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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과 인조 -드라마 왕이 된 남자-
인조반정,선조, 인목대비, 영창대군, 소현세자, 봉림대군, 효종
광해군의 선조 시절
1608~1623 통치 15년
출생 1575 즉위 33살
인조반정퇴출48살 죽음 66살
광해군은 인조보다 20살 많음
광해군 형 임해군보다 1살적음
광해군 2살에
엄마인 공빈김씨가
산후병으로 죽음
광해군 14살에
43살 정여립사건
(서인이 정권을 장악함)
이때 선조는 37살
광해군 15살에
서인 황윤길(54살)전쟁준비
동인 김성일 (52살)전쟁안남
두사람 임진왜란1년후 죽음
광해군 16살에
55살의 정철이
광해군 세자로 하자고 주장
정철 임진왜란 1년후 죽음
(동인이 정권을 장악)
이때 선조는 39살
임진왜란 일어나기 1년전임
정철의 처벌을 두고
온건한 측은 남인(유성룡)
강경한 측은 북인(이산해)
임진왜란 발발시 (1592년)
광해군 17살에 세자가 됨
선조는 23살 많기에 40살
유성룡 50살
(선조보다 1년전 65살 죽음)
이순신장군 47살
임진왜란 발발 3년후
인조탄생
임진왜란 종료(1598년)
광해군 23살 선조 46살
이순신장군 53살 죽음
임진왜란 종료1년뒤
선조 첫 부인 의인왕후 죽음
임진왜란 종료 4년뒤
광해군은 27살
50살의 선조는 32살 어린
18살의 인목대비 맞이함
임진왜란 종료8년뒤
영창대군 태어남
임진왜란 종료 9년뒤
선조 56살로 죽음
광해군 33살로 등극
임진왜란이 끝나고 9년이 지나 선조는 56살로 죽고 광해군이 33살에 등극을 하여 15년을 통치하다 48살에 인조가 28살에 일으킨 반정으로 쫓겨나 강화도로 유배를 갔다가 다시 제주도로 유배를 가서 66살에 죽습니다,
광해군과 인조
인조는
정원군(광해군보다 5살이 어림)의 아들로
16살인 능창군도
( 후에 인조가 되는 능양군의 동생으로
4살이 적음)
역모를 꾀했다고 하여
유배를 보냈는데 죽습니다.
이때가 광해군이 등극한 지 7년이
되었을 때입니다.
인빈김씨의 아들 중 원종이라는 사람이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임
광해군은 선조가 가장 총애를 했고 선조보다 1살이 적은 공빈 김씨가 어머니입니다. 이 공빈 김씨는 21살에 임해군을 낳고 22살에 광해군을 낳습니다, 그리고 2년 후 산후병으로 죽습니다.
그런데 이 공빈 김씨보다 2살이 어린 인빈 김씨(효령대군의 후손)가 18살 즉 공빈 김씨가 임해군을 낳기 1년 전에 후궁으로 들어와서 공빈 김씨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 데 궁에 들어온 지 4년 뒤에 공빈 김씨가 광해군을 낳은 후 산후병으로 24살에 죽자 선조의 총애를 받게 됩니다.
이 때부터 광해군의 비극이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광해군은 어머니인 공빈 김씨가 산후병으로 2살 때 죽습니다, 이 공빈 김씨를 선조가 엄청 좋아하였기에 공빈 김씨가 광해군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여 광해군을 싫어하기 시작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광해군의 어머니인 공빈 김씨가 죽은 후에는 선조가 인조. 할머니인 인빈 김씨를 무척 좋아하기 시작하여 그녀가 낳은 자식으로 광해군보다 3살 어린 신성군을 세자로 삼기를 원하였습니다.
