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월드컵에서 한국이 만날 첫 상대는 그리스다. 이어서 ‘언제나 우승후보’ 아르헨티나, ‘아프리카의 강호’ 나이지리아 등과 맞붙을 것을 생각하면, 강력한 첫인상을 남기는 게 중요하다. 바로 기선제압이 필요하다는 말씀이다. 분명 만만치 않은 상대이나 그나마 우리에게는 기댈 만한 제물감인 그리스다.
그리스하면 단서처럼 따라붙는 것이 유로2004 챔피언이라는 사실인데, 기실 그리스는 기적의 2004년 정점을 찍은 이후 내림세를 그리다 거기서 주춤하는 모양새를 보이고 있으니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글=김지은(베스트일레븐)/사진▶PA(www.pressassociation.com )
16년만의 월드컵 본선행
유로2004 정상에 오르기 전까지 그리스는 철저히 변방이었다. 2004년 이전의 국제무대 경험을 꼽을라치면 유럽선수권과 월드컵 출전 각각 1회에 그친다. 이유야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터인데, 치열한 유럽예선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셨기 때문이다. 유럽선수권에서야 2번째 출전이었던 2004년 대회에서 정점을 찍으며 놀라운 성공을 거뒀지만 월드컵에서는 1994년 대회가 유일한 경험이고 그것도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나이지리아, 불가리아, 아르헨티나와 함께 D조에 배정됐던 그리스는 3전 전패에다 한 골도 기록하지 못했고 도합 10골이나 내줬다. 불가리아와 아르헨티나를 맞아서는 모두 0-4로 대패했다. 당시 한국이 독일, 스페인, 볼리비아 등이 포진한 ‘죽음의 조’에 놓인 와중에도 2무1패로 분전했던 것과 비교된다.
그래도 그나마 본선무대라도 밟을 수 있었던 게 다행이었다. 1998년과ㅏ 2002년 대회 모두 본선티켓을 손에 넣지 못하자 그리스는 일대 개혁을 천명하고 꿈을 이뤄줄 적임자로 오토 레하겔 감독을 지명한다. 그때 막 환갑을 넘긴 레하겔 감독은 25년간 분데스리가에 몸담으면서 산전수전 다 겪기는 했지만 대표팀을 이끈 경험은 전무했으니 실상 반신반의했다. 하나 카리스마와 확고한 신념의 소유자로 알려진 레하겔 감독은 3년여의 조련 끝에 그리스를 유럽의 정상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정상에 계속 머물 정도의 전통강호는 아니었던 까닭에 그리스는 2004년 이후 내리막을 걸었고 2006월드컵 지역예선에서도 우크라이나, 터키, 덴마크 등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다 아깝게 탈락하고 말았다.
우여곡절 끝에 2010월드컵 티켓은 손에 넣었다. 조 1위로 쉽게 남아공행을 확정지은 것은 아니지만, 대진운을 등에 업고 과거의 월드컵 지역예선에 비하면 순항했다. 스위스, 라트비아, 이스라엘, 룩셈부르크, 몰도바 등과 한 조에 배정됐는데, 사실 유럽임을 감안할 때 대부분 강호보다는 약체에 가까운 팀들이었다. 그리스는 조 1위 스위스에 잇따라 패한 것을 제하고는 다른 팀들과의 매치업에서 우위를 점했고 라트비아와 룩셈부르크를 상대로 각각 5-2, 3-0으로 큰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물론 승점 1점차로 스위스에 본선 직행권을 내주고 만난 우크라이나와의 플레이오프는 꽤 부담이었다. 하지만 그리스는 홈에서 무승부를 기록한 뒤 우크라이나 원정에서도 1-0 극적인 승리를 거두고 요원하던 월드컵 본선무대를 16년 만에 다시 밟게 됐다.
레하겔의 팀이라서 강하다
현재 그리스는 레하겔 감독의 장기집권이 이어지고 있는데 2001년 9월 핀란드와의 첫 경기로 데뷔전을 치른 이후 꼬박 8년 넘게 지휘봉을 잡고 있다. 유로2004 우승이라는, 그리스에게 전무했고 후무할 가능성이 높은 성공을 가져다줬기에 안팎으로 두터운 신뢰가 쌓여있는 게 장수의 배경이다. 실지로 레하겔 감독과 함께 한 2000년대 들어 그리스는 메이저 대회에 자주 얼굴을 내밀고 있다. 비록 2006월드컵 본선행은 실패했지만 2회 연속 유럽선수권 진출에 성공했고 결국은 16년 만에 세계축구대제전인 월드컵에 나설 기회도 잡았다.
