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에게 잊지 못할 빈들판
2023. 8. 6. 주일오후예배
요즘 빈들판의 부흥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아서 감사합니다. 전에는 잘 몰랐지만 주님 모신 빈들판을 생각하고 그 유익을 생각해볼 때는 너무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라 생각이 됩니다. 복음이 역사할 수 있는 유일한 토양은 빈들판입니다. 오늘 빈들판은 제목을 이렇게 정해보았어요. 야곱에게 잊지 못할 빈들판! 우리 각자에게도 잊지 못할 빈들판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제 말씀의 중심은 어느 특별한 빈들판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날마다 주님과의 사귐을 하는 빈들판이 각각의 시간 속에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어려울 때만 빈들판을 찾았어요. 우리가 어려울 때 주님을 찾듯이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긍휼이 없지 않아 있었어요. 그렇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야곱의 길은 ‘그럴 때만 올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만나자 왜 그렇게 가뭄에 콩 나듯이 나를 만나려고 그러느냐’ 그러시는 것 같습니다. 날마다 바라보는 햇빛, 날마다 마시는 물이 의미 없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해 없이 살면 어렵듯이 물 없이 살면 죽듯이 부모님이 날마다 계시니까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면 오산이지요.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은 참 짧습니다. 시간이 화살처럼 달려간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사야 41장에는 오늘 살펴볼 야곱에 대한 두 대명사가 대조적으로 나옵니다. 하나는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였노라 내가 택한 나의 종 야곱아” 이러한 대명사가 있고요, 또 하나는 이사야 41장 14절에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이러한 대명사도 있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표준은 ‘나의 택한 나의 종 야곱아’ 이렇게 부르고 싶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참 못난 죄인으로 주님 앞에 왔습니다만 계속해서 이렇게 못난 죄인 이런 말을 주님이 원하시겠습니까? “주님, 당신의 종이 오늘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자 왔습니다. 주님, 당신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제가 해야 될 일을 명령해주십시오” 이렇게 준비된 종의 자세로 서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주님이 원하시는 주님의 종으로 그래서 택한 야곱이 주님의 뜻대로 살 때 ‘내가 너를 택하길 잘했다. 내가 역시 축복하기를 잘했다. 역시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답다’ 이렇게 주님께서 기뻐하실만한 야곱, 아브라함의 자손 되었으면 합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니까 우리도 야곱의 위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야곱이 절대 잊지 못할 빈들판 네 군데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 벧엘
야곱은 쌍둥이 형, 에서가 있습니다. 에서는 야곱하고 거의 똑같이 생겼을 거예요. 그런데 에서가 좀 더 우락부락하고 털이 많지요. 색깔이 붉다고 해서 에서라고 했는데 야곱은 엄마 뱃속에서부터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던 욕심이 가득한 사람입니다. 야곱은 세상적이고 에서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자아가 충만한 사람이지요. 자기에 기반한 자아가 충만한 사람이나 세상 욕심이 가득한 사람이나 똑같은 육적 사람이고 동전의 앞뒷면같다는 것입니다. 에서가 자기 장자 직분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리고 야곱은 장자 직분을 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아버지 이삭이 나이 들어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축복하고자 마음을 썼을 때 형에게 준 축복을 가로챈 사람이 또 야곱입니다. 그러고 나서는 형이 무서워서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가는 길에 있었습니다. 그 밧단아람이라는 외삼촌 집으로 도망갈 때 들렸던 장소 중 하나가 루스라는 광야였습니다. 거기서 야곱은 밤중에 돌베게 베고 자고 있는데 꿈에서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가 보이고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깨어나서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라고 하면서 벧엘이라고 이름을 정합니다. 여기 창세기 28장에 나오는 벧엘, 그 벧엘의 빈들판이 야곱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잠시 형의 칼날에서 피할 수 있는 피난처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곳이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하나님의 전이요, 하나님의 집으로서의 의미가 담겨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헤롯 성전을 가리켜서 이 성전을 무너뜨리면 사흘 만에 내가 손으로 짓지 않은 성전을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예수님 당신이 우리가 거할 성전입니다. 내가 주님께 속하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내 안에 계신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성전의 삶을 살게 됩니다. 창세기 28장의 벧엘이라는 빈들판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성전 된 삶의 실제성과 소중성입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예루살렘까지 갈 필요는 없습니다. 그곳에 성지순례로 갈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 내가 마음으로부터 뿌리를 내리고 있는 예수님 안에 조용히 마음을 두고 주님께 귀를 기울이면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요, 성전 된 삶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 벧엘이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 아닙니까? 의미 없는 루스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주의 백성이라면 하나님께 속한 성전 된 삶은 그에게 필수적이고 영광이라 생각합니다. 주님 모신 성전 된 삶! 거기서 사닥다리가 하늘에 닿았고 땅에 닿아서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합니다. 우리의 역할은 천사처럼 주님의 뜻을 받들어서 주님의 돕는 자로 서가는 것, 그게 또한 벧엘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천사가 아니지만, 주님의 종이 이 땅에서 주님의 심부름을 할 때는 천사처럼 할 줄 압니다. 나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나를 감추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고 오른손이 하는 일 왼손이 모르게 하는 그 천사처럼 사는 삶 말입니다. 벧엘, 그 빈들판에서 우리는 성전과 천사처럼 사는 삶을 배워야 할 줄 압니다.
