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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땅 울릉도와 독도 그리고 다케시마 라는 이름의 유래!
1. 조선과 에도 도쿠가와 막부
조선만 해도 옛날이라 땅 보다 사람이 소중했으니 먼저 조세를 거둘수 있고, 성곽이나 도로 개수 부역
에 동원하고 전복등 특산품을 진상받으며 16세부터 60세까지는 병역의 의무를 졌으니 백성이 바로
국력이라... 19세기에 함경도 사람들이 흉년과 관리들의 수탈을 피해 두만강을 건너 간도로 넘어갈
때 조정은 인구 유출을 한사코 막았던 것이며 반면에 무인도는 그 중요성이 덜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리고 동서고금 5천년 역사에서 이웃나라는 99% 원수지간이니 흉노 몽골과 중국, 중국과 베트남, 베트남
과 캄보디아, 태국과 미얀마, 그리스와 터키, 영국과 프랑스, 프랑스와 독일에 오스만 터키와 오스트리아,
로마와 페르시아, 이라크와 이란, 인도와 파키스탄이니 이웃 나라는 100년 평화가 드문데 유일한 예외가
있으니 1600년부터 1875년까지 무려 275년 동안이나 전쟁 없이 “평화와 선린우호한 조선과 일본” 입니다.
에도 도쿠가와 막부는“현상유지가 국책”이라 외국을 침략하는 대신에 쇄국정책을 취했으니, 나가사키
데지마에 네델란드 상인을 거주시켜 중국 및 서양과 일본 사이 무역을 하도록 하고 일본인은 일체
국외로 나가는 것을 엄금했으며, 심지어 임진왜란 이전부터 베트남 호이안, 태국 아유타야, 말레이시아
말래카의 저팬 타운에 거주하던 일본인 상인들 조차 귀국을 금지했으니... 그냥 외국에서 살다가 죽어라!
처음에는 3차례 쇄환사를 포함해 12번에 이르는 400명 내외의 조선통신사가 1년에 걸쳐 일본을 방문하면
막부는 무려 2년치 국가 예산을 쓰면서 숙소인 절을 수리하고 도로를 보수 내지 새로 다리를 놓으며...
각 지방 번주들은 진수성찬을 차리고 일본인들은 도로에 양 옆으로 서서 조선인들을 환영하며 사신들
에게서 글 하나를 받자고 예를 다했으니 오늘날의 긴장관계 와는 전혀 다른 선린우호의 시절 이었습니다.
2. 진태하 선생이 말하는 다케시마 이름의 유래
우리나라 동해에 자리한 대한민국의 섬인 독도를 일본에서는 다케시마라고 부르는데.... 일본 사람
들은 대나무 라고는 한 뿌리도 자라지 않는 돌 섬인 "독도를 왜 다케시마(竹島 죽도)"
라고 했을까 하는 의문이 떠오릅니다만.... 하지만 모든 이름에는 다 그 "연유" 가 있기 마련이지요?
전 인제대학교 교수 진태하 선생은 '漢字學全書(한자학전서)' 에서, 한 분야에 10년을 전념하면 프로
의 세계 에 입문하게 되고, 20년을 하면 강호에 나가서 일방적으로 얻어맞지는 않으니 때리기도
하며... 30년을 하면 대가의 반열에 오르고 50년을 하면 접신(接神) 의 경지에 도달한다고 말합니다?
진태하 선생의 주장 가운데 "독도(獨島)" 의 이름이 어떻게 해서 독도가 되었나를 밝힌 부분이
흥미로운데, 원래는 '독섬(돌섬)' 으로 불렸다는 것이니, 고대에 이 섬을 지나다니는 뱃사람
들이 붙인 이름으로..... 섬에 나무가 없이 바위로만 이루어졌기 때문이니 “돌섬” 을 의미합니다.
“돌(石)”의 방언이 '독' 이니 우리나라 남부 지방 경상도와 전라도의 사투리에서는 '돌' 을
'독' 으로 발음하는데, 세분하자면 납작한 돌은 “독” 으로 뾰족한 돌은 “돌” 이라고 하니
독도는 경상도와 전라도 뱃사람들이 저 섬에 갔다가 붙였던 이름으로 추정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독섬' 으로 불려오던 이름이 1897년 이후 대한제국 시대에
한자 이름으로 바뀌면서 '石島(석도)' 로 되었는데, 그러다가 다시 소리 나는
대로( 借音表記 ) 바꾸었으니..... '독섬' 이 '獨島(독도)' 가 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일본은 대나무가 있는 것도 아닌 독도 섬에... 왜 대나무 竹(죽) 자를 넣었을까요? 일본인
들이 독도를 竹島(죽도) 로 표기한 경위를 살펴보자면.... 대나무 원산지는 동남아시아
인데 점점 북상하여 중국 남방으로 올라왔으니 중국 남방에서는 竹 을 'tek 텍' 으로 발음 합니다.
이것이 일본에 들어와서는 종성(終聲) 을 분리하여 발음하는 습관에 의하여 '다케' 로 발음되었고...
반면에 한국에 들어와서는 입성(入聲) 이 탈락된 뒤에 들어와 '대' 로 발음하게 되었다는 것이
진 선생의 주장인데, 중국말 'tek 텍' 이 일본에서는 “다케”로 한국에서는 “대”로 되었다는 것이지요?
우리나라 뱃사람들이 '독셤' 이라고 발음하는 것을..... 일본 사람들이 듣고 전하는 과정에서
'도케시마' 로 전해지고, 이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다케시마' 로 정착되었으니
다케시마를 일본식으로 표현하면 다케는 竹(죽)이니 '竹島(죽도)' 가 되었던 것이라고 합니다.