선조가 즉위한지 22년 즉 선조가 37살이 되고 광해군이 14살이 되는 해에 정여립(43살)반란사건이 일어나는 데 이를 계기로 정철(당시 53살)을 중심으로 한 서인들이 동인을 몰아내는 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1년 뒤 그 유명한 황윤길(서인) 김성일(동인)이 일어나고 그 1년 뒤 즉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에 정철은 광해군(당시16살)을 세자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서인은 몰락을 하고 동인이 다시 집권을 하게 됩니다,
이 동인 중에서 정철에 대한 처벌에 온건한 측은 남인(유성룡이 중심)이 되고 강경한 측은 북인(정인홍, 곽재우등이 중심, 후에 이들은 광해군시절 주세력이 됨)이 되지만 선조는 결국 남인의 손을 들어줍니다.
동인에서 남인과 북인으로 -
정철 처벌에 대한 시각의 차
이로써 당파의 기초가 이루어지고 1년 뒤 조선이 엄청난 피해를 보는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데 이때 광해군은 17살이고 선조는 40살입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세자 책봉문제가 수면아래에 가라앉았으나 선조가 세자로 삼고자 했던 신성군이 피난길에 의주에서 14살로 죽자 선조는 분조를 할 수 밖에 없어서 17살의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합니다.
이렇게 광해군은 전쟁 중에 평양에서 세자로 책봉된 뒤 선조가 피난 가고 없는 궁을 지키면서 전란 수습을 했습니다. 함경도와 전라도 등지에서 군수품과 의병을 직접 모집하는 한편, 민심을 위무하고 군량미를 모아 민중들의 신망과 지지를 받기도 했습니다.
또한,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의 양자가 되어 세자로서의 위치를 표면상 굳히게 되었다. 그러나 선조는 그런 세자 광해군을 오히려 경계하며 심하게 견제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1년 뒤 선조의 정비로서 선조보다 3살이 어린 의인왕후가 45살로 죽습니다. 이 선조는 아주 나쁜 사람입니다. 피난을 갈 때도 이 의인왕후와 같이 가지 않고 인조할머니인 인빈김씨와 함께 갑니다,
그리고 피난길에서 돌아올 때도 인빈 김씨만 데리고 오고 의인왕후는 광해군이 모시고 옵니다, 이 의인왕후가 죽은 뒤 6년 후 그렇게 총애하던 51살의 인빈김씨가 살아있는 데도 불구하고 54살의 선조는 자신보다 32살이나 어린 22살의 인목왕후를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해에 영창대군을 낳습니다,
이러자 소북파인 유영경(선조보다 2살 많음)등은 영창대군을 세자로 삼고자 하고 선조도 동의하였습니다. 이러다 선조는 몸이 아프게 되자 광해군에게 세자교서를 내리고 약밥을 먹다가 죽자 이때 선조가 56세입니다.
그리고 1년뒤에는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를 보내져서 8살에 죽습니다, 이때가 광해군이 재위한 지 6년이 된 해로 광해군은 39살이었고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는 30살이었습니다,
그리고 계축옥사가 일어날 때 인빈 김씨가 58살로 죽습니다 그리고 1년 뒤 바로 영창대군이 죽고 그 후 1년뒤에는 인빈 김씨의 아들 35살의 정원군(광해군보다 5살이 어림)의 아들로 16살인 능창군( 후에 인조가 되는 능양군의 동생으로 4살이 적음)도 역모를 꾀했다고 하여 유배를 보냈는데 죽습니다. 이때가 광해군이 등극한 지 7년이 되었을 때입니다.
이 사건 후 4년뒤 능창군과 인조의 아버지인 39살의 정원군은 화병으로 죽습니다. 이때 후에 인조가 되는 24살의 능양군은 큰어버지 뻘인 44살의 광해군에 대해서 독심을 품게 되어 결국은 4년 뒤 28살의 능양군인 인조는 반정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때가 광해군이 등극한지 15년이 되었을 때입니다.