오랜 시간 공을 들인 그리스 대표팀은 사실 ‘레하겔의 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부에서는 레하겔 감독을 기존의 것을 지키는 데 몰두하는 ‘보수파’로 분류한다. 하지만 마냥 보수는 아니고, 안정을 중시하는 가운데 지난 8년간 꾸준히 인적쇄신을 도모해온 것을 보면 ‘온건 개혁파’ 정도로 분류하는 게 옳겠다. 5년이 지난 지금 유로2004 우승 멤버 중 세이타라디스(DF) 카라구니스 카추라니스(이상 MF) 차리스테아스(FW) 등만이 살아남은 것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이들을 제외한 다른 우승 공신들은 나이가 적잖았던 탓에 떠밀리듯 물러나야 했던 이유가 있었지만, 자의든 타의든 레하겔 감독은 서서히 세대교체를 행해 나갔다. 해외파 ‘젊은 피’ 파파스타도풀로스(DF/제노아), 사마라스(FW/셀틱) 등의 중용이 단적인 예다. 하지만 여전히 그리스 대표팀의 주축은 생존에 성공한 유로2004 멤버들이다. 대부분의 멤버들이 지금은 20대 후반이지만 대표팀 발탁 당시에는 레하겔 감독이 집권 초기 고심 끝에 엄선한 재능들이었다. 요컨대 ‘레하겔의 아이들’이 뼈대로 자리 잡고 있는 작금 그리스 대표팀은 아무래도 사령탑의 전술을 극대화하기에 수월하다. 게다가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씹는다’고 6년 전의 기억이기는 하나 유럽을 제패했던 경험이 바탕에 깔려 있는 그리스를 결코 약하다 평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레하겔의 팀이라서 약하다
강한 압박, 탄탄한 수비조직, 위협적인 역습 등이 그리스 대표팀의 장점이며 레하겔 감독 부임 후 굳어진 틀이기도 하다. 한데 근래 이를 두고 비판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심심찮게 들려왔다. 나이 든 선수들과 함께 고인 웅덩이가 됐다는 게 골자다. 사실 레하겔 감독이 세대교체를 단행했다고는 하지만 애초 어느 정도 프로무대에서 경험을 쌓은 중고신인이 주를 이뤘는데, 때문에 현재 베스트멤버의 대부분이 서른을 바라보고 있거나 넘었다. 선수단 운영과 전술 운용에 있어서도 유연하지 못하다는 비난이 유로2008 직후 팀 내에서 흘러나오기도 했다.
유로2008 당시 그리스는 디펜딩 챔피언이라는 직함이 무색하게, 4년 전 견고했던 모습과는 달리 조별리그에서 3전 전패로 탈락했는데, 빈약한 공격력 탓에 자국 언론으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았다. 맞물려 현대 축구의 흐름이 시시각각 변하는데 레하겔은 자신의 것만 고집한다는 혹평이 가해졌다. 물론 결과가 좋지 않으니 민심이 팍팍해진 탓도 있겠지만 그래도 아니 땐 굴뚝에는 연기가 나지 않는 법이다.
다행히 2010월드컵 지역예선에서는 공수 불균형을 어느 정도 극복한 모습을 보였다. 한데 최근 수비에 치중하는 모습이 다시금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월드컵 본선티켓을 따내기는 했지만 3백에서 시작해서 경기 내내 거의 5명의 수비수가 위험지역에 주둔하다시피 하는 광경이 좋게만 보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실리가 우선이었던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나 이런 방식이 본선에서도 통하겠느냐는 지적의 논리였다. 수장이 꿋꿋이 팀을 이끌고는 있으나 안팎의 비난에 팀이 흔들리는 것은 당연지사다. 산전수전에다 공중전까지 겪었을 노장 레하겔 감독 역시 한번쯤은 자신의 신념에 대해 고심했을 법하다.
요는 흔들리는 그리스이고 이는 역으로 우리에게 기회라는 것이다. 그리스에 견주면 지역예선을 통해 성공적으로 세대교체와 신구조화를 이뤄낸 대한민국이니 자신감을 가질 만한 대목이다. 전술 운영의 탄력성과 젊은 허리와 공격진을 갖췄다는 점도 그리스의 수비진을 공략하기에는 효과적일 것으로 보인다. 물론 우리 수비진이 그리스의 역습을 적절하게 차단한다는 전제 아래서 말이다.
TEAM PROFILE
대륙 : 유럽 수도 : 아테네 인구 : 1,072만명 축구협회 창립 : 1926년 FIFA 가입 : 1927년 FIFA 랭킹 : 11위(2010년 3월 현재) WC예선성적 : 2조 7승3무2패 21골10실점 2위 월드컵 본선출전 : 1회 한국기준 역대성적 : 1무1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