3. 울릉도와 독도
독도는 울릉도 동쪽 90km에 위치한 섬이니, 우산국(于山國)은 6세기 초까지 울릉도를 지배했던
고대 왕국으로 일본삼대실록에서는 세라국(細羅國)이라는 이름으로도 나오는데... 우산
토착민과 동예 또는 옥저에서 건너온 예맥계 유민이나 삼한계 유민들로 추정되며, 일본
삼대실록 에는 일본인들과는 간단한 한자 필담을 제외하면 말과 글이 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산국은 큰 섬인 우릉도(울릉도)와 제사 지낸 제단이 있는 무릉도(죽도, 죽서도) 두 섬으로 구성됐는데,
512년 6월 하슬라주 군주 이사부가 배에 사자등 맹수 모형을 싣고 가서 풀어놓겠다고 섬 주민들을
위협해 항복을 받으니 신라에 복속되었으며, 이후 두 섬을 합쳐 울릉도라 칭했는데 고려 인종과 조선
명종때는 蔚陵島 로...... 조선 때는 鬱陵島 로 적었으며 성종 때는 삼봉도(三峰島)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후 우산국은 신라와 고려에 종속된 속국으로서 토산물을 바치고 자치를 유지하였는데 한자 표기는
于山國 이었으나 조선 태종때는 于山, 세종 때는 于山과 牛山 으로 세조 때는 牛山, 고종때는 芋山
으로 기록하니 “우산 ”은 한자어가 아닌 한글 언어로 짐작되는데... 이름도 우산국 - 우릉도 - 우산도
(태종실록) - 우산도와 울릉도(우릉, 동국여지승람) - 우산도와 무릉도(세조실록) 등으로 자주 바뀝니다.
그런데 세조실록에는 “우산도(牛山島) 와 무릉도(茂陵島) 의 두 섬에는 읍(邑)을 설치할 만하니,
그 물산(物産)의 풍부함과 재용(財用)의 넉넉함은, 저목(楮木)·저상(苧桑)·대죽(大竹)·해죽
(海竹)·어교목(魚膠木)·동백목(冬栢木)·백자목(栢子木)·이목(梨木)·시목(柹木)과, 아골(鴉鶻)· 흑색
산구(黑色 山鳩)· 해의(海衣)· 복어(鰒魚)· 문어(文魚)· 해달(海獺) 등의 물건이 있지 않은 것이 없다.”
“또 토지가 비옥하여 화곡(禾穀)의 생산이 다른 지방 보다 10배나 된다. 동·서·남·북이 상거
(相距) 가 각각 50여 리(里) 나 되니 백성이 거주할 수가 있다”라고 했으니..... 사람이
거주할수 있는 섬이라면 그럼 우산도는 독도 라기 보다는 울릉도에 딸린 죽도(죽서도)를
의미하는 것 같으며 또 본섬의 이름이 옛날의 우릉도에서 무릉도로 바뀐 것을 알수 있습니다.
아울러 우릉도의 한자어 표기는 芋陵島(우릉도/고려 태조) 와 羽陵道(우릉도/고려
덕종) 그리고 于陵道(우릉도/조선 시대) 로 바뀌며, 무릉도에 관한 한자 기록은
武陵島(무릉도) 와 茂陵島(무릉도) 에서 조선 태종과 세종 시기에는 武陵島 와
茂陵島 를 동시에 사용하니 이런 점으로 보아 “우” 와 “무” 는 한글언어인 것입니다.
가야는 가야(加耶·伽耶·伽倻)· 가라(加羅)· 가량(加良)· 가락(駕洛)· 구야(狗邪· 拘邪)· 임나(任那)·
한(韓)으로 쓰고, 주몽은 주몽(朱蒙)· 추모(鄒牟)·중모(中牟)· 중해(衆解)·상해(象解)·추몽(鄒蒙)
·중모(仲牟)·주배(朱背)와 도모(都慕)로 기록되며 신라는 신라(新羅)· 신로(新盧)· 시라(斯羅)·
서나(徐那)· 서라벌(徐羅我)· 서야(徐耶:徐耶我)· 서라(徐羅)· 서벌(徐我) 과 계림(鷄林)
으로 기록되니 이는 우리 민족이 문자가 없다가 훗날 한자가 들어오니 표기했기 때문 입니다.
4. 왜구 침범으로 울릉도 공도령(空島令)
고구려에 속해 있던 말갈이 여진으로 불리니 오래전 부터 만주와 연해주 그리고 함경도에 대를 이어
거주했는데, 11세기에 여진족 해적들이 강원도 동해안과 일본 서해안에 해적질을 다녔으니, 일본의
소우기(小右記) 에 의하면 1019년 3월 도이인(刀伊人 여진족)들이 50척의 배를 타고 쓰시마(대마도
對馬島) 에 쳐들어와 소와 말등 가축들을 빼앗았으며 4월에는 이키섬(일기도壹岐島)을 공격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일본 규슈에 상륙하여 하카다(博多)와 나카사키(長崎)까지 침략했다고 하는데 이때
여진족 해적들에 의해 460여명의 일본인들이 죽임을 당했고 1300여 명의 일본인들이 붙잡혀
갔다는데, 여진족 해적들은 모두 방패를 들었으며 제 1열의 전투원들은 짧은 칼(단도短刀)을
사용했고, 제 2열의 전투원들은 긴 칼(대도大刀) 을 사용했으며, 제 3열은 활을 쏘았다고 합니다.