이 계축옥사 후 1년뒤 영창대군이 죽고 다시 4년 뒤 43살의 광해군은 34살의 인목대비마저 폐서인을 시키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인목대비 유폐된 곳 -덕수궁 안의 전각
또한 후금이 요동을 침범하여 명이 군사를 요청하지만 58살의 강홍립(임해군을 처리한 공이 있음)에게 군사 10,000명을 보내며 후금에게 몰래 투항을 하게 하여 조선이 후금하고도 좋은 관계를 맺고 싶다는 의지를 보여 등거리외교도 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때 군사 5,000명이 죽습니다.
후에 인조반정 후 4년 뒤에 광해군의 원수를 갚는다는 이유로 후금이 조선을 침범하지만 강홍립을 내세워 조선과 교섭에 응한 것을 보면 광해군을 진정으로 좋게 본 것인지는 모호합니다.
명나라와 후금과 조선
하여튼 이 폐비사건 후 5년 뒤에 인조반정이 일어나 인목대비는 광해군을 죽여야한다고 했지만 인조는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를 보냅니다. 이 유배지에서 광해군의 아들과 며느리는 탈출하려다 실패하고 부인은 화병으로 죽습니다,
그렇지만 광해군은 다시 제주도 유배를 가고 여기서 병자호란이 일어나 청나라가 광해군의 퇴출을 문제삼자 역모가 일어나는 데 이 역모에 서찰을 보내지만 인조는 죽이지 않습니다, 이러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후 5년 뒤 그리고 인조반정이 일어나서 권력에서 물러난 후 18년 뒤 66살에 광해군은 한많은 삶을 살고 죽습니다.
광해군에 대한 생각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이지 않고
인목대비를 폐비만
시키지 않았으면 하는 아쉬움 남습니다,
영창대군이 왕후의 자손이기에
마음의 부담이 있었다고 해도 말입니다.
곧 망할 명나라를(1644년 망함)
섬기지 않고 오랑케인 청을 섬긴다고
반정을 일으킨 인조반정(1623년)은 참으로 명분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인조 반정의 정당성 여부
1623~1649 통치 26년
출생 1595년
즉위 28살 죽음 54살
인조공신들
김자점은 35살,이귀는 66살,
이괄은 36살, 최명길은37살,
김상헌은 53살
(이 김상헌은 공신이 아님)
인조 즉위 1년 뒤에
이괄의 난 발생 진압
인조즉위 4년뒤(인조32살)
35살 청의 홍타이치 침략
( 정묘호란 )
인조즉위 9년뒤(인조37살)
인목대비 48살로 죽음
인조즉위 13년뒤(인조41살)
44살의 홍타이치 침략
(병자호란)
삼전도 굴욕 후
25살 소현세자와
18살의 봉림대군이
청에 끌려감
인조즉위15년뒤(인조 43살)
병자호란 2년뒤임
인조보다 29살적은
14살의 장렬왕후를 맞이함
(후에 자의대비)
인조즉위18년뒤(인조 46살)
병자호란 5년뒤임
66살 광해군 죽음
인조즉위21년뒤(인조 49살)
병자호란 8년뒤임
명나라 망함
인조즉위 26년뒤(인조54살)
병자호란 13년뒤임
인조 죽음
인조(선조의 첫손자,능양군)보다 4살아래인 동생 능창군은 광해군(인조반정 때 48살로 인조보다 20살이나 많은 데 인조반정 후 18년을 더 살다가 병자호란이 일어난 후 5년 뒤인 66살에 죽습니다)에 의해16살 나이에 역모로 죽었습니다.
이 사건 후 4년뒤에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광해군보다 5살이 적으며 이 정원군의 집터가 경희궁이었습니다)은 홧병으로 39살의 나이로 죽습니다, 이에 대한 반감으로 아버지인 정원군이 죽은 뒤 4년후인 1623년 4월에 능양군인 인조는 반정을 일으켜 28살에 임금이 됩니다,
이 인조반정은 영창대군이 8살에 죽은 후 9년 뒤에 일어났으며 이때 인목대비는 30살(인목대비는 반정 후 9년 뒤에 39살에 죽기에 정묘호란은 겪지만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4년 전이라서 겪지 않음)이었고 광해군은 48살이었습니다.
