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이라는 이름은 JOB으로 일이라는 말인데 사람의 일, 자기 일을 내가
반드시 성취해야 하겠다는 뜻이 아닙니까? 욥은 자신의 할 일만 생각하는
‘대적한다’는 뜻으로서 사단에게 당하니까 그만 하나님 앞에 항복이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굴복이 안 됩니다. 이와 같이 사단의 수중에 있는 사람들은 무릎이
꿇어지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교만입니다. Job(일)에 의한 교만은 도무지 하나님의
긍휼이 스며들어 갈 틈이 없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해 있는 사람에게 가서 말로
이제부터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면 더 안 됩니다. 우스갯소리로 사람이 기분이
나쁘면 천당도 안 간다고 말하고 맙니다. 화나면 하나님한테도 대들며 욕해 버립니다.
물론 욕한다고 하나님이 쥐어박고 혼을 내시는 분은 아닙니다. 아무 말씀 안하시고
계시다가 나중에 그 사랑을 엄청나게 퍼부어 주셔서 그 사랑 앞에 무릎을 꿇고
찬양하게 만드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혼을 내십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대단하십니다.
죽은 자를 향한 하나님의 인자함도 한이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설 자격이
없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에게 인자함으로 대하시고, 또 우리가 그분 앞에 나갈 수
있는 자격이 없기 때문에 그분이 우리를 끊임없이 용납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악하고 게으르기 때문에 그분은 오래 참으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하나님을 몰라서 그래 지금 당신이 그리스도의 안에 머물지 않고
그리스도 밖에 나와 있으니 고생하는 거야 주님은 당신을 부르시며 기다리고 계셔’
이렇게 말해줘야지 팍 깨져야 해 이러면 아무도 안 깨져요. 마음의 문을 더 틀어
잠그고 마음은 그렇게 하고 싶어도 절대로 항복을 안 합니다. 고난당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어떠하다는 걸 인내하면서 끈기 있게 설명해줘야 됩니다.
결국 욥이 하나님 앞에 설득된 계기가 뭡니까? 하나님이 욥에게 제일 먼저 묻는
말씀이 ‘네가 재산도 잃어버렸다. 아내도 잃어버렸다. 자식도 잃어버렸다. 그리고
몸에는 악창이 나서 죽을 고생이다. 이것들이 멀쩡할 때는 나를 순전하게 경외하고
정직하여 악에서 떠났는데 그러면 이것 없다고 네가 하고 싶은 말 다 하면서 네가
옳다고 끝까지 주장하는데 너는 뭐냐? 그런 것 있고 없고는 너희들이 말하는 것처럼
주시는 자도 하나님이요 거두시는 것도 하나님이시라며? 그리고 인생이 사는 동안에
티끌에 불을 지르면 위로 올라가듯이 당연지사로 그렇게 되는 것을 다 알고 있는데
그렇게 말하는 것과 전혀 상관없이 너의 지금의 신앙 상태는 도대체 뭐냐?
네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란 실체가 도대체 뭐냐?’ 바로 이것 아닙니까?
만약 우리들에게 오늘 밤에 주님이 오셔서 너는 뭐냐고 물으신다면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이 말은 네가 지금 뭘 갖고 있느냐는 겁니다. 그 때에 제가 평생
십일조 감사 헌금을 빠짐없이 했습니다. 주의 일에 충성 봉사 했습니다. 그러하겠습니까?
그런 것은 나하고 언제나 거리가 떨어져 있습니다. 나와 하나 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사망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9)
생명을 가진 자는 생명을 가진 채로 사망을 가진 자는 사망을 가진 채로 마지막 날 주님
앞에 나온다는 말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그대로 나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나 다윗이나
모세나 모든 선지자, 그리고 주님의 제자들과 바울 그들은 어디서나 너는 뭐냐고
물을 때에 '제가 지금 주님과 함께 있나이다. 제가 주님을 내 앞에 모시고 있습니다.
저는 평생토록 주님을 따를 겁니다' 이렇게 나옵니다. 그들은 일이 잘 될 때나
못 될 때나 항상 이렇게 대답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행불행의 원인은 세상이나
세상이 주는 것들이 아니라 그들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가 그들의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욥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거꾸러지기 시작합니다. 천지를 창조할 때 너 어디
있었느냐? 다시 말하면 욥이 땅의 얘기를 계속하고 있으니까 사람들이 무엇이 있고
없고, 이런 걸 하나님이 가져가기도 하고 말기도 하고, 각자에게 오고 가고 하는 말을
계속하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얘기를 전혀 안하니까 하나님이 설교를
사람의 키 높이에 낮추어서 천지 창조 얘기를 하시는 겁니다. 그것들을 만들 때
너희들은 어디 있었느냐? 너희들이 주인이냐? 왜 너희들이 주인인 것처럼 말 하느냐?
