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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의 바다(서민 영) |
09.12.04 14:43: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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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를 위한 반대’ 라고요?
이명박 대통령이 TV에 나와 그간 논란이 되고 있는 여러 문제들에 대해 ‘국민과의 대화’로 풀어보겠다고 했을 때, 솔직하고 진솔한 대화가 될 것이라고 기대한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까. 민주화 이후 대국민 담화 대신 국민과의 대화는 꽤 여러 차례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 대통령이 감독, 주연, 조연까지 도맡아서 하는 모노드라마였다. 손석희 교수가 물러난 자리에 대신 주인공으로 나선 이명박 대통령은 1분 질의에 20분간 답변하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토해냈다. 물론 그 중엔 대통령도 추운 겨울이면 일반인들처럼 내복을 껴입는다는 새로운 사실도 있었다. 그러나 우려했던 대로 100분간 진행된 ‘대화’는 불도저 대통령의 일방적인 ‘담화’로 채워지고 말았다.
대통령은 4대강 사업과 관련해 지난 정권들에서도 수질 개선과 홍수 조절 등 여러 가지 하천정비 사업에 해마다 수조원이 들어갔는데, 그때는 반대 안 하다가 지금에 와서 반대하느냐고 볼멘소리를 한다. 그간 수질 관리며 홍수 예방을 위해 찔끔찔끔 예산을 집행해 왔는데 이번에 잘 정비해서 원천적으로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하겠다는 논리다. 얼핏 들어보면 맞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 대통령이 추진하는 정책이 늘 해오던 하천정비 사업이나 서울시장 시절의 치적으로 내세우는 청계천 사업과 비교될 만한 수준이 아니라 국토환경을 변화시키는 거대사업이란 사실은 쉽게 망각되어 버린다. 게다가 지금까지 홍수가 났던 곳들은 대개 지방하천이고, 이명박 대통령이 보를 만들겠다고 하는 곳은 국가하천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대통령 당선인 시절부터 ‘반대를 위한 반대’란 말을 즐겨 사용해왔다. 인수위의 영어몰입교육 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그때도 “반대를 위해 반대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에 대한 대통령의 초지일관한 자세를 높이 평가해야 할까. 또 대통령은 ‘반대를 위한 반대’는 주장이 간단명료하기 때문에 국민들 귀에 잘 전달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4대강 사업에 대한 국민의 반대가 심한 까닭을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실상을 잘못 이해하거나 대통령이 우리 국민의 수준을 너무 낮게 보고 있는 것이다.
현 정부의 경제정책을 비판했던 미네르바가 구속되었다가 풀려났고, 정권이 바뀌면서 해임되었던 정연주 KBS 사장도 결국 해임 무효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MBC 의 PD와 방송작가는 재판이 진행 중이고, 4대강 사업에 반대하는 환경단체들이 내보내려 했던 라디오 광고는 두 차례나 방송이 보류되었다. 미디어법 강행 통과 이후 정부의 미디어법 홍보광고는 계속되었지만 미디어법에 반대하는 시민단체의 광고는 헌재에 의해 심판 중이란 이유로 보류되었다. 이처럼 반대의 목소리는 도처에서 억압받고 있다.
요즘 이명박 대통령의 대화 상대는 아무래도 국민이 아니라 역사인 듯싶다. 그는 여러 차례 인기보다는 소신을, 그로 인해 비난받을 것도 각오하고 있음을 피력했다. 자신에게 반대하는 이들은 정치적 의도로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고, 자신은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소신 있는 정책을 추진한다고 말하는 것은 결국 역사의 정의가 자신에게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문제 투성이의 4대강 사업에 대해 역사를 말하는 것은 어이가 없는 일이다.
자신의 정책을 추진하는 데만 급급해 국민의 말을 들을 시간조차 없는 대통령의 말에 과연 역사가 귀기울여줄지도 의문이지만, 설령 이와 같은 대통령의 소신과 진정성을 백 번 믿어준다 하더라도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한 대통령의 소신과 정책이 어째서 자고 일어나면 표현이 달라지고 내용이 달라지는지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다.
- 전성원
ⓒ 경향칼럼 ( http://www.khan.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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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의 바다(서민 영) |
09.12.04 14:44: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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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와 독단
진정성 없는 대화는 공허한 말잔치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1633년 바티칸 종교재판소에 회부된 혐의 꼬투리는 바로 전해에 출간한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 두 가지 주요한 우주체계에 관한 대화'라는 저서였다. 그는 이 책에서 지구를 중심으로 하늘이 돈다는 천동설 신봉자들을 야유하고 조롱하며,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한다는 지동설의 과학적 근거를 설파했다.
