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대생도 아니고 더군다나 사법고시에 응시할 생각도 없으며, ‘위법’한 행위라고는 전혀 해본일이 없는-워낙 소심함(^.^)-나로써는 내가 법원이라는 곳을 가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한번도 가져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막상 법원에 갔다오라는 과제를 해야한다는 것이 솔직히 상당히 긴장되고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그래도 어차피 한번은 갔다와야 될 것, 이왕이면 제대로 된 법원을 갔다오자는 친구와의 합의에 따라 교대에 있는 법원을 가기로 결정했다.
‘촌사람 서울구경’ 가는 듯한 마음으로 출발한 우리의 앞길은 처음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이날(2004.7.14)따라 ‘가는날이 장날’이라는 말 그대로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던 것이다. 엄청나게 쏟아지는 비를 뚫고 찾아간 법원. 평소 그려왔던대로(?) 모두들 정장을 입은 채, 검은 서류가방을 들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렇게 정장을 말쑥이 빼어입은 사람들 속에서 평범한 캐쥬얼 차림으로 들어간(^^;;) 나는 대체 법원 어디로 가야 재판을 볼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고민까지 안게 되어 마음이 무거웠다. 법원이 이리도 넓을 줄이야. 다행히 맘씨좋아보이는 수위아저씨의 도움으로 무사히 법원 견학을 시작할 수 있었다.
형사재판과 민사재판 중 어느것을 볼까 고민하다가 먼저 민사재판부터 보고, 뒤에 형사재판을 보기로 결정하였다. 민사재판을 보러 재판장을 들어가는 순간, 그 엄숙한 분위기와 위압감에 저절로 마음이 위축되었다. 죄지은 것도 없으면서 절로 숙연해진 것이다. 그래도 과제는 해야겠고, 처음와본 법원에 대한 호기심도 들고, 거기에 학생의 신분에서나 나올 수 있는 용기를 보태어 찬찬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맨 위쪽 가운데에 재판관석이 있고, 그 양 옆으로 변호사석, 그리고 뒤쪽으로 관객(?)석이 있었다. 일단 내부 구조를 열심히 보고 있는데, 재판관 4명이 들어왔다. 그런데 재판관들이 들어오자 사람들은 전체 기립을 했다가 다시 앉았는데, 나는 영문도 모른채 ‘눈치껏하면 중간은 간다’라는 말을 떠올리며 따라서 일어섰다가 앉았다.
재판관은 총 4명이었으며, 신기한 것은 원고나 피고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고, 변호사들만 달랑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처음에만 해도 법정에서 원고와 피고간의 치열하고 열띤 공방전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었는데,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가 않아서 좀 싱거운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은 그냥 이미 자료로 주어져 있고, 변호사들은 특별히 서로에 대한 공격을 하지 않았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법정에서의 재판 진행에서 원고와 피고간의 대등한 공방전이 아니라, 판사가 변호사들을 심문하는 것 같은 분위기가 더 강했다는 점이다. 원고와 피고간에 열띤 공방전이 없는 만큼 재판은 순식간에 끝나, 1시간도 안되어서 약 7개나 되는 재판이 이루어졌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냥 여러개의 사건에 대한 선고만 잔뜩 내리는 재판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변호사들도 변호사석에 거의 잠깐 앉아있다가 다시 들어가고, 또 새로 들어오고 했다. 이런 분위기를 처음 접해본 나는 그야말로 정신이 하나도 없고, 어안이 벙벙했다. 솔직히 민사소송의 용어도 어려워서 부끄러운 말이지만, 민사재판에서의 내용은 무슨 말인지 자세히는 알 수가 없었다. 민사재판에서 본 사건 중 몇 개만 들자면 다음과 같다.