그것으로 행불행으로 논하느냐? 따져 들어가니까?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운 자가
누구이니까? 하고는 욥이 그 입부터 가립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당할 때에 헛소리가 나가지 않도록 입부터 막아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대충하고 말려고 우리를 그의 자녀로 부르신 게 아닙니다.
우리를 자녀 삼으실 때는 우리를 우리 생각대로 적당히 만들려고 우리를 부르신 게
아니죠. 우리를 상품처럼 사람들에게 편리하게 사용되려고 팍팍 찍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오래오래 그의 손으로 매만지시므로 그분의 영과 생명을 불어넣어서 드디어 그 분의
손 때 묻은 하나님의 작품을 만들어 놓고 그래서 주님의 업적을 선전하는 영광의
도구로 삼으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입니다(엡1:12)
무엇이 있을 때도 너는 뭐냐? 하고 물으시면 제가 주의 종입니다. 없을 때도 네가 뭐냐?
하시면 제가 주의 종입니다. 일이 잘 될 때도 네가 뭐냐 할 때에 제가 주의 종입니다.
모든 것이 다 날아가 버릴 때도 네가 뭐냐? 아무것도 없습니다. 쫄딱 망했습니다가
아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주의 종입니다. 주여 저 좀 보세요. 너무 초라합니다.
그래도 주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잘 압니다. 여전히 주를 뒤따르는 주의 종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욥의 고난은 37장까지 가는 겁니다.
군대의 훈련도 등 따스하고 배부르게 해놓고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험준한 산악 훈련을 시켜 놓고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너와 나 나라 지키는 영광에 살았다.’ 목이 터져라 노래하도록 하는 겁니다.
그 배고프고 춥고 처절한 고통 속에서도 그들은 그런 노래를 부르는 훈련을 받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옷도 헤어지지 아니하고, 아침마다 만나를
주시고도 왜 그렇게 시험했느냐고 물으면 하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 이거 하나 가르치게 하기 위하여
40년 동안을 광야에서 그렇게 모질게 훈련을 시켰노라고 대답하십니다.
우리 신앙이 광야에 있을 때 하나님의 표적과 기사를 봤다고 ‘나는 특별한
존재야 아말렉 저것들이 웃기고 있네. 불레셋 그것들 참 우습네’. 이게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의 자존심을 살려주어 세상에 군림하라고 불기둥 구름기둥아래
추위와 더위를 조절하시며 보호하시고 만나를 아침마다 먹인 것이 아닙니다.
광야의 목적은 딱 하나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 이것 하나 제대로 백성들에게 가르치기
위하여 하나님이 그렇게 오래 참으시고 자비와 긍휼로 그들을 돌보셨습니다.
그들의 숫자가 장정만 육십만 삼천 오백 오십 명인데 40년 동안 하나님이 소비한
것을 돈으로 환산하면 전부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 엄청난 것을 투자해서 말씀을
순종하게 하는 목적 딱 하나 건지려고 그 일을 시작하신 겁니다. 우리가 태평연월로
여기까지 왔든지 고난과 역경과 형통과 곤고을 번갈아 가며 왔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싶은 것은 오직 한 가지 내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입 맞추어라입니다. 그 이름 앞에 무릎 꿇고 주와 그리스도로 그 이름을 불러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법을 배워라 이 것 하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네가 뭐냐고 물으실 때에 언제나 내가 주님 안에 있지 않습니까?
내가 주님 안에 항상 있고 언제나 내가 주의 이름을 부르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주님의 종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네가 누구냐 물으실 때에는 내가 아버지의
자녀입니다. 내가 주의 사랑을 입은 주의 아들입니다. 나는 이전에는 아무 짝에
쓸모없었으나 이제 주님 안에서 쓸모를 찾은 주의 종입니다. 이렇게 자기 존재를
주님 앞에 고백할 수 있어야 됩니다. 내가 목사로서, 장로로서 나름대로 일을
할 만큼 했지 않습니까? 내가 집사로서 봉사할 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주님께서
못 보셨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내 존재 자체를 주님 앞에 정확하게
고백해야 됩니다. 이런 고백을 할 수만 있다면 설사 우리에게 욥의 고난과 같은
고난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그분의 자비와 긍휼의 얼굴을 우리 심령에
항상 비추어 주실 겁니다. 그게 바로 세상의 환난을 이기는 방법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주께 감사!
아멘. 항상감사합니다
아멘