이 여진족 해적들이 중도에 반드시 울릉도에 들르는지라.... 일본을 약탈하러 가던길인 1018
년에 울릉도에서 무자비한 약탈로 궤멸적인 타격을 받은후, 1022년에는 남아있던
우릉성주와 아들 부어잉다랑등 주민들이 모두 고려로 귀부하니 우산국은 완전히 멸망
했고, 조선초에는 공도령(空島令) 으로 주민 쇄환 정책을 펼쳐 무인도 상태로 있었습니다.
고려 공민왕 때 왜구는 경상, 전라도는 물론이고 함경도와 평안도에 출몰하며 황해도에 상륙해서
개경을 노리니 수도를 한양이나 철원등 내륙으로 천도 하자는 주장까지 대두되는데.... 24년간
100회 가 넘는 침입으로 고려는 쑥대밭이 되었으며 우왕 때에는 15년간 왜구의 침략 횟수는
무려 370회 에 달했으니 1년에 25회 꼴로 38년간 왜구가 무려 470회나 고려를 침략한 것입니다.
강화가 함락되고 수도 개경이 위협당해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수도를 내륙으로 옮기자는 논의가 있었으며
고려 강산은 산산히 찢어져 피로 얼룩지니 섬과 해안은 사람의 자취라고는 찾아볼수 없는 무인지경으로
변해 황폐화 되었는데.... 왜구 침탈은 횟수도 많고 병력도 대규모에 이른 것은 요시노의 남조 조정이
교토의 북조와 전쟁군비를 확보하기 위해 대거 왜구의 대열에 참가했기 때문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조선조 들어서도 왜구침탈이 끊이지 않자 태종과 세종 임금은 울릉도에 공도령(空島令)
을 내리는데.... 왜구의 피해가 심한지라 울릉도에 관리를 보내는 것 보다는 차라리
주민들을 육지로 이주시키고 섬을 비우는게 낫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으로, 섬에 숨어
들어간 백성이 없는지 확인해 잡아오거나 일본 어부를 쫓아내기 위해 순시선을 보냅니다.
중국에는 한나라때 부터 시대별로 도자기 발달사가 순서대로 전시되지만 고려는 쌍기가 온 이래 갑자기
등장하고 중간 발달 과정이 없으니 청자 기술은 중국에서 수입된 것이지만, 각고의 노력으로 중국을
능가한 비색으로 최우수 고려청자가 탄생했으나 도요지가 있는 강진이 왜구로 황폐화되자 고려청자
는 사라지니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에게 고려청자를 선물하자 고종은 우리나라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 외 중국에서 청자가 백자로 유행이 바뀐데다가 엄청난 돈을 지불하던 고려 권신들이 사라지고, 조선
은 유교 영향으로 화려함 보다는 검소하고 단아한 순백의 미를 좋아하니 분청사기를 거쳐 이조 백자
로 이어지지만.... 조선초 3~4% 이던 양반이 조선말에는 돈 벌어서 논밭을 사고 큰 집을 짓고 노비
에다가 양반 족보를 사니 양반이 90% 를 넘으면서 과거시험에 매달리자 저 이조백자도 사라져 버립니다.
5. 안용복의 도일과 고종의 식민
그러니까 처음엔 3년마다 섬의 상태를 확인할 관리를 파견하였으나 점차 느슨해져서 중종 이후는
아예 파견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숙종때인 1693년 부산 어부 안용복이 울릉도에 고기
잡으러 갔다가 왜인들이 섬에 거주하며 고기 잡는 것을 보고 항의하다가 일본으로 잡혀갔다가
돌아오니 이후 일본 막부에서는 도해금지령을 내리는데, 한국측은 울릉도와 독도 두 섬 모두
가지 말랬다고 해석하고 일본에서는 조선령인 울릉도에만 가지 말라고 했다고 다르게 해석합니다.
놀란 조선 조정은 안용복에게 월경죄와 관리 사칭죄를 물어 곤장을 치고 감옥에 가두는 한편 장한상
을 울릉도에 파견하는등 다시 정기적 사찰을 하다가 고종 때인 1881년에 순시선을 보냈더니
조선인 60인과 왜인 120인이 섬에 거주하는지라 쫓아내고는.... 1883년에 경상도와 전라도
사람들 수십호를 이주시키니 현재 울릉도 주민들의 조상으로 이주 역사는 140년쯤 되는가 봅니다?
조선이 울릉도에 조선인을 살지 못하게 한 때문인지 한반도 남부에 영향력을 제법 준 가야나
삼한들의 속국으로 살아남아 인지도가 있는 탐라국에 비해, 울릉도는 인지도는 물론 기록
조차 거의 없다시피한 실정이며... 그나마 언급되는 기록은 신라 지증왕 대 펼쳐진 이사부의
공격과 여진족 해적들의 침탈로 인해 멸망한후 우산국의 유민들이 고려에 귀화한 것 뿐입니다.
6. 죽도 도해봉서와 다케시마의 날
1989년에는 신라인 도래인의 후예 임을 주장하는 동해(일본해)에 자리한 시마네 島根(도근)현
의원들이 선조들의 옛 고향인 경상북도를 방문하여 같은 "신라인의 후예라며 자매결연"
을 맺은바가 있으나, 1905년 2월 독도(다케시마) 를 일본 제국 시마네현으로 편입고시한 100
주년을 기념해 2005년 3월 16일 시마네현은 "다케시마의 날" (일본어: 竹島の日) 을 지정합니다.
1618년 일본 에도 막부에서 “竹島(독도, 다케시마) 도해봉서” 를 발급한 것은 돗토리현
요나고시의 오오야가(大谷家) 와 무라카와가(村川家) 인데 왜 시마네현으로 했을라나?