이 인조반정을 도운 김자점은 28살의 인조보다 7살이 많은 35살이었고 이귀는 66살, 이괄은 36살, 최명길은 37살, 김상헌은 53살(이 김상헌은 공신이 아님)이었습니다. 인조반정은 중종이 수동적으로 참여한 중종반정과는 달리 인조가 직접 주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 인조반정은 인조의 주도하에 서인과 남인의 힘을 빌려서 성공하였고 광해군이 명을 섬기지 않고 청나라에게 아부한다는 것 외에는 특별한 명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인조는 서인들로부터 많은 압력을 받았기에 이를 무마하려고 서인의 반대파인 동인에서 갈라진 남인들을 많이 기용합니다, 이것이 나중에 숙종 때 당파싸움을 만듭니다. 이 인조반정이야말로 당파싸움을 만드는 기폭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 명분이 없었던 인조반정은 1등공신의 선정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난을 일으켜 도성까지 들어오지만 진압을 당합니다,
이괄의 난
선조의 은빈한씨의 흥안군을 왕으로
이 이괄의 난 후 3년 뒤에 여진족 출신의 누르하치는 59살에 후금이라는 나라를 만들어 명나라로부터 독립을 하려고 명을 치다가 67살에 죽고 그의 아들인 35살의 홍타이치가 왕의 자리를 물려받고 조선을 공격하는 정묘호란(인조가 32살)을 겪습니다.
이 정묘호란이 나고 9년 후 인조가 41살인 해에 후금은 청나라로 이름을 바꾸자말자 44살의 홍타이치가 조선을 침공하는 데 이것이 병자호란입니다.
인조는 1만명의 군사를 데리고 남한산성에 들어가지만 66살의 김상헌(인조반정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병자호란 끝난 뒤가 아닌 3년 뒤 청이 명을 치기 위해 군사요청을 한 것에 대해 반대하다가 청에 끌려가서 소현세자와 함께 돌아와 인조가 죽고 3년 후에 82살에 죽음, 안동 김씨로서 조선 후반의 외척 거두인 김조순이 이 사람의 후손임)은 여전히 척화를 주장한 반면 50살의 최명길(인조반정에 참여한 사람, 인조가 죽기 2년 전에 61살에 죽음)등은 청나라와 화해를 할 것을 주장합니다,
남한산성에 들어간 인조는 근왕군(지방에서 모집한 군사)이 오기만을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지만 근왕군은 청군에게 모조리 당합니다. 군인수가 많은 경상지역의 군사마저 오다가 청군에게 지자 나머지 병사들은 오히려 달아납니다.
이리하여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한지 1달 보름이 되는 1월22일에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있는 강화도가 함락되자 인조도 항복을 결심하고 1월30일에 남한산성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삼전도(오늘날 송파구 삼전동, 삼전도비는 잠실 롯데호텔 뒤 석촌호수 주변에 있음)에 가서 청나라의 홍타이치에게 치욕적인 굴복(세번 절할 때마다 땅에 세번 머리를 찧습니다)을 합니다.
이 삼전도 굴복을 하고 일주일 후 25살의 소현세자와 18살의 봉림대군은 청나라로 인질이 되어 끌려갑니다. 이런 병자호란이 끝나고 5년뒤에는 광해군이 죽습니다,
이러한 인조는 이런 삼전도 굴욕을 당하고도 2년 뒤에 자신보다 29살이나 적은 14살의 장렬왕후를 맞이하고 이 왕후는 인조가 죽은 후 자의대비가 되어 그 녀가 상복을 입는 기간문제로 당파싸움의 원조가 되는 1,2차 예송논쟁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리고 인조의 장남인 소현세자가 25살에 청으로 끌려간 지 8년 만에 즉 명나라가 망하자(명이 망하기 1년전에 홍타이치는 죽음) 33살이 되어 돌아와 서양문물을 받아들이자고 하면서 청나라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자 인조의 미움을 받는 과정에서 돌아온 지 2개월 만에 갑자기 죽습니다.