<서울중앙지방법원(민사) 557호 법정, 재판부-제 29민사부, 법관-강재철, 이경훈, 이상원>
1. 사건번호: 2003가합26797 사건명: 보험금
원고: 김민숙 외 2명, 피고: (주) 녹십자 생명 보험
-> 이 사건에서 원고가 2명이라는 것이 신기했다. 그리고 의아했다. 여지껏 원고와 피고는 한명씩만 되는 줄 알았는데, 원고가 여럿일 수도 있다는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2. 사건번호-2003가합74659, 사건명-물품대금 등
원고-주식회사 이레포스, 피고-주식회사 아미노젠
-> 이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소동이 있었다. 어떤 아저씨가 재판관한테 뭐라고 말을 했는데, 워낙 작아서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재판관이 언성을 높이며 아저씨를 혼냈다. 소송에서(민사소송이라고 집어서 말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아무나 대리인이 될 수 없고, 변호사만이 가능하다면서 변호인을 선임하라고 화를 내었다. 그리고 변호인을 선임하지 않고 민사소송에서 이기기 힘들다며, 변호인 선임이 본인에게도 이롭다고 하였다. 보니까 아저씨가 법에 대해서 잘 몰라서 그랬던 것 같은데, 재판관이 잘 모르는 사람에게 너무 몰아세우는 느낌이 들어서 조금 탐탁치 않게 여겨졌다. 자신은 법관이라 전문가이지만 비전문가인 보통 사람은 몰라서 헤메는 수도 있는데, 순간 재판관이 너무 냉정하게 느껴졌다.
용어도 그렇고 다소 어려운(?) 내용의 민사재판을 보느라 머리가 지끈했던 나는 형사재판을 보면서 이제는 아예 재미를 느끼고 관람(?)하기 시작했다.
형사재판에서는 내가 보는 쪽에서 왼편으로 검사가 앉아 있는 것이 민사재판때와 위치가 달랐다. 검사는 검은 옷을 입고 있어서 눈에 확 띄었다. 그리고 또 형사재판을 하는 법정에는 재판 안내석이라는 곳이 있어서 아저씨가 들어오는 사람들을 살펴보기도 하고, 피고의 가족들을 안내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안내석 아저씨가 수첩을 들고 있는 나를 보더니 학생인가 아니면 모니터를 하러 온 사람인가를 물으며 상당히 경계심(?)을 드러내어서 당황했다. 내가 학생이라고 대답하자 그제서야 표정이 부드러워지면서 자리로 돌아갔는데, 법원에 재판을 모니터링 하러 오는 사람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이왕이면 모니터하러 왔다고 할 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잠시 해보았다(^^;;). 형사재판에서 본 몇 가지 사건들을 나열하면 아래와 같다.
<서울 중앙지방법원(형사) 523호 법정, 재판부-형사 7단독, 법관-이병세>
-구분-속행, 사건번호-2004고단2933, 사건명-사기, 피고인-김선재
우선 형사재판이라 피고가 하늘색 죄수복을 입고 나타나서 시선을 끌었다. 젊은 사람이었는데 벌써 죄를 짓고 온 것을 보니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형사재판이라서 그런지 관객(?)석에 경찰들이 앉아 있었다. 자세히 들어보니 피고인 김선재는 회사의 부도 때문에 재판을 받게 된 것 같았다. 피고의 변호사는 첫째로 피고가 피해자들에게 손해를 입힌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는 회사가 부도가 난 사실을 몰랐으며 또 고의로 해를 끼친 것이 아니라는 점, 둘째로 피해를 당한 피해업체들이 오히려 피고의 정상참작을 바라고 있다는 점, 셋째로 피고가 전과가 전혀 없다는 점을 들어 피고에게 무죄를 내려달라고 주장하였다. 마지막으로 피고도 재판관에게 선처를 부탁한다는 말을 했고, 재판관은 8월 22일에 다시 재판을 하겠다고 하며 재판을 마쳤다. 재판이 끝나자 경찰들이 재빨리 와서 피고인 김선재씨를 끌고 갔는데, 그것 때문에 왠지 분위기가 삭막하고 엄숙했다.
<서울 중앙지방법원(형사) 423호 법정, 재판부-형사항소4부, 법관-최중현(재판장), 김지숙, 강주헌, 예비판사 박옥희>
= 구분-속행, 사건번호-2003노10822, 사건명-도로교통법위반(음주운전) 등, 피고인 유병선
이 사건에서는 특이하게 피고인이 출석하지 않은 채 재판을 시작하였다. 내용을 들어보니 피고인은 원심에서의 벌금 300만원에 대한 판결이 부당하다며 항소를 한 것 같았다. 사건 번호를 보아도 2심이 분명했다. 피고인 변호사는 피고인이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다는 점, 그리고 피고가 반성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감형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재판관은 피고인이 술에 취해 오토바이를 운전한 점, 그리고 여러차례 경법죄의 경력이 있다는 점, 그리고 운전당시 알콜 수치가 매우 높았다는 점을 들어 피고인의 항소를 기각하였다.
