記誦詞章。日就月將。同處鱣堂者。常不下數十餘人。而咸以公推先焉。戊辰元年。增廣。俱中鄕試。不利於禮圍。己巳夏。州牧柳侯仲郢。聚一州士子較藝。而公乃居首。因接于山寺。凡所製述。多有步驟。柳侯與其子修撰成龍公。相歎曰。李某將爲一國名士。見待之禮。頗加敬焉。秋試大比。鄕黨親舊。皆以若摘頷髭跂足。而懷抱利器。蹔蹶霜蹄。是常情之所欝欝。而公則泰然無一毫介也。庚午秋。守庵朴公枝華。來憇于淸淵農墅。相去剡溪書堂。纔十許里。於是。徵士公。令門下數三人。往質所學。公持一部論語。一日講一篇。積二十餘日。乃畢。沿思窮到。辨質精明。守菴稱不容口。乃云此秀才。决不但已。他日所就未可量也。明年春。與同契友。入落影山空林寺。夏棲于俗離諸名菴等處。孜孜講讀。及冬而返。自初至終。只專心於魯論。嚌胾深至。如不知有他書。庶幾程夫子所謂手舞足蹈之驗歟。自是以來。雖未敢擅廢科業。而學問上工夫。十居七八。要以極本窮原爲務。可謂共學適道者也。壬申夏。課公都會。取進士試。秋與其弟大迪。共捷生進試。棣華輝暎。於癸酉之蓮榜。公之於文。閎其中而肆其外矣。九月因謁聖觀光。留泮過冬。同泮諸員。莫不稱其愷悌。或托以死生者。有之。其見信於人。可知矣。其冬。展省于楊州曾王父墓。歸來渡江時。偶吟一絶曰。氷下滄波幾仞深。行人莫不戰兢臨。若敎平地皆如此。步步無時放爾心。非得於居敬之學。能摸寫至此哉。一日。成均白日塲。題出制外養中箴。公製。居于第二。大司成許草堂語人曰。鋪張文字。則居魁者勝。而深知宗旨。能掇骨子。無踰於公。先覺之所推許。豈無所見而然也。甲戌正月日。還鄕拜徵士公。往留聘家。浹旬而復來。剡溪書會。偶得寒疾。不汗彌留。轉成沉痼。至于三月二十日。奄啓手足。享年二十五。嗚呼痛哉。親朋執紼。移殯于 嶺山所。踰月而葬于某坐某向之原。不兆先塋。隨時之義。非公志也。先是。寢疾時。語同志曰。天之生我。必不偶然。豈有斯疾斃焉之理乎。若永間則將搆數椽精舍于聘庄。左右圖書。俯仰思讀。以遂朝聞之願。則存吾順而沒吾寧也。其向學之志。終始無他如此。然而所造之淺深。未易浚測。姑以見行之實言之。少失所恃。常懷追服之痛。而父在未專。故忌朔豫致齋戒。及其日。白衣冠。哭泣如禮。親家貧窘。如玉難繼。則營辦負送。不絶數百里之外。一衣一服。不先于親。則不敢自著。事親之誠也。金昆玉季。塤唱篪和。厥兄之年纔長數歲。而事之如嚴父。憫其弟之晩學。懇懇敎誨。終成聯璧之譽。友愛之篤也。甞曰。易首乾坤。詩冠關雎。夫婦造端之重。於此可見。豈可褻狎而侮慢哉。敬相對如賓。少無嘻嗃之失。有別之道也。至於師友。以爲徵士公於己。恩同父母。他日若遇夢楹。則以築室三年之制爲定。同志之友。若染十無一瘳之疫。則人皆以爲難見。而公則斷然以奔救爲誼。其於恩信之間。亦云得矣。嗚呼。以如是才學。展布素蘊。則鞠躬盡瘁。可以致孝移之忠。而天其不憗。竟至齎志。可勝惜哉。可勝歎哉。公風標軒仰。氣像醞藉。見人爲善。傾心以許之。後雖有可絶之事。容而不遺。仁恕虗己之量。天性然也。如使終始周旋於畏友嚴師之間。充足其所未盡。則有若無犯不校。可復見於斯人。而雖曰竪赤幟於靑丘。爲儒林領袖。庶無愧矣。噫。猗蘭欲茂。秋風敗之。皓月將輝。陰雲翳之。以二十五年之光陰。未能飽飫其無窮義理。則苗而不秀。秀而不實之慟。非夫人而爲誰。雖然。非才之罪也。實斯文之不幸也。幸而才之美者。必不幸而至於夭閼。或幸而將欲施爲者。又不幸而斬伐於士禍。非特自今日。公爲始言之。至此可謂於悒。然公之玉樹雙枝。挺然拔萃。立揚一世。善繼善述。則積善餘慶之理。固不誣於已定之天。而不幸中之大幸。嗚呼休哉。公詩格淸逸。文思典雅。可以大鳴於世。而意長日促。所著不夥。未能裒集而行。亦一恨也。公內子安東金氏。副司直燾之女。生二男。長曰時發。參判君是已。擢己丑文科。纔過三旬。位至二品。人皆以益齋德業爲期。公之贈職以此也。次曰時得。遺腹而生。登武科。今爲縣監。參判娶成均進士驪興閔敬男女。生一男三女。縣監娶司果柳希淵女。生一男三女俱幼。吁。公之歿。已過一世。而猶未表賁墓道。一日參判君。謂余曰。伯父雖草先君行蹟。而似涉踈漏。願以耳目之所覩記。俾無遺忘。囑之丁寧。再三不已。以余不文。誠不足以贊揚玄德。然而同堂合席。歷知顚末者。莫我若也。苟辭而不記。則於何考德而取信哉。玆不獲已。因記其實。以塞參判君之孝懇。又以待秉筆者之裁取焉。嗚呼。由今日三十年之後。想當日三十年之前。則如聆音旨於警欬談笑之餘。而風範神采。森然於目前。吾何以爲懷哉。吾何以爲懷哉。愴咽而識其大槩云。<끝>
서계집 > 西溪先生文集卷之三>[行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