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절반이 넘는 기간 혹독한 추위를 견뎌야 하는 러시아인들이 외국인들을 만나면 흔히 하는 말이다. 호기같지만 실제로 러시아인들은 그런 삶에 익숙하다. 러시아인들의 진정한 삶의 무대는 모스크바나 상트 페테르부르크 등 도시가 아니다. 도심에서 떨어져 있는 다차(Dacha·주말별장)이다. 다차는 도심에서 떨어진 곳에 있어 통나무로 지은 집과 사우나, 텃밭이 딸린 별장이다. 도시에서 사는 시민들이 주말 휴식을 취하며 에너지를 충전하는 곳이다. 시내 외곽의 경관이 좋은 곳이면 어디든지 있다.
영하 50도의 날씨에도 러시아 북쪽끝 북극해 야말반도에서 순록과 더불어 유목하는 네네츠인이 그가 북극해에서 잡은 '묵순(백어)'을 들어보이고 있다. 네네츠인들은 잡아올리면 바로 얼어버리는 이 물고기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지만 대패로 썰어 보드카 안주로 먹기도 한다. /북극해=정병선 기자© 제공: 조선일보 다차는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러시아 도시민들이 평생 주말을 보내는 세컨드 하우스다. 겉은 초라해 보일지 몰라도 내부는 화려하고 고급스럽다. 없는 것이 없다. 1990년대 소련 붕괴 당시 경제 상황이 극도로 열악했을 때도 러시아인들의 다차에는 보드카에서부터 캐비어(철갑상어알)까지 없는 게 없었다. 러시아인에 있어 다차는 제2의 생활공간이다. 모스크바를 비롯한 도시민 70%가 다차를 소유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주말이면 어김없이 다차에서 생활한다.
러시아의 다차 문화는 19세기 제정(帝政) 러시아 시대부터 내려온 전통이다. 귀족들이 여름이면 별장에서 살며 야외파티를 즐겼다. 1953년 3월4일 아침 당시 소련 관영 ‘라디오 모스크바’는 “스탈린이 모스크바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뇌출혈로 쓰러졌다”고 보도했다. 사실 흐루쇼프가 회고록에서 밝혔지만, 당시 스탈린은 모스크바 근처 그의 다차에 있었다.
지난 2014년 조선일보의 통일기원 사업 '뉴유라시아 자전거 평화대장정' 에 나선 대원들이 러시아 사우나를 체험하고 있다. /오종찬기자© 제공: 조선일보 다차가 대중화된 것은 지난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다. 하지만 최근에는 휴식을 위한 개념을 떠나 고급 다차가 생겨나며 별장의 개념으로 자리 잡고 있다. 다차는 러시아인들이 자기 인생의 작품을 만드는 곳이다. 다차에는 반드시 ‘바냐’라는 러시아식 사우나 시설이 갖춰져 있다. 다차를 만들고서 사우나를 설치하는 것은 필수다. 사우나는 겨울 러시아인들에게 휴식을 주는 공간일 뿐 아니라 보드카를 마시는 장소이다. 사우나와 보드카는 러시아 겨울을 나기 위한 최고 조합이다. 사우나와 보드카를 찾는 이유는 러시아 특유의 저기압 때문이다. 모스크바는 겨우내 기압이 낮다 보니 시민이 두통을 자주 앓는다. 저기압은 보통 750mmHg보다 낮은 경우를 말한다. 모스크바 표준 기압은 748~749mmHg 정도다. 하지만 지난해 1월 14일 기압은719.7mmHg로 1948년 이후 가장 낮았다. 외국인들 역시 두통을 호소하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저기압으로 인한 것이라 마땅한 치료법이 없다. 의사들은 “보드카를 적당히 마시든지 사우나를 하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보드카를 매일 마실 수는 없지만, 사우나를 즐기는 러시아인들은 많다. 이를 습관으로 여긴다. 보드카로 열량을 채우고 부족한 운동량을 사우나로 대신하는 식이다.