그건 아마도 고대에 바다를 건너온 신라인들이 정착한 곳이, 일본에서 아마테라스를 모신
이세 신사에 이어 두번째로 크며 스사노오를 모신 이즈모대사가 있는 시마네현의
이즈모라... 그런 연유로 시마네현으로 편입했고 기념일 까지 제정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한국 영토인 독도를 일본인이 다케시마라고 부르며 자기 영토라고 우기는건 1618년 다케시마
도해면허, 1660년 마쓰시마 도해면허, 1836년 하치에몽에 대한 판결문등 일본 어부들이
수백년간 독도에서 조업해온 실적에다가 조선 태종과 세종이 울릉도에 공도령을 내리고
주민들을 육지로 철수시키니“울릉도가 빈 섬” 이라, 일본 정부의 허가를 얻어 조업하러 간
일본 어부들이 독도와“울릉도에 상륙해 움막”을 짓고 어업과 산림 벌채를 했기 때문으로 봅니다.
7. 대마도주 울릉도에 이주 요청
조선 태종이 공도령(空島令)을 내려 울릉도가 빈섬이 되자 1407년 대마도주 종정무는 평도전(平道全)을
보내 무릉도(울릉도)에 왜인들이 이주하기를 청원 합니다.“종정무가 무릉도에 여러 부락을 거느리고
가서 살고자 하므로“ 허락한다면 일본 국왕이 반인(叛人)을 불러들였다고 틈이 생기지 않을까” 하니,
남재(南在) 가 대답하기를... “왜인의 풍속은 반(叛)하면 다른 사람을 따릅니다.” 해서 허락하지 않습니다.
광해군 1614년 2차 청원을 하니 “비변사는, 울릉도에 왜노의 왕래를 금지하라는 예조의 서계 가운데
이미 사리에 근거하여 회유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마도의 왜인이 아직도 울릉도에 와서 살고
싶다하여 또 서계를 보내었으니 놀랍습니다. 본도가 우리나라에 소속되었음은 여지승람(輿地勝覽)
에 기록되어 있는데, 방물을 거두기도 하고 도민을 조사 정리하기도 한 전고(典故)가 명확히 있습니다.”
“ 이 일을 회답하는 서계 가운데 갖추어 기재하고 의리에 의거하여 깊이 꾸짖어서 간사
하고 교활한 꾀를 막는 것이 편리하고 유익할 듯 합니다. 경상 감사와 부산의
변신에게 공문을 보내 이번에 온 배에 특별히 유시하고 이 글을 가지고 속히
돌아가 도주에게 보고하여 조정의 금약을 준수하도록 하소서라고 하여 그대로 하였다.”
1614년 조선은 도쿠가와 에도 막부와 울릉도에 왜인의 왕래를 금지하기로 하는 외교문서를 주고
받은 바 있으니, 이런 상황에서 대마도주가 울릉도 이주를 청원한 것이라 조선은 당연히 허락
하지 않았으며, 1882년 이규원의 순시선이 불법 거주한 왜인 120명을 적발하자 고종은 470년간
계속된 공도정책을 포기하고 1883년에 전라도와 경상도등 조선인들을 울릉도에 이주시킨 것입니다.
8. 독도의 강치(바다 사자)
독도 주변 해역은 쓰시마 해류와 북쪽에서 오는 리만 해류의 접점이며.... 어패류, 해조류가 풍부한
어장이니 일본 이즈(伊豆) 제도 처럼 니홍아시카(ニホンアシカ, 강치, Zalophus californianus
japonicus) 의 주요번식지 하나였지만 1951년 독도에서 50~60마리가 확인되었다는 보고가
마지막(혹은 1975년에 몇 마리?) 목격담으로 더 이상의 보고되지 않으니 멸종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니홍아시카(강치, 바다사자)는 일본 주변 바다에 많이 서식하고 있었지만, 어획 및 제거,
남획에 의해 각지에서 멸종됐으며 20세기 초반에는 서식지는 독도(다케시마)
등 일부 지역으로 좁혀졌으니, 독도의 해식동굴에 서식하고 있었지만 메이지
(1868~1912)와 다이쇼(1912~1926) 연간에 일본인들에 의해 대량 포획이 이뤄졌습니다.
강치(나홍아시카, 바다사자)는 독도에서 일본 어부들의 의한 남획 외에도 기후 변화와 환경오염,
주일 미공군의 수년에 걸친 폭격등 군사 훈련과 한국에 의해 독도가 요새화 된 것도
멸종 요인의 하나로 지적되는데.... 그 외에 포유류는 범고래 등의 고래도 독도 근해를 통과합니다.
9. 서양인들이 부르는 울릉도와 독도 이름
2008년에 우리 외교통상부가 전세계 지도등 3,380건을 조사한 결과 독도로 표기된 것 은
1.5%(49건) 에 불과하고 분쟁지역 2.8%, 다케시마 1.4% 그리고 1849년 독도를
발견(?)한 프랑스 배의 이름을 딴 리앙쿠르 암초 등이 1.6% 미표기가 92.7% 라고 합니다.
또다른 조사에는 700여개 지도 중에 섬이 표시된 것은 20% 정도인 데, 독도 단독표기는
거의 없고, 대개는 미국 CIA 처럼 “리앙쿠르 암초” 로 표시한다고 합니다?
독도를 프랑스어로 Rochers Liancourt 영어로 Liancourt Rocks 니 섬을 뜻하는 Island 가 아니고
"암초를 뜻하는 Rocks" 라고 쓰는 것은..... 국제법상 섬은 밀물시 드러나야 하고 물이 솟아나야
하며 2가구 이상이 주민등록을 하고 섬에서 어업을 비롯해 생계유지가 가능해야 하는데,
독도는 결정적으로 생존에 필수인 "물이 없기 때문이니 섬이 아닌 바위(Rocks)" 라고 한 것
이며, 그외 다케시마 단독 표기나 독도/다케시마, 리앙쿠르/독도등 공동 표기가 10여건씩 입니다.