갈릴레이는 '대화' 때문에 재판대에 섰지만 그러나 그의 재판은 '대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신성재판소는 그에게 지동설을 철회하고 코페르니쿠스 천문학을 옹호하지도, 가르치지도 말 것을 강요하면서 가택연금에 처한다. 재판에서는 압박과 협박, 궤변과 일방적 주장만 있었을 뿐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대화와 토론은 없었다. 갈릴레이가 재판소 문을 나서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중얼거렸다는 얘기는 그의 제자가 지어냈을 거라는 설이 있지만 전기 '갈릴레오'를 지은 과학저술가 마이클 화이트는 그게 "갈릴레오의 성격에 어울리는 말인 것만은 분명하다"고 적는다.
지난 주말 미디어법 세종시 4대 강 문제를 놓고 벌인 '대통령과의 대화'를 지켜보면서 대통령과 견해가 다른 사람들이 TV 채널을 돌리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중얼거리지 않았을까 싶다. 거기에 '대화'는 없었다. 청와대는 설득과 이해를 구한다고 했지만 주장과 강요, 일방적 통보만이 횡행했다. 2시간 동안 대통령의 설교와 질책, 힐난과 비아냥거림, 호통만이 난무했다. 대화에 필수적인 쌍방향의 소통과 주장에 대한 반론, 재반론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TV를 끄면서 "이럴 거면 아예 담화문을 발표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라는 느낌이 많았다면 거기에 '대화'라는 말을 붙이기에는 쑥스럽다.
대통령은 4대 강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상당수는 알면서도 반대하거나 아니면 모르고 반대"한다고 정리해버렸다. 대통령의 말대로라면 4대 강 반대자들은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생떼쟁이나 뻔히 알면서 반대를 하는 사기꾼, 혹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체하는 허풍쟁이 또는 따라쟁이 쯤이 된다. 지난 16일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의 발표에 따르면 성인남녀 700명 가운데 70% 이상이 당장 4대 강 사업을 중지하거나 축소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라는 데가 사회과학적 연구조사방법도 모를 만큼 한심한 기관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렇다면 졸지에 이 나라 70%가 넘는 국민들은 대통령의 정의에 따라 생떼쟁이 사기꾼 허풍쟁이 따라쟁이가 되는 것인가.
대통령은 세종시 원안불가 이유로 '자족기능' 부족을 내세웠지만 건교부가 노무현 정권 때인 2006년 이미 세종시 자족기능을 위해 대학 의료 첨단산업 상업 업무 문화 국제교류 등 제반사업을 준비한 사실은 무시하거나 모른 척했다. 청년실업을 걱정하는 대학생의 질문에 "눈높이를 낮춰라"고 말한 적이 없고 대신 "눈높이를 맞추라"고 했다고 주장했지만 여기서 누가 거짓말하고 있는지 말하지 않겠다. 지난 1월 31일자 몇 개 신문만 뒤적여보면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대화'가 연예인을 조연으로 등장시켜 "대통령님 내복 입으시냐"거나 "대통령님 요리 좋아하시냐"로 이어지는 순간, "아! 이런"이라는 민망한 어투가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은 시청자는 몇이나 될까.
영화 '친구'에서 바다거북과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이 시합을 하면 누가 이기느냐를 놓고 조무래기들이 튜브 위에서 말씨름하는 장면이 나온다. 극 중 힘센 준석이 상택보다는 동수 편을 들면서 영화 속 친구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지만 내게는 조무래기들조차도 권력의 향배에 따라 '대화'의 물줄기가 달라진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대화'는 진정성과 확고한 사실이 전제돼야 가능하다. 그것이 없다면 '대화'는 팔뚝 힘이 세거나 입담이 좋거나 돈과 권력을 가진 실력자들이 장악하는 '말잔치'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갈릴레이 재판 뒤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이탈리아의 담론수준이 다시 중세로 전락하고 유럽문화의 중심이 이탈리아에서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등 북서쪽 개신교 나라들로 옮겨간 것은 합리적인 이성과 대화보다는 무지몽매한 종교적 독단과 억지를 내세운 필연적 결과였다. 오늘 대한민국에서 진정 필요한 것은 '진실한 대화'다.
- 송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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