사우나장 앞 눈속에 꽂아둔 보드카. 러시아인들은 이렇듯 사우나 하는 동안 보드카를 얼려 마신다. /정병선 기자© 제공: 조선일보 러시아인들은 보드카를 혹한 극복을 위한 최적의 상품이자, 저기압 인한 두통 치료제요, 기분까지 전환하는 만병통치약으로 여긴다. 이 때문에 겨울 보드카 소비량은 여름보다 3배 이상 늘어난다. 보드카 안주로는 까만 빵에다 소시지, 다차에 딸린 텃밭에서 재배한 오이와 토마토, 배추 등을 소금에 절인 것들이다. 우리의 김장 김치 정도 된다. 다차엔 지하 저장고가 있는데 이런 음식들로 꽉 채워져 있다. 겨울철 신선한 채소를 자주 먹지 못하는 러시아인들에게 보드카 안주일 뿐 아니라 비타민 섭취용으로 이용된다. 러시아 사우나란 통상 다차의 사우나를 말한다. 물론 다차의 사우나도 휴양지 사우나도 자연 속에 있다. 사우나를 한 뒤 눈밭에 나와 뒹굴기도 하고 얼음을 깨고 강물에 뛰어들면서 호기도 부린다. 러시아 사우나엔 냉탕은 있지만 온탕은 없다. 사우나를 하면서 눈밭에 보드카를 꽂아둔 채 보드카를 마시며 샤쉴릭(러시아식 바비큐) 파티를 하는 것이 보통이다. 사우나에 초대 받을 정도면 러시아인으로부터 신뢰 받는다는 의미다.
핀란드의 헬싱키 반타공항 사우나. 사우나 원조를 주장하는 핀란드는 사우나 홍보에 여념이 없다. /조선일보DB© 제공: 조선일보 러시아 만큼 사우나를 즐기는 나라가 핀란드이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양국의 사우나에 대한 열광과 집착은 대단하다. 한 때 1인당 알코올 소비량 세계 1위를 달리던 두 나라 국민은 술 마신 다음 날 사우나로 숙취를 없앤다. 양국의 원조 사우나 논란도 가관이다. 핀란드사우나협회는 “핀란드 사우나는 약 2000년 전 칼렌루야 지방에서 시작됐다”며 “핀란드어로 ‘로일리(뜨거운 돌에 물을 뿌려 증기를 만드는 것)’를 이용한 사우나가 원조다”며 러시아를 자극한다. 또 “핀란드 정착한 원주민들은 일조량이 턱없이 부족한 것을 매일 사우나를 통해 해결했다”며 “핀란드 사우나는 생존을 위한 수단이었다”고 주장한다.
모스크바 상점에 진열된 보드카. 보드카는 시대상을 반영한다. /정병선 기자© 제공: 조선일보 실제로 2022년 기준 핀란드에 있는 사우나는 320만개로 인구 550만 명의 절반을 넘는다. 하지만 러시아는 “모스크바 인구만 1000만명이 넘는데 모스크비치(모스크바 시민)의 70%가 소유하고 있는 다차의 사우나만 생각해도 핀란드와는 규모면에서 비교가 안 된다”며 맞선다. 이 때문에 양국 주당(酒黨)들과 사우나 마니아들 사이에선 겨울이 되면 ‘보드카 마시기 대회’와 ‘사우나에서 오래 견디기 대회’ 등 이색 이벤트 행사들을 벌이곤 한다. 핀란드와 러시아에선 ‘사우나나 보드카로 치료 안 되면 불치병이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사우나와 보드카의 조합은 겨우내 힘을 발휘한다.
전통적으로 러시아인들의 보드카 최고 안주는 우크라이나 ‘살라(돼지비계를 농축시켜 얼린 것)’였다 살라를 치즈처럼 잘라 보드카와 마시는 조합이었다. 하지만 양국이 전쟁을 벌이면서 양 국민 사이에 러시아 보드카 우크라이나 살라 조합은 깨진 지 오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