75개국 353건 다른 조사에 일본해가 74%, 동해가 24% 이나 정부 차원은 95% 이상 일본해로 표기되어
있는게 현실이니 이는 국제수로기구 IHO 에서 오랫동안 “일본해”로 단독표기를 해왔기 때문이고,
미국과 영국이 일본해 단독 표기를 완강하게 주장하기 때문이니 천안함 사태후 미국과 한국이 중국을
의식해 서해가 아닌 동해에서 훈련을 하면서 미국은 “일본해”에서 훈련했다고 발표한 것이 현실입니다.
10. 독도 의용 수비대 :
독도 의용수비대는 1953년부터 3년 8개월 동안 독도에 무단 침입한 일본에 맞서 독도를 지킨 순수
민간 조직이니 6.25 전쟁기간인 1953년 일본은 세 차례에 걸쳐 독도에 무단 상륙해 1948년
미군의 폭격 연습 과정에서 희생된 한국 어부의 위령비를 파괴하고(?) 독도에‘시마네현 오키군
다케시마(島根縣隱岐郡竹島)’ 라는 나무 표지판을 세우는 등 불법 영토 침략을 공공연히 저질렀습니다.
1953년 4월 한국전쟁에 특무상사로 참전한 경력이 있던 홍순칠(洪淳七)이 주도해 울릉도에 살고있던
청년들을 중심으로 독도의용수비대가 결성됐으니 33명으로, 이들은 모금한 돈으로 사들인 무기와
울릉경찰서로 부터 지원받은 박격포, 중기관총, M1 소총 등으로 무장해서는 1953년 6월 일본
오게(大毛) 수산고교 연습선 지토마루호를 독도 서도 150m 해상에서 나포해 일본으로 돌려보냅니다.
1953년 7월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이 독도에 접근하자 위협사격을 가해 이들을 격퇴시켰으며 1954년
6월 독도 동도 바위에 韓國領(한국령)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었고, 같은 해 8월 수비대는 다시 독도에
접근한 해상보안청 소속 순시선을 물리쳤으며 11월에는 일본 순시함 세대 및 비행기 한 대와 격렬한
총격전을 벌여 승리를 거뒀으니 전투에서 일본측은 16명의 사상자를 내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독도 의용수비대는 일본 순시선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무기로 무장한 상태였지만 큰 통나무에
검은 칠을 해 가짜 대포를 만들어 일본 함선의 눈을 속이는 기지를 발휘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1956년 독도수비대는 기존의 업무를 경찰에 넘기고 임무를 마쳤으나 독도
방파제 설치를 정부에 건의하는 등 여러 다양한 형태의 독도 지키기 운동을 전개해 나갑니다.
11. 한국산악회 독도 상륙
1953년 10월 서울대 공대생 김연덕씨를 비롯한 한국산악회원 16명이 울릉도에서 독도
로 향하는 해군 함정에 몸을 실었으니 국토 구명 학술조사 활동이었는데, 정부는
일본과의 외교 마찰을 우려해 군대가 아닌 민간단체의 독도 상륙을 지원했으니... 출발
4시간 후 독도에 도착해 소형 배를 띄웠지만 거센 파도에 휩쓸려 뱃머리가 부서집니다.
울릉도로 뱃머리를 돌린지 한시간후 정체불명 배가 산악회원들이 탄 함정을 추격해왔으니 독도를 순찰
하던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이라, 우리 해군이 전투태세를 갖추고 일본 영해로 돌아갈 것을 요구
하자 순시선은 물러갔으며, 이틀후인 1953년 10월 15일 재출항해 6시경 독도 동도 상륙하니 눈에 뛴
것은 안용복 때 처럼 ‘시마네현 오치군 고케무라 다케시마(島根縣 隱地郡 五箇村 竹島)’ 나무 말뚝이라?
산악회원들은 말뚝을 뽑아버리고 독도 측량과 탐사에 나섰으니 다음 날인 16일 오후 9시 이들은 울릉도
로 돌아가는 배에 올랐는데, 승선하기 전에 한글로 ‘독도’ 라고 새긴 표석을 구릉지대에 세웠습니다.
12. 주일 미공군 독도 폭격 훈련으로 한국 어선들 피격
광복후 한일 양국 정부는 독도를 놓고 지속적으로 갈등을 벌였으니 일본 정부는 1947∼1953년 주일
미군이 독도에서 폭격 연습을 벌인 것을 근거로 영유권을 주장했는데, 미국이 한국 정부가 아닌
일본 정부와 합동위원회를 구성해서 독도를 폭격 연습지로 지정하고 폭격 날자와 시간을 한국
(미군정)이 아닌 일본에 통보하는 과정에서 미국 정부가 자신들의 영유권을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1948년 6월 8일 미 공군의 일본 오키나와 가데나 기지를 출발한 B29 폭격기 24대가 76
개의 폭탄을 투하한 폭격 연습으로 독도 해상에서 조업 중이던 한국 어선 20척
가운데 14척이 침몰했는데, 당국은 14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발표했으니 어선 1척당
한명으로 줄여서 거짓 보도한 것으로 어민들은 “희생자가 3백명” 도 넘는다고 말합니다.
1950년 6월 8일 피격 2주년에 조재천 경북지사등은 “독도에 희생자 위령비” 를 세웠는데 반미감정이
대두되는 것을 꺼렸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비석은 감쪽 같이 사라졌지만, 당시 분위기는 진상 조사
나 다시 비석을 세우기 힘든 시대라 유야무야 넘어갔는데, 2015년 광복 70주년을 맞아 독도 탐사
팀이 수중을 촬영하다가 우연히 저 비석이 발견되었고 3년 후에는 시민단체들이 위령제를 올렸습니다.