둘째, 브니엘
밧단아람의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두 아내들을 얻고 두 하녀를 얻고 자식들을 열두 명을 낳았습니다. 그중 요셉은 애굽으로 팔려갔는데 죽은 줄 알고 있었지요. 그래서 자기 외삼촌 집에서 이제 자기 가족들과 소유물을 이끌고 나가고 있는데 자기 형, 에서가 사백 명의 자객을 거느리고 마주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청천 날벼락이지요. 그때 얍복강 나루에 모든 자녀들과 소유를 분산시켜서 내 형, 에서를 만나면 뒤에 야곱이 온다고 말하라고 지시하면서 형의 마음을 달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얍복강 나루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지요. 그때 한 사람이 밤중에 와서 야곱과 씨름을 하게 됩니다. 그 사람은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자라고 생각하는데요. 야곱은 그를 붙잡고 축복하지 않으면 놔주지 않겠다고 매달립니다. 축복에 대해서는 대단히 감각이 예민한 사람이 야곱이예요. 그래서 그 사람이 야곱의 환도뼈를 부러뜨리면서 사실 야곱이 졌지만 네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고 야곱의 손을 들어줍니다. 야곱은 그곳에서 하나님을 뵈었다는 마음이 들어서 그 얍복강 나루를 브니엘,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이름을 짓습니다. 마치 창세기 28장에 ‘루스’를 ‘벧엘’로 지었듯이 창세기 32장 그 ‘얍복 나루’를 ‘브니엘’이라고 짓습니다.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그래도 야곱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영적 진리를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삶에 적용을 못해서 탈이었지 말입니다. 벧엘의 삶이 그에게 필요했듯이 브니엘의 삶도 야곱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얼마나 필요한지 모르겠습니다.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얼굴빛 가운데서 살아가야 성도답게 살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줄로 압니다. 하나님의 얼굴이 없으면 우리의 영혼은 어둠에 지게 되고 죄의 종노릇 하게 되겠지요. 하나님의 얼굴빛이 있으면 우리는 의의 종이 되고 죄를 이기며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 될 줄 압니다. 거기서 그 하나님의 사자는 야곱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게 되지요. “너는 이제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기는 자의 이름입니다. 브니엘이 될 때 이스라엘이 가능합니다. 브니엘이 없는데, 하나님의 얼굴이 없는데 이기는 자는 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이기는 자가 되기를 원해요. 그러나 먼저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빈들의 삶이 있을 때 이기는 삶, 열매 맺는 삶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리라고 생각합니다.
셋째, 브엘세바
세 번째로 살펴본 야곱의 빈들판은 브엘세바입니다. 브엘세바는 창세기 46장에 나오지요. 창세기 45장에서는 자기 자식들이 기근에 쌀을 구하려고 애굽으로 갔다가 자기 동생 요셉을 만나지 않습니까? 요셉은 형들의 마음을 딱 단속시키고 주님께 마음을 단단히 긴장시키고 묶은 후에 수레를 보내서 아버지 야곱을 모셔오게 합니다. 야곱은 요셉이 애굽의 총리 된 모습보다도 살아 있다는 사실에 감격하고 자신이 죽기 전에 보고자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제 모든 소유를 이끌고 집에서 출발해서 브엘세바에 이르렀는데 그 밤에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을 드렸다고 했습니다. 브엘세바에서 제단을 쌓는 것이지요. 제단을 쌓고 있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야곱아, 야곱아” 야곱은 “내가 여기 있나이다” 라고 대답을 하지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나님이다. 네 부친의 하나님이요, 너는 애굽에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너로 거기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내가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에 함께 하겠다. 그리고 다시 올라올 때도 너를 인도하겠다. 네 아들 요셉이 너의 눈을 감길 것이다. 이렇게 일곱 가지 약속을 해주십니다. 일곱 가지 말씀을 해주시지요.
