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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한호는 국내외의 주요 인사들에게서 격찬에 가까운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그것이 일반적이거나 오래 지속되지는 않은 것 같다. 그가 상대적으로 폄하된 결정적인 원인은 비교적 한미한 그의 가문과 벼슬이었다.
한호와 거의 비슷한 시기를 살면서 형조참판(종2품)을 역임하고 중국에 사신으로 자주 다녀온 최립(崔笠, 1539~1612)은 이런 세태를 통렬히 비판했다.
말세(末世)의 습속(習俗)을 보면, 남의 평가를 귀동냥한 것만 소중히 여기고 자신이 직접 본 것은 천시하며 믿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우리나라의 풍속은 문벌(門閥)만을 따져 평가하기 때문에 경홍(한호의 자-인용자. 이하 같음)의 글씨도 잘못된 비평을 받는 때가 있다. 그럴 때 경홍은 마음 속으로야 그런 비평에 흔들리지 않겠지만, 겉으로는 수긍하는 척하는 때도 있었다. 일찍부터 나는 경홍과 관련해 이런 세태를 분하게 여겨왔다. 사람들은 경홍의 손에서 그 작품이 나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멋대로 비평을 가했던 것인데, 만약 왕우군(王右軍-왕희지)의 법첩(法帖)을 임서(臨書)한 경홍의 글씨를 금석(金石)에 새겨 왕우군의 작품과 뒤섞어 전하게 한다면, 과연 그것을 제대로 구별해 낼 사람이 있을까 의심스러웠다([간이집(簡易集)] 제3권).
최립의 타당한 비평처럼, 한호가 명필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고 판단된다. 최립이 지적했듯이, 조선시대는 문벌이 매우 중요했고 모든 탐스러운 가치들은 대부분 그리로 귀속되고 그것에 따라 좌우되었다. 또한 서예는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고매한 정신에서 나오는 수준 높은 예술로 평가되었기에 뛰어난 서예가들도 유명한 학자나 관원이 다수를 차지했다.
한호는 자신의 사상이나 문학을 담은 저작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정신 세계가 어땠는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서예를 잘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도 그의 글씨는 단정하고 아름답다. 그 방면에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야말로 수준 높은 예술의 힘일 것이다.
참고 문헌: 이병태, [석봉 한호의 생애], 석봉한호 기념사업회, 2005;이완우, [석봉 한호 서예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논문, 199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