미군은 특별 조사단을 독도로 파견해 “어선을 바위”로 착각해 폭격했다는 낯간지러운 허위 조사 결과
를 발표하고 사과는 없이 쥐꼬리만한 보상금으로 떼우고 넘어갔으니 “약소국의 운명” 을 탓해야
할른지? 하지만 미공군은 1952년에도 9월에만 세차례에 걸쳐 폭격기가 독도 해상에 폭탄을 투하
했으니, 그달 22일 학술조사단 36명을 독도로 파견한 한국산악회는 대경실색해서 상륙을 포기합니다.
우리 어민들이 많이 사망한데다가 민간인들의 상륙까지 불발되자 한국 정부는 1952년 11월 10일 주한
미대사관을 통해 주일미군의 독도 폭격 연습 중단을 요구하니, 이듬해인 1953년 3월 19일 미국
과 일본 합동위원회는 주일미군의 폭격 연습지에서 독도를 제외하기로 했는데....“한국산악회의 독도
상륙 기록은 민관이 힘을 합쳐 독도를 지키려고 노력한 모습을 생생히 보여주는 중요 사료”라고 봅니다.
※ 추가 : 조선과 일본에서 울릉도와 독도 이름의 변천
그런데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과 일본 양쪽 모두 명칭이 자주 바뀌어 혼란스러운데...... 우산국 -
우릉도 - 우산도(태종실록) - 우산도와 울릉도(무릉, 우릉, 동국여지승람) - 우산도와 무릉도
(세조실록) 등으로 이름이 바뀌며, 주민들이 부르던 독섬(돌섬)이 석도(石島)로 그리고 다시
독도(獨島)로 바뀌니 일본은 우산도가 울릉도 옆의 죽도라 하고 한국에서는 독도라고 말합니다.
먼저 조선에서 독도가 처음 기록된 것은 세종실록지리지 울진현조에 우산도(독도?)와 무릉도(울릉도)가
나오는데 우산, 무릉의 두 섬은 울진현의 정동쪽 바다 가운데 있는데, 두 섬이 서로 멀지 않아 날씨
가 청명한 날에는 바라볼 수 있다. (于山武陵二島 在縣正東海中 二島相去不遠 風日淸明 則可望見),
그러고는 일설에는 우산도 = 울릉도라 기록했으며, 18세기 편찬된 동국문헌비고에 "여지지에
이르기를 울릉도와 우산도는 우산국의 땅인데 우산도는 왜인들이 말하는 송도(松島 마쓰시마) 이다"
울릉도 동편 옆에는 죽도(죽서도)라고 불리는 별개의 섬이 존재하니 '울릉도 옆에 있으면서 사람이
사는 섬' 이라고 했으니 이는 독도가 아닌 죽도를 말함이니 그럼 우산도는 죽도(죽서도)이냐 독도
이냐를 놓고 논란이 있으며, 독도는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우산도?(于山島), 성종시대에 삼봉도?
(三峰島), 숙종때 안용복 관련 기록에는 자산도(子山島), 정조실록에는 가지도(可支島) 로 나옵니다.
“안무사 김인우가 우산도(울릉도?)에서 돌아와 대죽, 물소가죽, 생모시, 목화솜, 떡갈나무를 바쳤다. 거주
하던 사람 3명을 데리고 왔는데, 섬은 호(戶)가 무릇 15가구 이고 남녀 아울러 86명이었다. 김인우
가 갔다가 돌아오면서 거듭 태풍을 만나 겨우 살아날 수 있었다고 했다.” 『태종실록』 17년(정유) 2월 5일
“쇄출하자는 주장이 옳다. 저들은 일찍이 역(役)을 피하여 편안히 살아왔다. 만약 토공(土貢)
을 정하고 주수(主帥)를 둔다면 저들이 분명 싫어할 것이니 오래도록 머물러 있게 할
수 없다. 마땅히 김인우를 그대로 안무사로 삼아서 우산과 무릉 등지에 돌아 들어가
그 주민들을 이끌고 육지로 나오게 해야 할 것이다 . ” 『태종실록』 17년(정유) 2월 8일
세종 때 고려사 에는 하나의 섬(울릉도=무릉=우릉) 이라 하고 일설에 우산과 무릉 2개 섬이라 나오는 데,
처음 '우산무릉등처안무사' 라고 했다가 무릉도를 울릉도로 보면서 '무릉도순심경차관' 이라고 쇄출사
의 직함이 바뀝니다만, 우산도는 독도가 아닐수 있으니 “우산도는 86명이 사는 비옥한 석벽에 둘러싸인
섬” 이라고 기록했고 또 울릉도에서 독도가 90km 인데 '부속 도서로 취급할만한 거리' 인지도 의문입니다.
공도 정책후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섬은 무릉도(울릉도)가 세종때 15건등 40건이고“우산”이라는 단어
는 울릉도나 독도를 뜻하기도 하는데, 태종 3건, 세종 4건, 문종과 단종 1건, 그리고 고종 1건에 불과하니
조선 조정은 섬의 존재를 잊어버린 모양인데, 1882년 고종때 『승정원일기』 4월 7일자에 고종은 울릉도,
우산도, 송죽도등 섬이 3개라 하고.... 검찰사 이규원은 울릉도(우산도) 와 송죽도 2개 섬이라고 말합니다.