브엘세바는 창세기 26장에 자기 아버지 이삭과 창세기 21장에서는 자기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블레셋 왕 아비멜렉과 서로 화친하고자 맹세했던 곳이 브엘세바입니다. 그래서 브엘세바가 맹세의 우물이란 뜻이지요. 그런데 특별히 창세기 21장에는 그곳에서 에셀나무를 심고 영생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 했습니다. 평범한 날이지만 내 삶의 근거는 주님이시고 주님께 뿌리 박고 영생의 길에 서 있다는 분이 아브라함입니다. 그러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을 때 창세기 22장의 시험을 이길 수 있는 것이지요. 아브라함은 짧은 삶을 살았지만 영생의 길에 서 있는 분입니다. 주님께 뿌리를 내렸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자손인 저와 여러분도 예수님께, 부활하신 주님께 뿌리를 내리므로 우리는 영생의 길에 서 있는 것입니다. 브엘세바, 그곳에서 하나님은 야곱을 부르셨습니다. 브엘세바에서 야곱을 부르실 때 하나님은 참 다정하게 부르시고 세밀하게 그의 앞길에 함께 하겠다고 약속해주십니다. 이러한 과정을 볼 때, 브엘세바 때 야곱의 영적 상태는 좀 안정되고 주님께 가까이 붙들려 있던 것 같아요. 젊을 때는 제 멋대로 살다가 나이가 130세쯤 되었을 때는 철이 든 것 같습니다. 저는 브엘세바를 이런 의미로 생각해보았어요. 주님과의 살아 있는 언약 속에 머물러 있는 빈들판이라고요. 언약이 살아 있는 뼈있는 성도가 브엘세바의 빈들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언약도 있고 우물이라 할 수 있는 주님과의 살아 있는 사귐도 있는 그러한 삶이 우리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넷째, 야곱의 침상
마지막으로 살펴보는 야곱의 빈들판은 야곱의 침상입니다. 창세기 48장에 요셉에게 어떤 사람이 부친이 병들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요셉은 자기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함께 자기 아버지 집에 방문합니다. 사람들이 야곱에게 그러지요. ”당신의 아들 요셉이 왔고 두 손자를 데려왔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힘을 내어서 침상에 앉아 축복기도를 하려고 합니다. 요셉은 야곱의 오른손에는 큰아들 므낫세를, 야곱의 왼손에는 작은아들 에브라임을 향하게 해서 기도를 받도록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눈도 침침하고 잘 보이지 않는 야곱이 손을 어긋 맞춰서 우수를 에브라임에게 좌수를 큰아들 므낫세에게 펼칩니다. “아버지, 그게 아니고 여기가 큰아들이고 여기가 작은아들입니다”라고 요셉이 말할 때 그 유명한 말을 남기지 않습니까?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너는 눈 뜨고 보고 있어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지만 나는 눈을 감았어도 안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일지 몰라도 이때 당시에는 영적으로 까막눈인 것 같습니다. 오히려 야곱은 늙었고 그가 어디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침상에서 지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마치 요즘 요양원에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똑같아요. 저도 몸이 불편하다 보니까 집을 떠나지 못하고 주로 침상에서 기도할 때가 많은 것 같아요. 그런데 요새 야곱을 생각하다보니 적지 않아 위로가 되었습니다. 내 몸은 약해서 침상을 의지할지 몰라도 내 마음으로는 깨어서 주님의 뜻을 알아준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여러분들의 침상이 천국의 축복과 우리 주님의 생명을 전달하는 빈들판 되시기를 바랍니다. 연약하지만 마음은 살아 있어서 주의 뜻을 알고 기도를 해주는 사람, 주의 뜻을 알고 섬기는 사람, 주님의 뜻을 알고 생활하는 사람 나이는 들고 병들어서 사람들은 무시할지 모르지만 주님은 결코 우리 겉옷을 보지 않습니다. 주님은 결코 외모를 보지 않습니다. 주님은 중심을 보신다고 했어요. 야곱의 침상은 바로 주님의 생명의 통로요, 축복의 통로였습니다. 야곱이 침상에 힘을 내어서 앉아서 축복했던 것처럼 힘을 내어서 주님의 뜻을 따라 주님을 아는 자로 기도하고 주님을 아는 자로 섬기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