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나는 성산가야 / 김성문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그 고요한 땅에 묻혀 있던 옛 나라, 성산가야星山加耶가 이제야 세상의 빛을 다시 맞이하고 있다. 지금은 잊힌 이름일지 모르나, 성산가야는 찬란한 청동기 문화 위에 세워진 자랑스러운 고대 왕국이다.
성산가야의 시조에 관한 이야기는『삼국유사』에 전해진다. 하늘에서 자줏빛 끈에 매달려 여섯 개의 둥근 알이 김해 구지봉에 내려왔다. 그 알 중 하나에서 태어난 동자 벽로碧露가 서기 42년에 성산가야를 세우며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그 전설은 단순한 이야기 이상이다. 알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성스러운 존재, 곧 하늘의 자손임을 상징하고자 했던 신화적 장치였으리라.
성산가야는‘벽진가야’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지금의 성주군 벽진면에서 비롯된 지명으로, 시대에 따라 성산군, 벽진군, 경산京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가 오늘날 성주로 정착한 것이다. 또 다른 이름인 벽진碧珍은 15세기 조선 세종대의 『경상도지리지』 성주목 항목에 등장한다.
“이곳은 예전에 벽진국이라 불렸는데, 이는 지방에서 전승되는 바이다.”
이 기록은 성산가야의 흔적이 단순한 신화가 아닌, 실재했던 역사임을 말해준다.
안타깝게도 성산가야의 왕계는 뚜렷하게 전해지지 않는다. 김영창이 펴낸 『6가야국 사실록』에 따르면 1세 벽로왕, 2세 이차왕, 3세 유충왕의 이름만이 겨우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때 가야사 관련 문헌이 대부분 소실되어 그 이상의 기록은 찾기 어렵다. 그러나 남겨진 몇몇 흔적과 유물들은 성산가야가 상상의 나라가 아니었음을 웅변한다.
성산가야의 존재를 증명하는 고분군은 성주군 곳곳에 흩어져 있다. 성주읍 성산동, 월항면 용각리, 금수면 명천리가 대표적이다. 그중 성산동 고분군은 해발 383.4m의 성산 능선을 따라 이어지며, 129기의 고분이 확인되었다. 그 고분군은 서기 1963년 사적 제86호로 지정되었다. 다수의 무덤은 순장에 의해 조성된 다장묘多葬墓 형태로, 하나의 봉분 안에 여러 사람을 함께 묻은 구조다. 부곽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은 주곽보다 오히려 더 풍성한 물질문화를 보여준다.
서기 1986년 계명대학교 박물관에서 본격적인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때 수습된 유물들은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금귀걸이, 손잡이 달린 항아리, 접시류, 장신구류는 가야인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전한다. 섬세하고 화려한 금귀걸이를 보며, 그 주인이 왕비였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게 된다. 한 항아리 속에 가득 담긴 고둥을 보고는 ‘그들도 우리가 먹던 바다의 향을 즐겼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대가야 지역 고분에서도 닭 뼈나 생선 뼈가 담긴 그릇이 출토된 것을 보면, 가야인들의 식생활 또한 풍요로움이 짙게 배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서기 2017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성산동 고분에서 출토된 토기를 전시했다. 긴 목 항아리는 지금 사용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섬세하고 실용적이었다. 토기 하나하나에 깃든 장인의 혼과 정성은 고대인의 미감과 실용성을 동시에 보여준다.
성산동 고분군 입구에는 서기 2021년 5월 문을 연 성주 성산동 고분군 전시관이 자리한다. 그곳에는 지역 주민들이 기증하거나 맡긴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성산리 차동골에서 출토된 유물은 양적으로도 풍부하다. 그중 시신의 얼굴 부위에서 발견된 깃털 부채는 유독 시선을 사로잡는다.『삼국지』「위서 동이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큰 새의 깃을 장례 부장품으로 삼아, 죽은 이의 영혼이 하늘로 날아가기를 바란다.”
이는 가야인들이 영혼의 존재와 사후 세계를 믿었다는 뜻이다.
또한 벽진면 가암리에서 출토된 금동관은 국보급 유물로 평가된다. 서기 1976년 발굴 당시 두 점이 발견되었으나, 안타깝게도 그중 하나는 훼손되어 사라지고, 다른 하나는 압수되어 보관 중이다. 금동관이 지닌 위엄은 당시 성산가야의 정치적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전시관 내부에는 고분 발굴 현장을 재현한 영상과 사진 자료가 마련되어 있어, 고대의 무덤 구조와 유물 배치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야외 전시장에서는 차동골 고분과 선남면 장학리 고분의 복원 모형도 관람할 수 있다.
유물의 특성을 보면 성산가야는 신라와의 문화 교류가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4세기 후반 그 후에는 대구 지역의 신라 문화와의 접점이 더욱 뚜렷해졌다. 그러나 단순한 수용이 아니라, 성산가야만의 고유한 양식을 함께 유지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이를 통해 성산가야는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운 고대 국가였음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금귀걸이, 금동관, 환두대도, 토기는 성산가야 고분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들이다. 이들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그들의 삶과 정신을 전하고 있다. 비록 정사에는 짧은 언급만 남았고, 문헌 기록은 많지 않지만, 고분은 묵묵히 성산가야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이제 남은 과제는 그 흔적을 더 많이 찾아내고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다. 성주에 산재한 고분들을 정밀하게 발굴·조사해 찬란했던 성산가야의 문명을 되살리고 후대에 알리는 일은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잊힌 나라 성산가야가 고요한 땅에서 다시 깨어나는 날을 우리는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