조선 중종 1530년에 편찬된 신동국여지승람의 팔도총도 지도에는 세종실록지리지 영향 탓인지
우산도(독도?)가 울릉도 서쪽에 그려지기도 하는데, 18세기에 작성된 정상기의「동국지도」
는 무릉은 왼쪽, 우산은 오른쪽으로 이동하며..... 스페인에 전시된 '조선왕국전도' 에서는
울릉도를 반릉도 (Fan-ling-tao) 로, 우산도를 천산도 (Tchian-chan-tao) 로 적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1876년까지는 울릉도는 '다케시마(竹島)' 로 불렸고 독도는 '마쓰시마
(松島/송도)' 라고 불렸으니, 조선측 만기요람에도 “울릉과 우산이 모두 우산국 땅
인데 우산은 왜에서 송도라 부른다.” 일본측 은주시청합기에는 “일본에서 1박 2일
거리에 송도(독도)가 있고 다시 거기서 1일 거리에 죽도(울릉도)가 있어 고려가 보인다.”
독도는 한국에서는 '우산도', 일본에서는 '마쓰시마' 로 인식되었는데 안용복 이후 1696년 쟁계
사건이 있었고 1849년 리앙쿠르호 이후 아르고너트호가 울릉도 측량 과정에서 위도, 경도
표기를 잘못 기재해 위치가 바뀐지라(?) 일본 명칭과 대조하는 과정에서 동쪽의 다줄레(울릉도)
를 '마쓰시마', 서쪽의 아르고노트를 '다케시마' 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일본 해군성에 역수입
되었지만 메이지 정부는 옛날 대로 울릉도를 '다케시마', 독도를 '마쓰시마' 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
한국은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 울릉도를 울도군으로 만들면서 "石島(석도)" 를 죽도와 함께
울릉도 행정구역에 소속시키는데 한국에서는 이 석도를 독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일본에서는
울릉도에 인접한 관음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는데, 1899년 일본 해군 발행 조선수로지
전라남도 소안항 조에 석도(石島)의 발음을 トヽクソム(토토쿠소무=>독섬)로 했고 1904년 일본
군함 니타카(新高)호의 일지에 “리앙코루도 암(岩), 한인은 독도(獨島) 라고 쓴다” 는 기록이 있습니다.
에도 막부와 메이지 정부의 '마쓰시마/송도(松島)', 때로는 '다케시마(竹島)', 조선 말
고종이 말한 송죽도(松竹島), 대한제국의 석도(石島) 등등... 이 때문에 한국 측이
'이 섬은 독도다' 라고 하면 지칭하면.... 일본 측에서는 '이 섬은 독도가 아니다.'
라며 자료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시하면서 이는 대개 죽도(죽서도) 라고 주장합니다.
‘돌(石)’ 은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의 이전의 ‘돍’ 으로 니타카 호와 조우한 한인이 한자 독(獨)으로
표기해 일본인에게 알려주었고, 1906년 오키섬의 일본 행정관리들이 울릉도에 방문해 울도군수 심흥택
에게 사용하고, 심흥택이 일본인이 사용한 명칭을 공식문서에 옮겨 적으면서 독도(獨島)의 한자 표기로
굳어졌지만, 울릉도민들은 1950년 까지도 '독섬' 이라는 한자 표기 이전 고유발음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1618년 오야 진키치(大谷甚吉) 와 무라카와 이치베(村川市兵衛) 는 동해 한가운데 있는
다케시마라는 섬에 도항하기를 요청했고, 에도 막부의 허가를 받아 운행을 하게 됩니다.
“호키국(伯耆国) 요나고(米子)에서 몇해전 다케시마(울릉도)에 도항했다고 합니다.
이번 요나고의 주민인 무라카와 이치베(村川市兵衛)와 오야 진키치(大谷甚吉)의
도항 청원을 장군(쇼군)님께 여쭙자 승인을 해도 좋다고 말씀하셨으므로 그 뜻을
받들어 도항 허가의 분부를 내려 주십시오. - 다케시마 도해 허가 지령서, 1618년”
“다케시마(울릉도)에 이르는 길에 주회 20정(町) 정도의 작은 섬이 있는데 초목이 없는 바위산
으로 25년전에 아베시로고로(阿倍四郎五郎)님의 중개로 하사하여 도항하고 있습니다.
이 작은 섬에서 강치의 기름을 조금 얻고 있습니다. - 1681년(엔포 9년) 5월 오오야
(大谷) 가에 숙박한 막부 순견 관리의 질문에 대한 큐에몬 가쓰노부(九右衛門勝信)의 답변“
이때 도항을 한 기간은 안용복에 의해 저지된 1696년 까지로, 일본은 78년이나 울릉도와 독도 두 섬을
왕래하며 물고기와 전복을 잡고 울릉도의 산림에서 나무를 베어내 일본으로 대량 반출한 것입니다.
“(오키에서) 북서쪽으로 이틀 가면 송도(독도)가 있다. 또 하루를 가면 죽도(울릉도)가 있다.
속칭 기죽도라고 불리며, 대나무, 물고기, 바다사자가 많다. 생각건대 (바다사자는) 신서에
나오는 오십맹이 아닌가. 이 두 섬은 사람이 살지 않는 땅으로 고려(내륙)를 보는 것이
마치 운주(雲州)에서 은주(隱州)를 보는 것과 같다. 그러한즉 일본의 서북 한계는 이 주
(은주) 까지로 한다.-『은주시청합기』「국대기(國代記)」, 사이토 도요노부(斎藤豊宣), 1667년”
당시 일본 어부들은 이 섬(울릉도)이 조선령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으며, 물고기 잡으러 가는
일본 밖의 무인도 정도로 취급한 듯 보이는데... 그 이유는 조선이 울릉도에 공도(空島)정책을
실시해 조선인들의 울릉도 민간출입이 엄금되어, 근처 다른 국가들이 왔다 가지 않았기 때문 입니다.