= 구분-신건, 사건번호-2004노2097(병합), 사건명-사기, 피고인-최재호
죄수복을 입고 등장한 피고는 중앙지법(?)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이에 항소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번 사건에서는 판사가 재판 시작 전에 피고인에세 ‘진술거부를 할 수 있고, 자신에게 유리한 진술을 할 권리가 있다’라고 알려주었다. 체포할 때에 미란다 원칙이 있는 것은 들어서 알았지만, 재판 시작 전에도 이렇게 말해준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피고인 최재호는 이미 형을 살던 중에 항소한 것 같았는데, 피고인 변호사는 피고인이 자수를 하였다는 점, 그리고 경매사업에서 사기 의도가 전혀 없었다는 점, 또 경매사업에 관여한 일도 없으며 그동안의 수감생활을 통해 깊이 반성한다는 점을 들어 형의 감면을 주장했다. 피고인도 피해자들에게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다면서 깊이 반성하고 있으니 선처해달라고 말했다. 재판관은 8월 10일 오전에 판결선고한다면서 재판을 끝냈다.
= 구분- 신건, 사건번호-2004노1958, 사건명-권리행사방해, 피고인-임춘발(갈?)
이번 사건에서는 특이하게 피고인이 사복차림으로 등장하였다. 왜 어떤 피고인은 사복차림이고, 어떤 피고인은 죄수복 차림인지 궁금했다. 아마도 이미 수감 중에 재판을 받는 사람들은 죄수복을 입고 참석하는 것인가 보다고 생각했다. 피고는 중앙지방법원에서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 보호관찰, 사회봉사를 받고 항소한 모양이었다. 피고측 변호사는 피고가 피해자를 돕기 위한 의도로 간것이며, 위협행위를 보여주지는 않았다는 점, 돈을 달라고 찾아간 적은 있으나 행패를 부린 것은 없다는 점을 들어 변론하였다. 피고인도 깊이 반성하고 있으며, 자신은 도와주려고 한 행위로 대가도 전혀 받지 않고 한 행위라는 점을 들어 선처를 부탁하였다. 피고인은 자신이 아는 사람에게 돈을 갚지 않은 사람을 찾아가서 대신 돈을 달라고 요구하였다가 이렇게 된 것 같았다. 절대 남의 일에는 나서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8월 10일날 판결선고를 한다고 하며 재판을 마쳤다.
= 구분- 신건, 사건번호-2004노2053, 사건명-상해, 피고인- 김현동
여기에서는 피고인이 서울 중앙 법원에서 벌금 30만원을 받고 항소한 것인데, 나는 벌금 30만원을 가지고 항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피고인도 나름대로 뭔가가 억울한 모양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사건은 정말 사소한 사건이었다. 피고인이 자전거를 타고가다가 피해자가 길을 막길래 비켜달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비켜주지 않아서 실갱이 끝에 싸움을 하게된 것이다. 피고인은 자신이 이미 하반신 탈골로 다른 사람들 폭행할 수 없는 상태임을 들어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 재판관 앞에서 흥분하며 엑스레이 사진을 들고 소리치는 것을 보면 나름대로 굉장히 억울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더 자세히 들어보니 피고인과 피해자는 평소에 한동네에서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나는 서로 잘 아는 사이간에 왜 사소한 일가지고 법정까지 오는가 싶어서 세상 참 삭막하구나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재판은 8월 12일 오후에 다시 열기로 하고 끝이났다.
처음가본 법원이라서 호기심도 있고 해서 그런지 재판이 너무 재미있었다. 민사재판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형사재판은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계속 지켜보았다. 그리고 법원이 민간인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다는 점이 참 좋았다. 이번 법원에 가서 정말 느낀 것은 사람이 죄짓고 살면 안되겠다(?)는 것이었다. 재판과정 내내 피고인은 재판관에게 꼼짝도 못한 채 그저 고개를 떨구고 선처를 부탁한다는 말만 조심스럽게 하고, 또 재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경찰들이 바로 데려가는 것을 보니 정말 피고인으로 저 자리에 서면 안되겠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리고 항상 뉴스에서 범죄 사건 등을 보면서 법이 있으면 뭘하나 하는 생각을 자주 했었는데, 이번에 가서 우리나라가 확실한 법치주의 국가라는 것을 새삼 확인하고 돌아왔다. 다음에 재미있는 큼직한 사건이 생기면 그 사건의 재판을 보러 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