이 소현세자의 죽음에 귀인 조씨와 김자점이 연관이 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소현세자는 귀인 조씨의 어머니와 내연의 관계라는 인조의 어의인 이형익이라는 사람의 시침을 받고 3일 후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 귀인 조씨는 인조가 총애를 합니다, 그녀의 나이는 알 수가 없지만 병자호란 전에도 숙원으로 있었기에 인조보다 10살 이상은 어리지 않았을까하고 추측합니다, 바로 이 귀인 조씨가 JTBC에서 방송헀던 궁중잔혹사의 여주인공입니다,
이 귀인조씨는 효종이 등극한 후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의 여동생의 딸을 모함하였다하여 효종이 자결을 하도록 합니다, 이때 김자점도 효종의 북벌계획을 청나라에게 밀고하였다는 죄목으로 능지처참을 당하여 63살의 나이에 죽습니다.
소현세자가 죽고 2개월 뒤 26살의 봉림대군이 귀국하여 세자로 책봉이 됩니다, 그리고 이 1년 후 귀인 조씨는 소현세자의 아내인 35살의 강빈(남편보다 1살이 많았음)이 인조를 독살하려고 하였다하여 인조에게 말하여 그녀와 어린 아들(인조에게는 손자)마저 죽이게 합니다. 마지막 아들만이 살아남아 효종 때 귀양에서 풀려남. 이 이야기는 추노라는 드라마의 소재가 되기도 합니다,
봉림대군이 세자가 되고 5년 뒤 즉 병자호란이 일어난 후 13년이 지나 인조가 54살에 죽자 소현세자보다 7살이 적었던 30살의 봉림대군이 왕위에 오릅니다 이 왕이 바로 효종이 됩니다.
이 효종으로 왕후가 낳은 자식이 왕이 되는 삼종의 시대가 열리게 되지만 이후 부터는 정말 눈을 뜨고 볼 수가 없는 예송논쟁과 환국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인조반정을 통해 임금이 된 인조는 선조때의 임진왜란을 겪고서도 전쟁에 대비하는 정책도 수립하지 못하고 오로지 명에 대한 명분에만 사로잡혀 미래를 보지 못했습니다, 오로지 청에 대한 하대와 반감뿐이었습니다, 청을 이길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무력한 군주였다고 생각합니다,
이 인조이후의 조선은 몰락의 길로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반면 일본의 이에야스 정권은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온전한 발전을 하였으며 이 막부정권은 명치유신을 통하여 입헌군주제라는 제도를 받아들여 아시아에서는 가장 먼저 근대국가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이런 인조는 자신의 잘못은 인정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서는 아주 잔인하게 대하는 전형적인 독재자적인 행동을 한 사람입니다, 이런 단세포적인 인조같은 지도자는 두 번 다시 나타나서는 안되기에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인조같은 정치세력이 두번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인조를 이은 효종이후가
궁금하실 경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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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당파의 역사- 효종에서 숙종까지
임금이 될 자격이 없었던 인조는 죽어서도 문제를 발생합니다, 인조의 둘째아들인 효종의 어머니인 인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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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는 그 뒤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박지원의 열하일기의 대상)라는 훌륭한 3대 황제가 150년을 이끌고 나가다가 그 후 힘을 잃고 조선에서는 청일전쟁(1894.7- 1895.4)으로 물러나고 결국 순원의 1911년 신해혁명으로 망합니다. 이때 마지막 황태자가 푸이인데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청의 3대 황제-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