덕분에 오야, 무라카와 가는 울릉도를 일터로 삼았으며, 본의 아니게 조선땅을 무단점거해
버리는 처지가 되어버리고 마는데... 울릉도는 이미 조선의 영토로 규정되어 있었고,
일본의 에도 막부에서 발급한 다케시마 도해 면허는 처음부터 조선 측의 아무런
동의를 얻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 두 국가의 충돌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 사태가 끝난 것은 1693년, 울릉도로 일부 어부들이 물고기를 잡으러 왔다가 일본인들
과 분쟁하게 되었을 때부터 시작되는데, 당시 물고기를 잡으러 나온 오야 가문의
사람들은 안용복등 조선인들의 난입(?) 때문에 전복을 잡지 못하게 되었고, 이에
조선인들에게 항의한 것인데 이때 조선기록에는 독도를 자산도(子山島)로 적고 있습니다.
때문에 조선인들은 조선인대로, 일본인들은 일본인대로 "여긴 우리땅이야" 를 시전하며 분쟁
이 발생하였고, 오야 가는 안용복등 조선인 2명을 일본에 데리고 가서 일본 정부에 항의
를 하게 되었는데... 조선은 공도정책으로 민간출입을 엄금하였기 때문에, 이 사실이
밝혀지면 처벌을 면치 못하게 되어 오히려 일본이 적극적인 반발을 실시하게 된 셈입니다.
3년이 지난 1696년 6월, 안용복은 사람을 모아 울릉도와 자산도(子山島)에서 일본인을 내쫓은
뒤 일본으로 건너가 호키슈 번주와 담판을 짓는데, 에도 막부는 쟁계 사건의 여파로 쇼군이
직접 나서서 안용복의 2차 도일 이전인 1월에 다케시마를 조선 땅으로 인정하고 도해를
금지한 상황이었지만, 문제는 그게 이듬해인 1697년이 되어서야 조선으로 전달되었던 것입니다.
“마쓰다이라 신타로(松平新太郞)가 이나바(因幡), 호키(伯耆)를 다스리던 때에 청원이 있었던 요나고
의 주민인 무라카와 이치베와 오야 진키치의 다케시마 도항에 대해 지금까지 고기잡이를 해왔지만,
앞으로 금지를 분부하는 취지의 상의가 있으므로 이해하기를 바란다. 울릉도 도해 금지 봉서, 1696년”
도해금지 봉서에 대해 한국측에서는 울릉도 및 독도 모두 에도 막부가 도해금지령을 내렸다고 해석하는
데 비해, 일본에서는“다케시마 ”도항을 금지한다고 했으니 일본은 당시 울릉도를 다케시마(죽도)
그리고 독도를 마쓰시마(송도)라고 부르고 있었기 때문에 울릉도만 도해 금지령을 내렸다고 주장합니다.
1789년에도 영국의 아르고노트 호가 울릉도를 측량하고 아르고노트 섬이라는 이름을 붙였
으나, 측량 과정에서 벌어진 오류로 실제 울릉도의 위치에서 서북쪽에 있는 것으로 표시
하였는데, 울릉도는 2년 전인 1787년에 프랑스 군함 두 척이 측량하고 다줄레 섬이라는
이름을 붙여놓은 상태였으니... 존재하지도 않는 아르고노트 섬이 나란히 등장한 것입니다?
1840년에 독일인 지볼트가 지도를 제작하면서 영국의 측량과 일본의 명칭을 받아들여
서쪽의 아르고노트 섬을 다케시마, 동쪽의 다줄레 섬을 마쓰시마로 비정하면서
일본측에서 독도를 가리키던 '마쓰시마(松島)' 라는 이름은 울릉도로 옮겨가고,
정작 울릉도를 가리키던 '다케시마(竹島)' 라는 이름은 그 실체가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9년 뒤인 1849년 프랑스의 포경선 리앙쿠르 호에 의해 독도가 측량되어 리앙쿠르 암초라고 명명되었고
1854년과 1855년에 러시아의 올리부차 호와 영국의 호네트 호에 의해 독도가 정확히 측량되고 아르고노트
섬의 존재가 부정되면서 이전의 잘못된 지리 지식은 바로잡혔지만, 그럼에도 지볼트의 지도가 역수입된
일본에서는 서구의 해안 측량 결과를 맹신한 나머지 울릉도는 다케시마, 독도는 마쓰시마로 인식합니다.
이후 1905년에 시마네현 고시 제40호 (일-메이지 정부)에서 독도를 다케시마로 울릉도를 마쓰시마
로 서로 바꾼 다음에 다케시마(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하는데.... 이름을 바꾼 이유를 생각해
보면 1618년에 호키번을 통해 에도막부는 죽도(다케시마) 도해봉서를 발급했는데, 울릉도
는 조선땅이니 그럼 저 서류는 불법을 저질렀으니 무효인지라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인 독도를 다케시마로 고치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후 19세기에 들어 도해금지령이 유명무실해 지자 다시 돗토리현과 시마네현의 일본 어부들은
빈 섬인 울릉도에 상륙해 움막을 짓고 고기를 잡고 산림을 벌채하다가 1881년에 검찰사
이규원에게 백 수십명이 적발되어 쫃겨나는데, 일본인들이야 오랫동안 두 섬에서 조업한
기득권을 주장할테지만 한국은 실효지배를 하고 있으니 독도는 우리 땅입니다! 단지 네델란드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에 가더라도 재판에서 이길 자료와 논리는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